독일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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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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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왕국
Regnum Teutonicum
파일:oBeMqmW.jpg
972년 신성 로마 제국 내 독일 왕국의 강역
(짙은 파랑색 영토)
911년/919년 ~ 962년 (독립국)
962년 ~ 1806년 ([[신성 로마 제국|{{{#000 신성 로마 제국}}}]] 구성국)
성립 이전
멸망 이후
동프랑크 왕국
라인 동맹
프로이센 왕국
위치
중부유럽
수도
프랑크푸르트
인구
12,000,000명(1500년)
정치 체제
선거군주제
국가원수

언어
중세 독일어
라틴어
종교
가톨릭
주요 사건
911년/919년 카롤루스 왕조 단절로 건국
955년 레히펠트 전투
962년 오토 1세신성 로마 황제 대관식

언어별 명칭
라틴어
Regnum Teutonicum
Teutonia
Alemannia
독일어
Deutsches Reich
Deutschland
중세 고지 독일어
Tiutschlant
Diutschlant
1. 개요
2. 역사
3. 역대 국왕
4. 다섯 부족 공국
5. 신성 로마 제국과의 관계
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독일 왕국은 동프랑크 왕국카롤루스 왕조가 단절되면서 911년 또는 919년 탄생된 왕국이다. 이후 962년에 건국된 신성 로마 제국에 종속된다. 신성 로마 제국이 건국된 후에도 독일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하위 왕국으로 존속한다. 때문에 독일 왕국의 공식적인 멸망 시점은 신성 로마 제국이 멸망한 시점과 같은 1806년이다.

기본적으로 동프랑크 왕국을 계승한 왕국이지만, 동프랑크 왕국과는 몇 가지 차별성이 있다.
  • 카롤루스 왕조가 단절되면서 그동안 느슨하게 이어오던 서프랑크 왕국(프랑스)과의 혈연적 관계가 완전히 정리되었다.
  • 독일 왕국 국왕들이 '독일인들의 왕'이라 자칭하면서, 기독교 세계의 통합국가였던 프랑크 왕국에 비해 민족 단위 왕국의 성격이 짙어졌다.
  • 왕국을 이루는 5개의 부족 공국들의 독립성이 강화되어 연합왕국의 성격을 띠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독일 제국(諸國)'이라 지칭하는 경우도 있지만 1871년에 세워진 '독일 제국(帝國)'과 다분히 혼동을 일으키는 명칭이므로 많이 쓰이지는 않는다.
  • 왕국을 구성하는 5대 부족 공작들이 모여 회의를 통해 차기 국왕을 결정하는 전통이 시작되었다. 이는 신성 로마 제국선제후 제도의 기원이 되었다.


2. 역사[편집]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이 3분할되면서 현재 독일 지역에는 동프랑크 왕국이 들어서게 된다. 그런데 동프랑크 왕국을 구성하는 영지의 상당부분은 불과 수십 년 전까지 카롤루스 대제에 의해 병합되기 전에 독립된 나라였던 곳이 많았기 때문에 지역별로 독자성이 강하게 남아있었다. 카롤루스 대제 사후 제국이 분열되면서 동프랑크 왕국의 왕권은 점차 약해졌고, 각 부족들의 힘은 다시 강해졌다. 그러다가 900년에 카롤루스 왕조의 마지막 왕이 된 유아왕 루트비히 4세가 6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서 왕권이 크게 약화되었고, 이를 우습게 본 마자르족이 침공해 왔다. 이에 바이에른 제후 등은 독자적으로 마자르족과 싸워 왕국을 방어했다. 결국 동프랑크 왕국은 왕권이 약화되고 제후권이 크게 강화되어 동프랑크 왕국을 구성하고 있던 5개의 부족들은 사실상 독립 국가에 가까운 자치권을 가지게 되어 5대 부족 공국(Stem duchy)을 형성하게 된다(프랑켄 공국, 슈바벤 공국, 로트링겐 공국, 작센 공국, 바이에른 공국). 911년 유아왕 루트비히 4세는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게 되어 카롤루스 왕조가 끊기게 되었다.

911년 유아왕 루트비히 4세가 후사 없이 죽자, 동프랑크 부족 공작 5명이 게르만족의 전통에 따라 모여 회의를 열었다. 카롤루스 왕조 출신 서프랑크 왕국 국왕인 샤를 3세가 혈연에 근거하여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지만 독일 제후들은 이를 거부하고, 독일인 중에서 다음 왕을 선출하기로 했다. 이에 모계로 카롤루스 가문과 연결된 프랑켄 공작 콘라트 1세가 새로운 왕으로 추대했다. 이로서 동프랑크 왕국 또는 독일 왕국은 서프랑크 왕국과 완전히 단절되게 된다.

918년 콘라트 1세가 아들없이 죽자 당시 유력자였던 작센 공작 하인리히 1세콘라트 1세의 지명을 받은 후 공작들의 선출을 거쳐 왕이 된다(919년).

독일 왕국의 시작 시점에 관해 콘라트 1세가 즉위한 911년과 하인리히 1세가 즉위한 918/919년 두 가지 시점이 엇갈린다. 기본적으로 콘라트 1세가 즉위하면서 동프랑크 왕국과 차별되는 독일 왕국의 특성들이 모두 갖추어졌기 때문에 그의 즉위가 사실상 독일 왕국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콘라트 1세 스스로가 자신을 동프랑크의 왕이라 지칭했기 때문에 그를 동프랑크의 마지막 왕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있다.

하인리히 1세의 경우 스스로를 '독일인들의 왕'이라 지칭하였기 때문에 그를 독일 왕국의 국왕으로 보는 데는 이견이 없다. 독일 왕국의 성립 시점에 관해서는 영문 위키피디아에도 911년과 919년을 혼재하여 서술하고 있다. 콘라트 1세의 치세를 동프랑크 왕국으로 보건 독일 왕국으로 보건 간에 그의 치세 때 독일 왕국의 틀이 만들어 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어찌 보면 콘라트 1세의 치세 기간은 조선 왕조가 개창된 후에도 한동안 고려라는 국호를 유지했던 시절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동프랑크 왕국 국명을 언제 독일 왕국으로 정식으로 바꾸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다만 하인리히 1세오토 1세는 스스로를 '독일인들의 왕(King of the Germans)'이라고 칭했다.[1] '독일 왕국(Regnum Teutonicum)'이라는 라틴어 국명은 11세기에 처음 나타난다.

962년 오토 1세가 이탈리아 왕국을 병합한 후 신성 로마 제국을 세운 뒤부터는 1039년부터는 '독일인들의 왕(독일왕)' 대신 '로마인들의 왕(로마왕)'이라는 왕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두 왕명은 계속 병용해서 사용되었다.[2]

3. 역대 국왕[편집]


오토 1세가 신성 로마 제국을 건국하기 이전의 국왕들을 정리한다. 신성 로마 제국 건국 이후 모든 신성 로마 황제들과 로마왕들은 기본적으로 독일 왕국의 국왕이다.


콘라트 1세와 하인리히 1세는 비록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아니었지만, 후세 황제들은 이들 이후로 넘버링된다.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하인리히 2세, 콘라트 2세부터 시작한다.

사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은 황제로 대관받기 되기에 앞서 선제후 선거에서 독일왕으로 선출되어야 했다. 게다가 선출 황제 시절 이전에는 독일왕으로 선출되었지만 교황의 대관을 받지 못해 공식적으로는 독일왕에 머문 사실상의 황제들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교황 대관을 받지 못한 독일왕이자 사실상의 황제들 역시 모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간주되고 있으며, 황제들의 넘버링 역시 교황 대관과 무관하게 연속되고 있다. 예를 들어 루돌프 1세는 교황 대관을 받지 못해 공식적으로는 독일왕일 뿐이지만 이후 황제는 루돌프 2세로 넘버링된다. 이런 의미에서 최초의 독일왕인 콘라트 1세와 하인리히 1세에 이어 후세 황제들이 넘버링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4. 다섯 부족 공국[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부족 공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독일 왕국은 작센, 프랑켄, 슈바벤, 바이에른, 로트링겐 이렇게 부족 공국(Stem ducky) 5개로 구성되었다. 동프랑크 왕국 시절 왕권이 계속 약해지면서 각 부족들의 독립성과 자치권이 강화되었다. 카롤루스 왕조 마지막 국왕인 유아왕 루트비히가 즉위한 직후 5대 부족 공국들의 권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5. 신성 로마 제국과의 관계[편집]


936년 하인리히 1세가 죽은 후[3] 그의 아들 오토 1세가 공작들의 선출로 왕위에 올랐다. 962년 오토 1세가 이탈리아 왕국을 정복하고 교황의 대관을 받아 황제가 되면서 신성 로마 제국이 시작된다.

엄밀히 말하여 신성 로마 제국의 성립으로 독일 왕국이 멸망하거나 소멸한 것이 아니라 신성 로마 제국이 시작 후에도 독일 왕국은 계속 존속한다. 따라서 독일 왕국이 공식적으로 멸망한 시점은 신성 로마 제국이 멸망한 시점과 같다. 이는 후대 독일 제국과 그 실체이자 본체 격인 프로이센 왕국의 관계와도 정확히 같다.

명목상 독일 왕국은 이탈리아 왕국, 부르군트 왕국, 보헤미아 왕국과 함께 신성 로마 제국을 구성하는 왕국령 중 하나였다.[4] 그러나 독일 왕국은 이탈리아, 보헤미아, 부르군트 왕국에 비해 일종의 제국 본국으로서의 우월한 위상을 가졌다. 이와 함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선출할 수 있는 권한은 오직 독일 왕국의 선제후들에게만 있었다. 또한 다소 특기할 만한 점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 형성되고 좀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긴 하지만 보헤미아 국왕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뽑는 7인의 선제후 중 한 명이었다. 즉 독일 왕국 아래에 제후국으로 보헤미아 왕국이 존재하는 형태였다. 보헤미아 국왕을 제외한 다른 명목상 왕위는 황제나 황태자가 모두 겸했다. 독일왕이 교황 대관을 받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 오르면 이탈리아 국왕까지 자동적으로 겸하였다. 원래 이탈리아는 카롤루스 대제 사후 프랑크 왕국이 3분할되었을 때 로타르가 다스리는 이탈리아 왕국(중프랑크 왕국)이 되었으나 오토 1세가 교황의 요청으로 이탈리아 왕국을 접수하고 이탈리아 국왕에 오른 이래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자동적으로 이탈리아 국왕을 겸하게 되었다. 독일왕,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이탈리아 국왕을 겸직하는 것은 프랑스 혁명 전쟁 때까지 지속되었으나, 뤼네빌 조약에 의해 폐지되었다.

1500년에는 독일 지역의 인구만 해도 12,000,000명에 달했다. 자세한 내용은 독일/인구 참조.

다만 신성 로마 제국이 시작된 이후의 독일 왕국은 사실상 이름만으로 존재했고 신성 로마 제국과 겹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독일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 성립 전까지 911년/918년 ~ 962년 동안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

신성 로마 제국 성립 이후에는 일반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독일왕(로마왕)을 겸했다. 다만 엄밀히 말하면 독일왕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차이가 있고 약간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일단 독일왕은 콘라트 1세 이래의 전통대로 유력 제후들(훗날 7선제후)의 선출에 의해 선출된다. 독일왕으로 선출되면 후에 교황이 황제로 인정하는 대관식을 집전하게 되는데, 교황의 대관을 받으면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된다. 황권이 안정된 시기에는 제위를 아들에게 확실하게 세습시키기 위해 황제의 생전에 차기 황제를 뽑는 선거를 미리 치루는 경우가 많았다. 선거에서 뽑힌 차기 황제는 독일왕 신분이 되는데, 이때 독일왕은 황태자를 의미하게 된다.


6.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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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대에는 보통 그냥 '왕'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사실 이것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인데, 자기 나라 왕을 그냥 왕이라 부르지 딱히 나라 이름을 그 앞에 굳이 붙이지는 않기 때문이다.[2] 문헌상으로는 11세기 서임권 투쟁 때 황제 하인리히 4세가 '로마왕'을 내세우자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로마왕이 아니라 그냥 독일왕(Rex Teutonicorum)일 뿐이라고 깠고 그것이 문헌상 남아있는 라틴어 '독일왕(Rex Teutonicorum)'의 최초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3] 정확히는 하인리히 1세가 죽기 1개월 전[4] 맨 위 지도의 파란색이 독일 왕국, 회색이 이탈리아 왕국, 왼쪽 주황색이 부르군트 왕국(아를 왕국), 오른쪽 주황색이 보헤미아 왕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