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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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국(穢國)[한자] | 동예(東濊)
Eastern Ye

고구려의 조공국
동예의 세력권 (4세기경)
(기원전 3세기~) 기원전 82년?[1] ~ 기원후 4세기[2]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성읍국가
고구려
국호
(濊)[한자]
위치
한반도 중부 (함경남도 남부)
강원특별자치도
경상북도 [3]
군주
군장 (읍군, 삼로)
민족
예맥 (특히 예(穢)인)[한자]
(외 한(韓)인 일부)
언어
고대 한국어 (부여계 언어; 고구려어?)
(반도 일본어?)
현재 영토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북한|

북한
display: none; display: 북한"
행정구
]]

사건
기원전 2세기 고조선에 복속(남옥저)
기원전 1세기 한사군에 편입
기원전 82년 동예 독립
60년 실직국 침공
4세기 고구려에 복속
548년 독성산성 전투 참여
6세기 신라에 편입

1. 개요
2. 역사
3. 지방 행정
4. 멸망 가설
4.1. 고구려 복속설
4.2. 자연 멸망설
4.3. 기타 요인설
5. 영서 지역
6. 문화
7. 문제 출제 유형 및 사료
8. 인물
9.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濊) 또는 동예(東濊)는 기원전 82년부터 기원후 4세기까지 오늘날의 함경남도 남부 원산[4] 부근에서 강원도 강릉시, 경상북도 영덕군에 이르기까지 동해안 지역에 넓게 퍼져 있었던 부족사회 집단이다.


2. 역사[편집]


강릉 이남으로 동해안을 따라, 가장 남쪽인 포항시 신광면 마조리에서 출토된 유물인 '진솔선예백장(晋率善濊伯長)인'[5]으로 미루어보아 신라가 발원한 경주시에서 그리 멀지 않은 포항까지 일정한 수의 예인이 진출해 있었다고 추정된다.

북쪽으로는 고구려옥저, 남쪽으로는 진한에 접했다.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의 멸망 이후 전한 제국에 의해 세워진 한사군 중 임둔군의 일부가 현도군과 합쳐졌고(BC 82), 현도군이 구려의 서북쪽으로 이동(BC 75)한 뒤 이 중 영동 7현을 낙랑군 동부도위가 담당하게 되었으나, 훗날 후한 광무제 건무 6년 동부도위가 폐지(AD 30)된 뒤 영동 7현이 독립하면서 부조현은 옥저로, 나머지 6현은 동예로 귀속되었다. 한사군에 의한 점령 시절 통치제도의 변화가 나타났으며, 남쪽의 실직국 등 주변국을 공격하기도 하는 등 그럭저럭 지냈다. 불내예국, 화려국 등이 있었다. 후술하는 불내예국이 낙랑군 동부도위의 치소가 있었던 곳이다.

동예계 국가가 가장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것은 함경남도 안변군 지역의 불내예국(不耐穢國)이다. 관구검을 비롯한 조위군의 침공으로 고구려의 복속에서 잠시 이탈했기 때문이다. 불내예국은 245년 낙랑군 태수 유무(劉茂)와 대방군 태수 궁준(弓遵)의 침입을 받고, 다시 중국 군현의 영향권내에 들어가서 '불내예후'의 작위를 받고 조공을 바쳤다. 247년에는 잠깐 불내예왕의 작위를 받고 격상했다. 이후로는 기록이 적어 4세기까지 고구려에 다시 복속된 것으로 보인다. <광개토대왕릉비문>(廣開土王碑文)에는 당시 고구려가 정복했던 일부 동예 지역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동예의 영역이 울진, 영덕, 포항 등에 미쳤던 만큼 일부는 신라에도 병합되었다.

옥저와는 달리 동예의 멸망에 관한 기록은 없으나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고구려에 복속된 뒤에도 한동안은 주류인 고구려인과는 구별되는 정체성을 유지했는지, 한참 뒤인 6세기에 일어난 사건인 독성산성 전투(548) 때 고구려 제24대 양원왕이 백제 제26대 성왕을 공격할 때 동예인 병사 6,000명을 동원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조-에 나온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북명(北溟)을 동예로 추정하기도 하는데, 이곳 출신의 고구려 장수로 괴유[6]가 있으며 여씨 용사라는 장사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에서는 백제신라 건국 초창기부터 '말갈'이라는 세력과 충돌하는 기사가 여러 번 등장하는데, 이 부분에 등장하는 말갈이 만주에 사는 진짜 퉁구스계 말갈족이 아니라 동예 계통 집단을 말하는 것이 아니냐는 연구가 조선 후기 정약용 때부터 현대까지 제기되고 있다. 이들에 대해서는 위말갈 문서 참조.


3. 지방 행정[편집]


산과 하천을 경계로 읍락이 구분되어 각 읍락에는 읍군이나 삼로(三老)라는 군장이 통치했다고 한다.


4. 멸망 가설[편집]



4.1. 고구려 복속설[편집]


그 당시 강국으로 부상하던 고구려가 옥저를 복속시킨 후에 공격했고, 이에 따라 동예가 멸망했다는 것이다. 서기 56년 제6대 태조대왕에 의해 동옥저가 고구려의 속국이 되었고, 244년~245년경 고구려 제11대 동천왕에 의한 직접 지배가 실시되었으므로, 이때 옥저와 비슷한 위치에서 고구려에 조공하던 동예도 고구려에 의한 직접 지배를 받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4.2. 자연 멸망설[편집]


동예는 왕권이 한 곳으로 모아지지 않은 느슨한 연맹왕국 체제였다. 이에 따라 내부 분열이나 내부에서의 혼란, 반란 등의 이유로 멸망했다는 설이다.

이 설이 맞더라도 어찌되었든 잔존 세력들은 차후에 고구려에 복속되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5세기 제19대 광개토대왕 때 동예를 병합했다고도 하는데, 늦어도 4세기 말에는 이미 이 지역이 고구려의 영역이었다.


4.3. 기타 요인설[편집]


북방의 유목민족과 같은 다른 소수민족들의 침략을 받아 멸망했다는 설이다. 정확히는 유목민족보다 고구려, 그리고 고구려의 병사로 파견되기도 했던 말갈 일부 부족[7]들의 침입 때문에 점점 쇠락해졌다고 봐야 가깝다.


5. 영서 지역[편집]


흔히 교과서나 다른 참고서들에서는 강원도 일대가 모두 동예의 영역으로 나와있기 때문에, 대부분 영서 지역 역시 단순히 동예와 같은 궤에서 성립하고 멸망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영서 지역의 고대사는 방기된 관심과는 달리 상상 이상으로 복잡하며, 동예로 대표되는 예족의 문화와 어떤 면에서는 유사하지만 또 어떤 면에서는 크게 다르기도 하기 때문에 이를 제대로 짚고 넘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영서 지역은 청동기문화의 유형에 있어서도 다른 한반도 중남부 지역과는 구별되는 문화를 향유했다. 초기에는 한강 유역 미사리 유형과 역삼동 유형의 영향을 받아오던 북한강 일대 및 춘천 지역은 중기에 이르러서 천전리 유형이라는 송국리 문화와 비교되는 독자적인 청동기문화를 형성했다. 이 천전리 유형은 지리적 특성으로 한반도 서북 일대와 교류하며, 요동 및 서북한 지역과의 청동기 관계망이 지속되어 전•중기에는 비파형 동검을 매개로 한 관계망이 더욱 강화되었다.[8] 한편, 이 시기 영동 지역에서도 포월리 유형이라는 나름 독자적인 청동기문화를 발달시켰다. 또한 영동에서는 동해안을 타고 발달한 북한 동북부의 범의구석 문화(호곡동 유형)의 영향 또한 받았고, 송국리 유형 유적도 다소 확인되었다. 이 시기에는 영서의 유적이 더 조밀하며, 영동은 그에 비해 보다 느린 발달이 확인된다.

그러다가 북옥저의 기층문화로 여겨지는 단결-크로노프카 문화가 동해안을 타고, 강원 영동/영서에 영향을 주게 되었고,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는 춘천의 중도 유형 문화가 기원전 2세기~1세기경을 상한으로 형성되었으며, 영서·영동·경기 일부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중도 유형 문화는 경질무문토기ㆍ타날문토기ㆍ회흑색무문양토기의 공반, ‘呂(凸)’자형 주거지, 즙석식 적석묘 등의 요소를 특징으로 하며, 한성백제의 기층문화로도 여겨지고,[9] 예족 집단의 고고학적 문화로 이해된다.[10]

이 중도 유형 문화는 일반적으로 동예(혹은 그와 같은 예족)의 문화로 추정되며, 북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강원 영서와 영동, 경기 동북부 일대로 분포 범위를 넓혀나갔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영동과 영서의 예족들은 그 고고학적 특성에 있어 명확히 구분되지는 않지만, 지리적인 이유로 원삼국시대 이래 다른 발달과정을 겪어왔고, 영향을 받아온 외부 문화들에 따라서도 다르게 흘러왔다. 먼저, 영동과 영서는 기원전 3~2세기경, 초기 중도 유형 문화로 추정되는 임둔(臨屯)이라는 집단이 영유하다가 위만조선에 복속된 후, BC 108년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한사군 중의 임둔군이 설치될 데까지는 대체로 비슷한 역사를 가졌다.

그러다가 임둔군이 BC 82년 폐군되고, 현도군낙랑군에 각각 관할이 이관된 후, BC 75년 현도군마저 요동 바깥으로 이현하면서 그 운명이 달라졌다. 그 관할을 낙랑군이 물려받았을 때, 단단대령 이서는 전한에서 독립하고, 이동 지역은 낙랑군 동부도위에 통합되어 영서와 영동의 예맥 집단이 분화하게 되었다. (윤용구 2010; 윤선태 2013; 金在弘 2015). 이것은 정백동 364호분 유적의 낙랑군 현별 기록 분석을 통해 뒷받침되고 있다.[11]

다만 주의할 점은 낙랑군이 강원도 전역을 지배했다고 보는 견해는 거의 없고, 영동의 경우 강릉·동해 이북, 영서의 경우에는 북한강 유역의 춘천·화천·양평에서 낙랑군 관련 유물이 확인되지만 남한강 유역의 평창·원주·제천 등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유물이 확인되는 영서 북한강 유역과 그 이북의 영서 북부 지역도 낙랑군이 직접 현을 두어 관리했다기보다는 영향권 안에 두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한사군 자체가 일부 중추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토착집단의 체제와 문화가 이어져오기도 했고, 낙랑군의 직할 구역은 평안도황해도 일대에 그쳤으며, 산세가 험한 강원도 내륙지역에는 한사군 설치시부터 서기 4세기 초 축출시까지 통치력이 제대로 미치지 못했다. 《정사 삼국지》 <위서(위지)> -동이전-에서도 이러한 험지에 행정력이 잘 닿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기사가 종종 등장한다.[12] 이러한 지리적·정치적 특성으로 영동과 영서의 예족들은 기존에도 반독립적인 자치를 이어오다 낙랑군 동부도위의 폐지 때(AD 30)부터는 거의 독자적인 정치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렇게 분화하게 된 영서 지역의 정치체들을 다양한 명칭으로 부르는데, 춘천 등 영서의 지역사적인 면을 강조하는 일파에서는 예족의 동예와는 별도의 명칭을 강조하는 맥국[13]으로, 동예와 비슷한 예족의 정치체임을 강조하는 일파에서는 영서예로, 《삼국사기》 기록에서 초기 백제를 괴롭힌 말갈, 즉 위말갈의 정체가 이 영서 정치체로 추정되므로 이 기록을 따르는 일파에서는 말갈로 각자 다르게 칭하기도 한다. 이외에 《통지》에 나오는 현도군 고구려현(한나라의 창해군이었던 예의 남쪽으로 기록) 및 고구려(옥저 서쪽의 개마대산의 동남쪽)의 정체로 추정된다.

파일:영서말갈 (1).jpg
(사진출처 - https://cafe.naver.com/heestoria/186)

이 영서의 정치체는 크게 5개 그룹으로 나뉘며, 적석묘 출토지역에 따라 연천(임진강) 그룹, 춘천 그룹, 남양주·양평 그룹, 횡성 그룹, 남한강 그룹으로 나뉜다. 연천 그룹백제 이북지역에서, 남양주·양평 그룹춘천 그룹은 백제의 동쪽에서 대치하며 각각 3세기 말엽~4세기 초엽(연천), 4세기 초~중엽(춘천, 남양주·양평)에 백제에 복속되었다. 남한강 그룹은 평창~제천의 비교적 광활한 영역이었고, 4세기 중엽 경에 횡성 그룹과 함께 백제에 복속됨이 확인된다. 이렇듯 영서 지역은 대부분 고구려에 점령되기 이전에 백제에 우선 복속된다는 점에서 영동 지역과 차이가 있다. 영동의 동예가 3세기 초부터 4세기 중후반에 걸쳐 고구려에 복속될 때, 영서는 한사군 개편 때와 마찬가지로 영동과는 다른 운명을 맞이했다는 얘기이다. 물론 5세기경부터는 고구려가 백제 지역들을 경략하며 영동과 영서 모두 고구려 관할에 들어가기는 한다.


6. 문화[편집]


동해안에 해안을 끼고 위치한 까닭에 해산물이 풍부하며[14], 그 외에도 단궁(檀弓)(박달나무로 만든 )[15], 과하마(키 작은 조랑말), 반어피(물범 가죽)[16] 등이 특산물이다. 또 농사가 주업이였으며 직조 기술도 발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산악 지형이 대부분인데도 불구하고 토지가 비옥하여 농경이 발달했다고 한다. 제천 행사로는 10월의 무천(舞天)이 있었으며, 씨족 사회의 관습이 엄격히 남아 남의 마을을 침범하면 재물로서 보상하는 책화[17], 같은 부족 사람끼리는 혼인하지 않는 족외혼의 풍습이 남아있었다. 민족은 족 또는 예맥족으로, 역사서에는 그냥 '예'라고만 나와있다. 《삼국사기원삼국시대 관련 기록에서 강원도 지방에 말갈이 자주 출몰하는데, 이 말갈은 우리가 아는 그 말갈이 아니라 동예를 가리키는 것이다. 자세한 것은 위말갈 문서 참조. 그냥 '예'였던 나라 이름을 민족 이름과 구별하기 위해 현대의 역사가들이 '동' 자를 붙였고, 그게 국사 교육에까지 그대로 적용되었다. 위키백과에서는 동예와 예가 구분되어 나온다(예를 들면, 강원도 북부는 '동예'로 표기되고, 강원도 남부는 '예'로 표기). 사실 '예'(동예)도 지역별로 부족연맹 사회이다보니 여러 부족들로도 나뉘어졌다. 다만 동옥저, 남옥저, 북옥저로 구분되었던 옥저와는 달리 예인의 경우, 여러 부족들로 나누어지되 나누어진 지역마다 동예 등의 명칭으로 불렸는지 확실하지 않은데다가[18], 서예나 북예, 남예는 없었다. 물론 이것과는 별도로 압록강 중상류, 두만강 상류 등 한반도 북부 내륙 일대에 수많은 예족들이 있었다.

종교문화의 경우 호랑이에게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고 하며, 이를 단군 신화에 결부해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고구려를 이루던 맥(貊)은 이란 뜻를 가졌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예와 맥의 통합을 신화적으로 표현한 것이 단군 신화라는 것이다.

한 편, 동예 주거지의 특징이기도 한 여(呂) 또는 철(凸)자형 집들이 있다는 것인데, 이렇게 위아래로 구분되어있거나 위로 튀어나온 네모 모양의 집을 지음으로서 주공간과 화로를 구분했다.

후한서》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의하면 동예인들은 옥저와 같이 보병전을 잘하며 3장 길이의 긴 창을 여럿이서 들고 싸웠다고 한다. 동양의 길이 단위에서 1장은 10척이고, 한국의 삼국시대에 보통 척은 1척이 23cm인 후한척을 사용했으니 3장이라고 하면 약 6.9미터가 된다. 이 정도 길이면 굉장히 긴 길이인데, 장창으로 유명한 고대 그리스의 마케도니아 군사들이 사용했던 사리사나 중세 유럽의 스페인 테르시오스위스 용병대가 사용했던 파이크전국시대 일본 보병인 아시가루들이 사용했던 야리보다 더 길다. 헌데 보통 장창은 한 명이서 들게 마련인데, 그걸 여럿이서 들었다는 구절을 놓고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의견이 분분하다. 일설에 의하면 창이 너무 길고 무거워서 혼자서는 들기 어려워 두 명 이상이 들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19] 또한 신라와 백제를 침공한 말갈족의 정체가 동예가 가장 유력하다는 점, 훗날 고구려가 동예인 병사 6,000명을 548년 독성산성 전투에 동원하는 등 상당히 군사력이 강했던 듯 하다.


7. 문제 출제 유형 및 사료[편집]


대군장이 없고, 한나라 시대 이후로 후, 읍군, 삼로 등의 관직이 있어서 하호(下戶)를 통치했다(대통령 없이 시• 도지사만 있었단 이야기다.).[20] '풍속은 산천을 중요시하여 산과 내마다 구분이 있어 함부로 들어가지 않았고, 고구려에 복속되었다'는 표현이 나오면 동예다. 약간 지엽적으로 출제될 경우 특산물인 반어피, 과하마, 단궁이 고구려나 부여의 특산물이라고 치사하게 말바꾸기 형식으로 출제된 적이 있다. 동예의 무천 행사(10월)를 제천이나 영고로 표현해서 오답형으로 종종 출제된다. 옥저와 마찬가지로 동예는 연맹왕국이 아니라 군장국가라고 보는 것이 맞는다. 대군장이 없다고 직접적으로 제시된 떡밥도 있으며, 조금 어렵게 출제될 경우 나올 수도 있으니 군장국가임을 인식하자. 연맹왕국은 부여, 고구려다(둘 다 5각 체계. 부여 - 5가, 고구려 - 5나 >> 5부).

2016년 계리직 공무원 한국사 시험에서는 '식구가 죽으면 살던 집을 헐어 버렸다'는 지문이 동예의 특징으로 제시되었다.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중에서는 지학사 교과서가 다루는 내용이다.


8. 인물[편집]


  • 부조예군(夫租薉君): 인명이 아니라 부조(夫租) 지역의 예군(薉君)이라는 뜻이다. 부조 지역의 토착 군장(君長)으로 추정된다. 평양시 낙랑구역 정백동 1호 무덤에서 그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축조 시기가 기원전 1세기경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 불내예왕
  • 예백(穢佰): 포항시 북구 신광면에서 발견된 '진솔선예백장'(晉率善穢佰長)에 등장하는 예족 인물. 울진 ~ 포항 부근에서 활동했던 예족의 수장으로 추정된다.
  • 맥국거수(貊國渠帥): 《삼국사기》<신라본기> -유리 이사금 조-에 등장하는 인물. 맥국(貊國)의 우두머리(渠帥)라는 뜻으로, 유리 이사금 17년, 화려국과 불내국의 예인들이 침략하자 곡하 서쪽에서 이들을 격퇴했다. 신라 유리 이사금이 이를 기뻐하며 맥국과 우호를 맺었다. 유리 이사금 19년에는 사냥한 짐승과 새를 바치기도 했다.[21]
  • 여씨 용사


9.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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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A B C '예'는 '濊', '穢', '薉' 등 비슷한 한자로 표현되는데, 발음을 음차한 것으로 보인다.[1] 청동기/철기시대의 정치체가 기원전 21세기(청동기, 오산리 I 유적#) 혹은 기원전 7세기(철기, 철정리 II 유적#)부터 성립했다는 의견도 있으나, 대체로 "동예"는 기원전 3세기경 연해주의 단결-크로노프카 문화(옥저)로부터 영향을 받은 초기 중도 유형 문화(임둔국?)가 성립하다가 고조선에 복속되고, 고조선의 고토에 한사군이 설치된 이후 기원전 82년 임둔군의 폐군으로 성립된 것으로 본다. [2] 사실 서기 548년인 독성산성 전투때 백제를 공격한 고구려가 동예인 병사 6,000명을 동원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조-에 나온다. "二十六年 春正月 高句麗王平成 與濊謀 攻漢北獨山城 王遣使請救於新羅 羅王命將軍朱珍 領甲卒三千發之 朱珍日夜兼程 至獨山城下 與麗兵一戰 大破之"[3] 울진군 ~ 영덕군 일대[4] 현재 원산시는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해 강원도에 속해있다.[5] 보물 560호. <신라본기> -남해 차차웅- 기사에는 북명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왕'(濊王)의 도장을 발견해 바쳤다는데, 이때 등장하는 북명이란 지명을 예족의 일부로 보기도 한다.[6] 괴유는 북명 출신인데, 북명의 위치 비정이 매우 힘들어 단순히 동예 출신으로 단정짓기엔 오류가 있다.[7] 고구려에 복속되거나 친고구려 세력 등[8] 송만영, 2019, <북한강유역 역삼동유형 영향설에 대한 검토> 초록에서 발췌.[9] 이 경우 '한예'(韓濊)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마한 지역에 고구려계 유민이 지배층으로 건국한 한성백제가 예족과 무슨 관련이 있냐는 질문이 나올 수 있지만, 원래 원삼국시대 삼한 집단과 예족의 문화적 양상은 무 자르듯 나눠지지 않는다. 거기다 당시 마한에게 있어 서울과 경기 해안 일대는 외곽 지역이었고, 실제로 문화적 양상도 마한의 주된 묘제인 토광 목관묘·석곽묘 계열이 아닌 토돈 분구묘제 계열이었다.[10] 박중국, 2012, <중도문화의 지역성 -‘중도유형문화론’의 재검토를 중심으로>[11] 유은식(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2018, <濊文化의 형성과 확산양상- 중도유형문화를 중심으로->, 본 논문에서는 영서 북부·영동 북부·중도 유형 문화를 모두 '예'(濊)의 물질문화로 보았다.[12] “(후한) 환제(桓帝)•영제(靈帝)의 말년에 한예(韓濊)가 강성하여 군현(郡縣)이 능히 제어하지 못하니 많은 이가 한국(韓國)으로 유입되었다.”(《三國志》 <魏志> -東夷傳- '韓條')[13] 하지만 민족 구성이 명확히 나뉘지 않고, 맥족, 맥국이 일반적으로 고구려를 일컫는 말임을 감안하면 고구려 영역이었던 영서를 후대에 신라가 구분한 명칭일 가능성이 있다. 다만 이에 대해서도 학술적으로 반박하는 견해가 많다.[14] 《삼국사기》를 보면 '동해'에서 고구려에 공물로 고래의 눈알을 바쳤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데, 그 '동해'가 바로 동예로 추정된다.[15] 다만 한국의 전통 활을 복원하는 연구가들의 말에 의하면 박달나무는 탄성이 적어서 활로 만들어도 화살이 멀리 나가지 못해 사실 활을 만드는 데는 그다지 좋은 재료가 아니라고 한다.[16] 일설에 의하면 관구검이 이끄는 조위군이 고구려를 침략했을 무렵, 고구려 장수 유유가 음식을 가져가서 위나라 군대한테 바치고 거짓 항복했다가 위나라 장수를 죽였다는 구절을 놓고, 사실 유유가 가져간 건 음식이 아니라 이 반어피 같은 동물 모피였다고 한다. 음식은 쉽게 상하고 식으면 맛이 없기 때문에, 먼 거리를 가는데 음식을 같이 가져가기는 거의 불가능한 반면 동물 모피는 상하지 않는 데다가 중국인들이 무척 탐내는 물건이었으니 유유는 위나라 장수한테 동물 모피를 뇌물로 바치는 척하면서 거기에 숨겨둔 단검을 꺼내 위나라 장수를 죽였다는 것이다.[17] 가축이나 노예를 주로 보상 대상으로 삼았다.[18] 우선 옛 사료기록에 따르면 '東濊'라는 언급이 없고, 오늘날 부르는 명칭인 동예로 간략하게 구분하여 표기한 정도에 가깝다[19] 다만 창이 길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16세기 유럽에서 긴 창을 들고 싸우는 전투 방식으로 유명했던 스위스 용병란츠크네히트 중에서 상대적으로 실력이 더 뛰어난 스위스 용병의 창이 실력이 좀더 부족하다고 알려진 란츠크네히트 병사들이 쓰는 창보다 더 짧았으며, 마찬가지로 16세기 일본에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부하들한테 전투에서 짧은 창과 긴 창 중에 어느 쪽이 더 유리한가를 묻자 부하들 모두가 실전에서는 짧은 창이 긴 창보다 더 유리하다고 대답했다. 사실 창이 너무 길면, 그만큼 무게 중심이 제대로 잡히질 않아서 찌르거나 내리칠 때 그만큼 힘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적에게 입히는 피해가 적어진다.[20] 옥저와 동예의 통치체제는 '후'의 존재로 구별된다.[21]삼국사기》 <지리지>를 비롯하여 《고려사》 권58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6 <춘천도호부조> 등에서는 춘천을 맥국(貊國)의 소재지로 비정한다. 다만 최근 학계에서는 화려와 불내라는 지명이 영동 지방에 위치했음을 고려하면, 춘천보다는 동해안에 가까운 지역에 있었던 동예인을 이끄는 우두머리(君長)로 보는 의견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