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팡즈싱 호 침몰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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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보이는 검은 것이 침몰한 선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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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몰 이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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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양한 모습이다.

해상사고 요약도
발생일
2015년 6월 1일
유형
운항중 전복
발생 위치
중국 양쯔강 충칭
탑승인원
승객: 408명(투어가이드 5명포함)
승무원: 46명
사망
442명[1]
구조
12명
기종
크루즈 여객선
1. 개요
2. 사고 원인
3. 사고에 대한 의문과 문제점
4. 안타까운 사연들



1. 개요[편집]


2015년 6월 1일 저녁 9시 30분경 '둥팡즈싱'(東方之星/동방지성)호가 중국 양쯔강에서 456명의 승객을 태운 채 운항하다 강한 바람을 맞아 침몰한 사건.

이 사고로 침몰한 여객선 '둥팡즈싱 호'는 난징을 출발해 충칭으로 향하던 도중 양쯔강 중류 후베이성 젠리현 부근에서 침몰했는데, 먼저 탈출한 선장과 1등 기관사의 말로는 강한 바람을 맞아 급속도로 침몰하였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한국 영사관 측에서는 아직 한국인 승객은 없는 것으로 보고 있지만, 중국에서는 국내 여객선을 발권 시 신분을 확인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인 피해자가 나올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충칭시 완저우 소속의 여객선 '둥팡즈싱'은 장쑤성 난징 우마두부두를 출발해 충칭으로 향하던 중이었다.1994년 2월 건조된 이 배의 길이는 76.5m, 폭은 11m 등으로 정원은 534명이다. 이 배는 교통부가 '부급 문명선'으로 평가한 호화유람선이며 1967년 설립된 국유기업으로 창장일대에서 사고 배를 비롯해 5척의 유람선을 운행하고 있는 충칭동방륜선(重慶東方輪船)공사 소속이다.

사건 당시 회오리바람 등으로 인해 배가 견디지 못하고 침몰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리커창 총리, 마카이 부총리, 양징 국무위원 등과 함께 사고 현장으로 달려가 구조작업을 지휘하고 있다. 중국 당국은 10여 척의 배를 동원해 사고 수역 주변을 수색하는 동시에 정확한 사고 원인을 조사하고 있으며 사고수역은 젠리현 신저우(新洲)항에서 4㎞ 떨어진 지점으로 해사, 공안, 교통, 무장경찰, 의료인력 등이 신저우항에 연합지휘부를 설치하고 구조작업을 펴고 있다.

6월 2일 16시 기점으로 12명이 구조되었다고 하는데, 현지 기상사정이 좋지 않은데 더해서 침몰 지점의 물이 탁하고 물살이 거센 탓에 생존자 수색에 난항을 겪고 있다고 한다. 또한 사고가 한밤중에 발생한 데다가 승객 대부분이 단체 관광객이었고, 연령대도 70~80대의 고령자가 많아 피해가 크다고 한다.(#)

6월 3일 사망자수가 38명으로 늘어났다.(#)

6월 5일 중국 당국은 더 이상의 생존자가 없을 것으로 판단, 선체인양을 결정했다.(#)

6월 5일 인양을 완료하였으며, 선체 내부를 7시간 동안 최종적으로 수색하고 마무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6월 6일 침몰된 선체에 대한 수색 작업이 완료되면서 침몰 후 약 5일 만에 탑승객 456명 중 442명이 사망, 실종된 대참사로 결론 지어졌다.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추모가 잇따르고 있으며, 양쯔강 일대에서의 실종자 수색 작업, 관계자 조사, 희생자에 대한 보상 등이 협의되고 있다.

6월 13일 오후 11시경(중국 현지 시간 기준) 드디어 실종자를 모두 수습했다. 그런데, 탑승인원 수가 456명에서 454명으로 줄었고, 구조자 수도 역시 14명에서 12명으로 줄었다.

3개월 뒤에 필리핀에서 이와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2. 사고 원인[편집]


아직 조사 중이지만, 선원들의 말에 따르면, 급작스런 강풍, 싸이클론을 만나 배가 전복되었다고 진술하였다고 한다.


3. 사고에 대한 의문과 문제점[편집]


둥팡즈싱 호는 연안 여객선이기 때문에 블랙박스와 자동경보장치 탑재가 의무였다. 그러나 양쯔강 해사국의 발표에 따르면 해당 여객선은 자동경보장치를 탑재하지 않은 채 운항을 하여 침몰 당시 주변 선박에 경보가 알려지지 않았다. 때문에 중국 당국이 사고 사실을 인지한 것은 침몰 당시 탈출한 승객 우젠창 씨가 인근 어선에 구조되고 침몰을 신고한 시점으로, 침몰 후 몇 시간이 지난 상태라 구조가 늦어졌다. 또한, 인양된 선체에 대한 최후 수색에도 불구하고 블랙박스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따라 훼손된 선체 및 선장과 기관장을 포함한 생환자 14명의 증언, 선박 회사 및 관계자에 대한 조사 이외에는 사고를 규명할 방법이 없게 되었다. 사고 원인을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규명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의 목소리가 높다.

또한, 6월 6일 침몰선 최종 수색 이후(20:00) 발표에 따라 이번 둥팡즈싱 호의 총 탑승객 456명 중 구조자는 14명, 사망자는 406명, 실종자는 36명으로 집계되었다. 아직 양쯔강 하류까지 수색범위를 확대하여 수색 작업 중이므로 사망자의 시신이 더 수습될 가능성이 있으나, 실종자가 너무 많다는 지적이 있다. 실종자는 사실상 전원 사망했을 것으로 보이므로 이번 사고의 희생자는 442명으로 추정되나, 신속한 인양에도 불구하고 8% 이상에 해당하는 36명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것. 일반적으로 승객들 대부분이 객실에 머물고 있는 밤 시간대에, 그것도 갑판 위로 탈출할 틈도 없이 몇분 만에 침몰한 배의 경우 탑승객 대부분의 시신을 수습할 수 있다. 6월 11일엔 실종자를 모두 수습하기는 했다.

우리나라에서 1993년 비슷하게 침몰한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에서는 17일 만에 실종자 전원의 시신을 수습한 바가 있으며, 침몰 전 갑판 위로 탈출한 승객이 많았던 2014년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에서 희생자 304명 중 295명의 시신을 수습하여 실종자 비율은 3%에도 미치지 않는다.

지나치게 다급한 선체 절단 및 인양 작업도 많은 비판을 받으며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중국 당국은 침몰 후 72시간도 지나지 않은 6월 3일 오후부터 선체에 구멍을 뚫고 잠수부를 투입하는 작업에 들어갔으며, 72시간이 지난 직후에는 신속히 선체를 바로 세우고 인양 작업에 들어갔다. 6월 5일 선체 인양을 완료하고 6월 6일 선체 수색 작업도 완료함에 따라 침몰한 지 채 5일도 지나지 않아서 대참사로 결론을 내린 뒤 양쯔강 일대의 실종자 수색 작업 외에는 사실상 사고의 직접적인 수습을 끝내버린 상황. 특히 중국 당국은 에어 포켓의 훼손 가능성을 최소화하여 선체를 절단했다고 하지만, 선체 절단 작업은 에어 포켓을 훼손시켜 생존자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는 작업으로, 생존자 존재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을 때는 실행하기 어려운 작업이다. 다만 여객선 사고 대부분에서 에어 포켓이 없었음을 감안한다면 중국 당국의 판단이 꼭 틀렸다고 단정하긴 어렵다.

또한 뒤집힌 선체를 바로 세우고 인양하는 작업 역시 마찬가지로 생존자의 안전을 위협하며, 선체가 크게 요동치고 선체 안의 물건들과 뒤섞여 시신이 크게 훼손될 수 있는데도 잠수수색을 초기에 중단하고 360여 명의 실종자가 남아있는 상태에서 선체 인양으로 시신을 수습한 것도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생존자 구조 가능성이 사실상 소멸된 상황임을 고려하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특히 중국 인민 대학교 마샹우(馬相武) 교수는 “사태를 질질 끌다가는 상황이 더 복잡해질 수 있었다. 그러면 세계적인 관심거리가 된다. 중국으로서는 가능한 한 피하고 싶은 시나리오라고 해야 한다.”면서 중국 당국이 분명 한국의 세월호 사고를 학습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게다가 이런 사고는 어차피 유가족들의 의향대로 전부 해줄 수가 없으며, 해도 욕먹는 건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차라리 신속하게 일처리를 하고 그걸로 며칠에서 몇 주 정도 욕먹은 다음 조용히 정리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나중에 진짜 당연히 해야 할 상식적인 조치나 조사조차 하지 않은 것만 아니면 최소한 정부가 받는 비난과 사회적 혼란은 단기간으로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 당국은 사태 수습 작업 내내 실종자 가족의 현장 접근을 차단하고 언론을 통제했다. 이 역시 사고 여파가 장기화되고 여론이 주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로 보인다. 실종자 가족들은 사고 이후 계속해서 현장에 접근하려 했으나 모두 제지당했으며, 당국은 생존자의 안전이 위협될 수 있는 선체 절단 작업이나 인양 작업을 개시할 때도 실종자 가족과는 전혀 협의하지 않았다. 현장은 구조인력조차 접근에 제약이 까다로울 정도로 삼엄한 통제하에 있었으며, 언론사들 역시 접근이 통제된 채 관영방송인 신화통신의 기사, 중앙방송인 CCTV의 영상만 사용해서 보도할 수 있었다.(#) 외신 취재진에게도 마찬가지 지침으로 접근을 통제하여 언론 통제가 문제시되었고,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리 총리는 6월 4일 외신 기자들의 접근을 허용하라고 지시했으나,(#) 이후에도 외신 기자들이 현장에 직접 접근하지는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생존자나 사망자와 실종자 가족들에 접근 및 인터뷰조차 제한되고 있다.


4. 안타까운 사연들[편집]


최초 신고자인 승객 우젠창 씨는 아내 리슈전 씨와 함께 객실에 머물고 있었다고 한다. 배의 요동을 느끼고 우 씨는 아내를 안심시키기 위해 손을 잡았으나, 배가 크게 기울면서 리 씨가 침대에 깔렸고 객실로 급속하게 물이 밀려 들어왔다. 리 씨는 남편에게 손을 놓으라고 소리쳤고 우 씨는 결국 아내의 손을 놓친 채 선실 창쪽으로 탈출을 할 수 있었다.(#)

천구이샹(57) 씨는 언니 세 명과 형부 두 명 등 무려 다섯 명의 가족을 잃었다. 6자매였던 천 씨 자매 중 첫째 천청잉 씨, 둘째 천룽잉 씨, 셋째 천구이잉 씨와 형부 두 명이 10박 11일 일정이었던 둥팡즈싱 호 크루즈 여행에 동행했다. 사고 당일 오전까지만 하더라도 사진을 보내며 즐겁게 여행을 즐기고 있던 언니들과 형부였으나, 5명 중 아무도 구조되지 못했다.(#) 가족 단위 승객이 많았던 이번 둥팡즈싱 호의 특성상 천 씨와 마찬가지로 한 번에 여러 명의 가족을 잃은 안타까운 사연이 많다.

침몰 후 신고나 승객 구호조치를 하지 않고 탈출해 비난을 받았던 장슌웬 선장도 승무원으로 탑승했던 아내를 구하지 못한 사연이 전해졌다. 장 선장은 전처와 이혼하고 3년 전 같은 회사 직원인 모빙 씨와 재혼하였는데, 사고 당시 모빙 씨는 둥팡즈싱 호의 여객사무장으로 탑승한 상태였다. 해당 사연이 전해진 이후 장 선장에 대한 책임방기론 주장이 다소 줄어들었다고 한다.(#)

인터넷에 익명으로 사연을 올린 한 여성은 부모님과 딸이 둥팡즈싱 호에 탑승했으며, 딸은 탑승자 중 최연소 나이인 3세인 것으로 알려져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유감스럽게도 선체 인양 후 이루어진 수색에서 이 여성의 딸로 추정되는 여자아이의 시신이 수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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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려 전체 탑승객의 97.4%가 사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