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르크 카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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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르크 카윗의 기타 정보





네덜란드의 축구감독


파일:lr220602ab22154.jpg

디르크 카윗
Dirk Kuyt
출생
1980년 7월 22일 (43세)
네덜란드 자위트홀란트주 캇베이크
국적
[[네덜란드|

네덜란드
display: none; display: 네덜란드"
행정구
]]

신체
183cm / 체중 77kg
직업
축구 선수 (스트라이커, 윙어 / 은퇴)
축구 코치
축구 감독
소속
유스
퀵 보이스 (1985~1998)
프로
퀵 보이스 (1998)
FC 위트레흐트 (1998~2003)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2003~2006)
리버풀 FC (2006~2012)
페네르바흐체 SK (2012~2015)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2015~2017)
퀵 보이스 (2018)
코치
퀵 보이스 (2017~2018 / 수석코치)
감독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U-19 (2018~2022)
ADO 덴하흐 (2022)
국가대표
파일: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104경기 24골 (네덜란드 / 2004~2014)
SNS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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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2.2. 국가대표 경력
3. 플레이 스타일
4. 지도자 경력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6. 여담
7. 같이 보기



1. 개요[편집]


네덜란드축구 선수 출신 축구 감독. 에레디비시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에 진출하여 네덜란드 리그 득점왕 출신 성공 사례를 잇는 선수가 되었지만, 동시에 가장 과소평가받은 선수. 장신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활동량과 높은 수비 기여도, 이타적인 플레이, 높은 득점력이 강점으로 평가받는다.


2. 선수 경력[편집]



2.1. 클럽 경력[편집]


1998년 18세의 나이에 FC 위트레흐트에서 프로 데뷔를 치뤘고 5년 동안 공격수로 활약했으며, 마지막 시즌에만 34경기 20골을 터뜨리며 자신의 재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러한 활약을 인정받아 당시에는 상당히 잘 나가던 페예노르트로 입성, 전 경기 출장에 20골을 기록하여 화려한 데뷔 시즌을 장식했다.

다음 시즌에는 살로몬 칼루와 함께 투톱을 형성, 강력한 파괴력을 보여주며 04/05 시즌에만 29골을 터뜨리며 생애 첫 득점왕의 영예를 안게 된다. 이러한 활약에 단숨에 수많은 명문 클럽들의 러브콜을 받았지만 뛰어난 충성심을 보이며 05/06 시즌까지 팀에 잔류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팀은 당시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끌던 PSV 아인트호벤에 번번히 밀려 리그 우승을 놓쳤다.

그러다 2006년 8월 라파엘 베니테스의 러브콜을 받고 1,500만 유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리버풀 FC로 이적했다.

첫 시즌 리버풀에서, 이전과 같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긴 한데, 득점력이 줄었다. 활동량과 팀 플레이는 여전히 톱클래스를 달리지만 유럽 리그에서도 가장 거친 몸싸움과 강한 압박이 이루어지는 EPL 팀들의 수비진에는 고전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이러한 면이 득점력의 감소로 이어졌다.[1] 게다가 풀타임 출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첼시 FC로 이적하여 서브 및 로테이션으로 활약하는 살로몬 칼루보다 득점 면에서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은 상당히 안타깝다.[2]

결국 토레스가 온 07-08 시즌부터는 4-3-3 혹은 4-2-3-1[3]으로 전술을 바꾸면서 카윗은 스트라이커에서 오른쪽 윙 포워드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매 시즌마다 자리를 잡지 못 하고 주전이 바뀌는 왼쪽과[4] 달리 오른쪽의 카윗은 넓은 활동량과 이타적인 플레이로 리버풀 FC 부동의 주전으로 활약했다. 수비진의 강한 압박에 고전한다지만 오히려 카윗이야말로 필드의 좌우를 종횡무진 누벼대며 피지컬로 미친 듯이 비벼대고, 공을 탈취하고, 태클이나 반칙 한 번 더 하고, 공을 연계하며 상대편에게는 울화통을 아군에게는 사기를 선사하는 멋진 플레이를 기복없이 보여주고 있다. 리버풀에 디르크 카윗이 있다면 맨유에는 박지성이 있다. 매우 흡사한 역할과 플레이를 보여준다. 다만 공격 포인트나 부상 빈도를 본다면 카윗이 박지성상위 호환이나 다름없다[5].

또한 득점력이 떨어진다 어쩐다 하지만 첫시즌을 제외하면 윙포워드로 많은 시간을 뛰었고 네덜란드 시절의 폭발적인 득점력과 기대치에 못 미쳐서 그렇지 286경기 71골이라는 윙포워드로서는 준수한 기록을 남겼다. 마무리 능력이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기복없는 꾸준한 모습과 필요할 때 한 방으로 꾸준한 득점력을 보여줬다.

10-11 시즌 부진했던 리버풀이 맨유와 경기를 가졌을 때 모두가 맨유의 압승을 예상했으나 카윗의 해트트릭으로 리버풀이 3:1로 이겨버렸다.

2012년 6월, 페네르바체 SK로의 이적이 결정되었다. 이적 조항에 따라 이적료는 단돈 £1M이며, 리버풀 팬덤은 브렌던 로저스 감독의 부임 직후 터진 이 뉴스로 충격에 빠졌다.[6]

페네르바체 SK에서는 모우사 소우와 함께 팀의 공격을 이끌었다. UEFA 유로파 리그에서도 팀이 32강 토너먼트에 진출하는 데 한몫했다. 최종 기록은 리그 31경기 8골.

2013-14 시즌에도 모우사 소우, 엠마뉴엘 에메니케와 함께 페네르바체의 득점을 책임지며 리그 31경기 12골을 기록했으며 2014-15 시즌에는 리그 32경기 8골을 넣었다. 통산 95경기 28골. 유럽대항전과 컵대회 기록을 합치면 130경기 37골이다.

2015년 4월 10일, 페이스북을 통해 올 시즌으로 페네르바체 생활을 마감하고 다음 시즌에는 페예노르트로 귀환함을 알렸다. 2016년 2월 21일 로다전에서 페예노르트 통산 100호골을 달성했다. 2월 28일 위트레흐트전에서 결승골을 넣으면서 1959/60 시즌의 렌스트라(39세), 빌커스(36세)에 이어 에레디비시 사상 세번째 최고령 15골 득점자(35세 221일) 기록을 세우고 리그 득점 3위를 달리고 있다. 최종 기록은 리그 32경기 19골. 나이를 거꾸로 먹고 있다.


2017년 5월 14일, 2016-17 시즌 마지막 라운드인 헤라클레스 알메로와의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자신의 조국에서 첫 리그 우승을 이뤄냈다. 동시에 시즌을 12골로 마무리하며 두 시즌 연속 두 자릿수 득점에도 성공했다.

시즌 최종전 승리 이후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마지막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고 팀을 18년만에 우승으로 이끈 뒤 명예롭게 유니폼을 벗게 되었다.

2018년 4월 7일, 자신이 코치로 있는 퀵 보이스의 공격수 부족으로 현역에 복귀했다.


2.2. 국가대표 경력[편집]


국가대표팀에서도 헌신적인 플레이 덕분에 활약이 좋다. 비록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아르연 로번, 웨슬리 스네이더 등에게 득점 면에서 밀리는 면모가 있었지만, 16강전인 슬로바키아 전과 8강전인 브라질 전, 그리고 4강인 우루과이 전까지 3경기 연속 어시스트를 기록하는 등 대회에서 총 1골 3도움으로 팀의 준우승 기여했다. 특히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수비력과 투지와 활동량은 카윗을 제외하면 네덜란드 공격진의 다른 어떤 선수도 제공할 수 없는 것이었다. UEFA 유로 2012, 카윗을 기용하지 않은(카윗은 이 대회에서 2번 교체 출전했으며, 그것도 모두 후반 막판이 전부였다.) 눈 버리는 경기력으로 3패 광탈한 것이 단적인 증명이다. 카윗이 빠진 것만이 이유는 아니겠지만, 커다란 이유 중 하나임은 틀림 없다.[7] 과소평가 과소평가 말이 많지만 그것까지 감안해서도 정말로 과소평가되고 있는 선수.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팀의 필요에 따라 최전방공격수에서 후방의 윙백까지 포지션을 변경해가며 대활약. 멕시코전에서 국제경기 100경기 출장을 달성했다. 브라질과 맞붙은 3·4위 결정전에서는 전반전 헤딩 경합 중 머리에 출혈이 있었으나 교체하지 않고 풀타임 출장하면서 마지막 월드컵을 3위로 마무리했고, 이어진 이탈리아와의 친선경기[8]를 끝으로 국가대표 커리어를 마감했다.


3. 플레이 스타일[편집]



유망주 시절에는 그리 주목 받던 선수는 아니었다. 헌신적이고 움직임이 좋으나 실력은 기대에 조금 못미치는 선수였으나, 10대 중,후반에 들면서 여태까지 노력이 결실을 맺었는지, 기량이 폭발적으로 만개하였다. 카윗은 플레이스타일이 흡사 박지성과 비슷하다. 뛰어난 위치선정과 엄청난 활동량, 공수 양면에서 능력을 갖춘 팀 플레이어다. 거기에 정확한 킥력을 갖췄다.[9]

리버풀 시절에는 주로 수비형 윙어로 굉장히 헌신적인 활동량과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현란한 드리블링이나 엄청난 킥을 보유한 선수는 아니지만 한때 에레디비시에에서 4년 연속 20득점을 해줬던 선수임에도 아주 수비를 열심히 가담하고 심지어 잘하기도 하며 특히나 왕성한 활동량과 체력은 운동장 전체에서 카윗을 구경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본래 에레디비시에 시절에는 공격수로 엄청난 득점력을 보여주었다. 페예노르트 시절에는 4년 연속 20골을 넣었고 실제 리버풀로 올때는 그 전에 있다가 빌라로 떠난 밀란 바로시나 같이 뛰었던 크레이그 벨라미, 피터 크라우치등의 득점력이 좋은 스트라이커들이 없었기에 입단 당시만해도 에레디비시에 시절처럼 스트라이커로 많은 득점을 해주길 바랬었다. 훗날 생길 -라인보다도 먼저 리버풀의 주포가 되어주길 바랬으나 기술적으로 아주 훌륭한 선수는 아니라 꾸준한 기회에도 페예노르트 시절만큼의 폭발력이 발휘되지는 못했다. 사실 득점력이 줄었다기보다는 에레디비시에 시절에도 본인이 스스로 엄청난 득점기회를 만들거나 혹은 골잡이로의 본능을 보여주었던 것은 아닌데 리그의 수준차이나 이런 것들로 인한 다소간의 오차였다. 그런 이유로 계륵이 되어가던 중이었는데 당시 감독이었던 라파엘 베니테즈는 아예 공격수 치고는 놀라운 활동량이나 수비력을 보고 윙어로 변신시켜 버렸으며 이른바 수비형 윙어가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정말 대성공을 거두게 되어 심지어 2014년 월드컵에서는 쓰리백의 윙백으로 뛰기까지 한다. 20골씩 넣는 폭발적인 득점력은 보여주지 못했지만 그래도 꾸준히 어느정도씩 골을 넣어주고 맨유와의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등 아직 죽지 않은 득점력을 보여주었었다.

이후 페네르바체 SK로 떠나면서 똑같은 롤을 수행했지만, 페예노르트로 복귀하면서부터는 득점력이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4. 지도자 경력[편집]


2022년 6월 2일, ADO 덴하흐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1년 계약.

2022년 11월 24일, 성적 부진으로 인해 경질되었다.#


5. 기록[편집]



5.1. 대회 기록[편집]








5.2. 개인 수상[편집]




6. 여담[편집]


  • 사비 알론소의 인터뷰에 의하면 자기가 본 리버풀 팀원들 중 가장 무식하다고 한다.

  • 2009년 3월 영국의 일간지 더 선에서 세계에서 가장 못생긴 축구선수 3위에 꼽혔다. 참고로 4위는 호나우지뉴였다. 다만 은퇴하고 40대가 된 지금은 회춘했다.

  • 네덜란드 국적자 치곤 영어가 그리 유창하진 않다. 물론, 영국에서 오랜 시간동안 선수 생활을 한 만큼 영어를 딱히 못 한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인터뷰 영상을 보면 영어가 좀 어눌하다. 그래도 오랫동안 꾸준히 노력한 덕분인지 리버풀을 떠나던 시점에는 영어 인터뷰를 꽤 유창하게 소화해냈지만, 초창기에 그의 영어는 꽤나 서툴렀었다.

  • 김호 감독이 이끌던 수원이 2002년에 당시 22세의 네덜란드 유망주 디르크 카윗을 영입하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 당시 소속팀이던 위트레흐트와 이적료 협상을 마치고 사인만 남겨놓은 상황이라 김 감독이 공론화하기 까지 했다. 하지만 카윗은 2002/03 시즌을 시작하자 무서운 득점력을 보였고, 네덜란드 대표팀 명단에까지 올랐다. A매치 데뷔는 2004년에 성사됐지만 대표팀 명단에 오를 정도로 유망주로 급부상한 것이다. 결국 카윗은 수원 입단을 거절하고 2003년 거액의 이적료로 페예노르트에 입단했다. 이는 호비뉴와 함께 K리그 사상 역대 최고급 선수를 영입하려다가 불발된 대표적인 사례로 남아 있다.


  • 조국 네덜란드의 축구팬들 사이에선 국대 레전드로 인식되며, 특히 페예노르트 팬들 사이에서의 지지는 가히 절대적이다.18년만에 AFC 아약스로부터 리그 우승컵을 되찾아온 주역이기도 하고, 화려하진 않지만 특유의 꾸준함과 성실함으로 매번 국가대항전 경기 때마다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고, 네덜란드 대표팀이 2000년대 중후반부터 약 10년 간 메이저 대회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줄 때마다 항상 중요한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 유럽 축구선수로선 드물게 독실한 개신교 신자이며 인격적인 면에서의 평가도 괜찮은 편이다. 선수 시절부터 자신의 이름으로 된 재단을 설립하여 장애를 지닌 어린이들을 돕거나 개발 도상국의 어린이들의 교육을 후원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 리버풀에 있을 당시 동료들끼리 레이싱카트를 타러 놀러갔다가 크라우치한테 치일 뻔 했던 적이 있다. 자세한 것은 피터 크라우치 문서 참고.


7.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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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베슬리 스네이더르]] || '''134회''' || 2003.4.30[br](vs 포르투갈) || 2018.9.6[br](vs 페루) ||
|| 2 || [[에드빈 판데르사르]] || '''130회''' || 1995.6.7[br](vs 벨라루스) || 2008.10.15[br](vs 노르웨이) ||
|| 3 || [[프랑크 더부르]] || '''112회''' || 1990.9.26[br](vs 이탈리아) || 2004.6.26[br](vs 스웨덴) ||
|| 4 || [[라파엘 판데르파르트]] || '''109회''' || 2001.10.6[br](vs 안도라) || 2013.11.19[br](vs 콜롬비아) ||
|| 5 || [[지오바니 판브롱크호르스트]] || '''106회''' || 1996.8.31[br](vs 브라질) || 2010.7.11[br](vs 스페인) ||
|| 6 || [[디르크 카윗]] || '''104회''' || 2004.9.3[br](vs 리히텐슈타인) || 2014.9.4[br](vs 이탈리아) ||
|| 7 || [[로빈 판페르시]] || '''102회''' || 2005.6.4[br](vs 루마니아) || 2017.8.31[br](vs 프랑스) ||
|| 8 || [[필립 코퀴]] || '''101회''' || 1996.4.24[br](vs 독일) || 2006.6.25[br](vs 포르투갈) ||
}}}



[1] 덕분에 리버풀은 부족한 득점력을 메우기 위해 또다른 공격수를 영입해야만 했고, 그 결과 리버풀에 입단한 선수가 바로 페르난도 토레스. 하지만 토레스를 영입하기 위한 이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크레이그 벨라미, 지브릴 시세, 마르크 곤살레스, 루이스 가르시아, 플로랑 시나마-퐁골 등 주전급 자원 여러 명을 이적시켜야 했고 이는 팀의 스쿼드가 얇아지는 결과를 초래했다.[2] 출장한 경기 수는 거의 엇비슷하지만 칼루는 처음 이적해왔을 때부터 활약이 변변찮아 서브로 전락해버리며 풀타임 출장 횟수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그에 비해 거의 전 경기 풀타임 출장하는 카윗이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이게 되고 만 것이다.[3] 제라드의 위치를 중미, 혹은 공미로 보느냐에 따라 포메이션이 달라진다.[4] 07/08 때는 라이언 바벨, 08/09 때는 알베르트 리에라, 리에라가 2010년에 방출된 후에는 막시 로드리게스. 이 중에 그나마 막시가 제일 잘하긴 했다.[5] 사실, 실력 차이를 떠나서 플레이 스타일도 따지고 보면 많이 다르다. 물론, 왕성한 활동량과 특유의 성실한 플레이를 보면 많이 비슷하기도 하지만, 카윗은 친정팀인 페예노르트에서 스트라이커로도 많이 뛰었던 만큼이나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의 포스트 플레이에도 능한 모습도 종종 돋보이는 반면에, 박지성은 좌우측면을 휘저으며 스피드를 활용해 상대 수비수를 돌파하는 플레이가 카윗에 비해 조금 더 두드러지는 편. 실력의 차이보다는 아마 이런 플레이 스타일, 그리고 역할의 차이 때문인지 두 선수는 스탯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윙어로 출전한 카윗은 상대 윙플레이어에게 직접 달라붙어 피지컬로 압박하여 공격을 방해하는 플레이는 박지성에 비해 뛰어난 반면에, 박지성은 오히려 뛰어난 축구 지능을 활용하여 패스를 차단하여 곧바로 역습으로 연결시키는 플레이가 카윗에 비해 더 돋보인다. 박지성의 플레이스타일은 사실 제임스 밀너와 좀 더 유사하다. (카윗보다는 미드필더적이고 밀너보다는 포워드적인 움직임을 가져갔다.)[6] 지난 시즌부터 이어 진 리버풀 구단측의 세대교체 움직임으로 출전 기회가 줄었고, 구단 입장에서도 고주급자들을 처리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이적이 결정되었다. 팬 입장에서는 팀에 헌신적이고 필요 할 때 한 건씩 해주는 카윗의 이적이 뼈아프게 다가오는 점이다.[7] 연계가 안 되는 공격진, 공격진에서의 부족한 수비 가담, 그로 인해 풀백과 미드필더진들과의 고립 현상, 수비마저 불안.[8] 2014년 9월 4일 경기[9] 다만 박지성과는 결이 조금 다른데 박지성이 카윗보다 좀 더 지능적이고 섬세한 반면 카윗은 박지성보다 좀 더 투박하다. 물론 득점력은 카윗 쪽이 훨씬 우위다. 그렇다고 박지성이 득점력이 아주 떨어지는 선수는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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