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도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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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명칭
그리스어
Διάδοχοι
영어
Diadochi[1], Successors

1. 개요
2. 대왕의 요절과 분열
3. 제1차 디아도코이 전쟁: 페르디카스 VS 프톨레마이오스
4. 제2차 디아도코이 전쟁: 폴리페르콘 VS 카산드로스
5. 제3차 디아도코이 전쟁: 안티고노스 VS 셀레우코스
6. 제4차 디아도코이 전쟁: 안티고노스 VS 셀레우코스, 리시마코스, (카산드로스) 연합군
7. 3왕국의 정립과 헬레니즘 시대의 끝
8. 기타



1. 개요[편집]


원래는 고대 그리스어후계자들, 계승자들을 의미하는 말이다.

하지만 역사에서 디아도코이라고 하면 대개 알렉산드로스 3세의 사후 헬레니즘 제국의 분열 과정에서 서로 투쟁했던 마케도니아 왕국의 장군들을 가리킨다.


2. 대왕의 요절과 분열[편집]


BC 323년,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 상당 부분을 정복한 위대한 정복군주 알렉산드로스 3세는 바빌론에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4세는 아직 어머니 록사나의 뱃속에 있었고 대왕은 후계자를 지명하지 못하고 요절한다. 일설에 따르면 임종에 가까워질 무렵 알렉산드로스 3세는 잠시 정신을 차렸으며, 부하들이 "누구를 후계자로 정할지 알려 달라"고 묻자 유언으로 이 한 마디를 남겼다고 한다.

"가장 강한 자(kratistos, κράτιστος)에게."


대왕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말을 듣고 급히 달려온 마케도니아 장군들은, 명확한 후계자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하나같이 다른 마음을 먹게 된다. 당시 대왕의 임종을 지켜본 장군들 중 중요한 인물들을 꼽아보면 아래와 같다.


아래는 임종 자리엔 없었지만 중요한 인물들이다.
  • 안티파트로스(Ἀντίπατρος): 마케도니아 본국 섭정, 마케도니아에 거주 중, 장군들 중 최연장자.
  • 카산드로스(Κάσσανδρος ): 안티파트로스의 아들.
  • 크라테로스[2](Κρατερός): 최선임 페제타이로이 지휘관, 킬리키아에 체류 중.[3]
  • 폴리페르콘(Πολυπέρχων): 크라테로스의 부관, 킬리키아에 체류 중.
  • 안티고노스(Ἀντίγονος): 프리기아의 사트라프, 모노프탈모스(Μονόφθαλμος, "애꾸눈")
  • 데메트리오스(Δημήτριος ): 안티고노스의 아들, 폴리오르케테스(Πολιορκητής, "도시 공격자")
[4]

제국은 크게 두 파벌로 나뉘었다. 아르게아스 왕조하에서 통합된 제국을 유지하려는 제국통합파, 제국을 분할해 자신의 왕국을 세우려 하는 제국분할파가 그것이다. 1~2차 전쟁은 제국통합파와 제국분할파의 대결로 볼 수 있고, 3~4차 전쟁은 제국통합파가 몰락한 후 제국분할파 간의 대결로 볼 수 있다. 제국통합파의 대표적인 3인[5]은 서로 다른 이유로 죽었고,[6] 제국분할파의 대표적인 3인[7]은 제국통합파 3인이 죽은 뒤, 공공연히 자신을 왕으로 칭하며 자신의 이름을 딴 왕조를 세우게 된다.

다음 왕이 결정될 때까지 왕을 대리해 회의를 주재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노장 파르메니온과 왕의 측근 헤파이스티온이 사망한 이후 공식적인 2인자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군 직제상 엘리트 근위기병대 헤타이로이의 최선임 천인대장의 서열이 가장 높았고, 그 직위는 페르디카스가 가지고 있었다. 그는 왕의 친위대[8] 중에서도 가장 서열이 높았으며,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받은 왕의 인장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 의미는 왕이 회복할 때까지, 또는 왕이 죽은 뒤 다음 왕이 등극할 때까지 그가 왕을 대리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처음 현안은 다음 왕을 누구로 할 것인가였다. 멜레아그로스는 필리포스 2세의 사생아, 즉 대왕의 이복 동생이었던 필리포스 3세 아리다이오스를 옹립할 것을 주장했지만,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드로스 3세의 자식이 태어나기를 기다려 아들이면 공동 왕으로 옹립하고, 딸이면 필리포스 아리다이오스를 단독 왕으로 옹립하자고 주장했다. 네아르코스는 왕의 사생아 헤라클레스를 왕으로 옹립하자고 제안했다. 그런가 하면 프톨레마이오스는 여러 장군들이 과두정치를 하자고 주장했다.[9] 결국 멜레아그로스는 필리포스 아리다이오스를 앞세워 페르디카스를 공격했으나 페르디카스를 비롯한 장군들은 모두 도망가 버렸고 에우메네스만 남아[10] 멜레아그로스와 페르디카스를 중재하려고 노력했다.

결국 록사네는 아들을 낳았고 양측의 입장을 절충하여 아리다이오스와 갓난 아들 알렉산드로스를 각각 필리포스 3세[11]알렉산드로스 4세로 옹립하였다. 하지만 필리포스 3세는 뇌전증 환자였고, 알렉산드로스 4세는 갓난아기였기에 페르디카스가 제국 섭정이 되고 멜레아그로스가 그를 보좌하기로 했다. 하지만 페르디카스는 곧 자신을 죽이려 한 멜레아그로스를 살해하고 전권을 차지했다.

파일:Diadochi satraps babylon.png
지역
직책
인물
바빌로니아
국왕
필리포스 3세 아리다이오스
알렉산드로스 4세
섭정
페르디카스
태수
아르콘
마케도니아
일리리아
(에페이로스)
(그리스)
섭정
안티파트로스
크라테로스
트라키아
태수
리시마코스
소(小) 프리기아
태수
레온나토스
대(大) 프리기아
팜필리아
리키아
태수
안티고노스
카리아
태수
아산드로스
리디아
태수
메난드로스
(카파도키아)
(파플라고니아)
태수
에우메네스
킬리키아
태수
필로타스
이집트
태수
프톨레마이오스

권력을 잡은 페르디카스는 바빌론에서 장군들에게 제국 각지의 사트라프 자리를 분배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때 이집트를 받아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에우메네스를 제외한 모든 유력 장군들이 마케도니아인이었으므로 마케도니아의 향방이 중요해졌는데, 당시 마케도니아 섭정은 안티파트로스였고 크라테로스가 그의 후임 섭정으로 임명받아 마케도니아에 귀국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3세의 부고와 함께 그 명령은 무의미해졌고, 결국 마케도니아는 안티파트로스와 크라테로스가 공동 통치하기로 했다. 마침 알렉산드로스 3세의 부고를 틈타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폴리스들이 반란을 일으켜 안티파트로스를 라미아 요새에 고립시켰지만 레온나토스가 이끄는 지원군 덕분에 안티파트로스는 탈출하였고[12] 크라테로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군에 합류하여 크란논 전투에서 반란군을 참패시켰는데, 이를 라미아 전쟁이라고 한다.


3. 제1차 디아도코이 전쟁: 페르디카스 VS 프톨레마이오스[편집]


최고 지위를 차지한 페르디카스는 권력욕이 심해져 아내와 이혼하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누이였던 클레오파트라 공주와 재혼하려고 했는데, 그 이혼당한 아내가 안티파트로스의 딸이었으므로 그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이에 안티파트로스와 크라테로스, 안티고노스, 프톨레마이오스가 남몰래 손잡고 페르디카스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기로 했다. BC 320년 프톨레마이오스의 군대가 대왕의 관을 마케도니아 아이가이(Aigai)의 왕실 묘지로 운구하던 페르디카스 측 군대를 습격하여 관을 탈취[13][14] 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페르디카스는 여러 번 대왕의 시신을 반환할 것을 요구했으나 프톨레마이오스는 거절했다. 이는 페르디카스가 주도하는 제국통합을 반대한다는 뜻이었으므로 페르디카스는 이를 진압해야만 했다. 통합된 제국을 유지하고자 했던 에우메네스가 페르디카스의 명에 따라 반란자들 중 하나인 마케도니아 공동 섭정 크라테로스를 헬레스폰토스 전투에서 죽이며 분전했지만,[15] 대왕의 시신을 되찾기 위하여 이집트로 쳐들어갔던 페르디카스가 나일 강을 건너는 데 번번이 실패했고 결국 다른 마음을 품은 부하들[16]에게 갑작스레 암살되면서 1차 디아도코이 전쟁은 제국통합파의 영수였던 페르디카스의 패배로 마무리되었다.

이후 트리파라데이소스(Triparadisus) 협정을 통해 전후 처리가 이루어졌다. 새 섭정은 안티파트로스가 되었으며 두 왕[17]은 마케도니아로 이송되었다. 사트라프 자리도 재분배되었는데, 리시마코스트라키아를 받았고, 페르디카스 암살에 일조한 셀레우코스가 바빌로니아를, 페이톤이 메디아를, 안티게네스가 수사 일대를 받았다.


4. 제2차 디아도코이 전쟁: 폴리페르콘 VS 카산드로스[편집]


트리파라데이소스 협정에서 장군들은 페르디카스의 명령에 따라 크라테로스를 죽인 에우메네스를 없애기로 합의했다. 이에 BC 319년, 안티고노스가 대군을 이끌고 카파도키아에 있던 에우메네스를 공격하여 그를 노라라는 산악 요새에 고립시켰다.[18] 하지만 마케도니아에서 섭정 안티파트로스가 사망하면서 새 섭정으로 폴리페르콘을 지명했고, 동맹할 만한 세력을 찾던 폴리페르콘이 에우메네스와 손을 잡고 그를 지원하였으므로 에우메네스는 무사히 탈출했다.

안티파트로스의 아들이던 카산드로스는 자신을 제치고 폴리페르콘이 섭정이 된 것에 불만을 가졌다. 그는 폴리페르콘에 맞서기 위해 안티고노스, 리시마코스, 프톨레마이오스 등과 동맹을 맺었다.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일대에서 벌어진 내전에서 카산드로스가 승리했고, 패배한 폴리페르콘은 어린 알렉산드로스 4세와 록사나를 데리고 알렉산드로스 3세의 어머니인 올림피아스와 함께 자신의 고향인 에페이로스로 탈출했다. 에페이로스에서 군세를 정비한 폴리페르콘과 올림피아스는 마케도니아를 다시 침공했고, 올림피아스는 필리포스 3세와 그 아내 에우리디케를 생포하여 죽여버렸다. 하지만 그들은 카산드로스에게 또 다시 기원전 316년 피드나 전투에서 패배했고, 카산드로스는 올림피아스를 왕을 죽인 죄로 재판에 부쳐 처형시킨 후 마케도니아를 장악하였다.

안티고노스에게서 탈출한 에우메네스는 메소포타미아로 이동하여 군세를 재정비했지만, 문관 출신에다 그리스인이라는 이유로 다른 장군들이나 부하들로부터 경원시되었다. 그 탓으로 안티고노스에게 점점 밀리다가 전투에선 이겼지만 결과적으론 무승부였던 두 차례의 큰 전투[19] 이후 결국 BC 316년 안티고노스의 사주를 받은 자기 부하들에게 사로잡힌 에우메네스는 안티고노스에게 인도되어 처형당했고, 안티고노스는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이란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장악했다. 이때 바빌론의 사트라프로 있던 셀레우코스는 안티고노스가 메소포타미아로 오자 알아서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에게로 도망쳤다.

이 때문에 당시 안티고노스의 영토는 바빌로니아를 포함할 정도로 절정을 찍었다.《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눈물》이라는 책에서 나온 당시 디아도코이들 간의 영토를 보면 알렉산드로스 3세가 생전 정복한 인도 영역까지 전부 안티고노스 영토로 포함되어 있다.[20] 단순 영토 크기만 보면 안티오코스 3세 메가스 전성기 시절 셀레우코스 왕조와 비슷하거나 크다.


5. 제3차 디아도코이 전쟁: 안티고노스 VS 셀레우코스[편집]


이처럼 안티고노스의 세력이 너무 강해지자 BC 314년 프톨레마이오스, 카산드로스, 리시마코스가 손을 잡고 안티고노스와 맞섰다. 하지만 안티고노스는 이에 맞서 영토를 더욱 확장하는 한편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잔존해 있던 폴리페르콘 세력과 연합했다.[21] 이에 카산드로스와 리시마코스가 아나톨리아를 공격했고, 안티고노스는 이를 격퇴하기 위해 북진했다. 하지만 BC 312년 안티고노스의 아들 데메트리오스가자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에게 패배하고, 프톨레마이오스의 지원을 받은 셀레우코스가 바빌론을 수복하자 안티고노스는 다시 남하해야 했다. 이쯤 되자 안티고노스와 프톨레마이오스 모두 휴전을 바라게 되었고, 결국 카산드로스-리시마코스-프톨레마이오스와 안티고노스는 휴전 협정을 맺었다.

이 휴전 협정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왜냐하면 이 협정은 마케도니아의 카산드로스, 트라키아의 리시마코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아나톨리아와 시리아의 안티고노스가 모두 외교 관계를 수립할 수 있을 정도로 독자적인 세력을 가졌음을 공인한 것이었기 때문이다.[22] 실제로 카산드로스는 이 협정 이후 별 필요가 없어진 알렉산드로스 3세의 마지막 혈육 알렉산드로스 4세와 그 모친 록사나를 죽여버렸다. 그리고 폴리페르콘을 보내 알렉산드로스 3세의 사생아이자 그의 마지막 자손이었던 헤라클레스마저 독살함으로써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대는 단절되었다.[23] 한편 바빌론을 차지한 셀레우코스는 동쪽으로 계속해서 영향력을 확대했고, 안티고노스는 그를 저지하기 위해 BC 311년부터 309년까지 바빌론 전쟁을 치뤘으나 이기지 못했다.

휴전 협정으로 잠시 숨을 돌리자 디아도코이들은 곧바로 딴 생각들을 품었다. BC 308년 카산드로스는 폴리페르콘과 화해했고, 이에 그리스의 폴리스들이 동요하자 프톨레마이오스가 안티고노스와 은근슬쩍 손을 잡고 에게 해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쳐들어갔다. 하지만 별 성과를 얻지는 못 했고 안티고노스와의 협력도 곧 무산되었다. BC 307년 카산드로스가 에페이로스에 간 사이 데메트리오스가 아테네를 점령했고, BC 306년에는 키프로스로 쳐들어가 프톨레마이오스의 군대를 연속으로 격파하고 키프로스를 장악했다. 이때부터 안티고노스와 데메트리오스는 공공연히 을 칭하기 시작했고, 카산드로스, 리시마코스, 프톨레마이오스, 셀레우코스도 뒤질세라 왕위를 자칭했다.[24]

카산드로스와 프톨레마이오스 1세에게 모두 한 방씩 먹인 데메트리오스 1세는 BC 305년 로도스를 공격했고, 엄청나게 거대한 공성탑 헬레폴리스를 동원하기도 했지만 로도스의 강력한 저항과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보낸 지원군에 막혀 결국 로도스를 함락하는 데는 실패했다. 대신 로도스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를 공격할 때만 빼면 안티고노스 1세를 지원할 것을 약속해야 했다.[25] 데메트리오스 1세는 그리스로 돌아가 자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폴리스 동맹을 창설했고, 궁지에 몰린 카산드로스는 휴전 협정을 시도했으나 무산되었다.


6. 제4차 디아도코이 전쟁: 안티고노스 VS 셀레우코스, 리시마코스, (카산드로스) 연합군[편집]


파일:터키 디아도코이.png
입소스 전투 직전 디아도코이들의 영역.

이에 카산드로스는 안티고노스 1세를 대적하기 위해 리시마코스와 프톨레마이오스 1세, 셀레우코스 1세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가장 가까운 트라키아에 있던 리시마코스가 아나톨리아 반도에 침입하자 그리스의 데메트리오스 1세는 부친 안티고노스 1세를 돕기 위해 아나톨리아로 철수했다. 아나톨리아를 휩쓸고 다니던 리시마코스의 군대는 입소스에서 안티고노스 1세와 데메트리오스 1세의 군대에 의해 고립되었는데, 때마침 셀레우코스 1세의 군대가 당도하여 양측 사이에 대전투가 벌어졌다. 이것이 BC 301년 벌어진 입소스 전투로써, 디아도코이 전쟁 가운데 가장 큰 규모였으며, 셀레우코스 1세의 압승으로 끝났다. 당시 70대 중반의 노인이던 안티고노스 1세는 전사했고, 데메트리오스 1세만 패잔병을 이끌고 겨우 그리스로 탈출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셀레우코스의 역습"이 가능했던 것은 서방에서 디아도코이들끼리 각축전을 벌이는 동안 셀레우코스 1세는 큰 방해를 받지 않고 땅따먹기 하듯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동방 영토를 차례차례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를 저지할 만한 유일한 세력은 한창 인도 전역을 석권하고 있던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마우리아 왕조였는데, 셀레우코스 1세는 찬드라굽타가 차지한 동방 영토를 공격하려다[26] 휴전하고 BC 303년 동맹을 맺었다. 이 결과 셀레우코스 1세는 아라코시아와 게드로시아, 드랑기아나 및 그 외의 모든 인도 접경 영토를 포기하고, 딸을 찬드라굽타와 결혼시키는 대신 코끼리 500마리를 받았다.[27] 이로써 다소 굴욕적이긴 하나 큰 손해 없이 안정된 동방 영토를 차지한 셀레우코스 1세는 기본적인 수적 우위에 더해 페르시아 기병과 인도 코끼리까지 동원한 압도적인 전력으로 안티고노스 1세에게 결정타를 가할 수 있었다.[28]

또한 셀레우코스 1세와 안티고노스 1세의 인망 차이도 큰 영향을 미쳤다. 셀레우코스 1세는 바빌론의 사트라프로 있을 때 바빌론 주민들의 인망을 얻어 안티고노스 1세에게 밀려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있던 이집트로 도망쳤다가 돌아올 때, 바빌론 주민들은 그를 열렬히 환영하고 니카토르(= 승리자)라는 칭호까지 바쳤다. 그래서 셀레우코스 1세는 원정을 나갈 때도 바빌론 지역에는 최소한의 경비 병력만 남기고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안티고노스 1세는 난폭한 성정 때문에 주민들의 인망을 사지 못했고 그가 죽자 그의 영토는 별 저항 없이 셀레우코스 1세에게 접수된다.

입소스 전투 이후 안티고노스 1세의 영토는 승자들이 나누어 가졌다. 리시마코스가 아나톨리아 서부를,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유대를 차지했으며, 킬리키아와 뤼키아는 카산드로스의 형제인 플레이스타르코스에게 돌아갔다. 패배한 데메트리오스 1세는 테살리아, 그리스 일부, 키프로스 섬 정도만 겨우 유지할 수 있었다. 그 나머지는 모두 셀레우코스 1세가 차지했다. 이 시기를 마케도니아의 안티파트로스 왕조 / 트라키아의 리시마코스 왕조 /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 아시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4왕국이 정립된 시기라 하여 "알렉산드로스 제국은 4개의 왕국으로 분열되었다."라고 설명을 마치기도 하지만, 아래 서술대로 안티파트로스 왕조와 리시마코스 왕조는 이후 역사의 무대에서 그야말로 광탈하고 몰락한 안티고노스 왕조가 부활하므로 이후 3왕국의 정립까지 적는다.


7. 3왕국의 정립과 헬레니즘 시대의 끝[편집]


파일:헬레니즘 터키.png
입소스 전투 직후의 정세

입소스 전투 이후에는 주로 마케도니아가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지가 문제가 되었다. 패잔병들을 이끌고 그리스로 돌아온 데메트리오스 1세는 재기를 노렸고, 카산드로스의 동생인 플레이스타르코스로부터 리키아와 킬리키아를 빼앗았다. BC 297년 카산드로스가 병으로 죽었고, 3년 후 BC 294년에 그 아들인 안티파트로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5세 사이에 내분이 일어났는데, 이때 알렉산드로스 5세가 데메트리오스 1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데메트리오스 1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쳐들어가 알렉산드로스 5세를 죽이고 마케도니아를 점령했다. 안티파트로스 2세는 리시마코스에게 의탁했으나, 리시마코스는 오히려 안티파트로스 2세를 죽인 후 데메트리오스 1세와 협상해 그의 마케도니아 지배를 인정했다. 이로써 안티파트로스 왕조는 3대만에 멸망했다.

데메트리오스 1세가 마케도니아에 원정하는 틈을 타,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키프로스와 리키아를, 셀레우코스 1세는 킬리키아를 뺏어갔다. BC 287년, 데메트리오스 1세는 에피루스피로스 1세에 의해 마케도니아에서도 쫓겨나 궁지에 몰렸다. 하지만 피로스는 마케도니아 지배를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리시마코스에게 쫓겨났으며, 마침내 마케도니아는 리시마코스의 차지가 되었다. 쫓겨난 데메트리오스 1세는 아들인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에게 그리스와 테살리아를 맡기고, 아나톨리아를 침공하며 재기를 노렸으나, 패배하고 셀레우코스 1세의 포로가 되어 몇 년후에 죽었다.

BC 283년,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가 숨을 거두었다. 그에게는 큰아들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와 작은아들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가 있었는데, 후계 싸움에서 밀린 케라우노스가 리시마코스에게 의탁한 상태였기 때문에 필라델포스가 왕위에 올라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되었다. 그해, 리시마코스는 자기의 셋째 부인인 아르시노에의 말에 속아 첫째 부인 소생의 아들인 아가토클레스를 죽였고, 아가토클레스의 부인이자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딸이었던 리산드라는 셀레우코스 1세에게로 도주했다. 셀레우코스 1세는 리시마코스 왕가의 내분을 기회로 삼아 아들인 안티오코스를 내정 대리인으로 임명한 뒤 리시마코스를 공격하여 BC 281년 코루페디온 전투에서 그를 죽이고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 이후 케라우노스는 승리자인 셀레우코스 1세 진영에 합류했으나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다. 셀레우코스 1세가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트라키아에 상륙했을 때, 케라우노스는 그를 암살하고 마케도니아의 왕을 칭했다.

리시마코스와 셀레우코스 1세가 모두 전사하며 권력의 공백이 생긴 마케도니아에서 리시마코스의 잔당들과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가 싸우던 도중[29], 마침 동방으로 대규모 이주하던 켈트 부족들이 그 힘의 공백을 틈타 마케도니아, 그리스, 아나톨리아로 쇄도해 왔다. BC 279년, 케라우노스는 이 전쟁에서 켈트 약탈자들에게 패배해 살해당했으며, 마케도니아는 정치적 공백 상태에서 군인들이 왕을 옹립하고 갈아치우는 혼란에 빠졌다. 이때 그리스에서 근근이 버티고 있던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가 본격적인 반격에 나서 BC 277년 리시마케이아 전투에서 켈트인들을 몰아내고, 나머지 켈트인들이 아나톨리아 중부의 갈라티아에 정착하면서 마케도니아는 겨우 안정되었다.[30]

BC 272년 마케도니아를 호시탐탐 노리던 에피루스피로스 1세가 전사하면서[31] 마케도니아는 확고한 안티고노스 왕조의 땅이 되었다. 이로써 알렉산드로스 3세 사후 50년가량 계속되던 배틀로얄은 종료되고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왕조,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아시아의 셀레우코스 왕조라는 3왕국 체제가 완성되었다. 또한 이 3왕국에서 1세대(디아도코이) → 2세대(에피고노이)[32]의 왕위 계승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면서[33] 왕조 체제 역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파일:attachment/diadochi_275.png
BC 275년경 3왕국의 판도. 이 지도에는 파르티아 영토가 표시되어 있는데 정확히 말하면 이때는 아르사케스 왕조가 파르티아를 차지하기 전이었다. 그리고 마우리아 왕조가 영조를 더 넒혔는데, 탁사실라 분파의 영역 확장이다.

이 세 왕국들을 보통 헬레니즘 왕조 혹은 계승자 국가(Successor States), 디아도코이 왕조 혹은 에피고노이 왕조라고 한다.


아래는 엄밀히 말하면 디아도코이에 해당하지는 않지만, 후대에 성립된 헬레니즘 계열 왕조들이다.


파일:터키 포에니.png
기원전 218년, 로마가 막 성장할 무렵의 지중해 판도

그 후 이 디아도코이 제국들은 지중해 동부의 패권을 놓고 수세기 동안 각축전을 벌였지만, 이러한 혼란을 정리한 자는 동쪽이 아닌 서쪽에서 넘어왔다. 지중해 서부를 평정한 로마가 동부로 세력을 뻗쳤기 때문. 로마는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왕조를 시작으로 계승자 왕조들을 차례대로 정복해 나갔고,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마지막으로 모든 디아도코이 제국들은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한편 전성기 셀레우코스 제국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메소포타미아 등 동방 영토는 파르티아에 의해 정복되었다.

그렇게 제2의 알렉산드로스를 목표로 한 수많은 실력자들이 군웅할거하던 디아도코이의 시대는, 로마와 파르티아라는 두 외세에 의해 막을 내렸다.


8. 기타[편집]


로마: 토탈 워 희대의 모드인 Europa Barbarorum에 이 시대가 배경이 된다. EB와 토탈 워: 로마2의 시작 시기가 바로 BC 272년.

패독사의 임페라토르: 롬는 정확하게 디아도코이 시기를 다루는 게임이다. 기원전 304년에 시작하는 게임이다.

만화《히스토리에》가 이 시기를 다룰 것이 확실시된다. 다만 아직 연재 속도 문제로 아직 알렉산드로스는커녕 필리포스 2세도 안 죽었다(...).

2013년 2월에는 이 시기를 다룬 사서인《지중해 삼국지》가 출간 되었다. 세력 분포 등을 표시한 지도가 챕터별로 수록되어 있어서 복잡한 세력 판도를 정리하기 좋으니 관심이 있을 경우 참고하면 좋다. 위에도 언급된《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눈물》이라는 서적도 참고할 만하다.

팟캐스트 [휴식을 위한 지식]전쟁사 문명사 세계사 49 ~ 51화에서도 이 디아도코이에 대해 다루었는데, 나름 정리를 잘 했기 때문에 참고할 만하다.

디아도코이를 무대로 한 보드게임도 있다. 대표적인 워게임 제작사 GMT에서 출시한 <후계자들> 3판이 있고 팔랑크스라는 제작사에서 킥스타터로 펀딩을 진행해 4판을 제작해 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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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이'애더키 처럼 발음된다.[2] 알렉산드로스 3세의 유언인 가장 강한 자(kratistos, 크라티스토스, κράτιστος)가 사실은 "크라테로스를 말하려던 게 아니었을까?" 하는 가설도 있다.[3] 안티파트로스의 후임으로 마케도니아 섭정 자리를 이어 받기 위해 본국으로 귀환하는 중이었다.[4] 단, 안티고노스를 제외한 인물들은 아직 별명들을 얻기 전이었다.[5] 페르디카스, 에우메네스, 안티파트로스[6] 암살, 사형, 노환[7] 프톨레마이오스, 셀레우코스, 안티고노스[8] 알렉산드로스의 최측근 장교 7인. 멤버는 헤파이스티온, 페르디카스, 프톨레마이오스, 아리스토누스, 페우케스타스, 레온나토스, 페이톤, 리시마코스[9] 장군 중 최선임자인 페르디카스를 견제하려는 제안이었다. 결국 페르디카스와의 정쟁에서 이기게 된다.[10] 에우메네스는 그리스인이라는 자신의 약점을 역이용해 자신은 외국인이기 때문에 권력 투쟁에 관계없으며 따라서 중립적으로 중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멜레아그로스가 장군이 아닌 문관인 자신까지 죽일 리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11] 필리포스 3세 아리다이오스[12] 정작 레온나토스 자신은 적들과 싸우다가 전사했다.[13] 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시체를 방부 처리하여 정치 상징으로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보존 처리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시신은 황금으로 된 관에 안치되어 화려한 무덤에 매장되었다. 하지만 훗날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그의 무덤을 도굴해서 부장품들과 황금관을 쓸었고 그의 시신은 유리관으로 옮겨진 뒤 프톨레마이오스의 궁전 속 신전으로 이장되었다. 그 후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참배한 기록이 있었으나, 서기 5세기 이후에는 자연재해로 신전이 바닷속으로 잠기는 바람에 역사 기록에서 사라져서 현재는 행방을 알 수 없다. 구 소련이나 북한 등 공산권 국가에서 지도자의 시신을 영구보존처리하여 정치상징으로 써먹는 행위의 원조가 바로 이것이다. 즉, 훌륭한 시체팔이.[14] 알렉산드로스 3세는 생전에 이미 신격화된 존재였고 그가 묻히는 땅은 번성하리하는 신탁도 있었으며 그를 동경하는 젊은이들이 모여든다는 부가 효과도 있었다. 그리고 아르게아스 왕조의 초대 군주 페르디카스 1세가 아이가이에 왕가의 묘지를 만들라고 아들 아르가이오스에게 명하면서, 마케도니아의 모든 왕은 그곳에 묻혀야 하며 다른 곳에 묻힐 경우 왕조가 끝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어쨌든 알렉산드로스 3세는 아이가이에 묻히지 않았고, 아르게아스 왕조도 단절된다.[15] 이 대사건에 많은 마케도니아인들이 경악했다. 페르디카스조차 에우메네스가 크라테로스를 이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시간을 끌어줄 것을 기대했을 정도다. 이 사실이 페르디카스에게 전해졌다면 암살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16] 셀레우코스, 페이톤, 안티게네스[17] 필리포스 3세알렉산드로스 4세[18] 노라 공방전[19] 기원전 317년의 파라이타케네 전투, 기원전 316년의 가비에네 전투[20] 안티고노스가 격파한 에우메네스 연합군에 동방 태수들이 대거 참가해 있었기 때문에 그렇다. 에우메네스를 격파하면서 안티고노스는 자연스럽게 동방 지역에 대한 종주권도 획득할 수 있었다.[21] 다만 폴리페르콘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거점들에 틀어박혀 BC 303년 사망할 때까지 별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22] 사실상 독자적인 왕국[23] 카산드로스는 기원전 301년에 병사했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저주라도 내린 것인지 그의 자손들은 요절하거나 내분으로 연이어 피살되었다. 그리고 안티고노스 1세의 아들 도시 공격자 데메트리오스 1세에 의해 가문이 멸족되면서 카산드로스는 아르게아스 왕가의 대를 끊은 댓가를 제대로 치르고 말았다.[24] 셀레우코스와 프톨레마이오스는 그리스-마케도니아인이 아닌 토착민들을 상대로 진작부터 왕으로 행세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 근거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이후 셀레우코스 왕조파르티아에서 사용했던 연호를 보면 셀레우코스가 안티고노스로부터 바빌론을 탈환했던 BC 311년을 원년으로 삼고 있다.[25] 데메트리오스 1세의 별명인 폴리오르케테스(= 도시 공격자)와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별명인 소테르(= 구원자)가 이때 얻은 것이다. 그리고 로도스는 데메트리오스 1세가 남기고 간 공성탑 헬레폴리스 등을 처분한 돈으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로도스의 거상을 건축해 도시의 수호신 헬리오스에게 봉헌한다.[26]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한 사료는 남아있지 않다. 아피아노스는 둘이 전쟁하다 "서로를 이해하게 되어" 동맹을 맺었다고 쓰고 있다. 하지만 아래 서술하듯 셀레우코스 1세가 영토를 꽤 많이 떼 준 것을 보면 그의 공격 시도가 성공적이지 못했음은 짐작할 수 있다. 일단 병력차가 너무나도 컸는데, 마우리아 왕조의 상비군은 60만 보병, 3만 기병, 9천 코끼리 부대였다고 한다. 이 중에 1/4이라도 셀레우코스 왕조군보다 많은 수준이다.[27] 다만 일부 의견에선 정말로 이해가 맞아서 그만두었을 확률도 제법 있다고 나온다.[28] 셀레우코스 1세는 다른 마케도니아인들이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절 결혼한 페르시아 아내와 이혼할 때 끝까지 이혼하지 않았고, 자신의 후계자 역시 페르시아 아내와의 혼혈인 아들 안티오코스를 선택한 인물이다. 페르시아 기병대에 호감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29] 이는 나중에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3세가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트라키아 일대를 차지한 로마를 공격하는 명분이 된다. 셀레우코스 왕조는 리시마코스 왕조와 싸워 이겼기 때문에 그 영토인 트라키아 지역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정당한 전리품이라는 논리였다.[30] 몇몇은 이집트까지 내려가 용병 생활을 했다.[31]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가 다른 적들과 싸우는 동안 피로스 1세이탈리아에 건너가 로마와 싸우고 있었다. BC 275년 피로스 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베네벤툼 전투에서 패하고 에피루스로 철수한 피로스 1세는 BC 274년 아오오스 강 전투에서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를 격파하고 일시적으로 마케도니아를 제패했다. 하지만 BC 272년 스파르타의 왕을 갈아치워 그리스 폴리스들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려고 스파르타를 포위했다가, 스파르타의 격렬한 저항과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의 지원 때문에 실패하고, 이어지는 아르고스 시가전에서 안티고노스 2세에게 패해 전사하고 말았다. 피로스의 승리 패턴을 그대로 반복했다[32] 디아도코이는 계승자, 에피고노이는 후손을 뜻한다.[33] 안티고노스 왕조의 경우에는 3세대[34] 아제르바이잔의 전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