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나발로나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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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라나발로나1세.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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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navalona I
생몰년: 1778년~1861년 8월 16일(향년 83세)
재위 기간: 1828년 8월 11일~1861년 8월 16일(33년 5일)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편집]


메리나 왕국[2]여왕. 재위 동안 왕국의 인구를 절반으로 줄여 폭군 중의 폭군으로 꼽히는 여왕이다.


2. 생애[편집]


1778년 아바드라노(Avadrano) 왕국[3]의 안드리안자피(Andrianjafy) 왕[4]의 조카로 태어났으며, 원래 그녀는 메리나 국왕 라다마 1세(Radama I)의 15살 연상의 왕비였고, 라다마 1세와의 사이에서는 자식이 없었다. 남편 라다마 1세가 후사 없이 죽자 그녀가 남편을 계승해 왕위에 올랐다[5]. 그녀의 본명은 라마보(Ramavo)였지만 "접혀진/치워진"이란 뜻의 라나발로나를 왕명(王名)으로 삼았다.

라나발로나 1세는 여왕 즉위 후 장교 안드리아미하자(Andriamihaja)를 총리 겸 애인으로 삼고 그와의 사이에서 아들 라다마 2세를 낳았으나[6] 1831년 안드리아미하자를 반역죄로 처형했다. 1833년 라이니하로(Rainiharo)를 정식 남편 겸 총리로 삼았고 19년 후 그가 죽자 라이니조하리(Rainijohary)와 또 재혼했다.

라나발로나 1세는 재위 동안 무역 관계 등 서구와의 관계를 거의 완전히 끊고는 서구 열강이 배후에 있는 기독교를 탄압하면서 기독교 탄압으로만 15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는데, 그녀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일화로 라나발로나는 15명의 기독교 지도자들을 궁전 근처에 있는, 바위로 가득 찬 협곡 150피트(약 45.7m) 상공에 밧줄로 매달고는 그들에게 개종하라고 했는데, 이들이 개종을 거부하자 밧줄을 매단 채 이들을 모두 공개 처형했다고 한다.[7]

또 라나발로나 1세는 마다가스카르 영토 확장과 자신의 지배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내전을 벌여 정복한 속주마다 초목과 식량을 모조리 불태워 없애는 무자비한 초토화 작전을 벌이고는 대량으로 처형하거나 노예로 만들었고, 이 과정에서 생존한 사람들도 상당수가 기근으로 목숨을 잃었으며, 라나발로나 1세는 군인들로 하어금 학살 후 정복한 속주에 있던 귀중품들을 약탈하게 해 자신의 재산을 축적했다.

특히 라나발로나 1세는 탄게나(tangena)라는 관목의 열매에서 독을 추출하고 그 독을 세 조각의 닭 껍질과 함께 범죄 혐의가 있는 사람에게 강제로 먹인 후 억지로 물을 먹이고는 닭 껍질을 모두 토해내면 무죄, 모두 토해내지 않거나 죽으면 유죄로 판단하는 마다가스카르의 전통적 관행이던 '탄게나 시련'을 이전보다 더욱 확장시켜 단순히(?) 범죄를 저지른 평민이나 노예 뿐만 아니라 궁정의 사람들에게도 적용했는데, 이렇게 그녀가 집권할 적게 잡아도 33년 동안 평균 3천 명, 많게는 20~40만 명이 '탄게나 시련'으로 죽었으며, 심지어 1838년 한 해에만 메리나 왕국의 인구의 1/5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백성들뿐만 아니라 군인들도 엄청나게 죽어나갔는데, 특히 마다가스카르 섬의 해안 지역에 만연했던 말라리아로 인해 죽는 군인들이 많았다.

이렇듯 라나발로나의 학정이 너무 가혹했던 나머지 마다가스카르의 인구는 1833년부터 1839년까지 단 6년 만에 외부의 침략 하나 없이 500만 명에서 250만 명, 즉 절반으로 줄었으며, 1829년부터 1842년까지 수도 안타나나리보의 인구는 75만 명에서 13만 명으로 급락했다. 참고로 마다가스카르의 인구는 그녀의 사망으로부터 약 한 세기 후인 1960년에야 겨우 500만 명을 넘기게 되었다.[8] 심지어 학살 기간 동안 출생한 신생아 수까지 고려하면 실질적인 학살 피해자는 250만 명보다 많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9]

다만 오늘날에는 그녀의 정치적 행보가 마다가스카르를 서양 세력의 영향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자립 정책 실시와 나라 확장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고육지책이었다는 재평가도 있으며, 라나발로나 1세가 집권할 동안 무분별한 학살만 한 것은 아니다. 영국 선교사들은 교육과 산업화에만 몰두하는 한 메리나 왕국에 있는 것이 허용되었고, 프랑스인에게 의뢰해 총을 제공한 후 제조법을 배우게 하거나 야금술, 화학 산업을 받아들이는 등 수많은 서구의 기술 혁신들을 받아들였고, 영어-말라가시어 사전 편찬을 주도하고 어학 학교도 세워 훗날에 마다가스카르 외교에 중대한 역할을 할 후학들을 양성하기도 했고, 메리나 왕국의 온 유럽인들에게 정지적으로 전통 춤을 보여주거나 전통 건축과 음악을 부흥시키는 업적도 남겼다.

1861년 8월 16일 라나발로나 1세는 그녀의 오만 악행에도 불구하고 비참하게 죽기는커녕 권력과 부귀영화를 계속 누려오다가 향년 83세까지 천수를 누리고는 잠을 자다 평온하게 사망했는데, 그녀의 장례식 중 화약통에 불꽃이 떨어져 일어난 폭발과 화재로 많은 구경꾼들이 사망했다고 한다. 그녀의 사후 그녀의 아들 라다마 2세가 즉위했는데, 라다마 2세는 어머니의 고립주의 정책과 기독교 박해를 거부하고 서방권에 개방 정책을 펼치다가 이에 반발한 신하들과 군인들의 쿠데타로 1863년 군인들에게 목이 졸려 살해되었다.

그녀의 무덤은 프랑스가 마다가스카르를 점령한 1897년 마다가스카르를 위협하고 왕실의 힘에 대한 마다가스카르 주민들의 믿음을 파괴하려는 목적으로 프랑스 정착민들에게 도굴당한 후 시신은 다른 곳으로 이장되었다고 한다.[10]

네덜란드어 위키백과의 '마다가스카르의 라나발로나 1세' 항목. 라나발로나 1세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나온다.


3. 기타[편집]


  • 그녀의 학살 기록은 인구 손실 비율, 규모 모두 폴 포트 능가하는 수준이다. 폴 포트는 집권한 4년 동안 인구를 672.8만 명에서 605.2만 명 정도로, 이전의 10% 정도밖에(?) 줄이지 못해 라나발로나 1세의 기록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리고 인류 역사상 외침과 기근[11]이 없는 인구 감소 면에서 그녀와 비교할 만한 지도자는 적도 기니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 정도밖에 없다.

응게마는 '아프리카의 폴 포트'라고 불릴 정도로 극악무도한 학정을 저질러 그가 집권할 직후에 인구가 32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던 나라에서 그가 쿠데타로 축출될 때까지 5만~8만 명이 죽고 1만 명이 실종된 데다가 10~15만 명이 해외로 도피하여 인구의 50~75% 가량이 증발해버렸다. 그러나 이는 10년 동안의 누적 수치라 실제로는 이전의 25%가 준 24만 명으로 인구가 줄었다.[12]

  • 1845년에는 5만 명의 백성에게 버팔로 사냥을 하라고 명령했는데, 이 사냥을 위해 정글을 가로질러 도로를 건설해야 했지만 4개월에 걸친 사냥 과정에서 약 1만 명이 피로, 기아, 말라리아 질병으로 사망한 것과 달리 사냥해야 할 버팔로는 단 한 마리도 죽지 않았다고 한다. #


  • 해외 인터넷에서 라나발로나 1세의 컬러 초상화인 것처럼 돌아다니는 그림이 있는데, 사실 이는 라나발로나 3세가 1893년 찍은 사진을 모사한 것이다. 라나발로나 1세는 생전에 사진은 커녕 초상화도 남기지 않았으며, 상단의 초상화와 1875년 그려진 판화는 그녀의 사후에야 그려진 상상화이다.

  • 죽을 때까지 문맹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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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전에 그려진 초상화가 아닌, 사후인 1905년 그려진 초상화다.[2] 오늘날의 마다가스카르 지역에 있던 왕국이다.[3] 메리나 왕국이 4분할 되었을 때의 왕국 중 하나로, 오늘날 마다가스카르의 중부 고원에 있었다.[4] ?~1787, 조카만큼은 아니었어도 만만찮은 폭군이었다고 한다.[5] 이에 대해서는 라나발로나가 남편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있다.[6] 라다마 2세의 아버지는 라다마 1세로 공표되었지만 라다마 1세가 1828년 7월 죽었는데 라다마 2세는 1829년 9월 태어났다. 14개월 전후의 임신 기간을 갖는 동물은 기린이나 범고래 정도 뿐이므로 라나발로나가 다른 남자와 간통하여 자식을 낳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런데 그게 맞다면 라나발로나는 51세라다마를 낳았다는 소리가 된다.[7] 오늘날 이 자리에는 이들의 순교를 기리기 위한 대성당이 건설되었다.[8] 즉 마다가스카르는 이전의 인구를 회복하는 데 무려 120년 이상이 걸렸다는 소리다![9] 마다가스카르는 2020년에는 출산율이 3.92로 최빈국치고는 낮은 편인 출산율을 보이고 있으나, 1960년에는 출산율이 오늘날의 니제르보다도 높은 무려 7.3명이었다고 한다.[10] 그녀의 무덤은 2008년에야 겨우 복원될 수 있었다.[11] 아일랜드 대기근 당시 아일랜드도 끔찍한 굶주림과 그 후유증으로 인한 국민들의 해외 이주로 70여년 동안 아일랜드 인구의 절반이 줄었다.[12] 다만 영토 확장을 위한 내전으로 인구를 줄인 라나발로나 1세와는 달리, 응게마는 그 어떠한 전란도 없는 순수 폭정만으로 인구를 줄였으니 어느 면에서는 응게마가 라나발로나 1세보다 더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