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 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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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RAI 2에서 이탈리아인들을 대상으로 투표한 ‘가장 위대한 이탈리아인’ 명단이다. 고대 로마 제국 시기의 인물들이 완전히 배제되고 투표율도 6%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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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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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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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위
7위
8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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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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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마냐니
루이지 피란델로
엔리코 페르미
단테 알리기에리
11위부터는 영문 위키 참고.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르네상스 3대 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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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Michelangelo Buonarroti)
라파엘로 산치오
(Raffaello Sanzio)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파일:Leonardo_self.jpg

본명
레오나르도 디세르 피에로 다빈치[1]
(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출생
1452년 4월 15일
피렌체 공화국 빈치
사망
1519년 5월 2일 (향년 67세)
프랑스 왕국 앙부아즈
묘소
앙부아즈 성
직업
화가, 조각가, 운동선수, 검객, 발명가, 건축가, 과학자, 음악가, 공학자, 문학가, 해부학자, 지질학자, 천문학자, 식물학자, 역사가, 지리학자, 도시계획가, 집필가, 기술자, 요리사, 수학자, 의사
종교
가톨릭
서명
파일:레오나르도 다빈치 서명.svg

1. 개요
2. 위상
3. 명칭
4. 생애
5. 작업
6. 일화
7. 작품
8. 대중매체
8.1. 기타 매체
9. 여담



1. 개요[편집]


피렌체 공화국예술가.


2. 위상[편집]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 예술의 기반을 제시한 선구자이자 인류 지능의 정점에 도달했다고 평가받는, 그야말로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화가,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과학자, 음악가, 공학자, 문학가, 해부학자, 지질학자, 천문학자, 식물학자, 역사가, 지리학자, 도시계획가, 집필가, 기술자, 요리사, 수학자, 의사 등 다방면에서 완벽에 가깝게 두루 활약한 자타공인 천재이며, 키, 외모, 목소리 등 외적 조건 또한 뛰어났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그의 다재다능함과 창의성으로 '르네상스 인간(Renaissance Man)'이라 불릴 만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걸출한 회화 작품들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며, 대표작으로는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등이 있다. 흔히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예술가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라파엘로 산치오 등과 함께 르네상스 3대 거장으로 손꼽힌다.

3. 명칭[편집]


흔히 다 빈치라고 줄여 부르는 경우가 많아 '다 빈치'를 성씨로 아는 경우가 많은데, '다 빈치'는 성씨가 아니라 그냥 빈치(Vinci) 출신이라고 해서 붙은 칭호이다. 이탈리아가 유럽의 다른 지역에 비해 성씨가 늦게 보편화되었기 때문이다. 현대와 같은 성+이름 방식이 아직 확립되지 않던 당시에는 다른 사람 (특히 동명 이인)과 구별하기 위한 기호로써 자신의 출신 지역을 사용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한 동네에 레오나르도가 세 명 산다면 그 셋을 구별하기 위해 각각 '방앗간 집 레오나르도' 와 '앞골짜기 레오나르도', '빈치 사람 레오나르도' 식으로 불렀다.[2] 이 점에서 보면 현대의 성처럼 '다 빈치 씨'라고 부르기에는 적절치 않지만, 기본적으로 성씨와 비슷한 구실을 한다. 로망스어 이름에서 흔히 발견되는 de 뭐시기와 독일어의 von 뭐시기들이 이런 풍습의 흔적이다.[3] 1563년에 열린 제3차 트리엔트 공의회를 통해 가톨릭 교회에서 모든 이의 성명을 포함한 본적 기록부를 의무화했다. 그래서 1563년 이후 세대에서는 이탈리아에서도 모든 이들이 성씨를 가지게 되어 일반인도 보통 성씨로 줄여 부르게 되었다. 1563년 이전에는 이탈리아에서 아직 성씨를 쓰지 않는 이들이 많아서 이름으로만 부르는 경우가 보편적이었다. 그 예로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이름인 갈릴레오로 불렸거나, 레오나르도 피에로 다빈치가 레오나르도로 불렸던 것을 들 수 있다. 한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나, 조반니 보카치오처럼 성씨로 불리는 이들도 있었다.

따라서 '다 빈치'의 의미가 더 잘 전달되는 서양권에서 그를 언급할 때는 주로 이를 생략하고 레오나르도라고 부른다. 비슷한 예로 빈센트 반 고흐는 국내에서는 주로 '고흐'라고 하지만 서양에서는 주로 빈센트라고 부르고, 잔 다르크도 국내에선 풀네임으로 '잔 다르크'라고 많이 호칭하지만 서양권에서는 '잔(Jeanne)', '조앤(Joan)' 같은 식으로 짧게 부르는 경우가 많다.[4]

실제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대한 한국어 영상영어 영상의 코멘트를 보면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한국인들은 '다 빈치는', '다 빈치가' 같이 언급하는 반면 해외에서는 '다 빈치'라고 부르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레오나르도는', '레오나르도가' 같이 언급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생애[편집]


레오나르도 "피에로"는 1452년 4월 15일 토요일 밤 3시경 피렌체 공화국 토스카나빈치 마을에서 태어났다. 레오나르도는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은 부모인 변호사 아버지 안토니오 피에로와 농민이었던 어머니 카타리나 사이에서 태어난 혼외아들이었다. 처음 태어나서는 어머니의 집에 살다 대여섯이 돼서 아버지의 집에 가서 살게 되었는데, 레오나르도를 돌봐준 것은 아버지보다는 숙부였고 숙부는 어린 레오나르도에게 자연과 세상을 조금씩 가르쳐주었다.

어머니 카테리나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 소작농의 딸로 체르케스인 출신이라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아버지가 레오나르도의 재능을 인식한 뒤, 레오나르도는 14살쯤 피렌체로 이사를 가 안토니오 델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 공방에 들어가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고 20살이 되어 베로키오의 그림 <그리스도의 세례>에 조수로 참여해 꼬마 천사 두명을 맡았는데, 당시에 일반적이던 템페라 기법에 새로 알려지기 시작한 유화를 같이 실험해서 그렸다. 세간에는 베로키오가 그걸 보고 현타가 찾아와 화가를 은퇴했다는 야사가 전해지지만, 이는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베로키오는 그 뒤에도 잘만 작품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그림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베로키오는 다빈치를 정식으로 화가 길드였던 성 루카 조합에 가입시켜주게 했다.

30살이 된 1482년 다 빈치는 밀라노 공국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밀라노 공이었던 루도비코 스포르차가 다빈치를 지원하면서, 다 빈치는 여러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암굴의 성모>나 <기마상> 등이 이때 만들어졌고[5], 그 중 가장 유명한 건 <최후의 만찬>이다. 제2차 이탈리아 전쟁이 일어나면서 1499년에 프랑스 왕국루이 12세가 밀라노를 점령하고 루도비코는 프랑스에 투옥되며 밀라노 정세가 불안정해지면서 다 빈치는 잠시 베네치아에서 일을 하다가 1500년 피렌체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1501년 <성 모자와 성 안나> 제단화를 그린 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연구 스케치와 관찰을 남겼다. 헬리콥터나 인체비례도 등 잘 알려진 다빈치의 과학자/기술자적 면모는 이 때의 스케치로 알게 된 것. 1503년에 피렌체 시청에 벽화작업을 의뢰받아 <앙기아리 전투> 작업을 시작했는데, 재밌는 건 옆편 벽에서 라이벌인 미켈란젤로가 <카시나 전투>를 작업하고 있었다는 것. 또한 1503년에는 그 유명한 모나리자 작업을 시작해 죽을 때까지 그림을 손에 놓지 않는다.

1506년에는 루이 12세의 요청을 받고 다시 밀라노에서 작업을 하게 된다. 밀라노를 떠나는 1513년까지 다빈치는 다양한 작업과 연구를 하면서 지냈는데, 제3차 이탈리아 전쟁으로 1512년 교황이 밀라노를 공격하고 프랑스는 물러난다. 그렇게 프랑스가 떠나면서 다 빈치는 교황령의 로마로 가서 교황청 작업을 주로 하게 되었지만 완성작 없이 취소되었고, 1516년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 루아르 강의 앙부아즈 궁에 기거하게 되고, 여기서 <모나리자>가 완성된다. 그러나 말년에 가면 건강이 갈수록 악화되어 그가 좋아하던 작업은 할수없게 되었으며 소일거리만 하게 되었다. 결국 1519년 4월 23일 죽음을 직감한 그는 유언장을 작성하고 1519년 5월 2일 프랑스의 클로 뤼세(Clos Lucé)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레오나르도는 독신인터라 그가 자식처럼 아낀 제자 프란세스코 멜지(Francesco Melzi)[6]가 모든 재산을 상속받는다.


5. 작업[편집]


그의 기록은 해부학, 역학, 공학, 식물학, 조경 분야 등 미술뿐 아니라 정말 다방면에 이름이 남아 있다.[7] 그러나 다 빈치가 관심을 가졌던 방대한 분야에 비하면 실제로 만들어지거나 남아있는 작품의 숫자는 적은 편이다. 게다가 본인이 작품에 서명하지 않았던 탓에 다 빈치의 작품인지 아닌지 이견이 갈리며 불확실한 작품들이 많다. 거기다가 워낙 본인이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보니 다 빈치와 딱히 관련이 없는데도 아무데나 다 빈치가 관여했다는 소문이 붙어버리는 상황이다. 예를 들면 근거가 전혀 없음에도 일반적으로 스파게티 면이나 포크까지 발명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다.[8][9]

심지어 인터넷 커뮤니티에 떠도는 흥미위주 짤방이나 글에선 다 빈치가 그린 스케치 한 두장 가지고 비행기, 헬리콥터, 탱크 등을 발명했다고 하기까지 하는데, 당연히 조선시대 비차에 대한 기록을 비행기 발명의 증거라 하는 급의 말도 안되는 소리다. 또한 조각 작품을 남긴게 아예 없음에도 당장 이 문서의 직업소개 항목에서부터 조각가라고 하고 있다(...). 건축 역시 본인이 직접 설계하거나 감독해서 건축물을 지은게 하나도 없는데 건축가라 되어 있다(...).


파일:1374px-Mona_Lisa,_by_Leonardo_da_Vinci,_from_C2RMF_retouched.jpg

그의 유명한 작품인 모나리자


파일:Peter_Paul_Ruben's_copy_of_the_lost_Battle_of_Anghiari.jpg

앙기아리 전투의 페테르 파울 루벤스 모사본. (밀라노 공국베네치아 공화국)


유명한 레오나르도의 자기소개서에선 대부분을 군사용 공격병기를 구상해 이야기하였고, 그림의 재능을 마지막에 소개했지만 오늘날 다 빈치의 그림 실력은 그의 능력 중 높게 평가되는 부분이다. 그가 남긴 그림은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유명한 것들이다. 그는 그림 실력 그 자체로써도 출중했지만, 새로운 화법의 실험이라는 면에서 높게 평가할 만한 인물로, 자신의 그림에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당시 이탈리아 최초로 기름을 사용한 유화를 시도한 화가들 중 하나였다.[10] 그 결과로 모나리자에서 공기 원근법을 처음으로 구사해내는 등 좋은 결과도 여러 차례 얻어냈다. <암굴의 성모>나 <에르마인을 안고 있는 숙녀>는 르네상스 최고의 초상화로 손꼽히는 명작들이다. 반대로 지나치게 실험정신이 투철했던 나머지 프레스코 그림에 프레스코와는 상극인 유화 기법[11]을 써서 그림이 그대로 녹아내리는 바람에 망치는 일도 있었다(<앙기아리 전투>). 그리는 도중에 그림이 녹아내리기 시작하자 그림을 빨리 말리기 위해 화로까지 동원했지만, 결국 아랫부분 일부를 제외한 작업분이 전부 녹아내리는 바람에 그대로 버려졌다고 한다. 문제는 이 작품이 미켈란젤로와의 대결작이었다는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카시나 전투>라는 작품을 그려내지만, <앙기아리 전투>는 현재 라파엘로 등 다른 화가들의 스케치 모사 밖에 남아있지 않다. 본 문서의 앙기아리 전투 그림도 루벤스가 그린 모사본이다.


<앙기아리 전투>를 너무 대차게 말아먹어 상대적으로 덜 부각되지만 실험 정신이 지나쳐 망가진 사례는 이외에도 많다. 심지어 유명한 <최후의 만찬>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최후의 만찬은 완벽주의적인 그의 성격으로 당시 유행하던 프레스코 벽화 기법[12]이 아닌 템페라로 그려져 바로 퇴색이 시작되는 등[13] 그의 도전이 실패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당대에 확립된 그의 천재 미술가적 이미지는 사실 그의 작품이 얼마 남아있지 않다는 것에 기인하는 바가 매우 크다.

실제로 그가 서양사에 오래토록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자연과학적인 사고방식으로, 금기로 여겨지던 해부를 행하는 등 여러 시도를 통해 인체의 많은 부분들을 실질적으로 관찰해냈다는 것 때문이다. 인간의 태아를 최초로 그린 사람이기도 하고 많은 해부 스케치를 남긴 바 있다. 다 빈치의 스케치인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은 인체 비례에 대한 상징처럼 여겨질 정도로 유명하다. 다만 이 또한 대표적인 다 반치에 대해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우선 르네상스 시대에 교회에서는 인체 해부를 공식적으로 금지한 적도 없고, 실제로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인체 해부쇼가 유행할 정도였으며 당시 다른 유명한 화가들도 다들 해부를 하고 해부도를 그렸다. 당장 라이벌(?)인 미켈란젤로만 하더라도 엄청나게 뛰어난 해부도를 남겼다. 애초에 다 빈치의 해부도는 여자의 자궁을 척추와 연결해버리거나 하는 등 동시대 제대로 의학을 배운 이들이 그린 해부도에 비해 뒤떨어지는, 틀린 부분이 상당히 많다. 즉 흔한 레오나르도 과대 평가 떡밥 중 하나이다. 무슨 사회적 터부를 어기면서까지 진리 탐구에 몰두하고 시대를 앞서가고 그런 건 아니란 소리. 오히려 다 빈치의 해부가 불법이었던 건 다 빈치가 정규 의대생이 아니었던 탓이 크다.

그렇게 생전에 완성한 그림이 얼마 되지 않고, 성격이 괴팍하기는 했지만 그 그림 실력 하나만큼은 천재적으로, 그의 스승 안드레오 델 베로키오는 그 당시에 유명한 화가였으나, 자신이 그리던 <그리스도의 세례>를 레오나르도가 몇 가지를 덧붙였는데, 스승 베로키오가 레오나르도의 솜씨를 보고는 '다시는 물감에 손대지 않겠노라'고 맹세한 기록이 있다. 이 당시의 나이가 스무 살. 하지만 실은 베로키오가 재능넘치는 도제에게 더 많은 그림을 위임하고 자기는 수익성이 높은 조각상 제작에 전념하겠다는 사업상의 결정을 내렸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작품을 완성시키지 못한 경우가 많은데, 밀라노의 공작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동상을 수년간 연구만 하다가 완성하지 못한 일도 있으며, 오스만 제국에는 젊은 시절의 그가 메흐메트 2세의 초상화를 그리다가 메흐메트 2세가 그 도무지 끝이 안 보이는 제작기간에 질려서 돌려보냈다는 식의 설화도 있을 정도였다.[14] 이외에도 오스만 제국 보스포루스 해협에 다리를 디자인했는데 당시 기술로서는 도무지 이게 만들 수 있냐고 오스만 제국 황실에서 부정적이라 끝내 이뤄지지 못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냥 평범하게 나무로 길쭉한 다리로 만들어진다. 요즘에는 한 작품을 완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또 다른 그림에 손을 대었던 것이 성인ADHD의 증상이 아니었나 하는 해석도 있다. 물론 모두 본인의 잘못은 아니었는데, 예를 들면 체사레 보르자에게 인정받아 도시 계획의 총책임자급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지만 체사레가 몰락한 탓에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또한 목차에는 건축가라 되어 있지만 진짜로 훌륭한 건축가였던 미켈란젤로라파엘로에 비해 다 빈치는 건축 분야에서 딱히 뚜렷한 결과물을 남기지 못했다. 애초에 본인이 설계하거나 감독으로서 건축을 해본 경험 자체가 없다. 물론 건축면에서 큰 발전이 있었던 르네상스 시대인 만큼 레오나르도 역시 건축에 관심이 많았고, 이탈리아와 프랑스 등에서 건축 자문으로 활동하며 건축에 관련된 스케치를 다수 남겼지만, 레오나르도 본인이 독자적인 건축가로 활동하지는 못했다. 레오나르도가 프랑스의 샹보르 성의 이중 계단에 대한 아이디어를 그림으로 남겼고, 이 성의 건축가였던 도메니코 다 코르토나가 그것에 따라 설계했다는 '설'이 유명하지만 레오나르도가 그에게 그림을 넘기거나 도메니코가 레오나르도에게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확실한 근거는 없다.

2010년 6월 20일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의 코너인 Surprise Secret에서는 그가 요리사 활동한 적이 있다고 한다.[15] 1981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발견된 코덱스 로마노프가 레오나르도가 남긴 요리에 관련된 문서이다.[16]

2014년 11월 30일자 서프라이즈에서는 그의 자화상으로 알려진 그림이 후세에 그려진 가짜라는 주장을 다루었다. 레오나르도의 모작을 업으로 하던 화가가 가짜 자화상을 그려서 사기를 치자는 음모에 가담해서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속 플라톤의 얼굴을 토대로 그린 것이고, 그의 다른 초상화와 비교해 봐도 얼굴에서 차이나는 부분이 많은데다 그만의 빗금선의 특징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 실제로도 다른 초상화는 비교적 샤프한 인상인 데 비해 후덕한 편이기는 하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보다 100년 먼저 중력 실험 연구를 하였다는 스케치가 해독이 되었다. 해당 스케치에는 이탈리아어로 '운동의 등가성'이라고 적혀있는 등 당시의 수학 수준이나 실험도구가 부족한 시대였음에도 중력 가속도의 개념을 이해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 단, 중력이 가속운동 이라는 것은 이미 르네상스 이전 14세기에도 알려진 사실이었고, 다빈치의 노트는 '그 가속도가 얼마인가?'를 연구한 것이다. 물론 이걸 연구한 것도 대단한 건 맞지만, 물리학 발전에 딱히 구체적으로 기여하질 못했다. 이는 두 새로운 과학이라는 역학에 대한 교과서를 써서 후세에 영향을 준 갈릴레오와 비교되는 면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사실 애초에 갈릴레이부터가 중력 가속도에 관한 최초 연구자가 아니었고, 당시 이탈리아 여기저기서 많은 이들에 의해 훗날 뉴턴의 물체 운동론에 기초가 되는 연구들이 자잘하게 사회 일반에 보고되고 그런 소문들이 정착해 갔던 시기이다. 그러나 이론적 배경과 명확한 증명이 불명이었다가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에 의해 비로소 웬만큼 정돈이 된 것이다. 삼각형이면 구슬들이 일정 속력으로 떨어진다는 건데, 속도와 가속도에 관해 조금만 수리학적으로 정돈해 봐도 면피할 수 있는 착오다. 결론은 다빈치의 노트는 물체운동 이치에 관한 당대의 흔한 오개념들 일부를 다빈치는 그림으로 나타내 본 것뿐이다.


6. 일화[편집]


  • 멀티태스킹의 달인이기도 해서 친구가 집을 방문했을 때 한 손으로는 글을 쓰고 한 손으로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고 한다.[17]


  • 굉장히 특이한 필기 습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글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좌우를 반전시켜 기록했다. 그래서 그의 글을 제대로 읽으려면 반드시 거울을 옆에서 비춰야 했다. 이 필기 양상을 '거울형 글쓰기(mirror writing)'라고 불리는데, 현대에도 드물지만 이런 필기 양상을 보이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고 한다. 다빈치코드에도 나오는 이야기인데 글을 쓸 때 본인만 알아볼 수 있게 속필로, 그것도 거꾸로 써나갔다고 한다. 그래서 다빈치가 남긴 저작물은 이리저리 돌려보고 단어 하나 하나 유추해서 봐야 한다고한다.

  • 어렸을 때도 비범해서 아버지의 친구가 방패에 무서운 그림을 그려달라는 요청을 했는데 괴물을 그리기 위해 살아있는 동물들을 산 채로 해부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는 나중에 인체 비례도를 그릴 때 시체보관소에 틀어박혀 인체를 연구하는 계기가 된다.

  • 흔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레오나르도가 동성애자였다는 가설이 있다. 실제로 1476년의 법정 기록을 보면 세 명의 젊은 남성과 같이 동성애로 기소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은 기록이 있다. 그의 사후 제자 겸 연인으로 추측되는 멜지가 그의 작품들과 땅을 상속 받았다. 2014년 10월 26일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모나리자의 모델이 레오나르도의 제자이자 동성연인인 안드레아 살라이(Andrea Salai)[18]일 것이라는 가설을 다루었다. 레오나르도의 동성애에 대해 해석한 프로이트의 논문이 있다.

  • 레오나르도는 어떤 인물을 그리고자 할 때 가장 먼저 대상의 성격과 본성을 고려했다. 즉, 그 사람이 귀족이냐 평민이냐, 활기찬가 진지한가, 고민이 많은가 행복한가, 젊은가 늙은가, 성격이 급한가 침착한가, 호의적이냐 악의적이냐와 같은 것들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에 대해 결심이 서면, 그는 이런 종류의 사람들을 많이 찾을 수 있는 장소로 가서 그들의 얼굴, 행동, 옷, 움직임을 면밀히 관찰했다. 그리고 필요하다 싶은 것이 눈에 띄면 벨트춤에 항상 차고 다녔던 작은 책을 꺼내 펜으로 스케치를 했다. 이것을 아주 많이, 여러 번 반복하면 아주 많은 양의 스케치들을 모으게 되었고, 따라서 그가 그리고 싶어하는 사람에 대해 충분한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다음에는 그 그림들을 정교하게 그리는 데 집중하면 되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경이로운 성공을 해내고 마는 것이었다.

  • 2017년 11월, 그의 그림인 살바토르 문디가 무려 4억 5천만 달러(약 4,803억 원)에 경매로 팔리면서 인류 역사상 가장 비싼 예술품이 되었다.

  • 레오나르도가 작성한 36장 분량의 노트가 빌 게이츠에게 340억 원에 낙찰되었다. 그리고 빌 게이츠는 교육 목적으로 이 노트를 번역해서 주석을 달아 공개했다.

  • 미켈란젤로보다 한창 연장자지만 호승심 가득찬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를 존경하는 선배라기보다는 강력한 경쟁자로 인식했다. 그에 비해서 그들보다 연하인 라파엘로는 명작 아테네 학당을 그리면서 플라톤헤라클레이토스를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를 모델로 삼아 존경심을 드러냈다고 한다. 이들은 미술사에 르네상스 시기의 3대 대표 화가로 불린다. 물론 레오나르도 다 빈치 본인도 이런 존경심이나 경쟁 의식에서 초탈한 성인군자는 절대 아니고 상당히 까칠하고 유치해 보이기까지 한 독설가였다. 그래서 미켈란젤로와의 충돌도 정말 많았다. 한 예로 레오나르도가 추종자들과 대화하다가 단테 알리기에리의 작품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레오나르도는 마침 지나가는 미켈란젤로를 가리키며 "저 친구가 더 잘 알 것이오."이라고 말했다. 미켈란젤로를 인정해서가 아니라 '저놈이 단테에 대해 알기는 하겠냐'라는 식의 비꼬기였다. 그런데 미켈란젤로는 로렌초 데 메디치 아래서 활동할 때 부터 문학을 접하였고, 미켈란젤로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바로 단테였다. 그러니 이 말을 들은 미켈란젤로가 어떤 감정을 품었을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당연히 그 자리에서 레오나르도에게 "밀라노에서 만들던 동상도 제대로 완성시키지 못하고, 뭐든지 제대로 하는 게 없는 놈이다! 네놈에게 동상 일 맡긴 그놈[19]은 둘도 없는 바보 멍청이고!"라며 노발대발하며 날뛰었다. 이 일화는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 일화 중에선 매우 사소한 이야기에 불과할 정도로 사사건건 충돌했다.

파일:bPbobHI.jpg
  • 레오나르도는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은 이성을 잃고 미쳐버린 짐승과 같다"라는 말을 할 만큼 전쟁을 싫어했다. 하지만 정작 그러면서도 여러 개의 포탄을 한꺼번에 쏘는 오르간 건 같은 최신형 무기들을 만들어서 여러 귀족들한테 납품을 했다. 전쟁이 좋다기보다는 자신의 천재성을 귀족들한테 보여주는 용도로 일부러 무기들을 만들어 보내는 일을 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레오나르도는 전차 같은 현대 무기들의 원리를 이미 고안해 내기도 했다. 다만 '현대 무기의 원리를 고안했다'라는건 지나치게 침소봉대 한 것인데, 사진만 봐도 알겠지만 저건 그냥 나무 장갑판 이어붙인 것에 사람 여러명이 들어가 사람 다리로 움직이는 물건이다. 실제 전장에서의 효용성은 당연히 없고, 또한 저걸 가지고 현대 무기 어쩌구 하는건 조선시대 화차를 가지고 현대 다련장 로켓의 원리 어쩌구 하는 것보다도 더욱 심한 오바이고 과대평가이다.

파일:external/www.leonardodavincisinventions.com/leonardo-da-vinci-helicopter.jpg
  • 레오나르도의 스케치 중에 비행과 관련된 것을 빼놓을 수 없다. 회전익기의 원리를 고안한 스케치도 있으며, 글라이더 스케치의 경우는 인력으로 움직였는데, 마치 새처럼 날개를 움직이는 형식이었다. 일설에 따르면 실물 글라이더 제작은 물론 비행에도 성공했지만, 첫 비행에서 애제자가 죽은 이후 레오나르도는 다시는 비행에 손대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실제로 제작하고 비행에 성공했다는 것은 딱히 근거가 없는 썰에 불과하고 애초에 현존 가장 오래된 글라이더 비행 기록은 다빈치보다 수백년 앞서서 이슬람의 기록이 있다. 헬리콥터 역시 회전하는 날개가 양력을 일으키는 현상 자체는 훨씬 오래전부터 알려진 사실이고 다빈치는 다들 알고 있는 걸 그림으로 그렸을 뿐이라 현대 헬리콥터의 발전과는 별 관련 없다. 애초에 르네상스 예술가들 대부분이 이런저런 공상의 무기 같은걸 스케치 하는게 유행이었고 다 빈치 역시 그런 당대의 유행을 따라간 것 뿐이다.


7. 작품[편집]


제목
시기
소장처
비고
수태고지
1472~1475년경
[[이탈리아|

이탈리아
display: none; display: 이탈리아"
행정구
]]
우피치 미술관

동방박사들의 경배
1481년
[[이탈리아|
이탈리아
display: none; display: 이탈리아"
행정구
]]
우피치 미술관

암굴의 성모
1483년~1485년
1495년~1508년
[[프랑스|
프랑스
display: none; display: 프랑스"
행정구
]]
루브르 박물관
[[영국|
영국
display: none; display: 영국"
행정구
]]
내셔널 갤러리
[20]
최후의 만찬
1490년
[[이탈리아|
이탈리아
display: none; display: 이탈리아"
행정구
]]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흰 담비를 안은 귀부인
1490년
[[폴란드|
폴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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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차르토리스키 미술관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1490년
[[이탈리아|
이탈리아
display: none; display: 이탈리아"
행정구
]]
아카데미아 미술관
[21]
모나리자
1503년~1506년경(추정)
[[프랑스|
프랑스
display: none; display: 프랑스"
행정구
]]
루브르 박물관

살바토르 문디
1505년~1515년경(추정)
[[사우디아라비아|
사우디아라비아
display: none; display: 사우디아라비아"
행정구
]]
무함마드 빈 살만
[22]


8. 대중매체[편집]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가인데다 시대를 앞서간 여러모로 기이한 면이 많아서 다양한 미디어에서 그의 이름이 등장하거나 본인을 등장시키곤 한다. 기이한 천재 이미지는 기본적으로 먹고 들어가고 예술가의 모습보다는 주로 과학자나 기술자, 발명가, 공학자의 모습에 비중을 둬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캐스터 클래스의 서번트로 등장. 여기서의 다 빈치는 모나리자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모나리자의 모습으로 본인을 마개조해버렸다.
위의 다빈치가 주조한 다 빈치를 닮은 인조생명체.




전함소녀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위의 인물이 아닌 위의 인물의 이름을 딴 굴리엘모 마르코니급 잠수함의 자매함 중 하나가 모티프이다.


이탈리아의 애니메이션 영화이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도미네이션즈/유니버시티/레오나르도 다 빈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전설 유물/다 빈치의 비행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전설 유물/다 빈치의 기관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1. 기타 매체[편집]


  • 시간탐험대에 나오는 레오나르도 박사는 바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본인이다. 여기선 게으르고 알려진 거와 다르게 아주 딴판으로 나온다.


  • 화관의 마돈나에서는 먼치킨으로 등장한다. 천재 화가일뿐더러 전쟁 무기를 고안하기도 하고, 화학자로서 명망도 떨치면서 이 작품의 최대 떡밥인 녹정수를 고안하는 약사도 된다.

  • 운계미궁 제가이(1992)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에선 구름 속 세계에 와서 세계 정복을 노리는 히미코 여왕을 돕는 과학자로 나오다가 실존한 일본 발명가 히라가 겐나이가 만든 살아있는 배를 공격하던 도중 폭발에 휘말려 허무하게 죽는다. 한국 더빙판 비디오에선 유일하게 본 이름으로 나오는 캐릭터.(나머진 죄다 일본 이름이라서 현지화)

  • 대항해시대 3에서는 밀라노의 저택에서 만날 수 있다. 자신의 발명품들을 주는데 게임 진행에 유용한 아이템들이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고.

  •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는 마르세이유에 있는 저택에 있는데, 그가 언급되는 퀘스트들의 내용을 보면 성격이 상당히 까다롭다 못해 깐깐한 듯 보인다(...).[23]

  • 대항해시대 5에서는 주인공 일행이 라몬의 해도에 대한 단서를 얻기 위해 토스카넬리를 찾아갔지만 보이지 않았는데, 주인공 일행에게 토스카넬리가 있는 장소를 알려주는 대신 앤트워프에서 유화를 사오게 한다. 이후에는 주인공 일행에게 돈을 받고 배의 설계도를 강화시키기 위한 도움을 준다.

  • 백광의 바르시아에서는 모습을 바꾸어가며 영원을 살아가는 신의 사자. 레오나르도는 짧은 순간 불렸던 이름일 뿐이라고.

  • 응원단 시리즈의 북미판인 '도와줘! 리듬 히어로'에서는 찰랑거리는 갈색머리에 느끼한 외모를 자랑하는 훈남으로 등장, 게임 내에서 모나리자를 쏙 빼닯은 여인에게 반해서 그녀에게 애정공세를 펼친다. 그런데 사실 풍성한 머리카락은 가발이며 가발이 벗겨지면 실제 초상화에서 나오는 머리가 훤히 벗겨진 늙은이 레오나르도의 모습이 된다.


  • 퓨쳐라마에서는 외계인으로 등장하는데, 사실 다 빈치 행성에서 온 외계인이었다. 그는 그 행성에서는 멍청한 편이었기 때문에 예전부터 놀림을 받아왔고, 결국 필립 J. 프라이가 가져온 설계도를 이용하여 지구 최후의 날 기계를 만들었다. 프라이는 아이스크림 만드는 기계인 줄 알았지만, 아이스크림은 그냥 부산물이고 실제론 톱날이랑 대포로 사람 학살하는 기계.


  • 굉굉전대 보우켄저에서는 레온 조르다나라는 식으로 나온다. 작품상에서는 가명이었든 아니면 모티브였든 노트에서 나오는 그림들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떠올리게 한다.


  • 스파르타쿠스로 유명한 제작사 Starz에서 레오나르도의 젊은 시절을 묘사한 미드를 방영했다. 제목은 '다빈치 디몬스(Da Vinci's Demons)' 2013년 봄시즌 첫 방영. 2014년 시즌 2가 끝났고 2015년에 시즌 3 예정. 트레일러 이 시리즈에서는 양성애자로 나온다.

  • 딜버트 애니메이션판에서 세계 미술계를 좌지우지하는 끝판왕으로 등장한다.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있느냐는 질문에 14세기에 헬리콥터와 탱크 그리고 낙하산을 발명했는데 불사약을 발명 못했겠냐고 쿨하게 답한다. 참고로 미술계 다섯 패밀리의 수장이다. 각각 르네상스파, 인상파, 추상파, 초현실파, 포스트모더니즘.


  • 루팡 3세 Part IV
    • 13화 마지막에 MI6 본부에서 탈출하고 이탈리아를 내려다 보는 것으로 첫 등장.
    • 14화에서는 미네 후지코가 어떤 화가에게 또 다른 모나리자를 구입했는데 이 모나리자를 그린 것이 바로 다 빈치였다. 이후 1유로 동전 뒷면에 해부도가 있는 것을 보고 "왜 자신의 낙서가 동전에?"라고 의문을 표한다.
    • 18화에서는 자신이 그린 최후의 만찬을 배경으로 루팡 일행과 제니가타 경부, 레베카, 닉스와 MI6 본부장 퍼시발의 초상화를 그려 모이게 한 뒤 그들에게서 자신의 정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게 만드는데 그의 정체는 MI6가 이탈리아의 꿈을 이용해 다 빈치의 인격을 이식해 만들어진 인간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후 루팡 3세에게 자신의 목적을 말한다. 그의 목적은 바로 이탈리아를 재설계하는 것이었다.
    • 19화에서는 폭스라는 테러리스트를 이용해 드래곤즈 테일이라는 디스크를 훔치게 만든다. 이후 닉스가 퍼시발을 죽이려하자 그를 제압하고 가족 곁으로 보내준다.


  • 스마트폰용 게임 더 하우스 오브 다 빈치에서는 그의 제자가 되어 갑자기 행방불명된 스승 레오나르도의 흔적을 추적하게 되는데, 여기서 그가 어느 비밀집단에 쫒기고 있으며, 타임머신을 만들어 시간의 차원 저 너머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결국 그 제자도 시간문을 열어 그 뒤를 따른다.

  • 유니버설 픽처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24]의 영화사가 월터 아이작슨의 책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영화 판권을 획득하고 각본 집필 중이다. 주인공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나온다.

  • Rock of Ages 시리즈에 등장. 1편에서는 대전 상대로 등장하며 천재답게 유일하게 작중 상황이 게임임을 인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고안한 것들 중 일부가 작품 내에서도 등장하는데 1편에서는 오르니톱터가 헬리콥터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2편에서는 수륙양용전차가 등장한다.


  • 신데렐라를 모티브로 제작한 1998년 영화 에버 애프터에서도 주조연으로 등장하는데, 초반 집시 무리들에게 그림을 빼앗긴 것을 우연히 근처를 지나가던 헨리 왕자에게 찾아달라고 부탁하는 모습으로 첫 등장하는데, 이후 그 그림이 모나리자라는 것을 보여주며 그 다 빈치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주인공 다니엘과 헨리가 서로 썸씽을 가지게 해주거나 위기에 처한 다니엘을 도와주고 그녀가 무도회장에 갈 수 있게 치장을 도와주는 등 사실상 요정 대모 포지션. 후반에 다니엘의 계모의 거짓말로 그녀를 오해하게 된 헨리를 꾸짖으면서 다니엘이 두고 간 구두 한 짝을 건네주며 다시 한번 헨리의 마음을 제대로 잡아주는 중요한 역할을 맡기도 한다. 중간중간 등장할 때마다 그의 유명한 작품이나 발명품들도 깨알같이 등장한다.

  • 이탈리아에서 살아남기에서 등장. 원 역사에서도 밀라노에서 주로 활동한 만큼 여기서도 밀라노로 오게 되며 말뼈로 만든 류트를 연주해 주인공의 관심을 끄는데 성공한다. 이 소설에서도 공돌이 포지션을 맡는데 요새 건설과 휠락 머스킷으로 대표되는 신무기 발명, 신도시 계획등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낸다. 그 공으로 2급 관료인 자문관 자리에 오른다. 본인은 이제 은퇴해서 전업 예술가로 지내고 싶어하지만 주인공이 놔줄 리 없다는 게 문제...



9. 여담[편집]


파일:external/www.museoscienza.org/balistalanciasassi_180.jpg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고안한 투석기.

동물들을 사랑했고 전쟁경멸한 사람이었다고도 전해진다. 무기를 제작 및 디자인하긴 했지만 이건 필요로 하는 물체를 연구하다보니 자연스레 한 것이었다고 한다.

  • 요리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일반 요리사가 아닌 꽤나 창의적인 요리사였다. 1473년 이탈리아의 피렌체에 있는 음식점에서 일할 때 그가 부엌을 책임지자 메뉴를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25] 하지만 결국 피렌체의 음식점에선 잘리게 되었고 몇 년 후 그의 친구인 산드로 보티첼리와 함께 음식점을 열고 자신의 요리의 진가를 사람들이 알아주길 원했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이후 1480년 밀라노의 루도비코 스포르차를 위해 일하기 시작하면서 또 다시 주방을 책임지게 되어 그곳에서 채소를 으깨고 스파게티를 뽑는 기계나 개구리를 겁주어 물탱크에서 쫓아낼 수 있는 기괴한 기구도 만들었다.[26] 이후 스포르차가 최후의 만찬을 바탕으로 한 그림을 밀라노에 있는 교회의 벽에 그려 달라고 부탁했을 때 요리에 평소 관심이 많아서 흔쾌히 수락했고, 이후 식탁 위에 어떤 음식을 올릴지 고민하며 음식을 결정하기 위해 모든 음식을 요리하느라 많은 시간을 썼다고 한다. 비록 요리사로서는 성공하진 못했지만 그가 얼마나 요리에 관심이 많았는지 알 수 있다.

  • 음악가이기도 했지만 현재까지 그가 작곡한 음악은 알려져 있지 않은데 자신의 그림에 악보를 숨겨두었다는 설이 있다. 실제로 조반니 팔라라는 이탈리아의 음악가 겸 컴퓨터 기술자가 최후의 만찬 그림에서 40초 분량의 악보를 찾았다며 연주해서 재현하기도 했다. 찾아낸 악보를 연주한 노래. 다만 명확하게 검증된 바는 아니라서 이것이 진짜 다 빈치가 숨겨 놓은 음악인지 확실하지는 않다.

  • > "단순함이야 말로 궁극의 정교함이다.(Simplicity is the ultimate sophistication.)"
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야말로 공학자의 궁극적 모토이며, 단순할 수록 고장이 적고, 고장이 나더라도 그 원인을 찾기가 쉽기 때문이다.

  • 그림을 그리고 마무리를 붓이 아닌 손가락으로 했기 때문에 그의 그림엔 지문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모나리자가 도난당하고 짝퉁 속에 있어서 어느 것이 진품인지 알기 어려웠을 때 그 지문으로 진품을 찾았다는 말이 있는데 이건 사실이 아니다. 당시엔 지문 검사 방식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 체육계에도 이름을 남겼는데 높이뛰기와 멀리뛰기가 뛰어난 육상선수였다고 한다.


  • 최후의 만찬에 관련된 음모론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에서 주요 떡밥으로 쓰였으나 그 사실성에는 이래저래 말들이 많다. 일단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시온 수도회의 비밀 교주가 아니었던 것은 확실하다.

  • 아카데미과학에서 다 빈치의 발명품을 모형화하여 전개하고 있다. 장갑차, 헬리콥터, 시계, 아치다리 등등.



  • 이탈리아 최대의 방위산업체 레오나르도S.p.A의 사명도 그의 이름에도 유래한 것이다.


  • 후세에는 동명이인인 작곡가 레오나르도 빈치[27]가 있었다. 이 사람은 빈치가 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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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망스어게르만어권의 인명이나 지명의 관사는 발음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은 채 뒤 요소와 붙여 적는다.[2] 그래서 디스크월드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패러디 캐릭터인 레오나르도 드 퀌은 퀌에서 온 레오나르도라는 뜻이 된다.[3] 네덜란드어권은 양쪽의 영향을 모두 받아서 de 뭐시기와 van(독일어의 von과 같은 어원) 뭐시기가 공존한다. 대표적인 예시로는 반데르발스.[4] 한국 관점으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김두한이 '종로의 두한'이라고 알려져 있다고 해보자. 이 경우 한국인들은 보통 앞의 수식어를 떼고 '두한'이라고 부를 것이다. 반면 '다 빈치', '고흐' 같은 호칭은 사람을 단순히 '종로'라고 부르는 셈이다.[5] 다만 이 기마상은 이탈리아로 쳐들어온 프랑스 군사들이 활쏘기 과녁으로 삼아서 마구 석궁의 화살을 쏘아대는 바람에 커다란 고슴도치로 변해버려, 결국 완성되지 못하고 버려졌다.[6] 레오나르도와는 스승과 제자보다는 부모와 자식 같을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다. 특히 프란세스코는 레오나르도의 곁에 항상 있었고 임종도 함께 해줄 정도였다.[7] Fritjof Capra, '다 빈치처럼 과학하라', 강주헌 옮김, 김영사, 2011[8] 포크는 고대 이집트 시절 유물에서도 확인이 가능한, 인류가 사용한 오래된 식기류 중 하나이고, 동로마 제국에서 처음 상용화되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태어나기 100여 년 전의 인물인 샤를 5세 또한 금과 은으로 만든 포크를 가지고 있음이 확인 되는 만큼 포크 자체를 발명한 것이 아님은 확실하다. 포크가 일반 민중들에게까지 전파 된 데에는 르네상스 시대 베네치아를 비롯한 이탈리아 국가의 영향이 컸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유명한 발명가인 다 빈치가 발명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오는 듯하다.[9] 스파게티면도 마찬가지로 고대 로마의 유물 중에 스파게티틀이 발굴되어 다 빈치의 발명품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10] 단 그는 유화보다는 템페라를 더 좋아했다고 한다.[11] 유화는 습기와 열에 극도로 취약한데, 프레스코화는 회칠을 한 벽면에 그리는 그림이다. 회반죽이 마르기 전에 그려야 하기 때문에 벽면이 당연히 습기로 축축하며, 회반죽이 굳으며 화학반응이 일어나 이 발생한다.[12] 프레스코 기법은 벽이 마르기 전에 그림을 완성해야 하고 수정하기도 매우 힘들기 때문에 완벽주의적인 다 빈치는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때문에 템페라로 그린 최후의 만찬은 역사상 가장 불행한 그림중 하나가 되어버리고 말았다.[13] 템페라는 광물을 곱게 갈아서 달걀 노른자와 섞어 만든 물감으로 전통적으로 이콘을 그리는 데 많이 쓰였다. 다만 이콘 항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템페라 물감은 변색이 쉽게 되고, 특히 성당같은 경우 항상 초와 향을 쓰기 때문에 그을음이 달라붙어 시간이 지날 수록 새까맣게 변하게 된다. 때문에 아직도 템페라 물감으로 그리는 이콘은 70-80년마다 한 번씩 덧칠을 해준다.[14] 어린이용 교육책에 종종 올라오는 일화 중에 어느 장수의 그림을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은 화가가 활 하나만 그리는데 그리고 버리고 그리고 버리고를 반복하다 십년 넘게 걸렸다는 일화가 있는데, 이게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비꼬려고 만든 일화라는 주장도 있다.[15] 밀라노 대공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궁정에 있을 때 일로 당시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요리를 만들어 평판은 그저 그랬다. 이탈리아 요리는 풍성하면서도 화려한 것을 기대하는데, 레오나르도의 요리는 엔초비 한 마리와 곁들이는 채소 정도로 소박했기 때문에 좋은 평가를 받기 힘들었던 것.[16] 대한민국에는 2002년 책이있는 마을에서 '한 천재의 은밀한 취미' 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 항목 아래쪽에는 동물을 사랑해서 고기를 먹지 않겠다 라고 했다는데 그 문서에 따르면 글쎄...? 이 내용은 EBS 지식채널e 에서도 다뤘다. 상당히 개그스러운 에피소드.[17] 이로 인하여 문학작품에서 양손잡이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으나 실제로는 다른손잡이였다.[18] 원래는 레오나르도가 그림을 가르쳐줄 제자로 쓰기 위해서 고용했으나, 살라이가 그림에 대해 소질이 없자 할 수 없이 그를 곁에 두고 자신이 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도와주는 조수로 삼았다. 그리고 레오나르도는 죽기 전에 자신이 가진 유산인 포도밭을 살라이한테 넘겨주는 내용의 유언장을 작성할 만큼, 살라이를 아꼈다.[19] 당시 밀라노의 대표인 스포르차 가문을 의미한다.[20] 같은 작품이 두 점 존재한다.[21] 인체 비례도(Canon of Proportions)라고도 한다.[22] 다 빈치의 작품 중 유일한 개인 소장품. 다 빈치의 작품이 맞는 가에 대한 진위 논란이 현재진행형이다.[23] 심지어 관련 퀘스트의 대부분이 유저들을 전국일주하게 만들 정도로 경로도 그렇고 과정도 복잡해 상당한 원성을 듣고 있다.[24] 레오나르도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유가 어머니가 이탈리아에 갈 당시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그림을 보고 반응한다고 해서 붙인 것이다.[25] 당근 조각을 곁들인 생선이나 꽃으로 장식한 음식 등. 현대 21세기에는 많이 대중적이고 예술적인 음식이었지만 당시에는 많은 양의 고기 요리에 익숙한 손님들은 불만족스러워했다고 한다. 사실상 시대를 앞서가버린 셈.[26] 미술사학자 노성두 교수의 말에 의하면 이건 완전히 거짓이라고 한다. 웃으라고 써놓은 글을 진짜로 받아들인 결과라고.[27] 1690년 ~ 1730년, 오페라 가 대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