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 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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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 찰스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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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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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레이 찰스
RAY CHARLES

헌액 부문
공연자 (Performers)
멤버
(개인자격)
입성 연도
1986년
후보자격 연도
1986년
후보선정 연도
1986년
































역대 그래미 시상식[1]
파일:external/www.brooklynvegan.com/grammy.jpg
올해의 레코드상
제46회
(2004년)


제47회
(2005년)


제48회
(2006년)

"Clocks" - 콜드플레이

"Here We Go Again" - 레이 찰스 & 노라 존스

"Boulevard of Broken Dreams" - 그린 데이






레이 찰스
Ray Charles


파일:ray-charles-portrait-in-black-and-white-321.jpg

본명
레이먼드 찰스 로빈슨
Raymond Charles Robinson
별명
천재
The Genius
출생
1930년 9월 23일
조지아주 올버니
사망
2004년 6월 10일 (향년 73세)
캘리포니아주 베벌리 힐스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직업
싱어송라이터, 피아니스트
장르
R&B, 소울, 블루스, 가스펠, 컨트리, 재즈, 로큰롤
활동
1947년 – 2004년
배우자
에일린 윌리엄스 (1951년 7월 31일 – 1952년)
델라 베아트리스 (1955년 4월 5일 – 1977년)
자녀
12명[1]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대표곡



1. 개요[편집]



파일:the genius.jpg


대중음악계의 유일한 천재.

프랭크 시나트라


미국의 음악가로, R&B의 대부이자 특유의 리듬감과 풍부한 성량, 그루브 가득한 보이스로 20세기 소울 음악을 대표한 아티스트다. 스티비 원더, 냇 킹 콜과 더불어 미국 가요사의 한 획을 그은 R&B 아티스트로 평가받는다.


2. 생애[편집]


1930년 9월 23일, 조지아주 올버니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2][A] 그는 아레사 로빈슨과 베일리 로빈슨의 첫 자식이었으며, 아버지는 철도 쪽에서 일했고 어머니는 세탁 일을 했다. 그는 굉장히 가난했지만 행복했다고 회상했다. 그가 5살쯤 됐을 때 남동생이 익사하는 일이 일어났다.[3] 5살 때부터 동네 카페에서 피아노를 치며 음악을 시작했다고 한다.[B]

그는 5살부터 녹내장으로 추정되는[B] 질병으로 시력을 잃어갔고 7살엔 맹인이 되었다.[A] 그는 침례회에서 연주되는 가스펠 음악 · 탐파 레드 (Tampa Red) 와 같은 음악가들의 블루스에 매료되었으며[D], 이후 플로리다주에 있는 인종 분리된 특수학교인 성 아우구스티누스 학교에 보내졌다.[C] 1937년부터 45년까지 그곳에서 그는 점자피아노를 배웠다. 피아노 외에도 클라리넷, 알토 색소폰, 트럼펫, 오르간을 배웠다고 한다.[E] 어머니는 그가 15살이었을 때 으로[B]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도 2년 후 사망했다.[A]

어머니 사후 학교를 그만두고 플로리다 주 잭슨빌로 이주했으며, 그곳에서 음악 활동을 시작했고 슈거 레이 로빈슨과 구분하려 '레이 찰스'란 이름을 사용했다.[D] 그는 실력을 계속 쌓아서 1948년에 시애틀로 이주했고 자신의 트리오를 결성했다.[C][D] 하지만 이때부터 17년 동안 시달린 헤로인 중독도 시작되었다고 한다.[D] 20살이 되기도 전에 그는 시애틀의 잭슨 스트리트에 있는 술집과 클럽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마침내 1952년엔 애틀랜틱 레코드와 계약을 맺었다.[C]

그는 본래 냇 킹 콜, 찰스 브라운 같은 음악가들에게 영향을 받았지만 1955년에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C] 1954년 같이 일하던 기타 슬림 (Guitar Slim) 의 히트곡 "Things That I Used to Do"도 그가 냇 킹 콜 등의 모방이 아닌 주체적인 음악가로 나아가는데 영향을 주었다. 이후 그는 댈러스로 이사하고 밴드를 결성했다.[D] 마침내 1954년 발매된 가스펠의 영향을 받은 곡 "I Got a Woman"이 히트곡이 되었고, 1959년엔 자신의 백보컬 그룹인 라엘레츠와 녹음한 What'd I Say가 큰 인기를 얻었다.[C] 같은 해 그는 애틀랜틱 레코드를 떠나 ABC-파라마운트 레코드로 소속을 바꿨다.[4]

1960년대 그의 음악은 여러 장르를 넘나들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찰스는 여러 음악가들에게 영향을 주면서 인기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다.[C] 특히 1960년 발매된 Georgia on My Mind는 그에게 첫번째 그래미상을 안겨줬고[5] 조지아 주의 주가가 되기도 했다.[C] 1965년 전성기가 찾아왔을 때, 그는 마약 혐의로 체포되었고 헤로인을 끊기 위해 1년 간 활동을 중단했다.[E] 복귀 후 다시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1962년엔 탠저린 레코드를 설립했다. 1970년대 중반엔 다른 레이블을 설립했고 애틀랜틱 레코드를 통해 앨범을 발매했다.[D]

그는 또한 1960년대의 흑인 인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마틴 루터 킹의 친구이자 후원자였고, 1963년 이후부턴 인종 분리가 일어난 곳에선 공연을 거부했다. 인종 차별을 비판하는 노래를 작곡하기도 했다.[C]

그는 마이클 잭슨이 작곡 및 주도한 We Are the World에 참여했고, 1990년대에도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1992년엔 빌 클린턴에게 미국 국가 예술 훈장을 수여받았다.[A] 2004년 6월 10일, 콘서트 투어를 시작하려던 찰나 간질환 합병증으로 베벌리 힐스의 자택에서 사망했다.[D]

2004년 발표된 유작 앨범 <Genius Loves Company> 가 크게 히트하면서, 그래미 시상식에서 올해의 앨범상(Album of the Year)를 수상했다.

3. 여담[편집]


  • 시각장애를 가진 흑인으로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는 점에서 스티비 원더와 많이 비교된다.[6]

  • We Are the World 녹음 당시, 시각장애인인 레이 찰스는 화장실에 가는 도중 길을 잃어 헤매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관계자가 이를 보고 그를 화장실까지 친절히 안내해주었다. 그리고 그 관계자는 스티비 원더였다.(...)[7]

그의 라이브 영상을 보면 정말 분위기 잡고 부르는 곡 아니면 대부분 매우 행복한 듯이 활짝 웃으면서 노래를 부른다.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표정에서 모두 표현된다.

  • 영화 블루스 브라더스에서 카메오로 나온 바 있다. 주인공 둘이 간 악기 가게 주인인데 맹인인 가게 주인으로 나와 어느 아이가 악기를 훔치려 하자 권총을 벽에 쏴서 제압한다. 극중 노래도 잠깐 부른다.

  • 1990년 10월 6일 부터 7일까지 예술의 전당에서 비비킹과 함께 내한공연을 했었다.


  • 그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레이(영화)도 있다. 음악에 관해 그의 성공과 방황, 재기를 잘 나타낸 영화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 해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과 음향믹싱상을 동시 수상했고 다른 부문에도 이름을 올려 경쟁했다.


  • 그는 두 번 이혼했고, 12명의 자녀를 두었다.[D]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로 그는 여자관계가 좀 복잡했다.

  • 자신이 맹인이라는 것을 조금도 단점이라 생각하지 않았다.[8]

  • 미국 시트콤 못말리는 유모(The Nanny)에도 카메오 출연한 적이 있다.


4. 대표곡[편집]


  • I Got a Woman

  • What'd I Say: 한 클럽에서 공연하던 중 준비한 레퍼토리가 다 떨어졌는데 시간이 남아서 즉석에서 키보드 리프 하나에 가사를 붙여 시간을 때웠는데, 뜻밖에 큰 호응을 얻어 정식 싱글로 발매되었다. 소울 장르의 효시 중 하나이자, 레이 찰스를 미국 메인스트림에 올려놓은 히트곡이다.




  • Unchain My Heart[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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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일린과는 자녀가 없었고, 3명은 델라 소생이다. / Matthew Whitaker, Icons of Black America: Breaking Barriers and Crossing Boundaries [3 volumes\]: Breaking Barriers and Crossing Boundaries [Three Volumes\] (ABC-CLIO, 2011), 176.[2] 실제로 방문해보면 레이 찰스 기념공원 같은 시설도 있고 일생을 다룬 간단한 소개문도 있다.[A] A B C DS6 EP8: RAY CHARLES: THE GENIUS OF SOUL: About Ray Charles,” PBS, 2006년 3월 17일.[3] Cassandra Tate, “Charles, Ray (1930-2004),” HistoryLink.org, 2004년 6월 17일.[B] A B CRay Charles: American musician,”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D] A B C D E F G H Jon Pareles, “Ray Charles, Who Reshaped American Music, Dies at 73,” 뉴욕 타임즈, 2004년 6월 10일.[C] A B C D E F G H Brent Campbell, “RAY CHARLES (1930-2004),” Blackpast, 2007년 1월 29일.[E] A BRay Charles, American Legend, Dies at 73,” NPR, 2004년 6월 11일.[4] “Billboard”, 1966년 10월 15일, 43.[5] Biography.com Editors, “Ray Charles,” Biography: Historical and Celebrity Profiles, 2014년 4월 2일.[6] 그리고 스티비 원더의 데뷔 콘셉트 중 하나가 "꼬마 레이 찰스"였으며, 이를 이용해 레이 찰스 헌정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다.[7] 둘은 같은 시각장애인이다.[8] Ian Dove, “Ray Charles: 'Genius? That's nothing to be ashamed of' – a classic interview더 가디언, 2015년 3월 11일.[9] 조 카커가 커버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히트한 버전은 레이 찰스의 원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