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널드 레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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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40대 대통령
로널드 윌슨 레이건
Ronald Wilson Reagan


파일:Official_Portrait_of_President_Reagan_1981.jpg

출생
1911년 2월 6일
미국 일리노이 주 탬피코
사망
2004년 6월 5일 (향년 93세)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벨에어
묘소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도서관
재임기간
제40대 대통령
1981년 1월 20일 ~ 1989년 1월 20일
서명
파일:레이건 대통령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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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잭 레이건[1]
어머니 넬리 윌슨 레이건[2]
배우자
제인 와이먼[3] (이혼)
낸시 레이건[4] (재혼)
자녀
장녀 모린 레이건[5]
장남 마이클 레이건[6]
차녀 크리스틴 레이건[7]
삼녀 패티 레이건[8]
차남 론 레이건[9]
학력
딕슨 고등학교 (졸업)
유레카 대학교 (경제학·사회학 / B.A.)
병역
파일:미합중국 육군기.svg 미합중국 육군 소령 전역 (육군 항공대)[10]
종교
개신교 (PCUSA)[11]
신체
185cm, O형
최종 당적




파일:48.t56dee88e.m1200.tif.pv.xOFZmeH16lVIJ3a6s.jpg

백악관 공식 초상화

1. 개요
2. 약력
5. 대한민국일본과의 관계
6. 기타
6.1. 일화
6.2. 대처와의 비교
7. 어록
8. 소속 정당
9. 선거 이력
10. 대중 문화에서의 모습
11. 둘러보기




제40대 미국 대통령 취임 선서[1]


1. 개요[편집]


"LET'S MAKE AMERICA GREAT AGAIN''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

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로널드 레이건의 대선 캠페인 슬로건.[2]

미국의 제40대 대통령.

1911년 일리노이 주에서 태어나 1937년부터 1965년까지 영화배우로 활동했고, 제2차 세계대전 때 공군 기지의 부관으로 종군한 뒤 1962년 공화당에 입당했다. 1967년부터 1975년까지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냈으며, 1980년 대선에서 민주당지미 카터 당시 대통령을 상대로 승리하고 1984년 월터 먼데일을 상대로 재선에 성공하여 1981년부터 1989년까지 임기를 지냈다. 퇴임 후 알츠하이머 병과 투병하다 2004년 향년 93세로 사망했다.

당시 역대 최고령의 나이로 취임한 미국 대통령이자[3] 미국 대통령 선거 사상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다음으로 가장 큰 선거인단 수로 이긴 대통령이었다.[4] 뛰어난 언변을 앞세워 국민들과의 소통을 중시하여 위대한 소통가(the Great Communicator)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5]

영국마가렛 대처와 1980년대의 신자유주의 체제를 건축한 대표적인 지도자로 손꼽힌다. 또한 미국 보수층과 공화당 지지자들의 정신적 지주에 근접한, 80년대 이후 현대 미국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존재로 평가되며, 이에 21세기 현재의 미국 공화당은 레이건 행정부를 계승하는 정당임을 자처하고는 한다. 일례로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 공화당 경선에서는 도널드 트럼프가 레이건의 1980년 대선 선거구호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를 재사용하여 캐치프레이즈화하였다.


2. 약력[편집]


  • 193?. WOC 라디오방송국 스포츠아나운서
  • 1947. 미국노동총연맹 산하 영화배우협회장
  • 1947.11. 제9대 영화배우조합장
  • 1959.11. 제13대 영화배우조합장
  • 1967.1. 제33대 캘리포니아 주지사[6]
  • 1981.1. 제40대 미국 대통령
  • 1993.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 수훈
  • 2000. 의회 명예 황금 훈장 수훈


3. 생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로널드 레이건/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1.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 198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로널드 레이건이 당선되면서 구성된 행정부다.


4. 평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로널드 레이건/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대한민국일본과의 관계[편집]


전두환박정희의 핵무장 프로그램과 미사일 개발을 중단시키면서 레이건의 대통령 취임 후 최초로 백악관을 방문한 외국 정상이 되었고, 이후로도 여러 차례 미국을 방문한 바 있다. 레이건 역시 1983년에 미국 대통령으로서 방한을 하는 등[7] 찰떡같은 한미공조를 이뤄냈다. 오늘날에도 한국의 보수 우파 성향 정치인들언론들이 유난히 좋아하는 대통령이며, 당대 민주화 운동가들 입장에선 한반도 전술핵무기 배치, 농산물 등 수입개방 때문에 안 좋은 소리를 들었다.

다만 그렇다고 전두환의 뒤를 무조건 봐준 것은 아니라서 1987년 6.10 민주 항쟁 때에는 전두환 정권에게 압박을 가해 군대가 투입되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게 하면서(일명 레이건 친서 사건), 유혈사태가 일어나는 걸 방지하여 한국이 민주화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2016년에 공개된 외교문서를 보면, 전두환 측에서 제5공화국 헌법에 대한 공개 지지를 표명해달라고 했지만 내정간섭을 우려해 거절했다.# 그러나 6월 민주 항쟁에서 미국은 6.29 선언을 종용하고 노태우의 대통령 당선을 지지하기도 했다.[8] 직선제가 16년만에 처음으로 치뤄진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미국은 대놓고 노태우의 대통령 당선을 축하하는 논평을 내서 한국 내의 반미세력들을 자극하기도 했다. KBS MBC

당시 카터 행정부와 마찬가지로 신군부에 의해 수감되고 사형판결을 받은 김대중을 구명하기 위해 외교채널을 통해 노력했으며 신군부를 승인하고 전두환을 백악관에 초청했던 것은 김대중의 사면과 미국망명이라는 반대급부를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라는 시각이 있다. #

하지만 한국인 최초의 미 국무성 통역가 통 김(Tong Kim, 한국명 김동현)의 증언에 따르면 퇴임 이후 알츠하이머 때문에 서서히 기억력이 떨어지고 있었던 레이건은 전두환과 만나는 4번째 회담임에도 불구하고 회담을 30분 남겨둔 브리핑 자리에서 전두환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러자 다급해진 참모들이 레이건에게 전두환을 "서울에 방문했을 때 (서울에 있는) 학생들을 매우 부정적으로 말하던 사람"이라 설명했다. 레이건은 그때야 비로소 "아, '학생들은 죄다 공산당(빨갱이)'이라고 했던 그 친구!"라며 기억해냈다.

그리고 일본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와 절친했다. 오죽하면 그들이 서로를 불렀던 호칭인 론-야스라는 말이 미일 정상간의 우애를 상징하는 관용어로 자리잡았을 정도. 조지 워커 부시고이즈미 준이치로가 그런 관계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런 두 정상 간의 친밀함에도 불구하고 플라자 합의 등 미국의 대일 통상 압박은 어느 때보다 강했다.

6. 기타[편집]


  • 그의 집권 시기는 한국에서 5공이 막 시작되고, 6공의 출범기와도 겹친다. 대통령으로는 전두환의 재임기 전부[9]노태우의 임기 첫해에 해당한다.

  • 당선 당시 만 69세로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최고령이자 이혼 경력이 있던 최초이자 당시에는 유일했던 대통령이었다.[10] 사실 지금도 할리우드에서는 이혼이 많지만 당시 할리우드 배우들은 이혼이 더 많았는데, 전 부인 제인 와이먼처럼 4~5번 이상 이혼하고 혼자 늙는 것이 평균 수준일 정도였다.[11] 2차대전 이전 할리우드에서 유명했던 배우들 중 2번 이상 이혼 안 한 배우들이 드물 수준이라 레이건처럼 단 한 번 이혼한 것은 당시 할리우드에서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에는 미국뿐만 아니라 소련 등 공산권 여배우들도 이혼이 많았고 한국과 일본 연예계가 그나마 이혼이 적은 편이었다.



  • 상술되었듯 역대 미국 대통령들 중에서 이미지 좋기로는 순위권에 드는 인기남이지만, 되려 그 때문에 이미지 메이킹에만 치중해서 자신의 정치적 실책을 가리려 하는 교활한 정치인 이미지도 있다. 의외로 진보 측뿐만 아니라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이런 이미지가 있는 편인데, 여기에는 레이건 최대의 실책 중 하나인 이란-콘트라 사건도 큰 요인이 되었다.

  • 나이 탓에 임기 초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피부암, 대장 용종 등을 제거하기 위해 심심찮게 수술대를 오르내리며 부시 부통령이 몇 시간 단위로 권한대행을 반복했다. 1기 임기부터 보청기를 끼고 다녔는데 그 보청기가 초대박을 터뜨렸다고 한다. 이후 알츠하이머 진단은 1994년에 받았지만 아들 로널드 레이건 주니어의 주장처럼 퇴임 이전부터 점점 인지능력 저하의 징조가 보였다는 증언도 있다.

  • 1984년, 앨범 Thriller로 국제적인 슈퍼스타가 된 마이클 잭슨백악관으로 초대해 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이는 앞서 기술한 흑인들에게 받는 부정적인 평가에 대해 최초의 흑인 슈퍼스타를 직접 대면함으로써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오려고 한 의도였다.

  • 레이건이 임상심리학이나 정신의학에서 알츠하이머의 대표적인 예로 소개된다. 2011년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딸이 타임지에 기고한 수기엔 그의 말년의 생활상이 상세하게 묘사되어있다. 주위 사람들이 대통령임을 알아보고 인사를 해도 딸에게 '저 사람이 어떻게 날 아냐?'라고 물어봤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차남 로널드 주니어는 자신의 부친이 재임기간에 알츠하이머 조짐이 보였다는 회고록을 출판했고 그로 인해 다른 남매들에게 사실 왜곡이라고 비난을 받았다.


  • 레이건 이후에 당선된 모든 대통령들은 키가 180cm를 넘었다. 이와 반대로 대한민국 대통령 중 180cm 이상이었던 사람은 최규하(182cm)가 유일하다.

  • 2011년에는 두 번째 결혼 전에 잠깐 데이트했던 배우 파이퍼 로리(Piper Laurie)가 회고록을 썼는데, 레이건은 잠자리에서 별로 신통치 않았다고 한다. 로리는 18세였고, 레이건은 무려 39세였으며 둘은 영화에서 부녀사이로 출연하다가 눈이 맞았다고. 40분이 넘게 거칠게만 힘을 쓰는 레이건에게 불평했더니 "너 무슨 문제가 있는 거야. 이쯤했으면 오르가즘을 여러 번 느꼈어야지. 넌 병원에 가봐야 해('There's something wrong with you. You should have had many orgasms by now—after all this time. You've got to see a doctor.')"라고 했다고 한다. 자신감이 넘쳤던 모양이다. #

  • 축구선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이름은 로널드 레이건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호날두의 어머니가 레이건의 팬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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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전에 젤리빈 애호가로 유명했다. 백악관 회의 때 각료들에게 돌리거나 외국 정상들에게도 미국 대통령 문장이나 백악관 로고가 붙은 젤리빈을 선물할 정도였으며, 레이건 사후 유족들은 그의 빈소에도 젤리빈 한통을 놓아 고인을 기렸다.

  • 일리노이 출신의 백인답게 시카고 컵스의 팬이었다고 하지만 그가 살아있던 시기에는 단 한번도 컵스가 우승하지 못해 재임 기간 중에는 남의 팀을 백악관으로 초대해야 했다. 시카고 컵스는 그가 태어나기 3년 전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한 이후 단 한 번도 우승을 하지 못했고[12] 그가 죽고 난 후 12년이 지나고 나서야 월드 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껴안았다. 근데 레이건은 단순한 팬을 넘어서 라디오 아나운서 시절에 시카고 컵스의 전속 중계 아나운서를 했었다.

  • 명색이 한때 할리우드 배우답게, 할리우드 배우들과 회담을 가진 적이 있다! 존 웨인, 제임스 스튜어트, 딘 마틴, 프랭크 시나트라와 함께 있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저 넷 모두 공화당원이라는 것. 그리고 레이건은 '나는 존 웨인 같은 배우와도 영화를 찍은 적이 있기 때문에 지미 카터와의 TV토론이 그다지 떨리지 않았다'와 같은 명언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한데, 실제로 영화계를 떠나서 공화당 정치인이 된 뒤 존 웨인을 거의 동등한, 아니 더 높은 위치에서 회담하게 되었다.[13] 전체적으로 연예계에 보수주의자들이 많았던 1930년대 이전 출생 세대 연예계[14]에서는 인기가 많지만 그 이후 출생 세대 연예계에서는 주도적으로 비판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 그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40년 뒤에, 반대쪽 당에서 비슷한 형태로 대통령이 된 분이 생겼다. 둘 다 취임 당시에 최고령의 나이[15]에 당선되었고, 테쿰세의 저주에 해당하는 선거에서 당선되었으며, 4연속 정권연장을 깨고 4년만에 정권교체[16]를 이루었다.

  • 로널드 레이건의 배우 시절 우연스럽게도 'Storm Warning'에서는 도리스 데이와 비중있는 조연으로 출연하고 'The Winning Team' 에서는 도리스 데이와 주인공으로 출연한다. 'The Winning Team' 에서 로널드 레이건의 아내 역할로 출연한 도리스 데이는 로널드 레이건을 매우 매력적이라고 이야기 했으며 베벌리힐스에서 짧은 연애를 하며 오랜기간 친구로 남았다.


6.1. 일화[편집]


그의 일화들을 보면 그는 평소 엄청난 입담과 유머 센스를 자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유머가 미국인들에게 크게 다가와 현재 미국인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대통령으로 꼽히게 된 큰 근거가 되었다.

  • 배우였던 시절에 유일한 히트작이 《폭풍우의 청춘》이라는 영화였는데, 레이건 재임시절 이 영화를 반복시청하는 것이 레이건에 대한 충성심의 증표라는 우스개가 있다. 어느 정치인은 무려 60번을 봤다고 유머러스하게 주장했다. 첫 결혼상대였던 제인 와이먼[17]은 이혼 사유를 묻자 "《폭풍우의 청춘》은 이제 질리도록 봤으니까"라고[18] 말했다고 한다. 물론 이건 그냥 하는 말이고 실제 이혼 사유는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얼마 못 가 병으로 죽게 된 것이 계기였다. 이후 방황하던 와이먼이 동료배우와 바람을 피우며 이혼을 요구해 레이건은 무척 힘들어했다고 한다. 이런 뒷사정이 있어 이혼전력이 레이건에겐 치명상이 아니었던 측면이 있다. 그래선지 레이건은 평생 첫 번째 아내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 간혹 동료 정치인들과의 모임에서 그의 이혼이나 전처가 화젯거리가 되면 정색을 하는 탓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고. 사실 지금도 할리우드에서는 이혼이 많지만 당시 할리우드 배우들은 이혼이 더 많았는데, 전 부인 제인 와이먼처럼 4~5번 이상 이혼하고 혼자 늙는 것이 평균 수준이었을 정도였다. 2차대전 이전 할리우드에서 유명했던 배우들 중 2번 이상 이혼 안 한 배우들이 드물 수준이라 레이건처럼 단 한 번 이혼한 것은 당시 할리우드에서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미국뿐만 아니라 소련 등 공산권 여배우들도 이혼이 많았고 한국과 일본 연예계가 그나마 이혼이 적은 편이다.

1971년경, 중화인민공화국중화민국을 밀어내고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인정되었을 당시, 매우 불쾌해하며 미국이 국제기구를 탈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뿐만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지국인 탄자니아 대표단이 승리의 춤을 추자 그들을 '원숭이', '식인종'에 비유하며 비난했다.
  • 단, 로널드 레이건이 한창 대통령에 재임했을 당시에는 덩샤오핑이 한창 개혁개방 정책에 나서며 서방과의 우호관계 구축에 노력했던지라 레이건도 중국과의 친교를 다졌고, 1984년에 중국에 방문하기도 했다.[19]

  • 1984년 대선 당시 경쟁 후보였던 민주당의 월터 먼데일과 레이건의 2차 대선토론은 미국 대선토론 역사상 명장면 중 하나이자 레이건의 입담을 나타내는 예시로 꼽힌다. 사회자가 레이건에게 너무 고령이라 직무수행에 차질이 있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하자 "전 나이를 가지고 문제를 삼지 않을 것을 이 자리에서 약속드립니다. 상대 후보가 너무 젊고 경험이 부족하다는걸 절대 정치적으로 공격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재치있게 받아친 것.[20] 좌중은 웃음바다가 됐고 먼데일도 웃을 수 밖에 없었다.[21] 이후 레이건은 49개주에서 선거인단 525 대 13로 승리를 거두는 압승을 기록했고 이는 미국 대통령 선거 사상 최대의 선거인단수로 승리한 선거였다. 그만큼 그의 인기가 얼마나 많았는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승리를 거두지 못한 곳은 먼데일의 고향미네소타와 골수 민주당인 워싱턴 D.C 뿐이었다. 먼데일은 최초의 여성부통령 후보인 제럴딘 페라까지 앞세워 진보적 가치를 내세우려고 했지만, 오히려 중도층의 반감을 사서 역사적인 패배를 당했다. 이후로도 상상을 초월한 압도적인 패배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고 한다. 본인이 엄청난 인기를 구가한 것 뿐만 아니라 공화당의 위치를 강경보수로 재정립하여 흔들리던 위상을 회복시킨 것으로 인해 정치 전문가들은 그를 공화당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로 표현하기도 한다.
    • 다만 이렇게 본다면 재임기 내내 인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건 또 아니었다. 재임 초기에 금리가 20%에 달하고 실업률이 10%를 넘는 경기침체의 후폭풍으로 인기가 폭락해서 1982년 중간선거에서 패배하기도 했고, 재임 후반기에는 이란-콘트라 사건과 블랙먼데이 사건의 여파로 인기가 폭락했는데, 1988년 대통령 선거에서 조지 허버트 부시가 네거티브 전략을 써서 지지율을 올리기 이전까지 민주당으로의 정권교체가 예상되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 언젠가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남아프리카 공화국데즈먼드 투투 주교의 방문을 받았는데, 투투 주교는 레이건의 면전에서 미국과 레이건의 강경정책을 비판했다. 투투 주교가 돌아간 후 누군가가 "투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묻자, 투투(TuTu)라는 이름의 운율에 맞춰 "So-So(그저 그랬어요)"라고 말해서 좌중이 뒤집어졌다고. 이 일화는 레이건의 장례식날 한 번 더 언급되었는데, 이 때도 폭소가 터졌다. 마지막 가는 날까지 사람들을 웃긴 셈.

  • 대통령 후보 시절 카터와 TV 토론을 벌였는데, 토론이 끝난 후 참모들이 "처음 토론에 나선 것 치고는 꽤 훌륭하셨습니다."라고 말하자 덤덤하게 "무슨 소리! 나는 존 웨인과 같이 촬영한 적이 있는데!"라고 받아쳤다고 한다. 무명배우인 자신이 존 웨인 같은 대배우와 같이 촬영 할때도 안 떨었는데 카터와 맞서서 덜덜 떨 까닭이 있겠느냐는 농담으로 자신이 무명배우였다는 걸 강조한 자학개그이자, 동시에 당시 현직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가 사실 존 웨인보다 못한 인물이라는 식으로 상대를 돌려 깐 것이기도 하다.[22]

  • 카터와의 TV 토론 때 카터가 자신을 비판할 때 씨익 웃으면서 "또 시작이네요(There you go again)"라고 받아넘기는 행동이 명성을 얻었다. 당시의 실제 동영상은 여기서 볼 수 있다. 레이건의 이 행동은 토론에서 상당히 초조하고 불안정해 보이는 카터에 비해서 레이건은 상당히 여유있고 위트 있는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레이건의 뛰어난 이미지 활용을 보여주는 사례.

  • 뉴햄프셔 주에서의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상대방 후보 조지 H. W. 부시의 연설이 끝난후 상대방 후보를 지지하는 탤래그래프 지의 편집장인 진행자 존 브린이 음향 담당자에게 "레이건씨의 마이크를 꺼버려."라고 하자 "미스터 그린, 이 마이크를 쓰는 비용은 내가 내고 있소."라고 일갈했다. 비용 얘기가 나온 이유는 저 경선토론회를 여는데 들어간 비용을 전적으로 레이건 선거본부에서 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본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말그대로 폭풍간지. 브린을 그린이라고 부른 것은 한마디로 이름도 헷갈릴 정도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사람이 토론에 감놔라 배놔라 한다는 뜻.

  • 생사를 다투는 상황에서도 꽤 위트있는 농담을 했는데, 1981년 암살 시도로 부상을 입어 들것에 실려나갈 때는 자신의 상처 부위에 응급처치를 하던 간호사들에게 "내 아내 낸시에게 허락은 받고 만지는 건가?"라는 말을 했고, 수술실에 도착했을 때는 의사들에게 "여러분들이 공화당원이기를..."이라는 말을 했다.[23] 그리고 그 때문인지, 살았다. 병원에서 의식을 회복하자마자 아내 낸시 레이건에게 "여보, 수그려야 하는데 총을 피한다는 것을 깜빡했어(Honey, I forgot to duck). 내가 아직 영화배우였으면 피했을텐데"라고 너스레를 떨었다고. 이 말은 뎀프시롤로 알려진 미국의 유명한 복서 잭 뎀프시가 1926년 진 터니에게 패한 후 자신의 아내에게 한 유머로 유명한데 적절하게 리바이벌한 것.


  • 해당 총격사건이 있었던 약 2달 뒤 베를린에서 연설을 할 때 커다란 풍선이 터지는 일이 있었다. 마치 총소리처럼 들리는 해당 풍선 소리가 제법 커서 좌중의 이목이 집중되었으나 레이건은 움찔하지조차 않았고 잠시 뒤 "빗나갔군요.(Missed me.)"라고 말한 뒤 연설을 계속하려 했다. 당연히 좌중은 환호갈채.

  • 대통령 재임 시절 야당인 민주당을 불황의 이유로 들며 비판하자, ABC 뉴스의 샘 도널드슨이 "최근 지속 경기침체에 대해 연준의 실수와 국회탓을 하는데 자신의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을 하자, "책임이 좀 있죠.[24] 저도 오랫동안 민주당원이었으니까요"('Yes, because for many years I was a Democrat)"라고 응수했다.

  • 재선에 도전 중이던 1984년 8월 11일에는 대국민 주례연설 직전에 "국민 여러분. 저는 방금 소련을 멸망시킬 명령을 승인했습니다. 5분 후에 우리 군의 폭격이 시작될 것입니다."라는 흠좀무한 멘트를 남겼다. 사실은 방송 직전에 입을 풀기 위한 조크였고, 실제 방송에도 나오지 않았지만 소련군에서 이 내용을 인지하고 약 30분간 긴급대기 태세에 돌입했다는 후문이 있다. 원본

  • 위트 있는 레이건도 멕시코에서 어리버리를 탄 적이 있는데, 멕시코 국민들을 상대로 연설을 했는데 그들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레이건이 연설을 마친 후 한 멕시코 고위관리가 일어나 스페인어로 연단에서 연설을 했는데 그의 연설에 멕시코 국민들은 박장대소했으며 연설이 끝나자 열화와 같은 박수 갈채를 받았다. 머쓱했지만 당황한 기색을 감추기 위해 레이건도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는데 옆에 있던 멕시코 주재 미국 대사가 이렇게 귀띔했다. "저 사람은 각하의 연설을 통역한 것 뿐입니다."


6.2. 대처와의 비교[편집]


파일:external/resources0.news.com.au/614988-ronald-reagan-with-margaret-thatcher-in-1982.jpg

신자유주의의 서막을 여는 지도자로서 로널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는 서로 많이 비교된다.

비슷한 시기 영국의 마거릿 대처가 호감도와 평가가 지역, 계층, 성향에 따라 너무 극명하고 극단적으로 갈리는 데 비하면, 레이건은 물론 정치인으로서의 평가는 갈리긴 하지만 '개인'으로서의 호감도와 인기는 전반적으로 높은 편이다. 워낙 대외적으로 원숙하고 위트있는 이미지를 구축했기에,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정치적인 평가와는 별개로 레이건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호감을 보이는 Reagan Democrat라 불리우는 이들이 적지 않다.

영국은 상원 선거를 따로 치르지 않고, 하원의 권한이 막강하다 보니 마거릿 대처가 별다른 견제를 받지 않고 업무를 수행했던 데 반해, 당시 레이건 정권은 상원은 공화당이 장악했긴 했지만[25] 하원은 민주당이 우세였기에[26] 정책 수행에 견제를 받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대처보다는 온건했다. 실제로 레이건은 당시 민주당 출신 팁 오닐 하원의장과 수시로 전화 통화 및 대화를 하였고 야당인 민주당을 상대로 적극적으로 설득하고 대화하는 자세를 보였다. 뿐만 아니라, 재치있는 언변과 훌륭한 연설을 통해서 국민들에게 정책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능숙한 대화와 소통의 자세를 보였다. 또한 챌린저호 폭발사고 당시에 당일에 사고로 충격을 받은 미국 국민들에게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감동적인 명연설을 하여 큰 지지를 받기도 했다.

또한 한국 입장에서는 레이건은 6월 항쟁 당시 전두환 정권에 압력을 행사하여 군사력 투입을 막는 등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측면이 매우 크다. 이 점에서 오히려 인권 외교를 내세우면서도 5.18 민주화운동에서 신군부를 억제하지 못해 참극을 초래했던 지미 카터보다 좋은 평가를 받기도 한다.

아무튼 레이건의 평가가 보다 긍정적인 것은 전임자인 지미 카터가 자신의 편협한 사상에 기초한 독설을 미국 국민들에게 퍼부어서 질리게 만들었던 것도 있고 역시 카터가 임명한 폴 볼커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을 유임시켜 고금리정책을 집행해서 실업률이 초기에 상승하긴 했지만, 부실기업들의 구조조정을 통해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국가경제의 경쟁력을 높였기 때문이었다.


7. 어록[편집]


배우 출신답게 재치있는 언변과 깔끔하고 위트있는 어투를 구사했고, 이런 어휘력으로 자신의 인간미를 살리면서 인기 비결 중 하나로 삼았다.[27] 대통령 임기가 시작된 이후에도 자신의 장점을 잘 살려 토요일 대통령이 직접 자신의 생각을 밝힌 라디오 국정연설을[28] 생방송으로 진행해왔으며 특히 취임 후 첫해 무려 7회에 달하는 TV 국정연설을 해왔다. 이러한 매스미디어를 적극 앞세워, 자신의 장기인 위트넘치는 화술으로 재선 당시 압도적 지지율로 임기를 연장시키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29]

대선 당시 TV 토론의 수혜를 입었다는 평가가 있다. 당시 레이건은 카터의 공격에 "또 시작이군요." 라는 식으로 여유있게 웃으며 받아쳤고, 이러한 자신있어 보이는 레이건과 뭔가 짜증나 보이는 카터의 모습이 대조적인 이미지로 TV 시청자들에게 어필하여 결과적으로 대선 승리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또한 TV 연설에서 카터는 "지금 미국의 문제는 국민 너희들이 잘못해서 그렇다." 라는 '불쾌한 연설(malaise speech)'를 한 데 비해, 레이건은 국민들을 꾸짖는 대신 '미국을 다시 발전시키겠다.' 라며 자신이 희망의 등대가 될 것을 어필해서 큰 효과를 봤다. 사실 TV에 멋있게 나오는 것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배우이니... 물론 이 당시 이미 레이건이 지지율에서 꾸준히 앞서고 있었기 때문에 TV가 결정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는 평가도 많다. 카터의 인기가 워낙 바닥을 기기도 했고.

1980년 대선 유세 중 그를 반대하는 좌파 시위대들이 야유를 부리는 통에 연설 진행을 못하자 일갈하는 장면. "Oh, Shut up."

병원으로 이송된 레이건 전 대통령은 사건 발생 몇 주 후 일기에 "총을 맞는 것은 아프다."며 "나를 쏜 젊은이에 대해 증오심을 느꼈으나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를 시작했다"고 썼다. 그는 또 "나는 낸시가 그곳에 있는지 찾으려고 눈을 떴다. 그녀가 그곳에 없는 날을 맞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며 낸시 여사에 대한 각별한 애정도 드러냈다.

If history teaches anything it teaches that simple-minded appeasement or wishful thinking about our adversaries is folly. It means the betrayal of our past. the squandering of our freedom.

“만일 역사가 가르쳐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순진한 유화정책이나 적에게 희망적인 생각을 가지는 행위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가 주는 가르침에 대한 배신이며 우리의 소중한 자유를 부수는 행위다.”

- 1983년 3월 8일 '악의 제국' 연설 中


"A nuclear war cannot be won and must never be fought."

핵전쟁은 승리가 불가능하며, 벌어져서도 안된다.

--

1984년 1월의 의회 연두교서 중에서. 불과 1년 전의 '악의 제국' 연설에서 나타났던 강경함과는 대조적이다.


"I now begin the journey that will lead me into the sunset of my life. I know that for America there will always be a bright dawn ahead."

저는 이제 인생의 황혼을 향한 여정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저는 미국이 언제나 빛나는 아침을 맞을 것이라 믿습니다.

1994년 자신이 알츠하이머로 투병중인 사실을 국민에게 알리는 편지. 그가 사실상 마지막으로 남긴 공식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위대한 소통가'로서 그의 명성을 보여준 사례들 중 하나.


"Mr. Gorbachev, open this gate. Mr. Gorbachev, Tear down this wall!"

고르바초프 서기장님, 이 을 여십시오. 고르바초프 서기장님, 이 장벽을 허무십시오!

1987년 6월, 베를린에서 한 유명한 연설. 이 말은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물론 동유럽 공산권의 '철의 장막' 붕괴를 상징하는 말로 잘 알려져 있다. [30]


Trust, but verify

상대를 믿되, 반드시 검증하라

원래는 소련의 속담이었는데 레이건이 가져와서 잘 써먹었다. 소련과의 군축협상을 임하는 자세를 설명하는데에 썼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만약 그들이 빛을 보지 못한다면 그 열기를 느끼게 하라

자신의 감세정책을 지원하기 위해 한 말. 의원들이 감세정책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국민 여러분들이 적극적으로 그들에게 압력을 가하라는 뜻이다. 후에는 낙수효과를 뜻하는 상징적인 말로도 받아들여졌다.


"불경기란 당신의 이웃이 실직할 때를 말합니다. 불황이란 당신이 실직할 때를 말합니다. 경기회복이란 지미 카터가 실직할 때를 말합니다."

80년 선거전 당시 어록으로 카터의 경우 재선 도전이었다. 원래는 33대 대통령인 해리 S. 트루먼이 한 말로 그 뒤에 카터를 까는 표현을 추가한 것.


"How do you tell a Communist? Well, it’s someone who reads Marx and Lenin. And how do you tell an anti-Communist? It’s someone who understands Marx and Lenin.” "공산주의자는 마르크스레닌을 읽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반공주의자는 마르크스와 레닌을 이해한 사람입니다. "


“Freedom is never more than one generation away from extinction. We didn't pass it to our children in the bloodstream. It must be fought for, protected, and handed on for them to do the same, or one day we will spend our sunset years telling our children and our children's children what it was once like in the United States where men were free.” "자유가 말살되는 데에는 단 한 세대도 걸리지 않습니다. 자유는 우리 후손들에게 혈통을 통해서 유전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는 쟁취해야하며 지켜야 되고 후손들도 그런 자유를 누리라고 물려주는 것입니다."


"급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날 깨워도 좋소이다. 국무회의 중이라도 얼른 나를 깨워주시오."

레이건은 국무회의 중에 자주 졸았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본인이 자학개그를 한 것.[31]


"경제학자란 현실에서 발생하는 뭔가를 보고 그게 이론적으로 성립할지 여부를 궁금해 하는 사람이다."


"제가 보청기를 착용한다는 건 비밀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로 며칠 전에 갑자기 작동이 잘 안 됐습니다. 알고 보니 KGB제 보청기에 도청장치를 했더라고요."


"소련과 미국 헌법은 모두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다. 차이가 있다면 미국은 표현 이후의 자유도 보장한다는 것이다."


"미국인소련인이 자기 조국 자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인이 "우리 나라에서는 백악관으로 쳐들어가서 대통령의 면전에서 책상을 두드리며 '대통령 각하, 난 당신이 이 나라를 다스리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자 소련인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저도 크렘린으로 쳐들어가서 '서기장 동무, 난 레이건 대통령이 자기 나라를 다스리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라고 할 수 있다고요."

고르바초프에게 이 유머를 들려줬는데 그도 웃었다고 한다. 영상


Future doesn't belong to the faint-hearted. It belongs to the brave.

"미래는 나약한 자들이 아니라 용감한 자들이 만들어낸다."

1986년 1월의 우주왕복선 챌린저호 폭발 참사를 추모하는 대국민 연설 중에서.


Government is like a big baby - an alimentary canal with a big appetite at one end and no responsibility at the other.

"정부란 커다란 아기와 같아서 식욕은 왕성하지만 배설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못한다."



8.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 - 1962
입당


1962 - 2004
정계 입문
정계 은퇴
사망


9.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필요시 선거인단)
당선 여부
비고
1966
미국 주지사 선거
캘리포니아


3,742,913 (57.55%)
당선 (1위)
초선
1970
미국 주지사 선거
3,439,664 (52.83%)
재선
1980
미국 대통령 선거
미합중국
43,903,230 (50.75%, 489명)
초선
1984
미국 대통령 선거
54,455,472 (58.77%, 525명)
재선


10. 대중 문화에서의 모습[편집]


백 투 더 퓨처 시리즈 1편에서 1950년대로 간 마티가 브라운 박사를 만났을 때, 박사는 마티에게 네가 사는 시대의 대통령은 누구냐고 묻는다. 마티가 레이건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하자 "로널드 레이건? 그 영화배우? 그러면 부통령은 누구야, 제리 루이스? 그러면 영부인은 제인 와이먼이겠군!"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후에 마티가 카메라로 녹화된 방송을 티비로 보여주자 브라운 박사는 "왜 대통령이 영화배우여야 됐는지 알겠구나. 텔레비전에서 호감으로 보여야 할테니 말이다."라고 감탄한다. 당시 영화 제작진들은 '괜히 이 장면을 넣었다가 큰 일 나는 거 아닌가'하고 벌벌 떨었지만, 정작 레이건 대통령은 이 대사가 나오는 부분을 계속 돌려봤을 정도로 아주 좋아했었다고 한다. 배우 이름을 외울 수 있었던 것은 레이건이 출연한 영화 몬타나의 여걸이 힐 밸리에서 막 상영 중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레이건은 1편 개봉 후 이듬해인 1986년 2월 4일 연두교서에서 백 투더 퓨처의 대사 하나를 인용하기도 했다.해당 부분바로 "Never has there been a more exciting time to be alive, a time of rousing wonder and heroic achievement. As they said in the film 'Back to the Future,' 'Where we're going, we don't need roads."이다.



레이건의 태도를 비꼬는 새터데이 나잇 라이브 스킷 '레이건: 흑막'이 있다. 대통령이 겉으로는 헐헐거리는 인자한 나이든 인물로 연기하지만 사실은 뒤에서 모든 스캔들을 배후조종하는 흑막이라는 내용으로 당시에 제법 큰 반향을 일으켰다. 레이건이 "자네가 물러나줘야겠네"라며 희생양으로 삼는 대상은 도널드 리건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이란-콘트라 사건 당시 레이건 측근들로부터 '당신이 백악관 관리를 못한 총체적인 책임을 지고 물러나서 대통령을 지키라'는 압박을 받고 사임한 일을 비꼬는 대목이다. 사임 직후 폭로에 가까운 회고록을 출판하는데, 이 책에서 낸시 레이건이 점술가에게 국정을 자문했다는 것을 처음 공개하였고, 자신은 영부인과 그 측근들이 벌이는 농단을 막으려고 애썼다고 주장했다. 참고로 이 사람 성은 Regan으로 레이건과 비슷하다.

SCP 재단에선 취급이 좋질 않다. 암살 미수 사건 등 그의 정치 여정을 소재로 한 만화시리즈(SCP-095)가 SCP로 등록되어있지 않나, 심지어 자기 연설을 완전히 고인드립 수준으로 능욕한 고어 괴영상(SCP-1981)이 나왔었다.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에서는 무명 배우가 아니라 그럭저럭 유명한 배우로 성공하지만 미국 내전 통에 의문사당한다.

데이터 이스트사에서 개발한 드래곤닌자라는 격투게임에서는 악의 닌자단에 의해 납치당한 레이건 대통령을 구출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막상 구출된 레이건 대통령은 포상이랍시고 겨우 햄버거 1개만 준다.

스티븐 킹11/22/63(11.22.63)에서는 케네디 암살 미수 사건[32] 이후 망해가는 미국에서 휴버트 험프리 다음으로 취임한다. 취임시 이란 대사관 인질 사건이 더 큰 스케일로 벌어지고 이란에 군사적 개입을 하는 바람에[33] 인질 전원이 참수되는 것으로 마무리. 다만 호메이니 치하 이란은 사형은 자주 해도 참수는 안했으니 실제로 인질들이 처형됐다면 참수보단 자기들 전매특허인 기중기 교수형이나 총살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에서 알란 릭맨이 레이건으로 나오는데 상당히 인간적인 미를 선보인다. 주인공 세실 게인즈 부부를 만찬에 초대하기도 하였고 백악관 내 흑인과 백인 직원의 임금, 승진 기회를 평등하게 했다. 세실이 은퇴하자 역대 대통령을 대표해 감사를 표한다. 하지만 세실이 은퇴 후 주미 남아공 대사관에서의 항의 시위[34]에 참가한 것을 보면 그가 남아공의 경제제재를 반대한 것이 주인공의 신념을 흔든 계기 중 하나로 보인다. 비록 미국 내의 인종차별은 아니지만 작중에서 인종 차별에 반대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 유일한 대통령으로 아이젠하워 이래 세실이 갖고 있던 '대통령이 우리를 위해 해주고 있다'는 생각을 흔든 것으로 보인다.[35]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선 영화판과 소설판 모두 등장한다. 영화판에선 레이건이 백악관 정원에서 일하는 인부에게 벽을 무너뜨리지 말라고 말했는데, 하필 주인공이 그걸 녹음해버리고, 주인공에게 녹음된 걸 전해받고 들은 고르바초프가 베를린 장벽에 대한 말인줄 알고 "레이건 놈이 벽을 무너뜨리지 말라면 우리는 무너뜨려야지!"라며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라고 지시해버린다.

테디 루스벨트 전기로 유명한 에드 모리스의 레이건 전기가 꽤 유명하다. 가상의 사람들을 통한 레이건의 이미지 구현으로 논란이 심했는데 의외로 객관적이라는게 중평이다.

마블 코믹스데드풀에서 악령으로 부활한 역대 미국 대통령들 중 한명으로 나오며, 데드풀이 배를 가르자 젤리빈이 쏟아져 나왔다.

DC 코믹스 배트맨 가족의 죽음에서 조커가 레이건 때문에 돈이 없다는 듯이 그를 깟다.

앨런 무어의 그래픽노블 왓치맨에도 역시 레이건이 배우 출신 대통령이었던 것을 개그소재로 삼는 장면이 나온다. 마지막 부분에서 로어셰크의 메모장이 배달되기 전, 삼류 일간지 신문사 편집자들이 기사에 넣을 소재가 떨어졌다고 고민하다 한 사람이 로버트 레드포드가 대선 후보로 나올거라는 얘기를 하자 하는 말, "뭐? 말도 안돼, 누가 카우보이를 백악관에 놓길 원한단 말이야?" 비록 배우는 바뀌었지만 서부 영화 출신 배우라는 점, 공화당원이라는 점[36], 리처드 닉슨 퇴임 이후에 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점, 이니셜이 RR인 점 등 누가 봐도 레이건을 패러디했다.

2006년에 나온 공포영화 "The tripper" 에서는 80년대 당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복지예산 감축으로 몇몇 정신병원이 돈을 아끼려 몇몇 정신병자들을 퇴원시켰는데 그중엔 싸이코패스 환자도 있었고, 이 환자가 자기가 어떻게 퇴원되었는지를 알게 된 뒤 레이건 대통령을 존경하다 못해 신인것 처럼 찬양하며 아예 레이건 대통령 가면을 쓰고 사람을 죽이고 다닌다. 희생자 대부분은 히피고 공화당 지지자도 죽인다.

의외로 홍콩 영화에도 출연했는데, 최가박당 3편 막판에 주인공 킹콩 일행에게 임무를 맡기러 홍콩까지 찾아온다.


펑크 록 밴드 라몬즈의 노래 중에 Bonzo goes to Bitburg라는 것이 있다. 이는 1985년 레이건이 독일 비트부르크의 국립묘지를 방문하여 헌화한 "비트부르크 논란"에 관한 곡인데, 문제는 이 국립묘지에 무장친위대 전사자들이 묻혀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한국으로 치면 현역 대통령이 야스쿠니를 방문한 격. 보컬 조이 라몬 부터가 유대계 미국인이어서 더욱 분노가 컸다. 정치적인 곡을 거의 발표하지 않은 라몬즈의 유일한 정치적인 곡. 참고로 노래 제목은 레이건 대통령의 1951년 출연작 Bedtime for Bonzo의 후속작 Bonzo goes to collage를 패러디 한 것이다. 이 영화들은 본조라는 침팬지가 인간들과 함께 살면서 겪는 해프닝을 다룬 코메디물인데, 쉽게 말해 라몬즈는 레이건을 원숭이 취급을 했다. 게다가 더 웃긴 지점은 정작 노래 제목의 기원이 된 후속작에는 출연진이 싹 다 교체되는 바람에 레이건이 아예 안 나온다.



2012년, FPS 게임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 2 인트로에서 그의 연설 장면이 잠시 나온다.[37]



그리고 블랙 옵스 시리즈의 2020년 신작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 콜드 워에서 직접 등장한다. 위 영상 1분 53초부터, 블랙 옵스 1편의 존 F. 케네디처럼 주인공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소련 간첩 페르세우스를 잡는 흑색 작전을 승인한다.[38] 그리고 배드엔딩에서는 페르세우스가 유럽 국가들에 매장되어있던 핵탄두들을 기폭시키는 것으로 인해 모든 정보들을 지우고 위기를 전두지휘하는 목소리로만 등장한다. 성우는 제프 버그만으로 레이건 성대묘사를 아주 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어 더빙판은 원로 성우 온영삼이 연기했다.

아메리칸 대드에서는 시간여행을 한 주인공 스탠이 마틴 스콜세지에게 대마초를 끊으라고 설득해서 택시 드라이버가 개봉되지 않아 버렸고 그로 인해 존 힝클리 주니어도 주디 포스터를 보지 못해 사랑에 빠지지도, 로널드 레이건을 암살시도 하지 않는 세계관이 형성되어 재선에 실패해버린다. 그 후 미국은 1년후 소련의 속국이 되어버리고 2000년대까지 소련은 건재하고 미국은 완전히 소련땅이 되어버려 어쩔 수 없이 주인공이 암살시도를 하여 원상태로 돌아온다. 여담으로 스탠이 가장 좋아하는 대통령 중 하나다.

원더우먼 1984에서는 해당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 그의 집권기였던 1984년인 만큼 당연히 등장하였는데, 살찐 레이건 느낌이 강하다. 맥스웰 로드에게 털리는 역할로 나온다.

소련이 먼저 달착륙에 성공한 대체역사물 미드인 포 올 맨카인드(For All Mankind)에서도 등장한다. 여기선 에드워드 케네디 대통령을 위협하는 보수세력의 대선주자로 등장하며, '좋았던 옛 시절로 돌아가자'는 캐치프레이즈로 미국의 중장년층에게 인기를 끈다.[39] 그리고 결국 시즌 2의 배경이 되는 1976년 대선에서 실제 역사보다 4년 일찍 케네디를 꺾고 대통령이 되었으며, 소련과의 군비 경쟁을 더욱 강화하려고 한다. 결국 미-소 간의 긴장이 더욱 심해진 끝에 달 기지에서 미국 우주비행사가 오해로 인해 소련 우주비행사를 사살하고, 그 보복으로 소련 우주비행사들이 미국 달 기지를 습격하여 많은 희생자가 나오자 소련과의 핵전쟁을 결심하지만, 중단하라는 자신의 명령을 어기고 아폴로-소유즈 테스트 프로젝트가 우주에서 성사되자 태도를 바꿔 유리 안드로포프 소련 서기장과 긴급 정상회담을 갖고 평화를 회복시킨다.

웨이스트랜드 3에서 레이건의 재림 인공지능이 등장하고 그 인공지능을 신으로 따르는 '기퍼즈(Gippers)'란 세력이 등장한다. 여사제는 영부인의 이름을 따 낸시라 자칭하며, 거대한 레이건 흉상 로봇은 눈에서 레이저 광선을 발사한다. 로봇 코뮌과 갓-피셔란 두 조직의 조직원들을 체포했는데, 갓 피셔는 레이건 교도 사람을 잡아다가 그대로 사지를 잘라버린 후에 연에 매달아놓은 것 때문에 잡혔고, 로봇 코뮌은 단순히 치료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가 붙잡혔다. 그런데 우습게도, 갓-피셔는 히피라면서 살려보내지만 로봇 코뮌은 "코뮌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그의 이상향이자 조상"이라는 말을 하니 공산주의라는 말만 듣곤 광분해 태워죽인다.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그에게 육체를 주거나 가둘 수 있다. 웨이스트랜드 원작이 나온 시기가 레이건 재임 시절이었던 때이기도 하고 제작진의 미국 정치에 대한 태도가 드러나기도 한다.

2001년작 TV영화 로널드 레이건 암살 미수 사건(The Day Reagan Was Shot) 에서는 영화 람보 시리즈에서 샘 트라우트먼 대령 역으로 유명한 리처드 크레나가 레이건 대통령을 연기함.


11. 둘러보기[편집]





[1] 미국 의사당 서쪽편에서 개최된 첫번째 취임식[2] 당시 미국은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인해 경제가 악화되어 상당한 피해를 받고 있었는데, 레이건은 이때 "LET'S MAKE AMERICA GREAT AGAIN"(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악화된 미국 경제를 반대로 선거 운동의 발판으로 삼아 유권자들 사이에 애국심을 불러 일으켰다. 36년 후 도널드 트럼프 또한 이 구호를 채용해 제법 쏠쏠한 효과를 보았다.[3] 취임 기준 만 69세 349일, 이 기록은 2016년 도널드 트럼프에게 깨졌으며, 트럼프 또한 4년 후 조 바이든에게 깨졌다.[4] 525명 VS 13명 이라는 엄청난 차이로 이겼다. 루스벨트는 1936년 선거에서 레이건보다 적은 523명을 확보했지만 공화당 후보가 불과 8명을 획득했기 때문에 515명 차로 압승했다.[5] 레이건 대통령에게 붙은 이 별명은, 명료하고 유창한 언변을 활용한 연설을 앞세워 평소에도 기자회견을 꺼리지 않고 자주하고, 국민들과의 소통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의회를 상대로 적극적으로 대화하려고 했던 자세에 힘 입은 바이기도 하다. #[6] 1967.1.2. ~ 1975.1.6.[7] 특히 방한 한 달 전 발생한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인해 취소 혹은 연기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으나 예정대로 방문했다.[8] KBS, MBC 자료 참고.[9] 전두환의 11대 대통령 시절은 지미 카터의 재임 기간과 겹치며 12대 대통령 임기가 레이건의 재임기간과 겹쳤다.[10] 이 기록은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깨졌다. 트럼프는 2번 이혼했다.[11] 특히나 엘리자베스 테일러 같은 경우 7회 이혼이라는 진기록을 세웠다.[12] 시카고 컵스2016년 월드 시리즈 진출 이전까지 마지막으로 나갔던 1945년 월드 시리즈 당시에 레이건은 군인이었다. 고로 살아 가면서 민간인 신분으로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응원팀이 월드 시리즈에 올라가는 모습을 못 보고 죽은 셈이었다.[13] 다만 존 웨인이 살아있던 당시 레이건은 대통령에 당선되지는 못했다. 존 웨인 사망 후인 1980년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저 사진에 존 웨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저때는 아직 레이건이 대통령이 아니었다.[14] 지금 대부분 노령으로 사망했다.[15] 레이건 69세, 바이든 78세[16] 레이건 앞에 공화당의 아이젠하워 8년~민주당의 케네디와 존슨 8년~공화당의 닉슨과 포드 8년~민주당의 카터 4년이며 바이든 앞에 민주당의 클린턴 8년~공화당의 부시 8년~민주당의 오바마 8년~공화당의 트럼프 4년이다.[17] 이 사람은 평생 공화당 지지자였다. 오히려 이 당시의 레이건은 민주당 지지자였었다.[18] 장래가 불투명하게 보였다는 말을 재치를 담아 전한 것. 매우 예리한 시선이 담긴 말일 수도 있는 게, 레이건은 용모와 훤칠한 체격을 다 갖춘 덕분에 인지도는 갖췄으되 배우로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47년 미국노동총연맹 산하 영화배우협회 회장에 선출된 후부터 정치적 역량을 길러나가며 본격 성공가도를 밟기 시작한 것. 다만 배우협회장에 선출된 시기가 제인과 사이가 멀어지던 시점이었고, 낸시와 재혼 후 정치에 입문해 상전벽해 수준으로 위상이 달라졌기 때문에, 낸시가 옆에 있어준 덕분에 로널드가 저렇게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호사가들도 있었다고 한다.[19] 이 당시 중국 방문을 두고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이 당시 중국의 화장실 대다수가 재래식에 화장실에 칸막이도 없는 경우가 허다했고, 주요 관광지와 백화점들의 화장실도 위생관리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는 경우가 많아 위생적인 화장실 찾기가 쉽지 않았다.(사실 당시의 한국도 올림픽으로 개선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사정은 크게 다른건 아니었다.) 당연히 중국 당국에서도 문제점을 인식하고는 있던 만큼 나름대로 화장실에 신경을 썼고, 그래서 레이건과 영부인인 낸시는 위생적인 귀빈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만리장성 바디링 화장실에 다른 그 관리자가 어지간히 골통이라서 낸시 여사가 화장실 이용을 다 마치자 바로 문을 잠궜고, 결국 다른 고위급 인사들은 볼일을 볼 수 없게 되었는데 그 관리자가 레이건과 영부인만 고위급 인사고 주변인물도 고위급 인사라는 생각을 안하면서 고집을 부렸던 것.(...) 결국 다른 고위급 인사들은 재래식 화장실에서 쪼그려 앉으며 경호원과 같이 볼일을 봐야했고, 이러한 일로 곤혹을 치른 후에 경호원들이 방문경로에 위생적인 화장실을 발견할 때마다 점거(?)해서 현지 시민들을 불편하게 한 바람에 중국 국무원과 마찰을 빚는 웃지못할 일이 벌어졌다. [20] 앞서 레이건은 1차 토론에서 평소와 다르게 심하게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보여 국민들을 불안하게 했고, 사회자도 이를 염두에 두고서 나이 문제를 거론하고 나섰던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런 불리한 상황을 이 재치 있는 답변으로 단번에 역전시켰다.[21] 먼데일은 이 순간 자신이 선거에서 졌다는 걸 예감하고 토론 끝나고 자기 부인에게 가서 "여보, 아무래도 선거 끝난거 같아"라고 했다고 전해진다.[22]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존 웨인은 할리우드 내 유명 보수주의자이다. 레이건의 드립 실력이 어디까지 갔는지 제대로 보여주는 예시.[23]드립에 수석 의사가 "지금 이 순간은 저희들 모두가 공화당원입니다, 대통령님."이라고 받아쳐줬다고 한다.[24] 'Yes'의 의역. 영어에서 부정의문문의 사용이 한국어와 정 반대라 '예'라고 직역할 수 없다. 자세한 사항은 no문서 참조.[25] 이후 1986년 중간 선거에서는 뒤집혔다.[26] 미국 하원은 1954년부터 1994년까지 민주당이 40년간 계속 다수당을 지켜 왔다. 1900년대 중반부터 민주당이 점점 진보화되면서 공화당 텃밭이던 북부로 진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공화당은 반대로 보수화되면서 민주당 텃밭이었던 남부로 진출하기 시작했지만, 이 과정이 민주당보다는 조금 늦었기 때문에 서로의 텃밭이 뒤바뀌는 이 기간 동안은 민주당이 새로운 텃밭이 되어 가던 북부+기존에 남아있던 남부 기반(일명 딕시크랫)을 바탕 삼아 하원만큼은 굳건히 지켜 왔다.[27] 비슷하게 조지 W. 부시는 레이건처럼 완벽하지 않으면서도 친근하고 털털한 이미지를 내세웠다. 그래선지 아버지 조지 H. W. 부시는 재임기간 업적이 어느정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임에 그친데다가 인기도 그저 그런 반면 아들인 조지 W. 부시는 업적 하나 꼽기가 난감한데도 사람은 좋았다는 평가를 받았고 재선에 성공했다.[28] 이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루즈벨트의 노변정담식 라디오 연설에서 그 아이디어를 가져왔다.[29] 대통령 임기 이전인 1976년 뉴욕 타임스의 러셀 베이커는 그에게 위대한 소통가라는 수식어를 붙인 바 있다.[30] 원래는 참모들이 존 F. 케네디의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처럼 독일어로 번역해서 원고를 준비했다. 그런데 레이건이 "난 미국 대통령인데 왜 독일어를 해야 하냐"고 해서 다시 영어로 되돌렸다는 후문. 그래도 당시 연설 영상을 보면, 베를린 시민들은 잘만 알아듣고 환호를 보냈다. 거기에 독일어가 들어간 케네디의 연설 후에도 베를린 장벽은 20년이 넘게 건재했지만, 영어만 쓴 레이건의 연설로부터 불과 2년 후 베를린 장벽이 정말 무너졌다.[31] 치매의 전조 증상 중 하나가 낮에 꾸벅꾸벅 조는 것이고 이를 근거로 레이건이 대통령 재직 중에도 치매를 이미 앓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제법 있으나 레이건의 주치의는 부정하였다.[32] 그러니까 리 하비 오즈월드댈러스에서 저격했던 사건을 주인공이 타임슬립해서 막았던 사건.[33] 다만 이때의 레이건을 변명하자면 군 병력 증원없이 돈만 퍼부었던 베트남이 케네디 2기 정권 시절에 망했고 하노이에 핵을 투하한 터라 핵을 동원한 위협은 소용이 없어서 군사개입을 했었다.[34] 흑인 인권 운동을 벌이던 아들이 주동했다.[35] 물론 더 부정적으로 나온 건 역시 닉슨이다. 인종차별도 입장을 드러내지 않은 것 뿐이고, 레이건이 단행한 흑인 백인 직원의 동일 대우는 닉슨이 60년 대선에 출마하며 세실과 동료들에게 약속한 것이지만 자기가 대통령이 되고는 실행 안 했고,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물러난다. 다만 그 닉슨도 완전히 악당이 아닌 인간적인 시선을 유지하여 묘사하였다.[36] 레드포드는 2012년 버락 오바마 지지 선언을 하며 민주당 쪽으로 전향했다.[37] 이 게임의 메인 악역 라울 메넨데즈가 미국을 증오하게 된 원인이 이란-콘트라 사건 때문이다. 레이건이 이 사건의 장본인이기 때문에 연설 장면이 삽입된 듯 하다.[38] 그리고 깨알같이 젤리빈 애호가답게 젤리빈 통도 등장했다.[39] 이걸 보고 케네디 대통령은 "대체 언제가 좋았다는 거냐? 대공황? 베트남 전쟁? 짐 크로우?"라면서 비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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