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엘진 호 침몰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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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엘진 호 침몰 사고
파일:레이디 엘진 호 침몰 사고.jpg
발생일시
1860년 9월 7일 오전 2시 20분경
발생 위치
미국 일리노이 주 미시간 호 수상[1]
유형
충돌로 인한 반파,침몰
탑승인원
불명(약 400여명으로 추정)
인명피해
사망
불명(약 300여명으로 추정)
생존
약 100여명
선종
목조 외륜 증기선, 여객선

1. 개요
2. 사고 선박
3. 사고 과정
4. 여담



1. 개요[편집]


1860년 9월 7일[2], 미국 일리노이 주미시간 호 수상에서 호화 여객선이었던 PS 레이디 엘진 호범선 어거스타 호와의 충돌로 침몰한 사건이다.

약 300여 명으로 추정되는 인명피해를 냈으나, 사고 과정에서 승선자 명부가 유실되는 바람에 정확한 탑승 인원과 사망자 수는 알 수 없다. 다만 추정치만으로도 오대호에서 발생한 선박 사고 중 최악의 참사로 기록되어 있다.


2. 사고 선박[편집]


레이디 엘진 호는 1851년 뉴욕 버팔로에서 건조되었다. 1854년까지 캐나다 주 총독[3]을 역임했던 엘긴 경[4]의 아내 이름을 붙였으며, 당시 미시간 호를 누비던 여객선 중 가장 빠른 배라는 위명을 떨쳤다. 당시 호황을 누리던 시카고의 사업가들 사이에서 호수의 여왕으로 불렸고, 그만큼 인기가 많은 여객선으로 일리노이 주 시카고온타리오 주 콜링우드 사이를 오가고 있었으나, 이 사고 이전에도 몇 번의 크고 작은 사고를 겪고 견인되어 수리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어거스타 호는 목재 운반용 스쿠너로, 사고 당시 다리우스 말롯 선장이 몰고 있었다는 것과 뱃머리에 백색광 하나가 달려 있었다는 것 외에 알려진 사실은 거의 없다. 어거스타 호는 이 사고로 침몰하지 않았으며, 말롯 선장은 사고 규모를 모른 채 그대로 배를 몰아 시카고 항에 입항했다.


3. 사고 과정[편집]


1860년 9월 6일, 시카고의 날씨는 문자 그대로 악천후였다. 레이디 엘진 호의 잭 윌슨 선장은 경험 많은 선장이었음에도 출항을 주저하였으나, 이 배의 주 고객층인 일부 사업가들은 사업상의 일로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선장에게 압박을 넣어 출항을 종용하였다. 결국 그들의 성화에 못 이긴 윌슨은 위스콘신 주 밀워키를 향해 출항했고,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이 되었다.[5]

폭풍우 속에서 항해하느라 늦은 시간까지도 시카고 항에서 그리 멀리 가지 못했던 레이디 엘진은, 선수에 달린 백색광 한 줄기만을 앞세운 채 시속 11노트(시속 20km 정도)로 자신들을 향해 돌진하는 범선 어거스타 호를 발견한다. 어거스타와 레이디 엘진 모두 서로를 인지했지만, 어거스타는 백색등 하나만으로 항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발견이 늦었던 데다 바람에 의존해 항해하는 범선의 특성상 어거스타는 즉각적으로 방향을 돌릴 수 없었다. 그렇다고 400여 명의 승객을 태운 호화 증기선이 그 무거운 몸으로 회피기동을 하기에도 늦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결국 레이디 엘진은 어거스타의 길다란 선수에 창처럼 찔리고 말았다.

어거스타 호는 어둠 속에서 사고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했고, 레이디 엘진이 크게 상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 말롯 선장은 그대로 배를 몰아 시카고로 향했다. 그러나 레이디 엘진은 사고 6분여만에 선수를 제외한 모든 부분이 완파되어 호수로 가라앉았다. 사고 지점이 육지에서 그리 멀지 않았고, 구명정을 빠르게 내린 윌슨 선장의 판단 덕에 승객들 중 100여 명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으나, 나머지 300여 명은 익사를 피하지 못했다. 선장 윌슨은 여섯 명 정도의 승객을 추가로 구명정에 건져올렸으나 거기까지였으며, 두 명의 여성을 구하려던 중 파도에 휩쓸린 후 바위에 부딪혀 사망하였다.

선체가 파손된 후에도 얼마간 호수에 뜬 채 흘러가던 선수 부분은, 사고 지점으로부터 1.6km 정도 떨어진 곳에서 닻이 호수 바닥에 걸리면서 완전히 가라앉았다.


4. 여담[편집]


  • 노스웨스턴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에드워드 스펜서라는 학생이 해안 근처에서 10시간 동안 고군분투하여 17명 정도를 구하였으나, 감사 인사를 받지 못했다는[6] 일화가 유명하다. 스펜서는 이날 너무 무리하게 근육을 사용한 나머지 장애를 얻어 학업을 잇지 못할 정도로 열성적으로 구조에 임했는데, 나중에라도 감사 표시를 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당사자가 신학대학생이어서인지, 한국 인터넷에서 이 사고를 검색하면 대부분이 이 일화를 이용한 목회자들의 설교문이다.

  • 밀워키의 Historic Third Ward에는 이 사고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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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리노이 주 하이랜드 파크 인근, 시카고 북쪽 약 26km[2] 일부 기록에는 9월 6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출항일이 9월 6일 저녁이었으며 정확한 사고 시각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후에 밝혀진 여러 기록을 종합할 때 7일 오전 2시 20분경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3] 현재의 캐나다 총독이 아닌, 퀘벡 일대에 해당했던 캐나다 주의 총독을 뜻한다. 현재 의미에서의 캐나다 총독은 1876년 부임한 찰스 몽크부터를 1대로 친다.[4] 본명 제임스 브루스. 아편 전쟁에 두 번 모두 참전하여 톈진 조약원명원의 파괴, 베이징 조약에 관여했으며, 인도 총독으로도 부임하여 아시아 식민지 역사에도 두루 악명을 남긴 식민 행정가이다.[5] 다만, 사고 당시 이 배의 탑승객 대다수는 주 방위군과 가족들이었다는 기록도 있다.[6] 또는 소녀 1명에게만 감사 인사를 받을 수 있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