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무가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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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무가베


제1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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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비


짐바브웨 제2대 대통령
로버트 무가베
Robert Gabriel Mugabe


파일:2008063018.jpg

출생
1924년 2월 21일
남로디지아 쿠타마
사망
2019년 9월 6일 (향년 95세)[1]
싱가포르 글레니글스 병원
국적
[[짐바브웨|

짐바브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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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학력
쿠타마 대학교 (교육학 / 학사)
포트할레 종합대학 (교육학 / 석사)
신장
173cm/78kg[2]
소속 정당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 연맹 - 애국 전선
(1987~2019)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 연맹(1963-1987)
짐바브웨 아프리카 인민 연합(1961-1963)
국민민주당(1960-1961)
임기
1987년 12월 31일 ~ 2017년 11월 21일[3]
서명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8px-Signature_of_Robert_Mugabe_clear.svg.png
종교
가톨릭

1. 개요
2. 상세
3. 집권 전
4. 대통령 집권 이후
4.1. 경제 파탄
4.2. 무자비한 철권통치
4.2.1. 피로 얼룩진 2008년 선거
4.2.2. 강제 수용소 운영
4.2.3. 학살
4.2.4. 정적 암살
4.3. 소수자 탄압
4.3.1. 백인 탄압
4.3.2. 성소수자 탄압
4.4. 사치 행각
4.4.1. 생일파티
4.5. 교육
5. 2000년 이후의 행적들
6. 하야
6.1. 축출 과정
6.1.1. 우려
6.2. 하야 선언 이후
7. 사망
8. 아내 그레이스 무가베
9.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leymanmw.com/mugabe.jpg
2014년, 90살 당시의 모습.

짐바브웨독립운동가, 초대 총리(1980~1987)이자 제2대 대통령(1987.12.31.~2017.11.21.), 독재자.


2. 상세[편집]


한때는 백인의 식민통치에 저항하여 짐바브웨의 독립과 건국을 주도한 투사였고 집권 초기까지도 이러한 면모가 남아서 백인과 화합정책도 실시하고, 순조로운 경제성장을 보여주면서 짐바브웨의 문맹률을 10%대로 낮춰 아프리카 최저의 문맹률을 기록한 데다가 보건체계도 정비하는 등의 업적들도 남겼다.

그러나 오랫동안 집권하면서 잔혹한 철권통치를 펼치는 것은 물론, 2000년대 중후반에 발생한 초인플레이션[4]은 전 세계에 짐바브웨의 이름을 어떤 면에서 널리 알렸으며, 그 이전에도 무능한 경제정책으로 국민의 80%를 실업자로 만들면서 짐바브웨를 최빈국으로 만드는 데에 일조했고, 에이즈에 대한 무능한 대처로 환자를 2백만이 되도록 방치하면서 짐바브웨를 세계에서 가장 낮은 평균수명을 가진 나라로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악행들 때문에 2009년에는 워싱턴 포스트의 주말판 매거진 '퍼레이드'에서 선정한 독재자 순위에서 오마르 알 바시르, 이사야스 아페워키, 심지어 김정일[5]까지 모조리 제치고 당당히 세계 최악의 현직 독재자 1위에 선정되었을 정도였다.[6]

중국의 민간단체에서 수여하다 폐지된 공자평화상 제6회 수상자이다.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짐바브웨의 독립을 이뤄냈다는 명목으로 상을 받았는데, 독립 직후까지 일만 보면 그렇다 쳐도, 나중에 자행한 일들을 보면 로버트 무가베는 상을 받을 자격이 없는 인물이다.

3. 집권 전[편집]


파일:robertmugabe.jpg
1980년대 무가베의 모습.

지금은 김정일도 능가한다는 평가까지 받을 정도로 극악무도한 독재자로 추락했지만, 젊었을 적의 무가베는 짐바브웨의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으며, 로디지아 시절 실질적으로 독립운동을 지휘하여 백인정권을 패퇴시키고 백인정권에 신음하던 흑인들을 해방시킨 인물로, 사실상 짐바브웨의 국부이자 흑인 독립운동의 대명사격 인물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인물이었다. 독립영웅이 독재자가 된 경우는 많아도, 흑화의 정도로 따지면 무가베 이상인 경우는 에리트레아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외에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무가베는 코사족 추장의 아들로 태어난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이나 자나키 족 추장의 아들로 태어난 탄자니아줄리어스 니에레레 전 대통령, 키쿠유족 출신의 주술사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케냐조모 케냐타 전 대통령 등 다른 아프리카 국가의 역대 지도자들과 다르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인물로,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빈곤한 목수였다고 한다. 부모는 프랑스에서 온 예수회 사제들의 영향을 받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무가베도 선교사들이 개척한 마을에서 자라났다. 하지만 아버지는 예수회 선교사들과 사이가 벌어졌고, 선교마을에서 쫓겨나서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이렇게 방랑생활을 하면서 무가베의 형제 자매도 전염병으로 요절했지만, 다시 마을에 돌아와서 선교사들에게 교육을 받았다. 부모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수업료를 계속 내어줬고, 그는 고향의 쿠타마 대학에서 교사자격 과정을 마치게 되었다.

그는 쿠타마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로 일하던 중, 1949년 장학금을 받고 당시 아프리카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근대화되어 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포트할레 종합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할 기회를 갖게 된다. 똑똑하고 부지런했던 무가베는 남아공으로 유학을 와서 이곳에서 교육학을 전공했고,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에 가입하면서 반식민주의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는 1952년 고향으로 돌아와 찰림바나 사범대학(Chalimbana Teacher Training College)에서 교수로 일하면서 교사들을 양성했다. 하지만 백인정권 아래서 아프리카인들이 신음하는 것을 인식한 그는 점점 과격해지게 되었고,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는다.

이렇게 점점 과격해지던 무가베는 195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인 투쟁에 나선다. 38세인 1960년부터 로디지아 백인정권에 맞서 짐바브웨의 독립운동에 헌신하였으며 1964년 과격한 행동으로 인하여 넬슨 만델라처럼 10년 동안 감옥에 투옥되어 1974년에 풀려났다. 옥고를 치르는 중 아들을 병으로 잃기도 했으며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연합의 최고 지도자가 된 무가베는 평화적인 투쟁만으로는 독립을 얻을 수 없음을 느끼고 무장투쟁으로 전환했다. 감방에서 무가베는 이전부터 다니던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공부를 멈추지 않아 경제학 석사, 행정 학사 및 2개의 법학 학위를 따게 되었다.

무가베 자신은 감옥에서 풀려난 후 당시 공산정권이 들어서 있던 인접국 모잠비크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짐바브웨의 게릴라 전쟁을 지휘한다. 이 당시 여러 공산국가들은 아프리카 해방운동을 지원했고, 소련, 중국, 동유럽 각국, 북한까지도 무가베의 게릴라전을 지원했다. 물론 무가베는 군사지도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개별작전을 지휘하지는 않았다.[7] 수많은 흑인들이 무가베의 호소에 응해 게릴라전에 참전하였고, 백인 정권과 처절한 전투를 벌였다. 이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수 만명의 사상자를 난 참혹한 전쟁이었다. 백인정권은 무력에서 압도적으로 앞섰지만 머릿수가 딸렸기 때문에 도저히 이런 손실을 감당할 수 없어서 손을 들고 말았다.

당시 무장 투쟁의 실질적인 중심은 무가베가 아닌 카난 바나나였는데, 쉽게 말해 쿠바 혁명으로 치면 무가베는 체 게바라의 포지션이었고 바나나는 피델 카스트로의 포지션이었다고 보면 된다. 다만 무가베는 반 로디지아 정부 투쟁 당시 동맹 관계였던 ZAPU(짐바브웨 아프리카 인민 연맹)와 연대할 때도,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에서는 배신을 일삼았다고 한다.

결국 1979년 백인정권은 손을 들고 말았고, 1979년 영국에서 랭커스터 하우스 합의가 발표되어 백인 정권은 항복하고 흑인에게 정권을 넘기겠다고 합의했다.

이후 백인 정권인 로디지아가 흑인에게 정권을 넘기면서 국호를 바꾼 짐바브웨가 정식으로 독립했다. 그리고 카난 바나나가 대통령이 되고 그가 초대 총리를 맡아 실권을 가졌으며, 1987년에 로디지아 정부-ZANU-ZAPU 3자가 합의한 랭카스터 협정을 깨고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바나나를 잡아다가 동성애 혐의로 투옥시켰으나 바나나는 감옥에 갇힌 지 얼마 못 가 탈옥우간다로 망명했다. 말하자면 체 게바라가 쿠데타를 한 번 더 일으켜서 카스트로를 축출하고 쿠바의 대통령이 된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대통령이 된 무가베는 총리제를 폐지하고 대통령이 되어 30년간 짐바브웨를 통치했다.


4. 대통령 집권 이후[편집]



4.1. 경제 파탄[편집]


식민통치 시절부터 짐바브웨는 가난한 후진국이었어도 자원 부국이자 풍부한 농업을 자랑했던 국가로,'이프리카의 빵 바구니'라는 별명까지 생길 정도였다. 그러나 무가베는 그런 기반을 가진 고국을 37년동안 통치하면서 국민들의 실질소득을 오히려 저하시켰다.

대통령이 된 후 초기 10여 년간은 그럭저럭 경제를 운용해왔다지만 원자재에 국가경제를 많이 의존했던 경제구조 탓에 1인당 GDP는 600-1000달러대의 박스권에 머물고 있었고 80년대 성장률추세를 보면 그다지... 특히 국가가 물가와 환율, 수출입을 전면 통제하는 통제경제 노선을 택한 탓에 변변한 경제성장 같은 건 이룩하지 못했다. 결국 90년대 후반에 외환보유고가 바닥나서 1990년대 말에 한국처럼 IMF에 구제금융을 받게 되고 가뭄으로 인한 농업 생산량 저하, 정부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터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무가베의 인기는 바닥으로 떨어질 상황에 처했다.

이 상황에서 무가베는 국민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 2000년에 토지개혁으로 소수인 백인 지주들의 농지를 몰수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본래 짐바브웨의 토지 개혁은 1980년 독립 당시부터 무상몰수 무상분배로 계획되었으나 영국이 돈을 대주는 조건으로 매입 후 분배 방식으로 해줄 것을 요청해서 바뀌었는데, 그 영국이 태도를 바꿔 돈 못 대준다고 나선 통해 개혁이 지지부진했다. 그 상황에서 2000년에 무가베가 무상몰수 카드를 다시 뽑아든 것이다. 이 일로 인해 영국의 분노를 샀으며, 당시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가 직접 유감을 표했다. 그러나 무가베는 내정간섭이라며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이는 짐바브웨 국민들의 무가베에 대한 지지율을 더 높여주게 되었다.

영국 정부는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1960년대에 영국인들이 짐바브웨로 이민가서 농장을 사서 합법적으로 정착한 것까지 압수하고 폭도들이 이러한 농장주를 살해했다고 반론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민자들은 그전의 식민지시절에 거져얻은 그 땅을 산 것이었다. 땅 뺏은 뒤 뺏은 땅을 합법적으로 구매한다고 해도 흑인들 입장에서는 뺏긴 땅인건 여전하다. 따라서 짐바브웨 정부는 콧방귀도 안 뀌았다. 결국 비싼 돈주고 농장을 샀던[8] 백인들은 죄다 거덜났다. 문제는 이렇게 강탈한 농장들이 농사의 ㄴ자도 모르는 흑인들이게 돌아갔다는 점이다. 그나마 농부에게 분배된 경우는 좀 나았지만, 대부분은 농장의 장비조차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할 정도로 농업에 무지하여 짐바브웨의 농업은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이런 핸디캡을 생각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토지 분배를 추진한 점에선 무가베도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아예 소련처럼 강제로 트랙터 교육이라도 시켰으면 모를까 그마저도 안 했던것이다. 특히 무가베의 큰 잘못은 토지개혁 자체가 아니라 대책 없이 즉흥적으로 시행했다는 점과 국민을 위해서가 아니고 자기 인기를 위해서라는 점이다.

다음으로 무가베 정권은 2008년에 외국 자본이 소유한 짐바브웨 기업들 중 50만 달러 이상의 자산을 소유한 기업은 주식 절반을 내국인(정확히는 토착 흑인 짐바브웨인)에게 양도하라고 지시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IEEA라고 부르는 법안을 발의한 것인데, 사실 짐바브웨가 아니더라도 FDI(외국인 직접 투자) 제한 자체는 많은 국가들이 시행하고 있으며 당연히 그 적용 업종 범위 및 제한율은 국가마다 천차만별이고 시간이 지나면서 규제를 완화하거나 강화하는 등 변화해가는 부분이다. 멀리 갈 것 없이 당장 우리나라도 옛날보다 훨씬 개방되긴 했으나 지금도 일부 업종에 대해 외국인 투자비율 50% 제한 등의 규제를 두고 있다. # 이러한 법을 만든 이유는 위의 백인 농장주 축출과 동일한 취지인데, 원래 짐바브웨에서 외국 자본이 크게 차지하는 부분은 사실상 농업과 광업 뿐이었다. 따라서 위에서 서술한 토지개혁으로 농업에서 외국 자본(백인 농장주)을 쫓아낸 다음, 이 법안으로 광업에서의 외국 자본들을 축출하려고 한 것이다. 이는 당연히 짐바브웨 경제애 대한 불확실성을 크게 증가시켰다. 다만 이는 짐바브웨 경제 몰락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보긴 어렵다. 이미 2002년부터 쭉 이어진 서방의 제재로 인해 외국 자본의 비율이 높지 않았을 뿐더러 위에서 말했다시피 사실상 광업을 타겟팅한 법안인데 대부분의 외국 광산 기업들은 이것으로 인해 철수하거나 하지는 않았고 결국 토착민에게 지분을 양도했다.[9] 여담으로 이 법의 시행도 개판이어서 법을 일관성 없이 적용하고, 주식 양도에 따른 보상금도 적절한 가치로 지불되지 않는 등 많은 문제가 있었다.

위의 막장 정책들 중 짐바브웨 경제를 몰락시킨 가장 큰 원인은 토지개혁이다. 광업과 비슷하게 수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던 농업이 망해버렸기 때문에 농업 수출보다 수입이 더 많아지는 지경에 이르렀고, 당연히 외환보유고도 거덜나고 서방의 제재로 인해 지원도 끊겨 경제는 막장이 되었다.

그 결과 2002년부터 2008년까지 7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지속했는데 이 기간동안 -62%의 성장률을 기록하여 1인당 국민소득이 8년 만에 40%나 폭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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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에서 보인 짐바브웨와 베네수엘라인플레이션율. 짐바브웨가 2008년 4분기에만 7.3×1022% 폭등했다고 나온다. 기사

그 결과 짐바브웨는 농업도 망하고, 기업도 망하고, 자본은 해외로 빠져 나가고 하다보니 국가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세수가 부족해졌다. 그러나 경제개념이 전혀 없던 무가베는 오히려 돈 찍으면 되는 거 아니냐며 짐바브웨 달러마구 찍어서 국가 재정을 충당하는 어이없는 짓거리를 했다. 그리고 짐바브웨 경제는 하이퍼 인플레이션으로 붕괴했다.

이리하여 2008년 들어 초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초저질 경제정책[10]으로 인해 그나마 남아있던 지지층도 다 까먹고 오히려 안 좋은 의미로 네임드가 되어 전 세계에 짐바브웨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앞서 설명한대로 8년간 마이너스 성장을 지속해 1인당 소득이 40% 폭락한 시기와 겹쳐진 것이다.

이 당시 짐바브웨의 화폐는 같은 크기, 같은 재질, 같은 두께의 아무것도 인쇄가 안된 종이보다도 가치가 떨어졌으며, 때문에 짐바브웨 달러북한 원과 같이 절대로 위조지폐를 만들지 않는 화폐의 양대산맥이 되었다. 이는 도저히 위조가 불가능할 정도로 정교해서가 아니라 위조지폐를 만드는 노력과 비용이 화폐액면가보다 더 많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런 탓인지 무가베는 2008년 대선 때 모건 창기라이에게 1차 선거에서 패배하는 결과가 나왔다(창기라이 47.9% vs 무가베 43.2%). 이렇게 되자 무가베는 온갖 수단을 사용해 창기라이를 괴롭혀서 2차 선거를 방해했고 견디다못한 창기라이가 선거 보이콧을 선언해 2차 선거에서 88.5%로 4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국제 사회가 비판을 퍼붓고 국내외의 여론이 안 좋아지자 결국 무가베도 창기라이와 타협을 시도해 헌법을 개정하여 폐지되었던 총리직을 부활시키고 창기라이를 총리에 앉히며 거국정부를 형성했고, 총리가 된 창기라이는 외국환 도입 정책을 펼쳤고, 짐바브웨 경제는 초인플레이션의 상흔에서 그제서야 회복했다. 하지만 여진히 문제는 많았으며 고질적인 정부재정의 부족은 여전했다.


4.2. 무자비한 철권통치[편집]


파일:0z13WoN.jpg
짐바브웨 주요 야당인사 체포 현황.

무가베의 야당 탄압과 언론 탄압, 고문을 동원한 폭정은 매우 가혹했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전술한 것처럼 김정일을 누르고 세계의 독재자 랭킹 1위에까지 들어간 적까지 있을 정도였다.[11]

또한 짐바브웨의 고문은 세계에서 엄청난 잔인성으로 악명이 높으며, 잔인성으로 따져도 북한, 이란에 절대로 뒤지지 않을 정도의 수준이다. 실제로 고문당한 피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어떤 짐바브웨인은 경찰이 자신을 고문실로 끌고 가서 갈고리에 걸린 채로 며칠 동안을 매달려 있었다고 증언했으며 갈고리에 입을 걸거나 입을 날카로운 물질을 이용해서 인중이 찢어져버린 사람도 있었다. 특히 고문실로 끌려간 피해자들은 고문관들이 채찍으로 자신들을 무자비하게 후려쳤으며 등과 온몸에 엄청나게 많은 상처가 날 정도로 채찍을 후려쳐서 땅에 피가 철철 흐를 정도가 되었고 결국 과다출혈로 숨진 사람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또한 엉덩이를 몽둥이와 여러가지 각목 등을 비롯한 온갖 흉기들로 때려서 그 부위가 피멍이 들었고 후에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그 부위가 완전히 썩어 문드러져서 잘라내야 했던 사람도 있었다.

이외에도 의도적으로 욕창이 생기게 만들어서 피해자들의 살이 썩어들어가게 만드는 고문, 음식을 주지 않고 굶어 죽게 만들거나, 사람을 산채로 땅에 묻어 죽여버리는 방법도 있고, 극악무도한 물고문전기고문은 당연히(?) 존재하며, 심지어 피해자에게 정체불명의 화학 물질을 바르거나 사람의 살을 조금씩 조금씩 고통스럽게 잘라낸 인육을 먹인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게다가 불법 총기 소지로 구속된 어느 미국인은 24시간 불이 켜져 있는 방에서 나체인 상태로 침대에 연결된 철제 족쇄에 다리가 묶인 상태로 감금되었으며, 한 여자는 척추와 목뼈에 무자비한 구타를 당해서 뼈가 부러지고 온몸에 피멍이 든 채로 참혹하게 사망했고, 심지어 어떤 아이는 심한 구타로 눈이 멀게 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짐바브웨에서 고문당한 피해자들의 사진이 궁금하면 zimbabwe torture라고 구글에 쳐보면 나온다.[12] 그리고 이 모든 고문을 명령하고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는 게 다름 아닌 무가베이다.

이 자료에 의하면 2011년 2월 19일에 짐바브웨 수도 하라레에서 국제사회주의조직(ISO)의 모임이 열렸는데, 갑자기 짐바브웨 경찰이 이 모임에 들이닥쳐서 참여자들을 체포했다. 경찰이 참가자들을 잡아간 이유는 이들이 이집트와 튀니지의 혁명에 관해 토론했으며, HIV 활동가이자 국제사회주의조직 회원인 네비게이터 문고니의 사망을 추모하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모임에 참석한 45명이 짐바브웨 감옥에 갇혔고 무자비한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피고인인 호프웰 검보는 "우리에게 육체적 체벌이 가해졌다. 나는 코가 깨졌다"고 말했으며, "다른 사람들도 때린 도구와 맞은 부위에 따라 다양한 부상을 당했다", "에이즈 감염자를 포함해 우리에 대한 약이나 치료도 차단됐다"고 증언했으며 함께 수감되었던 모임의 참석자 중 하나였던 데이비드 음팟시는 이런 고문으로 인해 사망했다.

4.2.1. 피로 얼룩진 2008년 선거[편집]


2008년에는 3월 29일에 1차 투표로 4명 중 무가베와 경쟁자인 모건 창기라이가 당선되었고, 6월 27일에 있던 결선 투표에서는 창기라이가 후술할 이유로 사퇴했지만 무가베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결선 투표를 진행했고, 그 결과 선거는 당시 현직이었던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이 85.5%로 압승했다. 그렇지만, 이 투표는 국제적으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선거 당시 언론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사위원회의 일원으로 짐바브웨에 비밀리에 입국해 몇 년을 지냈던 미국의 칼럼니스트 클레어런스 페이지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자신은 짐바브웨의 경찰에게 체포될까봐 두려워서 밤에 잠을 자지 못했다고 하는데, 왜냐하면 로버트 무가베가 외국 언론인들에게 비자 발급을 중단했기 때문이였다고 한다. 비자 발급이 중단된 이후 짐바브웨에서는 무가베를 지지하지 않는 야당 인사들, 그리고 일반 시민과 언론들에 대한 폭력행위가 급격하게 증가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당시 짐바브웨 시민들은 경찰이나 깡패들의 폭력을 두려워하여 잠을 자는 것조차 두렵다고 할 정도였다고 하며, 그들에게 사망한 짐바브웨인들의 명단은 짐바브웨 사람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고 클리어런스 페이지는 증언했다.

이 선거 당시에 짐바브웨에서 폭력으로 사망한 사망자 명단은 무가베에 반대하는 야당이 작성하여 국제 언론매체에 제공했고, 시카고 트리뷴의 아프리카 특파원이 보도했다. 이 보도 내용에 따르면 무가베에 반대했던 한 남자는 자기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던 중 폭력배들에게 구타를 당했으며, 다른 남자는 자기 집 정원을 손질하다가 폭력배들에게 살해되었다. 이런 식으로 정부에 표적으로 찍힌 한 남편에 대한 경고로 부인이 강간살해되기도 했으며 사람들을 소리소문없이 데리고 가서 무시무시한 고문을 하거나 살해하며 온갖 협박을 가하기도 하는 등, 여러 방법으로 무가베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탄압했다.

1차 투표 이후 수도 하라레에서 열릴 예정이던 창기라이 총재의 유세는 무가베 대통령을 지지하는 민병대원 1천여 명이 쇠파이프와 몽둥이를 휘두르며 방해하는 바람에 무산됐다고 하며, 군 정보기관이 개입하여 주도한 모건 창기라이 암살 음모까지 있었다고 한다. 결국 이러한 이유로, 2008년 선거에서는 무가베의 온갖 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야당지도자인 창기라이가 결선투표에서 이길 수 있는 상황이였지만, 창기라이는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가해지는 무가베의 폭력행위들을 중지시키기 위해 선거에서 기권했다.

이런 식의 폭력배와 경찰을 이용한 방법으로 결선 투표 과정에서는 고작 하루 만에 확인된 사람만 80여 명 이상이 살해되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실종되고 고문당하거나 협박당하는 만행이 벌어졌다. 여러 뉴스들을 보면 무가베 지지자들이 야당 인사들에 대한 공격을 자행해서 163명을 살해하고 5000명을 고문하고 구타하는 탄압을 자행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무가베는 죽은 사람을 유권자로 등록해 자기 표로 만들고, 여당을 지지하지 않으면 식량 배급을 중단하겠다는 협박까지도 했다.

게다가 재당선 직후인 2008년 8월부터는 콜레라가 짐바브웨에 확산되어 3,800여 명이 숨졌으며, 전술하듯 '모든 물자의 물가가 30분마다 올랐다는' 초인플레이션과 80%에 달하는 실업률, '짐바브웨에서 편히 잠을 자는 사치'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국민들은 도탄해 빠졌음에도 무가베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고 오로지 선거 테러에만 골몰했다. 그때 당시 84세였던 무가베는 젊었을 적의 위대한 면모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국민의 생명과 자유는 전혀 신경쓰지도 않고 권력에만 집착하는 미치광이 독재자로 변해 있었다.

이 폭력 사태는 같은 해에 있던 전설적인(?) 초인플레이션과 함께 무가베의 악명을 높였고, 2009년에 김정일을 제치고 '세계 최악의 독재자 1위'로 선정된 것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받는다.

4.2.2. 강제 수용소 운영[편집]


영국 BBC 방송은 2011년 8월 8일에 짐바브웨의 마랑게(Marange) 다이아몬드 광산 주변에서 짐바브웨의 군과 경찰이 고문 수용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방송을 내보냈다. 이 방송에 따르면 이 수용소에서는 수감자들에게 무자비한 구타성폭행은 물론 개에 의한 무자비한 공격까지 자행되고 있다고 한다. 마랑게에 있는 고문 수용소 운영은 무가베의 친구가 맡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 고문 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에게 돈이 없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엄청난 금액의 돈을 요구하거나 광부들에게 채찍질을 포함한 고문 등을 통해서 강제 노동을 강요받고 있다고 한다. 고문으로 인해 한쪽 팔을 못 쓰게 된 한 포로가 증언하기를 "그들이 아침에 40번, 오후에 40번, 저녁에도 40번씩 채찍질했다"고 증언했다. 또 다른 피해자도 "가끔 광부들이 두들겨 맞아서 걷지 못하기도 한다"고 증언했다. BBC 방송은 "우리가 확보한 가장 최근의 희생자는 2월에 발생했고, 고문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고, 또 고문 수용소에 관한 증거를 짐바브웨 정부에 보냈지만 BBC 방송은 정부로부터 아무 말도 들을 수 없었다고 방송을 내보냈다.

심지어 BBC에서 2004년 2월 29일에 방영한 "수용소의 비밀(Secrets of the Camps)"이라는 방송에 의하면 무가베는 지난 2001년 11월부터 전국에서 납치해온 청소년과 어린이들 1만 8천여명을 수용한 뒤 고문방법과 살인기술을 훈련시키는 시설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방송에 따르면 이 시설에서는 어린이들을 술과 마약에 중독시켜 인지능력을 상실하게 만든 뒤 살인 기술과 고문 방법을 가르쳤고, 심지어 이들이 여성일 경우에는 아무리 11살 소녀라 할지라도 예외 없이 훈련의 일부라며 성폭행까지 가했다고 한다. 당연히 이것을 거쳐간 아이들은 매우 큰 고통을 받고 고국을 떠나는 경우까지 있었는데, 심지어 이들은 수용소 내에서의 경험을 절대 말하지 말라는 경고까지 받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곳에서 살인기술을 배운 대니얼이라는 이름의 소년은 "한 손에 곰인형을 든 채 사람의 목뼈를 부러뜨리는 방법을 배웠다, 다음 단계는 전기고문이고 그 다음 단계는 물고문을 하는 것"이라고 목숨을 걸다시피 한 증언을 했고, 당시 수용소에서 고문당한 죠셉이란 소년이 증언하기를 자신과 같은 어린이들이 자신을 기둥에 묶고 자신의 성기에 전기자극을 가했으며 이 고문의 후유증으로 죠셉은 신경계가 마비되고 말았다고 한다.

심지어 무가베 본인은 이 수용소에서 발생하는 일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으며, 정부 당국은 이 수용소가 '이 나라의 젊은이들에게 국가적 정체성과 애국심을 심어주었다'고 주장하며 곧 모든 청소년들이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고 한다. 거기다가 2002년에는 짐바브웨 정부가 이 수용소에 지원하는 금액을 2배로 늘렸는데, 수용소의 한 관계자 말로는 이렇게 지원금이 증가한 이유는 "내년에 총선이 있기 때문에 여당을 지원하는 행동대가 필요해서"라고 한다. 전술한 선거 때의 폭력 사태를 고려하면 이 말은 쉽게 말해 "반대파들을 고문하고 살해할 사람들이 필요해서 지원금을 늘렸다"는 뜻으로 볼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무가베는 그 호르헤 비델라와 김씨 3대도 저지르지 않은 대악행 중의 대악행을 장려한 것이다.

4.2.3. 학살[편집]


또한 1983년 1월 3일부터 1987년 12월 22일까지 무가베와 은코모가 합의할 때까지 무가베는 거의 5년 동안 북한에서 훈련받은 짐바브웨 국군의 보병여단인 제5여단을 동원해 마타벨레란트에 거주하는 은데벨레족[13] 주민들을 학살했는데 그 이유는 부족 주민들이 무가베의 반대파 지도자인 조슈아 은코모를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무가베는 먼저 1982년 2월에 은코모를 쿠데타 혐의로 체포한 후, 이에 반발한 마타벨레란트 주민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이자 이 지역에 통행금지령을 내린 후 대규모 학살을 시작했다. 이 '작전'에는 '구쿠라훈디(Gukurahundi)'라는 말이 붙었는데, 이 말은 쇼나어로 '봄비가 오기 전에 겨를 씻어내는 이른 비'라는 뜻이다. 그러나 마타벨레란트의 '구쿠라훈디'는 5년 가까운 기간 동안 봄뿐만 아니라 나머지 계절들에도 왔으며, 단순히 겨뿐만 아니라 집, 사람까지 쓸어냈다.

먼저 제5여단은 촐로초, 루파네, 응카이 등 마테벨레란트 지역의 주요 도시로 들어가서 2주일 만에 무려 2천 명이 넘는 민간인을 잔혹하게 학살했다. 천주교 위원회(ZCCJP)가 1천 명 이상의 목격자의 증언을 토대로 만든 보고서에 따르면, 제5여단은 주로 10명 이상의 민간인들을 학교 등의 시설에 한꺼번에 모아서 구덩이를 판 후 민간인들을 산 채로 묻어버리거나 교회에 강제로 가둔 뒤 불을 지르는 방식으로 학살을 자행했으며, 임산부와 생후 4개월밖에 안된 아이에게도 예외는 없었으며, 심지어 학교에서 공부하던 여학생들을 강간하여 임신시키는 악행까지 벌였다. 거기다가 제5여단 대원들은 주민들에게 무가베와 무가베 당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도록 강요하면서 가족과 친구들이 고문당하고 총에 맞는 것을 돕게 했으며, 학살의 비극에 통탄해하며 눈물을 흘리는 주민 역시 사살했다. 이 사건에 정리한 보고서는 인터넷에서 다운받을 수 있는데, 웬만하면 절대 다운받아 보지 않을 것을 권장한다. 여기서 묘사되지 못한 구투라훈디의 다른 학살 수법들은 난징 대학살, 킬링필드와 놀라울 정도로 똑같은 잔혹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5여단은 마테벨레란트 지역을 철저히 봉쇄해서 이 지역에 식량이 조금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으며, 이에 굶어 죽기 직전까지 간 주민들이 "식량이 없으면 무엇을 먹어야 하냐"라고 물었더니 "당신 동료들의 인육을 먹으라"라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이에 주민들은 풀을 뜯어먹거나 벌레들을 잡아 먹어야 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사망했다. 이런 참혹한 방법이 지속된 끝에 은데벨레족 2만~3만 명이 사망했다.

2000년에 무가베는 자칭 ‘참전군인들’이 백인 농부들의 토지를 폭력으로 강탈한 것을 옹호했으며, 선거가 끝난 후에는 선거 때 자신에게 반대표를 던졌던 도시 빈민을 상대로 이른바 '청소' 작업을 벌였다. 이 이야기가 무슨 소리인가 하면, 수도 하라레 정화를 명분으로 빈민층 밀집 지역의 집을 불도저로 밀어버렸다는 이야기이다. 게다가 자기를 독재자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잡아가두는 등의 행태를 보였다. 또한 선거철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되었는데 선거가 시작되기 전과 선거가 끝난 후에 자신을 찍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자신의 반대파들에 대한 학살을 저질렀다.


4.2.4. 정적 암살[편집]


무가베가 자행하는 정적에 대한 암살은 아주 악명이 자자했다. 2014년 3월에는 짐바브웨의 언론인이며 인권운동가인 이타이 자마라가 번호판이 없는 차에 실려서 납치된 이래 행방불명되었는데 사실상 사망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또한 에드워드 친도리 치닝가 전 ZANU PF 광업위원회 의장은 마랑게 다이아몬드 광산과 관련한 부정부패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가 운전을 하던 도중 사망했다. 짐바브웨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교통사고지만, 짐바브웨 야당 정치인들은 그가 운전 중에 머리에 총을 맞아 죽었다고 주장했다고 하며, 실제로 친도리 치닝가는 사망한 지 고작 24시간도 안 돼서 매장되었으며 부검이 이루어지지도 않고 황급히 매장되었다. 짐바브웨 국회의원인의 크로스는 치닝가가 그들이 나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으며, 그로부터 10일 후에 사망했다고 증언했다.

또한 무가베는 자신의 당 내에 있는 핵심 인물들조차도 정권에 위협적이라고 생각하면 인정사정 볼 것도 없이 숙청했다. 솔로몬 무주루는 무가베와 함께 짐바브웨 독립전쟁에서 함께 싸운 전우였지만 2011년 괴한들에게 공격을 받아 사망했는데, 무주루가 자신의 농장에 도착하자 괴한들이 그에게 차에서 내리라고 지시한 뒤 총을 쏴서 사망했다고 한다. 이때 괴한들은 무주류의 시신을 침대 위에 옮기고 폭발물을 설치한 뒤 집에 불을 지르는 만행까지 저지른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후 이뤄진 조사에서 증인들은 무주루의 집에 불이 나기 전 총성을 몇 번 들었다고 증언했지만 짐바브웨 법원은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죄 판결을 내렸으며 그의 시신을 찾아달라는 유가족의 요구를 거부했다.


4.3. 소수자 탄압[편집]



4.3.1. 백인 탄압[편집]


사실 90년대까지 무가베는 나름 백인과의 화합 정책을 펼쳤다지만, 2000년대부터 무가베는 흑인 우월주의를 주장했으며 백인에 대한 공공연한 인종차별과 복수를 선동했다. 그리고 앞서서 말했던 백인들의 토지를 빼앗아 흑인들에게 나눠주려고 하자 물론 백인들도 반발하여 민병대를 조직해서 대항했다. 이에 무가베는 경찰과 폭력배를 동원해 백인들을 강제로 쫓아내기도 하며 집을 불태워서 나가게 만들었고, 심한 경우에는 반항하지도 않는 사람들을 몽둥이로 때려 죽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가베는 "아프리카의 자원은 제국주의자, 식민주의자가 아닌 아프리카인들에게 귀속되어야 한다"며 아프리카 국가들과 서구 유럽 국가들 간의 대결 구도를 만드는 거짓 선동을 일삼았다. 무가베 정부가 이러한 경찰과 민병대들의 학살을 방조하면서 1980년대 초반 무가베 집권 후 백인들은 자신의 재산과 농장,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무기를 들고 스스로를 지켜야 했다. 그리하여 백인 민병대와 흑인 경찰과 폭력배 간의 무수히 많은 유혈 사태들이 발생했으며 그 참상은 가히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처참했다. 길가에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사람들이 널려 있었다고 하며 심하게 부상을 당하거나 총에 맞아 사망한 사람도 헤아리지 못할 수준이었다고 한다. 또한 증언에 의하면 백인들은 수용소로 끌려가서 나중에 풀려나서 국외 추방될때까지 강제로 노동에 동원되었으며, 호명되는 사람들은 무자비한 채찍질을 당했고 흑인들은 인종정화를 명목으로 백인 처녀들과 소녀들을 강간하고 임신시켜 흑백 혼혈아를 출산시켰다.

결국 짐바브웨의 백인들은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해외로 탈출하기 시작하여 짐바브웨는 백인들이 급격히 감소해 현재는 거의 남아있지도 않다. 이런 악행을 저지르면서 무가베는 죄책감을 느끼기는커녕 흑인 100퍼센트에 가까운 국가가 되었다면서 만족했다.


4.3.2. 성소수자 탄압[편집]


호모포비아였던 무가베는 동성애가 ‘비아프리카적인 현상'이며 동성애자들이 개만도 못하다고 주장하면서, 중국은 동성애를 허용하라고 압박하지 않아 중국으로부터 원조를 받는 것이 좋다고 말하기도 했다. 2014년에는 약 1400만 명이나 되는 인구가 살고 있는 짐바브웨에 게이, 레즈비언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말했고 "동성애자들을 소탕"하고 싶어하는 무가베는 이후 법을 바꿔서 성소수자에 대한 법이 더욱 가혹해졌다.[14]

무가베는 2014년 무가베의 외동딸[15]인 보나의 결혼식에서 "나는 우리나라(짐바브웨)에 동성애자 집단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그저께 그 얘기를 듣게 됐다. 따라서 누가 이 집단에 속하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짐바브웨 동성애자 단체는 대통령으로부터 끊임없이 위협받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수년간 활동을 이어 오고 있지만 무가베는 성소수자들의 목을 자를 것이라고 그들을 주기적으로 협박하고 있다. 실제로 짐바브웨의 전직 대통령인 카난 바나나[16]가 재직 중에 남자직원들과 성적 관계를 가진 혐의로 기소되는 등 동성애자들이 고난을 겪고 있는 중이다.

이런 성격 때문에 나이지리아우간다에서 새로 제정된 반동성애법들에 대해 무가베는 마음에 든다고 말하기도 했다. 무가베는 새로운 반동성애법에 서명한 나이지리아와 우간다 대통령들을 칭찬하면서 "서방은 이것이 인권 침해라고 말한다. 요웨리 무세베니 우간다 대통령이 최근에 한 일 말이다. 남자가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와 결혼한다면 인권은 보장된다. 하지만 남자가 남자와 결혼한다면 우리는 권리를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그들을 계속 추방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다닌다. 이러한 그의 동성애 탄압과 폭압 정치 때문에 런던에서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1999년 10월경에 무가베는 비공식적으로 런던을 여행하고 있었는데 영국 외무부가 밝힌 바에 따르면 무가베는 쇼핑을 목적으로 일주일 전쯤에 영국을 방문했다고 한다. 말 그대로 국민들이 굶어 죽어가든지 말든지 신경도 쓰지 않고 그냥 사치 생활을 하러 갔던 것이다. 그러던 중 1999년 10월 30일 런던의 버킹엄 게이트에 있는 크라우네 프라자 호텔 앞으로 들어오는 무가베의 승용차에 3명의 남자가 갑자기 뛰어들었고, 동성애자단체 회원인 이들 중 2명이 차를 가로막자, 피터 타첼이란 회원이 승용차의 뒷문을 열었다, 승용차 문을 연 타첼은 경호원을 밀치며 무가베의 팔을 잡은 뒤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무가베, 당신을 고문 혐의로 체포한다. 고문은 국제법상 범죄 행위다." 이 회원들은 승용차에 뛰어들면서 "무가베, 동성애자를 모욕하지 마라"라는 현수막도 들고 있었다.[17] 영국 경찰이 도착하자 타첼은 유엔의 반고문 조약 등을 보여주며 무가베를 체포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경찰은 타첼과 동료들을 체포했고, 풀려난 무가베는 그날 저녁 귀국해버렸다. 피터 타첼 일행은 “우리는 인권 억압자에 대한 시민의 체포를 연출해 볼 생각이었다"며 무가베가 동성애자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겨온 것은 물론, 최근 2명의 언론인을 고문하는 등 인권을 억압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타첼은 "특히 국민들은 굶주리는데 대통령이 가족을 위해 외국에 나와 사치품을 사들이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말하며 무가베를 비판했다.


4.4. 사치 행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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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가베의 별장들 중 하나 출처

무가베는 가장 가난하고 파탄난 짐바브웨를 만들었으며, 국민의 80%를 실업자로 만들고 국민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 마당에도 저 정도로 엄청난 수준의 사치행각을 일삼았다. 국민들은 뼈 빠지게 고생하는데 자기 혼자 온갖 호강 다 하고 살아서 그런지 90살이 넘었을때도 여전히 정정했다. 위의 90세 시절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 얼굴만 보면 이제 갓 70줄에 든 사람 같아 보였다.

2008년에 수도 하라레 근교 별장이 완공되었는데. 이 별장의 가격은 2600만 달러(한화 약 290억 원)로 25개의 욕실을 갖추고 있다. 그는 이 궁전의 인테리어에 수백만 달러를 들였는데, 중동 예술가를 1년간 고용해서 별장 천장을 디자인하고 제작하도록 했다. 웃긴 사실은 짐바브웨 대통령이 받는 연봉이 공식적으로는 고작 5만 7000달러(한화 약 6천만 원)밖에 안 된다는 점이다. 때문에 도대체 무슨 돈으로 저 지랄을 했냐는 비아냥을 받았다. 게다가 이 별장은 그가 대통령이 된 후 3번째 지은 별장이며, 그가 소유하게 된 5번째 별장이다. 2008년 이후에도 이런 식의 별장이 짐바브웨 내에 몇 개가 더 있다고 하며 권좌에서 축출될때까지 엄청난 수준의 사치를 계속해서 하고 있었다.

외국에 갔을때도 호화로운 쇼핑을 즐겼는데 기사에 의하면 무가베는 2011년 상반기 6개월 동안 외국 여행에 무려 1천200만 파운드(한화 약 206억 원)를 지출했다고 현지 일간지 데일리뉴스가 폭로하기도 했다. 게다가 싱가포르에서 아내인 그레이스와 함께 수백만 파운드에 달하는 쇼핑을 하는 등 사치가 심각했다.#

이런 사치 행각과는 별개로 식생활은 후술할 생일파티를 벌일 때를 빼고는 금욕적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무가베는 2015년 2월 28일에 있던 91세 생일파티 자리에서 나의 장수비결은 배부를 때까지 먹지 않는 것이라며 자랑했다. 무가베는 짐바브웨 빅토리아 폭포 주변 고급호텔 골프장에서 열린 대규모 생일파티를 하기 전에 방송 인터뷰 도중에 "나는 잘 먹지만, 내 배를 가득 채우지는 않는다"고 말했다고 남아프리카공화국 뉴스통신 사파(SAPA)가 보도했다.

그는 "당신은 잘 먹어야 한다. 그러나 음식이 당긴다고 배가 찰 때까지 먹지는 마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충고했는데, 무가베는 자기 건강을 매우 생각해서 금욕적인 생활을 했고 이 생활 습관은 상당히 유명하다고 한다. 무가베는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 오랫동안 산책을 하고 식단에서 고기는 조금만 먹고 야채는 많이 먹었다고 한다. 또한 무가베의 여동생은 무가베의 장수비결을 술과 담배를 하지 않고 운동을 많이 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4.4.1. 생일파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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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월 21일. 89세 생일잔치 당시.

무가베의 기행과 사치가 가장 드러나는 부분은 바로 그의 생일파티다. 국민은 쫄쫄 굶는데도 자기 생일이랍시고 온갖 비싼 음식들을 차리기 위해 국민들을 수탈하여 생일잔치를 열었다. 무가베가 얼마나 생각이 없는 사람인가 하면 짐바브웨의 인플레율이 800억%로 최고조에 달했던 2009년에 무가베는 1961년산 볼링어와 모에&샹동 샴페인 2,000병, 조니 워커 500병으로 85회 생일 파티를 했다. 그리고 2013년에는 자신의 89번째 생일이랍시고 크고 아름다운 89kg짜리 생일 케이크를 만들어서 생일파티를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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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89kg짜리 케이크 사진. 저 큰 탑처럼 보이는 물체가 바로 케이크다.[18]

하지만 더 개념없는 사실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쭉 자신의 생일에 케이크 무게를 맞추어서 만들어왔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만들 것이고, 2015년에는 91kg짜리 케이크를 만들겠다고 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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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개의 케이크들 중 일부.[19][20]

2015년에 열린 생일파티만 해도 생일 잔치에 코끼리, 기린, 영양, 악어등을 비롯한 야생동물을 도축하여 만든 요리로[21] 한상 가득히 차려 손님 접대에 썼는데, 무가베는 부인과 함께 91개의 풍선을 하늘에 날리면서 생일파티를 시작했다. 약 2만 명이 참여한 생일 파티는 빅토리아 폭포 인근의 한 고급 호텔 골프장에서 열렸다. 참여자들은 대통령의 생일을 축하하고 장수를 기원했다. 이때 생일파티에는 캐비아와 고급 위스키와 대형 생일 케이크만 7개가 놓였고 어린 코끼리 1마리, 버팔로 2마리, 흑담비 2마리, 임팔라 5마리가 들어갔다. 이 동물들은 지역 토지 주인이 대통령에게 바친 진상품이었다. 또 40마리, 사자 1마리, 악어 1마리도 선물로 전달됐고 또 다른 코끼리는 총살해 빅토리아 폭포 지역 사회에 전달했다. 무가베의 생일잔치는 7일 동안이나 계속됐는데 이번 잔치에는 약 한화로 약 18억 원인 160만 달러가 들어간 것으로 추산된다.

무가베는 매년 그래 왔듯이 국민들의 자발적인 모금과 기부로 이뤄졌다고 주장했지만 이에 대해 야생동물 보호단체는 비윤리적의 극치라고 비난했다. 야당 관계자들은 생일파티에 쓰인 재정은 공중병원, 지역 학교 복구와 건설에 쓰여야 할 것이었다고 맹비난했다.

2016년에도 92kg 중량의 케이크를 만들어서 성대하게 잔치를 해댔다. 92개의 풍선을 하늘에 날리며 시작한 2016년 생일잔치에서 무가베 지지자들은 무가베가 예수만큼 위대한 인물이라는 연설을 해댔다. 지지자들은 무가베를 “아프리카의 선지자, 모세”, “친애하는 아버지”, “전하” 등으로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고 공연을 벌였다. 한편 짐바브웨 신문들은 "무가베의 생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일과 같다"고 홍보한 데 이어 지면에서는 "만수무강하시오, 무가베 동지여"라는 기사를 실었다. 또한 "고마워요 밥(무가베), 우리는 1980년 이후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요"라는 헤드라인을 통해 1980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데 공을 세운 무가베 대통령을 칭송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한편 무가베는 이 생일 파티에서 짐바브웨에서 가뭄 때문에 굶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을 해댔는데, 정작 2016년 짐바브웨는 20여 년 만에 닥쳐온 최악의 가뭄 때문에 짐바브웨 국민 300만 명이 식량난을 겪고 있으며, 가축 2만 마리가 아사해 긴급 구호를 기다려야 하는 지경에 놓인 상황이었다. 이에 짐바브웨 야당 정치인 심바 마코니는 현지 언론에“우리의 친애하는 지도자께서 국민이 배를 곯는 가운데 성대한 생일잔치를 준비하셨다"며“이 얼마나 잔인하고 무신경한 처사냐"고 무가베를 비난했다.

이러한 국제 사회의 비판과 2016년 6월부터 공무원들이 제때 봉급을 지급받지 못하고 있었으며 80% 이상의 노동자들이 비공식 영역에서 생활비를 충당하는 것은 물론 12월부터 이어진 폭우로 홍수가 나 200여 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열악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2017년에도 어김없이 93kg 케이크를 만들어서 사치스럽게 잔치를 해댔다. 2월 25일 마타벨렐랜드 남부 마토보 국립공원에서 열린 공식 생일잔치에 든 비용은 무려 250만 달러(한화 약 29억 원)로 역대 최고액이자 매년 생일잔치에 들어가는 평균 비용인 100~150만 달러(한화 약 17억 원)의 1.5배~2배에 달한다.#

이날 생일잔치에서 무가베는 "분파를 형성하느라 바쁜 사람들은 자신이 물러나야 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나 자신에게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묻는다"며 권력승계 문제로 분파 갈등을 겪고 있는 집권 여당에 대해서도 후계자를 지명할 생각이나 물러날 생각이 전혀 없음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에 한 인권단체의 대변인은 생일잔치가 열린 마타벨렐랜드는 무가베의 인권 탄압으로 인해 억울하게 학살된 사람들이 묻힌 곳이라면서 학살 현장인 이곳을 축하 장소로 써서는 안 된다고 무가베를 비판했다. #

그리고 2018년에는 94kg이 될 것이라 예측되고 있었으나 후술할 군부 쿠데타로 인해 퇴진하게 되면서 더이상 이 케이크를 볼 일은 없었다. 퇴진 후 무가베의 생일인 2월 21일이 공휴일로 지정되고, 전직 대통령 예우를 계속 받게 되었지만 이미 권력을 상실한터라 94번째 생일은 별다른 잔치나 행사 없이 조용히 넘어가게 되었다. 또한 2019년에 무가베 본인이 사망하여 케이크 사태는 끝나게 되었다.

4.5. 교육[편집]


위와 같은 독재 행각만 보면 교육 정책도 엉망진창으로 했을 것 같지만, 본인이 교육학 전공자이고, 교수출신이어서 그런지 교육기관은 은근히 잘 정비해놨다. 이는 경제정책 분야에서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의료제도는 그나마 신경 좀 쓴 쿠바체 게바라[22]와 비슷하다.

무가베는 독립 후 모든 국민에게 무상 의무교육을 약속했고 이는 고등학교까지 적용되고 있다. 무가베는 대학교육까지 무료보급을 약속했지만, 이는 막장인 짐바브웨의 경제사정상 실현되지 못했다. 하지만 짐바브웨의 문해율은 92%로 남아공과 함께 아프리카에서 가장 교육수준이 높을 수준 정도로 교육인프라를 잘 정비해 놓았다. 반면 짐바브웨와 인접한 아프리카 국가들인 모잠비크잠비아, 말라위는 50% 근처에서 놀거나 그 절반에 못 미친다.


5. 2000년 이후의 행적들[편집]


2000년 1월 무가베 대통령이 10만 짐바브웨 달러(당시 환율기준으로 한화 약 295만 원)짜리 복권에 당첨되었다.

2005년에 이라크 전쟁을 비롯한 전쟁을 일으키는 조지 W. 부시토니 블레어를 "히틀러무솔리니처럼 무고한 국가를 공격하기 위해 동맹을 결성한 불신성한 사람들이며, 세계 지배를 노리는 파시스트들"이라고 마구잡이로 비난하기도 했다.

이후 2009년 워싱턴 포스트지 주말 매거진 퍼레이드의 전 세계에서 최악의 독재자 부분에서 1위를 기록했다. 본인 스스로도 100세까지 채우고 퇴임하겠다고 선언했다. 다만, 후술하겠지만 은퇴할 생각이 없다고 하거나 사후 부인에게 권력을 물려줄 거라는 말을 한 것으로 보아 100이라는 숫자의 상징성에 대해서 언급한 것일 뿐 100살이 넘어도 죽지 않으면 하야하지않겠다는 말이였다.

결국은 자국 화폐를 포기하고 자신의 정적, 그것도 자신이 네 번이나 죽이려고 했던 모건 창기라이와 연정을 선언해 회복 중이라고 하였지만 믿는 사람이 없었다.

똑같이 젊은 시절 백인우월주의 정권에 항거하며 남아프리카의 국부로 존경을 받다가 세상을 떠난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과 너무나도 비교된다.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에게 무가베는 개인적으로도 친했던데다가 오래전 험난한 시절을 겪을 당시 너무나도 뜻이 맞는 동지이자 벗이었기에, 그는 국내외적으로 욕이란 욕은 다먹고 종신 독재자로 군림하던, 쿠데타로 축출되기 직전의 무가베를 살아생전에 너무나도 안타까워했다. 묘하게도 만델라와 무가베는 똑같은 95살까지 살았다.

무가베도 자신이 죽으면 권력승계화가 좌절되는 것을 아는 모양인지 적어도 압수한 백인 농장들만이라도 절대로 도로 백인들에게 줄 수 없다면서 소유권한을 이미 여러 이들에게 양도했고, 죽을 경우에도 유언으로 다른 사항도 준비했다고 한다. 이전 짐바브웨 백인 농장들의 독점실태가 워낙 심각했던 탓에 무가베를 쌍욕하는 다수 반대파조차도 지지하는 일이라 설령 무가베가 죽어도 백인들이 돌아온다고 해도 땅을 찾으려면 꽤나 고생할 예정이다. 어쩌면 짐바브웨 국민들에게는 애증의 대상인지도.

2011년, 리비아 내전카다피를 지원하고자 군대를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자국 사정도 워낙 개차반이라 대규모 지원은 어림도 없고 겨우 일부 부대와 군사고문단 수준을 지원했으며 큰 도움이 못 된다는 분석이다. 결국 카다피 정권이 무너지고 행방을 알 수 없는 카다피가 짐바브웨로 망명할 예정이라는 기사가 나왔지만 알다시피 카다피는 자신의 독재 정권이 반정부군의 공격을 받아 붕괴된 뒤에도 리비아 국내 이곳 저곳을 떠돌며 카다피 정권의 잔존 세력들과 함께 승산 없는 싸움을 이어가다가 나토 공군과 반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해버렸다.

2011년 11월에는 남아공의 유명한 식당 체인인 난도스[23]가 무가베를 주연으로 한 광고를 제작해서 짐바브웨 국민들의 격렬한 항의를 받고 있다. 내용은 무아마르 알 카다피, 사담 후세인, 마오쩌둥, 이디 아민, 피터르 빌럼 보타 같은 좋은 벗을 떠나보내고 홀로 남은 무가베가 쓸쓸히 저녁식사를 준비한다는 가슴이 아리는 내용. 그런데 후세인, 마오쩌둥, 이디 아민 등이야 다 그렇다 쳐도 피터 보타를 넣은 건 무리수였다는 비판이 많았다고 한다. 아무래도 자국의 독재자라는 이유로 광고에 넣은 듯 싶지만 무가베가 젊은 시절 정상인이었을 때 맞서 싸운 것이 로디지아같은 백인 우월주의자들이었으니 백인 우월주의자인 보타[24]가 무가베랑 친구라는 건 영 아니라는 것. 광고가 제작되는 시점에서 이미 몰락하거나 사망한 독재자를 광고에 집어넣은 듯 한데 차라리 김일성을 넣는 게 더 나았을 것이다. 김씨조선이 세습을 통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지만 마침 북한빠였기도 하니.

그리고 좀 더 첨언하자면 무가베는 카다피를 보고 "뇌가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고 돌직구를 날린 적도 있다. 사실 과거 1990년대에도 에티오피아의 전 독재자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을 받아주려는 시도도 했었고, 이후 멩기스투는 짐바브웨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다. 무가베가 이렇게 외국의 독재자들을 보호해주고 지원해주는 이유는 딱히 그들을 좋아해서라기 보다는 자기도 언제 그런 꼴을 당할 지 알 수 없어서 보신 차원에서 하는 행동인 게 더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즉 무가베는 카다피에게 지원을 해주긴 했다만 사이가 좋은 친구까지는 못 되었던 것.

건강상태가 의심스러웠는데 위키리크스에 따르면, "전립선암에 걸려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라고 주장했다. 매년 1월 눈 검진을 위해 싱가포르를 방문하는 것을 포함, 아시아로 연례적인 휴가를 떠나고 평소 건강한 식단과 소식을 고집하는것으로 알려진것으로 보면 건강에 각별히 신경을 쓰는 듯했다.

2013년 7월 31일 대선에서 승리했다. 득표율은 61.9%. 상대후보인 모건 창기라이는 33.9%에 그쳤다. 현재 창기라이는 총리이다. 연정을 구성한 셈이다. 그러나 창기라이의 민주변화운동은 부정선거라고 주장하면서 선거결과에 불복을 선언한 상황이다. 그러나 결국 무가베가 몰아붙여서 5선 임기를 시작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5선 임기를 시작한다면 2018년까지 재임할 것이며 이 때 무가베의 나이가 94세. 이에 대선 경쟁자였던 모건 창기라이 등 야당 지도자들은 "야당 우세 지역에서 100만 명이 투표를 하지 못했다"며 "선거 부정행위가 짐바브웨를 심각한 위기로 몰아갈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무가베는 "선거에 패배하고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 정치인들을 쓰레기처럼 처리하겠다"며 "영국이 짐바브웨에 거주하고 있는 백인 소유의 토지 몰수 정책 때문에 나를 축출하려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무가베는 여러가지 기행들을 저질렀는데, 2014년 90세 생일을 기념해서는 무려 500만 달러짜리 동상을 제작했다. 재밌는 건 이 동상을 제작한 게 다름아닌 북한의 만수대창작사.[25] 더 재밌는 건, 당시 생일파티 당시 "9살 같은 젊음을 느낀다.", "은퇴할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2014년 3월에는 4월 EU-AU 정상회담을 앞두고 "부인(그레이스 무가베)을 초청하지 않으면 정상회담을 거부하겠다"고 으름장까지 놓기도 했다. 부인 그레이스는 2002년 야당 탄압, 백인 농부 추방 등으로 인하여 EU 입국이 금지된 상태.[26] 로버트 무가베 짐바브웨 대통령의 회의 참석과 짐바브웨 및 수단의 인권 문제 등을 둘러싸고 긴장이 야기되긴 했지만 어찌어찌 참여는 한 모양.

이 회의에서 무가베 대통령의 인권탄압 문제가 크게 대두되었는데 앙겔라 메르켈 독일총리는 회의 첫날 비공개회의 연설에서 "오늘날의 짐바브웨 상황은 새로운 아프리카의 이미지를 해치고 있다"고 무가베 대통령을 겨냥해 공세를 폈으며 고든 브라운 총리는 '폭정과 인권탄압을 자행하고 있는' 무가베 대통령의 회의 참석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회의에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가재는 게편이라고 타보 음베키남아공 대통령 등 아프리카 지도자들은 무가베를 두둔하고 나섰다. 영국 등 유럽국가들은 짐바브웨의 폭압적 정치와 인권탄압을 비판하면서 붕괴 직전의 경제상황이 무가베 대통령의 실정 탓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아프리카 지도자들은 이를 식민통치했던 영국의 잘못으로 돌리고 있다.

그러던지 말던지 무가베 대통령은 정상회의 연설에서 "유럽은 선거에서의 승자를 싫어한다는 이유만으로 짐바브웨에서 합법적으로 치러지는 선거 결과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잘못이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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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4일에는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에서 열린 아프리카 지도자회의에 참석했다가 하라레 공항에 도착한 뒤 공항에서 넘어졌다고 한다. 목격자들은 무가베가 공항에서 그를 환영하는 지지자들에게 연설한 뒤 연단에서 내려오면서 발을 헛디뎌 곧바로 넘어졌지만 크게 다치지는 않았고 측근들은 재빨리 그를 부축해 리무진에 태웠으며 리무진은 속도를 내며 사라졌다고 전했다. 넘어지는 장면을 찍은 일부 사진기자는 보안요원에 의해 사진을 삭제할 것을 강요당했다. 그런데 이 사진이 꽤나 웃긴지라 해외에서는 mugabe falls down이라고 해서 이 사진들처럼 패러디되고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의 동성결혼 합법화 결정으로 동성애에 대한 논란이 확산되고 있던 2015년 7월 1일 반 동성애주의자 무가베가 워싱턴에 가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청혼하겠다고 빈정댄 사실이 보도되었다, 무가베는 국영라디오와의 인터뷰 도중 "오바마 대통령이 동성결혼을 지지하고 있고 매력적인 용모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결정했다. 필요하다면 워싱턴에 가서 무릎을 꿇고 오바마에게 청혼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며 "왜 오바마가 남색을 금한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을 감히 무시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2016년 7월에는 자신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짐바브웨 참전용사연맹 소속의 여러 독립투사들을 체포하는가 하면, 8월에는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이 끝난 이후 메달을 따지 못했다는 이유로 올림픽에 파견했던 선수단 31명을 전원 체포했다는 나이지리아 매체의 보도에 대해 진화에 나서기도 했다.

그리고 12월에 2018년 대선 출마를 선언한다.# 그러나 후계자를 정해놓지 않았다는 것이 큰 문제이다.

2017년 2월, 93세 생일 기념 짐바브웨 국영 TV 연설에서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도널드 트럼프의 정책을 지지한다며 짐바브웨인을 위한 짐바브웨를 만들겠다며 호언장담했다.

2017년 10월에는 세계보건기구가 무가베를 보편적 보건의료 및 건강 증진을 정책으로 삼아 아프리카 지역의 보건 향상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친선대사로 임명해 세계 안팎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소식을 접한 세계의 여러 보건의료 및 인권단체들은 무가베의 장기 독재로 인해 짐바브웨의 보건 환경은 오히려 퇴화했다면서 세계보건기구를 비판했다.


6. 하야[편집]



6.1. 축출 과정[편집]


2017년 11월 15일에, 상황을 보다 못한 짐바브웨 군부의 쿠데타가 일어났다. # 로버트 무가베가 후술할 자기 아내인 그레이스에게 대통령 자리를 물려주려고 하면서 부통령인 에머슨 음낭가과를 11월 6일 해임한 게 원인으로, 음낭가과는 해외 망명했다. 이때 경질한 이유도 어처구니 없는 게, 마법을 사용해 반역을 꾀했다는 것. 군부 출신인 음낭가과가 경질되자 그동안 무가베한테 충성을 바쳐왔던 군부가 이에 반발하여 그를 배신하고 쿠데타를 일으킨 것.

군부는 국영방송을 통해 대통령 주변의 범죄자, 국정농단 세력들이 표적이지 쿠데타가 아니라고 일축했으나, 이미 군부는 의회 등 정부 건물과 국영방송사 ZBC 등 수도 하라레 전반을 장악했으며, 무가베 사저에서 30~40발의 총성이 들렸다는 제보도 있었다. 더 어이없는 건 11월 13일에 군부 수장인 콘스탄틴 치웽가 장군이 고위급 장교 90명을 대동하고 "해방전쟁 참전용사 출신 인사들을 겨냥한 숙청을 중단하라", "숙청 멈추지 않으면 쿠데타 직면할 것"이라며 무가베한테 대놓고 경고했다는 것.#영상 즉 쿠데타 실행 이틀 전에 미리 알려줬다는 의미와 같다. 부통령이 해임된 날이 11월 6일인데, 쿠데타가 벌어진 날은 고작 9일 후인 15일이다. 이토록 단기간에 쿠데타 과정이 착착 진행되어간다는 것 자체가 군부가 예전부터 이미 준비는 철저히 다 해놨고 언제 일으킬지만 벼르고 있었다가 군부 측 대표격인 부통령을 경질한 것을 빌미로 일으킨 것.

앞서 언급했듯 군 고위급 장교 90명이 한꺼번에 대동하여 '쿠데타 경고' 기자회견을 했다는 것을 볼 때 짐바브웨군 내부에서 파벌을 불문하고 거의 전부가 무가베의 축출을 원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군부에서는 '무가베 대통령과 그 가족은 무사하며, 그들의 안전을 보장하겠다', '이는 쿠데타가 아니며 무가베 주변에서 범법행위를 하고 있는 범죄자들만 겨냥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당연히 이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런 발언부터가 바로 전형적인 쿠데타 직후의 반응이기 때문이다. 특히 권력자 주위의 인사들을 축출하기 위해 일으켰다는 주장은 매우 흔해 빠진 쿠데타의 대외명분이기도 하다.
비슷하게 동아시아에서도 반란을 일으킬 때면 황제/국왕의 눈을 가리는 간신들알 숙청한다며 궐기하지 처음부터 내가 황제 하겠다며 일어나지는 않았다(대표적인 것이 십상시를 겨냥한 동탁이나 조조)

이에 무가베는 반역이라며 길길이 날뛰었지만, 집권 37년 만에 처음으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점, 즉 명분 축적이나 각종 준비 등을 철저히 해왔을 거라는 점, 이미 주요 시설 및 방송국을 장악하는 등 정석적인 쿠데타 형태대로, 즉 군부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무가베가 이번 위기를 빠져나갈 가능성은 낮다. 결국 무가베는 가택 연금되었고, 남은 지지 세력의 반발과 국제 사회의 비판 여론, 독립 원로로서의 공로를 감안해 군부에서 무가베를 총살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이지만 내년까지 남은 임기를 채우겠다며 사퇴와 퇴진 후 과도정부를 구성하라는 군부의 제안을 거부했다. 이에 집권당에선 무가베의 당 대표직을 박탈하고 음낭가과를 새로운 당 대표로 선출했으며, 그의 아내 그레이스를 제명했다. 그리고 11월 20일까지 자진 사임하지 않는다면 탄핵 절차에 들어가기로 했다.

이후 당과 군부의 압박에 19일 늦은 저녁 자진 사퇴를 결정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지만, 정작 국영방송을 통해 생중계된 연설에서는 12월에 열릴 여당 총회를 주관하겠다는 딴소리를 하면서 끝내 사퇴를 거부했다. 자신과 부인에 대한 면책 특권, 개인 재산 유지를 조건으로 물러나겠다고 했다는 기사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이미 무가베가 대표직을 맡고 있었던 여당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동맹 애국전선은 무가베의 대표직을 박탈했고, 20일 직접 탄핵절차를 개시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11월 22일 탄핵 표결이 진행될 예정이며, 야당은 물론 여당에서도 무가베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는 이상 탄핵 충족 요건인 3분의 2를 채우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아프리카에는 문민통제 및 권력의 견제와 균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개발 도상국 혹은 최빈국이 수두룩하다. 이들 국가의 지도자가 민심 이반에도 불구하고 장기 집권을 유지할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군부의 지지에 기반을 둔 덕분인데, 만약 군부마저 등을 돌리면 육체적 생명은 해외 도피, 망명, 사임으로 건질 수 있을지 몰라도 정치적 생명은 확실히 끝난다.[27]

6.1.1. 우려[편집]


일각에서는 무가베가 축출된 짐바브웨가 음낭가과 부통령과 치웽가 장군 사이에 권력 다툼으로 인해 내전이 일어나 소말리아처럼 될 것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참고로 소말리아는 1991년 시아드 바레 정권 축출 후 헤게모니를 쥐게 된 무하마드 파라 아이디드와 마디 모하메드 등 반군 출신 군벌 지도자들의 분열과 내전으로 무정부 상태에 빠져 세계적인 파탄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외국의 원조와 약간의 축산업 외에 별 다른 국가 산업 자체가 없는 소말리아와는 달리 짐바브웨는 농업이 발달했으며 백금, 리튬 등의 자원이 풍부하다.[28]

또한 소말리아는 바레 정부가 축출되고 내전이 일어나 막장화되기 전인 1970년대와 1980년대 당시 독재자 시아드 바레 전 대통령이 선거나 야당 없이 영구 종신 독재를 벌이고 대체 정치 세력들의 활동을 허용하지 않으며 1당 1인 독재를 펼치고 자신의 출생 부족인 다로드-마레한 족을 우대하고 여타 부족 세력들을 박해, 배척하는 등 내부적으로 이미 내전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29] 반면 짐바브웨는 무가베 독재정권이긴 했어도 그래도 대통령 선거도 하고 야당의 정치 활동도 허용되는 등 1950년대 말 이승만 독재 정권 당시 한국(정확히 말하면 1958년부터 1960년 4.19 혁명 전까지)이나 현재 푸틴 독재 정권의 러시아처럼 어느 정도 민주정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고[30]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나 보츠와나, 잠비아, 모잠비크, 나미비아, 에스와티니 등 주변 남아프리카 국가들이 대부분 안정적이고 남아프리카의 역내 국가들 모두 정치적, 경제적으로 밀착되어 있어서 소말리아처럼 장기 내전에 빠져 지옥이 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일단 무가베 축출 후 짐바브웨가 내전으로 무법천지가 되면 이들 남아프리카 주변국들과 여러 광물 자원을 노리는 서구 열강들에게도 득이 될 것이 없기도 하고,[31] 게다가 현실적으로 군부가 어중간하게 갈라져서 두 개 이상의 파벌로 나뉘어 있다면 모를까 군부와 정권층 인사들 전체가 무가베보다는 음낭가과를 지원하고 있기 때문에 내전이 일어날 일이 거의 없다. 사실 짐바브웨군의 경우 "어버이 무가베 수령님"을 외치는 수준은 아니고 그냥 내심 저걸 어떻게 뒤집을까 생각만 하고 있었지 먼저 나서서 무가베를 축출하기에는 명분도 미약했고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음낭가과가 먼저 나서줬으니 음낭가과에게 반기를 들고 무가베를 위해 싸워줄 이유 따윈 없다. 다행히도 무가베 축출 이후에 음낭가과 신정부가 안정적으로 정국을 통치하고 있는 상황이라 소말리아와 같은 상황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32]

다만 무가베 축출 이후에 집권한 현 짐바브웨 정권이 안정적으로 정국을 통제하고 있지만 아프리카와 서방 국가들의 외교관과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음낭가과와 치웽가 역시 무가베 독재정권 시절 은데벨레족 등 반대파 부족 세력들에 대한 무력 진압을 주도하며 무가베를 지지했고, 무가베 정권 하에서 고위각료로 성장했던 인물인 만큼 무가베보다는 조금 나을 뿐, 그들도 별 반 다를바 없는 독재 정치를 펼칠 것을 우려하고 있다.

그리고 무가베가 실각, 사망하고, 정권을 장악한 음낭가과 현 대통령과 치웽가 현 부통령[33]이 정치권력을 둘러싼 분열과 갈등 없이 정국을 완전하게 통제하면서 짐바브웨가 1991년 시아드 바레 독재정권이 붕괴된 직후의 소말리아나 1997년 모부투 세세 세코 독재정권이 축출된 이후의 콩고민주공화국, 2011년 무아마르 카다피 정권 몰락 이후의 리비아처럼 내전이 일어날 가능성은 완전히 없어졌다.[34]

6.2. 하야 선언 이후[편집]


결국 현지 시각으로 2017년 11월 21일[35]부로 전격 사임했다. 짐바브웨 의회는 그의 사직서를 접수했고, 후임 대통령은 음낭가과가 승계한다고 밝혔다.[36]

무가베의 사임과 함께 짐바브웨 정부는 무가베의 재산과 신체적 안전을 보장[37]하며, 전직 대통령 예우를 지속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예우에는 수도에 소재한 무가베 일가의 거주지의 관리와 유지에 필요한 인력ㆍ비용, 무가베가 이용할 벤츠 S500급의 관용차 3대, 경호관 6명을 포함한 직속 보좌 인력 20명, 관용 여권, 연 4회의 관용 비행기 이용권한 등이 포함된다. 또한, 무가베의 퇴직금 명목으로 1,000만 달러의 현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이외 여러 면책권이 부여되는 등 매우 관대하게 처분되었다. 무가베가 재임 중후반기에 국가 경제를 말아먹는 등 개판을 쳤다 해도 일단 짐바브웨 백인통치를 끝낸 공이 있고,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도 무가베와 여러모로 관련이 있으며, 탄핵안이 입안되자 저항을 포기하고 순순히 정권을 이양했기 때문에 군부 입장에서 무가베를 일방적으로 격하하기도 곤란하기 때문이다.

비록 무가베는 권력을 박탈당하기는 했으나 숙청된 것은 아니며,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은 채 정치에는 아무 관여를 하지 않는 대신 남은 여생을 편하게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다. 물론 이때 무가베는 건강이 나쁘며 백살이 다 되어가는 노인네라 여생이 얼마 안 남았으니, 굳이 사법적 처리로 나라를 시끄럽게 하기 보다는 조용히 여생을 마칠수 있도록 해주는게 낫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더 중요한 점은 위의 여러 학살이나 정적 암살 의혹사건들은 사실 군부나 후임자도 공범이라서 이런 걸로 무가베를 재판대에 세워 봐야 자기들도 법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거시적 관점으로 보면, 최대한 피를 보지 않는 정권 교체가 더 이득이다. 그 이유는 정권 이양이 평화롭게 진행돼야 새로 정권을 잡은 자들도 추후에 본인들이 권력을 내려놓을 때에 대해 보다 더 안정감을 느끼고, 권력을 사수하려는 경향도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당수직에서 해임되었고 사실상 제명되었다. 이로 인해 앙금이 있는지 2018년 대선에서 야당 후보를 지지하는 기행을 선보이기도 했다.

무가베의 축출을 다른 아프리카 독재자들이 반면교사로 삼아 권력 유지를 유연화할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2018년 11월에 치료차 싱가포르에 머무르고 있으며, 못 걸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상태다. #


7. 사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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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병원에서 2019년 6월에 찍은 사진. 이디 아민의 사망 1달 전과 비교하면 확실히 초췌해 보인다.

2019년 4월에 로버트 무가베는 퇴원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건강이 악화되었기 때문에 싱가포르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하게 되었다. 2019년 6월에 27세의 무가베의 아들이 아버지의 최근 사진이라며 사진 3장을 공개했는데, 이제 갈 날이 머지 않았다는 듯 매우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 사진들이 무가베가 생전에 남긴 마지막 사진이 되었다.

결국 로버트 무가베는 2019년 9월 6일에 노환으로 싱가포르에서 향년 95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짐바브웨 정부 외에 남아공, 중국 등 일부 국가는 애도를 표했지만, 짐바브웨 국민들은 '눈물이 아깝다' '학살자가 죽었다는 소식에 기분좋은 금요일' 등 기뻐하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특히 전술한 것처럼 무가베에 의해 엄청난 학살을 당했던 은데벨레족 주민들은, 무가베 사망 소식에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몇날 며칠을 축제로 보냈다고 한다. 물론 이때 한 은데벨레족 출신 주민은 "저 놈이 너무 평화롭게 죽어서 분하다"며 비통해했다고 전해진다.

사후 시신은 싱가포르에서 짐바브웨로 이송되었으며 수도 하라레의 국가영웅묘역에 안장하려고 했으나, 유족들의 요구로 9월 28일에 그의 고향인 즈빔바 지역의 쿠타마 마을에 묻혔다. 이렇게 "빈민의 아들로 태어나 피나는 노력 끝에 백인 압제자들을 몰아낸 위대한 독립영웅 로버트 무가베"에서 "김정일과 비견되는 추악한 독재자 로버트 무가베"로 평가가 추락하는 극과 극을 오가는 삶을 살아온 무가베는 95년간의 긴 인생을 끝마치게 되었다.


8. 아내 그레이스 무가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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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들리는 내용에 의하면 무가베가 가장 신임하는 사람은 바로 배우자 그레이스 무가베(1965~)라고 한다. 2015년 동안 그레이스 무가베의 정치적 영향력은 계속해서 증가했으며 사실상 짐바브웨를 지배했던 인물로 꼽힌다.

원래 무가베의 첫 번째 아내는 샐리 무가베였다. 샐리가 본부인일 당시 그레이스는 짐바브웨 대통령 사무실의 타이피스트였는데 그레이스와 무가베는 샐리 몰래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러다 불륜을 알아차린 샐리가 이들의 불륜을 저지하려 했지만 샐리는 병에 시달려서 몸 상태가 말이 아닌 상태였고, 결국 첫 아내 샐리가 사망한 후 1996년 그레이스는 무가베와 결혼했다. 1965년생인[38] 그레이스는 짐바브웨의 영부인이자 두 아이의 엄마로서 ZANU PF의 여성연맹을 이끄는 지도자가 되며 당내에서 정치적 입지를 다져 현재에 이르렀다. 그와 함께 지난해 대학에 입학한 지 두 달 만에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도저히 믿기가 힘들 정도로 박사 학위를 빨리 딴 것이 의심스럽다고 한다.

사치스럽기로 악명이 자자하며 쇼핑을 좋아해서 세간에선 '구찌 그레이스'로도 불린다. 그레이스는 2014년 초에 딸의 결혼식에 무려 51억 7천만 원을 쏟아부어서 수많은 짐바브웨 국민들이 굶어죽어가는데 저렇게 돈을 쓰냐는 비판을 받았다.[39] 또한 성격도 더러워서 2009년 홍콩에서 명품들을 사며 쇼핑을 하다가 자신을 촬영하던 영국인 사진기자를 자기 맘에 안 든다고 폭행해서 폭행 혐의로 입건되기도 했다. 나중에 합의금 주고 풀려났다.

2015년에는 자신의 농장에서 생산되는 우유를 네슬레에서 더이상 구매하지 않기로 하자 이를 소모하기 위해 알파오메가라는 아이스크림, 초콜릿 회사를 설립하는가 하면 # 그해 11월, "내가 특수 휠체어를 만들어 밀고 다니면서 무가베 대통령의 집권을 연장하겠다"고 밝혔다. 무가베 대통령은 2014년 12월 연설에서 (집권당인) ZANU-PF 반대"라고 외쳐 사실상 판단능력을 상실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레이스 무가베는 2018년 대선에서 ZANU-PF 후보로 나설 것임을 이미 밝힌 바 있는데, 무가베 대통령보다 41살이나 어린 50세의 그레이스 무가베가 대통령에 당선될 경우 무가베 대통령만큼 장기집권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창기라이 전 총리는 수렴청정 가능성까지 제기했다. 다만 군부의 수장이자 부통령인 에머슨 음낭가과가 계승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 변수.

2016년 12월 26일에 그레이스는 짐바브웨의 채무를 상환하기 위해 국립공원 야생동물들을 중국으로 보냈다.# 그리고 그레이스는 그나마 좀 살기나은 밑동네 남아공[40]에도 저택이 있고 또 자주 남아공을 방문하는데 2017년 8월에는 발목염좌를 치료하기 위해 남아공을 방문했다 자기 아들의 친구이자 현재 남아공에서 활동하는 모델인 개브리엘라 엔젤스를 폭행했다고 한다. 엔젤스는 2017년 만 스무살이 조금 넘었고 그레이스에게 단순히 몇대 맞은 정도가 아니라 얼굴에 심한 흉터가 남을 정도로 상해를 당했다고 하여 남아공 국민들은 우방국 영부인이라지만 자국민이 그리 당했으니 그레이스의 처벌을 강력히 요구했지만 남아공 정부에서는 외교관 신분은 치외법권을 적용받는다는 이유로 그레이스를 그냥 짐바브웨로 귀국시키는 정도로 끝나 논란이 있었다.[41]

2017년 11월 15일 군부 쿠데타가 발발하면서 그레이스의 승계야망은 무산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애초에 그레이스는 독립운동으로 지지 기반이 있었던 무가베와는 달리 정통성이나 별다른 공적도 없었던지라 국민들 사이에서도 반발이 상당했고, 그레이스의 라이벌이었던 에머슨 음낭가과가 축출되면서 음낭가과를 밀고 있던 군부가 반발한 것이 쿠데타의 원인이기 때문에 복권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결국 21일 로버트가 하야함에 따라 권력 세습의 가능성은 없어졌다고 봐도 무방할 듯 하고 그나마 엘레나 차우셰스쿠나, 장칭 같은 최후는 안 맞았으니 오히려 그레이스 본인에게는 다행이라 할 수 있겠다.

공식적인 키는 불명이지만, 173cm의 무가베보다도 눈에 띄게 클 정도의 엄청난 장신이다.


9. 둘러보기[편집]


짐바브웨의 역대 총리
(초임)

초대
로버트 무가베


2대
모건 창기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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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0년대에 짐바브웨가 대기근, 말라리아, 에이즈 창궐로 짐바브웨 국민 평균 수명이 40세로 떨어진 것을 감안하면 짐바브웨 기준뿐만아니라 현대 기준으로도 엄청나게 오래 살았다.[2] 출처[3] 한국 시각 기준으로는 11월 22일.[4] 포브스 발표로 무려 6.5×10^108 = 6,500만 구골(1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5] 심지어 독재자 시절 무가베와 가장 절친했던 친구가 바로 그의 아버지인 김일성이었다. 이 인연으로 북한은 무가베의 동상을 제작해 선물해 주었을 정도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6] 참고로 여기서 김정일은 겨우(?) 3위였고, 2위는 수단오마르 알 바시르였다.[7] 짐바브웨의 군부 실세들이 대부분 이 당시 무가베의 호소에 응해 게릴라전에 참전한 인물들이다. 쿠데타군을 이끈 필립 콘스탄티노 치웽가 대장도 이때 게릴라전에 참전한 인물. 부부 세습을 하려는 무가베에 대해 쿠데타를 일으켜 하야를 압박했어도 상당히 예우를 갖춘 것은 다 이런 인연 때문이다.[8] 심지어 일부 백인 이민자는 빚까지 져가며 샀다.[9] 물론, 이를 따른 기업들도 외국 자본을 가져와서 신규 투자를 하기가 어렵게 되고 짐바브웨 자회사의 자산을 통한 재투자밖에 할 수 없게 되어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특히나 광업같은 업종은 일시적으로 많은 신규 투자(장비 구입 등)가 필요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10] 세계 인플레율 1위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11] 실제로 무가베가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에 친한 관계였던 남아프리카 공화국넬슨 만델라는 무가베의 이러한 타락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참고로 만델라와 무가베 모두 95세까지 장수했다.[12] 물론 너무도 잔인해서 웬만한 사람은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니 대단히 주의하기를 바란다.[13] 은데벨레족은 남아프리카 공화국트란스발 일대에 주로 거주하는 민족이다. 줄루족의 일파이며 줄루족 중에서도 고산지대에 사는 종족이다. 보통은 외부와 접근을 차단하면서 지낸다고 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외에 짐바브웨보츠와나에도 상당한 숫자가 살고 있다. 참고로 카난 바나나 당시 대통령의 어머니도 은데벨레족이었다.[14] 뭐, 탄압받지 않으려면 방법이 있기는 한다. 바로 남아공으로 가는 것인데, 남아공은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국가이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동성애를 배척하지는 않는다. 다만 남아공도 아프리카에서 부유한 나라이기는 하나 실업률이 높아서 짐바브웨 이민자들에 대한 시선이 영 좋지 않다.[15] 아들 셋 중 하나는 죽었고, 현재 아들 둘과 딸 하나가 있다. 참고로 딸의 나이는 1988년생으로 무가베가 64살 때 태어났다.[16] 이쪽은 실제 양성애자이다.[17] 유튜브에 Peter Tatchell과 Mugabe를 치면 영상을 볼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hFWos-ELjw[18] 이 케이크에서 ZANU–PF는 짐바브웨의 집권당의 영문 약자이다.[19] 참고로 위 사진 2개는 차트를 달리는 남자의 26회 주제인 '글로벌 최악의 지도자'에서 9위로 선정된 무가베의 사치행각 설명 중 첨부되었다. 제작진이 여기서 사진을 가져왔는지는 불명.[20] 안경 모양을 보면 알겠지만 저건 진짜 케이크가 아니다. 케이크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플라스틱 인형이다.[21] 사실 아프리카에서는 오래전부터 야생동물을 사냥해서 요리해 먹었기에 야생동물 고기 요리가 흔하다. 특히 코끼리의 경우, 덩치가 덩치이니만큼 단 한마리만 도축해서 나오는 고기 양이 장난이 아니다.[22] 실제로 의사 출신이다. 아르헨티나인으로 조국인 아르헨티나에서 의사로 있다가 뜻하는 바가 있어서 쿠바로 가서 혁명을 한 사람이다.[23] 1987년에 창업한 업체인데 페리페리 치킨으로 유명하다. 영연방 국가를 중심으로 32개국에 진출한 세계구급 기업이지만 이상하게도 한국에는 들어오지 않았다.[24] 흑인에 대한 탄압과 인권유린, 인종차별로 악명높은 자였다. 일단 재임 초기에는 흑백인종 간의 섹스를 엄금하는 배덕법과 통행법 등을 폐지하고 아시아계와 컬러드에게 투표권을 주어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폐지하려고 하는 듯 했지만 그건 기만이었고 실제로는 국민당의 일당지배체제를 조금이라도 더 연장시키기 위한 꼼수로 흑인들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고 억압한 건 마찬가지였다.[25] 김부자 동상 제작으로 50년 노하우를 가진 조직답게 아프리카에 선전용 대형 조형물 제작으로 외화를 벌고 있다.[26] 사실 이 때문에 로버트 무가베도 같이 금지되어 있지만, 정상회담이라 이를 적용하지 않기로 하고 무가베에 한해서만 입국을 허가해준 것이라고 한다.[27] 대표적인 사례로는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튀니지의 벤 알리, 한국의 이승만, 필리핀의 마르코스, 이집트의 파루크 1세와 무바라크, 네팔의 갸넨드라, 이란의 팔라비 2세,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리비아의 카다피 등이 있다.[28] 그러나 소말리아도 석유 등 지하자원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나 이건 추정일뿐인데 내전으로 나라 꼴이 워낙 엉망이어서 자세한 자원 조사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29] 바레는 정권 말기이던 1990년대 초 다당제 허용과 대통령 임기 제한 등을 골자로 하는 개헌을 하려고 했으나 통일소말리아회의 등 당시 소말리아내 반정부군 세력들이 이에 동의하지 않고 내전을 일으키면서 실패하였다.[30] 물론 민주주의적 제도를 두고도 무가베는 부정선거로 여러번 대통령직을 연임하며 독재 정권의 수명을 연장했다.[31] 인도양 바다와 접해있고 영토 면적이 굉장히 방대해서 미국과 에티오피아가 군사 개입을 단행했다 통제에 실패한 소말리아와 달리 짐바브웨는 바다가 없는 내륙국인데다 영토 면적이 소말리아보다는 작아서(짐바브웨 - 390,757㎢, 소말리아 - 637,657㎢) 설사 무정부 상태에 빠져 군벌, 부족 세력들간의 내전이 발발하여 남아공, 보츠와나, 잠비아, 스와질란드, 모잠비크 등 남아프리카 주변국들의 군사 무력 개입이 이뤄진다 해도 안정화, 통제가 상당히 수월하다. 그리고 짐바브웨는 내륙국가라서 4면으로 국경/영공 봉쇄, 물자 유입만 차단해도 내전이 장기전으로 이어지지 못 하고 금방 전쟁이 끝나기 쉽다.[32] 무가베는 1960, 70년대 당시 로디지아 백인 정권 시기 백인 지배에 맞서 저항한 저항 투사이기도 했고, 짐바브웨를 독립시킨 국부의 권위도 있었지만, 소말리아의 바레는 이탈리아의 식민지 시절에 이탈리아군 장교 출신이었고, 소말리아가 독립한 후에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였기에 같은 독재자이긴 해도 무가베 전 짐바브웨 대통령과는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33] 음낭가과 신임 대통령이 부통령으로 임명하면서 부통령이 되었다.[34] 거기에 이들 아프리카 나라들은 독재정권에 반발하여 내전을 일으킨 반군 및 부족주의에 기반한 군벌 세력들에 의해서 독재자가 축출된 경우라 군부 쿠데타로 정권이 붕괴된 짐바브웨와는 성격이 다르다.[35] 한국 시각으로는 11월 22일[36] 짐바브웨 헌법에서는, 대통령이 사임하면 부통령이 권한을 대행하나 90일 이내에 집권당이 새 대통령을 지명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37] 여기에는 무가베 집권기에 일어난 여러 정적 탄압과 관련된 범죄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한 것이 포함된다.[38] 1924년생인 남편 로버트와는 무려 41세 차이다! 그러니까 1965년생인 그레이스가 31세일 때 1924년 72세의 무가베와 결혼했다는 것.[39] 더군다나 짐바브웨는 빈곤 때문에 소녀들이 10~15살의 어린 나이로 나이 많은 남자에게 팔려가다시피 하는 조혼 문제도 심각한 나라이다. 같은 나라에서 누군가는 돈 때문에 딸을 파는데 누군가는 딸의 결혼식 때문에 수십억을 쓰다니 환장할 노릇이다.[40] 아프리카 국가긴 하지만 웬만한 유럽국가만 한 인프라도 갖춰져 있고 경제력도 상당히 갖춘 국가이다. 자세한 건 남아공 항목 참고.[41] 사실 외교관 신분도 아니었지만 이는 남아공의 집권당 ANC 나 짐바브웨의 ZANU-PF 도 예전 백인정권과 싸울 때 서로 협력했던 역사가 있어 마치 한미동맹 내진 북중동맹까지 군사동맹은 아니더라도 유대감이 곤고한 편이다. 그러하기에 남아공은 무가베가 유엔에서 인권유린으로 욕처먹어도 변호하는 입장을 취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