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암스트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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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암스트롱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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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5ARYZvK4L2afx8AcWcf6kF-1.jpg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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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루이 암스트롱
LOUIS ARMSTRONG

헌액 부문
개척자 (Early Influences)
멤버
(개인 자격)
입성 연도
1990년















루이 암스트롱
Louis Armstrong


파일:루이 암스트롱.jpg

본명
루이 다니엘 암스트롱[1]
Louis Daniel Armstrong

출생
1901년 8월 4일
미국 루이지애나 주 뉴올리언스
사망
1971년 7월 6일 (향년 69세)
미국 뉴욕 주 뉴욕 시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직업
가수, 트럼펫 연주자
소속
레드 어니언 재즈 베이비즈 (1924 – 1925)
핫 파이브 (1925 – 1928)
루이 암스트롱 앤 히즈 핫 세븐 (1927 – 1928)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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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미국 뉴욕 주 퀸스
플러싱 묘지
부모님
윌리엄 암스트롱 (1881-1922)
메리 알버트 (1886-1942)
배우자
데이지 파커 (1919 - 1923, 이혼)
릴 하딘 (1924 - 1938, 이혼)
알파 스미스 (1938 - 1942, 이혼)
루실 윌슨 (1942 결혼)
자녀
슬하 1남 1녀
클라렌스 암스트롱[1] (1915-1998)
샤론 프레스턴 폴타 (1955-)
거주지
미국 뉴욕 주 퀸스
Louis Armstrong House Museum[2]
학력
Fisk School for Boys
신체
168cm, 74kg
별명
재즈의 왕
King of Jazz

종교
기독교[3]
활동
1919년 ~ 1971년
사용 악기
보컬, 트럼펫, 코넷
장르
딕실랜드, 재즈, 스윙, 트레디셔널 팝
레이블
파일:Okehlogo.jpg·파일:컬럼비아 레코드 로고.svg·파일:Dot_Records_logo.png·파일:gennett records.jpg·파일:GNP_Crescendo_logo.png

1. 개요
2. 생애
2.1. 출생과 유년기
2.2. 본격적인 음악 입문기
2.3. 고향에서 시카고로, 또 뉴욕으로
2.5. 재즈 뮤지션에서 연예계 대명사로
2.6. 활동 후반기: 재즈의 아이콘이자 미국 문화의 상징
3. 수상 경력
4. 음악 성향
5. 사생활
6. 사후의 평가
7. 여담



1. 개요[편집]



파일:Louis_Armstrong_restored.jpg


You can tell the history of jazz in four words: Louis Armstrong. Charlie Parker.

당신은 재즈의 역사를 네 단어로 말할 수 있습니다: 루이 암스트롱. 찰리 파커.

마일스 데이비스#


미국재즈 트럼펫 연주자 겸 가수. 그는 음악가로서 미국, 그리고 전 세계의 문화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며, 재즈 역사에 기념비적 발자취를 남긴 전설적인 음악인이다. 재즈라는 장르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거장. 모국인 미국에서는 대다수의 역사 교과서의 근현대의 문화 파트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역사적 인물이기도 하다. 미국의 근대 사회와 문화의 한면을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것.

애칭은 입이 굉장히 컸던 데서 유래한 '사치모(Satchmo)'. 원래는 책가방만큼 입이 크다고 해서 새철 마우스(Satchel mouth)라고 불렸지만 이걸 줄여서 사치모, 또 더 줄여서 사치(Satch)라고도 했다. 이외에도 하마 입이라는 뜻의 디퍼마우스(Dippermouth)라는 별명도 있었고, 이 별명에서 나온 Dippermouth Blues라는 재즈 스탠더드 곡도 있다.

주 활동시대는 초창기 재즈 시대 부터 1970년대인 현대 모던재즈시대까지 거의 전부를 살았다.


2. 생애[편집]



2.1. 출생과 유년기[편집]


암스트롱 자신은 생년월일을 1900년 7월 4일[2]로 기억하고 있었기에 그가 살아있을때는 1900년생으로 나왔고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인명사전에서 이렇게 기록되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 중반 재즈사학자 테드 존스[3]뉴올리언스 침례회 교회들의 세례 명부를 조사하다가 1901년 8월 4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찾아냈다. 어쨌든 그가 루이지애나 주 뉴올리언스의 업타운 지역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흑인 노예의 후손으로 태어난 것은 확실했다.

아버지 윌리엄 암스트롱은 아내 메리 앨버트(애칭 '메이앤')가 루이와 또 다른 이복남매 비어트리스를 낳자마자 다른 여성과 살림을 차리러 나가버렸고, 루이는 어머니 메이앤과 함께 대부분의 유년기를 보냈다. 남편이 무책임하게 가정을 버렸기 때문에 메이앤은 매춘으로 돈을 벌어야 했는데, 루이와 비어트리스는 종종 '고객'들이 어머니에게 욕설과 학대를 가하는 것을 공포에 떨며 지켜보기도 했다.

어린 시절에 그는 독실한 개신교도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착실히 교회를 다녔던 걸 빼면 자주 싸움질을 하던 문제아였다.[4]

취학 연령이 되자 암스트롱은 흑인 아이들이 다니던 피스크 소년학교에 등록했지만, 집안 형편이 가난해 공부보다는 돈을 버는 데 바쁠 수밖에 없었다. 신문배달부와 잔반청소부, 석탄배달부 등 지저분하고 육체적으로 힘든 잡일로 하루하루 푼돈을 벌었고, 먹을 것이라고는 , 다른 사람이 먹다 남긴 고기 부스러기, 오크라뿐이었다. 그것도 한창 자랄 나이에는 턱없이 부족해서, 심지어 잔반 처리를 하면서 먹을 것을 찾기 위해 잔반통을 뒤적이는 것도 일상이었다.

11살이 되었을 때 암스트롱은 학업을 따라가기 힘들었는지 학교를 중퇴했고, 또래 아이들과 4중창단을 만들어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돈을 벌었다. 중창단 활동이 없을 때면 리투아니아 출신 유대인이었던 카르놉스키 일가에게 가서 일거리를 받았는데, 카르놉스키 집안도 형편이 별로 좋지는 않았지만 당시로서는 드물게 흑인이었던 암스트롱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심지어 암스트롱이 코넷을 사고 싶어하는 것을 알고는 악기 살 돈을 빌려주기까지 했다. 암스트롱은 카르놉스키 가족들의 은혜를 평생 잊지 않았고, 유대인이 아니었음에도 유대인들의 상징인 다비드의 별이 새겨진 목걸이를 지니고 다녔다.

이렇게 고된 유년기를 보내면서도 암스트롱은 당시 뉴올리언스에서 쉽게 접할 수 있던 초기 블루스와 재즈 연주, 보드빌 쇼 등을 어깨 너머로 볼 수 있었고, 어렵사리 중고 코넷을 구입해 독학으로 연주법을 익히는 등 음악으로 성공하려는 야심을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13살 무렵 송년회 때 친척 집에서 몰래 빼온 권총을 허공에 쏘아대며 가는 해를 자축했다가 놀란 주민들의 신고로 체포되는 사고를 쳤고, 암스트롱은 소년원에 송치되었다.


2.2. 본격적인 음악 입문기[편집]


하지만 소년원에서는 뜻밖의 행운을 얻었는데, 당시 음악으로 비행청소년들을 교화시키려고 했던 소년원 음악 교사 피터 데이비스가 암스트롱이 코넷을 어느 정도 불 줄 아는 것을 보고 그에게 처음으로 체계적인 음악 교육을 시켜줬다. 암스트롱은 이내 소년원 아이들이 조직한 밴드에서 두각을 나타내 밴드 리더까지 되었고, 이따금 소년원 밖에서 열리던 특별 공연에서도 참가해 연주했다.

이듬 해 소년원에서 석방된 뒤, 암스트롱은 여전히 낮에는 석탄배달 일을 하면서 돈을 벌고 밤에는 이런저런 댄스홀에서 코넷을 연주했다. 또 축제가 있을 때면 뉴올리언스 거리를 돌아다니며 연주하던 마칭 밴드에도 참가하곤 했는데, 이런 기회를 통해 아마추어였던 암스트롱은 이후 초기 재즈의 거물들로 역사에 기록된 벙크 존슨과 키드 오리[5], 버디 프티, 그리고 암스트롱의 초기 이력에서 매우 중요한 후원자이자 동료가 되는 킹 올리버와 귀중한 연주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6]

차츰 프로 악단에서 연주할 만큼의 실력이 되자, 암스트롱은 미시시피 강을 운항하던 증기선에 승선해 선상 밴드에서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들 밴드는 관광객을 끌어모아야 했기 때문에 꽤 수준급의 연주자들을 영입하고 있었고, 암스트롱은 이 밴드들에서 연주하면서 비번일 때는 밴드 단원들에게 음악 이론을 배웠다.[7]

이렇게 증기선에서 연주 경력을 쌓으면서 암스트롱은 프로 뮤지션의 소양을 갖추기 시작했지만, 1918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군항으로 지역 경제 활동의 큰 부분을 맡고 있었던 스토리빌이 폐쇄되면서 고향 뉴올리언스는 급속도로 침체되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 킹 올리버는 더 나은 수입을 기대하면서 시카고로 옮겨갔고, 올리버가 탈퇴하면서 공석이 된 키드 오리 밴드의 코네티스트 자리는 암스트롱이 이어받았다.


2.3. 고향에서 시카고로, 또 뉴욕으로[편집]


20살이 된 암스트롱은 이제 악보도 읽을 수 있었고, 또 집단 합주 형태로 연주하던 당시 재즈 밴드에서 꽤 길고 멋드러진 솔로를 연주하며 부각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뉴올리언스의 불황은 계속되었고, 암스트롱도 결국 1922년에 올리버를 따라 시카고로 떠났다. 시카고로 향하면서 유람선의 악단에서 활동했으며, 시카고에서 유명인이 된 올리버와 재회했다.[8] 올리버는 자신이 이끌던 밴드인 '크리올 재즈 밴드'에 암스트롱을 차석 코네티스트로 영입했고, 이듬해에는 밴드 멤버로서 자신의 첫 SP 음반을 제작했다.

보통 악기 하나당 주자 한 사람만을 두던 당시 재즈 밴드의 편성 관행으로 볼 때, 올리버가 후배를 데려와 코넷 파트를 듀엣으로 만든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뒤집어 말해 보면 올리버가 육체적인 문제로 연주 활동에서 점차 의욕을 잃고 있었다는 것이었고, 실제로 크리올 재즈 밴드는 그 당시에도 이미 구식 밴드 취급을 받으며 서서히 영락하고 있었다.

밴드에서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다가 암스트롱과 눈이 맞아 결혼한 2번째 아내 릴 하딘은 남편에게 클래식 등 다른 장르의 음악을 소개했고, 또 당시 무섭게 치고 올라오던 신예 밴드들의 참신한 공연을 보러 다니면서 '구세대' 올리버와 결별하고 새로운 길을 찾으라고 종용했다. 또한 킹 올리버는 자신을 능가하는 루이를 견재하고 있었기에[9], 결국 1924년에 암스트롱은 릴 하딘과 결혼하고 올리버의 밴드를 떠나 플레처 헨더슨의 초청으로 뉴욕에 오게 되었다. 거기서 플레처가 이끌던 밴드에 입단했다. 헨더슨 밴드에서 암스트롱은 그 동안 연주하던 부드러운 음색의 코넷 대신 더 힘있고 강렬한 트럼펫으로 악기를 바꾸었다.

헨더슨 밴드는 올리버의 비교적 설렁설렁한 조직과 달리 상당한 수준의 연주 기교와 합주력을 요구하는 어려운 편곡을 받아 연주하고 있었고, 당연히 멤버들은 그만한 요구를 받아들일 만큼의 실력이 있어야 했다. 암스트롱은 곧 적임자로서 이 밴드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훗날 자신과 함께 재즈의 선구자가 되는 테너 색소폰 주자 콜맨 호킨스와 함께 가장 주목받는 멤버가 되었다.

헨더슨 밴드 외에 암스트롱은 고향 출신으로 뉴욕에서 연주하던 피아니스트 클레런스 윌리엄스가 조직한 '윌리엄스 블루스 파이브'라는 소규모 밴드에서도 활동했고, 여기서는 역시 동향인이자 클라리넷과 소프라노색소폰의 화려한 연주로 유명했던 시드니 베쳇와 한솥밥을 먹기도 했다. 동시에 베시 스미스마 레이니를 비롯한 당대 본좌 블루스 가수들과도 협연하면서 저변을 넓혀가고 있었다.


2.4. 첫 리더: 핫 파이브와 핫 세븐[편집]


하지만 아내 릴이 보기에는 헨더슨 밴드도 올리버 밴드와 마찬가지로 한계에 부딪혀 있었고, 또 그 동안 사이드맨 역할만 하던 남편이 이제는 자신의 밴드를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암스트롱은 1925년에 다시 시카고로 돌아왔고, 여기서 릴의 조언 대로 자신을 리더로 한 퀸텟(5중주단)인 '루이 암스트롱과 핫 파이브'를 결성했다. 핫 파이브는 암스트롱의 트럼펫과 릴의 피아노 외에 암스트롱과 같은 뉴올리언스 출신이었던 키드 오리(트롬본), 조니 다즈(클라리넷), 조니 생시르(기타/밴조)로 구성되어 있었고, 특이하게 드럼이 빠져 있었다.[10]

핫 파이브는 당시 시카고에 스튜디오를 두고 있던 오케에서 첫 녹음을 취입하기 시작했고, 이 녹음이 담긴 음반들은 곧 암스트롱에게 첫 대박을 안겨주었다. 이 때의 녹음 중 'Heebie Jeebies'에서 암스트롱은 트럼펫 외에 짤막하게 아무 의미 없는 단어로 된 즉흥 보컬인 스캣을 처음 선보였는데, 악보를 떨어뜨려 얼버무리려고 했다는 설도 있고 일부러 그랬다는 설도 있다. 일의 진상이야 어떻든, 이 스캣은 트럼펫 연주 외에 그의 장기가 되는 재즈 보컬의 출발점으로 남아 있다.

이 핫 파이브를 기반으로 피트 브릭스(튜바)와 조니 다즈의 동생 베이비 다즈(드럼)가 더해진 '루이 암스트롱과 핫 세븐'이라는 셉텟(7중주단)도 만들어졌고, 암스트롱의 초기 리더작은 거의 모두 이 핫 파이브와 핫 세븐을 통해 녹음되었다. 이렇게 해서 그 동안은 집단적인 솔로와 코러스가 뒤섞인 형태로 연주되던 재즈가 높은 기교와 숙련도를 갖춘 스타 플레이어의 주도로 연주되는 형태로 변형되기 시작했다.

이 변화를 주도한 암스트롱은 이내 흑인뿐 아니라 백인들에게도 강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거물이 되었고, 금주법의 역효과로 급성장한 마피아들까지 자기들이 운영하는 클럽에 암스트롱 밴드를 세우려고 난리였다. 이렇게 해서 암스트롱은 피아니스트 패츠 월러, 얼 하인즈 등과 함께 1920년대 내내 재즈계를 석권했다.

이 시절 녹음본들을 모두 수록한 컴필레이션 앨범은 대중음악 역사에 남을 명반으로 인정 받는다.


2.5. 재즈 뮤지션에서 연예계 대명사로[편집]


하지만 1920년대 후반 세계 대공황이 터지면서 재즈계도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1932년에 금주법이 폐지되면서 이제 비밀 클럽을 운영하며 밀주로 떼돈을 벌던 마피아들도 버로우하게 되었고, 클럽들이 문을 닫자 수많은 재즈 연주자들도 일거리를 잃고 실직자가 되었다.

그나마 이후 불어온 스윙의 열풍에 적응한 젊은 뮤지션들은 합법화된 클럽의 전속 빅 밴드 멤버로 뛰며 어느 정도 수입을 올릴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한 보수적인 성향의 올드비 뮤지션들은 음악을 당분간 혹은 무기한으로 중단하고 다른 일을 알아보는 경우가 많았다. 암스트롱의 동료나 선배들이었던 시드니 베셰는 양복점 재단사로, 킹 올리버는 당구장 관리직으로, 키드 오리는 양계업자로 전직해 간신히 입에 풀칠하는 형편이었다.

이런 와중에도 암스트롱은 별로 타격을 입지 않았다. 오히려 1930년에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한 뒤 거기서도 계속 클럽 공연과 방송 출연으로 승승장구하고 있었고, 심지어 1931년에는 처음으로 영화에도 출연했다. 하지만 대공황 여파로 암스트롱의 수입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유럽 순회 공연을 진행했다. 거기서도 재즈가 음반을 통해 상당히 많이 보급되어 있었던 만큼 암스트롱의 인기는 대단했고, 이 공연에서도 꽤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수입을 많이 올렸음에도 그 중 암스트롱에게 돌아오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암스트롱은 결국 공연 프로모터들을 의심했고, 실제로 그 당시 암스트롱의 프로모터들은 공연장이나 클럽 주인들과 허위 계약 혹은 비밀 계약 등으로 암스트롱의 연주료에서 상당한 액수를 은근슬쩍 삥땅치고 있었다. 결국 프로모터들과 마찰이 잦아지게 되자, 암스트롱은 자신의 전속 매니저로 예전에 알 카포네 밑에서 일한 바 있던 조 글레이저를 기용했다.

글레이저는 다른 프로모터나 매니저들과 달리 암스트롱과 '공정하게' 수입을 나누었고, 덕분에 암스트롱이 자신의 가족들을 제외하면 가장 신뢰하는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글레이저는 그 당시 암스트롱이 독학으로 익힌 비정상적인 연주법 때문에 트럼펫을 연주할 때마다 심한 피로를 호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재즈 트럼페터보다 대중가요를 노래하는 가수이자 연예인으로 내세우려고 했다.

이런 전략에 따라 암스트롱의 음반은 트럼펫 연주보다 보컬로 취입한 것이 더 많아졌고, 영화나 라디오 쇼에서도 특유의 큼지막한 입에서 뿜어내는 재담과 익살을 선보였다. 덕분에 암스트롱은 연예인으로서도 상당한 명성과 수익을 올렸지만, 이후 '의식있는' 흑인들이 '결국 암스트롱도 백인의 꼭두각시로 이용당했다'고 깔 빌미를 주기도 했다. 그리고 이 때의 암스트롱만을 접한 사람들은 '특이한 목소리로 노래하고 가끔 트럼펫도 부는 흑인 연예인' 정도로만 기억했기 때문에 재즈에 기여한 업적 같은 건 아오안이었고, 그 때문에 동료나 후배 재즈맨들 중에서도 다소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글레이저는 점점 더 적극적으로 암스트롱의 활동에 개입했는데, 1940년대에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음악인들의 징집이 늘고 스윙 열풍도 사그라들자 암스트롱에게 그가 이끌던 빅 밴드를 해체할 것을 권유했다. 대신 1920년대의 핫 파이브/핫 세븐처럼 유능한 연주자들을 엄선해 소규모 캄보 형태의 밴드인 '루이 암스트롱과 그의 올스타즈'를 만들었고, 그 당시 유행하던 뉴올리언스 재즈의 리바이벌 움직임에 편승시켰다.


2.6. 활동 후반기: 재즈의 아이콘이자 미국 문화의 상징[편집]


암스트롱은 1940년대에 이미 비밥으로 새 세대가 시작되자 구시대 음악인이 되어 있었지만, 계속 하던 대로 뉴올리언스 스타일에 기반한 연주와 노래를 선보였고 텔레비전 쇼에도 단골로 출연했다. 1949년에는 타임지의 표지를 장식한 최초의 재즈 뮤지션이 되었고, 미국 국무부의 후원으로 전세계를 돌며 순회 공연을 진행해 '앰배서더 사치'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공연의 일환으로 1963년에는 대한민국을 방문해 그랜드 워커힐 서울에서 공연했는데, 당시 유명 재즈 뮤지션으로는 첫 내한공연을 한 인물로 기록되었다.

이렇게 미국을 대표하는 명사가 되자, 전세계의 유력 정치인들과 종교인들도 암스트롱을 접견하면서 이미지 관리를 할 정도가 되었다. 교황 비오 12세바오로 6세를 알현하기도 했고, 브리티시 인베이전이 시작되어 비틀즈를 위시한 영국발 락 음악이 미국 음악계를 점령하기 시작한 1964년에는 'Hello, Dolly!'로 비틀즈를 밀어내고 빌보드 핫 100 1위를 석권해 역대 최고령 빌보드 1위 뮤지션이 되었다.

하지만 이후 암스트롱은 수십 년에 걸친 바쁜 연주 활동으로 누적된 피로와 건강 악화에 시달리게 되었고, 빡빡하게 잡혀 있던 일정은 점점 줄어들었다. 하지만 생애 끝까지 은퇴 선언은 하지 않았고, 몸이 허락하는 대로 계속 공연을 뛰고 녹음을 하고 방송에 출연했다. 단적으로 루이 암스트롱의 가수로서 가장 유명한 히트 넘버인 What a Wonderful World1967년에 발표된 앨범이다. 이 때 루이 암스트롱의 나이는 66세였다.

1971년 7월 6일에 뉴욕의 자택에서 잠을 자던 중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고, 유해는 여러 유명 재즈 뮤지션들이 조문한 성대한 장례식 후 자택에서 멀지 않은 플러싱 묘지에 안장되었다. 향년 69세.


3. 수상 경력[편집]


  • 그래미상 남성 보컬 부문 (1964. Hello, Dolly!)
  • 그래미 평생 공로상 (1972)
  • 그래미 명예의 전당 11회 헌액 (1974~2008)
  •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 (1990)


4. 음악 성향[편집]


평생에 걸쳐 활발한 활동을 했기 때문에 음반 자료도 많고 음악의 발자취와 변화 양상을 확인하기도 비교적 쉬운 편이지만, 1930년대 이후에는 음악사적으로 남을 만한 큰 변화는 없었다. 기본적으로는 뉴올리언스 재즈의 전통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고, 거기에 자신의 화려하고 감수성 풍부한 솔로 연주나 노래를 얹어놓는 것이 일관된 음악 스타일이었다. 트럼펫 솔로의 경우 빠른 템포의 곡에서는 높은 음에서 아래로 미끄러지듯 떨어지는 글리산도를 거듭 연주하며 끝내는 경우가 많았고, 종종 흑인 영가나 유행가, 행진곡, 오페라 아리아의 멜로디를 인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저 솔로만으로도 암스트롱은 계속 본좌일 수밖에 없는데, 암스트롱 이전까지만 해도 재즈에서 즉흥 연주는 기껏 두세 마디 정도로 매우 짧았고 그것 마저도 매우 단순했다. 하지만 암스트롱은 코러스를 전체 합주로 연주한 뒤 리듬 섹션이 곡의 코드(화음)를 기반으로 깔아주는 반주 위에서 더 길고 효과적인 즉흥 연주를 선보였고, 이후 이 즉흥 연주 스킬은 뉴올리언즈 재즈와 래그타임을 필두로한 초창기 재즈 리듬은 물론 스윙재즈, 비밥, 하드 밥, 쿨 재즈, 프리 재즈, 퓨전 재즈, 뉴 트래디셔널(혹은 컨템퍼러리) 재즈에 이르기까지 어떤 종류에서든 모든 재즈 연주자들의 필수요소가 되었다.


또 단어의 내용이나 의미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악기 삼아 부른 스캣도 이후 재즈 보컬리스트들이 지나칠 수 없는 업적이 되었다. 암스트롱의 목소리는 가래 끓듯 매우 걸걸한 허스키 톤이라[11] 결코 매끈하고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그 목소리를 자신의 트럼펫 연주 스타일과 결부시켜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창적인 영역으로 발전시켰다. 실제로 들어보면 아주 신기한 것이, 목소리 자체는 80 노인의 가래 끓는듯한 목소리인데 그 목소리가 퍼지는 부분은 기겁할 정도로 깔끔하다. 스캣 없이 그냥 노래만 부른 경우에도 특유의 기질과 개성을 강하게 드러냈기 때문에, What a Wonderful World 같은 암스트롱의 히트 넘버들은 다른 가수가 부르더라도 암스트롱식의 표현을 쉽게 모방하기 힘들 정도다.

이외에 자신의 연주를 특정한 박자나 리듬에 얽매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내는 소위 '무박자 연주'에도 강했는데, 리듬 섹션이 규칙적으로 새겨주는 박자도 무시하고 아무렇게나 흘러가는 것 같으면서도 다시 코러스로 돌아올 때의 흐름은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럽고 정확했다. 이 때문에 재즈 뮤지션들이 갖춰야 할 또 다른 소양인 '타임 감각'을 거론할 때도 암스트롱이 예시로 나올 수밖에 없다. 이렇게 음악은 구닥다리가 됐을 지언정, 그 속에서 지금까지 내려오는 재즈의 방법론 중 상당수가 제시된 만큼 이론적인 면에서도 항상 언급되고 있다.


5. 사생활[편집]


밑바닥 인생에서 시작해 재즈의 거목이 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사생활이 늘 안정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결혼 생활도 숱한 실패로 점철되어 있었는데, 1918년에 뉴올리언스 인근의 그레트나에서 만난 데이지 파커와 첫 결혼식을 올렸지만 얼마 안 되어 별거에 들어갔다. 1924년에는 데이지와 이혼한 뒤 올리버의 밴드에서 피아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던 릴 하딘과 2번째로 결혼했는데, 릴은 위에 쓴 대로 이후 암스트롱의 음악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1920년대 후반 무렵부터 릴은 점차 다른 연주자들에게 밀려 들러리가 되었고, 암스트롱과도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1931년에 별거하게 되었다. 1938년에 릴과 암스트롱은 최종적으로 이혼했지만, 릴은 그 이후에도 '릴 하딘 암스트롱'을 자신의 이름으로 삼았다. 릴과 이혼한 직후 암스트롱은 별거 후 사귀기 시작한 알파 스미스와 3번째로 결혼했지만, 이 결혼 생활 역시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매우 짧게 끝났다.

1942년에 4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루실 윌슨과 결혼해 평생을 해로했는데, 루실은 이렇다 할 거처 없이 계속 연주 여행을 다니던 암스트롱에게 언제든 돌아와 편히 쉴 수 있는 자택을 마련하도록 설득하기도 했다. 이렇게 뉴욕 퀸스에 지어진 집에서 암스트롱 부부는 그 동안의 피곤한 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안락한 여생을 보낼 수 있었다.

어릴 적에 너무 못먹고 자란 탓이었는지 식탐이 꽤 대단했다고 하는데, 특히 고향 뉴올리언스 요리들인 잠발라야검보, 레드 빈즈 앤 라이스[12] 등을 좋아했다고 한다.[13] 심지어 편지를 쓸 때는 일반적으로 끝맺는 인사말인 Sincerely yours 대신 Red beans and ricely yours를 썼고, 히트 곡 중에서도 Cornet Chop Suey라든가 Cheesecake 같은 음식 이름으로 작명한 것들이 종종 있다. 후두염을 치료하기 위해 보양식으로 양식 바퀴벌레를 넣어서 끓인 스프를 즐겨 먹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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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것 외에 내놓는 것에도 상당히 신경을 썼는데, 메이앤은 자식들이 먹는 음식들이 너무 형편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먹은 것을 몸에 너무 오래 두지 말거라'고 당부했다. 물론 나중에 성공하고 나서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훨씬 좋은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도 있었지만, 어머니의 당부는 평생 동안 지켜졌다. 암스트롱은 식사 후 늘 스위스 크리슬리라는 이름의 변비약을 복용했고, 약을 제조한 회사는 암스트롱을 광고 모델로 내세워 전부 내려보내세요!(Leave all it behind ya!)라는 캐치프레이즈로 홍보하기도 했다.

물론 식탐 외에 초기 재즈맨들이 고질적으로 겪던 알코올 의존증에서도 자유롭지 못해 을 달고 살기도 했고, 대마초도 꽤 많이 피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 2가지가 건강을 망칠 정도로 심하게 탐닉하지는 않았고, 덕분에 69살까지 장수할 수 있었다.

2차대전 후 젊고 진보적인 흑인들은 암스트롱이 보여준 소위 '흑인 광대짓'을 탐탁치 않게 생각한 경우가 많았는데, 실제로 암스트롱이 쇼에서 보여준 즉흥 촌극의 경우 남부 백인들이 흑인들을 대하는 편견을 그대로 담은 것이 많았다. 독설로 유명한 마일스 데이비스도 그의 연주 실력은 극찬했고 선배 뮤지션으로서 그를 존경하지만 "백인들 앞에서 하얀 이를 드러내고 광대처럼 웃는 것"은 싫다고 발언한 바 있다. 하지만 암스트롱은 그 촌극대로 살았던 어리석은 인물은 아니었고 [14], 1960년대에 흑인 민권 운동이 본격화 되자 저널리스트들에게 자신이 당한 차별 경험을 토로하기도 했다.

심지어 아칸소 주의 리틀록에서 백인들이 주방위군까지 동원해 흑인들의 공립학교 등교를 막았을 때는 아이젠하워 정부의 미온적인 대응을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동시에 국무부 후원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던 소련 연주 여행까지 거부하는 강수를 둔 적도 있었다. 이 때문에 FBI 국장이었던 존 에드거 후버는 그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은 여타 유명 인사들에게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휘하 요원들에게 암스트롱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해 정기적으로 자신에게 보고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암스트롱의 정치적 견해가 어떠했든 그는 미국 흑인 사회에서 늘 주목받는 명사였고, 또 놀라운 친화력의 소유자였다. 심지어 그가 음악적으로는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던 비밥의 선구자 디지 길레스피도 경의를 표할 정도였다. 마일스 데이비스도 암스트롱을 '백인의 광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호되게 깠지만, 그래도 대선배였기 때문에 나중에 암스트롱에게 사과하고 1970년 그의 69번째(당시에는 70번째 생일로 파티를 했지만) 생일 파티에 참석해 연주하기도 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힘들게 보낸 유년 시절 때문에 암스트롱은 늘 대중들로부터 사랑받고 싶어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연주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암스트롱은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신처럼 떠받들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냥 이웃 주민처럼 자연스럽게 대해주는 것을 좋아했고, 퀸스 자택에서 살던 말년에도 집 주변의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거나 바에서 손님들과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등 동네 사람들과도 소탈하게 잘 어울렸다고 한다.


6. 사후의 평가[편집]


사후에도 암스트롱은 여전히 재즈뿐 아니라 미국 사회에서 유명한 인물로 자리잡고 있고, 그의 고향 뉴올리언스에는 루이 암스트롱 공원과 루이 암스트롱 국제공항이 있다. 암스트롱의 자택이 있는 뉴욕 퀸스에 자리잡은 테니스 경기장은 루이 암스트롱 스타디움으로 불리고 있고, 퀸스의 자택은 1977년에 한국의 사적에 해당하는 미국 역사 기념물(National Historic Landmark)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2003년에는 아내 루실의 유언에 따라 자택이 루이 암스트롱 박물관으로 개축되어 전세계 재즈팬들이 성지순례를 하러 오고 있다.


7. 여담[편집]


  • 무대에 오를때 항상 왼손에 하얀 손수건을 같이 잡은채로 트럼펫을 연주하였는데, 중간중간에 얼굴의 땀과 트럼펫에 고인 침을 닦아주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했던 닐 암스트롱과 이름이 비슷하여 둘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닐은 달을 다녀왔고 루이는 재즈라는 장르를 일구어냈다.[15]

  • 미국의 가수 스캣맨 존은 유년기에 엘라 피츠제럴드와 더불어 루이 암스트롱의 스캣송에 매료되었다고 이야기했고, 그래서인지 루이를 기념하는 노래인 Everybody Jam!을 1996년 앨범 타이틀곡으로 발표했었다. 흑백영상에서의 루이 암스트롱과 반갑게 인사하고 대역이긴 하지만 루이 암스트롱과 함께 노래 부르는 장면, 가사 등에서 그에게 루이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다.


  • 보이저호에 실려 우주로 발사된 골든 레코드에 미국 문화를 대표하는 곡으로 그의 노래인 "Melancholy Blues"가 실려 있다.

  • 이탈리아 영화 V2로켓 폭파작전에서 저항군에게 포위된 주인공 미군들(나치군복으로 위장한 채였기에)이 우린 미군이라고 말하면서 미국 상징하는 여러가지를 급히 말할 때, 루이 암스트롱?이란 말도 한다.



  • 한국 영화 밀정에서 후반부 전투 장면에서 루이 암스트롱의 "When You're Smiling"이 배경음악으로 사용되어 의외의 조합을 만들어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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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폴레옹이 미국에 팔기 전까지 프랑스령이었던 루이지애나 출신이라 그런지 Louis를 프랑스식으로 ‘루이’라고 읽었다.[2] 독립기념일의 상징성 때문[3] (1952~2007). 평생을 재즈 역사에 대해 연구하고 루이 암스트롱 연구에 기여했다. 안타깝게 50대 중순 나이에 여러 활동을 하던 중인 2007년 1월 1일, 집 앞에서 미끄러져 넘어져서 뇌진탕으로 사망.[4] 남무성, "JAZZ IT UP!" (2018 · 서해문집), 36~37쪽[5] 킹 올리버가 키드 오리의 밴드에 그를 추천해줬다. / 남무성, "JAZZ IT UP!" (2018 · 서해문집), 38쪽[6] 당시나 지금이나 뉴 올리언스에서 마칭밴드는 한 구역의 대표와 다름없고, 일종의 유파를 형성한다. 마칭밴드에 뽑혔다는 것은 그만큼 가능성과 실력이 준수하다는 의미다. 또 밴드의 선배들에게 지원과 교육을 받을 기회도 잡을 수 있다.[7] 이 배에 타기 전까지 루이 암스트롱은 꽤 날씬했다. 하지만 병에 걸려 고생하자, 밴드 멤버가 민간요법을 추천하였는데, 이 민간 요법이 사실상 당이 많이 든 음료를 들입다 마셔대는 것이라 이때 뚱뚱하게 변했고, 그 이후로 불어버린 몸이 줄어드는 일이 없었다 (자서전 Satchmo에서 참조)[8] 남무성, "JAZZ IT UP!" (2018 · 서해문집), 40쪽[9] 남무성, "JAZZ IT UP!" (2018 · 서해문집), 43쪽[10] 드럼을 뺀 것은 당시의 열악한 어쿠스틱 녹음 기술 때문에 드럼 연주가 녹음하기 까다로웠기 때문이었다. 특히 베이스드럼의 경우 녹음기의 바늘을 튀게 만들어 녹음을 망칠 정도로 음량이 컸고, 녹음 가능 주파수대에서도 한참 벗어나 들리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이 때문에 드러머들은 작은 심벌 한두 개와 우드블록, 카우벨 등 작은 타악기들을 드럼 대신 연주해 녹음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 드럼 녹음이 무리 없이 가능해진 것은 1925년 후반에 전기녹음 기술이 상용화되기 시작하면서 부터였고, 후술하는 핫 세븐에 드럼이 들어간 것도 전기녹음 기술이 재즈 녹음에도 도입되었기 때문이다.[11] 이런 소리는 재즈 그로울(jazz growl)이라 해서 재즈 음악에서 특유의 표현 기법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혀뿌리를 뒤로 밀어 후두개를 이동시키면, 진동하는 피열연골에 후두개가 부딪치며 나는 소리다.[12] 파일:레드빈즈앤 라이스.jpg[13] 검보는 아예 입에 달고 사는 수준이었다고.[14] 사실 한계가 있긴 했지만, 루이 암스트롱의 성공은 백인들이 무시하지 못하도록 흑인의 위상을 올려주는데 공헌을 했다.[15] 무한도전 정신감정 특집에서 노홍철이 "달에 최초로 착륙한 사람 이름은?"이란 질문에 "루이 암스트롱"이라고 답변한 적이 있다. 심지어 채널 십오야에서 은지원은 한술 더 떠서 음악가 루이 암스트롱이 달에 갔다온 줄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