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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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카페 왕조 제9대 국왕
가톨릭 성인
프랑스의 수호성인
루이 9세
Louis IX

파일:Louis ix of France.jpg
동시대의 묘사
출생
1214년 4월 25일
프랑스 왕국 푸아시
사망
1270년 8월 25일 (향년 56세)
하프스 칼리파국 튀니스
재위기간
프랑스 국왕
1226년 11월 8일 ~ 1270년 8월 25일
아르투아 백작
1226년 11월 8일 ~ 1237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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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카페 가문
아버지
루이 8세
어머니
카스티야의 블랑카
배우자
프로방스의 마르그리트 (1234년 결혼)
자녀
나바라 왕비 이자벨[1], 필리프 3세, 발루아 백작 장 트리스탄, 알랑송 백작 피에르, 카스티아의 블랑슈[2], 브라반트 공작부인 마르가레트, 클레르몽 백작 로베르[3], 부르고뉴 백작부인 아그네스
종교
가톨릭
별칭
성왕 루이(Saint Louis)


1. 개요
2. 생애
3. 기타
3.1. 독실한 가톨릭 군주



1. 개요[편집]


“내 아들아, 모든 것에 앞서서 주님을 사랑하여라. 네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만사가 무익하다. 자주 고해하고 성체를 영하며, 네 힘이 닿는 대로 병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여라. 주님께서 고난을 주시면 이런 보속이 마땅한 사람인 줄로 알고 감사하며, 행운을 주시면 교만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시기를 청하여라. 말을 교묘하게 하는 이들보다는 양심이 바른 이들을 주변에 두고, 그들이 너의 잘못을 두려움 없이 말할 수 있도록 하여라. 정의를 세우는 데 엄정하되, 진실이 분명히 밝혀질 때까지는 약자의 편을 들어라. 죄스러운 험담이나 하느님께 모독이 되는 말을 네 앞에서 용납해서는 안 된다. 다른 나라와 분쟁이 생겼을 때는 고민하고 심사숙고하여 정말 피할 수 없을 때에만 군대를 일으켜야 한다. 불평등과 착취를 나라 안에서 몰아내되, 우선 네 집안에서부터 그리 하여라. 왕이 스스로 궁정의 비용을 줄이고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면 백성이 따라 할 것이다….”

임종의 자리에서 아들에게 남긴 유언의 일부.[2]

프랑스 왕국의 국왕, 프란치스코회 제3회원, 가톨릭성인(聖人). 카페 왕조의 제9대 왕으로 사자왕 루이 8세의 4남이었다. 부왕이 이른 나이에 사망하면서 오랜 재위 기간을 누렸다.

별명은 "성왕(聖王) 루이"(Saint Louis)로, 사후 가톨릭 교회에 의해 공식적으로 성인으로 시성되었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그에 걸맞게 루이 9세는 실제로도 프랑스 역사상 가장 가톨릭적이며, 도덕적인 성군으로 손꼽힌다.


2. 생애[편집]


어린 나이에 즉위해서 모후 카스티야의 블랑카섭정을 했으나 친정을 한 이후에는 중세시대의 완벽한 왕으로 칭송받았다. 감찰관을 파견하여 행정관을 감독했고, 파리에 항구적인 법정인 고등법원을 설치했다. 여기서 정당한 재판을 위해 결투 재판을 금지하고, 무죄추정의 원칙을 도입했다.

루이 9세 치하에서 프랑스는 번영과 안정을 누렸으며, 서유럽의 중심 국가로 부상했다. 특히 루이 9세는 스스로가 프란치스코회 제3회원으로 활동할 정도로 프란치스코회의 이상에 공감했기에 금욕과 청빈, 자선을 직접 실행했다. 복장과 식사에서 왕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청빈과 금욕적 태도를 유지하고자 했으며, 나병 환자와 맹인들을 왕실에서 세운 구호소에서 직접 돌봐주고 빈민들의 발을 씻어주는 등 중세인들이 생각하던 이상적인 그리스도교 군주로 존경을 받았다.[3]

신앙심이 깊은 나머지 십자군 전쟁에 지나칠 정도의 열정을 쏟았는데 1248년 참가한 제7차 십자군 전쟁에서는 동생 하나를 잃고, 그 이듬해에 포로가 되었으며, 1270년 제8차 십자군 전쟁 때는 아들 하나를 잃고, 튀니스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그의 유해를 프랑스로 데려오기 위해 시신을 삶아 살은 발라내고 뼈만 골라내어 가져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국외에서 참가한 십자군 원정은 성과가 없었지만, 내치는 성공해서 파리에 파리 대학교를 세웠으며 알비 십자군에 참가해 남프랑스에 뿌리내렸던 이단인 카타리파를 소탕했다. 알비 십자군은 1229년에 성공했지만 아직 카타리파 잔당이 남아 있었는데, 루이 9세 때 잔당을 소탕하면서 14세기에 카타리파는 소멸했다. 이 과정에서 남프랑스에 대한 프랑스 카페 왕실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즉, 루이 9세는 개인으로서는 신심이 깊은 인물이었고, 왕으로서는 통치 이데올로기그리스도교식 도덕 군주를 내세워 신념에 따른 통치에 성공했으며, 세속적으로는 부국강병을 이루었기에, 당대 그리스도교 군주가 보여줘야한다고 여겨지던 덕목들을 모두 이룩했다고 할 수 있다.[4]

카페 왕조의 국왕이었기에 발루아 왕조부르봉 왕조의 공동 시조에 해당하기도 한다. 발루아부르봉 모두 카페 왕조 출신의 인물들이 소유했던 영지의 이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것도《살리카법》에 적용되지도 않는 부계 후손들이다. 한국,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개념에선 다 한 가문, 한 왕조인 셈이다. 루이 9세의 자식들에게서 카페 왕조와 부르봉 왕조로 나누어졌다. 그의 차남 필리프 3세는 카페 왕조의 왕이 되었고, 막내 아들이자 6남 로베르는 클레르몽 백작이 되었는데, 그 로베르가 부르봉-라르샹보(Bourbon-l'Archambault) 시(市)를 포함한 부르봉 지역을 상속받은 카페-부르고뉴 가문의 베아트리스[5]와 결혼하여 부르봉 가문을 개창했고, 그들의 아들인 루이[6]의 먼 후손인 앙리 드 부르봉이 부르봉 왕조를 창건했다. 더불어 자신의 후계자였던 필리프 3세의 막내아들인 발루아 백작 샤를의 아들 필리프 6세는 발루아 왕조를 창건했다.


3. 기타[편집]


  • 엄청난 미남이었다. 원래 카페 가문 직계 한정으로 가계 구성원에 미남이 많았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하고 우아하고 늘씬했다. 얼굴이 아주 아름답고 천사 같았다. 피부가 깨끗하고 금발에서 광채가 흘렀으며 온화한 눈빛은 우아함으로 빛나고 얼굴이 하얗고 황홀했다.

동시대인 이탈리아의 프렌체스코 신학자


  • 부왕 루이 8세의 외모를 특히나 빼닮았던 점이 남편을 일찍 여읜 모후 카스티야의 블랑카에게서 형제들 중 광적이고 집착적인 사랑을 받게 된 이유 중의 하나로 여겨진다.

  • 조부인 존엄왕 필리프 2세가 임종 전에 루이(= 루이 9세)를 불렀는데, "봉신들을 다룰 때에나 인간 관계에 있어서 포상을 먼저 주어서는 안 된다."는 신신당부를 들었다고 한다.[7]


  • 징기스칸 4》에서 나왔는데 오리지널에서는 모든 능력치가 60대이며 특기도 애매하지만 PK에서 상향되었다. 능력치는 PK 기준 74/72/68.

  •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도 플레이할 수 있으며, 확률이 랜덤이지만 플레이하기에 따라 게임에서도 성인으로 시성받을 수 있다.


3.1. 독실한 가톨릭 군주[편집]


파일:Louis_IX.jpg
걸인들의 발을 씻어 주는 루이 9세(14세기 채색 삽화)

프랑스 군주 중 유일하게 시성된 왕으로 미국세인트루이스 시, 프랑스의 생 루이 섬, 브라질의 상루이스 시 등의 이름이 여기서 나왔다. 한국 가톨릭에서는 성(聖) 루도비코로 표기하고 있으며, 축일은 8월 25일이다. 다만 현재 가톨릭에서 흑역사 취급하는 십자군 공적[8]이 있었고, 반유대주의자인데다가[9] 후손인 필리프 4세가 막나갈 때, "네 조상 좀 본받아라."라는 교황청의 정치적인 의도가 시성에 영향을 주었다.[10] 루이 9세가 이미 살아있던 시절에 성인 소리를 들었을 정도로 신심이 매우 깊은 군주이기는 했으나, 그의 시성이 사후 27년 만에 이루어진 것은 이러한 면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의 신심과 후대의 정치적 상황 등이 모두 시성에 복합적으로 영향을 주었겠지만 말이다.[11]

지금도 전통 가톨릭 신자들이 에콰도르의 가브리엘 가르시아 모레노 대통령과 함께 통치자 · 정치인의 이상으로 특별히 존경하는 성인이다. 전통주의 사제들이 강론 중에 자주 언급하는 성인 중 한 명이라고 한다.
[1] 동생 로베르에게 아르투아 백작위를 수여했다. [2] 2014년 11월 23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성서 주간) <대구주보> 5면[3] 이 부분은 네이버 지식백과를 출처로 했다.[4] 종교적인 수사법을 쓰지 않더라도, 가장 성공한 정치인이란 정치적 이득신념국가의 번영이 일치하는 유형이다. 루이 9세는 이것을 해냈다는 점에서 이상적인 그리스도교 군주라 불린 것이다.[5] 할아버지가 부르고뉴 공작이었으며 아버지가 공작의 차남(실질적으로는 장남)이었다. 아버지가 할아버지보다 일찍 사망한 탓에 부르고뉴 공작위는 베아트리스의 작은 아버지에게 돌아갔다. 만약 베아트리스의 아버지가 할아버지에게 정상적으로 작위를 물려받았다면 베아트리스와 결혼한 로베르가 부르고뉴 공작이 되었을 것이고, 그들의 장남인 루이 1세 드 부르봉 공작의 후손들이 부르봉 왕조가 아닌 부르고뉴 왕조를 개창했을 것이다. 당연히 그 유명한 발루아-부르고뉴 가문 역시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고, 더 나아가 네덜란드가 합스부르크 가문에 넘어가는 일 역시 일어나지 않아 역사가 크게 바뀌었을 수도 있다.[6] 1327년, 부르봉 공작에 임명되었다.[7] 이것에 대한 이유는 1,000년도 전 중국에서 있었던 장량유방에게 젓가락을 부러뜨리면서 했던 설교와도 맞닿는 면이 있다. 봉건제가 익숙한 체제 하에서 휘하 인물들은 이익에 따라선 제 주인을 얼마든지 배반하므로 보상을 먼저 주면 보상만 먹고 튈 가능성이 높으나 보상을 나중에 주면 휘하 인물들은 보상이 주어질 때까지 충성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8] 알비파 십자군 포함, 다만 알비파 십자군 시절에는 아직 어려 섭정 중이었다.[9] "신성 모독자와 토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에게 칼을 휘두르는 일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나치 시대처럼 유대인에게 가슴에 '노란 별'을 달고 다니라고 강제한 것은 루이 9세의 조치가 원조였다. 다만 한나 아렌트중세 시절 종교적 동기에서 비롯한 반유대주의와 이미 유대인이라고 할 만한 특성이 사라진 사람들에게 발동한 근대의 반유대주의를 구분하여 둘의 동일시는 피하고 있다. 반면 20세기 종교학자 겸 유대인 랍비 이스마 엘보겐은 저서《독일 유대인의 역사》에서 "중세 시절 십자군흑사병 시기 유대인 학살이 근대 이후의 반유대주의와도 크게 연관되었다."고 본다.[10] 물론 시성이 취소되었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애초에 중세 사람이 시대적 한계로 오류를 범했다는 것을 현대인과 동일한 책임을 묻기도 어렵고, 루이 9세가 당대의 군주들 중에서도 신심이 깊은 인물이었다는 것에는 크게 이견이 없다. 다만 십자군이 "루이 9세의 신심을 돋보이게 하던 요소"에서 "루이 9세의 신심이 보여주었던 안타까운 오류"로 평가가 바뀐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11] 위에서 인용한 네이버 지식백과에서도 비슷한 결론을 내고 있는데, "물론 이 시성식은 이 당시 프랑스 왕인 필리프 4세와 교황 사이의 정치적 협상의 결과였지만 루이 9세가 당대인들의 생각에 충분히 성자(聖者)로 시성될만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었다는 점 또한 사실이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즉, 원래 자격이 있는 사람이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좀 더 일찍 시성되었다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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