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날도 마르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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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Rinaldo Martino.jpg
이름
리날도 피오라몬테 마르티노
(Rinaldo Fioramonte Martino)
생년월일
1921년 11월 6일
사망년월일
2000년 11월 15일 (향년 79세)
국적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아르헨티나
출신지
로사리오
포지션
인사이드 포워드
신체조건
176cm | 73kg
소속팀
CA 산 로렌소 (1941-1948)
유벤투스 FC (1949-1950)
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 (1950)
CA 보카 주니어스 (1951)
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 (1952)
CA 세로 (1953)
국가대표
20경기 15골 (1942-1948 / 아르헨티나)
1경기 (1949 /
이탈리아)



1. 개요
2. 생애[1]
2.1. 어린 시절
2.2. 선수 생활
2.2.1. 클럽
2.2.2. 국가대표
2.3. 이후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4. 뒷이야기
5. 수상
5.1. 선수
5.1.1. 클럽
5.1.2. 국가대표
5.1.3. 개인



1. 개요[편집]


아르헨티나의 전 축구 선수


2. 생애[2][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마르티노는 로사리오에서 위로 5명의 형과 3명의 누나가 있던 9명의 형제자매중 막내로 태어났고 어린 시절부터 축구를 좋아했다.

저는 단지 축구를 정말 하고 싶었을 뿐이었어요. 학교에는 큰 관심이 없었죠. 제게는 축구만이 있었습니다. 클럽이나 거리에서 천이나 고무공을 갖고 놀았죠. 어느 날엔 제가 공을 만들려고 누나들의 스타킹을 훔쳤다고 해서 누나들이 화를 낸 적도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돌을 가지고 놀기도 했습니다.

리날도 마르티노


마르티노는 로사리오의 페냐롤 유스팀에서 축구 경력을 시작했고 1937년에는 벨그라노 유스팀에서 뛰었다.

1940년, CA 산 로렌소의 스카우터들은 센트랄 코르도바에서 뛰던 왈디노 아기레(Waldino Aguirre)의 경기를 보러 왔다. 그런데 하필 비가 와서 아기레의 경기가 취소되는 바람에 그들은 대신 벨그라노의 경기를 봤고 거기서 마르티노의 플레이를 보게 되었다. 그들은 벨그라노 구단에 마르티노의 이적료를 문의했고 13,000 페소라는 답이 오자 즉시 마르티노의 영입을 추진했다.[3]


2.2. 선수 생활[편집]



2.2.1. 클럽[편집]


마르티노는 13,000 페소CA 산 로렌소의 선수가 되었다. 마르티노는 1941년에 데뷔전을 치렀고 1942년에는 25골을 넣어 리그 득점왕에 등극했다.

1946년에 산 로렌소는 레네 폰토니와 마르티노의 호흡을 앞세워 10년 만에 다시 리그 타이틀을 차지했다.

마르티노는 1949년부터 유벤투스 FC에서 뛰게 되었고 ACF 피오렌티나에 5대2로 승리한 경기에서 이탈리아 무대에 데뷔했다. 그는 33경기에서 18골을 넣어 유벤투스의 세리에 A 우승에 기여했지만 한 시즌 만에 유벤투스를 떠나 나시오날로 다시 이적했다.

나시오날에서 우루과이 우승을 거둔 마르티노는 1951년, CA 보카 주니어스에서 1년을 뛰다가 다시 나시오날에 복귀했고 한번 더 우루과이 리그 우승을 맛보았다.

나시오날은 두 번째 우승 이후 마르티노를 자유 계약으로 풀었고 그는 1953년에 CA 세로에서 커리어의 마지막을 보냈다.


2.2.2. 국가대표[편집]


마르티노는 1942년 5월, 우루과이를 상대로 대표팀 첫 경기에 나섰다. 마르티노는 2골을 넣어 아르헨티나의 승리를 이끌었다.

마르티노는 1945년1946년에 두 번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 출전했고 아르헨티나는 2번 모두 우승했다. 그는 1945년 대회 우루과이전에서 대회 역사상 최고로 꼽힐 만한 골을 넣었는데 세 명의 선수를 제치고 골키퍼 마스폴리까지 속여서 필드에 주저앉히고 득점했다.

마르티노는 유벤투스 FC에서 뛸 때 이탈리아 대표팀 소속으로 한 경기에 출전했다.[4]


2.3. 이후[편집]


마르티노는 1962년, 파트너들과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나이트 클럽을 열었고 이 클럽은 15년 이상 탱고 클럽의 명소로 알려졌었다. 그리고 마르티노는 1964년엔 아르헨티나 은퇴 선수 모임의 회장이 되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편집]


마르티노는 뛰어난 하체 근력을 바탕으로 골 결정력, 세련된 볼 컨트롤, 플레이 메이킹에 강점을 보인 포워드였다.

그는 공격적인 인사이드 라이트 포워드로써 그가 가능한 최선의 방법으로 화려함과 견고함을 필드에서 보여줬고 특히 드리블에 매우 능숙했다. 팀의 공격에서 주로 1옵션을 맡았고 같은 방식으로 그는 게임에서 자신의 자질을 성공적으로 활용했다. 정확한 패스로 종종 동료 공격수에게 어시스트도 제공했다.


4. 뒷이야기[편집]


  • CA 산 로렌소에서 마르티노의 별명은 "Machucho"였다. 이는 마르티노가 말버릇으로 "más mucho(더 많이)"라는 표현을 자주 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마르티노는 한 인터뷰에서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 뛸 때 느낌이 어떠냐는 질문에 "모르겠어요. 라브루나가 나보다 훨씬 더 많이 플레이합니다."라고 답을 한 적이 있다.


5. 수상[편집]



5.1. 선수[편집]



5.1.1. 클럽[편집]




5.1.2. 국가대표[편집]




5.1.3. 개인[편집]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2] 출처: 위키피디아, 11v11[3] 당시 산 로렌소의 스카우터들은 아기레의 이적료로 4만 페소를 가져왔었다.[4] 당시 이탈리아 대표팀은 주축을 이루던 토리노 FC 선수들이 비행기 사고로 전부 사망한 어려운 시기였다. 때문에 그들은 1950년 월드컵에 출전할 새로운 얼굴들을 물색중이었고 마르티노도 그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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