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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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굴렘 공작부인 & 프랑스의 도핀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Marie Thérèse de 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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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마리테레즈 샤를로트 드 프랑스
(Marie-Thérèse Charlotte de France)
출생
1778년 12월 19일
프랑스 왕국 베르사유 궁전
사망
1851년 10월 19일 (향년 72세)
오스트리아 제국 란첸키르셴 프로스도르프 궁전
배우자
루이 19세 (1799년 결혼 / 1844년 사망)
아버지
루이 16세
어머니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토니아
형제
루이 조제프, 루이 17세, 소피
종교
가톨릭
1. 개요
2. 일생
2.1. 출생
2.2. 어린 시절
2.3. 프랑스 혁명 시대 : 탕플 탑의 고아
2.4. 망명 시대
2.5. 부르봉 왕정 복고
2.6. 백일천하
2.8. 불행한 말년
3. 인간관계
4. 대중매체에서
5. 검은 백작 부인(Dunkelgrafen): 마리테레즈 가짜설
6. 여담



1. 개요[편집]


마리 앙투아네트루이 16세장녀.

프랑스 왕국공주이자 마지막 왕태자비이다. 또한 남편 루이 앙투안이 20분 동안 프랑스 국왕 '루이 19세'로 즉위하면서 그녀 역시 20분 동안 프랑스의 왕비였다. 고귀한 신분과는 별개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비운의 왕녀. 이름은 각각 외할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1], 마리 앙투아네트와 가장 사이가 좋았던 언니인 나폴리 왕비 마리아 카롤리나에서[2] 따왔다.

마담 루아얄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Madame Royale Marie Thérèse Charlotte) 피유 드 프랑스[3], 마담 루아얄[4], 마담 라 도팽[5], 앙굴렘 공작부인(Fille de France, Madame Royale, Madame la Dauphine, Duchesse de Angouleme).


2. 일생[편집]



2.1. 출생[편집]


1778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태어났다. 비록 왕위계승자인 왕자는 아니었지만 루이 16세 부부가 혼인한 지 무려 7년 만에 태어나 많은 축복을 받았고 국왕 부부에게도 첫 아이 마리 테레즈는 아들딸을 막론하고 큰 기쁨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이의 성별을 듣고 처음 아이를 안았을 때 울음을 터뜨렸지만 훗날 시녀 마담 캉팡의 회고록에 쓰일 감동적인 말을 남겼다.

"불쌍한 어린 것, 너는 그들이 바라던 아이는 아니야. 그렇다고 우리에게 소중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야. 아들이었다면 국가의 아들이 되었겠지만, 너는 나의 것이야. 너는 내 모든 보살핌을 받게 될 거고, 내게 기쁨을 주고 슬픔을 나누게 될 거야." - 마리 앙투아네트


루이 16세는 외설적인 시와 노골적 팜플랫으로 왕국의 가장 낮은 신민들로부터까지 받아야 했던 모욕에서 벗어나고, 평소에도 아이들을 좋아하고 모성애가 남달랐던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마리 테레즈의 탄생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다.

여담으로 프랑스 왕실은 왕비의 출산 시에 아무나 공공연하게 입회하도록 하는 관행이 있었는데[6], 이 때 창문을 모조리 닫아놔 환기도 안되는 방에 너무 많은 구경꾼이 몰려들어 마리 앙투아네트는 거의 질식해서 죽을 뻔 했다고 한다. 때문에 루이 16세는 산모의 안전을 고려하여 이후의 출산은 친인척 등 허가받은 소수만 참관할 수 있도록 관행을 바꾸었다. 더군다나 담당 궁의가 산후처리를 잘못하는 바람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많은 출혈을 했고, 아이를 낳은 후 바로 기절했다. 그 후에는 출산 후유증으로 인한 치질로 고통스러워했다고 한다.


2.2. 어린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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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의 것'이라는 말 그대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딸의 교육에 많이 관심을 쏟았다. 이는 시고모들인 루이 15세의 딸들 마담 아델라이드, 빅투아르, 소피가 거만하고 사람들에게 경원시 당하는 것이 엄격하지 못한 교육 탓이라고 생각해서였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는 뛰어난 정치가이자 군주이긴 했으나 좋은 어머니라고는 볼 수 없었다. 많은 자식을 둔 집안에서 흔히 그렇듯이 아이들 모두가 어머니의 다정한 애정과 관리를 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고, 특히 가정보다는 나랏일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아야 했던 마리아 테레지아의 상황 탓에 항상 어머니가 부재 중이었던 오스트리아 황실에서는 더욱 그랬다. 그나마 자식들을 귀여워했던 아버지도 마리 앙투아네트가 9세 때 일찍 사망했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부모가 가장 하지 말아야 할 편애한 자식에게 마구 쏟아부어 남매들 사이에 불화의 씨를 뿌리곤 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어머니를 존경하고 경외했지만 모녀의 정은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방치당한 것에 늘 불만을 가졌다. 이 때문에 고생했던 경험과 어린애들을 너무나 좋아하는 기질까지 더해, 딸과의 애정 어린 접촉과 엄한 훈육을 강조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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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6년의 마리 테레즈.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기에게 직접 모유 수유를 해서 친정에서 잔소리를 들었고,[7] 마리 테레즈의 첫 가정교사는 프랑스의 명문가 로앙 게메네 가문의 게메네 공비였으나 앙투아네트는 가정교사로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인 폴리냑 백작부인 욜랑드 드 폴라스트롱을 들였다. 원래 왕족의 가정교사는 대귀족이 맡아왔는데 그녀가 자기 또래의 친구 폴리냑을 가정교사로 임명한 것은 많은 반발을 일으켰다.

평소 기부와 선행을 하는 것을 즐겼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딸과 함께 빈민 계급이 사는 곳을 방문하거나, 빈민 계급의 아이들을 초대하여 그들에게 마리 테레즈의 장난감을 선물하게 하는 등의 인성 교육도 했다. 1784년에는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불 피울 장작도 없는 불행한 사람들이 너무 많은 탓에" 그들을 돕기 위해 돈을 다 써버려 딸에게 신년 선물을 주지 못한 적도 있었다.

다만 아직 어린 그녀에게는 이런 것들이 불만의 대상이었던 모양이다. 하루는 승마를 나간 마리 앙투아네트가 낙마해 크게 다쳤다는 것을 마리 테레즈에게 알렸던 메르시 백작(Comte de Mercy d'Argenteau)은 비록 어린 아이의 치기 섞인 말일지언정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된다.

마리 테레즈: 나는 어머니가 더 많이 다쳤어도 신경쓰지 않았을 거에요.

메르시 백작: 그건 공주님께서 잘 모르시고 하시는 말이십니다. 그 말은 왕비 폐하께서 돌아가셨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공주께서는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르시겠지요?”

마리 테레즈: 알아요. 영원히 볼 수 없다는 뜻이죠. 어머니를 영원히 보고 싶지 않아요.


마리 앙투아네트는 딸에게 엄격했던 반면, 루이 16세는 딸에게 지나칠 정도로 너그러웠기에 마리 테레즈는 아버지를 제일 좋아했다고 스스로 인정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이것은 토라진 어린아이가 양가감정으로 "엄마 미워! 다시는 안 볼 거야!" 하고 투정을 부리는 정도의 발언이었고, 후일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어머니와 강제로 떨어져 따로 감금된 마리 테레즈는 울면서 '너무나 좋으신 어머니, 죽지 마세요'라는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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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남동생 루이 조제프 왕태자와 함께있는 마리 테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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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남동생 루이 17세와 함께있는 마리 테레즈.


2.3. 프랑스 혁명 시대 : 탕플 탑의 고아[편집]


이렇게 평화로운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의 어린 시절은 프랑스 혁명으로 한순간에 격변한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면서 그해 10월 마리 테레즈는 가족들과 함께 튈르리 궁전에 격리되었다. 다른 왕족들은 잽싸게 해외로 탈출했지만(...) 오스트리아로 망명하려다가 바렌에서 걸린 루이 16세 일가는 탕플 탑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탕플에서 지낼 때까지만 해도 대우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14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 루이 16세, 어머니 마리 앙투아네트, 고모 엘리자베트 공주가 차례대로 처형당하는 비극을 겪는다. 거기다 다른 감옥에 감금되어 있던 남동생 루이 17세마저 어린 나이에 병으로 사망하면서, 마리 테레즈는 루이 16세의 직계 가족 중 마지막 생존자가 된다.

혁명 정부 입장에서도 마리 테레즈를 어찌 처분할지는 골치 아픈 문제였다. 당시 시기였던 공포정치 시절은 왕족과 귀족이라면 무슨 죄라도 씌워서 무참히 죽이던 때였지만[8] 마리 테레즈는 간통, 근친상간, 반역, 스파이 같은 죄명을 씌우기에는 너무 어렸기 때문. 죽이자니 명분이 애매하고 그냥 두자니 위험할 수도 있는[9] 계륵 같은 상황 속에서 혁명 정부가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에, 부모와 남동생에다 고모까지 모두 잃고 고아가 되어 감금당한 어린 공주[10]에 대한 동정 여론이 일면서 그녀에 대한 처분은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마리 테레즈에게는 천운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제대로 돌봐주지 않았기 때문에 대우는 매우 열악했다. 간수들은 마리 테레즈에게 누더기를 입히고 편의도구를 빼앗아 거칠고 더러운 담요를 주어 덮게 했고 시종, 시녀들의 출입을 금지해 직접 감방을 청소하고 정리하게 했다. 게다가 감시와 통제를 심화하고 날마다 감방을 수색하여 그녀가 소지한 돈과 귀중품을 빼앗아가기도 했다. 이렇게 마리 테레즈는 학대에 가까운 감옥 생활을 몇년이나 보냈지만 고집스럽게 공화 혁명 정부의 심문에도 협조하지 않았기에 열악한 대우를 계속 받아야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동생 루이 17세의 병을 걱정하여 국민 공회에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감옥의 창문으로 가끔 루이 17세가 얻어맞으며 지른 비명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감옥에서는 고모 엘리자베트 공주의 유품인 실로 뜨개질을 하고 가톨릭 영성 서적인 준주성범과 <Voyages by La Harpe>라는 책을 읽었다. 다른 책을 달라고 혁명 정부에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1793년 5월 11일에는 로베스피에르가 감옥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대화 기록은 없다. 그런데 이번에는 로베스피에르가 마리 테레즈와 결혼해 왕이 되려고 한다는 비난이 나오게 된다.(...)

마리 테레즈는 옥중에서 가족에 대한 그 어떤 소식도 들을 수 없었고 간수들도 이에 대해 얘기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가족들의 죽음을 몰랐다. 다만 아버지 루이 16세가 처형 당했다는 소식만 접할 수 있었다. 마리 테레즈가 갇혀있던 감방 벽에 새겨진 글귀를 통해, 당시 그녀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Marie Thérèse Charlotte est la plus malheureuse personne du monde. Elle ne peut obtenir de savoir des nouvelles de sa mère, pas même d'être réunie à elle quoiqu'elle l'ait demandé mille fois. Vive ma bonne mère que j'aime bien et dont je ne peux savoir des nouvelles. Ô mon père, veillez sur moi du haut du Ciel. Ô mon Dieu, pardonnez à ceux qui ont fait souffrir mes parents.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랍니다. 수천 번을 부탁해 보았지만 어머니를 만날 수도 없고, 소식조차 들을 수 없죠. 내가 가장 사랑하는, 그렇지만 소식조차 알 수 없는 내 어머니, 꼭 살아 남으시길! 아, 나의 아버지! 하늘에서 저를 지켜봐 주세요. 아, 하느님! 부모님을 고통받게 한 저들을 용서하소서.


이렇게 마리 테레즈는 무려 2년 이상을 거의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고 갇혀 지내면서 발성 이상 장애를 가지게 되었고, 이는 이후 평생 동안 낫지 않았다.

1795년 7월 쯤에 공포 정치가 해소되면서 대우가 비교적 좋아졌다. 알자스 출신의 30세 여성 르네 드 샹테렌(Renée de Chanterenne) 부인이 신변을 돌봐주도록 고용되었다. 어느 정도 교양을 갖춘 르네 드 샹테렌은 마리 테레즈에게 의류, 필기 도구, 책 등을 제공했으며 정원을 산책하도록 허가를 받기도 했다.

1795년 8월 말에 르네 드 샹테렌은 가족의 소식을 모르는 마리 테레즈를 가엾다고 생각한 나머지 마침내 마리 앙투아네트, 루이 17세 등 다른 가족들의 최후를 알려주었다. 이때 진실을 알게 된 마리 테레즈는 비탄에 빠져 비명을 지르고 미친 듯이 울었다.

1795년에 혁명 정부는 오스트리아와의 포로 교환 협상에서 마리 테레즈와 교환해 프랑스인 10여 명을 돌려받는 조건으로 그녀를 석방시켜 오스트리아로 보냈다. 마리 테레즈가 풀려난 것은 17세 생일 전날인 1795년 12월 18일이었다. 장장 7년 가까운 세월 동안 10대 시절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낸 것.

마리 테레즈는 르네 드 샹테렌과 친해져 감옥에서 풀려난 뒤에도 편지로 연락을 주고 받았다. 나중에 르네가 아들을 낳고 이름을 지어달라는 부탁을 하자 마리 테레즈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샤를로트'의 남성형인 '샤를'이라고 지어주었다. 왕정복고 시기에는 샤를의 일자리를 알선해 주기도 했다.


2.4. 망명 시대[편집]



2.4.1. 오스트리아[편집]


하지만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 친척들은 그녀를 썩 반기지 않았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름조차 꺼내지 않던 친척들 입장에서 마리 테레즈는 그녀를 외면했다는 죄책감을 상기시키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물론 오스트리아가 손을 썼다고 해도 혁명 정부의 성질만 긁었겠지만.

어머니 마리 앙투아네트의 애인이었다는 소문이 돌았던(확실한 증거는 없다.) 한스 악셀 폰 페르센 백작은 앙투아네트가 남긴 돈과 보석 등을 마리 테레즈가 상속받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고 한다.

외사촌 프란츠 2세는 마리 테레즈에게 잘 대해줬다고는 하지만 거의 형식적이었고, 살아있는 이모들도 만났으나 그들의 대단히 빡센 성격 때문에 친밀감을 느끼지도 못했다. 프란츠 2세는 마리 테레즈를 자신의 동생 카를 대공과 결혼시키려 했지만 마리 테레즈는 외가가 아닌 친가 부르봉 가문을 선택했다. 만약 이때 합스부르크 가문을 선택했다면 이후 마리 테레즈의 삶도 좀 더 편안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르봉 가문으로 돌아간 것을 보면 어머니를 버린 외가에 대한 분노가 아주 컸던 듯.

2.4.2. 러시아 제국[편집]


마리 테레즈는 을 떠나 프로방스 백작아르투아 백작이 도피해 있던 러시아 제국의 미타우로 갔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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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

1799년 봄, 아르투아 백작의 장남인 3살 연상의 사촌 루이 앙투안(Louis Antoine)과 결혼했다. 처음엔 냉담했지만 부부 사이는 좋아졌고 마리 테레즈는 루이 앙투안이 1844년 69세로 죽을 때 마지막까지 남편 곁을 지켰다. 사이가 좋았던 이유는 그의 성격이 아버지 루이 16세와 비슷해서였다고 한다. 얌전하고 소극적인 성격, 우유부단하고 나약한데다 성적으로 무능력한 것까지 루이 16세와 똑같았다고(...)

하지만 1801년 러시아 제국에서 퇴거 명령을 받자 마리 테레즈는 다른 망명 왕실 가족들과 함께 영국으로 망명한다.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프랑스 왕실은 가구를 팔아야 했다.


2.4.3. 바르샤바[편집]


1801년 프랑스 왕실은 바르샤바(당시 프로이센 왕국령)에 도착한다. 1805년까지 바르샤바에서 망명 궁정을 유지하며 지낼 수 있었다. 일단 이들이 폴란드 공주 마리 레슈친스카(루이 15세의 왕비)의 자손들이었기 때문으로[12], 나폴레옹군의 프로이센과 러시아 공격이 시작되자 다시 러시아령 미타우로 옮겨간다. 마리 테레즈는 미타우에서 부상병을 간호하였다고 한다.

유럽 대륙에서 프랑스 왕실이 안주할 땅은 없어졌기 때문에 스웨덴 국왕구스타브 3세의 도움을 받아 스웨덴을 거쳐 영국으로 망명했다.


2.4.4. 영국[편집]


영국에서 버킹엄셔 주(Buckinghamshire)에 재정착한다. 조지 3세에게 치매가 발발하여 섭정을 맡고 있던 웨일스 공 조지는 프랑스 왕실을 환영했고 마리 테레즈와도 양호한 사이였다.

1813년 1월, 결혼 13년 만에 임신해서 왕실이 기쁨에 휩싸였다. 하지만 유산하고 말았고, 이후 다시는 임신하지 못하면서 결국 마리 앙투아네트루이 16세의 혈통은 단절되었다.


2.5. 부르봉 왕정 복고[편집]


나폴레옹이 패배하고 루이 18세가 즉위하여 부르봉 왕가가 프랑스로 복귀하자 마리 테레즈도 고국으로 돌아왔다. 귀환한 프랑스 왕실은 일단 부르봉 왕가의 권위를 살리기 위해 1815년에 루이 16세마리 앙투아네트, 엘리자베트 공주의 시신을 찾아내 왕실 묘소가 있는 생 드니 대성당에 안치시켰다.


2.6. 백일천하[편집]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하고 수백 남짓한 병력으로 파리를 향해온다는 소식을 들은 즉시 루이 18세를 포함한 전 부르봉 왕가가 공황상태에 빠져 외국으로 도피했다. 하지만 마리 테레즈는 머물고 있던 보르도에서 왕당파와 병사들을 끌어모아 맞서려고 했다.

하지만 모여든 병사들도 "마담을 경호해드리겠지만 나폴레옹과 싸우기는 무리"라며 탈출을 권했고 결국 그들의 권유에 따랐다. 결국 싸우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용기에 감탄한 나폴레옹은 "그 가문(부르봉 가문)에 사내라고는 저 여자밖에 없다(only man in her family)."는 말을 남겼다. 마리 테레즈에 대한 칭찬인 동시에 부르봉 왕가의 구성원들을 "싸우지도 않고 도망치는 저 겁쟁이들은 남자도 아니다."라고 대놓고 깐 거다. 아무튼 그녀를 추적해서 붙잡지는 않았다.


2.7. 부르봉 왕정복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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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8세가 자녀없이 사망한 이후 둘째 작은아버지 아르투아 백작이 샤를 10세로 즉위했다. 이에 샤를 10세의 장남 루이 앙투안의 아내 마리 테레즈는 앙굴렘 공작부인에서 프랑스의 왕태자비가 되었다.

당시 마리 테레즈는 루이 16세의 유일한 자식에 마담 루아얄(장공주)이자 마담 라 도팽(태자비)이라는, 프랑스 왕실 역사상 전무후무한 신분으로 등극했다. 살리카법만 아니었다면 당장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하고도 남았지만, 동생 루이 17세가 혁명 때 어떤 꼴을 당하다 죽었는지 보면 살리카법 덕에 그 지위를 가지고도 다행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

어린 시절에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금지옥엽으로 자라 밝은 성격의 소녀였다고 전해지지만 혁명 기간 동안 감옥에 갇혀 공포와 멸시와 외로움, 추위 속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다 보냈고, 망명 생활을 통해서는 가증스러운 꼴만 보며 외국을 떠돌고 평생 고생 아닌 고생까지 다 한 탓인지 매우 냉혹하고 변덕스러우며 메마른 고압적인 성격으로 성장했다. 어머니 마리 앙투아네트가 평온하고 품위 있게 속삭이던 것과는 달리, 마리 테레즈는 감옥 생활에서 얻은 발성장애까지 더해져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쉴새없이 분노의 고성을 토해냈다고 전해진다.

민중의 여론은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마리 테레즈에게 비교적 동정적이었지만, 그녀는 자신을 감옥에서 썩게 하고 어머니, 아버지, 고모, 남동생까지 죽인[13] 민중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마리 테레즈는 평생 극렬 왕당파 보수주의자로 살면서 혁명도 증오하고[14] 백색테러도 자주 일으켜서 민중의 미움을 받았다. 정작 부모인 루이 16세마리 앙투아네트는, 처형 직전에 남긴 서신이나 유언을 보면 양쪽 모두 자신들의 처형으로 인해서 더 이상의 희생과 폭력이 벌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자녀들을 위해서라도 이러한 유지를 살아남은 자녀에게 남기려고 했으나 마리 테레즈는 결국 성장기에 받은 너무도 큰 마음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것.

시민혁명으로 타도되었다가 외국의 도움으로 겨우 돌아와서 혁명 세력과 어느 정도 타협할 수 밖에 없던 부르봉 왕조 입장에서도 마리 테레즈의 복수는 결코 득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프랑스 왕가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고귀한 신분이다 보니 숙부인 루이 18세조차 그녀를 통제하기 어려웠다.


2.8. 불행한 말년[편집]


나폴레옹이 축출되자 부르봉 왕가의 재건을 위하여 노력했지만 그 와중에 벌인 백색테러로 인망이 좋지 않았고 민심을 잃었기에 결국 1830년 7월 혁명으로 샤를 10세, 남편 루이 앙투안, 조카 샹보르 백작 앙리와 같이 프랑스에서 쫓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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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보르 백작 앙리는 샤를 10세의 손자로, 샤를 10세의 차남이자 마리 테레즈의 시동생인 베리 공작 샤를 페르디낭의 아들이었다. 앙리는 1820년 어머니의 눈앞에서 아버지 베리 공작이 공화파에게 암살당한 그 해 유복자로 출생했다. 자식이 없는 마리 테레즈는 시조카 앙리를 친아들처럼 돌봤다.

7월 혁명으로 인해 샤를 10세가 퇴위하자 계승권 순서상 마리의 남편 루이 앙투안이 자칭 루이 19세로서 20분 간 형식적인 즉위식을 수행하고 20분 국왕 체험 직후 조카인 앙리에게 자리를 넘겨줬다. 그래서 샹보르 백작 앙리는 앙리 5세라고도 하지만 정식 대관식을 치르지 않은 상태에서 얼마 후, 루이필리프가 자신의 지지자들의 도움으로 즉위해서 실제 재위했던 기간은 며칠 밖에 안되기 때문에 앙리 5세라고 잘 불리지도 않는다.

마리 테레즈는 그 후 오스트리아 제국, 양시칠리아 왕국, 영국을 떠돌면서 살아야 했고 남편 루이가 1844년 죽은 뒤, 결국 오스트리아에서 폐렴에 걸려 유일하게 남은 부르봉 왕가 친척 앙리 곁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72세. 불행한 인생을 살았지만 정작 당시로서는 상당히 장수했다. 다만 정작 부르봉 왕가의 왕들은 루이 14세부터는 나름 장수한 편[15]이다.

마리 테레즈가 사망한 후 부르봉 왕가의 마지막 후예가 된 샹보르 백작 앙리는 더 비참하게 홀로 여러 유럽을 떠돌면서 눈칫밥을 얻어 먹어야 했다. 1870년 나폴레옹 3세가 퇴위하고 파리 코뮌이 들어섰지만 이를 아돌프 티에르가 진압했다. 앙리는 이 때 프랑스로 돌아가 왕위 계승권을 요구하지만 티에르를 대통령으로 한 제3공화국[16]이 들어서면서 된 프랑스에서 내쫓긴다. 이후 프랑스 내각은 입헌군주제를 생각하면서 그를 군주로 받아들일 것을 염두에 두기도 했으나 앙리는 마리 테레즈의 영향을 받아 전제군주제의 옹호자였고, 과거의 절대왕정 체제와 선을 긋긴 했으나 그와 동시에 '내가 태어났을 때 요람에 놓였던 부르봉 백기를 국기로 재지정하지 않으면 왕위에 오르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그 기회를 스스로 내쳤다. 앙리는 이후 평생 프랑스 입국을 금지당했다.[17]

이 시기에 이르면 확고하게 왕당파를 지지하며 부르봉 백기만을 국기로 인정하던 방데 지방조차 삼색기를 지지하기에 이르렀다. 이미 세월이 많이 지났고 혁명의 성과물이 프랑스라는 근대 국가에 모두 반영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모두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앙리는 이 때문에 프랑스의 공화주의자들에게 프랑스의 조지 워싱턴, 즉 공화국의 개국공신이라는 비아냥성 찬사를 받기도 했다.

결국 앙리는 떠돌이로 지내다가 1883년 프라하에서 병으로 쓸쓸하게 죽는다. 그가 후사를 얻지 못한 채 사망하면서 부르봉 왕가의 직계 혈통은 완전히 끊기게 된다.

이렇게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직계는 단절되었고 방계 혈통을 추적하면, 스페인계 부르봉 왕조의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18]이 명목상 루이 20세를 자칭하고 있다. 루이스는 알폰소 13세의 차남 세고비아 공작 하이메의 손자로 현재 스페인 군주인 펠리페 6세의 육촌인데 카우디요의 외증손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거기다 제2왕족인 부르봉-오를레앙 가의 후예 장 도를레앙(장 4세)[19]과 프랑스 부르봉의 정통이라고 서로 논쟁 중인 데다가, 보나파르트 가문의 장 크리스토프 나폴레옹(나폴레옹 7세)[20]까지 합세해서 세 가문이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 펠리페 5세[21]의 4남인 펠리페를 시조로 한 부르봉-파르마 가문까지 가세한다면 어떻게 될 지 모른다.[22]


3. 인간관계[편집]



3.1. 프랑스 혁명 세력[편집]


마리 테레즈의 가족들을 사형시키고 자신의 인생을 망친 불구대천의 원수들이다. 단순히 정치적인 문제를 떠나서 마리 앙투아네트를 처형하기 위해서 혁명세력은 그녀에게 터무니없는 근친상간 혐의까지 걸었다. 이 혐의가 얼마나 터무니 없었냐면 유일한 증인 및 증언자는 피해자인 루이 17세였는데 그는 당시 7살이었으며, 감옥에 갇힌 채 온갖 학대와 질병에 시달리는 상태였고 당연히 제대로 된 증인이 될 수 있을 리가 없다. 허나 어떻게든 마리 앙투아네트를 처형하려고 했던 혁명 세력은 이걸 명분삼아 마리 앙투아네트의 혐의를 확정짓고 단두대로 참수시켰다. 부모부터 고모까지 모조리 단두대에서 최후를 맞이하던 당시 마리 테레즈의 나이는 고작 14세였으니 혁명 세력에 대한 증오심은 이해가 되는 면이 있다. 차라리 누가 봐도 납득이 되는 이유를 들거나 설령 거짓이더라도 하다 못해 그럴듯한 이유로 처형했다면 말이 되기라도 했을텐데 모자 간의 근친상간이라는 경악스러운 혐의를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도 환자인 어린 아이의 증언만으로 공식화했으니.


3.2. 루이 17세[편집]


마리 테레즈의 동생. 마리 앙투아네트는 시누이 엘리자베트 공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내 딸이 누나로서 남동생을 도와줬으면 좋겠고, 아들은 누나에게 보살핌을 받아줬으면 좋겠다"라고 썼다. 죽음을 앞둔 마리 앙투아네트는 두 자녀가 살아남아 서로 의지하길 바란 듯 하지만, 마리 테레즈는 프랑스 혁명 당시 혁명 인사들에게 세뇌당해 어머니가 자신을 겁탈했다고 증언한 남동생 루이 17세를 매우 증오했다. 당시 루이 17세는 아직 성에 대한 걸 잘 모르는 어린 나이였고 혁명세력에게 일종의 세뇌를 받아 정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리 테레즈는 동생이 어머니에게 성폭행 당했다는 말을 한 것에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이 때문에 마리 테레즈는 평생 루이 17세의 사칭자들을 만나지 않았으며 그가 살아 있다는 루머에 대해서도 정말 살아 있다면 부모를 죽인 죄로 그 놈을 총살시켜야 한다고 대답했다. 물론 마리 테레즈 본인도 동생이 왜 그랬는지를 알고 있었지만, 그 증언으로 어머니가 처형당했기에 미운 감정을 지울 수 없는 것에 가깝다. 한마디로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한 것. 이후 루이 17세를 사칭하는 사람들이 여럿 나타났을 때 그 중 마리 테레즈를 만나려 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마리 테레즈는 '내 동생은 죽었다'고 딱 자르며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고.[23]

다만 이와 별개로 남동생을 걱정하고 그를 잘 돌봐달라고 혁명 정부에 편지를 쓰기도 했다. 특히 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큰 충격을 받고 슬퍼했다.


3.3. 루이필리프[편집]


부르봉 왕가의 친척이지만 왕위를 노리고 혁명에 가담한 부르봉-오를레앙 가문[24]도 원수로 여겨 루이필리프와는 망명지에서도 만나주지 않을 정도였다.[25] 마리 테레즈는 어릴 때부터 오를레앙 공작은 물론 그 아들도 항상 불신하고 의심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루이필리프는 대를 이어 사촌들의 통수를 쳐버리며(...) 프랑스 왕위를 차지했다. 정작 루이필리프도 1848년 혁명으로 폐위되면서 영국으로 망명했고 결국 복위되지 못한 채 영국에서 사망했다.[26]


3.4. 나폴레옹 보나파르트[편집]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역시 찬탈자, 반역자로 취급했다. 나폴레옹 시대에 작위를 받은 귀족들을 귀족으로 취급하지 않아 작위를 부르지 않고 평민처럼 불렀다고 한다. 애초에 출생부터 나폴레옹과 마리 테레즈의 신분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하지만 나폴레옹 입장에서는 꽤 억울한데 나폴레옹은 루이 16세 가족을 사형시킨 프랑스 혁명 세력의 주요 인물은 아니다.[27] 물론 마리 테레즈 입장에서는 그놈이 그놈으로 보일 수 밖에 없고, 나폴레옹이 훗날 프랑스의 황제로 즉위했기 때문에 나폴레옹이 마리 테레즈와 사이가 안좋은 것은 필연적이었다. 정작 나폴레옹은 백일천하 당시에 마리 테레즈가 병사들을 모아 자신과 맞서 싸우려고 하자 그 용기에 대해서 칭찬하는 등 마리 테레즈에 대해서는 별다른 악감정은 없었다.


3.5. 프란츠 2세[편집]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의 외사촌이자 외가인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유일하게 신경써주었던 인물. 그러나 프란츠 2세도 나폴레옹 전쟁과 그로 산적한 문제를 처리하느라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그리고 어머니를 외면한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반감을 가졌던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는 프란츠 2세의 동생 카를 루트비히가 아닌 친사촌인 부르봉 왕가의 루이 앙투안과 결혼한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마리 앙투아네트에 동정적인 창작물에서는 비교적 긍정적이게 나온다.


만화/애니메이션 베르사유의 장미에서 마리테레즈는 많은 분량은 아니지만 가끔씩 등장한다.
원작 완결 후 2014년에 출간된 외전 에피소드편 1권에서 1795년 프랑스의 포로 교환을 조건으로 탕플 탑에서 석방되어 빈으로 보내지는 시점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영화 2006년작 마리 앙투아네트 에서 아기로 나온다.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에서는 문은수와, 윤시영이 출연한다.

일본의 1인 게임 제작자 Tamadenki가 만든 도트게임들 중 하나인 쿠루퐁 어벤져(くるぽん アベンジャー)의 말 없는 주인공인 공주가 바로 이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이다. 이 게임은 구글 플레이 스토어에서 찾을 수 있다.

중반 스토리에 사형 집행인의 말 중 주인공 공주를 지목하는 오스트리아 여자의 공주가 언급되고, 엔딩과 크레딧이 나올 때 나오는 장면 중 주인공 공주와 닮은 백금발의 여자가 단두대를 향해 걸어가다가 사형집행자의 발을 밟고 "미안해요, 악의로 그런 건 아니었어요."라는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그녀의 어머니인 마리 앙투아네트 인것으로 추정된다.


5. 검은 백작 부인(Dunkelgrafen): 마리테레즈 가짜설[편집]


사실 오스트리아로 보내진 것은 '가짜' 마리테레즈라는 음모론이 있다.

음모론의 대상으로, '진짜' 마리 테레즈라는 주장이 있는 검은 백작 부인은 1807년 2월 튀링겐 주(Thuringia) Hildburghausen에 정착해서 아이자우젠(Eishausen)에서 살다가 1837년 11월 28일 사망한 신원불명의 여성이다. 그들은 철저하게 비밀스럽게 살았으며, 백작 부인은 늘 얼굴을 베일로 덮고 있었다고 한다. 백작 부인이 죽은 뒤 그 '백작'은 1845년 4월 8일까지 살다가 죽었다.

그러면 이후로 활동한 마리 테레즈는 누구냐? 음모론에 따르면 마리 테레즈와 바꿔치기 한 것은 에르네스틴 랑브리케(Ernestine Lambriquet)이다. 본명은 마리 필리핀 드 랑브리케로 베르사유 궁전시녀였던 마리 필리핀 누아레가 역시 시종인 자크 랑브리케와의 사이에서 낳은 4명의 아이들 중 둘째인 그녀는 어릴 때부터 마리 테레즈의 친구로 궁에 출입하며 자랐고 1778년 4월 30일, 어머니가 사망하자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입양되었다. 이 때 왕비가 에르네스틴으로 개명시키고 친딸처럼 귀여워했다. 1778년 7월 31일 에르네스틴은 10살이던 마리 테레즈의 놀이 친구가 되었는데, 기록에 따르면 두 소녀의 외모가 매우 닮았다고 한다.

에르네스틴의 출생 법률 문서에 어머니 마리 필리핀의 이름은 있지만 필리핀의 남편인 '자크'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다. 출생이 불분명한 데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입양되었고 얼굴도 닮았고, 게다가 루이 16세가 에르네스틴에게 비싼 드레스나 피아노를 사주는 등 매우 잘 대해주거나 왕비도 유독 아껴줬기 때문에 사실 이 소녀는 '루이 16세의 서녀'가 아닌가 하는 가설이 생겨나게 된다.

또 1792년 8월 9일, 마리 앙투아네트로부터 에르네스틴의 안전을 지키도록 명령받은 드 스시 부인은 튈르리 궁전이 민중들에게 습격당했을 때 에르네스틴을 데리고 도망쳤다. 마리 앙투아네트도 에르네스틴이 자기 딸이고 언제나 사랑할 것이니 어떻게든 지키라며 절규에 가까운 신신당부까지 했다.

아무튼 이 가설에 따르면 마리 테레즈는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강간을 당해 임신을 했고 그로 인하여 세상에 나서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1795년, 이복누이(?)인 에르네스틴을 대신 '마리 테레즈'로 세상에 내보내고 자신은 평생 은둔하며 살았다.

다만 이 음모론의 결정적인 문제는 에르네스틴은 나폴레옹 시대에 빠리에서 살았고, 1810년 12월 7일, 쟝 샤를 제르맹 프렝팡이라는 남자와 결혼하여 1813년 12월 30일 빠리 교외에서 사망했다는 서류가 있다는 것이다.(...)

이 전설이 퍼진 탓에 2013년 독일에서 무덤 파서 유전자 검사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검사 결과 그녀는 마리 테레즈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을 본 사람들은 마리 테레즈라고 생각했고 소유물 중에서는 부르봉 가의 상징인 백합 무늬가 들어간 고급품들이 많았다고 하니 참으로 미스터리.

2015년 12월 6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이 음모설에 대해 다뤘다. 처음엔 검은 백작부인이 마리 테레즈로 알려졌던 것처럼 나와 음모론과 사실이 매우 뒤섞여 제작진이 자료 조사를 잘못한 지 착각이 들게 했지만, 방송에 따르면 2013년 독일에서 유전자 검사를 한 결과 검은 백작부인은 마리 테레즈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니 오스트리아로 도망친 마리 테레즈가 진짜 마리 테레즈가 맞다는 말이다. 덧붙여 외국인 배우들이 계속 "마리 테레즈"라고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자막에는 샬럿이라고 나왔다.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가 풀네임이니 잘못된 건 없지만, 굳이 샬럿이라고 불러야 했다면 프랑스인이니 샤를로트라고 불렀어야 한다.


6. 여담[편집]


  • 초상화를 보면 알겠지만 키가 매우 작은 것을 볼 수 있다. 아버지 루이 16세의 키는 193cm로 프랑스의 역대 모든 군주들 중에서 두 번째로 키가 크고, 왕족의 초상화를 그릴 때 실제보다 키나 외모를 더 미화해서 그린다는 것을 감안하면 진짜로 키가 작은 것이다. 이는 키가 작은 어머니 마리 앙투아네트(154cm)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고, 한창 클 성장기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내 영양 부족으로 키가 작은 것이다.

  • 성인이 된 이후 나타난 고압적이고 변덕스러운 성격은 경계성 성격장애 증상으로 보인다. 해당 성격장애의 주된 발병 요인이 유년기에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거나 양육자로부터 신체적, 정신적 학대를 받는 것인데, 마리 테레즈는 두 경우 모두 해당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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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이름을 물려받게 된 이유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자식들에게 결혼해서, 첫 딸을 낳으면 자신의 이름을 붙이라고 명했기 때문이다. 마리 테레즈의 외사촌이나 이종사촌들도 마찬가지로 마리아 테레지아에게서 따온 이름을 가지고 있다. 요제프 2세(마리 앙투아네트의 큰오빠)의 장녀 마리아 테레사, 마리아 카롤리나(마리 앙투아네트의 언니)의 장녀 마리아 테레지아, 레오폴트 2세(마리 앙투아네트의 작은오빠)의 장녀 마리아 테레사 등이 있다. 어머니를 증오했던 마리아 아말리아만이 명령을 무시하고 딸들에게 들의 이름을 붙였다.[2] 카롤리나의 프랑스어형이 샤를로트였다.[3] 프랑스의 아이들. 왕자를 포함한 왕녀, 도팽(왕태자)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칭호.[4] 군주의 장녀에게 주어지는 칭호. 결혼하면 소멸되었다. 영국프린세스 로열이 이 칭호를 본따 만들어졌는데, 마담 루아얄과 다른 점은 프린세스 로열은 본 칭호를 받은 당사자가 사망할 때까지 유지된다는 점이다. 프랑스/역사에서 이 칭호를 받은 왕녀는 마리 테레즈 외에도 앙리 4세의 장녀 이사벨, 루이 15세의 장녀 루이즈 엘리자베트가 있으나 마리 테레즈의 높은 인지도 탓에 보통 마담 루아얄 하면 마리 테레즈를 일컫는다.[5] 프랑스 왕태자비.[6] 이는 아이를 바꿔치기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철가면루이 14세가 쌍둥이 형제라는 설이 부정되는 이유가, 다름아닌 이 관행 때문에 '정말 쌍둥이였다면 분명 본 사람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왕족의 출산인 만큼 정말 '아무나'는 아니고 왕실의 계서제에 따라 입회 권한이 정해져 있었다. 옷을 입을 때도 이러한 계서제에 따라 하녀는 왕비에게 옷을 바로 줄 수 없었고 의전을 맡은 백작 부인에게 건넨 뒤 왕비에게 가야 했다. 도중에 그 백작부인보다 더 높은 사람이 들어오면 다시 또 옷을 건네는 식. 이렇게 옷이 건네지는 동안 속옷 차림으로 있어야 했기 때문에 앙투아네트는 이를 무척 괴로워했다.[7] 모유수유를 하는 기간 동안엔 호르몬으로 인해 엄마는 임신이 잘 되지 않는다. 또한 육아의 피로도 영향을 줄 것이다. 예로부터 왕가 및 귀족들은 보다 많은 출산으로 안정적인 후계자 확보를 위해서 당연하게 유모를 두는 것이 관례였고 양육 노동도 생모가 직접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 왕실도 마찬가지.[8] 정말로 평민들을 착취했던 악랄한 귀족도 있었겠지만, 설령 개인적으로는 선량했더라도 혁명 정부와 시민들에게는 앙시앵 레짐의 모순적인 체제 속에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게 그들의 원죄라 당치않은 루머까지 씌우는 일도 있었다. 마리 테레즈의 고모 엘리자베트 공주는 그 자신의 성품은 충성스럽고 고결했음에도 '형제들과 근친상간을 했다'는 악성 루머로 고통받았으며 투옥된 후에는 뜬금없이 로베스피에르와의 염문설에 시달리기까지 했다.(이는 로베스피에르가 공안위원회를 장악하고 공포정치를 시행하던 시점에 정적들이 그가 엘리자베트 공주와 결혼하여 왕이 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비난하는 분위기에서 나온 말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국외로 도피한 오빠 아르투아 백작 샤를과 서신 교환을 했다는 이유로 반혁명 혐의를 받아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9] 이 무렵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마리 테레즈의 외삼촌 레오폴트 2세에서 외사촌 프란츠 2세로 이어지고 있었다. 즉, 혁명 정부 입장에서는 마리 테레즈를 그대로 두면 오스트리아 쪽에서 친척을 구명한다는 핑계로 혁명에 개입하려 들 가능성이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어른이 되어서 결혼 등으로 외국 왕실과 연대하거나 스스로 뭔가를 꾸미려 들지 모른다고 우려할 만했다.[10] 본래 마리 테레즈는 마담 루아얄로 어느 정도 국민적 인지도가 있었다.[11] 당시에는 러시아 제국의 영토로 과거 쿠를란트-젬갈렌 공국의 수도였다. 현 라트비아 옐가바.[12] 이 때 이들을 받아들여주고 손님으로 대접해줬던 건 분할당해 멸망한 폴란드의 옛 왕족이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왕족은 이후 마리 테레즈가 원수와 같이 생각한 나폴레옹의 휘하에서 장군으로 복무하며 26인의 프랑스 제국 원수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바로 폴란드의 애국자, 폴란드의 독립을 위하여 일평생을 바친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다.[13] 실제로 혁명파들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처형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 어린 루이 17세를 학대/세뇌시켜 ‘어머니가 나를 강간했다’ 라는 진술을 받아내게 만들었다. 당시 옆나라 영국에서도 ‘어떻게 왕과 왕비를 목 잘라 죽일 수가 있냐'고 프랑스를 야만적으로 보면서 양국의 사이는 더 나빠졌다. 하지만 사실 그 부분에선 영국이 프랑스를 뭐라 할 일이 못 되는 게, 프랑스가 왕 목 날리기의 선두주자로 여겨지기는 하지만 의외로 그 일은 영국이 144년이나 먼저 했다.[14] 특히 그녀가 프랑스 혁명 동안 프랑스에서 있었던 일을 적은 일기에서도 혁명 세력을 전부 악당으로 묘사했다.[15] 루이 14세(77세), 루이 15세(64세), 루이 18세(68세), 샤를 10세(79세)[16] 제1공화국은 1792년 프랑스 혁명으로 들어선 공화국, 제2공화국은 1848년 10월 혁명으로 루이필리프가 퇴위하고 들어선 공화국이다.[17] 이 때가 프랑스에서 자발적으로 군주제를 복고할 마지막 기회였다. 부르봉 왕가 내에서 정통파와 오를레앙파 간의 다툼이 앙리를 우두머리로 하고 그 후계를 오를레앙파인 파리 백작 필리프로 정하게 되면서 해소된 데다, 당시 제3공화국의 의회 구도가 왕당파 의원들이 과반수를 훨씬 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앙리가 오를레앙 왕가를 굉장히 증오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 왕당파의 패착이었다.[18] 프랑스어로는 루이 드 부르봉.[19] 루이 필리프 1세의 7대손이다.[20] 나폴레옹 1세의 동생 제롬 보나파르트의 현손.[21] 보르본 왕조의 초대 왕이자 루이 14세의 손자이다.[22] 사실 부르봉-파르마 가문은 펠리페 5세와 더불어 앙리 5세의 누나 루이즈 마리 테레즈 다르투아의 자손이기도 한지라 혈통상 제일 정통성이 있고, 더욱이 부르봉파르마의 공녀 지타가 오스트리아 황제 카를 1세의 황후로 그의 지원도 있어서 1차 세계대전이 다르게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 지 모른다. 루이필리프의 외손자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모를 일이지만[23] 여담으로 나중에 연구를 통해 루이 17세는 실제로 어린 나이에 죽었고 사칭자들은 전부 가짜였다는 게 밝혀졌다.[24] 루이필리프의 아버지 오를레앙 공작 루이필리프는 왕위를 탐내 프랑스 혁명 때 친척인 루이 16세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에 찬성표를 던져 프랑스 전역을 충공깽으로 몰아넣었고, 그렇게 욕을 퍼먹고도 정신을 못 차렸는지 왕이 되기 위해 혁명 정부 치하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실패하면서 루이 16세가 처형당한 해에 똑같이 단두대에서 참수당하게 된다.[25] 애초에 루이필리프는 아버지의 기회주의적인 행태로 망명 시대 당시에 마리 테레즈뿐만 아니라 부르봉 왕조 전체에게 왕따당하다시피 했다.[26] 게다가 부르봉 왕조의 마지막 직계 남성인 샹보르 백작 앙리를 제치고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재위 내내 부족한 정통성으로 전 유럽의 왕실에게 찬탈자이자 폭동왕이라고 욕을 먹어야만 했다. 하지만 샹보르 백작 앙리의 죽음으로 남계가 끊겨 단절되어버린 부르봉 왕가의 직계와 달리, 루이필리프가 무려 6남 4녀의 많은 자녀를 둔 덕에 오를레앙 가문은 루이필리프가 폐위된 후에도 상당히 번성했고 타국 왕가와 혼맥을 맺으면서 나름 잘 나갔다.[27] 나폴레옹은 하급귀족 출신 장교였지만 꽤 정치적인 인물이었으며, 혁명 급진파인 자코뱅파에 가담했고, 자코뱅의 수장인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의 동생인 오귀스탱 드 로베스피에르가 나폴레옹의 정치적 후견인이 되었다. 로베스피에르와는 어느정도 연이 닿아 있었지만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연줄을 잡자마자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당하는 바람에 같이 오귀스탱은 단두대로 갔고 나폴레옹 역시 잠시 감옥에 갇히는 신세로 전락했으며 하마터면 골로 갈 뻔 했다. 나폴레옹은 제정을 수립할 때 겉으로는 프랑스 혁명의 성과를 외세로부터 수호하기위해 제위에 오른다고 주장했고, 결과적으로 딱히 프랑스혁명과 무관한 인물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