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속(아! 내가 마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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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행적
3. 실적
4. 기타



1. 개요[편집]


파일:아! 내가 마속이다.jpg

간절히 작가의 웹소설 아! 내가 마속이다의 주인공.


2. 행적[편집]


본명은 박선운으로 본래 현대에서 산악회를 다니던 청년이었으나 악화된 건강 상태에도 불구하고 무리해서 북한산을 오르다 암벽에서 떨어져 사망, 가정에서 산을 오르던 마속에게 빙의한다.[1] 본래 제갈량이 기대했던 마속의 잠재력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서 군사적 재능도 뛰어나고, 미래 지식과 주변에 모인 인재들의 도움으로 착각물을 찍으며 활약하게 된다. 처음에는 착각으로 시작했으나, 작품이 진행될수록 능력적으로도 인격적으로도 성장하여 지위에 걸맞는 위인이 되어가는 것이 특징.

캐릭터성으로는 소시민 특유의 보신주의에 더해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을 통해 역사를 뒤바꿀 기회를 얻은 만큼 영웅 심리와 일반인이 적당히 뒤섞여 있다. 해당 시대의 진짜배기 위인들처럼 출세와 재물에 초연하지는 못하지만 자기 이름을 날리는 것에는 거의 관심이 없고, 적당히 사치할 수 있는 정도의 연금을 노리는 정도.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전공을 여러 번 세운만큼 자뻑하는 기질도 없잖아 있지만 그것도 금방금방 식어버린다.[2] 제 딴에는 회식자리에서 악질 상사를 붙잡아주는 식으로 행동하는데 주변에서는 대계의 일환으로 생각하는 식의 착각물 클리셰가 적지 않았고 마속도 거기에 대한 해명이나 태도를 바꾸는 건 거의 포기한 상태. 또한 제갈량이 암약으로 양의와 위연을 조종해서 자신의 움직임을 좌지우지한 것에 대해 크게 불쾌감을 느끼고 거부하려는 모습도 보이는데 제갈량이 말하길 이건 박선운의 성격만이 아니라 생전의 마량도 비슷했던 모양이다.

빙의 직후에는 원 삼국시대에서 마속의 비참한 최후를 알기에 급하게 하산해 가정을 돌파하기 위해 달려오는 장합의 위군 오만명과 대적하게 된다. 여기서 왕평에게 실전 지휘를 맡겼고, 운도 따라 줘서 장합을 막아내는 데 성공하고[3]왕쌍도 죽이게 된다.[4] 이로 인해 결정적이라 할 수 있는 전공을 세움으로써 계한 내에서 처음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지만, 여전히 심적으로는 현대인이자 평범한 소시민에 가까웠기에 어떻게든 전장과 정계에서 발을 빼고 현대로 돌아갈 방법을 찾으려 한다. 그런 와중에 오나라가 칭제하자 이를 기회라고 생각해 스스로 오나라에 사신으로 가기를 자처함으로써 실각한 뒤[5][6] 은거하며, 도사들을 불러모아 현대로 돌아갈 방법의 힌트라도 찾아볼까 했지만, 도사들은 하나같이 사이비였고 이후 계속되는 전쟁 수행으로 촉한 재정이 긴축상태로 들어가면서 연금도 반 토막나 가족을 먹여살리며 은거하기엔 부족해지는 바람에 울며 겨자먹기로 난세에 뛰어들게 된다.[7]

현대에서 산악회에 다니던만큼 등산을 매우 좋아해서 마속이 되고도 가정 싸움 이후 사실상 은퇴한 상황에서 운동이나 할 겸 노는 방법으로 산악장비를 제작하고 서천 산악회를 조직하는데, 이 서천 산악회 멤버들이 등산 경험을 살려서 산악전의 전문가가 되어버린다. 진짜 산악왕이 되어 버린 마속 이후로도 파견 나간 천수나 남중에서도 산악회를 만들 정도. 이 때 제작된 산악장비 등이 군사적으로 무척 유용하다보니 마속의 사소한 행보 하나하나가 모두 깊은 뜻이 있을 것이라고 제갈량을 비롯한 모두가 착각하게 되고, 요동 정벌 당시 선심쓰듯 제갈직과 위온에게 남겨둔 편지 등이 우연히 기회가 생겨 활용했을 뿐인데 장완이나 비의조차도 마속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큰 그림을 그려오면서 책략을 준비했다고 믿는 등, 장완의 마속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인 수준.[8] 계한의 장수들 다수가 마속과 함께 난관들을 뚫어온지라, 그들 또한 마속을 신뢰하고 있다.

빙의 초반에는 자신의 부관인 왕평의 능력에 거의 의존했지만, 기억을 정리해 마속의 능력을 완전히 손에 넣고 위나라의 침공이 본격화되고 왕평이 백이군의 장군으로 보직을 이동하자 직접 일군을 지휘하게 된다. 위나라의 옹량주 침공에서 제갈량의 계책에 힘입어 강유와 함께 수만의 대군을 휘몰아쳐 곽회를 격파하고 진창을 함락시키는 등 대공을 세우며 우장군으로 승진해 확실하게 입지를 굳힌다.[9] 이후 당시 손권이 계획하고 있었던 요동 상륙작전을 보완하는 식으로 실행해 손권의 권위를 올려 형익병진을 위한 배경을 마련하고, 제갈량의 마지막 북벌에서는 제갈량에게 작전 수립 역할을 위임받아 강유, 왕평, 마충과 함께 동관 진공작전이라는 대전략을 수립하며, 동관대전에서도 장합의 기습 공격에도 불구, 부장인 나헌과 황숭을 비롯, 군대 일부는 보존할 가능성을 보기도 하며 위연이 수십 명의 기병으로 장합과 공멸하자 상당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아군을 추스려 역으로 장합군을 궤멸시키기도 한다.

1차 북벌과 오나라 사신행으로 탕구장군 겸 성양후. 위의 반격 격파 후 우장군. 제갈량 사후엔 위장군에 임명되어 명실공히 계한 군부의 중추에 섰다.[10] 그리고 정면 승부로는 육손을 이기기 힘들며 군사 부분에서 향후 촉한의 총사령관이 될 강유는 30대 초반으로 경력과 관록이 아직 부족하므로 마침 마속 라인에 합류한 극정을 이용해 이간계로 육손을 실각시킬 계획을 세운다.[11][12] 주유, 노숙, 여몽 등 큰 공을 세우고 빨리 퇴장한 다른 대도독과 달리 육손은 양번을 얻고 상용을 촉한과 나누는 등 꾸준히 명망과 공적을 쌓아 위세가 하늘을 찌르니 이런 신하를 보는 초조한 손권의 심리를 이용하자는 것. 그 뒤 대의를 중시하는 계한의 명분론을 이용해 장안을 수복하려는 위나라의 계략으로 북방 유목민 난민들이 계한에 합류를 요청하자 이를 받아들여 군대를 이끌고 이들과 합류해 무사히 귀환하는데 성공한다.[13]

이후 육손의 사망소식을 듣고 차후 교주에서 반란을 사주해 위와의 전쟁 때 오의 배신을 대비하고자 한다. 이를 위한 군사, 정치, 외교적 행보와 친오파로 알려진 것 때문에 오가 배신했을 때 막대한 정치적 타격을 입을까 위장군 직에서 사임한다. 물론 바로 그 아래 직급인 대홍려가 되었지만, 그래도 군권이 없어 타인이 보기에는 실각인 모양. 그래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이용해 대오 전선에 자기 사람인 나헌과 왕준을 배치해 오나라의 동맹 파기와 침공을 대비한다. 이후 오나라가 뒤를 치자 곽익과 왕준을 데리고 교주의 반란을 이끌어 토벌군으로 온 여대를 격파한 뒤 형남으로 진격해 육윤과 대치하고 급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수비전의 천재인 나헌이 있는 백제성을 포위한 오나라 대군이라면서 자신있게 장기전을 준비한다. 이후 백제성에서도 계한군이 승기를 잡자 기다렸다는 듯 무릉으로 진출, 무리한 공격을 한 육윤을 격파하고 형남의 일부 지역까지 점령한다. 처음에는 왕평 등을 비롯한 타 장수들에게 크게 의존하는 경향이 강했지만, 이미 이 시점에서는 이제 과거 명장들의 손을 빌리지 않아도 그 스스로도 수위에 드는 능력을 갖춘 장군이 된다.[14] 계한은 물론 사마사나 육손 등 각국의 군사 실력자들이 마속을 두고 군사능력을 전혀 폄하하지 않는 것을 보면 능력은 확실. 댓글을 보면 마속은 유비의 안목이 엇나간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될 것이라고 한다.[15]

북벌 이후 오나라에게 한방 먹여줘서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귀환하고 친오파의 굴레를 벗어 우대장군직을 제안받으나,[16] 촉한에 권력다툼을 초래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도 있는데다 본래부터 출세에 대한 열정이 별로 없는 편이라서 이를 사양하고 대신 표기장군직을 받는다.[17][18] 이후 장완이 장안에 있는 비의의 저택과 땅을 잘 챙겨주자 장안 천도로 일이 늘었다고 성도에 늦게 와야 했다고 후회한다. 그 뒤 위나라의 사주로 독발부가 량주를 공격하자 강유, 양직과 함께 이를 토벌한다.

이후 장안을 순시하며 백성들이 전쟁에 지쳐있음을 절감하고 장완과의 이야기에서 조정 대신들도 북벌에 회의적이 되어간다는 소식을 듣는다. 마속 역시 자신이 처음 빙의했을 때 원했던 안락한 생활을 위한 모든 조건이 갖추어졌음에도, 그동안 자신이 함께해온 계한의 인물들과 그간 있었던 수많은 사건들을 헤쳐나오며 자신 역시 과거와는 마음가짐이 확실히 변했음을 깨닫고 장완과의 대화에서[19] 이런 자신의 마음을 확실히 알고 다잡은 뒤 자신이 알고 있는 미래지식을 이용해 한번 도박을 해보기로 결심한다. 바로 원 역사에서 하후패가 위를 버리고 촉한에 귀순한 사실을 마지막 북벌의 기회로 이용하기로 한 것. 진태와 제갈탄을 비롯한 위나라의 맹장들이 집결한 위군을 공성전 끝에 마침내 이기고 낙양에서 사마의까지 격파하며 입성하나 더이상의 확전은 어렵다고 판단한다. 이후 사마의의 계략으로 낙양대전 직후 곧바로 이어진 남양군을 둘러싼 오나라와의 힘겨운 전쟁 끝에 남양을 분할하는 것으로 자신 세대의 북벌을 완전히 마무리한다.

마지막 북벌 후에는 자의 반 타의 반[20]으로 표기장군에서 사도로 승진했고, 천거를 바라는 손님이 너무 많이 온다는 자기 편의주의적인 이유로 과거 제도의 기반이 될 만한 시험을 만들어 통과한 손님만 받다가 3년이 지나서 강직한 신료들을 잔뜩 꽂아둔 후, 중앙 정계에서 은퇴하며 익주목으로 전임된다. 10여 년간 익주목을 지내면서 시간이 남을 때마다 등산을 하며 나무를 심는 등 은퇴생활을 즐기다가 죽었다. 죽기 전에도 빙의의 영향인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 "또 다른 삶을 살려나?"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21] 또한 삼국지의 저자인 진수를 미리 옆에 데리고 있으면서 오나라의 쇠사슬 전략을 적어둔 비단 주머니를 일부러 보여주는 등 역사에 이름을 길게 남기기 위한 작업을 미리 해뒀다. 시호는 환후(桓侯)[22] 후에 역사에는 중흥사걸로 기록된다.


3. 실적[편집]



  • 제갈량의 1차 북벌 : 위나라군 5만의 공격 방어전 승리(적 지휘관 장합), 보급작전 중 위 기병대 500 대파(적 지휘관 왕쌍)

  • 위나라의 4로 반격 : 위나라군 3만 4천 대파(적 지휘관 곽회). 진창성 점령(적 지휘관 학소).

  • 동관대전 : 동관 기습 작전 입안, 위나라 원군 3만 저지(적 지휘관 진태), 동관 대전 일익 담당(적 지휘관 사마의)

  • 장완의 북벌 : 대오 전선 총사령관. 오나라 진압군 연파(적 지휘관 1만 2천 여대, 2만 육윤)

  • 낙양대전 : 위나라군 12만 대파.(적 지휘관 사마의)


4. 기타[편집]


작중 마속이 거친 관직과 작위는 승상부 참군(작품 시작)→기주목/성양정후(오나라 사신행 이후)→탕구장군(위나라 침공 당시)→우장군/현향후(요동 진공~동관대전)→위장군(제갈량 사망~병주 원정)→대홍려(자진 실각)→표기장군(장완의 북벌 이후)→사도(낙양대전 이후)→익주목+환후(완결)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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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일반적인 빙의처럼 아예 다른 영혼이 들어온 것이 아니라, 본래 마속의 영혼에 주인공의 영혼이 덧씌워진 것에 가깝다. 실제로 마속의 군사적 재능과 기억까지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2] 본인 역량의 상당 부분이 역사를 안다는 치트빨임을 잘 알기 때문. 그리고 이렇게 주제파악을 잘 하면서 처신을 제대로 했기에 도리어 어마어마한 업적들을 세울 수 있었다.본인 왈 마속의 오만한 성격이 자신이 들어가서 불평불만이 많은...이 아니라 겸손한 성격이 됐다고.[3] 가정 전투 중간에 장합의 화공으로 패배할 뻔 한 상황에 놓이고, 이에 도망치려 하나 끼니를 제대로 못 챙겨서 다리에 힘이 빠져버린 탓에 일어서지 못하고 결국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런데 그로 인해 바람에 흩날리는 대장기 옆에서 난전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꿋꿋이 앉아있는 간지나는 모습이 연출되고(...) 왕평을 비롯한 촉한군은 마속이 군대의 사기를 유지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착각해서 되려 사기가 올라갔고, 결국 방어에 성공했다.[4] 왕쌍이 식량운송중인 촉군을 계속 괴롭혔으나 왕평은 기병을 지치게 만든 뒤 콩으로 말들을 현혹시켰다.[5] 비록 동맹이라고는 하나 그간 오나라와 있었던 수많은 일들로 인해 촉한 내에서의 반오감정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고, 원 역사에서야 1차 북벌이 실패했기에 사적인 감정이야 접어둘 수밖에 없었지만 역사가 바뀌어서 1차 북벌이 성공함에 따라 오의 칭제에 대한 여론이 심상찮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오나라에 축하 사신으로 간 사람에 대한 촉한 시민들의 감정이 어떨지는....[6] 본인은 실역사의 진진처럼 후자리를 받아서 꿀을 빨려고 한 의도였다. 헌데 20년은 연상인 조조,유비를 막 부르고 술을 강요하는 손권이나 술에 고통받는 다른 오나라 신하들을 구해줬더니 일부러 사치를 부리게 한 거 아니냐고 의심하는 육손으로 혐오(吳)감정을 잔뜩 얻게된다.오죽하면 처음엔 무심코 무시하던 유선에게 없던 충성심이 솟아날 정도.[7] 물론 이것만 있는 건 아니고 조운이 죽기 직전 마속을 불러 청강검을 물려 주면서까지 한실을 도와달라고 부탁했기에 그걸 외면할 수 없었다는 도의적 측면도 있었다. 더불어 마속의 기억 속 촉한에 대한 애국심, 본인의 연금과 재물을 위한 보신주의적 성향, 그리고 위나라와 싸우며 생긴 적의와 오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오면서 고개를 든 혐오(吳) 감정까지 가세해 촉한에 충성을 다한다.[8] 장완은 마속이 가정 전투 등을 겪으면서 오만한 면모가 사라지고 차분한 성품이 된 대기만성형 인재라고 생각(착각)하고 있다. 비의의 경우도 군사 부분은 마속에게 깊이 의존하며, 자신이 재상이 된 것을 마속이 양보하고 희생한 덕분(오제 즉위 당시의 축하 사절 역할)이라 여기다보니 마속에게 부채감도 있다. 물론 실상은 마속은 그냥 과로사하기 싫었던 것이다.[9] 항복한 지 얼마 안 된 강유가 상황 상 마속보다 계급, 연령, 전공 모두 확실히 밑인 상황이라 마속이 어느 정도 허락하고 방향을 정해주지 않으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하물며 진창 공방전은 강유가 위연을 지원하러 간 상황이었기에 운이 크게 따라줬다고는 하지만 마속 홀로 이뤄낸 성과인 셈.[10] 사실상 군부 최고 권력자로서 이미 제갈량 사후 직전에 마속에게 제갈량의 후계자가 되라는 말이 나왔다가 마속 본인이 거부하며 자기 일에만 충실했던 적이 있었다. 심지어 이 때 순수한 군인인 강유나 마대는 마속이 군권을 이용해 후계자 자리를 노리는 행보를 보이더라도 불편해하기는 해도 나서서 막을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가 마속이 자신은 후계자가 아니며, 순수하게 자기 일에만 충실하겠다는 뜻을 강하게 밝히며 임무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자 표정이 밝아지기도 했다. 제갈량 사후에는 핵심 장수 중 마속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운 이가 없을 지경이었다.[11] 삼국지연의에서 마속은 정치공작으로 사마의를 실각시킨 적이 있다. 본작에서는 이 재능이 꽃을 피우기라도 했는지 전예, 육손 등등 남의 나라 인재들 여럿을 사악한 정치질로 날려버린다. 분명 초반만 해도 사람을 바둑돌처럼 대하는 건 나쁘다고 제갈량에게 반항하던 사람이었는데 이리저리 구르다 보니 제갈량도 흐뭇해 할 수준의 사악한 정략을 구사하는 나쁜 남자가 돼버렸다.[12] 육손을 직접 본 장완이 육손의 위험성을 실감하여 제거하는 계획을 서둘러 시행해야 한다고 하면서 적극 지지자가 되었고, 마속의 계획을 듣고 대단한 책략이라고 감탄한다. 대외적으로는 알리지 않았지만, 장완과 마속의 기록에 이것이 남았다면 후대에도 사악한 정치질로 적국의 인재들을 죽음에 이른 암흑책사로 유명해질 수도 있다.[13] 물론 위나라의 함정이었기에 쉬운 일은 결코 아니었고 강유등의 활약,화염방사기와 식초를 이용해 성벽을 부식시키고 흐르는 강물의 흐름을 멈춰 얼리는 등 온갖 미래의 과학기술을 동원해 얻은 승리였다.[14] 막 징집되어 한번도 호흡을 맞추지 못한데다 육전에 약한 오군보다도 떨어지는 전투력과 장비를 지닌 교주군을 이끌면서도 여대나 육윤같은 명장들과 치열한 공방을 벌일 정도.[15] 물론 진수에게 자신은 이 말을 듣고 정신을 차려 동오에 사신으로 가는 것을 자처했다고 밝혔기에 유비의 마속을 중용하지 말라는 말은 이 세계선에선 아직 대오각성하지 못한 마속을 중히 쓰지 말라는 제갈량에게 하는 충고임과 동시에 이 말을 듣게 될 마속 본인에 대한 충고로 여겨질 가능성이 크며, 실제로도 에필로그에서 마속에게 이런 말을 들었던 진수가 마속전을 작성하면서 그런 식으로 해석해 이것이 열조의 큰 뜻이었다고 칭송한다.[16] 마속은 대장군을 왜 좌우를 나누냐고 어이없어 했다. 제갈량도 군부의 수장인 위연과 오의를 좌우거기장군으로 임명한 적이 있었고, 이후에 비의는 대장군 직함으로 사실상 승상 일을 했다. 사실상 이 시점에 장완 또한 마속을 2인자로 내려앉힐 방법이 없다고 인정한 셈.[17] 이 시점에서 마속의 권위와 실적을 보면 마속과 제일 친한 장완조차도 마속을 견제할 필요성을 느낄 정도라는 게 실감된다. 마속은 남만부터 시작해(본 작품의 시작인 회귀 이전의 일이다.) 가정에서 대공을 세워 옹량주를 손에 넣은 제 1차 북벌, 위의 공격 방어, 오나라와 함께한 요동 전선 전투, 장안이 넘어온 제 2차 북벌에서 하나같이 한손에 꼽히는 군공을 세운 공신이었고, 그리고 제 3차 북벌에선 장익이 있던 상용을 제외(그나마 상용 역시 장완에게 대비할 것을 언급했던 것이 마속이라 지분이 없는 것도 아니다.)한 오나라 전선을 자신과 휘하 부장들만으로 정리한 나라의 주춧돌 수준의 명장이며, 한오 동맹 체결, 남만 반란 진압, 교주/형남 공략전까지 주도한 중신이다. 또한 과거 승상부에서 장완과 비의와 함께 업무를 보면서 내정 실력까지 확실히 증명했다. 유일한 결점이었던 친오파라는 입장마저 오나라의 배신을 홀로 예측하고 저지함으로써 없어졌다.[18] 거기다 지난 20여 년간 중대한 일 대다수에는 마속이 관여해 해결했고, 심지어 마속을 제외한 군부의 수뇌부라 할 수 있는 왕평, 강유, 마충, 오의 중에서도 왕평은 확실한 마속의 사람이며, 강유와 오의 역시 마속과 수년이나 함께 군대를 이끌며 굵직한 경력을 쌓았다. 마충도 마속과 대립할 이유는 없고, 꽤 안면을 튼 상태라서 마속의 라이벌로 세우기에는 애매한 면이 있었다. 제갈량 사후 유일하게 마속과 군부에서의 위상을 비견할만한 오의는 외척이라 전면에 나서기 어려운 입지인데다 오히려 자기는 늙었다면서 사마의와 육손의 맞수로 마속을 밀어줄 정도였으니 아예 논외. 마속의 제자로는 나헌과 황숭이 있고, 곽익, 왕준, 극정, 서막 등 직접 스카웃한 유능한 인재들 역시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제갈량의 자식으로 계한의 아이돌격 인기인인 제갈첨조차 공식적인 후견인은 장완이지만 마속을 숙부라고 부르면서 따르고 후광을 더욱 밝혀준 공적조차 마속의 것을 받아온 것이다. 이전 몇번의 전투와 병주 원정을 통해서 목숨을 구원받은 유목민들의 지지도 받는 것은 덤. 사실 장완의 북벌 건에서 장완, 비의가 모두 마속을 북벌에 앞세우려 했지만 마속은 이 기회를 거절하고 오나라의 배신을 예측하고 이를 완벽히 막아낸데다가 형남 일부와 교주까지 판도에 넣는 대역습에 성공했다. 따라서 마속은 마음만 먹으면 단숨에 계한 최대 규모의 파벌을 꾸릴 수 있었다. 작중에서도 만일 마속이 제갈량같은 권력자가 되려 하면 장완조차도 이를 제지할 수 없다는 언급이 나온다.[19] 장완은 자신이 병에 걸렸음을 솔직하게 공개했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히 장완의 권력은 줄어들고 차기 후계자인 비의를 중심으로 권력이 이전되고 있으며, 비의는 여전히 장완, 마속과 매우 절친한 사이이고 장완을 잘 챙겨주고 있긴 하지만 당시 시점에서는 이제 나라의 사정이나 여러가지를 계산하여 북벌을 중단하는 쪽으로 살짝 기울어 있었다. 실제로도 이미 계한의 세력이 실 역사와는 다르게 매우 팽창하고 군사력도 힘겹게나마 위오 양국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해진데다 지형 덕분에 방어도 쉬워 내정을 다스리며 시간을 끄는 것이 계한에게 더 유리할 것이라는 언급이 나왔다. 장완 역시 이러한 여론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긴 하나 자신이 버티고 있는 동안에는 제갈량의 뜻을 이어 끝까지 천하통일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고 있었다.[20] 주전파의 거두이자 군부의 최고 권력자인 마속을 군부에서 몰아내기 위한 평화파의 견제이다. 실제로 원 역사에서 강유도 북벌이 계속해서 실패하자 제갈첨 등이 강유를 행정직인 익주자사로 전임시켜 북벌을 못하게 하려고 한 적 있다. 촉한에서 익주자사는 재상들이 겸임하는 직책이라는 걸 감안하면 비슷한 경우이다. 다만 마속은 정재계에 영향력이 너무 막대해서 그런지, 마속이 슬쩍 떠보자 말을 건네던 초주는 바로 겁먹었다. 당시 마속의 영향력이라면 마음만 먹을 경우 제갈량이나 사마의급 절대권력을 쥘 수도 있었으며, 어지간한 고위직이라도 자리 보전이 어려웠기 때문. 물론 마속 역시 더 이상 전쟁을 할 생각이 없었고 사마의처럼 부정적인 의미건 제갈량처럼 긍정적인 의미건 과로사 하기 좋은 독재자급 권력자가 될 생각도 없었기에 나름 흔쾌히 받아들였다.[21] 물론 세인들은 이를 불교 전파에 영향력이 큰 마속이라 불교의 윤회사상을 언급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22] 곽거병의 시호가 경환후(景桓侯)이다. 환(桓)자는 땅을 넓혔다는 뜻이다. 굳이 전한까지 갈 것도 없이 우리가 잘 아는 장비의 시호 또한 환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