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에하라 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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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교육무상화를 실현하는 모임 로고.png 교육무상화를 실현하는 모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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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rowbgcolor=#ffffff,#000000><width=50%> 초대
마에하라 세이지 ||
||<bgcolor=#ffffff,#191919><-2>국민민주당(2020년)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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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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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huugiin_logo.png 일본 중의원 ((구) 교토 1구)
제39대
오쿠다 미키오
나가스에 에이이치
타케무라 유키오
이부키 분메이
타케우치 카츠히코

제40대
고쿠타 케이지
마에하라 세이지
이부키 분메이
타케우치 유즈루
오쿠다 미키오

선거제도 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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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huugiin_logo.png 일본 중의원 (교토 2구)
제41대
오쿠다 미키오

제42~49대
마에하라 세이지


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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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제12·13대 국토교통대신
일본국 제139대 외무대신
교육무상화를 실현하는 모임 대표
마에하라 세이지
前原誠司 | Maehara Seiji


파일:前原誠司.png

출생
1962년 4월 30일 (61세)
교토부 교토시 사쿄구
현직
제49대 중의원 의원
교육무상화를 실현하는 모임 대표
재임기간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방재)
2009년 9월 16일 - 2010년 1월 12일
제12·13대 국토교통대신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오키나와 및 북방영토 대책)
2009년 9월 16일 - 2010년 9월 17일
제139대 외무대신
2010년 9월 17일 - 2011년 3월 7일
내각부 특명담당대신[분야]
2012년 10월 1일 - 2012년 12월 26일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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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176cm
학력
교토교육대학 부속 중학교 (졸업)
교토교육대학 부속 고등학교 (졸업)
교토대학 (법학 / 학사)
정당
( )
파벌
료운카이 (회장)
지역구
(구) 교토 1구 → 긴키 권역 비례대표 → 교토 2구
의원 선수
10 (중)
의원 대수
40[1], 41[2], 42, 43, 44, 45, 46, 47, 48, 49
약력
교토부의원
신당 사키가케 원내부간사
중의원 의원 (제40대 / 舊 교토부 제1구)
중의원 의원 (제41대 / 비례 긴키 블럭)
민주당 5대 대표
내각부 특명담당대신[6]
제12·13대 국토교통대신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 / 간 내각)
제139대 외무대신 (간 내각[7])
국가전략담당대신 (노다 제3차 개조내각)
민주당 정책조사회장
민진당 3대 대표
국민민주당 대표대행
국민민주당 제2대 선거대책위원장
국민민주당 대표대행
교육무상화를 실현하는 모임 대표


1. 개요
2. 활동
2.1. 활동 초기
2.2. 2005년 - 2017년
2.3. 민진당 분당 이후
3. 료운카이(凌雲会)
4. 정치적 입장
5. 기타
6. 소속 정당
7. 선거 이력
8.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일본의 정치인.

민주당 대표 및 국토교통대신, 외무대신, 국가전략담당대신을 지내며 한때 간 내각에서 수차례 차기 총리 여론조사 1위를 했을 정도로 일본 야권의 거물 정치인이었으나 민진당 대표 시절 2017년 9월 민진당 분열사태를 시작으로 2023년 국민민주당 대표 선거에서 패배해 몰락한 상태다. 중국 위협론을 의식하는 평화헌법 개헌론자이며, 정치 파벌인 료운카이(凌雲会)를 이끌고 있다가, 2023년 11월 30일 국민민주당을 탈당했다.


2. 활동[편집]


교토대학을 졸업하고 1987년 마쓰시타 정경숙(松下政経塾) 8기생으로 합격했다.[1] 1991년 정경숙 졸업 후, 교토부의회 의원 선거에 입후보해서 당선된다.


2.1. 활동 초기[편집]


1993년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일본신당 후보로 (구) 교토부 제1구에 처음 중의원 의원에 2위로 당선되었는데[2], 일본신당의 호소카와 1인 독재체제를 강하게 비판하다가, 1994년 5월 20일 에다노 유키오, 아라이 사토시, 타카미 유이치 3인과 함께 일본신당을 탈당해 "민주의 바람(民主の風)"이란 원내교섭단체를 만들어 신당 사키가케와 함께 한다.

두달 후 1994년 7월 5일 신당 사키가케에 입당해 간 나오토 당시 정무조사회장 아래 원내부간사(국회대책부위원장)을 맡는다. 이후 1996년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직전 구 민주당, 1998년 민주당의 창당에 참가한다.

제41회 중원선에서 구 민주당 소속으로 교토 2구에 출마하지만 자유민주당 소속 오쿠다 미키오[4]에게 패배하고 석패율 비례대표로 당선된다. 이후 오쿠다의 제42회 중원선 불출마 및 정계 은퇴 이후 대신 출마한 자민당 야마모토 나오히코 후보를 꺾고 1위로 당선되었다. 이후 민주당이 부진한 44, 46, 47회 중원선, 48회 중원선에서도 1위로 당선된 것을 보면 지역구 관리를 굉장히 잘 하는 것 같다.


2.2. 2005년 - 2017년[편집]


2005년 민주당이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참패한 뒤 오카다 가쓰야 대표가 사퇴하자, 만 43세의 젊은 나이에 민주당 대표가 되었다. 하지만 치바 2구 나가타 히사야스 의원의 허위폭로에 대한 책임을 지고 1년도 안되어 대표직을 사퇴했다.

2009년~2012년 민주당 정권 3년 동안[5] 국토교통대신,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국가전략담당대신, 외무대신을 지냈다.

2011년 3월 재일교포 한국인으로부터 25만 엔(원화 환산시 약 230만 원)의 정치자금을 받았던 것이 드러나 외무대신 직을 사임했었다.

2011년 여름에는 다른 파벌 소속 노다 요시히코를 지원해서 총리로 올리는데 공헌했지만, 2012년 가을에는 노다의 사퇴를 압박하기도 했었다.

2011년 11월부터 료운카이(凌雲会)라는 당내 파벌의 회장으로 취임해서 계속 파벌을 이끌고 있다. 파벌의 성향은 중도 ~ 중도우파 정도[6]다.

마에하라 세이지는 2015년 11월초에는 민주당을 해산하고 유신당과 합당하자는 의견을 내놓았었는데 # 유신당이 맥을 못추고 오사카 유신회가 오사카 선거이후 부상하자 오사카 유신회와 연대를 모색중이다. 만약 그가 파벌 구성원들을 이끌고 탈당한다면 민주당에게 중도표 일부이탈이란 큰 피해를 주게된다. 하지만 그의 의사대로 민주당이 유신당과 합당해 민진당을 창당함에 따라 탈당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2016년 7월 제24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를 앞두고, 마에하라는 2015년 11월 창당한 개헌파 우익정당 오사카 유신회와 선거제휴를 하려는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물론 이러한 움직임은 당 주류의 방침과 어긋난다. 그리고 렌호, 다마키 유이치로 등과 대표 경선을 치뤘으나 패배한다.

2017년 9월 새로운 민진당의 대표에 선출되었다.

대표 취임 직후부터 기존에 있었던 야당연합을 파기하고 유신회와의 연대를 모색하고 있는 중이다. 그가 당내에 보수 성향이었던지라 다른 당보다도 공산당과의 연대가 아무래도 껄끄러웠던 듯하다. 이에 대해 전통적인 야당 성향의 유권자들은 유신회자민당 2중대로 여기고 있고, 또한 지금까지 의석 확보 및 지자체장 선거 승리를 기존 야당 연합의 연대로 인해서 이겼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민진당은 실력도 없으면서 주제파악도 못한다'고 반발하는 중이다.

2017년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희망의 당에 선거 승리를 위해서 흡수통합 당하는 형식으로 합당을 결정했다. 그의 이런 정치적 결단은 선거 결과에 따라서 평이 갈리겠지만 전권을 잡은 고이케 유리코가 당내 리버럴 성향의 의원들에게 무자비한 공천학살을 하자, 구 민진당의 핵심 지지층이었던 리버럴 성향 시민들에게 원수와 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7]

그리고 총선거가 끝나고 여당의 개헌선 도달 압승이라는 결과가 도출된 지금 마에하라는 야권의 역적이 되었다. 연립 여당만으로도 개헌이 가능해진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야권에서 표가 갈렸기 때문이다.[8][9] 마에하라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고이케 지사에게 백기 투항하는 바람에 그녀가 입헌민주당에 자객을 보내는 등의 야권 분열을 일으켰고 이걸 가능하게 만든 마에하라는 정치적 책임을 피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고이케는 전국 조직이 없고 선거는 갑작스럽게 열리기로 결정되어서 사실 그녀 자력으로는 야권 분열을 시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상황이었다.

한편으로는 2012년에 민주당을 대대적으로 집단 탈당해 노다 총리가 조기 총선을 열 수밖에 없어 야권을 패망하게 한 오자와 이치로의 뒤를 따라갈 가능성이 이야기 되고 있다. 카미카제 총선 이후에 오자와는 두 번 다시 메이저 정당에 가입할 수 없었다. 마에하라는 지역구의 지지는 탄탄하니 평생 무소속 중의원을 할거라고 조롱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선거가 끝난 이후 판세 분석이 어느정도 이루어지자 민진당의 전현직 의원들과 지지자들은 이게 다 마에하라 때문이다라고 연호하고 있는 상황. 그가 이번 정치적 모험을 한 이유에는 공산당의 안보 성향에 대해 반대 입장이였기 때문. 이후 산케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공산당에 혼을 팔지는 않았다."라면서 미일안보조약을 반대하는 일본 공산당과의 연대는 대단히 잘못된 것이라며 자신의 결정을 정당화했다.

선거가 끝나고 그는 희망의 당에 입당하기로 결심을 한 듯하다. 현재 그의 입장상 희망의 당이 존속해주기를 바랄 수 밖에 없는 상황. 희망의 당이 소멸해서 입헌민주당으로 야당 세력이 결집할 경우, 입헌민주당이 그를 받아줄 리가 없기 때문에.

이번 선거에서 본인은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총선에서 살아남았지만, 선거에서 반아베-호헌 성향의 야당 지지층의 민심이 에다노 유키오입헌민주당에 힘을 실어줬음이 확인됨에 따라 정치적 입지가 상당히 곤란하게 됐다. 당장 민진당 당 대표에서도 축출당하게 생긴 상황. 결국 2017년 10월 23일 미명에 기자회견을 열어, 참의원과 지방조직 처리 문제를 결론 짓고 난 후에 물러나겠다고 표명하였고 결국 일주일 후인 10월 30일 민진당 대표직 사임을 표명했다. 그리고 2일 민진당에 탈당계를 제출하고 6일에는 희망의 당에 입당원서를 제출해서 14일에 승인되어 현재는 희망의 당 중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3. 민진당 분당 이후[편집]


그러나 2018년 5월 7일 오쓰카 고헤이 대표와 다마키 유이치로 대표의 견의로 민진당과 희망의 당이 국민민주당으로 합당하여, 국민민주당 소속이 되었다.

2020년 6월에 일본유신회와 스터디 그룹을 만들었다.# 또한 2020년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일본유신회가 지지하는 오노 다이스케 후보를 지지했다.

2020년 8월 15일, 입헌민주당국민민주당의 합당을 놓고 국민민주당 내 분당 논의가 계속되자 자신은 합류하지 않고 당에 잔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본인이 밝힌 가장 큰 이유는 입헌민주당과 선거 협력 중인 공산당의 존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고 한다.

2021년 10월 31일 열린 49회 총선에서도 무난히 당선에 성공했다. 그리고 12월부터 선거대책위원장을 겸임한다.

2022년 들어 당대표인 다마키 유이치로와 갈등하고 있는데, 일본유신회와의 야권 연대 강화를 원하는 마에하라와 다르게 다마키 측에서는 자민-공명 연립 여당과의 연대를 강화하려하고 있어 노선 차가 크기 때문이다.

2022년 7월로 예정된 제26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는 교토부 선거구 일본유신회 후보인 구스이 유코를 추천하고 입헌민주당후쿠야마 데쓰로 전 간사장을 낙선시키기 위해 주력했으나, 결국 후쿠야마 전 간사장이 2위로 당선되어 살아남으면서 또 한번 패자가 되었다. 또다시 야권 분열의 원흉이 되었다는 비판은 덤. 이걸로 당의 실권자로 활동해오던 본인의 입지에 치명상을 입었다는 평이 다수이다.

2022년 7월 28일,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본인 말로는 여름 감기 정도의 증상이라고 한다.#

8월 31일, 양원의원총회에서 신바 가즈야 간사장이 선거대책위원장을 겸직하게 되면서 물러나게 되었다.

2023년 8월 2일 다마키 유이치로 대표에 맞서 9월에 있을 대표 선거에 정식으로 출마를 선언하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기자회견에서 "자민당에게 확실히 대치하는 강한 야당이 필요하다. 非자민·非공산의 골조로 야당 결집을 진행시켜 정권 교체의 길을 마련하고 싶다."라고 밝히면서, 동시에 "자민당의 보완 세력이 되지 않겠다, 자민당을 이롭게 하는 것은 하지 않는다."고 말해 자민당과의 대결 및 다마키 대표의 노선을 비판했다.#

2023년 9월 2일, 대표 선거에서 총 111점 중 31점을 획득하며 낙선했다. 패배 가능성이 높다는 평은 받았지만 예상을 벗어난 범위의 참패라 정치인으로서의 내상이 적지 않을듯하다.

일단 다마키 대표의 신 지도부에서도 큰 골격을 유지하기로함에 따라 대표대행 직을 연임하기로 했다.

2023년 11월 24일 교토신문에서 추경 반대를 이유로 탈당을 고려한다는 기사가 올라왔으나,# 본인이 트위터에서 직접 부정했다.## 그러나 11월 30일 마에하라가 탈당 신고서를 제출하고 신당을 창당하려한다는 사실이 알려져 탈당설이 기정사실화되었다.###

이후 자신을 따라 탈당할 약 4명의 의원[10]을 모아 교육무상화를 실현하는 모임(教育無償化を実現する会)이라는 신당을 창당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11] 이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유신회 측에서 완전 교육 무상화가 일본 전국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같이 스크럼을 짜자며 협력 의사를 밝혔다.

이때문에 일본유신회 입당을 위한 중간 단계로 탈당 및 신당 창당을 선택한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모양새가 좀 웃기게 된 점은 탈당의 이유로 다마키 유이치로 국민민주당 대표가 기시다 내각의 보정예산안에 당론 찬성한 것이 주로 언급되고 있는데, 유신회 역시 그 예산안에 당론으로 찬성했다는 것이다.

다만 입헌민주당 중심의 야권연대 탈퇴 이후부터 자공정권이나 일본유신회와 관련된 연대 문제 등으로 인해 다마키 대표와 여러 차례 갈등이 있었고,[12] 이로 인해 국민민주당이 다마키계와 마에하라계로 양분되었기 때문에 보정예산안 외의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탈당했을 수도 있다.

탈당신고 이후 비자민·비공산 야권제휴를 강조하면서 유신회의 교육무상화 관련 연대 제휴에 긍정적인 의사를 내비쳤다.

12월 13일, 국민민주당 지도부에서 탈당 신고서를 수리하지 않고 신당에 동조한 4인의 의원에 대해 제명 처분을 내렸다.#


3. 료운카이(凌雲会)[편집]


료운카이(凌雲会)는 원래 센고쿠 요시토내각관방장관를 중심으로, 지금은 마에하라 세이지 前 외무대신을 중심으로 한 계파이다. 대체로 마쓰시타 정경숙 출신들과 신당 사키가케, 일본신당 출신의 신진, 중견급 의원들이 모인 계파다. 성향은 현실주의적인 외교를 주장하는데 중국과의 외교 문제에 있어서는 견제론을 취하는 입장이라 친중적인 성향인 오자와 그룹과는 차이가 있다. 정책적인 면에서는 대체로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띈다. 이런 탓에 생추어리쪽과는 으르렁거리는 편이다. 중요 인물로 마에하라 세이지 외에 에다노 유키오 등이 있다. 다만 현재 에다노는 입헌민주당을 창당하면서 마에하라와 결별했다.

2015년 11월 현재 파벌 소속 의원은 중의원 13명, 참의원 4명이다. 파벌 소속 참의원중 2019년까지 임기가 보장되는 의원은 1명이다. 파벌 소속 참의원 4명은 대체로 호헌파다. 다만 파벌 소속 참의원 오가와 가쓰야(小川勝也)의 경우 기본적으로는 호헌파이긴 하지만, 일본의 핵무장에 대해서는 "미래에 검토해야 한다"라며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중의원에서는 아즈미 준(安住淳), 이즈미 겐타(泉健太), 후루카와 모토히사(古川元久), 와타나베 슈(渡辺周), 다마키 유이치로(玉木雄一郞), 야마노이 가즈노리(山井和則), 가미야마 요스케(神山洋介), 기이 다카시(城井崇) 8명이 개헌파다. 마에하라 본인도 포함하면 파벌 소속 중의원 9석이 개헌파인 것이다. 2021년 현재 아즈미, 이즈미, 와타나베, 야마노이, 가미야마, 기이 의원은 입헌민주당으로 이당해 마에하라와 결별했다.


4. 정치적 입장[편집]


아사히 신문 · 도쿄대 다니구치 연구실 공동 조사
2021년 중의원 선거 후보자 정보 - 마에하라 세이지

이슈
질문
답변
개헌
헌법 개정
<colcolor#000> 찬성[13]

정부
사회복지 등 정부의 서비스가 나빠져도 예산이 들지 않는 작은 정부가 더 낫다.
조금 반대
일자리 확충
공공 사업을 통한 일자리 확충은 필요하다.
중립
소비세 1
장기적으로 볼 때 소비세율은 10%보다 높아야 한다.
중립
소비세 2
한시적이거나 영구적으로 소비세율을 낮춰야 한다.
중립
무상교육
유치원·탁아소부터 대학까지의 교육을 무상화해야 한다.
조금 찬성
재정 지출
당장은 재정 재건을 위한 세출의 억제보다는 경기 부양을 위한 재정 투입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조금 찬성
격차 해소
A: 사회적 격차가 다소 있더라도 경제 경쟁력 향상을 우선해야 한다.
B: 경제 경쟁력을 다소 희생하더라도 격차 시정을 우선해야 한다.
조금 B
제정 적자
A: 국채는 안정적으로 소화되고 있어 재정 적자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B: 재정적자는 위기 수준이기 때문에, 국채 발행을 억제해야 한다.
중립
부자 증세
소득이나 자산이 많은 사람에 대한 과세를 강화해야 한다.
조금 찬성
법인세 증세
기업들이 내는 법인세율을 인상해야 한다.
중립
산업
A. 국내 산업을 보호해야 한다.
B: 무역과 투자의 자유화를 추진해야 한다.
중립

후쿠시마 오염수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처리수의 해양 방출은 어쩔 수 없다.
중립
치안·인권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개인 정보 보호 및 개인의 권리가 제한되는 것은 당연하다.
중립
동성혼
동성간의 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중립
동성애
LGBT 등 성 소수자를 둘러싼 '이해 증진' 법안을 조속히 통과시켜야 한다.
중립
피선거 연령
피선거권을 얻을 수 있는 연령을 인하해야 한다.
조금 찬성
외국인 노동
외국인 노동자의 수용을 추진해야 한다.
조금 찬성
야스쿠니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해야 한다.
반대
원전 재가동
원자력 규제위원회의 심사를 통과 한 원자력 발전소는 운전을 재개해야 한다.
조금 반대
탈원전
A: 지금 바로 원자력 발전을 폐지해야 한다.
B: 앞으로도 원자력 발전을 에너지 원의 하나로 유지해야 한다.
중립
부부별성
부부가 원하는 경우, 결혼 후에도 부부가 각각 혼전 성을 유지하는 것을 법률로서 인정해야 한다.
조금 찬성
가족관
A: 부부와 여러 아이들이 갖추어져 있는 형태가 가족의 기본이다.
B: 한부모 가정이나 사실혼 등 가족의 형태는 다양한 것이 좋다.
조금 B

핵개발
비핵 3원칙[14] 을 견지해야 한다.
찬성
국방
일본의 방위력은 더 강화해야 한다.
조금 찬성
선제 공격
타국으로부터의 공격이 예상되는 경우 선제 공격도 주저해서는 안 된다.
조금 반대
대북관계
북한에 대해 대화보다 압력을 우선해야 한다.
중립
후텐마 기지
오키나와현 후텐마 기지의 헤노코 매립지 이전은 부득이한 일이다.
중립
미일안보조약
A: 위기 때 미국과의 협력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미일 안보조약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
B: 일본과 관계없는 전쟁에 말려들지 않도록 미일 안보조약 강화에 신중해야 한다.
조금 A
중국 위협론
A: 중국은 일본에 위협이 된다.
B:일본에 있어서 중국은 파트너이다.
중립

참의원 선거
A: 한 표 격차 시정을 위해서도 참의원 선거구의 합구는 허용돼야 한다.
B: 참의원 선거구의 합구를 해소하기 위해서도 일정 범위 내의 한 표 격차는 허용되어야 한다.
조금 B

코로나19 대책
급부금과 조성금의 확충, 치료 체제 확충, 치료약 및 백신 개발.확보

'조금'의 답변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자면(どちらかと言えば)'이며 '중립'은 '어느 쪽도 아니다(どちらとも言えない)'이다.
일본 정계에서 보수자유주의 비슷한 포지션이지만, 정작 평화헌법의 개정 의견을 피력한 바 있고 집단적 자위권 행사도 주장했었다. 중국위협론도 그의 지론이다. 외국인 참정권에 대해서는 찬성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국론이 분열되어 있고 위헌이라는 논란도 있다."라면서 법안 제출에는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이후 안보법을 무효화시키자는 민주당 내의 의견에 대해서 "이미 통과된 법을 무효화시키긴 어렵다" 라면서 사실상 안보법 반대에 딴죽를 걸기도 했다.

경제적으로는 재정 지출에 신중한 모습을 보이는 긴축 재정파이다.

한국 관련해선, 민주당 시절부터 언론 기사를 통해 노출된 바로는 친한 성향의 인물로 분류된다. 동네에서 알고 지내던 재일 한인 아주머니가 있었다고 한다. 위에서 나온 정치자금 수수 얘기도 이 아주머니와 관계가 있다.#


5. 기타[편집]


  • ||파일:마에하라세이지 근황올림픽.jpg||파일:마에하라 세이지 근황올림픽2.jpg||
    정치인 중에선 꽤 잘생긴 축에 드는 얼굴이었으나, 2010년대 들어 부침을 많이 겪어서인지 이후부턴 노화가 꽤 진행된 상태다.



    • 일본 정계에서는 꽤 유명한 철덕이며 실력도 상당한 수준이라고 한다. 일단 프로필부터 SL사진촬영 및 관련 수집이라고 언급하고 있을 정도인데[15], 토리테츠(撮り鉄)로서의 실력도 수준급이라 철도 잡지에 사진이 실리거나 개인 사진전을 열기도 한다. 특히, 증기기관차(SL)[16]에 대한 관심이 남달라서 같이 활동하는 철도 전문 잡지사의 편집장도 그의 지식력과 사진 실력에 놀랄 정도라고 한다. 국토교통대신 시절 지치부 철도를 일부러 시찰한 일화는 유명할 정도. 이후에도 간간히 철도를 주제로 하는 방송에 출연하거나 같은 덕후인 이시바 시게루[17]와 함께 버라이어티 방송에 출연하기도 한다.


    6.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무소속|
    무소속
    ]]

    1991 - 1992
    정계 입문


    1992 - 1994
    입당

    [[무소속|
    무소속
    ]]

    (민주의 바람)
    1994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1994 - 1996
    입당

    [[무소속|
    무소속
    ]]

    1996
    민주당 창당을 위한 탈당


    1996 - 1998
    창당


    1998 - 2016
    합당[18]


    2016 - 2017
    당명 변경

    [[무소속|
    무소속
    ]]

    2017
    희망의 당 합류를 위한 탈당


    2017 - 2018
    입당


    2018 - 2020
    합당[19]

    [[무소속|
    무소속
    ]]

    2020
    정당 해산


    2020 - 2023
    창당


    (
    )
    2023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신당 창당

    [[무소속|
    무소속
    ]]

    (
    )
    2023 -
    신당 창당으로 인한 제명


7.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3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구) 교토부 제1구


65,182 (17.0%)
당선 (2위)
초선[20][21]
1996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교토부 제2구

31,257 (21.23%)
당선 (3위)[A]
재선
2000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52,077 (33.46%)
당선 (1위)
3선
2003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73,934 (49.73%)
4선
2005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73,795 (42.79%)
5선
2009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01,151 (57.52%)
6선
2012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72,170 (49.35%)
7선
2014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66,227 (50.44%)
8선
2017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22]
65,480 (48.71%)
9선
2021
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23]
72,516 (48.89%)
10선


8. 둘러보기[편집]










[분야] 경제재정정책, 과학기술정책, 원자력행정, 우주정책[1] 이때 정경숙에 합격한 8기 동기생이 나중에 외무대신, 내각부 특명담당대신을 역임한 겐바 고이치로인데, 1993년 제40대 중원선에서 중의원 의원에 첫 당선된 동기이다. 이 외에도 노다 요시히코, 다카이치 사나에, 이토 다쓰야 등이 제40대 중의원 의원으로 국회에서 활동하였지만 이 3명은 한번씩 낙선해서 9선이지만 마에하라와 겐바는 완전 낙선한 적이 없어서 10선이다.[2] 당시 1등으로 당선된 의원이 일본공산당 소속 고쿠타 케이지로 지금도 긴키 권역 비례대표 중의원 의원 및 일본공산당 국회대책위원장으로 활동중이다.[3]문부과학대신.[4] 제1차 하시모토 내각에서 문부대신[3]을 맡았으며, 2018년 별세했다.[5]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 간 내각, 간 제1차 개조내각, 간 제2차 개조내각, 노다 제3차 개조내각[6] 센고쿠 요시토 시절에는 빅 텐트 파벌의 성격이 강했으나, 마에하라가 회장이 된 이후에는 확실히 우경화되었다.[7] 유세 현장에서 '거짓말쟁이','꺼저라','배신자'등의 야유가 만무하고, 선거 중에 그가 연 민진당의 정책 포럼에서는 민진당 장례식장이라고 시민들이 항의하고 있다. [8] 이것은 민공 연대가 성사되어 이긴 부분과 분열되어서 진 상반되는 케이스가 뚜렷히 존재한다. 입헌민주당이 지역구에서 승리한 선거구 중 당선자가 많은 도쿄(4곳)-가나가와(3곳)-홋카이도(3곳)의 모든 선거구에서 공산당이 야권 연대를 위해 자발적으로 후보를 내렸다. 특히 도쿄-가나가와에서는 도쿄 7구를 제외하고 공산당이 후보를 냈으면 7 개구 중 6 개구는 전멸한다. 1~3% 차이의 선거구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각 자민당이 승리한 지역구를 자세히 살펴보면 '야권연대가 이루어졌다면' 이라는 생각이 드는 지역구가 상당하다. 단순히 연대한다고 모든 지지율 합산되는 것은 아니지만 자민당이 승리한 지역구 중 접전지가 제법 많았기 때문에 야권 분열의 상황이 커보인다.[9] 선거를 이기고 나서 시행한 어느 인터뷰에 노다 세이코 총무대신이 이번 선거는 '절대 평가가 아닌 상대평가. (야당이) 분열해준 덕에 의석을 지켰다'고 발언 했다.[10] 가다 유키코, 도쿠나가 히사시, 사이토 알렉스, 스즈키 아츠시[11] 부대표는 가다 유키코 전 시가현지사, 간사장은 도쿠나가 히사시 중의원 의원이 맡는다.[12] 다마키는 자공정권에 협력하자는 '친여권 행보', 마에하라는 일본유신회와 연대하자는 '야권연대'를 주장하고 있다.[13] 자위대 보유, 교육의 내실화를 위한 환경 정비 실시 내용 명기, 지방 공공 단체 권한 강화, 긴급사태 조항 신설과 관련한 부분의 개헌을 찬성했다.[14] '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15] 바로 위의 2장의 사진을 보면, 의원실 책상 위에 증기기관차의 명판들이 몇 개 전시되어 있다.[16] 일본어 위키백과 설명으론 증기기관차를 가리키는 영단어인 Steam Locomotive에서 앞글자를 딴 SL이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출처.[17] 다만 이시바 시게루의 경우 철도 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둔 덕후이며. 철도에서는 타는 것을 중점으로 두는 노리테츠(乗り鉄) 쪽에 가깝다.[18] 민정당, 민주개혁연합, 신당우애와 신설 합당[19] 민진당과 신설 합당[20]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21] 1994년 5월 20일 탈당, 1994년 7월 5일 입당. 1996년 8월 30일 탈당, 동년 9월 28일 창당.[A] 석패율제 당선[22] 당선 당시에는 민진당 당적을 가진 무소속 의원이었으나, 이후 희망의 당을 거쳐 국민민주당 소속이 됨.[23] 2023년 11월 30일 국민민주당 탈당, 동일 교육무상화를 실현하는 모임 창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