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 타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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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미국의 전 복싱 선수이다.[3] 1980년대와 1990년대에 활동했던 복싱 헤비급 슈퍼스타로, 짧지만 역사상 가장 센세이셔널한 전성기를 보내며 무하마드 알리와 함께 복싱의 아이콘이 되었다.[4]Everybody has a plan until they get punched in the mouth.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처맞기 전까진.
2. 생애[편집]
2.1. 출생과 성장[편집]
뉴욕 브루클린의 브라운스빌에서 태어났다. 2살 때 아버지가 집을 떠난 후,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며 강도짓을 일삼는 등 폭력으로 얼룩진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소년원에 수감되기도 했다. 형과 나이프로 찌르며 놀았을 정도라고 한다. 애초에 마이크 타이슨이 살던 지역이었던 브루클린 브라운스빌은 브루클린 내에서도 치안이 매우 좋지 않은 편이다. 게다가 타이슨의 유년 시절이 뉴욕 전체가 범죄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1960년대~1970년대임을 감안하면, 거의 컴튼을 연상시키는 수준의 생지옥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타이슨이 처음부터 비행청소년은 아니었다. 타이슨의 회고록이나 일대기를 다룬 뉴스 등을 봤을 때 아주 어린 시절에는 의외로 소심한 아이였다고 한다. 타이슨 본인도 율리우스라 이름 붙인 애완용 비둘기가 동네 불량아에게 죽기 전까진[5] 여자아이한테까지 맞고 다니던 소심한 아이였다고 회고한 바 있고, 본격적인 비행소년의 길로 빠져들게 된 것은 10살의 나이로 브루클린의 흑인 갱단인 졸리스톰퍼에 가입하고 나서부터라고 한다. 12살 때까지 체포된 횟수가 38번이었다고 한다.
더 화이팅에도 언급되는 이 비둘기 사건은 실화로, 10살일 때 도둑질한 돈 700달러로 새들을 사서 길렀는데 자기를 괴롭히던 불량아가 그 중 한 마리를 훔쳐 목을 잘라놓는 끔찍한 일을 저지르자 생애 최초로 싸움을 걸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불량아의 얼굴은 묵사발이 되었다. 그 후에 자신감을 얻은 타이슨은 자기가 불량배가 되어(...) 온갖 비행을 저지르게 된다.
2.2. 핵주먹 타이슨[편집]
타이슨의 목 둘레는 무려 약 52cm였다.[6]
소년원 복싱 트레이너 바비 스튜어트에 의해 명 트레이너 커스 다마토와의 만남으로 마음을 고쳐먹고 복싱을 시작했다.[7]
상상을 초월하는 체력과 맷집, 트레이드 마크가 된 체중 이동을 통한 강렬한 초스피드 연타로 1985년 데뷔 이후 연전연승을 거듭, 결국 1986년 11월 26일 약관 20세의 나이로 트레버 버빅을 쓰러뜨리고 WBC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다. 덕분에 당시 국내에선 핵주먹이란 별명으로 불렸다. 미국 링 네임은 아이언(Iron).
프로 데뷔 이후 무려 37연승을 거뒀으며 19전 연속 KO승을 따낼 정도의 엄청난 괴물이었다. 첫 1패를 38번째 경기에서 당할 정도였으니 그 위세가 장난이 아니었다.
2.3. 몰락[편집]
하지만 빠른 성공만큼 몰락도 급히 닥쳐왔다. 트레버 버빅과의 타이틀 매치를 앞두고 양아버지이던 커스 다마토가 사망한다. 소년원에서 처음 만나 복싱을 가르치고 출소 후에는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복싱 뿐 아니라 글과 예절 등을 가르치면서 타이슨을 머리 빈 복서가 아닌 훌륭한 인간으로 성장시키려 했던 아버지 이상의 존재였다.
실제로 커스 다마토는 타이슨이 16살 때 어머니를 잃자, 그를 양자로 받아들이면서 이끌어주었고 당시 타이슨을 유일하게 컨트롤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타이슨의 어머니는 커스 다마토가 타이슨을 돌보면 사람 구실은 하고 살 거란 희망을 가지고 타이슨을 맡겼으며, 타이슨 역시 자신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가족을 버린 건달인 친부보다 커스 다마토를 친아버지처럼 따랐다. 그리고 타이슨 어머니의 희망은 제대로 이루어지게 되었고 타이슨이 최소한 사람 구실은 하고 살 거란 걸 넘어서 영화, 방송에 진출하기까지 하는 업적을 이루게 된다.
멘토가 인생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사람이라면 커스 다마토는 손을 잡고 함께 걸어주었던 존재였다. 타이슨에게 있어서 커스 다마토는 단순히 트레이너나 멘토 정도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였다. 당시의 타이슨은 아버지를 잃었다고 크게 상심했다. 그리고 너무 슬픈 나머지 커스 다마토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했고 그 당시 그러지 못한 자신을 겁쟁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그런 커스 다마토가 사망하자,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여 어리숙했던 그의 돈을 노리고 사기꾼들이 접근했다. 커스 다마토가 살아 있었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당시 타이슨에게는 그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 줄 사람이 없었다. 주위에 아부꾼과 한 탕 해먹으려던 인물들만 가득 차게 되자 타이슨은 점점 타락하여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 생전 커스 다마토가 타이슨의 상처입은 자아와 두려움이 많은 성격을 파악하고 격려와 훈육을 통해 인격적인 성장 또한 이루어 준 데 반해, 커스 사후의 멘토나 프로모터들은 강력한 복서로 성장한 타이슨에게 "남자라면 생각이고 뭐고 꼴리는 대로 해야 한다. 너는 상남자다."같은 막나가는 식의 조언을 했다.
유년기의 상처가 깊었던 타이슨에게 이런 조언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고 자연스레 대중의 이미지도 나빠졌다. 그래도 커스 다마토 사후 26연승을 거두기는 하지만, 1988년 전반기에 커스 다마토 다음으로 타이슨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던 제이콥스가 죽고, 제이콥스의 뒤를 이은 매니저와 세컨드 코치 캐빈 루니와의 연속된 불화 때문에 훈련을 제대로 못 하였으며, 이때부터 타이슨은 점점 추락하기 시작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김대환의 6부작 칼럼 참조. #
이러한 점을 알고 있는 복싱 팬들은 커스 다마토가 몇 년만 더 살았더라도 복싱의 역사가 달라졌을 거라며 아쉬워하고는 한다.[8] 게다가 코치는 아론 스노웰과 제이 브라이트였다. 이 둘은 타이슨의 코치였지만 정작 실제로 보이는 모습은 마치 타이슨의 훌륭한 부하였다.
그리고 1990년 2월 11일, 일본 도쿄돔에서 벌어진 WBC, WBA, IBF 헤비급 통합타이틀 전에서 당시 완전히 무명이던 버스터 더글러스(당시 30세)를 맞아 10회에 KO라는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다. 이 경기에 대해선 많은 논란이 있었는데 프로모터 돈 킹은 8라운드에 더글라스가 다운당했을 때 심판의 카운트가 너무 느렸다며 결과에 불복하였다[9] . 이에 IBF는 그대로 더글라스를 챔피언으로 인정하였고, WBC와 WBA는 결과를 보류하고 경기를 재검토하였으나 결국 더글라스의 승리를 인정하였다.[10] 이 패배로 그동안 37승 무패로 승승장구하던 타이슨의 경력에 금이 가기 시작했으며 권투 선수로서의 경력으로 보나 인생 전체로 보나 이 경기를 기점으로 몰락이 시작되었다.
실제로 무하마드 알리와 레이 레너드 같은 전설들을 만든 전설적인 트레이너 안젤로 던디는 다마토 사후 타이슨의 어깨 근육을 보면 연습량이 부족한 게 티가 난다고 언급했고, 크루저에서 헤비로 올라온 홀리필드가 타이슨을 이길 수 있단 말도 했었다.
참고로 제임스 더글러스는 8달 뒤인 90년 10월 25일, 홀리필드에게 3회만에 KO로 져서 타이슨을 이기고 차지한 챔피언 타이틀을 금세 잃어버렸다. 이 패배 여파로 그는 6년이나 권투를 쉬었는데 홀리필드와 대전료 밎 그동안 번 돈으로 놀고먹어 비만이 되었고 당뇨같은 온갖 병을 얻었다. 1996년에서야 다시 링에 복귀했지만 다시는 챔피언 타이틀을 얻지 못하고 1999년 은퇴했다.
2.4. 강간 사건[편집]
이때쯤 발생한 미스 블랙 아메리카 참가자 Desiree Washington(데지레 워싱턴, 당시 19세)을 호텔에서 강간한 혐의로 재판에서 유죄로 징역 6년을 선고받고 3년만에 가석방되어 감옥에서 3년간 살기도 했다.
재판에서도 타이슨은 범행을 부정하였고, 타이슨의 변호사는 호텔에서 나와 병원으로 찾아간 피해자를 진단한 응급실 의사의 진단서와 범행시간 이후 피해자의 행동들을 지적하며, 주장의 부당성을 주장하였다. 성폭행 이후 타이슨은 방송이나 미디어 매체에 다시 출연해서 다른 일은 모두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맞으나, 성폭행만큼은 절대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형을 살고 나온 후 1995년 재기에 나섰고, 1996년 9월 6일 프랭크 브루노를 TKO로 제압하며 WBA 챔피언 자리를 다시 되찾는다. 브루스 셀던과의 1차 방어전도 TKO로 이긴다. 그러나 2차 방어전에서 에반더 홀리필드에게 TKO로 패하며 타이틀을 내주고 기세가 확 꺾이게 된다.
그리고 1997년 홀리필드와 리매치를 한다.
2.5. 핵이빨 사건[편집]
이 리매치에서 권투 역사에 길이 남을, 홀리필드의 귀를 물어뜯는 대형 사고를 일으키고 핵이빨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게 된다.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홀리필드의 귓바퀴 일부가 잘려나갔다.
이 핵이빨 사건은 보통 타이슨의 아무런 이유가 없는 정신나간 돌발행동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홀리필드의 계속되는 고의적 헤드버팅이 발단이다. 물론, 치아로 물어뜯는 게 잘했다는 소리는 아니지만, 홀리필드가 정말 더럽게 경기했다.잘 보면 헤드벗 말고도 로우 블로우에 은근슬쩍 니킥까지 시전한다. 게다가 심판도 수많은 헤드버팅을 무시하다가 막상 타이슨이 버팅을 하니까 바로 주의를 주는 등 편파판정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워낙 황당하고 충격적인 사건이라 Holyear vs Teethson 등의 온갖 패러디가 쏟아졌으며, 당시 타이슨을 닮은 모델이 권투 선수 차림으로 나와서 어느 특정 기업에서 만든 가방을 물어뜯는데 핵이빨에도 끄떡없다던 광고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애플 로고처럼 물어뜯긴 귀 모양의 초콜렛이 나온 것은 덤이다. 이런 이유로 타이슨에 대해 다른 것은 몰라도 이 핵이빨 사건만은 기억한다는 사람이 많다.
홀리필드에 대해서는 보통 귀 물어뜯긴 권투선수 정도로만 기억하지만, 복싱팬들은 홀리필드가 상당히 교묘하게 고의적 반칙을 저지르면서도 정치질을 발휘하여 심판들로부터 말도 안 되게 유리한 판정을 받는 걸로 악명 높은 선수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 사건에 대해서 타이슨이 프로답지 못했고 잘못한 것은 맞지만 홀리필드는 물어뜯길만 했다, 혹은 솔직히 홀리필드가 당한 게 꼬시다는 반응이 적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홀리필드와 싸웠던 조지 포먼마저도 살다살다 이렇게 더럽게 복싱하는 녀석은 첨봤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11]
2.6. 마지막 타이틀 도전과 은퇴[편집]
홀리필드에 2연패를 당하며 커리어에 크게 금이 간 타이슨은 약 1년 반 정도의 공백기를 가진 뒤 복귀하여 간간히 논타이틀 매치를 벌였고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
시간은 흘러 2002 월드컵이 한창이던 2002년 6월 8일, 당시 IBF-IBO-WBC 헤비급 통합 챔피언이자 또다른 동년배 헤비급 빅네임인 레녹스 루이스에게 도전할 기회를 갖게 되었지만 현격한 기량 차이를 보이다 8회에 KO패했다. 이 때는 이미 루이스도 타이슨도 30대 중후반으로 넘어가는 시기였기에 너무 늦게 매치가 성사된 데에 대한 아쉬움을 표하는 팬들도 있었다.[12][13]
레녹스 루이스전.
이듬해 클리포드 에티엔을 KO로 꺾으며 또다시 재기하나 싶더니 후속 경기가 뜸해졌다. 이후 2004년 7월 30일 대니 윌리엄스에게 KO패[14] , 그리고 2005년 6월 12일 케빈 맥브라이드에게 TKO패를 당한 것을 마지막으로 타이슨이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하고 링을 완전히 떠났다.
2.7. 은퇴 이후의 삶[편집]
2.7.1. 2000년대[편집]
성격 때문에 자신의 아내를 두들겨 패다가 결국 이혼을 당하면서 천문학적인 위자료를 지급한다거나, 재산을 그야말로 엄청나게 낭비하면서[15] 결국 2003년 파산신고했다. 복싱하면서 번 돈만 3억 달러, 즉 3000억원이 넘었다. 예금이 4억 달러였다고... 타이틀 획득 후 16년 만에 파산인 셈이니 단순계산으로 1년에 200억씩 펑펑 쓴 셈. 하지만 전처를 폭행한 점은 아직도 전혀 반성하지 않는데 '내 평생 최고의 펀치는 로빈[16] 에게 날린 바디 블로우'[17]#라고 하는 걸 보면 그 인생에 한 점 후회도 없는 듯하다.[18]
앨 고어는 그의 결혼 생활 동안 아내에게 헌신했다고 말합니다. 조지 W. 부시도 결혼 생활 동안 아내에게 헌신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다른 어떤 남자들도 하나같이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마이크 타이슨은 자신의 결혼 생활에 대하여 진실만을 말합니다.
난 내 부인과 삐-를 한 지 1년이 넘었어요. 내가 앤드류 골로타[19]
를 신경이나 쓸 것 같습니까? 내 애들도 한 달은 못 봤어요.(방청객: 왜요?)
네가 알 바 아니야, 이 흰둥이 놈아. 한 달은 못 봤다고
마이크 타이슨은 그의 부인과 섹스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건 당신들이 알 바가 아닙니다, 흰둥이 여러분.
마이크 타이슨을 대통령으로.
부시와 고어의 선거전이 한창일 당시 코미디언 크리스 락 쇼에 등장한 영상.
2.7.2. 딸의 사망[편집]
2009년 런닝머신에서 놀던 당시 4살이던 막내딸 엑소더스가 사고로 죽게 되었다. 이 사건은 타이슨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타이슨은 딸의 죽음을 크게 슬퍼했다. 수년이 흐른 후에 타이슨은 인생에서 가장 절망적인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딸의 죽음을 이야기했을 정도다. 어떻게 회복했냐는 질문에도 '회복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또한 딸이 본다면 기뻐할 만한 삶을 살기위해 노력할 뿐이라고 답했다.[20]
2.7.3. 2010년대[편집]
하지만 2010년대 부터는 딸의 죽음으로 충격도 받았고, 나이도 먹고 그래서인지 예전과는 달리 말썽을 잘 안 피우고 그나마 좀 사람답게 살면서 많은 팬들을 안도시키고 있다. 홀리필드와도 화해한 상태. 토크쇼에 같이 출연한 적이 있고, 홀리필드의 조미료 사업에 대해 서로 개드립을 날릴 정도로 친해졌다. "홀리필드가 만드는 조미료가 있다면 홀리필드 귀때기도 먹을 만했을 거다"라는 드립을 쳤고, 거기에 홀리필드가 먼저 "자기 귀때기 맛을 볼 테니 물어보라"고 개드립을 날렸다.
2010년 1월 12일(한국시각)일자 WWE RAW에 아들과 함께 특별 출연하였다. 자세한 것은 크리스 제리코 항목 참조.
외국의 동물 관련 프로에 출연해서 새 키우는 법을 강의하기도 했다.관련 사진 위에서 기재되어 있듯 타이슨이 인생 처음으로 대판 싸운 사고 자체가 평소에 타이슨을 괴롭히던 양아치가 당시 타이슨이 키우던 비둘기를 죽인 것부터 시작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복싱을 안할 땐 늘 새 키우기로 시간을 보냈는데 그 경력이 워낙 길어서 이 분야에선 준전문가 수준이라고 한다. 그런데 워낙 키우는 새가 많다 보니 소음 때문에 가끔 다른 주민들과 마찰이 생기기도 한다. 예상과는 달리 죄송합니다를 연발하고 양해해달라고 통사정한다고 한다.
2012년 갑작스레 스파이크 리 감독과 뉴욕 브로드웨이와 라스 베가스에서 자기 자신을 주제로 한 원맨쇼를 진행했다. 공연 직전 그의 극장 앞에서 배트맨 상영관에서와 같이 총기난사를 하겠다는 글이 타이슨의 트위터에 올라오기도 했지만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2013년 토니상 오프닝에 타이슨이 등장한 것도 이 때문.
토크쇼 등 쇼프로 단골 손님에 복싱 빅매치엔 빠지지 않고 관전하는 잘 나가는 셀러브리티다. 선수 시절 워낙 인기가 많았고 스토리가 있는 캐릭터에 언변, 예능감도 좋아서 여러모로 성공적인 방송 연예인의 삶을 살고 있다. 망가지는 역할도 주저하지 않고 복싱이랑 전혀 상관 없는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 더 보이스 등에도 게스트로 나오는 등 화제성은 여전히 현역이다. 많은 스포츠인들이 은퇴 이후 해당 스포츠 업계에 남거나 조용히 여생을 보내는 것과는 상반된 행보.
2015년부터 Hotboxin'이라는 개인 팟캐스트를 운영하고 있는데 유튜브 구독자가 벌써 200만명을 넘어섰다. #,다른 채널
2018년 캘리포니아 주가 오락용 대마초를 합법화하면서 대마초 농장에 투자했다.
홀리필드와 함께 풋락커 광고를 찍기도 했다. 잘려나간 귀를 돌려주면서 "내 입안에 남아있던 귀를 챙겨뒀어." 라고 화해를 신청하며 개드립을 하는 타이슨과 "내 귀잖아?" 라고 놀라면서 귀를 돌려받는 홀리필드가 압권이다.#
2.7.4. 2020년대 이후[편집]
2020년 5월 12일(현지시각) 인스타그램에 비디오를 올렸는데, 맹렬하게 복싱 트레이닝을 하고선 카메라를 쳐다보며 "I'm back."이라고 한다. 복싱에 다시 복귀를 준비하고 있음이 확실시되었고 자선경기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이번 경기는 전액 기부할 것이며 돈때문에 복귀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처음엔 에반더 홀리필드와 맞붙는 듯했으나 좀 더 거물급 선수라고 밝혔다. 대체 홀리필드보다 거물이면 누구인지 다들 궁금해하면서 별별 이름이 나왔는데, 현역 챔피언인 타이슨 퓨리까지도 언급되었다.[21]
2020년 5월 23일 열린 AEW의 더블 오어 나씽에 출연해 새로 공개된 AEW TNT 챔피언십 초대 챔피언 결정 토너먼트에서 우승한 코디에게 벨트를 수여하는 것으로 출연했다. 이후 다이너마이트에도 출연해 크리스 제리코와 2010년 이후 다시금 충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마침내 자선경기 상대가 결정됐다. 상대는 타이슨과 비슷한 나이인 로이 존스 주니어로 결정됐다. 2020년 11월 29일에 열린 해당 경기에는 스눕 독이 해설 위원으로 참가했으며, 경기 결과는 무승부. 그러나 타이슨의 나이가 50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이에 따른 피지컬 감소와는 별개로 날카롭게 튀어나오는 펀치나 위빙 테크닉을 보면 타이슨의 클래스는 어디 안 간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일부 언론에서는 이 경기에 대해 졸전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했으나 경기에 참가한 두 사람의 나이가 모두 50이 넘었다는 것과 해당 경기가 전액을 기부하는 자선 경기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꽤 무례한 표현을 사용했다고 봐도 무방할 듯.[22]
2022년 4월 21일 비행기 뒷좌석에서 취객 한명이 계속 조롱하며 시비를 걸자 참다못한 타이슨이 해당 취객을 두드려패고 비행기에서 하기했다.# 자리에 앉기 전까지 타이슨은 이 취객과 함께 사진을 찍을 정도로 밝은 분위기였으나, 취객이 타이슨한테 물병을 던지는 등 뒷좌석에서 계속 깐족거리며 도발하였고 결국 타이슨이 참지 못하고 일어나 그를 폭행한 것. 타이슨 측 대변인은 해당 취객이 만취 상태로 도발을 멈추지 않았으며 물병을 던지는 등 위해를 끼쳤다고 주장했다. 해당 취객은 이후 변호사를 선임하고 타이슨을 경찰에 신고했다고 한다.
취객 측 변호사는 순수한 팬심에 흥분한 것인데 타이슨이 과도한 대응을 했다며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하였으나, 이 취객은 이미 이전부터 워낙 크고 작은 사고를 너무 많이 치고 다니던 탓에 수 차례 전과가 생겨서 습관성 범죄자로 등재되기까지 한 인물이고, 사건의 내용이 담긴 영상이 인터넷에 공개되자 국내외를 막론하고 취객이 맞을 짓을 했다며 모두 타이슨을 옹호하고 있다. # 특히, 기내에서 난동을 피우는 것은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점에서 취객을 옹호하는 목소리는 거의 없는 편이다.[23] 결국 검사가 당시 정황을 참조하여 타이슨을 기소하지 않고 조용히 해당 사건을 종결하였다.#
3. 평가[편집]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견인했던 복싱 헤비급 역사상 최고의 슈퍼스타로 WBA, WBC, IBF 3대 세계 기구를 모두 석권했을 만큼 뛰어난 기량을 지닌 복서였다는 점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처럼 엄청난 인기와 명성에도 불구하고 복싱 매니아들 및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잘 쳐줘야 프로복싱 역대 TOP 50 끝자리에 들까말까하는 수준인데 이유는 전성기가 굉장히 짧았기 때문이다.
트레버 버빅을 제압하고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을 때가 약관 20세인데, 이후 순식간에 3대 기구를 석권하고 더글라스에게 패해서 타이틀을 잃은게 23살 때 일이다. 요컨대 평범한 복서들이 데뷔전을 치르고 있을 시기에 그는 세계 챔피언이 되었고, 그들이 경력을 쌓을 시기에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이러한 파멸적일 정도로 굴곡이 심한 선수 생활 때문에 팬들 사이에선 미완성 복서라는 인식이 강해서 만약 복서로서 완성되었다면 권투 역사가 바뀌었을 거라고들 얘기하지만 이미 다 지나간 이야기이다.
옛날 자료이기는 하지만, ESPN에서 뽑은 역대 최고의 복서 순위에서는 50위로 뽑혔다. 그 메이웨더가 48위이고 매니 파퀴아오는 순위에도 없으며 복싱 역사상 최고의 테크니션 중 한명으로 평가받는 슈거 레이 레너드가 12위, 역사상 최강의 미들급 챔피언 중 한명인 마빈 해글러가 35위이다.
사실 한국인들은 이름도 모르는 20세기 초중반 복서들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역사성을 고려한 보수적인 랭킹이긴 하다. 10위 이내를 보면 대중적으로 알려진 복서는 2위의 무하마드 알리, 6위 로베르토 두란, 더 파이팅 덕에 알려진 잭 뎀프시 정도가 끝이다. Top 10은 두란과 알리를 제외하면 모두 1960년대 이전에 활약했던 선수들이다.
아래 복싱 역사상 최고의 피지컬을 지녔다고 칭송받는[24] 로이 존스 주니어는 46위, 괴물 조지 포먼은 20위, 1위는 그 어느 매체든 거의 무조건 1위로 뽑는 슈거 레이 로빈슨이다 ESPN 랭킹 보기. 이름값 때문에 "겨우 50위?" 라는 반문을 하곤 하지만 당대 동급의 실력자였던 에반더 홀리필드, 레녹스 루이스에게 모두 패했고 자기 관리 실패로 전성기가 3년이 채 안 될 정도로 짧았던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첫 챔피언이 된 시기가 86년도이고, 더글라스에게 패한 때가 90년도이다. 데뷔에서부터 전성기로 잡으면 수감까진 6년이다.
헤비급 한정으로 보면 역대 10위권 정도에 포진되어 있다. 2017년 5월 링지에 올라왔던 조사에 따르면 30여명의 전문가들의 의견을 취합한 결과 역대 헤비급 9위에 올랐다. 이는 레녹스 루이스나 에반더 홀리필드보다 2단계 높은 수치[25] 로 상당히 의외의 결과인데, 레녹스 루이스 - 비탈리 클리츠코 - 블라디미르 클리츠코로 이어지는 아웃복싱 스타일로 헤비급 자체의 흥미가 떨어진 것에 대한 향수로 해석될 수도 있다.[26] 이 조사에서 그보다 위에 있는 선수들은 대부분이 전설과 같은 선수들인 데다가 절반 가까이가 1960년대 이전 선수들이기 때문에[27] 1980년대 이후로 한정하면 조지 포먼 정도만이 그의 위에 있는 셈이다.[28]
물론 그렇다고 절대 대단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역대 최고라고 불리기에 문제가 많다는 것이지, 최소한 WBA, WBC, IBF 헤비급 3대 세계 기구를 모두 통합할 정도의 실력은 보유하고 있었다. 그 오랜 복싱 역사 속에서 헤비급 선수들만 헤아려도 최소 수만 명은 나왔을 텐데 헤비급 한정으로도 10위권은 된다는 거고, 모든 체급으로 쳐도 100명 안에는 들어간다는 소리.
거기다 복서로서의 스타성 하나는 대단해서 복귀 후엔 90년대 당시 경기당 평균 대전료가 3,000만 달러가 넘었고 홀리필드전에선 한 경기 대전료가 5,000만 달러를 넘겼을 정도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흉폭한 카리스마와 화려한 경기 스타일은 물론이고 한국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말빨도 대단해서 당시 엄청난 팬과 안티들을 몰고 다녔다. 인터뷰에서 '공개 자위를 해도 메디슨 스퀘어 가든을 꽉 채울 수 있다'고 장담했을 정도.
아무튼 상기한 카리스마적, 문제아적 행보로 오스카 델라 호야와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가 등장하기 전까지 미국 복싱계 최고의 아이콘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가 링을 떠난 뒤 헤비급의 흥행력은 비탈리 클리츠코와 블라디미르 클리츠코라는 두 거성이 주도하는 유럽으로 완전히 넘어갔고, 동시에 멕시칸 복서들의 주 무대인 라이트, 웰터, 미들급 등 경중량급이 미국 복싱계 대세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짧은 전성기에도 불구하고 미국 헤비급 최후의 아이콘으로서 여전히 많은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29][30][31]
4. 파이팅 스타일[편집]
최대의 복싱 시장인 미국에서도 타이슨의 평가에 대해서는 논쟁이 일어난다. 다만 전성기 시절의 신체 능력과 기량만큼은 확실히 인간을 초월한 수준이었고 약물 중독과 수감으로 몰락하기 전까진 무적에 가까웠다는 것은 명확하며, 이로 인해 타이슨의 짧은 전성기를 아쉬워하는 팬들이 상당히 많다. 헤비급의 체중에 미들급의 스피드, 마치 망치를 휘두르는 듯 보이는 폭발적인 펀치력, 유연하고 안정적이면서도 빠른 체중이동은 어떤 노력으로도 얻을 수 없는 하늘이 내려준 타고난 재능의 영역이다. 신체의 탄력과 리듬감, 유연성 역시 엄청났다. 여기에 경기력을 받쳐주는 스타성과 쇼맨쉽, 미국 팬들의 지지를 받는 헤비급 복서라는 상품성 면에서도 압도적이었다. 체급 불문하고 타이슨 이후 수십년간 타이슨이 보여준 임팩트와 스타성에 근접한 후배 복서들은 오스카 델라 호야와 플로이드 메이웨더 정도이다.
결론적으로 역대 최강의 복서를 꼽을 때, 타이슨의 경력 전체가 언급되지는 않지만 타이슨의 전성기는 반드시 언급된다.[32]
마이크 타이슨은 헤비급 답지 않게 원투 펀치나 연타구사력이 경량급 엘리트복서보다도 더욱 부드러웠다.[33] 당연히 공격일변도도 아니며 방어와 회피도 완전히 갖춘 상태에서, 다른 신체능력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헤비급 복서들과 달리 영리하고도 맞지 않는 지능적인 복싱을 구사했다. 이미 15살에 커스 다마토가 "기술적으로는 더이상 가르칠 게 없다"고 말할 정도로 재능이 엄청났던 완전체 인파이터가 타이슨의 진면모. 타이슨은 일반적인 헤비급 선수들과는 근본적인 플레이 방식이 전혀 달랐는데, 허리와 등근육을 사용해 상체 전체를 좌우로 움직이며 뛰어난 동체시력으로 상대방의 잽과 공격을 모두 피해내는 슈퍼플레이는 전성기 그의 주특기였다. 전성기 기준으로 보면 완벽한 헤드슬립과 위빙으로 인해 타이슨에게 선타를 맞추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인파이터 답게 맷집도 뛰어난 편이었으며 엄청난 목근육과 그 둘레 덕분에 턱에 펀치 몇 방 맞는 정도로는 미동도 하지 않는 맷집을 지녔었지만,[34] 전성기 기준으로는 거의 맞지 않는 복싱을 구사하는 선수였다.
그를 상대한 대부분의 장신 헤비급 복서들은 당연히 타이슨보다 리치가 길다 보니 잽으로 찔러넣고 거리를 유지하면서 느긋하게 아웃복싱을 하려 하거나, 혹은 우월한 덩치를 바탕으로 힘으로 깔아 뭉개려고 했다. 그러나 타이슨은 종전의 스워머 인파이터와는 달리 멈춰서 잽을 보거나 막지 않고 경지에 오른 헤드슬립[35] 으로 그냥 잽을 흘려버린 뒤 들이대면서 원투를 치는 선수였기에 헤비급의 평범한 빅맨들은 리치차이가 남에도 타이슨의 무시무시한 스피드를 가진 파고들기에 오히려 선타를 내주고 연타 공격에 추풍낙엽처럼 완파당했다. 이러한 장점은 WBC 챔피언이었던 트레버 버빅과의 시합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타이슨이 거의 넘어지면 코 닿을 정도로 초단거리에서 주먹을 가볍게 피하던 모습은, 로프를 잡고 노가드 상태로 펀치를 죄다 피하고 상대를 농락하며 복싱 역대 최고의 동체시력을 가진자들 중 하나라 평가받는 바로 그 무하마드 알리와 비교될 정도이다.
빅맨들이 즐비한 헤비급에서 타이슨처럼 엄청나게 빠른 공격 스피드를 가진 경우는 정말 드물다. 다른 헤비급 복서보다 같은 시간에 두세 스텝은 더 밟을 정도니 미들급에서도 나오지 않는 공격 스피드를 가진 것으로, 천부적 재능의 영역이다. 거기다 작은 키에 비해 워낙 힘이 좋았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수준의 빠르고 유연한 체중이동이 가능했기에 좌우 모든 각도에서 펀치를 뿌리는데 그것이 엄청난 핸드스피드와 시너지를 내며 상대들은 채 반응하기 전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vs 토니 터커[36] 경기를 보면 터커와 타이슨이 잽싸움을 벌이는데, 타이슨의 잽이 터커에게 먼저 닿는다. 타이슨의 리치와 터커의 리치는 26cm가 차이난다. 그 정도로 독보적인 스피드 스타였으며, 이런 말도 안되는 수준의 핸드스피드로 인해 타이슨과 거리싸움을 한다는 것은 당시 대부분이 크고 강하지만 무거웠던 헤비급 복서들에게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반면 약점도 명확했다. 전성기 기준으로 보아도 무결점의 복서라고 보기는 힘들다. 분명히 아웃복서에게는 압도적인 위력을 과시했지만, 클린치 게임을 하는 상대에게는 후반까지 비등한 경기를 펼치거나 판정까지 갔던 적이 종종 있었던 적이 그 사례. 우선 기본적으로 헤비급치고 키가 매우 작고 리치가 짧다 보니 복슬링을 구사하는 상대에게는 경기 운영이 아주 매끄럽진 못했다는 점이 있다. 그리고 핵주먹이라는 펀치력도 엄밀하게 말하면 압도적인 한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정교한 타이밍과 연타력, 훌륭한 각도를 만든 후 좋은 궤도로 날리는 펀치의 특성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도 원인 중 하나이다. 즉, 거리를 두고 기량을 겨룰때는 막강했지만 클린치와 인파이팅을 반복하면서 다리를 붙이고 싸우는 상대를 압도할만한 능력은 없었던 것.
그래서 상대가 끈적끈적한 클린치 게임과 인파이팅으로 나왔을때, 자신의 정교하고 빠른 스텝을 살릴수 없게 될 경우 생각보다 많은 약점들이 있었다. 전성기때에도 조지 포먼 같은 상대를 피해야 한다는 조언을 들었을 정도이니 대처가 쉽지 않은 문제였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여러 사생활 문제로 인해 자기관리가 되지 않으면서 체력적인 약점이 생긴 것이 치명적이었다. 몰락이 시작됐던 마이클 더글라스에게 당한 첫 패배 때도 게임 플랜의 차원에서 보면 클린치 게임에 대한 준비 미비가 있었기에 매우 고전했었다. 고전 끝에 결정적인 다운을 뺏어냈음에도 불구하고 후반 체력저하로 인한 집중력 문제로 경기를 내주기도. 이후 버팅과 반칙 및 클린치로 타이슨을 봉쇄한 홀리필드 2연전에서 이런 타이슨의 약점들이 부각되었고, 다른 패배들도 이런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무엇보다 나이를 먹고 전성기가 지난 이후부터는 라이트급에 비견되었던 독보적인 스피드가 조금씩 떨어지면서 전성기의 압도적인 디펜스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게 되었다. 사실 타이슨은 헤비급에서 키와 체격, 리치가 상당히 작은 편이다. 이를 무시무시한 스피드와 유연성으로 파고들어 연타를 날리면서 극복한 것인데, 속도가 떨어지니 파고들지 못하고 접근하다가 얻어맞게 된 것이다.
결국 속도와 잽 싸움에서부터 지고 들어가게 되자 리치와 체격이 작다는 단점이 그대로 노출된 타이슨은 그저 맷집 좋고 펀치력이 강한 단신 인파이터 수준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물론 좋은 맷집과 상당한 펀치력이 어느정도 살아있다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지만 그의 전성기와 비교하면 확실히 약해지고 공략이 가능한 상대가 된건 사실이다.
5. 어록[편집]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37]
"Everyone has a plan 'till they get punched in the mouth."
"너와 싸우는 사람들이 모두 적은 아니며, 너를 돕는 이들이 모두 친구도 아니다."[38]
“Everyone that you fight is not your enemy and everyone who helps you is not your friend.”
"내가 지금까지 맞은 가장 강한 펀치는 바로 나의 성공이었다."
"the biggest sucker punch that I took was my success."[39]
"사람들이 간과하는 게, 복싱은 생각하는 사람의 스포츠라는 거야. 터프가이의 스포츠로 잘못 알고 있지. 하지만 이 바닥에서 가장 빨리 나가떨어지는 애들이 그 터프가이들이야."
"People don't realize that the boxing is the thinking men's sports. They think it's tough guys' sports, and those tough guys are the first who gets tossed out."[40]
[41]
6. 기타[편집]
- 만 13세 때 몸무게가 86kg이었으며, 살이 많이 쪘을 때는 109kg까지 나가기도 했었다.
- 마이크 타이슨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다.
- 많은 인기와 함께 말발로 유명했다는 점에서 유사한 무하마드 알리가 은퇴 이후 파킨슨병 투병으로 고생한 것과는 달리 타이슨은 특유의 말발을 계속해서 보여주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알리와 토크쇼를 함께하기도 했는데, 악동으로 유명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굉장히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망하기 몇 년 전 알리의 집을 찾아가 대화하는 방송을 촬영하기도 했다. 알리의 장례식 때는 관을 운구했다.
- 2013년 자신의 저서 'Undisputed Truth'에서 코카인과 마리화나 투약 혐의를 피하려고 가짜 성기는 사용한 적이 있지만, 스테로이드를 쓴 적은 한 번도 없다고 고백했다. 2020년에는 자신이 진행하는 팟캐스트 '핫박싱(Hotboxin)'에 출연해 "아기의 소변을 그곳(가짜 성기)에 넣은 결과는 굉장했다"며 "한 번은 아내의 소변을 대신 넣기도 했다"고 말했다. 또, "아내는 소변에서 임신결과가 나올 수 있다고 걱정했고 '나는 걱정말라'고 한 뒤 아기소변을 사용했다"는 구체적인 정황까지 밝혔다. 관련 기사영문 기사
- 그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다름아닌 스승 커스 다마토, 글러브를 잡기 시작할 때부터 줄곧 그렇다고 한다. 이상하게도 국내에서는 이소룡부터 시작해서 갖가지 이름이 등장하나,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스승이자 친부처럼 따랐던 다마토를 제외하고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라면, 바로 무하마드 알리. 복싱을 시작하기 전에 소년원에 있던 타이슨은 어느 날 소년원에 방문한 알리를 보고 그때부터 마음속에 무하마드 알리라는 거인이 자리 잡았다고 전한다. 복싱에서의 업적도 업적이지만, 맨주먹으로 인종차별도 때려눕히며 보여준 그의 활동은 타이슨 입장에서는 강렬했을 듯 하다.
- 또한 투팍하고도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실제로 투팍이 암살당하기 몇시간전에 간 곳이 타이슨의 무대경기장이었다. 그리고 투팍이 암살을 당하자 타이슨은 투팍을 암살시킨 놈을 딱 5초만 같은 링에 있게 해달라 라는 말을 했을 정도로 크게 분노했다고 한다.
- 브래드 피트가 무명 시절에 타이슨의 전처와 데이트를 했다가 그에게 폭행당할 뻔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때 타이슨과 그의 전처인 로빈 기븐스는 이미 법적으로 이혼한 상태였으나, 이혼하고도 교류는 있었던 것. 브래드 피트가 타이슨을 보자 "Dude, don't strike me!" (형씨, 나 때리지 마!) 라고 했다 한다. 의외로 순순히 보내줬다. [44] 타이슨이 말하는 브래드피트. # 피트가 3살 많다.
-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 시즌8 16화에서 타이슨 본인 역으로 카메오 출연했다. 우연히 지나가다 우는 아이를 달래주는 부드러운 남자로 나온다.
- 록키 발보아의 기획 단계에서 주인공 록키의 시합 상대로 고려되었고 타이슨 본인도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으나, 실베스터 스탤론이 보기에 아무리 촬영이더라도 타이슨의 주먹에 맞으면 위험할 거 같아서 무산되었다. 대신 경기 전 관중석 제일 앞 좌석에서 메이슨 딕슨을 도발하는 역으로 카메오 출연했다.
-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상대편 선수의 어깨를 물어 뜯은 루이스 수아레스에 대해서 열정 때문이라는 말을 남겼다. 개드립으로 옹호한 것은 아니고 "한순간의 열정과 뜨거운 피, 진정한 경쟁의식 때문"이라면서 "그런 순간이 엄습할 때면 우리는 진짜 경쟁적으로 변하고 나쁜 판단을 내리곤 한다"라는 발언에서 보듯이 본인의 경험에 비추어 해설한 것에 가깝다.
- 같은해 2014년에 어느 라이브 쇼 프로그램에서 진행자가 타이슨의 성폭행 전과 기록에 대해 거론하자 진행자에게 쌍욕을 퍼부었다. 후반에는 진행자가 겁먹었는지 당황하며 타이슨의 눈길도 피하고 말도 더듬었다. 보러가기(한글번역판)[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