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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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마이클 조던의 수상 이력






























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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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st : 1986-87 · 1987-88 · 1988-89 · 1989-90 · 1990-91 · 1991-92 · 1992-93 · 1995-96 · 1996-97
· 1997-98
2nd : 198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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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st : 1987-88 · 1988-89 · 1989-90 · 1990-91 · 1991-92 · 1992-93 · 1995-96 · 1996-97 · 199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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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0e8b473dad11db4253cb6aef0a5fdf9c--michael-jordan-number-jordan-.jpg
시카고 불스 영구결번[1]
마이애미 히트 영구결번
No. 23
No. 23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external/www.hoophall.com/c9429ba857c3d4278a2431f0689f4e23_f560.jpg

마이클 조던
헌액 연도
2009년




파일:airjordan23.jpg

시카고 불스 No. 23
마이애미 히트 No. 23
마이클 제프리 조던
Michael Jeffrey Jordan

출생
1963년 2월 17일 (61세)
뉴욕주 뉴욕시 브루클린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학력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지리학 학사)
신장
198cm (6' 6")[1]
체중
98kg (216 lbs) → 불명[2][3]
윙스팬
211cm (6' 11")

31.5cm (315 mm)[4]
후원사
에어 조던[5]
포지션
슈팅 가드[6]
드래프트
1984 NBA 드래프트 1라운드 3순위
시카고 불스 지명

소속 팀
시카고 불스 (1984~1993)
시카고 화이트삭스 산하 마이너 (1994)
버밍햄 배런스[7] (1994) / AA
시카고 불스 (1995~1998)
워싱턴 위저즈 (2001~2003)[8]
프런트
워싱턴 위저즈 (2000~2001 / 주주)
샬럿 밥캣츠 (2003~2010 / 주주)
샬럿 밥캣츠-호네츠 (2010~2023 / 구단주)
그린즈브로 스웜 (2016~2023 / 구단주)
샬럿 호네츠 (2023~ / 주주)
등번호
23번 - 시카고 / 워싱턴[9]
45번 - 시카고[10]
12번 - 시카고[11]
9번 -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
종교
개신교 (침례회)[12]
재산
35억 달러(한화 4조 7,425억원)[13] (2023년 8월 / 블룸버그)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1. 개요
2. 특징
4. 영향력
4.1. 리그의 패러다임에 미친 영향
5. 기록
6. 수상 내역
7. NBA Career Statistics
9. 관련 일화



1. 개요[편집]


미국농구인이자 前 농구 선수, 前 농구 행정가. 선수 시절 포지션은 슈팅 가드. 前 NBA 구단 샬럿 호네츠NBA G 리그 그린즈브로 스웜의 구단주 겸 사업가.

별명은 GOAT, MJ, Air, His Airness[14], Black Cat[15], Black Jesus[16] 등으로 불리고, 한국에선 농구 황제, '그 분', 마사장, 쪼잔왕, 미카엘 요르단, 역사상 최고의 소인배, 신발 장수 아저씨[17] 등으로 불린다.

2. 특징[편집]


선수 시절 등번호는 23번.[18] 워낙 유명해서 농구가 아니더라도 조던 세대들은 숫자 23을 조던 넘버라고 부른다.[19] 농구인들끼리는 암묵적으로 23번이 축구에서 10[20] 가지는 상징 그 이상으로 여겨지거나 아예 부담으로 느껴지는 경우도 있는 만큼 조던이 아무 의미 없던 특정 백넘버에[21] 이 정도 의미를 부여했을 정도로 얼마나 대단한 업적을 남겼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다. 그의 시그니처 농구화로는 에어 조던이 있다.

농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이자 농구라는 스포츠의 상징이며, 분야 무관 1980~90년대 미국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22] 북미 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다.[23]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운동선수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는 점에서 그의 위상을 알 수 있다. 참고로 2위는 베이브 루스, 3위는 무하마드 알리. 또한 GOAT라는 단어를 본격적으로 유행시킨 장본인이다. NBA를 지금의 위치로 올려놓은 두 인물 중 하나로, 나머지 한 명이 커미셔너를 역임한 데이비드 스턴임을 감안할 때, 선수인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라고 봐도 좋다.[24]

순수 기량과 커리어 자체도 정상에 있지만, 거기에 계약서에 "상기에 명시된 경기 이외에 몇 경기를 그저 "농구가 좋아서(for the love of the game)" 돈을 받지 않고 뛰어줄 수도 있다"고 할 정도로 그야말로 '농구에 미친 사람'이었고, 더불어 미디어에 자신을 포장할 줄도 알았으며 이미지 메이킹에도 천부적인 소질을 발휘, 즉 실력도 실력이지만 조던이라는 사람 자체의 스타성과 상품성이 매우 뛰어났다. 매직 존슨, 래리 버드의 라이벌리 시대가 끝나가는 시기인 1990년 초에 최정상 자리를 차지하면서 자연스럽게 NBA 대표스타로 떠오를 수 있었고, 그 당시부터 위성 방송으로 라이브 경기를 세계에서 비교적 싼 값에 송출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기 때문에 운이 좋았다고 할 수도 있다. 더군다나 지금과 같이 인터넷이나 스마트 기기들로 활발히 정보 교환이 되는 시기도 아니라 이미지 메이킹에 더욱 편리한 시대였기도 했다.[25] 물론 미디어의 발달 차이로 인해 조던의 경우 현재 스타들에 비해 노출도에서 훨씬 떨어지기에 이득이 되는 건 오직 이미지 메이킹 하나 때문인데, 조던은 본인의 소심하고 지독하기까지 한 승부근성이 다 까발려진 이후인 201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농구 선수들 중 압도적인 인기를 자랑했다.

압도적인 실력과 시대적 배경을 떠나도 그의 생애 자체가 마치 짠 것처럼 너무나도 드라마틱한 것 역시 그의 인기에 한몫하고 있다. 잘하는 선수야 많았지만, 이렇게 각본을 쓴 것처럼 농구 인생이 드라마틱하고 극적인 요소가 많은 농구 선수는 없었다.

  • 고등학교 시절 학교 팀 선발에서 탈락, 이후 실력을 갈고닦아 전미 최고 수준의 유망주가 됨
  • 대학 1학년 때 당시 기준으로 농구 역사상 가장 많은 유료 관중들 앞에서 역전 위닝슛을 터트려 팀을 우승으로 이끔
  • 프로 2년차, 부상당하고 복귀한지 얼마 안되어 역대 최고의 팀 중 하나이자 당대 최강팀을 상대로 터트린 플레이오프 최다득점(63점) 기록
  • NBA 역사상 최초로 시리즈 최종전에서 지고 있는 팀이 버저 비터로 역전승한 The Shot[26][27]
  • 리그 최하위권 팀에 데뷔해 한 단계 한 단계씩 성장하며 리그 최강이던 디트로이트를 상대로 레벨업을 하듯 1승 4패, 2승 4패, 3승 4패로 매해 1승씩 더 거두다가 결국 디펜딩 챔피언이던 디트로이트를 4-0으로 스윕하고 파이널 진출
  • 1980년대를 양분하여 지배한 매직의 마지막 파이널과 맞물린 그의 첫 파이널, 대관식을 하듯 매직과 비슷한 방식으로, 매직보다 더 뛰어난 활약을 하며 승리해 첫 우승[28]
  • 같은 포지션의 라이벌이었던 클라이드 드렉슬러와 맞붙어 모든 면에서, 심지어 약점이라 여겨졌던 3점 슛에서조차 그를 능가하며 두 번째 우승
  • 동년배들 중 처음으로 MVP 투표에서 조던을 제낀 절친 찰스 바클리를 압도하며 한 세 번째 우승
  • 모든 걸 이룬 바로 그 해 찾아온 아버지의 피살이라는 비극, 이로 인해 정상의 자리에서 미련없이 은퇴, 아버지와의 추억이 서린 야구라는 스포츠로 도피
  • 야구계 파업과 함께 복귀, 그러나 첫 해 겪은 좌절
  • 좌절을 딛고 이뤄낸 NBA 사상 한 시즌 역대 최다승 기록, 복귀 후 네 번째 우승을 아버지의 날에 이뤄냄
  • 다시 오른 파이널 무대에서 2-2로 팽팽히 맞선 승부처, 하필 그 때 식중독에 걸려 제대로 걷기조차 힘들 정도로 안 좋은 몸 상태를 딛고 팀을 승리로 이끈[29] Flu Game
  • 커리어 마지막 파이널 무대의 마지막 경기에서 믿었던 2인자의 부상 재발, 동료들의 단체 부진을 딛고 원맨쇼로 꾸역꾸역 따라가다가 마지막 순간에 스틸+역전 위닝샷
  • 리그 최고의 선수로 우승까지 거머쥔 상태에서 다시 한 번 정상에서 은퇴

웬만한 선수들은 커리어에 몇 번 있는 정도인 극적인 사건이 거의 매 시즌마다 있을 정도로 엄청난 드라마의 주인공이기도 했다.[30] 짰나 싶을 정도로 극적인 일을 겪은 것이 그의 커리어를 전설로 만드는 데 한몫은 했지만, 순수하게 스포츠 커리어 측면에서만 보면 손해도 많이 봤다. 조던은 명성에 비해 비교적 짧은 선수생활을 보낸 선수이다. 특히 그는 신체와 기량이 정점에 달한 30세에 아버지가 살해당해 갑자기 은퇴를 해 한 시즌 반, 다른 스포츠에 적응하느라 낭비한 시간을 합하면 거의 2년을 허비했다. 또한 1997-98 시즌에는 비록 하락세이긴 했지만 리그 최고의 기량을 유지하던 MVP가 돈 문제로 팀을 해체하고자 한 구단주로 인해 35세 나이에 은퇴를 했다.[31] 이미 굵직한 커리어에 무언가를 더 추가할 기회를 두 번이나 날린 셈이었다.

이 점 때문에 그의 워싱턴 복귀를 안 좋게 보는 팬들도 많다. 물론 워싱턴 시절에도 커리어 로우 득점을 한 이후 비판의 시선을 잠재우는 51점, 역대 유일하게 40점을 넘긴 40대 선수, 버저 비터 게임 위닝샷 이후 해설자의 "Michael Jordan, the greatest player of all time!"이란 외침 등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많았지만, 시카고 시절만큼 극적인 순간은 없었다. 51점이나 40대 40점은 모두 경기력 면에서 보면 굉장히 극적이지만, 이런 식으로 극적인 사건은 꽤나 흔하다. 조던이 더 특별했던 것은 조던 본인의 개인사나 스포츠 외적으로 봐도 극적인 면모가 더해졌던 것이다. 정상에서 은퇴하는 선수들은 종종 있지만 아버지의 피살로 인해 은퇴하는 이들이 얼마나 있는가? 또한 그 비극을 딛고 복귀했는데 하필 아버지의 날에 정상에 복귀하는 건 또 얼마나 극적인가?[32] 조던과 다른 "역대급으로 잘하는" 선수들을 구분짓는 그런 드라마가 워싱턴 시절엔 없었던 것이다.[33]

또한 시카고 불스는 조던 이전 9시즌 동안 2시즌 밖에 플레이오프를 못 간 약체팀이었는데, 조던은 불스에 뽑히면서 "내가 이 팀에 가는 이상 반드시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겠다"라고 선언했고 정말로 그 약속을 지켰다. 조던이 불스에서 활약한 전 시즌 내내 불스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13시즌, 1984-1993, 1995-1998)

  • 마이클 조던이 플레이오프에서 이긴 팀과 횟수: 뉴욕 닉스 5회,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4회, 마이애미 히트 3회, 유타 / 샬럿 / 필라델피아 / 애틀랜타 2회, 밀워키 / 시애틀 / 레이커스 / 피닉스 / 뉴저지 / 디트로이트 / 워싱턴 / 포틀랜드 / 올랜도 / 인디애나 1회

  • 마이클 조던이 플레이오프에서 패한 팀과 횟수: 디트로이트 3회, 보스턴 2회, 올랜도/밀워키 1회

3. 생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마이클 조던/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영향력[편집]



파일:1988 slam dunk contest.jpg

1988년 슬램덩크 콘테스트에서 선보인 자유투 라인 덩크[34]


파일:external/media-cache-ak0.pinimg.com/3591699cf011080693af0c85d9e8a4e4.jpg

마이클 조던에 대한 세계 주요 언론사들의 평가[35]
[ 펼치기 · 접기 ]

2017년 ABC(호주) 선정 역대 최고의 스포츠인

1위 로저 페더러 (테니스)
2위 무하마드 알리 (복싱)
3위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 (테니스)
4위 펠레 (축구)
5위 아이르통 세나 (F1)
6위 세레나 윌리엄스 (테니스)
7위 마이클 펠프스 (수영)
8위 미아 햄 (축구)
9위 마이클 조던 (농구)
10위 우사인 볼트 (육상)


2013년 BBC 선정 역대 최고의 스포츠인

1위 펠레 (축구)
2위 세레나 윌리엄스 (테니스)
3위 미하엘 슈마허 (F1)
4위 나디아 코마네치 (기계체조)
5위 마이클 조던 (농구)


1999년 로이터 스포츠부 선정 20세기 최고의 스포츠인

1위 펠레 (축구)
2위 무하마드 알리 (복싱)
3위 칼 루이스 (육상)
4위 마이클 조던 (농구)
5위 제시 오언스 (육상)


1999년 IOC 선정 20세기 최고의 스포츠인

1위 펠레 (축구)
2위 무하마드 알리 (복싱)
3위 칼 루이스 (육상)
4위 마이클 조던 (농구)
5위 마크 스피츠 (수영)


1999년 Sport-Express(Russia) 선정 20세기 최고의 스포츠인

1위 펠레 (축구)
2위 알렉산더 카렐린 (레슬링)
3위 무하마드 알리 (복싱)
4위 레프 야신 (축구)
5위 마이클 조던 (농구)


뉴욕 타임스 선정 역대 최고의 스포츠인

1위 펠레 (축구)
2위 무하마드 알리(복싱)
3위 마이클 조던 (농구)


마이클 조던의 위대함은 그가 경력을 통해 쌓은 실적과 기록, 그리고 아직까지도 채 식지 않은 인기로 증명되고 있지만, 더욱 대단한 것은 다음과 같은 영향을 아직까지도 NBA에 남기고 있다는 점이다.

  • 슈팅 가드 포지션의 혁신을 불러일으켰으며, 핸드체킹룰의 변화 또한 그의 간접적 영향이다. 빅맨 중심의 농구라면 지향할 수 없었던 룰의 변화는 조던의 은퇴 후 조던과 같은 스타를 양성하기 위해 상대적인 이득을 스윙맨에게 부여함으로써 경기의 재미를 극대화하고자 했던 NBA의 노림수였다. 정작 이 룰은 조던의 1차 은퇴 후에 도입되었는데, 2차 복귀 후에는 예전보다 하락한 운동 능력에도 NBA를 지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36]

  • NBA의 세계화에 절대적인 공헌을 했다. 드림팀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데이비드 스턴은 1992 올림픽에 NBA 선수들이 참가하는 것을 처음에는 막으려 했고, 이미 1984년에 나가 금메달을 따온 조던 역시 비시즌을 할애해가며 올림픽에 다시 나가는 것에 미온적이었다. 그러나 스폰서인 나이키의 설득, 그리고 자진해서 드림팀에 합류한 매직 존슨래리 버드의 설득에 따라 마음을 돌려 드림팀이 완성되었고, 마침 그 시기에 절묘하게 미디어 시장이 폭발적으로 확대되어 이미 올림픽에 합류하기 전부터 조던을 포함한 드림팀은 명사가 되어 있었다.[37] 게다가 드림팀이 보여준 충격과 공포의 퍼포먼스 덕에 사람들이 엄청나게 관심을 갖게 된다.[38] 이것에 자극을 받은 NBA는 마이클 조던을 앞세워 세계에 NBA를 홍보했고, 조던의 나이키, 경쟁자인 리복, 아디다스 등 세계적 스포츠용품 메이커가 여기에 편승해 어마어마한 투자를 했다. 그 덕에 농구가 지금의 국제적인 겨울 스포츠이자 올림픽의 대표적인 시청률 제조기라는 위상을 확보하게 되었다.


  • 에어 조던 브랜드도 빠질 수 없다. 스포츠 웨어 시장의 '상품성' 측면에서는 역대 가장 성공한 스포츠 선수인 셈.

  • 강팀이 아닌 약팀의 선수로 데뷔하여, 자신의 힘으로 그 팀의 수준을 끌어올리면서 온갖 장애물을 극복하고 6번의 우승을 이끌고, 왕조를 건설한 후 프랜차이즈 스타로 정점에서 은퇴하는 업적을 이룩하여, 이후 NBA 스타가 이뤄내는 업적에 대한 평가의 기준을 끝없이 상향시켰다. 단적으로 그의 업적을 따라갈 수 있을 것처럼 보이던 르브론 제임스마이애미 히트로 이적하자 마자 나온 얘기가 "조던 되기는 글렀다"였다. 농구팬들은 아직까지 포스트 조던을 기다리고 있으며 조던과 같은 왕도를 걷는 드라마를 다시 한 번 더 보고싶어하기 때문이다.

  • 스타 한 명이 소속팀과 리그를 넘어선 독보적 인지도를 확보했다. 은퇴하고 시간이 한참 흘렀으나 그는 당연하게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농구선수라는 데에 아무런 이견이 없고, 과장을 좋아하는 팬들은 "농구라는 종목보다 유명한 선수"라는 비약적인 말을 하기도 한다. 물론 이는 그냥 헛소리(...)이긴 하나, 이보다 조건을 낮춰 'NBA보다 유명한 선수'라고 한다면 성립될 만 했다.[39][40]

  • 새로운 스타가 나타날 때마다 수없이 비교기사와 논쟁이 벌어지고 있으며 현 시대의 선수들이 기록 하나씩 세울 때마다 3~5위권 이내에 하다못해 10위권 이내에 반드시 이름이 들어가있어 NBA팬들을 늘 경악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하는 선수이기도하다. 이렇게 기록지에서 갑자기 불쑥 튀어나오는 사람들로는 조던과 카림 압둘자바, 윌트 체임벌린 그리고 르브론 제임스가 유명하다.

4.1. 리그의 패러다임에 미친 영향[편집]


  • 조던은 NBA 패러다임 변화의 중심 인물 중 한 명이다. 역대 NBA를 지배했던 것은 조지 마이칸 ~ 빌 러셀, 윌트 체임벌린 ~ 카림 압둘자바로 대표되는 빅맨들이었으니, 가드인 매직 존슨과 포워드인 래리 버드로부터 시작된 변화의 정점을 찍은 게 바로 조던이라고 볼 수 있다. 매직과 버드가 '다재다능한 장신 선수'의 최초격이었다면[41], 이후에는 1970년대 후반 이후 태어나 매직보다는 조던을 보며 자란 코비 브라이언트, 트레이시 맥그레이디 등 스윙맨들이 난립하게 된다.

  • 뛰어난 센터 없이도 NBA를 지배할 수 있음을 증명한 사실상 최초의 선수이다.[42] 이후 수많은 팀들이 외곽 중시 트렌드에 따라 탁월한 센터 없이도 농구를 하는 방향으로 전술을 짜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무게중심이 골밑에서 외곽으로 옮겨갔다.[43]

  • 2022년 12월 13일, NBA당국이 NBA정규시즌 MVP 상을 리브랜딩해 The Michael Jordan Trophy로 명칭을 변경한다고 발표했다. 수상자에게 주어질 트로피는 23.6인치 (약 60cm)이며, 이는 조던의 등번호 23과 그의 통산 챔피언십 우승 횟수를 기념한다. 또한 트로피의 밑부분은 5각형이고, 경사는 15도로 되어있는데 이것은 조던의 5번 MVP 수상과 그가 15시즌동안 뛰었다는것을 기린다. [44]

5. 기록[편집]


  • 통산 파이널 MVP 역대 1위 (6회, 1991년, 1992년, 1993년, 1996년, 1997년, 1998년)[45][46]
  • 통산 득점왕 역대 1위 (10회, 1987년, 1988년, 1989년, 1990년, 1991년, 1992년, 1993년, 1996년, 1997년, 1998년)[47]

  • 단일 파이널 필드 골 역대 1위 (101골, 1993 파이널)
  • NBA 역사상 첫 200스틸, 100블록 성공 (1987-88 시즌)

  • 플레이오프 단일 경기 최다 득점 (63점)
  • 통산 평균 득점 역대 1위 (30.12점)
  • 통산 플레이오프 평균 득점 역대 1위 (33.45점)


  • 통산 정규 시즌 PER 역대 1위 (28.35)
  • 통산 플레이오프 PER 역대 1위 (28.76)

  • 통산 WS/48 역대 1위 (.2505)
  • 통산 플레이오프 WS/48 역대 1위 (.2553)


6. 수상 내역[편집]


수상 내역
파일:nbachampionfts.png NBA 챔피언 6회 (1991-1993, 1996-1998)
파일:nbachampionfts.png NBA 파이널 MVP 6회 (1991-1993, 1996-1998)
파일:NBA 로고.svg NBA 정규시즌 MVP 5회 (1988, 1991-1992, 1996, 1998)
파일:NBA 로고.svg 올-NBA 퍼스트 팀 10회 (1987-1993, 1996-1998)
파일:NBA 로고.svg 올-NBA 세컨드 팀 (1985)
파일:nbaallstatfts.png NBA 올스타 14회 (1985-1993, 1996-1998, 2002-2003)[48]
파일:nbaallstatfts.png NBA 올스타전 MVP 3회 (1988, 1996, 1998)
파일:NBA 로고.svg NBA 올해의 수비수상 (1988)[49]
파일:NBA 로고.svg NBA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 9회 (1988-1993, 1996-1998)
파일:NBA 로고.svg NBA 신인상 (1985)
파일:NBA 로고.svg NBA 올-루키 퍼스트 팀 (1985)
파일:NBA 로고.svg NBA 득점왕 10회 (1987-1993, 1996-1998)
파일:NBA 로고.svg NBA 스틸왕 3회 (1988, 1990, 1993)
파일:NBA 로고.svg NBA 슬램덩크 콘테스트 챔피언 2회 (1987-1988)
파일:NBA 로고.svg NBA 위대한 50인 선수 (1996)
파일:NBA 75주년 로고.svg NBA 75주년 팀 (2022)
파일:NCAA 로고.svg NCAA 챔피언 (1982)
파일:NCAA 로고.svg 네이스미스협회 선정 올해의 대학선수상 (1984)
파일: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로고 약자.jpg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선정 올해의 스포츠맨 (1991)
파일:미국 원형.png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 (2016)
파일:hofftsfts.png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2009)
파일:오륜기(여백X).svg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금메달
파일:오륜기(여백X).svg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

7. NBA Career Statistics[편집]


[ 정규시즌/펼치기 · 접기 ]
시즌
경기수
시간
필드골
3점슛
자유투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블록
턴오버
트루슈팅
PER
84-85
82
38.3
.515
.173
.845
28.2
6.5
5.9
2.4
0.8
3.5
.592
25.8
85-86
18
25.1
.457
.167
.840
22.7
3.2
2.9
2.1
1.2
2.5
.533
27.5
86-87
82
40.0
.482
.182
.857
37.1
5.2
4.6
2.9
1.5
3.3
.562
29.8
87-88
82
40.4
.535
.132
.841
35.0
5.5
5.9
3.2
1.6
3.1
.603
31.7
88-89
81
40.2
.538
.276
.850
32.5
8.0
8.0
2.9
0.8
3.6
.614
31.1
89-90
82
39.0
.526
.376
.848
33.6
6.9
6.3
2.8
0.7
3.0
.606
31.2
90-91
82
37.0
.539
.312
.851
31.5
6.0
5.5
2.7
1.0
2.5
.605
31.6
91-92
80
38.8
.519
.270
.832
30.1
6.4
6.1
2.3
0.9
2.5
.579
27.7
92-93
78
39.3
.495
.352
.837
32.6
6.7
5.5
2.8
0.8
2.7
.564
29.7
94-95
17
39.3
.411
.500
.801
26.9
6.9
5.3
1.8
0.8
2.1
.493
22.1
95-96
82
37.7
.495
.427
.834
30.4
6.6
4.3
2.2
0.5
2.4
.582
29.4
96-97
82
37.9
.486
.374
.833
29.6
5.9
4.3
1.7
0.5
2.0
.567
27.8
97-98
82
38.8
.465
.238
.784
28.7
5.8
3.5
1.7
0.5
2.3
.533
25.2
01-02
60
34.9
.416
.189
.790
22.9
5.7
5.2
1.4
0.4
2.7
.468
20.7
02-03
82
37.0
.445
.291
.821
20.0
6.1
3.8
1.5
0.5
2.1
.491
19.3

[ 플레이오프/펼치기 · 접기 ]
시즌
경기수
시간
필드골
3점슛
자유투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블록
턴오버
트루슈팅
PER
84-85
4
42.8
.436
.125
.828
29.3
5.8
8.5
2.8
1.0
3.8
.565
24.7
85-86
3
45.0
.505
1.000
.872
43.7
6.3
5.7
2.3
1.3
4.7
.584
30.1
86-87
3
42.7
.417
.400
.897
35.7
7.0
6.0
2.0
2.3
2.7
.529
28.1
87-88
10
42.7
.531
.333
.869
36.3
7.1
4.7
2.4
1.1
3.9
.598
28.4
88-89
17
42.2
.510
.286
.799
34.8
7.0
7.6
2.5
0.8
4.0
.602
29.9
89-90
16
42.1
.514
.320
.836
36.7
7.2
6.8
2.8
0.9
3.5
.592
31.7
90-91
17
40.5
.524
.385
.845
31.1
6.4
8.4
2.4
1.4
2.5
.600
32.0
91-92
22
41.8
.499
.386
.857
34.5
6.2
5.8
2.0
0.7
3.7
.571
27.2
92-93
19
41.2
.475
.389
.805
35.1
6.7
6.0
2.1
0.9
2.4
.553
30.1
94-95
10
42.0
.484
.367
.810
31.5
6.5
4.5
2.3
1.4
4.1
.557
24.8
95-96
18
40.7
.459
.403
.818
30.7
4.9
4.1
1.8
0.3
2.3
.564
26.7
96-97
19
42.3
.456
.194
.831
31.1
7.9
4.8
1.6
0.9
2.6
.524
27.1
97-98
21
41.5
.462
.302
.812
32.4
5.1
3.5
1.5
0.6
2.1
.545
28.1


8. 플레이 스타일[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마이클 조던/플레이 스타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9. 관련 일화[편집]


유튜브에 가면 플레이오프, 파이널 전 경기를 찾을 수 있고 정규 시즌 경기들도 많이 있다. 비슷한 시기 데뷔한 선수들, 1990년대 선수들 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영상이 존재한다. 참고로 현역선수들은 NBA 리그패스 저작권으로 풀 경기는 볼 수 없다.
  • 마이클 조던 관련 일화와 전설들: #

마이클 조던의 커리어 첫 번째 경기는 1984년 10월 26일 시카고 불스 vs 워싱턴 불리츠전으로 시카고 스타디움 홈경기.
마이클 조던의 커리어 마지막 경기는 2003년 4월 16일 워싱턴 위저즈 vs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전으로 웰스 파고센터 원정 경기[50].


10. 여담[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마이클 조던/여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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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착화 198cm (6' 6") / 맨발 196cm (6' 5"), 드래프트 측정 기록이 없기 때문에 추정치다.[2] 98kg은 NBA 활동 당시의 체중이다. 현재 체중은 이때보다 더 나간다. 조던의 몸무게는 변화가 꽤 있었는데 데뷔 당시부터 1988년도까진 200파운드(91kg) 정도였으나 이후 배드 보이즈의 거친 육탄방어에 대항하기 위해 91kg에서 2kg씩 꾸준히 벌크업을 시작, 1차 쓰리핏 시기에는 218파운드(98.8kg)의 체중이었으며 (조던도 인터뷰에서 본인의 전성기 체중은 218파운드라고 언급했었다) 1차 은퇴 후 야구에 적합한 몸을 만들기 위해서 체중을 늘렸다가 복귀 후 2차 쓰리핏때는 농구에 맞게 감량을 했다. 2차 쓰리핏 당시 조던의 몸무게나 워싱턴 시절엔 저보다 더 나갔을 것이라고 추정되지만 이 시절 몸무게라고 돌아다니는 것은 전부 추정치다. 조던의 몸무게 중 확실한 것은 "라스트 댄스"에서 "(디트로이트에 대항하기 위해) 200파운드였던 그가 15파운드의 근육을 늘렸다"고 언급한 부분과 ESPN과의 인터뷰에서 조던 본인이 현역시절 몸무게가 218파운드였다고 한 것 정도이다.[3] NBA는 프로필 업데이트를 잘 하지 않기 때문에 조던처럼 체형 변화가 잦은 선수는 몸무게가 몇인지 알 수가 없다. 실제로 1차 3연패 당시까지 발매된 조던 카드나 관련 매체에는 그의 몸무게가 190파운드, 혹은 198파운드라고 나와있으며, 워싱턴으로 복귀한 이후에도 그의 몸무게는 수정되지 않았다. 그리고 2차 3연패 당시 NBA카드와 대다수 매체에서는 그의 몸무게가 216파운드라고 표기됐다. 즉, 공식적으로 확인되는 것은 현역시절 그의 몸무게가 190, 198, 200, 216, 218파운드였던 적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위 ESPN 인터뷰에서 확인되듯 은퇴후 248파운드, 261파운드까지 나갔었다는 것인데, 1차 때보다 더 근육질로 보이는 2차 쓰리핏, 이보다도 더 벌크가 있던 워싱턴 시절 몸무게는 정확히 알 수 없다.[4] 미국 식으로 사이즈 13. 정확히 말하면 왼발은 사이즈 13, 오른발은 13.5를 신어 양 발 크기가 다른 선수로 유명하다. 여담으로 데뷔 당시에 비해 발 크기가 미세하게 커졌는지, 은퇴를 준비하던 1997-98 시즌 당시 루키 시즌에 신던 오리지널 에어 조던 1을 신었는데 신발이 너무 작아 발에서 피가 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경기가 잘 풀리고 있었기 때문에 갈아신지 않고 43분을 다 뛰었다. 국내에는 전반만 뛰고 갈아신었다는 설이 있지만 실제론 경기 후 수훈선수 인터뷰를 할 때 조던이 신발 때문에 발이 아파 죽겠다고 웃으며 언급하는 것과, 그의 발에 그때까지도 에어 조던 1이 신겨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5] 나이키와 종신 계약한 4명의 선수 중 한 명이다. 다른 3명은 르브론 제임스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케빈 듀란트. 에어 조던이 마이클 조던의 영향력을 통해 나이키의 프리미엄 독자 브랜드로 올라섰기 때문에 이에 대한 공로로 현재는 주주와 이사직(실제 직함은 아닌 이사 급 대우)을 겸하고 있다.[6] 2차 은퇴까지 커리어의 대부분을 슈팅 가드로 뛰었지만 수비 시에는 상대방의 포인트 가드를 맡는 경우도 많았다. (트라이앵글 오펜스에서 맡은 역할은 가드보다는 포워드에 가깝긴 했지만 수비는 주로 상대 가드를 막았으니까.) 3차 은퇴 이전인 워싱턴 시절에는 주로 스몰 포워드로 뛰었다. 1988-89 시즌에는 포인트 가드로도 뛴 적이 있었는데, 1989년 3월 25일 경기를 시작으로 11경기 동안 트리플 더블 10번을 달성하기도 했다. 시즌 평균은 32.5득점 8리바운드 8어시스트.[7] 잠깐 은퇴를 했을 때 갔던 시카고 화이트삭스 산하 더블A 야구팀.[8] 2번째 은퇴 이후 위싱턴 위저즈 구단주가 된 조던이 워싱턴 위저즈가 부진하자 홍보 차원에서 뜀.[9] 23번을 단 이유는 매우 유명한데, 마이클은 그의 형 래리와 마당에 있는 골대에서 주구장창 1대 1을 했는데, 어린 시절 마이클은 형을 한 번도 못 이겼다고 한다. 그러자 '형의 반이라도 됐으면.'하는 마음에 형 번호인 45번의 절반 정도인 23번을 택했다고 한다.[10] 첫번째 복귀 당시 달았던 번호, 잠시 야구로 외도했을 때 달았던 번호이기도 하다.[11] 1990년 올랜도 원정에서 락커룸에서 자신의 23번 유니폼이 도난당해 남아 있던 12번 유니폼을 입었다. 그래서 이름 마킹이 없다.[12] 계부가 침례교 집사였으며 지역교회에 출석했다고 한다. 어머니 역시 독실한 침례교인이었기에 어린시절 열심히 교회에 출석했다고 밝혔다. 사실 성장기에는 신앙심이 깊지 않았으나 차츰 성숙한 신앙을 갖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교회에는 자주 출석하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는데, 본인이 교회에 참석하면 너무 많은 이목을 끌어 예배에 방해가 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13] 전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예체능계 인물이며 타이거 우즈, 르브론 제임스와 더불어 전세계에 세 명뿐인 운동선수 출신 억만장자이다. 조던은 현역 시절 통틀어 받은 연봉이 9,328만 달러에 불과하며 그 중 워싱턴 시절 연봉은 9.11 테러 피해자를 위해 기부해 총 9,000만 달러가 조금 넘는다. 그러나 광고 수익과 에어 조던 로열티 등으로 본업 외 활동을 통해 1998년 은퇴 당시 이미 재산 5억 달러를 넘겼다. 2023년에는 지분 대부분을 보유하고 있던 샬럿 호네츠를 30억 달러로 추정되는 금액에 매각했는데, 10년 남짓의 기간동안 10배 가량의 시세차익을 거두었다. 또한 2022년에는 에어조던 매출 로열티 5% 명목으로 수령받은 금액이 3억 달러를 넘긴다.[14] His Highness + Air. 참고로 소유대명사 + Highness는 왕족들에게 붙이는 경칭이다. 한국어는 전하 혹은 폐하.[15] 젊은 시절에 한시적으로 불리던 별명.[16] 조던의 현역 시절 선수들 사이에서 주로 불리던 별명이다. 오픈 코트 같은 방송 프로그램이나 인터뷰에서 선수들이 종종 언급하곤 한다.[17] 만화 달숙이에서 실명 그대로 등장하는데 1차 은퇴 후 한심마을에 첫 등장했을 때부터 신발을 팔고 있었다. 이외에도 G-DRAGON의 어느 한 팬이 리뷰하는 글에서 마이클 조던을 알아보지 못하고 "GD 신발 신은 외국인 선수"라고 조던을 부르는 짤방이 널리 퍼지는 바람에 그대로 신발 장수 아저씨 같은 별명이 굳어져버렸다.[18] 조던은 그의 형 래리 조던과의 1:1 농구 시합에서 항상 이겨 본 적이 없다. 래리 조던의 학생 시절 등 번호는 45번이었는데, 마이클은 형의 반만이라도 농구를 잘 했으면 좋겠다는 의미로 45번의 2분의 1인 23번을 선택한 것이다. 아래에 서술되지만, 1차 복귀 후 잠시 45번을 달기도 했으나, 그 시즌 도중에 23번으로 돌아갔다. 근데 막상 형 래리 조던은 엄청난 농구 실력에도 키가 173cm(5피트 8인치)에 그쳐서 농구를 접어야 했다. 조던 집안에서 마이클을 제외하면, 178cm(5피트10인치)인 아버지 제임스가 그나마 크고 어머니 들로리스와 5남매 중 180cm을 넘긴 이가 한 명도 없다. 혼자 198cm(신발 신은 키)나 되는 마이클이 별종인 셈이다. 마이클의 장남 제프리는 185cm, 차남 마커스는 193cm(둘 다 농구화 신은 신장)로 그나마 크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조던 집안의 최장신은 마이클 조던이다.[19] 한 예로 축구선수 데이비드 베컴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을 때, 그는 전 소속팀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시절부터 줄곧 사용한 등번호 7번을 선택할 수 없었다. 당시 7번은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이던 라울 곤살레스가 달고 있었으므로 베컴은 7번 대신 조던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23번을 선택했다. 두 레전드의 선택을 받은 농구 외 스포츠에서도 상징적인 번호.[20] 10번은 펠레 이전에도 이미 중요한 번호였다. 원래 축구의 번호는 포지션을 의미했기 때문에 공격형 미드필더나 처진 스트라이커의 10번은 가장 화려한 포지션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펠레가 10대의 어린 나이에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의 10번을 받은 것은 당시 브라질축구협회의 행정적 실수로 어쩌다보니 우연히 받은 것이긴 하다. 그러나 우연히 10번을 단 어린 소년이 브라질 대표팀을 월드컵 우승으로 이끌고 도합 무려 3번이나 월드컵 트로피를 들어올리고 산토스에서도 대부분의 유럽 구단을 상대로 승리를 차지했으니 10번이 포지션 불문 에이스의 상징이 돼버린 것이다. 이후 디에고 마라도나SSC 나폴리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10번을 받은 다음 1986년 월드컵에서는 역대 월드컵 최고의 개인 퍼포먼스를 보이면서 우승에 크게 기여하고, 나폴리에서도 그동안 세리에 A에서 우승을 잘 차지하지 못했던 남부 팀인 나폴리에게 엄청난 기량을 선보이면서 두 번의 리그 우승과 한 번의 UEFA컵 우승을 안겨주면서 10번은 완전히 팀의 에이스를 상징하는 등번호로 인식된다. 이후 리오넬 메시FC 바르셀로나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10번을 받고 맹활약을 하면서 에이스로서의 상징성은 더욱 강화되었다. 반면 농구의 23번은 조던 이전까지 축구의 10번과는 다르게 정말 아무 의미 없는 번호였다.[21] 현재까지 23번을 주로 달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선수는 조던 외에는 프랭크 램지켈빈 머피뿐이며, 훗날 헌액이 확실시되는 르브론 제임스까지 해봐야 네 명이다. 게다가 램지는 1950년대 선수였고 램지와 머피 둘 다 NBA를 주름잡던 선수들은 아니었기 때문에 번호 자체의 상징성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NBA에서 전통적으로 레전드들이 많이 달았던 번호는 33번으로 카림 압둘자바, 래리 버드, 패트릭 유잉, 알론조 모닝, 스카티 피펜, 그랜트 힐 등 수많은 슈퍼스타들이 달았고, 샤킬 오닐조차도 원래 아마추어 시절 33번을 달다가(유잉을 존경해서 선택한 번호다.) 프로 입단 이후엔 33번을 누가 이미 달고 있어서 32번으로 바꿨다. 레이커스로 이적해서는 압둘자바 때문에 33번이 결번되어 있어 34번을 선택했는데 34번 역시 결번되었다.[22] 1990년대 초반 마이클 잭슨, 맥컬리 컬킨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있는데, 이는 1990년대 당시 미국의 문화 산업을 상징하는 사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만큼 조던은 단순히 운동선수 정도가 아닌 문화 산업의 상징에 가까울 정도로 입지가 높았던 것.[23] 2K 게임즈에서 제작한 NBA 2K12에서는 전설의 농구선수 18명의 팀을 플레이하여 플레이한 선수들의 팀을 해금해서 그 팀과 선수들로 통상 경기에서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그레이티스트 모드가 있다. 여기서 버젓이 1번, 즉 맨 앞에 위치하고 계신다. 참고로 2번은 매직 존슨, 3번은 래리 버드. 실제로 저 셋은 커리어도 커리어이지만 '상징성'이라는 측면에서도 NBA 역사에서 가장 굵직한 3인이다.[24] 참고로 커미셔너(총재)는 절대 권력자가 절대 아니라 실질적인 힘은 자금줄을 거머쥔 구단주들에게 있으며 총재는 이들의 동의 하에 임명된 월급쟁이 사장 정도 위치이다. 구단주는 총재의 해임을 위한 구단주 투표를 건의할 수 있는 반면, 총재는 구단주를 퇴출시킬 수 없고 구단주를 퇴출하려면 구단주 투표가 필요하다. 즉, 구단주들은 총재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반면 총재는 구단주들의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에 실제 파워에서는 돈줄을 쥔 구단주들이 더 막강하다. 다만 구단주와 달리 총재는 NBA 자체의 룰을 바꿀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리그를 변화시키는 면에 있어선 당연히 영향력이 막강하다. 게다가 스턴은 1984년부터 2014년까지 무려 30년간 장기집권하면서 드래프트 2라운드제(그 이전까지는 10몇개 라운드까지 있었으며 매년 바뀌었다), 드래프트 생중계(초창기엔 방송국에 돈까지 쥐어주면서 했다. 물론 지금은 광고료 받는다), NBA 선수들의 올림픽 출전, 공격농구와 공격수 보호를 위한 일련의 룰 개정 등 수많은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에 일반적인 총재보다 훨씬 막대한 영향력을 준 인물. 실제로 1980년대에 드래프트 중계권도 못 팔고 파이널도 녹화 중계되던 시절부터, 선수 연봉만 팀당 10억 달러 언저리를(스턴 은퇴 당시 기준) 지출하는 거대 리그가 되기까지 스턴, 그리고 스포츠 사상 가장 마케팅 가치가 높은 존재 중 하나인 조던의 영향력은 그야말로 절대적이었다.[25] 매직 존슨이나 래리 버드, 줄리어스 어빙 같은 그 이전 세대의 NBA 간판 선수들과 비교해보면 시기적으로 굉장히 잘 타고났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런 기회를 잡은 건 온전히 그의 실력. "시대를 잘 타고났다"고 말하기가 좀 애매한 게, 조던 수준의 실력과 인기를 지닌 선수는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기 때문에 비교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매직, 버드나 어빙, 후대의 코비, 르브론 등이 최소한 리그 내에서 입지가 조던과 비슷한데 노출도의 차이로 조던이 압도적인 상품 가치를 갖게 되었다면 시대 차이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겠지만, 이들은 조던만큼의 입지를 가진 적이 없다. 르브론의 예를 들면 그는 조던 이후 리그에서 가장 압도적인 선수이다. 그러나 NBA 특성상 리그 최고의 활약을 해도 우승을 하지 못하면 우승한 팀에게 시선이 쏠리게 된다. 07-08 시즌 리그에서 가장 뛰어나고 인기 있는 선수는 코비 브라이언트였지만, 파이널 패배 이후 파이널 MVP였던 폴 피어스에게 시선이 쏠렸고, 르브론이 리그를 지배했던 2010년대에도 우승에 실패하며 디르크 노비츠키, 스테판 커리, 케빈 듀란트 등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뺏겼다.[26] 현재까지도 시리즈 최종전 승리를 결정지은 버저비터는 더 샷과 2019년 우승팀 토론토 랩터스의 카와이 레너드가 필라델피아 시리즈 7차전에서 성공시킨 미드레인지 슛, 이 둘 밖에 없다. 그리고 레너드의 샷은 동점 상황에서 쏜 것이었기 때문에 지고 있는 팀이 시리즈 최종전을 버저비터로 승리한 케이스는(즉, 슛 한 번으로 지옥과 천당이 갈리는 상황에서 성공시킨 것은) 아직까지도 더 샷이 유일하다.[27] 심지어 더 샷의 경우 적지였고, 3초 남긴 상황에서 트리플 팀수준으로 조던에게 수비수 세 명이 붙은 상황이었다. 패스조차 받기 어려운 상황에서 페이크로 수비수를 제치고 패스를 받아 점퍼를 쏘는데 옆에서 점프한 수비수가 지나가버릴때까지 공중에 떠 있다 쏘는 슛이 백미.[28] 평균 득점을 30점 이상하면서 어시스트도 경기 당 10개 정도를 뿌렸다.[29] 그냥 이끈 정도가 아니라 38점을 넣었다. 사람들에게는 식중독이 아닌 독감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조던이 식중독에 걸린 이유는 게임 전날 밤에 먹은 피자 때문이다. 그 경기는 불스의 원정 경기였기 때문에, 피자가게 직원들이 주문자가 조던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수작을 부렸다는 의혹도 있다.[30] 위닝샷이나 경기력 관련 일들은 넘어가더라도 최정상급 선수들은 아무리 잘해도 애초부터 겪기 힘든 일들이 많다. 일단 역대급 재능을 지닌 선수라면 보통 고등학교 정도는 씹어먹지 1군 선발에서 탈락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시대를 지배하는 선수가 첫 파이널에 하필이면 그 전 시대를 지배하던 선수와 바통터치하듯이 만나는 경우도 지금까진 없었으며(마치 르브론이 첫 파이널에서 코비를, 오닐이 첫 파이널에서 조던을, 혹은 압둘자바가 첫 파이널에서 러셀이나 체임벌린을 만나 우승한 느낌이다), 같은 컨퍼런스 라이벌이 준왕조급 강팀인데 저렇게 매년 레벨업하듯 성장해 극복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만약 르브론이 마이애미로 이적하지 않고 클리블랜드에 남아 보스턴을 꺾었다면 저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최전성기에 은퇴는 말할 것도 없으며, 대부분의 레전드들은 은퇴 시즌에 우승이라고 해도 수준급 선수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조던은 1992-93 시즌, 1997-98 시즌 모두 리그 최강자였다.[31] 35세 당시 조던은 전성기만큼은 아니더라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리그 최고의 선수였고, 조던과 동시대에 그만큼 몸 관리가 철저한 선수는 칼 말론, 존 스탁턴 정도밖에 없을 정도로 그는 튼튼한 선수였다.[32] 단판제가 아닌 7전 4승제라 언제 시리즈가 끝날지 모르기 때문에 일부러 그렇게 짠 것도 아니다.[33] 특히 워싱턴 시절 커리어 누적 30,000득점을 넘긴 것을 제외하면 야투율이나 평균 득점이 크게 깎여 커리어에는 별로 도움이 안 되었다는 시선이 많다.[34] 1980년대 슬램덩크 콘테스트는 현재처럼 독특한 아이디어보다는 덩크의 완성도를 보는 성향이 더 강했다. 따라서 똑같은 덩크를 매년 보여줘도 감점 요소가 되지 않았으며, 도미니크 윌킨스의 파워풀한 투핸드 윈드밀, 마이클 조던의 자유투 라인 덩크는 그들이 콘테스트에 나올 때마다 매번 선보이는 "필살기"급 덩크였다. 실제로 조던은 1985, 1987, 1988년 세 번 출전하면서 매번 자유투 라인 덩크를 선보였는데, 1985년엔 준우승, 1987년과 1988년엔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똑같은 자유투 라인 덩크라도 신인이던 1985년엔 다소 뻣뻣하게 팔만 쭉 뻗어서 덩크를 한 반면, 1987년에는 좀 더 공중 동작이 가미되었고, 아예 팔다리를 접었다가 펴면서 역동적으로 덩크를 한 1988년도의 덩크는 역대 최고의 덩크 중 하나로 꼽힌다.[35] 1999년 타임이 선정한 20세기 가장 중요한 인물 100인 목록에는 들지 못하였다. 스포츠인으로서 당시 목록에 오른 3인은 펠레(축구), 무하마드 알리(복싱), 재키 로빈슨(야구).[36] 다만 현재 "수비수가 공격수에게 손도 못 대는 (공격 진행 방향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댈 수 있다. 밀면 안 되는 것) 심한 핸드체킹룰은 2004-05 시즌에 도입되었다. 이로 인해 그 다음 시즌, 무려 득점 상위 5걸 중 4명이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는 득점 인플레가 일어나기도. 이 중 앨런 아이버슨은 전성기가 지났고 평균 20점을 넣는 크리스 웨버가 합류했음에도 3점 가까이 올랐다. 또한 이들은 모두 그 다음 시즌, 팀 내 상황이나 기량에 큰 변화가 없었음에도 득점이 크게 하락했다. 르브론과 코비는 각각 4, 5점씩. 이는 핸드체킹룰 변화에 익숙치 못한 수비수들이 초기에 대응을 못했다가 이에 익숙해진 것이라고 추측이 가능하다.[37] 실제로 바르셀로나 시내에 건물 전체를 덮는 조던의 나이키 광고 사진이 걸려 있었을 정도.[38] 2012년에 드림팀 결성 20주년 기념으로 nba tv에서 제작한 "The Dream Team"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 드러난 내용이다. 당시 FIBA에서 "다른 나라의 프로들은 아마추어로 분류되어 올림픽 참가가 가능했다"며 모든 나라의 프로팀이 올림픽에 나갈 수 있다는 룰 개정안을 통과시킨다. 이에 미국은 팀을 결성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u.s. basketball committee 소속이자 NBA VP를 지낸 로드 쏜이 처음 연락한 멤버가 조던이었다. 그러나 조던은 이미 금메달도 있는데다가 "올림픽에 나가 혼자 고생하긴 싫다"며 다른 정상급 선수들의 참여 여부에 따라 결정하겠다고 했고 이에 따라 매직 존슨, 래리 버드, 찰스 바클리등 당대 최고 스타들로 구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던이 선수촌 입소 못한 걸 아쉬워했는지 여부는 다큐멘터리에 나오지 않으나 조던이 거의 매일 척 데일리 드림팀 감독과 골프를 치며 친해졌다는 내용은 나온다. 또한 골프 치고, 연습하고, 밤새 카드 치고, 잠깐 눈 붙이고, 경기하고를 반복하자 동료들이 그의 괴물 같은 체력에 놀라며 질려하는 모습이 나온다.[39] 1990년대 전까지 한국도 농구 자체의 인기는 상당했지만 NBA의 인지도는 낮았기 때문에 이충희, 김현준, 허재 등에 열광하던 올드팬들이 NBA는 모르면서 '농구를 세상에서 제일 잘하는 미국선수' 정도로 언론에서 떠들어대던 조던에 대해 아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조던은 단순한 농구선수가 아니라 문화 아이콘이자 전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스포츠 브랜드 상품명이기도 했기 때문에 NBA는 잘 몰라도 조던에 대해서 대충이나마 아는 사람은 지금도 많다.[40] 다만, NBA와 비교했을때는 몰라도 '농구보다 유명한 농구선수'란 건 성립이 불가능한 말이다. 농구란 종목 자체를 모를 정도로 스포츠에 관심이 없거나 낙후된 지역이라면 마이클 조던이란 이름을 접할 가능성은 더더욱 적은데다, 조던이 유명세를 탄 계기가 스포츠용품 및 스포츠 경기에서 기반한 것이고(NBA를 모르면서 조던을 아는 사람들 대부분이 '농구 겁나 잘하는 외국인' 정도로 막연하게 아는 경우다.), 전세계에 퍼져나간 것도 광고와 대중문화 출연 덕분인데, 농구를 모를 정도로 대중문화를 접하는 빈도수가 적은 사람들이 저런 광고나 방송만 볼 확률은 극히 적기 때문.[41] 예전에는 큰 선수들은 당연히 골밑 플레이를 익혔으나 장신임에도 다재다능한 롤을 소화하는 매직과 버드의 등장은 1970년대생 선수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센터급 체격을 가진 선수들이 다재다능한 포워드가 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 매직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대표적인 선수들로 크리스 웨버케빈 가넷이 있는데, 특히 가넷은 첫 올스타전에서 매직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이 손 안 씻을 거에요!"라고 카메라를 향해 농담할 정도로 매직을 존경한다.[42] 매직과 버드가 각각 자바, 패리쉬라는 뛰어난 센터와 함께였다.[43] 현재는 가드나 포워드들 사이에서 훅 슛 등 골밑에서 득점기술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지만(돌파에 이은 레이업과 다른 개념이다) 대신 3점 슛이 기본 소양으로 자리잡아, 현재 3점 슛을 아예 못 쏘는 1~3번은 매우 드물고, 반대로 3점 슛을 수준급으로 쏘는 빅맨들이 많아졌다.[44] https://www.nbcsports.com/chicago/bulls/nba-renames-mvp-trophy-after-bulls-legend-michael-jordan[45] 참고로 조던은 커리어 통산 NBA 파이널에 6번 진출했고 6번 모두 우승했으며, 6번 모두 MVP에 선정되었다. 이 때문에 국내 한정으로 조던에게 털린 선수들의 팬들 사이에서 666 대악마 드립이 돌기도 했다.[46] 1991년, 1992년, 1996년, 1998년의 경우, 시즌 MVP까지 동시 수상하는 위엄을 선보였다.[47] 루키 시즌인 1985년, 부상으로 시즌을 접다시피한 1986년, 1차 은퇴 시기인 1994년과 1995년을 제외하면 1998년 2차 은퇴 시기까지 한 해도 득점왕을 놓친 적이 없다. 2위가 그 유명한 윌트 체임벌린의 7회인데 조던은 그걸 연속으로 하고도 한 번의 은퇴 번복 후에 세 번 더 연속으로 했다. 워싱턴 시절 포함 시즌 평균 득점 30.1점 / 플레이오프 평균 득점 33.4점으로 1위이다.[48] 1986년 올스타전은 부상으로 뛰지 않았다. 실제 출전은 13회.[49] 무려 가드 출신 수상자이다. 수비수상 특성상 포워드-센터 포지션 선수가 타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업적이다. 역대 가드 출신 수상자로는 마이클 조던과 게리 페이튼을 포함한 6명이 전부이고, 이 시즌에 생애 첫 정규시즌 MVP와 함께 득점왕, 올해의 수비수상을 모두 수상하며 말 그대로 공격과 수비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했다.[50] 해당 경기에는 앨런 아이버슨도 있었으며 그는 경기 종료 후 영원히 조던을 그리워할 것이라고 인터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