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츠모토 마사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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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스승과 생애
3. 유파 및 제자
4. 평가



1. 개요[편집]


1466 ~ 1524
松本備前守政信 마츠모토 비젠노카미 마사노부.

일본의 양대 검성 츠카하라 보쿠덴카미이즈미 노부츠나의 스승.


일본 검술 중흥의 조 이이자사 이에나오의 수제자이자. 츠카하라 보쿠덴의 스승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인물이면서, 카미이즈미 노부츠나의 스승일 가능성도 낮지 않은 대단한 인물로, 카시마 신류(鹿島新流)의 창시자.


2. 스승과 생애[편집]


1466년 카시마진구(鹿島神宮) = 카시마신궁의 신관인 마츠모토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첫 이름은 모리카츠, 이후 나오카츠로 개명한 후, 몇 번 더 개명한다.

마츠모토 가문은 히타치 카시마 가문의 4숙로 중 하나로(鹿島神宮祝部四宿老の一人), 대충 신관으로 신분은 높지만 영지자체는 소 다이묘인 카시마 씨를 대대로 모시는 중요 부하 가문 정도였다고 생각하면 될 듯 하다. 참고로 검성 츠카하라 보쿠덴의 친아버지인 우라베 아키타카 역시 카시마 가문의 신관 중 하나였다.

스승은 앞서 말했듯이 이이자사 이에나오이나, 카시마신궁에는 관동 칠류라는 전래되어 오는 고무술이 있었기에 양자의 영향을 모두 받은 것으로 보인다. 카시마 신류(鹿島新流)의 일화로는 마츠모토 마사노부가 카시마 신궁에 기원하여 미나모토 요시츠네가 봉납했던 비서를 발견하여 카시마 신류를 창건했다고 한다.. 스승인 이이자사 이에나오의 일화의 너프판이다.

1488년,. 21살때는 상락하여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히사를 알현하여 히사=尙 한글자를 하사받아 이름을 다시 마츠모토 히사카츠로 개명한다. 그리고 이 해 스승인 이이자사 이에나오가 향년 102세로 사망. 다음 해에는 검성 츠카하라 보쿠덴이 카시마의 신관인 우라베 가문에서 태어난다.

1504년, 카시마 가문의 일족들과 지족들의 대립이 본격화 된다. 애초에 무로마치 시대 관동은 이미 오닌의 난으로부터도 무려 백 오십여년 전부터 전란이 계속되고 있는 곳이었고[1] 어쨌든 그로 인하여 가문의 신하들과 일족들의 내분이 계속되었는데, 그러다가 1514년 당주인 카시마 카게모토가 전사. 새롭게 당주로서 동생이던 카시마 요시모토가 자리에 오르나, 요시모토의 나이도 어렸고 인망도 없었으며 요시모토의 심복이자 츠카하라 보쿠덴의 제자였던 타마츠쿠리 히타치노스케가 악정을 펼쳐 신임을 잃었다고 한다. 이에 마츠모토 마사노부를 포함한 카시마 가문의 4숙로들은 히타치의 유력가문이던 다이죠 씨, 에도 씨 등과 손잡고 주군인 요시모토를 추방한 후 다이죠 타카모토의 동생을 카게모토의 첫째 딸과 결혼시킨후 카시마 가문의 양자로 삼아 다이묘로 삼는다. 특히나 이 일에는 마츠모토 마사노부 본인과 그의 동생의 활약이 컸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확실하게 현 주군에 대한 반역이었으며, 특히나 이러한 카시마 4숙로들의 독단적인 행동은 츠카하라 보쿠덴과 츠카하라 씨 같은 카시마 지족들의 반발을 부른다. 결국 요시모토는 1524년, 츠카하라 보쿠덴 등의 카시마의 지족들을 소집하여 설욕의 군대를 조직. 700여명의 병사들을 모집하여 카시마 성에 쳐들어간다. 이에 마츠모토 마사노부 역시 군대를 동원하여 전투를 벌였다. 무려 57세의 마츠모토 마사노부는 이 전투에서 일기토 23회, 이름있는 자의 목 25개, 잡졸의 목 76개를 취하는 말도 안되는 활약을 보였다고 하나, 결국 마침내 전사하여 향년 57세로 사망한다. 츠카하라 보쿠덴이 이 전투에 참전했다는 설에 의하면 츠카하라 보쿠덴 역시 이 전투에서 크게 활약했다고 한다.


3. 유파 및 제자[편집]


마츠모토 마사노부는 이이자사 쵸이사이 이에나오에게서 카토리 신토류를 배웠으며, 카토리 신토류의 검술들을 정리하고, 기술들을 완성했다고 하며, 카시마 신류를 창시한다.

또한 카미이즈미 노부츠나와 츠카하라 보쿠덴의 각각의 스승. 혹은 그 아버지들의 스승이었다는 설이 존재하고,
또한 츠카하라 보쿠덴의 오의인 일의 태도 역시 마츠모토 마사노부가 개발하여 츠카하라 보쿠덴에게 전수했다는 설, 혹은 양부에게 전수해서 양부가 보쿠덴에게 전수했다는 설이 존재한다.


4. 평가[편집]


어린 나이로 쇼군 앞에 불려가서 이름을 하사받고, 57세의 나이로 무쌍을 펼친 것, 일본 역사에서 제일 강한 사람 2명의 스승이라는 설들까지 있다면 실력면에서는 정말 최강에 가까웠던 검호였음에는 분명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인물을 크게 높이 평가할 수 없는 이유는 결국 확실한 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카미이즈미 노부츠나의 스승이라는 말이 있으나 어디까지나 설들 중 하나일 뿐이고, 무엇보다 노부츠나 본인부터가 카게류를 이어 신카게류를 창시하는 등 아이스 히사타다의 계보를 이은 것을 자칭 혹은 제자들이 주장했으니 스승이었다고 해도 끽해야 "유명인 누구누구가 우리 중학교,고등학교 나왔다!" 정도의 소리 일 뿐이다.

츠카하라 보쿠덴의 스승이라는 말도 있으나, 역시 설들 중 하나일 뿐이다. 이쪽은 카미이즈미 노부츠나 스승 설보다는 둘이 지리적으로도 인적으로도 굉장히 가까운 사이였으니 훨씬 가능성이 높고 개연성도 높긴 하나, 츠카하라 보쿠덴은 특정 유파를 칭하지도 않았고, 유훈집 등에서도 누군가를 자신의 스승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

이이자사 이에나오의 카토리 신토류의 검술들을 정리하고 기술들을 발명했다는 것 역시 불명확하다. 실제로 그렇다고 해도 유파의 창시자에 비하면 당연히 격이 떨어지며, 무엇보다 주군 가문에 반역을 저지른 하극상을 시도하고, 심지어 실패하여 패사했다는 점, 소 다이묘도 못되는 수준의 작은 가문에서 벌어진 일 이라는 점에서 검호로서도 무장으로서도 인격면에서도 크게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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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카시마 가문의 내분도 당대에 벌어진 교토쿠의 난의 영향이었다는 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