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토 네레틀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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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토 네레틀랴크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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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 2007 · 2008




Hrvatska U-20 nogometna reprezentacija


파일:마토_감독.jpg

이름
마토 네레틀랴크
Mato Neretljak
K리그 등록명
마토
출생
1979년 6월 3일 (44세) /
유고슬라비아SFR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SR
오라치예

국적
[[크로아티아|

크로아티아
display: none; display: 크로아티아"
행정구
]]

신체
191cm | 체중 87kg
직업
축구선수 (수비수[1]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선수
NK 오라치예 (1999~2000)
NK 오시예크 (2000~2002)
HNK 하이두크 스플리트 (2002~2005)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05~2008)
오미야 아르디자 (2009~2010)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11)
HNK 하이두크 스플리트 (2012)
HNK 리예카 (2012~2014)
NK 자다르 (2013~2014 / 임대)
지도자
NK 오라치예 (2015~2016)
NK 메탈레예-BSI 야이체 (2016~2017)
NK 오라치예 (2017~2018)
GOSK 가벨라 (2018~2019)
크로아티아 U-20 (2019~ / 수석 코치)
NK 오라치예 (2019)
NK 즈비예즈다 (2020~2021)
국가대표
10경기 1골 (크로아티아 / 2001~2006)


1. 개요
2. 선수 경력
3. 은퇴 후
4. 플레이 스타일
5. 기타




1. 개요[편집]


크로아티아축구 감독. 마시엘, 아디(축구인)와 함께 K리그 역대 최고의 외국인 수비수로 꼽힌다.[2]


2. 선수 경력[편집]


2000년 NK 오시예크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고, 2002년에서 2005년까지 HNK 하이두크 스플리트에서 활약하였다. 이 때 04-05 챔피언스리그 2차 예선전에서 선발로 뛰었었다. 이 시기에 대표팀에도 뽑혔는데 독일과의 친선전에서는 비록 1대2로 패했으나, 종료 직전 코너킥 헤딩골을 넣기도 했다. 당시 골키퍼는 올리버 칸이었다. 유로 2004 23인 엔트리에도 뽑혔으나 본선에서 뛰지는 못했다.

2005년 K리그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이적하였다.

수원 이적 후 통곡의 벽이라 불릴 정도로 빼어난 수비력과 타점 높은 헤딩 수비수임에도 강력한 프리킥을 선보였는데 실제로 첫 시즌이던 2005년 수비수임에도 팀 내 최다 득점자라는 기록을 세웠다[3] 그 후 2006, 2007, 2008 시즌 연속으로 K리그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고 2008년 수원의 정규리그 우승에 절대적으로 기여했다. 다만 2008년에는 마토보다 이정수의 지분이 더 컸다고 평가받는다.

2008 시즌 종료 후 유럽 진출을 원하며 재계약을 거부하였으나 유럽이 아닌 J리그 오미야 아르디자와 연봉 1억엔에 계약을 맺었다.

J리그 진출 초반 컨디션 난조를 보이기도 햇으나 이내 적응해 8골로 팀내 최다득점자가 되었으며 변치않는 수비력으로 자칫 강등당할뻔한 오미야의 구세주가 되었다. 그러나 2년차부터는 스피드가 눈에띄게 저하되어 발빠른 일본 공격수들에게 농락당하는 모습이 자주 포착되었다.

그리고 2년만에 다시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복귀한다. 2011 시즌 초반에는 타점높은 헤딩으로 공중볼을 잘 걷어내고 프리킥과 헤딩으로 득점을 해내면서 역시 명불허전이라는 칭찬을 듣기도 했으나 시즌이 진행되어갈수록 이전보다 더 느려진 발 때문에 빠른 공격수들에게 신나게 털리면서 수원 팬들이 리웨이펑을 다시 찾게 만들었다. 심지어 최성환에게 주전 경쟁에서 밀리나 싶었으나 후반기 들어 다시 폼을 끌어올려 황재원, 곽희주가 부상으로 이탈한 수원의 수비진에서 한 시즌 내내 꾸준히 뛰어주면서 다시 성원을 받았다.

2012 시즌을 앞두고 방출되었다. 그 자리를 비슷한 스타일의 호주 출신 에디 보스나가 메꿨다.[4] 방출 이후에는 크로아티아 리그로 돌아갔다.

3. 은퇴 후[편집]


2014년에 은퇴하고 코치 연수를 시작했다. 그 해 여름에는 연수차 한국에 잠깐 왔는데 빅버드에 모습을 드러내서 팬들의 박수를 받기도 했다. 2015년 6월 27일 상암에서 열린 FC 서울과의 경기에서 과거 팀 메이트였던 이싸빅과 함께 응원차 방문했다.

2020년 현재 크로아티아 U-20의 수석코치이다.


4. 플레이 스타일[편집]


전성기 시절 마토의 플레이 스타일을 요약하자면 발은 느리지만 그 외 모든 것을 갖춘 육각형 수비수라고 할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190이 넘는 장신에다가 체격이 좋아 몸싸움 등 경합 능력이 좋으며, 위치 선정이 좋고 점프력도 좋아서 공중볼에도 매우 강했다. 여기에 좋은 태클 실력, 끈적끈적한 대인 마크 능력도 갖췄고, 좋은 위치 선정이라는 장점을 살려 수비 시 예측 판단을 통한 차단에도 능했다.

공격적인 측면에서도 장점이 확실했다. 크로아티아에서도 왼발 킥이 좋기로 유명했는데, 여기에 발기술도 나쁘지 않고 패스 셀렉션이나 시야 역시 좋아서 후방 빌드업을 맡길 수 있었다. 2011년 수원에 리턴했을때 롱패스를 이용한 카운터 어택을 쓸 경우 마토가 약간 전진한 후 왼발 킥으로 상대 페널티 에어리어로 공을 배달해준 것이 그 사례. 여기에 프리킥 상황에서 왼발 키커로도 활약했는데, 2006년 8월 13일 서울과의 FA컵 8강전에서 그림처럼 휘어들어가 김병지를 꼼짝못하게 만든 프리킥 골이 유명하다.[5] 2011년 수원에 복귀했을때는 염기훈이라는 역대급 왼발잡이가 있었음에도 프리킥을 나눠찼다.

여기에 앞서 언급한 공중볼이라는 장점이 공격시에도 고스란히 발휘되었다. 단단한 몸에 높은 타점으로 강력한 헤더를 꽂아버리니 상대 수비나 골키퍼 입장에서는 마토의 헤더를 막는 것도 큰일이었다. 덕분에 프리킥이든 코너킥이든 세트피스에서 마토는 수원의 훌륭한 공격 옵션으로 활용되었으며, 수원 공격진이 빈공에 시달리던 2005 시즌에는 마토가 팀 내 최다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런 공격력을 살리기 위해 마토의 전성기 시절 차범근 감독은 마토를 종종 레프트백으로 기용한 적도 있는데, 하술할 느린 발이라는 약점 때문에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않았다.[6]

다만 큰 체구의 반대급부로 발이 느리고 민첩성이 떨어졌다. 전성기때도 이 문제로 종종 뒷공간을 내주곤 했으며, 일본에서 수원으로 복귀한 2011년에는 노쇠화가 진행되어 이 문제가 한층 두드러졌다. 초반엔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는데 중반기 들어 이 문제점이 심히 부각되어 상대의 공략대상이 되는 바람에 실점위기를 자주 내줬다. 이러다보니 수비 파트너를 조금 타는 편인데, 2000년 후반 수원 센터백 중에 가장 준족이었던 곽희주와 궁합이 좋았던 것으로 유명했다.

5. 기타[편집]


  • 홍명보 이후 뚜렷한 대체자가 나타나지 않는 중앙수비진에 답답해하던 K리그 팬들 중에는 마토가 귀화해서 대한민국 국대로 뛰기를 은근히 바란 팬들도 많았다. 그렇지만 어차피 길진 않아도 크로아티아 대표팀에선 뛴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귀화했어도 한국국대는 애초에 뛸 수가 없었다. 2001년 4월 25일 벌어진 그리스와의 친선 경기에서 데뷔했고, 유로 2004에서 크로아티아의 23인 엔트리에 포함되었지만 경기에 출전하지는 못했다. A매치 첫 골은 2004년 2월 18일 벌어진 독일전에서 기록했고(이때 독일의 골키퍼가 올리버 칸) 2006년 홍콩에서 열린 칼스버그컵에서 두 경기에 대표선수로 출전하여 한국대표팀과 맞대결했다.[7] 국가대표팀 변경이 조금 널널해진 지금이라면 가능성이 있었을지도 모르나, 당시에는 FIFA나 UEFA가 주관하는 메이저 대회 및 그 예선 경기에 출전한 이력이 있으면 대표팀을 바꿀 수 없었다.

  • 2007년 미국에서 열린 월드시리즈 오브 풋볼 2007 대회에서 첼시와 수원이 맞대결했는데, 첼시의 셰브첸코드록바를 준수하게 막아내서 마토를 잘 모르던 해축팬들이 많이 놀란 적이 있다.

  • 2008시즌 종료후 성남 일화의 이적제의를 받았으나 자신을 응원해준 그랑블루를 위해서라도 K리그의 다른 팀에서 뛸수는 없다며 거절했다.



  • 수원으로 이적한 이유는 수원의 이적료가 제일 높았기 때문. 당시 함부르크, 슈투트가르트, 베르더 브레멘, 페예노르트등의 팀들이 수원과 같이 오퍼를 넣었는데 이적료가 가장 높았던 수원을 택해서 친정팀에 돈을 안기고 싶었다고한다. 2003년 즈음 UEFA 컵 예선 경기에 나선 그를 차범근 감독이 눈여겨보고 이적을 요청했다고 알려져있다.

  • 귀염둥이 딸아이를 둬서 한때 화제가 되기도 했다.##

  • 한국에서 얻은 별명인 '통곡의 벽'을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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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센터백[2] 3명 중에선 가장 한국에서 오래 뛰었고 센터백과 풀백, 미드필더 모두 빼어났으며 말년까지 기복없이 꾸준했던 아디가 꼽힌다.[3] 다만 이 시즌은 수원 공격진들이 심각한 부진을 겪던것도 한몫했다.[4] 공교롭게 크로아티아호주[5] 당시 1:2로 뒤진 상황에서 종료 5분을 남기고 들어간 동점골이었다. 이 동점골에 힘입어 수원은 승부차기까지 끌고가는데 성공했고 서울 7번째 키거 김치곤의 실축에 이은 조원희의 마무리로 승리를 거머쥐었다.[6] 참고로 차범근은 2006년에 마토를 레프트백으로, 발 빠른 곽희주를 라이트백으로 기용하면서 마토-이싸빅-이정수-곽희주의 포터백 백4를 구성한 적이 있다. 성공 여부와는 별개로 넷 다 공중볼 경합을 비롯한 공격적인 기여에 일가견이 있는 선수라는 점이 재밌다.[7] 당시 같은 수원삼성 소속의 팀 메이트였던 조원희와 강력한 몸싸움을 벌이면서 볼 다툼을 벌이다 둘이 같이 넘어지는 장면이 있었는데 서로 일으켜 세워주면서 격려하던 모습이 수원팬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자랑거리로 회자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