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마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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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마사코
(もり (まさ( | Masako Mori


파일:external/www.officiallyjd.com/20110823_uchino_06.jpg

본명
(もり( (まさ( (모리타 마사코, Masako Morita)
출생
1958년 10월 13일 (65세)
도치기현 우츠노미야시
국적
[[일본|

일본
display: none; display: 일본"
행정구
]]

가족
장남 모리우치 타카히로(1988년생)
차남 모리우치 토모히로
삼남 모리우치 히로키(1994년생)
직업
가수, 배우
소속사
음악 공방(おんがく工房)

1. 개요
2. 상세
3. 여담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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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가수, 배우이다. 70년대 사쿠라다 준코, 야마구치 모모에와 함께 꽃의 중3 트리오로 불리었다. 외모는 트리오 중 가장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으나[1] 순진한 인상과 넘치는 끼, 세 사람 중 최고로 평가받는 가창력으로 두 사람 못지 않은 인기를 누렸다.[2]

동시에 1985년 기준으로 NHK 홍백가합전에서만 출장 횟수가 두자릿수가[3] 넘어가고 토리를 2번 이상 맡았으며[4] 동시에 사회까지 맡은[5] 당시 20대 여가수 중 가장 경력이 화려한 가수이다.


2. 상세[편집]


  • 1971년 인기 오디션 프로그램 <스타 탄생!>에 참가해 초대 우승자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 1대 챔피언이 아니라, <스타 탄생!>에서 배출한 우승자 중 가장 먼저 기획사에서 계약을 원했고 성공한 우승자이다. <스타 탄생!>의 프로듀서이자 유명 작사가인 아쿠 유의 일대기를 그린 드라마에서 모리 마사코가 등장하는데, <스타 탄생!>은 최초 방영 당시 참가자들의 수준도 그다지 높지 않았고 시청률도 아슬아슬한 편이었다. 그러나 미야코 하루미의 노래를 기가 막히게 잘 부르는 12세 소녀, 모리 마사코가 등장하면서부터 방송은 자리를 잡았고 이 프로의 출연자들에 대해 기획사에서 주목하게 되었다.

  • 사실 전 우승자들은 어느 기획사에서도 계약할 의사가 없었는데, 모리 마사코만은 수많은 기획사가 동시에 계약 의사를 밝혔다고.[6]

  • 다음 해 7월, ‘선생님 (せんせい)’ 이라는 곡으로 데뷔했는데 엄청난 히트를 쳤다. 지금도 모리 마사코의 대표곡이라고 하면 ‘선생님’을 꼽는다.

  • 그리고 한국과 연관이 있는 부분이 있다면, 조용필돌아와요 부산항에 (釜山港へ帰れ)를 리메이크해서 부르기도 했다. 사실, 일본에서는 엔카가 대세라 한국식 트로트곡이 리메이크가 된 사례가 그리 많지 않은데, 1980년대에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엄청나게 대히트를 쳤고 엔카의 여왕 미소라 히바리, 야시로 아키, 등려군, 등등 일본에서도 수많은 유명 엔카가수들이 리메이크를 했다.


  • 2005년 10세 연상의 모리 신이치와 이혼했는데, 이혼의 제일 첫 원인으로는 부부가 모두 현직에서 가수 활동을 하다 보니 부부 공동 출연으로 콘서트를 개최하는 게 사실 마사코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고 한다. 다른 부업으로 일을 양립시켜서 가정을 돌봐야하는 것에 심적으로 부담이 크던 것이다. 이로 인해 부부의 홈이 더욱 깊어지기 시작했다.

  • 2005년 2월에 모리 마사코가 공황장애가 원인이 되어 집에서 갑자기 호흡 발작으로 의식을 잃고 쓰러져 중환자실에 입원해 위 세척까지 받았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병이 어느 정도 낫지 않았는데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동으로 옮겼는데 옮긴지 하루 만에 마사코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신이치가 의사에게 퇴원을 요청해 결국 마사코가 동의하고 불과 하루 만에 퇴원했는데, 이게 연예계에서 다양한 추측을 불러 일으켜 여러 언론에 불화설이 거론되고 후에 이혼으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 2005년 3월에 모리 신이치와 별거를 시작하고 4월 19일 공식 이혼을 발표했다. 아들 3명 모두의 양육권은 마사코에게 넘기기로 합의하고 양육비는 1인당 13만엔(한화 약 130만원) 으로 총 39만엔(한화 약 400만원) 을 모리 신이치가 부담하는 걸로 합의했다.

  • 이혼 후 연예계에 복귀할 때, 20년 만의 신곡 <장밋빛 미래>로 2006년 홍백가합전에 출전했는데 출전 이전에 일각에서 '모리 신이치와 경연이 이루어지는 것 아닐까'라고 시사했지만 결국 마사코가 순서를 늦춰서 두 사람이 같은 무대에 서는 장면은 못 보게 되었다. 당연하지

  • 이후 2007년부터는 10년 넘게 홍백가합전에 출전하지 않고 있다.

  • 경력도 경력이고[7]1983년 '엣토 츠바메'라는 노래로 일본 레코드 대상을 수상한지라, 가수들 사이에서는 대선배로 항상 어르신 대접을 받는다. 어느 프로에서는 '오고쇼' 라고 소개할 정도.

  • 2009년, 가키노츠카이의 ‘절대 웃으면 안되는 시리즈’ 호텔맨 편에 게스트로 나와 데뷔 당시의 헤어스타일과 복장 그대로 ‘선생님’ 을 불렀다. 결과는 당연히 전원 아웃. 웬만해서는 동요하지 않는 하마다 마사토시가 매우 놀란 표정을 지었다.

  • 2007년 이후 어떤 원인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병치레가 잦는 일이 많은 것 같다. 2007년 9월에 컨디션 불량을 호소하고 급성폐렴 증세가 나타나 급히 병원에 입원했는데 이로 인해 이 날 예정되었던 구마모토 콘서트가 펑크난 일도 있었다.

  • 2009년 5월에는 자궁근종 수술, 2010년경부터는 폐경과 빈혈, 데뷔 당시의 가창력을 잃었다고 생각해 우울증에 빠졌던 적도 있었다.

  • 2010년 5월에는 다시 자궁 경부암으로 자궁을 모두 적출하는 대수술을 치렀다.


  • 2019년 12월 25일 마지막 콘서트를 개최했다. 영상


3. 여담[편집]


  • 데뷔 당시에는 보이시한 헤어스타일로도 유명했다. 그래서 붙었던 별명이 '몬치치'(モンチッチ)[8]였다.

  • 치비마루코쨩에서 주인공 마루코가 이발소에서 머리를 자르러 왔다가 야마구치 모모에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잘라달라고 했는데, 이발사가 사진 옆에 있는 모리 마사코의 사진으로 착각하여 그만 머리를 짧게 잘리게 된다. 이 때 깜짝 놀라면서 "내가 모리 마사코처럼 되다니?" 하면서 놀라는 장면이 나온다. 치비마루코쨩의 시대배경으로 1980년대의 유명한 일본 아이돌을 소개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 트리오 중에 유일하게 홍백 사회를 맡았으며 출연 횟수도 가장 많다. [9]

  • 미소라 히바리가 유독 모리 마사코를 귀여워했다고 한다. '내 뒤를 이을 사람은 마사코 뿐' 하고 늘 칭찬했고, 홍백 무대에 같이 출전할 정도. 나중에는 히바리가 본인의 집에서 묵고 가도록 했을 정도로 가까워진 듯. 그런 고로 미소라 히바리의 사망 후 장례식과 추도식에서는 모리 마사코가 항상 앞자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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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일:1986년 결혼.jpg 그것도 준코와 모모에가 전형적인 미인이라 그렇지, 마사코도 귀엽고 상큼한 인상의 미인이다. 위의 사진은 많이 보이시하게 나왔지만 조금 더 긴 머리의 사진을 보면 둘에 떨어지지 않는 매력이 있다. 더군다나 모모에의 은퇴 이후 위 결혼사진에서 보면 알 수 있듯 80년대 중반의 스타일은 둘을 가히 압살할 정도로 청순하다.[2] 특히 아그네스 챤, 미야코 하루미, 고야나기 루미코 등 각종 가수들의 성대모사를 기가 막히게 잘했다.[3] 13회[4] 81, 85년[5] 85년[6] 아쿠 유는 이대로 계속 출연자들의 수준이 낮아서 시청률도 기획사의 지원도 계약도 들어오지 않으면, 프로그램 폐지까지 고려 중인 단계였다고 한다.. 모리 마사코의 우승으로 인해 이 프로그램이 주목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생전의 아쿠 유는 모리 마사코를 매우 아꼈다고 한다.[7] 27세에 홍백 출전횟수 13회 달성. 1980년대 초반 20대 여가수 중 출장횟수 1위, 20대에 홍백 2연속 토리를 경험한 여가수.[8] 1972년에 발매된 원숭이 인형. 지금도 팔리고 있으며 구글에서도 검색하면 볼 수 있다.[9] 1차 은퇴 직전에 출장한 홍백이었는데 사회에다가 가문의 영광이라는 토리를 2번째로 맡았다!! (…) 그래서 마지막에 출장곡인 애상가를 부를 때 감정에 휩쓸려 노래를 부르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 홍백 최고의 명장면이라 불리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