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민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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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심서
牧民心書


파일:목민심서1.jpg

출간
1818년 (순조 18)
편저
정약용
권수
48권 16책
소장
장서각
1. 개요
2. 내용
3. 여담
4.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오늘날의 백성을 다스리는 자[1]

들은 오직 거두어들이는 데만 급급하고 백성을 부양하는 방법은 알지 못한다. 이 때문에 하민들은 여위고 병들어 줄지어 굶어죽은 시체가 구덩이를 메우지만 다스린다는 자들은 바야흐로 고운 옷과 맛있는 음식에 자기만 살찌고 있으니,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목민심서 서문 中

다산 정약용이 저술한 책이다. 제목의 뜻은 목민할 마음만 가졌지 몸소 시행할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라고 다산 본인이 밝혔다. 혹은 목민관이 가져야 할 마음(牧民心), 백성을 다스리는 마음에 관한 책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내용적으로는 수령, 관리가 걸어야 할 올바른 길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즉 관리, 윗사람으로서의 솔선수범, 청렴함 등을 강변하고 있는데 사실 실질적인 행정 업무 설명서적인 성격도 강하다. 또 관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으로만 해석할 것이 아니라 현대에 시민으로서, 그리고 책임을 가진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로 의미를 확장해서 읽으면 부정한 상사(上司)에게 굴해서는 안 된다는 말 등 굉장히 유익한 내용이 많다(함부로 따라하면 작자처럼 귀양가기도 한다). 책 자체의 평가는 매우 높다.

저자인 정약용은 1801년 순조 1년 일어난 천주교 박해인 신유박해에 휘말렸다. 이 사건은 노론 벽파의 주도로 남인을 주축으로 한 정조의 친위세력인 시파(時派)를 완전히 몰락시킨 사건이다. 남인 청류당 계열 가운데 이가환, 이승훈 베드로[2], 정약종 아우구스티노[3], 이벽 세례자 요한, 권철신 암브로시오 등의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했다. 정약용은 겨우 살아남아 16년간 귀양살이를 보내게 되며, 이런 유배 생활에서 쓰여 진 것이 바로 목민심서이다.

이런 내용과는 별도로 정약용의 개인적인 주관 등이 들어가서 의외의 재미가 있다. 논어를 딱딱한 책으로 생각하고 처음 읽어 본 사람이 공자가 제자의 뒷담화를 하는 장면이나 제자가 공자에게 반항하는 장면 등을 읽으면서 놀라는 것과 비슷하다. 당시 목민관들 사이에 돌던 '업계의 속사정'이라든가, 시장터에서 골목대장 행세를 하는 자를 묘사한 장면 등 가볍고 재미있는 부분이 많다. 정약용 개인 취향이 보이는 부분도 있는데 나라에서 식량을 절약하기 위해서 금주령을 내리면 설사 서울에 끈이 있는 지방의 토호라고 할지라도 잡아다가 엄단할 것을 설파하던 분이 '농주는 식사대용도 되니까 그냥 넘어가라......'고 약해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총 분량은 부임(赴任)·율기(律己, 자기 자신을 다스림)·봉공(奉公)·애민(愛民)·이전(吏典)·호전(戶典)·예전(禮典)·병전(兵典)·형전(刑典)·공전(工 典)·진황(賑荒)·해관(解官, 관원을 면직함) 12편이며, 각 편을 6조로 나누어서 총 72조로 구성한다.

목민심서는 크게 두 가지의 이본(異本)이 있다. 하나는 1817년 강진(康津)에서 이루어진 초고본이고 다른 하나는 이 초고본을 수정ㆍ가필하여 1821년에 마현(馬峴)에서 마무리한 완성본이다. 완성본에는 초고본의 조명(條名)을 다소 바꾸고 문장을 수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역대 중국과 조선의 순리(循吏)들의 선행(善行)에 관한 사례를 대폭 증보했기 때문에 책의 분량이 3분의 1 이상 증가하였다.



2. 내용[편집]


  • 부임육조
목민관으로 발령을 받고 고을로 부임할 때 유의사항이다.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며, 나라에서 주는 비용 외에는 한 푼도 백성의 돈을 받아서는 안 되며, 일을 처리할 때는 공과 사를 분명히 구분해야 하고, 아랫사람들이 자신 모르게 백성을 괴롭히는 일이 없도록 단속해야 한다.
  • 제배(除拜, 임명 받기): 수령의 직분을 매관매직을 피하며, 새 수령 맞이용 말의 비용은 이미 나라에서 주니 백성들에게 돈을 거두지 말아야 한다.
  • 치장(治裝, 행장 꾸리기): 검소한 복장을 해야 하며, 고사, 시집, 의서, 병서 등등 책들을 많이 구비해야 한다.
  • 사조(辭朝, 조정에 하직하기): 자신을 추천한 전관에게 사사로히 감사를 표하지 말고, 맞이하러 온 이방이 가라치는 팁이 담긴 읍총기를 주면 즉시 돌려주고, 이방에게 고을의 큰 폐단을 듣고 감사에게 바로 잡을 방법을 의논해 봐야 한다. 맞이하러 온 이방과 하인에게 장중하고 화평하게, 또 간결하고 과묵히 접대해야 마땅하다.
  • 계행(啓行, 부임 행차): 일찍 출발하고 해가 지기 전 일찍 쉬도록 하되, 하인들이 밥 먹고 시작하도록 수리[4]에게 말해 준다. 미신을 물리치고 제 길로 가면서 이웃 선배 수령들을 맞이해 업무에 관해 물어봐야 하고, 취임 전 하룻밤은 백성들 폐 끼치지 않게 이웃 고을에서 자야 한다.
  • 상관(上官, 취임): 길일을 기다리지 말고 비가 없는 빠른 시일날 취임하여 아전과 하인들을 모아 인사한다. 그 후 고을 백성들을 다스릴 준비를 한다.
  • 이사(莅事, 업무 시작하기): 이튿날 새벽에 출근한여 상급관청에 올리는 보고 중 전례에 따라고 좋은 건 바로 서명하고 사리를 따져야 할 것은 글을 다듬어 아전들에게 다시 쓰도록 한다. 민간에게의 명령은 꼼꼼히 검사하여 의심가는 건 수리와 담당 아전한테서 조사하여 본말을 안 후 서명한다. 백성들에게 고을 폐단에 대해 의견을 구하고 그 폐단에 대해 최대한 서명을 미루고 개혁을 도모한다. 모든 관청일에는 기약일을 넉넉히 주선할 수 있게 한 다음 이를 분명히하고 거듭 알린 후에도 기약일을 어기는 사람은 약속대로 벌을 시행한다. 화공을 구해 고을 지도를 그려 관아 벽에 걸어 두도록 한다.

  • 율기육조
율기는 '몸을 다스리는 규율'이란 뜻으로서 목민관이 지켜야 할 생활 원칙이다.
  • 칙궁(飭躬, 바른 몸가짐): 목민관은 몸가짐을 절도 있게 해서 위엄을 갖추어야 한다. 위엄이란 아랫사람이나 백성들을 너그럽게 대하는 동시에 원칙을 지키는 것을 통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다.
  • 청심(淸心, 청렴한 마음): 마음가짐은 언제나 청렴결백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청탁을 받아서는 안 되며, 생활은 언제나 검소하게 해야 한다.
  • 제가(齊家, 집안을 다스림): 집안을 잘 다스리는 것도 목민관의 중요한 덕목이다. 지방에 부임할 때는 가족을 데리고 가지 말아야 하며, 형제나 친척이 방문했을 때는 오래 머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 병객(屛客, 청탁을 물리침): 이는 쓸데없는 청탁이 오가고 물자가 낭비되는 일을 막기 위해서이다.
  • 절용(節用, 씀씀이를 절약함): 모든 것을 절약하고 아껴야 한다.
  • 낙시(樂施, 베풀기를 좋아함): 이 아낀 걸로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 또한 목민관이 지켜야 할 원칙이다.

  • 봉공육조
목민관의 업무 내용과 그 처리 방법을 자세하게 제시한다.
  • 선화(宣化, 가르침을 펼침): 목민관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임금의 뜻을 백성에게 잘 알리는 일이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교문(敎文)이나 사문(赦文)과 같은 공문서를 각 고을로 내려 보내는데, 글이 너무 어려워 일반 백성들이 그 뜻을 이해하기 힘들었으므로 목민관은 이것을 쉽게 풀어써서 백성들에게 알려 주어야 한다.
  • 수법(守法, 법도를 지킴): 목민관은 법을 잘 지키는 한편 지방에서 내려오는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는 데 힘써야 한다.
  • 예제(禮際, 예의있는 교제): 상대에게 예의에 맞춰 백성에게 화가 미치지 않도록 하고 특히 친분이 있더라도 감사와 감영에게 예를 극진하게 할 것이다. 상급관청이 아전과 하인들을 조사하면 지위에 맞게 순종하되, 악의 없이 과오로 나온 경우에는 죄인을 호송하는 문서에 사정을 해명하고 용서를 빈다. 만약 악의가 있을 경우엔 사직서도 써서 같이 제출해서, 감사가 굽혀서 사과하면 정서를 볼 것이고, 아니고 무례하게 굴면 사직하라.
  • 문보(文報, 보고서): 공문서는 정해진 기간 내에 완벽하게 처리해야 한다.
  • 공납(貢納, 공물 바치기): 또한 공납과 같은 세금을 공정하게 징수해서 아전들이 부정을 저지르는 일이 없도록 철저히 단속해야 한다.
  • 왕역(往役, 차출되는 일): 외국 선박이 표류해 들어온 경우에는 예의를 갖춰 잘 보살펴 주어야 하며, 그들에 관한 모든 것(배의 모양, 크기, 문자 등)을 빠짐없이 기록해 상부에 보고해야 한다. 이 때 그들의 좋은 점은 보고 배워야 하며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 애민육조
백성을 사랑하는 방법이다.
  • 양로(養老, 노인 봉양): 목민관은 노인을 공경하고 불쌍한 백성을 보살펴야 할 의무가 있다.
  • 자유(慈幼, 어린이를 보살핌): 백성들을 타일러 자기자신들의 자식들을 기르게 하고 내버려진 아이들은 거두어주고 길러주어야 한다..
  • 진궁(振窮, 가난한 자를 구제함): 특히 4궁(窮), 즉 홀아비, 과부, 고아, 독거노인을 구제하는 데 힘써야 한다.
  • 애상(哀喪, 상을 당한 자를 도움): 집안에 초상이 난 사람에게는 요역(徭役)을 면제해 주고
  • 관질(寬疾, 병자를 돌봄): 환자에게는 정역(征役)을 면제해 주어야 한다.
  • 구재(救災, 재난을 구함): 목민관은 자연 재해가 나지 않도록 항상 대비해야 하며, 재해가 생겼을 때는 백성들을 위로하고 구호하는 데 힘써야 한다.

이전편부터 공전편까지는 각 방의 세부 업무에 대해 설명한 부분이다. 조선 시대의 지방 행정 조직은 수령 아래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의 육방의 업무를 총괄하는 책임자이므로, 마땅히 모든 업무를 빈틈없이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 이전육조
    • 속리(束吏, 아전을 단속): 아무리 학문이 뛰어나더라도 아전을 단속할 줄 모르면 백성을 다스릴 수 없다. 아전을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목민관 스스로 자기 몸을 잘 다스려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목민관은 아랫사람을 은혜로 대하고 예로 바로잡아도 고치지 않고 세력을 믿고 속이는 자이면 법으로 단속해야 한다. 단속 후 비석을 세우고 이름을 새겨 영구히 복직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너그러우면서 권한이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있도록 하여, 조종하며 통제하는 모든 일이 다른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도록 한다. 모든일에 먼저 자신의 견해를 세워 바깥의 사물에 흔들리지 않고 노여움을 다른 데로 옮겨 풀지 않고 무릇 한 가지 명령과 한 가지 지시서를 내릴 때라도 마땅히 수리와 해당 아전에세 그 일의 근본과 지엽 등 자세히 알아보고 난 뒤에 결재를 하면 아전의 꾐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감사가 아전으로 수령을 염탐하기 때문에 아전에게 빌붙어 자신의 불법을 덮고자 하는 미련한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취임한지 몇달이 지나거든 아전들의 이력표를 만들어 책상에 놓아서 연초에 해당 아전에 맞는 요긴한 직책을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 어중(馭衆, 관속들을 통솔함) : 청렴함에서 위엄, 성실함에서 믿음을 얻어 뭇사람을 복종시킬 수 있다. 관노 중 수령은 말이 없는데 나서서 꾸짖고 치라 명령하면 엄하게 다짐해두고, 어기는 자는 처벌해야 한다. 기생보단 수급비들을 보살펴 준다.
    • 용인(用人, 사람 쓰기) : 백성을 잘 다스리려면 무엇보다도 인재를 등용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할 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고을에서 가장 착한 사람을 향소로 골라 수령을 보좌하게 한다. 향원에서 옛 좌수들을 후보삼아 투표를 하여 1위는 좌수, 2위는 부승으로 임명한다. 아첨 잘하는 자는 충성스럽지 못하고, 간쟁하기 좋아하는 자는 배반하지 않는다. 무반은 모두 굳세고 씩씩하여 적을 막아낼 기색이 있어야 한다. 관리를 뽑을 때는 충성과 신의를 첫째 기준으로 삼아야 하며, 재주나 지혜는 그 다음으로 보아야 한다
    • 거현(擧賢, 인재의 추천) : 인재를 추천하는 것은 수령의 임무이다. 관내에 귀한 이와 어진 이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 마땅하며 명절마다 술과 고기를 계속 보내야 한다.
    • 찰물(察物, 물정을 살핌) : 수령은 우뚝 고립되어 있어서 자신이 앉아 있는 자리 밖에 있는 사람은 모두 속이려는 자들이다. 눈을 사방에 밝히고 귀를 사방에 통하게 해야 한다. 아전과 향청직원, 군교들의 간사하고 교활함이 저절로 행사되지 못하게, 관노비와 별졸들이 몰래 민간에 나가 토색질하고 행패 부리는 것, 또 불효불공하고 장터에서 횡탈을 일삼는 것, 향촌에서 무력으로 행하거나, 힘을 믿고 약한 이를 업신여기는 자를 금해야 하니, 별도로 염탐 및 조사가 필요하다. 부임 초기에는 2-3차례, 그 후엔 4계절의 마지막 달에 1차례씩 향통을 마을에 놔둬 신고를 2-3일 받은 후 지적된 잘못한 바를 고칠 것이고, 민폐를 개혁할 것이요, 무고하는 것 또한 살펴야 할 것이다. 관리가 고발을 당하면, 정말 부정이 있는 자는 곧바로 조사하여 처리하고 실제 증거가 없는 일은 다시 조사해야 할 것이다. 토호나 도적이 고발을 당하면 해당 면에 경고 명령을 내린다. 매 계절의 첫달 초하룻날에 각 면의 최장자 중 행실이 바르고 일을 잘 아는 이를 4명씩 뽑아 향로로 삼아 향교에 첩문을 내려 고발장을 받아 잠자코 홀로 헤아려 별도로 몰래 알아야 한다. 자제와 빈객 가운데 단정하고 결백하며 실무에 능한 사람으로 몰래 조사하게 하여 성공한 자들에게 후하게 보수를 주어야 한다. 현 이방을 좋아하지 않는 다른 아전들을 통해 그 이방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 미세한 허물과 잘못은 그냥 보아 넘기거나 속 짐작만 하고 하고, 혹은 은밀히 그사람을 불려 따뜻한 말로 훈계하여 스스로 반성하게 하는 등 덕으로 다스려야 한다. 옆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하는 말은 모두 사사로운 의도가 들어 있음으로 그대로 듣고 믿어서는 안 된다. 수령이 직접 미행하지 말아야 한다.
    • 고공(考功, 고과제도) : 관리가 한 일은 공과를 기록해두었다가 연말에 공적을 따져 상벌을 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백성들로 하여금 믿고 따르게 할 수 있다. 수령의 임기를 6년으로 늘리고 어사 감찰을 3년에 1번씩 좀 더 자주 하여서 신뢰를 얻고 부정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 호전육조
세금을 거두는 일이다. 소출량을 기준으로 한 세금 징수는 정확한 실태 파악이 어렵기 때문에 문제가 있었다. 정약용은 이 점을 비판하고 공정한 세금 징수를 위해 해마다 직접 조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목민관은 원활한 조세 업무를 위해서 호적을 정비하고 부정 방지에 힘써야 한다. 또한 국민 경제의 근본인 농업을 장려하는 정책을 펴야 한다. 농사를 권장하는 핵심은 세금을 덜어주고 부역을 적게 하여 토지 개척을 장려하는 것이다. 권농 정책에는 벼농사 장려뿐만 아니라 목축과 양잠의 장려, 소의 도축을 막는 일 등이 모두 포함된다.

  • 예전육조
제사와 손님 접대, 교육, 신분 제도 등에 대한 것이다. 목민관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정성을 다해 제(祭)를 지내는 일이다. 미풍양속을 해치는 미신적인 제사가 있다면, 사람들을 계몽하여 없애 버려야 한다. 또한 교육을 장려하고 과거 공부를 권장하여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 문란해진 신분 제도를 바로잡는 일도 목민관이 해야 할 일이다.

  • 병전육조
군대를 키우고 잘 훈련하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야 한다. 당시에는 병역 의무자가 군대에 가는 대신 옷감을 내고 면제를 받는 제도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부정이 많았다. 목민관은 이러한 부정을 가려내어 가난한 백성들이 피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또한 병기들을 수리하고 보충하여 늘 비상사태에 대비해야 하며,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는 목숨을 걸고 지방을 지켜야 한다.

  • 형전육조
재판과 죄인을 다스리는 방법이다. 재판을 할 때는 사건의 전말을 모두 파악한 뒤 신중하게 판결해야 하며, 특히 옥에 가두거나 형벌을 내릴 때 잘못이 없도록 해야 한다. 또한 거짓으로 남을 고발한 사람은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 예로부터 어진 목민관은 형벌을 약하게 했으니 지나친 형벌은 피하는 것이 좋다. 옥에 갇힌 죄수에게는 집과 식량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폭력을 일삼은 흉악한 자들은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

  • 공전육조
산림과 수리 시설, 환경 미화 등에 대한 것이다. 목민관은 산림을 울창하게 가꾸고 농사의 기본이 되는 수리 시설을 관리할 책임이 있다. 수리 시설의 경우, 지방 토호들이 제멋대로 저수지를 파서 자기 논에만 물을 대는 행동을 막아야 한다. 도로를 닦고 건전한 공업을 육성하는 것 또한 목민관의 책임이다.

  • 진황육조
재해가 났을 때를 대비해 준비해야 할 사항들이다. 흉년이 들 때를 대비해서 평소에 곡식을 저축하고, 창고 안에 있는 식량의 양을 늘 파악하고 있어야 하며, 철저한 대책을 마련해 두어야 한다. 또 흉년이 들어 위급한 때는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말고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 백성을 구제하는 데는 2가지 관점이 있는데, 첫째는 시기에 맞추는 것이며, 둘째는 원칙을 세우는 것이다. 이는 정확한 실태 파악을 바탕으로 구휼에 나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목민관은 집을 잃은 백성들에게 쉴 곳을 마련해 주고, 재해에 대한 구제가 끝나면 백성들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어야 한다.

  • 해관육조
해관이란 관직에서 물러난다는 뜻이다. 목민관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날 때와 그 이후의 일에 관해 말하고 있다. 벼슬에 연연하는 것은 선비의 도리가 아니며, 떠날 때 많은 재물을 가지고 가는 것 또한 선비가 할 일이 아니다. 백성들이 목민관이 떠나가는 것을 슬퍼하고 길을 막아선다면 훌륭한 목민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오랜 병으로 눕게 되면 거처를 옮겨서 공무에 지장이 없도록 해야 한다. 또 죽은 뒤에라도 백성들이 내는 돈을 받지 않도록 미리 유언으로 명령해 두어야 한다. 송덕비나 선정비는 죽은 이후에 세워야 하는 것으로, 있을 때 세우는 것은 예가 아니다.


3. 여담[편집]



  • 손석춘 교수가 박헌영의 아들 원경스님과의 인터뷰를 쓴 《박헌영 트라우마》에도 박헌영이 호치민에게 목민심서를 줬다는 거짓 정보가 나온다. 《박헌영 평전》이 《박헌영 트라우마》보다 유명해서 저자인 안재성만 비난받아 왔다. 그러나 원경스님의 인터뷰를 그대로 쓴 손석춘 저서에도 이 얘기가 나오는 걸 보면 틀린 정보의 출처는 원경스님일 것이다.

박헌영과 호찌민은 각별히 친밀했다. 박헌영은 호찌민에게 조선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의 저서 목민심서를 선물했다. 민중을 어떤 마음으로 만나야 하는가를 서술한 이 책은 베트남 혁명의 지도자가 되는 호찌민에게 평생의 지침이 되었다.

손석춘, 박헌영 트라우마


  • 선운사 마애불의 배꼽에는 검단선사의 비결이 들어 있어서 이것이 세상에 나오면 한양이 망한다는 전설이 있었다. 후에 동학농민운동 때 동학군이 이 비결을 빼내갔는데 그것이 바로 정약용의 목민심서와 경세유표였다는 전설이 있다.

  • 전두환도 이 책의 위세를 입어보고자 하여 순방 시 전용기 집무실에 목민심서를 놓아두고 언론에게 보도지침으로 "집무실 안에 목민심서가 눈에 띈다"라는 낯간지러운 기사를 쓰라고 지시한 적도 있다.[5]

  • 번역 과정이 매우 오래 걸리고 어려웠다고 한다. 국사학·국문학·한문학·동양사학·경제사학·사회학 등을 전공한 16명의 학자가 참여하여 10년이나 걸렸다고. 특히나 강희자전에도 안 나오는 벽자들이 난무하고 있는 데다 정약용은 당대 최고의 지성이라, 책에서 조선 지방자치 제도를 다루면서도 아주 어려운 문학적 수사를 사용하고, 옛 문헌 인용을 많이 했고, 따라서 번역자들은 이에 대한 해석뿐만 아니라 책 내용에서 다루는 조선 법제와 정치사에 대해서도 연구가 필요했다고 한다.

  • 위에 서술되어 있듯이 진실이 밝혀진 후에는 부정되는 호치민 애독서라는 소문에 대해 역사학자 임용한은 과거부터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 책의 한문 난이도는 한학을 배운 정도가 아니라 당대 석학급이나 가능하다고. 정확하게 말해서 목민심서의 수준은 정약용이 책을 쓸 때 독자층으로 여긴 조선시대 목민관조차 대다수는 읽을 수 없는 정도라고 한다. 왜냐하면 당시 조선시대 지방수령들은 무관이나 음서직들도 상당했고 문과 급제 출신 수령도 어지간한 실력이 아니면 읽기 어려운 수준이라고.


  • 북한에서는 이 책이 한때 금서였다. 이유는 북한 내 계파 투쟁과 연관되어 있다. 북한 정권 내 계파 중 갑산파는 전통 문화 및 사상을 새롭게 발굴하는 작업을 행했는데 그 중에서도 이 목민심서를 비롯한 정약용의 저술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그런데 김일성갑산파를 비롯한 다른 계파들을 숙청하면서 이 갑산파의 연구 작업도 중단시켰고 목민심서까지 금서로 지정해 버린 것. 1980년대 이후에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자들에 대한 연구가 어느 정도 재개되면서 목민심서도 제한적으로나마 금서에서 풀렸다.


4.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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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목자[2] 한국 가톨릭 최초의 영세자.[3] 정약용의 형.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큰아들 정철상 가롤로와 함께 시복되었다. 아내 유 체칠리아, 작은아들 정하상 바오로, 딸 정정혜 엘리사벳은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방한 때 시성되었다. 한국 103위 순교성인,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항목 참조.[4] 아전들 중 우두머리.[5] 전두환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의 면담을 필두로 국제 무대 외교에 상당히 공을 들였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북한과 필사적으로 경쟁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최대한 우방국을 많이 만들려는 시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