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하시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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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문무반 최고위 실무직
문반
무반
종1품 중서문하성 문하시중
<white,#191919> 정3품 응양군 상장군

1. 개요
2. 연혁
3. 상세
4. 목록
4.1. 주요 역임자[1]



1. 개요[편집]




고려 왕조의 실질적인 수상#首相급 관직.

고구려대대로, 백제상좌평, 신라상대등, 발해대내상, 태봉시중,[2] 조선영의정[3]과 비슷한 최고위 재상직이다.


2. 연혁[편집]


고려 태조 때에는 광평시중(廣評侍中), 즉 광평성시중이 백관(百官)을 통솔하는 최고위 재상직이었으나, 982년(성종 1) 관제를 개편하면서 2성 6부제를 도입하여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의 문하시중이 최고위직이 되었다. 문종 때는 내사문하성을 중서문하성으로 개칭하였고, 문하시중의 정원을 1인으로 하였으며 품계는 종1품으로 정했다. 고려에서는 현직 관료로서 실무직으로 올라갈 수 있는 최고 품계는 종1품이었다. 정1품은 불교대사#大師가 임명되는 국사#國師삼사삼공 같은 지위에 가까운 명예직이 받는 품계였다.

충렬왕은 원나라의 간섭으로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첨의부로 격하될 때 문하시중을 첨의중찬으로 고치고 첨의우중찬, 첨의좌중찬으로 나누었다. 두 관직은 첨의우시중, 첨의좌시중 혹은 도첨의시중으로 바뀌었다. 충렬왕이 첨의부를 도첨의사사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또 충혜왕이 이를 첨의우정승, 첨의좌정승으로 바꾸었다. 이후 원나라의 간섭이 약화되자 공민왕은 첨의부를 문하부로 관제복구하고 우정승, 좌정승을 문하시중, 수문하시중으로 고친다. 문하시중, 수문하시중은 문하좌시중, 문하우시중으로 고쳤다가 다시 문하시중, 수문하시중으로 고치는 등 명칭이 변동한다. 원 간섭기에 관제가 격하됐을 때는 원나라처럼 상우(尙右)[4] 원칙을 좇았는데, 1303년 일시적으로 상좌(尙左)[5] 원칙으로 환원했다가[6] 충선왕이 복위한 1308년 다시 상우(尙右) 원칙으로 돌아왔다. 이후 공민왕이 자주정책을 표방하며 관제를 복구하면서 다시 상좌(尙左) 원칙으로 환원됐다.

시중 2인은 이후 조선 초기에 정종의정부가 설치되어 태종문하부가 사라지기 전까지 문하좌·우정승이란 이름의 정1품 벼슬로 남아 있다가 좌·우의정으로 이어졌고, 명목상 최고위직이었던 중서령은 영문하부사로 바뀌었다가 영의정으로 이어졌다.


3. 상세[편집]


고려의 최고 관직은 중서령과 상서령이나, 이는 명예직에 가까웠고 문하시중이 실제 수상의 역할을 하였다.

태봉에서는 광평성 등 신라에서는 없었던 기구 또한 나타난다. 관등제 또한 약간 달랐다. 고려는 초기에 신라 13부17관등제를 부분적으로 도입했던 태봉의 체제를 계승했다. 이후 성종당나라3성 6부제를 수입해 대체했다. 그래서 명목상으로는 신라가 아닌 당의 시중이 고려 문하시중의 유래에 해당하지만, 그 실질적인 기능은 태봉이 차용했던 신라의 시중과 유사했다. 그런데 고려는 고대 국가로 출발했던 삼국과는 달리 이미 형성된 인프라를 이용해 호족합좌제의 중세 국가로 출발했기에 삼국의 제도와는 또 다른 고유성이 아주 강했다는 걸 유념해야 한다. 직책으로도 대광, 원윤, 호장 등의 특이한 향직이 존재했으며 중앙관제로도 문산계, 무산계의 구분이 생긴다. 신라는 당대 가장 선진적이었던 당의 관료제를 일부 도입했는데 명칭상 같은 직책이라고 해도 신라에 원래 있던 직책을 당풍으로 개명했거나 신라가 처한 환경에 맞춰서 도입한 경우가 많아 기원부터가 아예 다르거나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지게 된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차이의 대표적 사례가 병부(兵部)이다. 3성과 6부의 관계와 달리 신라의 13부는 위계의 차등은 있으나 각각 별개의 기구였으며 병부 역시 3성 6부제에서의 상서성 병부와 달리 한 기구에 종속되지 않은 독립된 기구였다. 게다가 신라의 병부는 상서성 병부보다 설치 시기부터가 더 이르다. 당의 문하시중과 신라의 집사시중의 관계도 이와 유사하다. 당의 3성 6부제에서는 시중이 꼭 수상(首相)이 아닐 때도 있고 애초에 재상의 명칭이 자주 바뀌었다. 이는 귀족합좌제적 성격이 강했던 삼국과 전제군주적 성격이 강했던 중국의 환경 차이에서 기인했던 것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고려의 중서문하성에서는 수상의 명칭으로 일관되게 문하시중을 사용하며 문하시중에 임명된 사람이 없을 경우 서열상으로는 밀리지만 동급(종1품)인 중서령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문하시중의 바로 밑인 정2품 문하시랑평장사가 수상이 되었다.

이러한 환경 차이는 중국보다 귀족합좌제적 성격이 강했던 한국의 특성이 반영된 결과라고도 볼 수 있는데 고구려에서는 대대로, 백제에서는 상좌평, 발해에서는 대내상이라는 신라의 상대등/시중과 유사한 수상직이 공통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삼국은 수없이 반복된 경쟁과 협력을 통해 종국에는 서로 비슷한 문화와 제도로 수렴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보면 고려는 이런 삼국의 문화를 종합하여 완성시켰다고도 볼 수 있다.

문하시중의 종1품에 대응하는 품계는 종1품의 최고위 품계 개부의동삼사이다. 즉 개부의동삼사 품계를 지니고 문하시중을 받아야 제대로 된 종1품 관료인 것이다. 하지만 늘 관료의 품계와 관등을 똑같이 맞출 수는 없었고, 이에 행수법이란 제도를 통해 자신의 품계보다 높은 관등의 직위를 받는 경우, 직위 앞에 수(守) 자를 붙여 관직의 품계가 자신의 품계보다 높다는 것을 명시했다. 그래서 고려 초중기 문하시중과 수문하시중은 같은 관직이며 단지 받은 관료의 품계가 종1품 개부의동삼사인가 아닌가의 차이가 날 뿐이다.

그런데 고려 후기 공민왕 대에 문하시중이란 관직을 두 개로 찢으면서 문하시중 - 수문하시중의 두 직위로 정한다. 즉 공민왕대에는 문하시중 > 수문하시중으로 수문하시중이 한 단계 낮다.


4. 목록[편집]


파일:고려 의장기.svg
고려 문하시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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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기
(918~981)

광평시중
김행도 | 박질영 | 류덕영 | 공훤 | 왕철 | 권직
문벌귀족기
(981~1170)

문하시중
최승로 | 박양유 | 한언공 | 김승조 | 최숙 | 류윤부 | 위수여 | 유진 | 최사위 | 유방 | 강감찬 | 서눌 | 황주량 | 최제안 | 최충 | 이자연 | 김원충 | 왕총지 | 김원정 | 박성걸 | 최유선 | 이정 | 문정 | 이정공 | 소태보 | 최사추 | 위계정 | 윤관 | 김경용 | 이위 | 김인존 | 이공수 | 김부식 | 김약온 | 임원후 | 왕충
무신정권
(1170~1270)

정중부 | 두경승 | 이의민 | 조영인 | 최충헌 | 이항 | 이연수 | 김취려 | 최종준 | 최항 | 김준 | 이장용
원 간섭기
(1270~1356)

김방경
(도)첨의중찬 · 도첨의시중 · 도첨의정승
김방경 | 류경 | 송송례 | 원부 | 허공 | 김방경 | 홍자번 | 조인규 | 홍군상 | 홍자번 | 홍규 | 홍자번 | 조인규 | 정가신 | 조인규 | 김혼 | 송분 | 홍자번 | 설공검 | 염승익 | 송분 | 한희유 | 한강 | 한희유 | 송분 | 홍자번 | 한희유 | 채인규 | 한희유 | 안향 | 한희유 | 한희유 | 김혼 | 정인경 | 최유엄 | 김지숙 | 최유엄 | 최유엄 | 류청신 | 홍규 | 류청신 | 권부 | 김이용 | 김이용 | 민지 | 배정 | 김태현 | 윤보 | 최유엄 | 김심 | 민지 | 김이 | 김이 | 윤석 | 정방길 | 윤석 | 김심 | 한악 | 윤석 | 강융 | 권한공 | 조적 | 한악 | 윤석 | 채하중 | 이능간 | 기철 | 채하중 | 한종유 | 왕후 | 김륜 | 김영후 | 김영후 | 인승단 | 노책 | 김영돈 | 왕후 | 노책 | 노책 | 손수경 | 손수경 | 이암 | 이제현 | 손기 | 송서 | 조일신 | 정천기 | 송서 | 조일신 | 이제현 | 조익청 | 홍빈 | 조익청 | 인승단 | 채하중 | 염제신 | 염제신 | 류탁 | 채하중 | 채하중 | 이제현 | 홍언박 | 홍언박 | 윤환
여말선초
(1356~1392)

문하시중 · 도첨의정승 · 도첨의시중
홍언박 | 윤환 | 이제현 | 염제신 | 염제신 | 이암 | 홍언박 | 류탁 | 경복흥 | 경복흥 | 류탁 | 경복흥 | 김보 | 이춘부 | 이인임 | 김일봉 | 이춘부 | 이인임 | 윤환 | 경복흥 | 염제신 | 경복흥 | 이인임 | 윤환 | 이인임 | 홍영통 | 이자송 | 조민수 | 임견미 | 최영 | 이성림 | 임견미 | 이성림 | 이인임 | 이성림 | 반익순 | 반익순 | 이성림 | 최영 | 이성계 | 최영 | 우현보 | 조민수 | 이성계 | 이색 | 이성계 | 이림 | 심덕부 | 이성계 | 정몽주 | 이성계 | 이성계 | 심덕부 | 배극렴 | 이성계
고려 국왕 · 무신정권 집권자

고구려 (좌우보 · 국상 · 대막리지) · 백제 (좌우보 · 상좌평)
신라 (대보 · 시중 · 상대등) · 발해 대내상 · 태봉 시중 · 고려 문하시중
조선 영의정 ·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 대한민국 국무총리






4.1. 주요 역임자[7][편집]



[1] 광평시중, 문하시중, (도)첨의중찬, (도)첨의정승, (도)첨의시중 등을 포함함.[2] 왕건이 바로 즉위 전 궁예에 의해 파진찬 겸 시중에 올랐다. 태봉에서는 광치내(匡治奈)라고 불렀으며, 국가 최고의결기관인 광평성(廣評省)의 수장이었다.[3] 다만 조선 초기 영의정은 고려시대 중서령 또는 상서령에서 비롯된 명예직에 가깝고, 좌의정이 문하시중, 우의정이 수문하시중의 역할을 이어 받았다는게 중론이다.[4] 우를 좌보다 높임.[5] 좌를 우보다 높임.[6] 그래서 이 시기에 일시적으로 도첨의좌중찬이 도첨의우중찬보다 높아졌다.[7] 광평시중, 문하시중, (도)첨의중찬, (도)첨의정승, (도)첨의시중 등을 포함함.[8] 柳德英. 본관은 정주(貞州). 태조의 6비 정덕왕후(貞德王后)의 아버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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