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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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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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의 10대 중앙 종합 일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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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회사 문화일보
株式會社 文化日報
The Munhwa Ilbo Company

국가
[[대한민국|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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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설립
1990년 8월 29일 현대문화신문 ,(33주년),
사명변경
1999년 3월 17일 문화일보
창간
1991년 11월 1일 ,(32주년),
본사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새문안로 22
,(충정로1가 68),
대표자
이병규
임원진
발행·편집·인쇄인 · 대표이사 회장 이병규
업종명
신문 발행업
상장여부
비상장기업
기업규모
중소기업
임직원
296명 (2019년 12월)
매출액
710억 3,691만 1,244원 (2022년 연간)
영업이익
23억 8,514만 3,424원 (2022년 연간)
순이익
56억 4.360만 8,957원 (2022년 연간)
최대주주
문화일보 우리사주조합 (지분 38.75%)[1]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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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2021년 1월 31일

1. 개요
2. 사시
3. 지배 구조
4. 사옥
5. 성향
6. 역사
7. 논란 및 사건사고
8. 계열사
9. 주관 대회
10. 기타
11. 관련 문서
12. 역대 임원 및 간부
12.1. 회장
12.2. 사장
12.3. 부사장
12.4. 편집국장
13.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보수성향 석간 종합 일간 신문.

10대 일간지 중 하나로 1990년 8월, 현대그룹 계열 '현대문화신문'으로 출발하여 1991년 11월 1일에 정식 창간했다. 다른 주요 일간지들 조간 신문으로 전환하는 가운데도 꿋꿋이 석간을 유지하고 있으며,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 5일 발행한다. 1998년 11월, 공식적으로 현대그룹에서 계열분리 되었으며, 지금은 현대중공업이 설립한 동양문화재단과 문우언론재단이 지분 합계 61% 가량을 보유하고 있다. 사실상 현대중공업이 지배하는 언론이다.[2] 산하에 경제지 디지털타임스를 두고 있다. 한때 'AM7'이라는 무가지를 발행하기도 했으나, 무가지 시장이 몰락하자 2013년 4월 1일자로 폐간했다.

수도권도 그렇긴 하지만, 특히 비수도권에서는 문화일보를 보기가 매우 힘들다. 아예 종이신문 산업 자체가 사양길로 접어든지 오래인 마당에 석간 신문을 따로 가정에서 구독하는 사람들도 이젠 찾아보기 힘든 상황인데다가, 심지어 모든 종류의 신문을 사실상 반 강제적으로 구독하는 영업장인 관공서, 공공기관, 공기업, 방송국, 도서관 등이 아니라면 수도권과 비수도권을 불문하고 문화일보를 접하는 것 자체가 힘든 상황이다. 심지어 지방의 소규모 도서관의 경우에는 아예 없는 경우도 많다. 신문 가판대의 경우에도 큰 기차역이나 수도권 주요 전철역의 가판대가 아닌 이상 거의 팔지 않을 정도이다. 참고로 발행부수가 20만 부 정도로, 10만 부 이하 수준인 서울신문, 세계일보, 국민일보 등의 다른 중소규모 일간지보다는 약간 많은 수준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신문 항목에도 잘 나와 있듯이, 이런 숫자들은 대놓고 가짜 부수임을 감안해야 한다.

노조는 미가맹.[3]

2. 사시[편집]


빠른 뉴스의 신문, 젊고 미래를 개척하는 신문, 착한 시민에게 희망을 주는 신문



3. 지배 구조[편집]


주주명
보유주식수
지분율
우리사주조합
4,174,635
38.74%
문우언론재단
3,300,000
30.63%
동양문화재단
3,300,000
30.63%
총계
10,774,635
100.00%
출처: 2019년 감사보고서


4. 사옥[편집]


창간 당시 무교동에 사옥이 위치해 있었으나, 1995년 현재의 서대문 사옥에 정착했다.

한편, 초창기에는 큰 인쇄시설이 없는 관계로 지방으로 배송하는 신문은 용인 현대그룹 연수원에 윤전기를 두어 신문을 찍어내기도 했다. 현재는 서울 충정로 사옥 지하에 자체 윤전기를 두고 있는 몇 안되는 언론사 중 하나이다. 2006년에 광고 물량 수주 확대를 꿈꾸며 신형 윤전기를 도입했는데, 마침 그 시점이 신문시장의 몰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때였던지라, 돈은 돈대로 쓰고 윤전기 교체의 효과는 거의 보지 못했다.[4] 인쇄 매출을 위해 다른 신문사의 신문을 많이 찍어낸다고 한다.

5. 성향[편집]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보수진영 관련 문서 파일:푸른깃발배경제거.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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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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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진영 관련 문서 (진보 · 민주당계 · 보수)



신문의 논조와 정치적 성향은 제도권 신문사 중에서 가장 강경한 보수 우파 반공주의이다. 일례로 신문 논조가 급격히 우경화 및 극단화 되기 시작한 2000년대 초중반부터는 조중동과 함께 '조중동문'으로 불리기도 했고, 심지어 문화일보 내부에서도 스스로 '살굿빛 조선일보'라고 한탄했을 정도였다.[5] 어쨌든 지금까지도 조중동을 필두로 한 이른바 '보수 신문'들 중에서 말단을 차지하고 있는데, 보도 및 논설의 논조로만 따지면 같은 보수 우파 언론 계열인 조중동보다도 훨씬 정치적으로 극단적이며 일관적이다.

그러나 매체의 영향력 면에서는 조중동 등과는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데, 신문 유료부수 순위에서도 문화일보는 10위 언저리 수준이며,[6] 신문 구독률이나 열독률 관련 조사에서도 좀처럼 통계에 잡히지 않는 정도의 미미한 영향력을 나타내고 있다. 심지어 신뢰하는 언론, 불신하는 언론 관련 여론조사에서도 거의 통계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매체 소비자들에게 존재감이 없다.

여느 다른 국내 언론사들과 마찬가지로, 문화일보 또한 온라인 어뷰징 집중 정책 때문에 포털사이트 클릭 장사가 심각한데, 후술된 대로 편집국의 인력 부족 때문에 기자들의 업무 과중이 극심하다고 한다. 심지어 주요 부서의 차장급 간부의 경우에도, 하루에 무려 10개 가량의 온라인 기사를 쏟아내는 일이 허다할 정도.

6. 역사[편집]


창간 배경은 1980년 현대그룹삼성그룹의 이른바 '매스컴 전쟁'이었다. 당시 현대와 삼성의 규모가 엇비슷해지면서 재벌 1위 순위 다툼이 치열해지자, 삼성그룹 측이 계열 언론인 중앙일보동양방송를 총동원하여 현대그룹을 헐뜯는 보도를 내보내면서 시작되었다. 온갖 비리와 부실공사, 소비자 불만 등을 연일 쏟아내어 현대그룹의 이미지를 박살내 버린 것이었다.

현대는 중앙일보를 제외한 모든 신문에 광고를 내면서 '재벌이 언론사를 소유하면 안된다'는 논리로 반격했지만 역부족으로, 기업 이미지가 나빠져 해외수주가 무산되는 등 엄청난 손해를 입게 되었다. 결국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이명박 현대건설 사장과 중앙매스컴 홍진기 사장, 김덕보 대표이사가 만나서 전격 화해하고 여론전을 마무리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언론의 자유가 확대되면서 신문사 설립 등에 대한 각종 제한이 대폭 완화되자 현대그룹은 언론사 설립에 착수, 1990년에 마침내 자체 언론사를 갖게 된다. '문화일보'라는 이름도 현대그룹의 홍보 관련 부서 이름인 '문화실'에서 처음 만들어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창간 당시에는 종합 일간지 승인을 받지 못해 문화 전문지로 출발했는데 1995년 7월 21일에 종합 일간지 승인을 받았다. 초대 사장은 한국경제신문 사장을 10년이나 지냈던 이규행(1935~2008)[7], 주필은 경향신문에서 이직한 손광식(1937~2015)[8]이었다. 창간 당시 현대 계열사의 전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강제 구독 정책을 시행하는 등 현대그룹 차원에서 엄청난 물량 공세를 펼치기도 했는데, 현대그룹 임직원들을 통해 문화일보 1년 무료 구독권까지 시중에 마구 뿌려지기도 했다.

창간 때부터 정주영 회장의 '대선 출마'라는 정치적 목표를 위해 급조된 신문사라는 말이 많았다. 특히 제14대 대통령 선거 기간 중 문화일보는 노골적으로 통일국민당 정주영 후보의 당선을 위해 뛰었는데, 그동안 휴간해왔던 일요판을 3차례씩 발행하는가 하면, 대선 직전에 부산 초원복집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무려 1백만부 이상을 발행하면서 이슈 몰이에 힘썼다.# 특히 대선 후보로 뛴 1992년에 발간된 정주영의 자서전인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원래 베스트셀러이기도 했지만,[9] 현대그룹의 임직원 조직이나 통일국민당 지구당 조직을 통해 전국적으로 무료로 엄청나게 배포되기도 했는데, 당시 이 책을 출판했던 곳이 바로 '현대문화신문사', 즉 문화일보였다.[10]

현대그룹은 이후 1993년에 자회사 금강기획[11]을 통해 케이블TV 사업에도 진출, 연예오락 전문채널 HBS를 1995년 3월에 개국하는 등 의욕적으로 언론, 미디어 사업을 확대해 나가려는 행보를 보였다.[12] 아마 장기적으로는 HBS에 보도기능까지 추가하여 종합편성채널으로 육성하려고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1998년 IMF 외환위기가 닥치자 문화일보를 계열분리하고[13] 1999년에는 HBS도 매각했다.[14]

독립경영 시기 문화일보는 김용옥이 진보적인 논조의 칼럼과 기사를 쓰면서 조중동 등의 네임드 보수 언론들을 비판하기도 했고[15],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 조중동과의 인터뷰는 거부하면서도 문화일보와의 단독 인터뷰를 승낙하기도 하는 등, 2000년대 이후의 경향신문과 비슷하게 진보적인 논조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비슷한 논조를 보이던 기독교방송과 제휴를 맺어 기독교방송에서 주로 문화일보 기사로 뉴스 보도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2004년부터 현대중공업 측에서 재단법인을 통해 다시 문화일보의 경영권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신호탄은 2004년 3월에 있었던 이병규 사장의 부임이었는데, 이 때를 기점으로 문화일보는 다시 보수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16] 이 시기 문화일보 논조 전환의 단적인 예가 바로 '김광원 논설위원 징계 사건'이었다.

2004년 당시 문화일보 논설위원 김광원은 조중동의 보수성과 신문시장 독과점 문제, 미국의 이라크 전쟁 등에 대해 비판하는 등, 상당히 진보적인 내용의 칼럼들을 문화일보 지면 뿐만 아니라 몇몇 외부 매체에 기고하고 있었다. 그런데 2004년 12월에 갑자기 '외부 매체 칼럼 기고에 대한 기간 연장 허가를 서면으로 받지 않았다'는 사소한 트집을 잡아 사규 위반 명목으로 사측에서 김광원 논설위원에게 징계를 내렸다.

이는 말 그대로 '시범 케이스'가 되었고, 마침 당시 문화일보에서 임직원 구조조정이 진행 중이었던 것과 맞물려, 문화일보 구성원들이 해당 징계에 대해서 제대로 반발도 못하고 '큰소리 나게 해서 불안을 키우지 말자'는 소극적 태도로 그냥 조용히 넘어가도록 만들었다. 경영진이 신문의 보수 색채를 분명히 하기 위해 벌인 일련의 사태에 대해 사내 구성원들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특히 이 때는 사장이 신문의 편집권에 직접 개입하여 대놓고 간섭하는 일이 벌어진 시기였는데, 심지어 문화일보 사내의 노보에서 '국장이 사장실에 다녀와서 뉴스 게재 결정을 내린다'는 고발 기사를 쓸 정도였다.

이뿐만 아니라 당시 만평을 연재하던 이재용 화백의 그림이 보수적 논조의 신문 사설과 맞지 않다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잘리는 일이 발생했다. 이재용 화백은 "편집국에서 '사설에 만평을 맞추라'고 주문하고 있다"면서, "만평은 기명 코너여서 내가 책임지는 것이지만 사설은 무기명이다. 사설에 맞추라는 말은 만평이 아니라 삽화를 그리라는 뜻이다"라며 편집국의 일방적인 태도에 대해 비판하기도 했다. 김종호 문화일보 편집국장이 '비판의 무게 중심이 한나라당에 치우쳐 있다'는 식의 이유를 들어, 일방적으로 만평을 빼라고 지시하곤 했던 것이다. 결국 이를 견디다 못한 이재용 화백은 2006년에 문화일보를 그만두게 된다.

심지어 이 시기에는 오피니언란에 실린 칼럼의 서두와 결론이 일방적으로 고쳐지는 지시가 내려지기도 일쑤였다. 김용옥이 문화일보 명예기자 활동을 그만 둔 시기도 바로 2004년이었다. 김용옥이 2004년 3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에 대해 반대하는 내용의 칼럼을 썼는데, 편집국에서 이 칼럼의 논조를 반대하며 지면 게재를 일방적으로 거부한 것이다. 이 일이 벌어지자 김용옥은 곧바로 명예 기자직을 그만두었다.당시 관련 기사 또한 이런 일련의 사건들 이후 2006년에는 편집국 공채 1기 김모 기자가 "가치관과 맞지 않아 재직할 수 없다", "없는 자와 어려운 자를 대변하며 힘있는 자들이 세상에 기여하도록 목소리를 내놓던 과거 문화일보의 호연지기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취재 나갈 때마다 '살구빛 조선일보'라는 출입처와 동료,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과 질책이 쏟아져 회사를 그만두게 됐다"며 회사 총원에게 전자메일로 사직의 변을 내고 퇴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대해 당시 이용식 편집국장이 "쓴소리를 하려거든 남아서 하라"고 말하며 논쟁을 빚기도 했는데, 어쨌든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겪으면서 문화일보는 완연한 보수 신문의 대열에 들어섰다.

2020년 기준으로, 극심한 인력 유출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최근 3년간 무려 기자 16명이 연이어 퇴사를 한 까닭에 남은 기자들의 업무가 가중되고 있고, 다른 종합 일간지들에 비해 정치부나 사회부 등 주요 취재팀의 규모가 절반 또는 3분의 1 수준에 불과한 상황에서 인력 충원마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실제 워낙 인력 유출이 장기간 누적되었던 터라, 취재 현장을 떠난 논설위원들과 편집국 간부들까지 포함하여 기자단 전체를 탈탈 털어봤자 겨우 백여명 정도에 불과한 작은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심지어 회사의 경영 사정이 나빠졌다는 이유로 기자 공채도 한동안 진행하지 않다가# 그나마 오랜만에 2022년과 2023년에 연달아 수습기자 공채를 진행했으나, 기자들의 업무 과중이 전혀 해소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퇴사자가 속출하는 것으로 보인다.

7. 논란 및 사건사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문화일보/논란 및 사건사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 계열사[편집]




9. 주관 대회[편집]


  • 평화통일마라톤
  • 문화일보배(경마)

10. 기타[편집]


  • 1999년 11월 1일부터 종이가 현재와 같은 살구색으로 바뀌었다.

  • 국내 유일의 동시석간이다. 전통적인 석간의 경우 전날 일어난 사건을 다음날 오전 내에 더 숙고하고 추가 정보도 모아서 종합적으로 제시하는 형태이고 동시석간은 발행당일 오전 오후의 사건들을 실시간으로 정리해서 저녁에 발행하는 형태라는 차이가 있다. 이 동시석간이라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석간 특성상 오후에 배달이 가능하려면 오전 11~낮 12시에는 기사 마감을 해야 한다. 그래서 문화일보 기자들은 오전 6~7시쯤 출근해 취재하고 기사를 쓰는데, 3~4시간 동안 그것도 꼭두새벽에 나와서 취재를 해야 하니 동시석간은 꽤나 품이 드는 방식일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유명 정치인이나 영부인의 장례식이 당일 오전에 있다, 축구 결승전이 제작 당일 새벽에 있다거나 하는 경우가 있겠다. 이러면 밤을 새거나 반쯤 실시간으로 현장 취재사항을 기사로 때려박아야 한다. 드라마로 치면 실시간으로 쪽대본을 전송하는 셈. 논조를 떠나 당일 일어난 일이라면 당일 제작 조간이 가판을 짜기 전에 속보성으로 기사를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겠으나 아무래도 품이 많이 들고 사고 가능성도 높아 양날의 칼이 되겠다. 어쨌든 석간은 이러한 사정상 취재기자들이 주중에 회사에 거의 안 들어간다는 특징이 있다. 보통 취재처로 바로 출근하고 인터넷으로 기사를 송고하고 수정하기 때문.


11. 관련 문서[편집]




12. 역대 임원 및 간부[편집]



12.1. 회장[편집]


  • 이규행 (1994~1995)
  • 김진현 (대표이사 · 발행인, 2000~2001)
  • 이병규[17] (대표이사, 2014~ )

12.2. 사장[편집]


  • 이규행 (대표이사, 1991~1994)
  • 손광식 (대표이사, 1994~1995)
  • 유인근 (대표이사, 1995)
  • 이인원[18] (사장대행 · 대표이사, 1995)
  • 남시욱[19] (대표이사, 1995~1999)
  • 김진현 (대표이사, 1999~2000)
  • 김정국 (대표이사, 2001~2004)
  • 이병규 (대표이사, 2004~2014)

12.3. 부사장[편집]


  • 이영일 (대표이사 · 인쇄인, 2000~2001)


12.4. 편집국장[편집]


  • 최성두 (1991.10 ~ 1993.11)
  • 유경환 (1993 ~ 1994)
  • 백기범 (1994.4 ~ 1995)
  • 이두석 (1995.2 ~ 1995.11)
  • 우승용 (1995 ~ 1996.8)
  • 박창래 (1996.9 ~ 1998.3)
  • 강신구 (1998.3 ~ 1998.12)
  • 김병규 (1999.1 ~ 1999.6)
  • 김호준 (1999.6 ~ 2000.10)
  • 최희조 (2000.11 ~ 2002.3)
  • 황열헌 (2002.4 ~ 2004.3)
  • 김종호 (2004.3 ~ 2005.3)
  • 이용식 (2005.3 ~ 2008.4)
  • 박학용 (2008.4 ~ 2012.4)
  • 최영범 (2012.4 ~ 2016.4)
  • 김병직 (2016.4 ~ 2019.4)
  • 박민 (2019.4 ~ 2021.4)
  • 오승훈 (2021.4 ~ 2023.4)
  • 유병권 (2023.4 ~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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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대 주주인 동양문화재단과 문우문화재단이 각각 30.63%씩 같은 비율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현대중공업이 설립한 재단이다. 따라서 여전히 모기업인 현대중공업이 압도적인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A] A B 2023년 1월 9일 기준[2] 일례로 2014년 지방선거 때, 엄연한 현직 문화일보 기자들이 대거 정몽준 서울시장 후보의 선거 캠프에 합류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3] 과거에는 민주노총 언론노조의 가맹 노조였으나 2000년대 후반 즈음 탈퇴했으며, 이후에는 사실상 노조의 활동이 매우 쪼그라든 상태이다.[4] 그나마 문화일보는 중앙일보 대비 상황이 약간이나마 낫다. 중앙일보는 2007년에 신문 판형을 바꾼답시고 신형 윤전기를 6대씩이나 들여왔다가, 종이신문 몰락의 된서리를 맞았고, 빚은 빚대로 2,000억을 지고 이자까지 내면서 재정에도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게다가 신형 윤전기 도입 직후 하필 2008년 세계금융위기가 터지는 바람에, 일본에 지불해야 할 윤전기 리스 금액이 엄청나게 불어나서 손해가 더 커졌다.[5] 문화일보는 종이 색깔이 보통 회색인 타 신문들과 달리, '살구색'이다. 참조[6] 물론 신문 항목에도 잘 나와있듯이, 해당 유료부수 수치는 대놓고 가짜 부수 공시인 점을 감안해야 한다.[7] 1960년 조선일보 공채 기자로 경력을 시작했다. 이후 경향신문으로 이적하여 편집국장(1980)과 주필(1980~1981)을 맡았고 한국경제신문 사장(1981~1991)을 지내다가 스카웃되었다.[8] 1964년 대한일보 공채 기자로 경력을 시작했다. 이후 경향신문으로 이직하여 경제부장, 편집국장(1985~1986), 주필(1987~1991)을 지내다가 스카웃되었다.[9] 물론 공격적인 출판 마케팅을 통해서 책이 꽤 팔린 것도 사실이지만, 당시에는 현대 측의 조직적인 대량 구매를 통해 베스트셀러로 밀어 올렸다는 이야기가 시중에 파다했다.[10] 참고로 문화일보는 이때 어린이용 만화판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인 '거인 정주영'까지 출판하여 전국적으로 엄청난 양을 무료로 배포했다.[11] 현대그룹의 광고회사였다. 현재는 오길비앤매더에 매각하여 금강오길비가 되었으며, 이노션이 정신적 후계 역할을 하고 있다.[12] 한때 HBS 홈페이지도 문화일보 홈페이지와 통합운영한 적이 있기도 했다.[13] 주식 중 38.7%를 우리사주조합에 넘겼으며, 나머지는 반씩 나누어 재단법인을 설립했다.[14] 이후 NTV를 거쳐 2002년 CJ미디어에 매각되어 현재는 OCN Movies가 되었다.[15] 김용옥은 2002년 12월부터 2004년 3월까지 문화일보 명예기자 신분으로 고정 칼럼 연재나 특별 인터뷰를 하며 활동했다.[16] 문화일보에 '살굿빛 조선일보'라는 별명이 붙게 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17] 1953년생. 1977년 현대건설에 입사한 이후 반세기 가까이 범현대그룹에서 일하는 현대맨이다. 현대그룹 문화실장을 맡아 문화일보 창간에 기여했고, 이후 통일국민당으로 잠깐 건너가 당 대표 비서실장을 지냈다. 통일국민당이 사실상 망한 이후에는 문화일보 부사장으로 복귀했다. 이후 아산사회복지재단 사무처장과 서울아산병원 행정부원장 등을 지냈고, 1998년부터는 현대백화점 부사장, 사장을 지냈다. 이후 2004년에 다시 문화일보로 복귀하여 사장 자리에 올랐고, 2014년에는 아예 회장으로 승진했다.[18]KBS 뉴스 9 앵커. 통일국민당에 잠깐 몸을 담았다가 문화일보 부사장으로 이동했고, 이후 문화일보 부사장직에서 물러난 이후 다시 국민통합21에 입당하여 당 대표 권한대행을 지내기도 했다.[19]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