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라 히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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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라 히바리
((そら ひばり | Hibari Mis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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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とう (かず((카토 카즈에, Kazue Kato)
출생
1937년 5월 29일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이소고구
사망
1989년 6월 24일 (향년 52세)
도쿄도 분쿄구 준텐도대학 의학부 부속 준텐도병원
국적
[[일본 제국|

일본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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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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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명칭

깃발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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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 점령하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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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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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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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147cm, O형
가족
아버지 가토 마스키치 (加藤增吉)
어머니 가토 기미에 (加藤喜美枝)
여동생 사토 세츠코 (佐藤勢津子)
남동생 가토 테츠야 (かとう哲也), 카야마 타케히코(香山武彦)
자녀
양자 가토 카즈야 (加藤和也)
학력
세이카 학원 고등부 (졸업)
소속사
히바리 프로덕션
데뷔
1949년 1집 앨범 '河童ブギウギ'
서명
파일:hibarimisora.jpg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활동
2.3. 사망
3. 일본 음악계 내의 위상
4. 한국계 루머
5. 여담



1. 개요[편집]


일본가수이자 배우.[1]

쇼와(昭和)의 가희(歌姫)로 불릴 정도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국민 가수이며, 일본인들에게는 쇼와 시대를 통째로 상징하는 인물로 여겨질 정도. 데뷔 때부터 타계하는 1989년까지 약 45년 동안 대단한 인기를 구가하였으며, 현재까지도 일본인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일본 엔카 가수 중 가장 유명한 가수로, 지금도 일본에서 엔카 가수라 하면 미소라 히바리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누적 음반 레코드 판매량 8,000만장 이상. 비공식 일본가수 음반 판매량 1위다.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1937년에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에서 생선가게를 하는 아버지 카토 마스키치(加藤增吉)와 어머니 카토 키미에(加藤喜美枝)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 둘 다 노래 부르는 것을 상당히 좋아했기 때문에 집안에는 레코드 기기가 있었고, 늘 노래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1943년 아버지가 전쟁에 징집되는 바람에 집을 떠나게 되자 떠나기 전 송별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처음으로 히바리는 노래를 공개적으로 불렀는데, 이때 많은 사람들이 히바리의 노래에 감명을 받았고 어머니는 히바리의 재능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2.2. 활동[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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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히바리는 어렸을 때 노래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어머니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8살의 나이에 데뷔하게 된다. 히바리의 어머니는 전쟁이 끝난 45년에 직접 사재를 털어서 자체적으로 딸 히바리를 위한 소규모 악단과 무대를 마련하여 적극적으로 지역 공민관 등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도와주었는데, 이때의 나이가 8살이었다. 1946년에는 NHK의 노래 콘테스트에 참여하여 예선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히바리 모녀는 당연히 예선 합격을 예상했건만 심사위원으로부터 "노래는 잘 하는데 어린이답지가 않다.", "비교육적이다", "빨간 드레스가 좋지 않다." 등 노래와는 별 상관도 없는 이유로 어이없게 탈락하게 된다.[2][3]

이후에도 계속해서 무대활동을 하며 인맥을 쌓아나간 히바리 모녀는 1947년에는 지방순회공연에 가수로써 참석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고[4], 그 기회를 살려 무대활동 범위를 넓혀나갔다. 그러나 동년 4월 히바리 모녀는 연예단의 버스가 사고를 당하면서 죽을 뻔한 위기에 처하게 되었는데, 히바리의 아버지 마스키츠는 이 사고를 겪고 나서 "더 이상 노래 부르는 건 금지"라고 말할정도로 히바리의 무대활동을 반대하게 된다. 하지만 히바리는 아버지의 이런 반대에 "노래 부르는 것을 그만둘 바엔 차라리 죽겠다"고 말할 정도로 격렬하게 반항하였고, 결국 마스키츠는 딸의 고집을 꺾지 못한다.

사고로 한동안 활동을 쉬었던 히바리는 1948년 고베 마츠자카 극장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우연하게 당시 고베를 주름잡고 있던 최고의 폭력조직인 야마구치 구미의 두목 다오카 카즈오의 눈에 띄게 된다.[5] 이후 고향인 요코하마시에서 무대활동을 하던 히바리는, 우연히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이자 배우였던 카와다 하루히사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히바리의 무대를 인상깊게 본 카와다는 직접 자신의 옆자리에 히바리를 앉히고는, 히바리에게 가수로써의 여러 노하우를 알려주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히바리는 카와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고, 이후 수많은 회고에서 "나의 스승은 카와다뿐이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카와다와의 관계를 소중하게 여겼다.[6]

연예계의 거물들과의 잇따른 이러한 만남은 히바리가 점차 더 많은 연예계의 유명인들과 만나는 계기로 이어졌으며, 결과적으로 1948년도 중반 쯤 될 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전국적인 활동이 가능해질 정도로 그 유명세가 쌓여가기 시작했다. 이때 "슬슬 연예계 활동을 위한 예명을 지어보는게 어떻겠냐"라는 조언을 받게되었고, 결국 미소라 히바리라는 예명을 짓게된다.[7]

1949년에는 12살밖에 안 되는 나이로 수많은 방송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이름을 알려나가던 히바리는 처음으로 레코드 취입을 하게 되는데, 이 첫 싱글 레코드가 45만장이나 팔리는 대히트를 치면서 히바리는 본격적으로 전국규모의 유명가수들과 이름을 나란히 할 정도로 유명인으로 성장하게 된다.[8]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스타급 가수, 성우[9]로 활동을 이어나갔는데, 1952년에는 영화 <과수원>의 소녀의 주제가 <リンゴ追分>를 담은 앨범이 70만장이나 팔리며 당대의 최고판매기록을 갱신하게된다.

이후부터 히바리는 근 40년간 엔카, 나아가서 일본 가요계의 여신(女神)으로 군림하였다.

일각에서는 이렇게 유년시절부터 연예계에서 생활을 해왔던 그녀를 비공식이지만, 1960년대아이돌로 규정짓기도 하였다.[10]


2.3. 사망[편집]




향년 만 52세의 이른 나이에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1980년대 초반 이후부터 어머니와 두 동생, 그리고 라이벌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에리 치에미, 소속사 사장이자 후견인이었던 다오카 카즈오 작곡가 코가 마사오 등등 히바리 주변의 여러 지인들이 차례차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히바리는 슬픔과 외로움을 잊기 위해 술과 담배에 의존하였고, 그 때문에 그녀의 건강도 빠르게 악화되고 말았다.

히바리가 죽고 난 뒤 그녀의 장례식은 일본 전 방송사에 생중계가 되었고, 장례식에 모인 조문객만 무려 5만여명이었다고 한다. 규모 면에서도 웬만한 국장, 국민장에 준하는 수준으로 치러졌다. 당시 일본 국민들은 5개월 전 천황 쇼와 덴노가 죽었을 때보다도 더 큰 애도의 물결을 이루었고, 그녀의 죽음으로 진정한 쇼와 시대가 막을 내리고 저물었다며 슬퍼하였다.


3. 일본 음악계 내의 위상[편집]


일본 가요계의 레전드. 음악계를 넘어, 사망 후 국민장급으로 치러질 정도로, 일개 가수가 아닌 일본 현대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로 위상이 높다.

사후에 일본 정부로부터 여성 최초로 국민영예상(1989년 7호)을 수상했다. 또한 히바리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부른 <川の流れのように(강물의 흐름처럼)>은 NHK에서 조사한 일본의 명곡에서 1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나중에 우리나라에서도 이건우 작사, 가수 이화숙이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번안해서 불렀다.

여담으로 미소라 히바리 사후, 얼마되지 않아 일본의 버블경제무너지면서, 그녀의 위상은 단순히 국민가수를 넘어 일본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쇼와 시대 자체를 대표하는 위상을 지니고 있다. 전성기를 구가한 시기가 일본의 전성기와 묘하게 일치하면서, 그녀를 향한 그리움은 화려했던 시대에 대한 그리움까지 합쳐진 것. 여러모로 그녀의 타계와 함께 일본이란 나라의 한 페이지가 넘어갔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미소라 히바리는 타계한 지 34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많은 일본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일본 가요계에서는 전설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사카모토 후유미, 고바야시 사치코 같은 거물급 엔카 가수들은 물론이고, 김연자계은숙도 미소라 히바리의 곡을 자주 부른다. 미국에서 비슷한 위상을 지닌 가수는 엘비스 프레슬리 정도.


4. 한국계 루머[편집]


오래 전부터 한국계 루머가 끊이지 않는 일본의 유명인 중 하나이며 한국, 특히 재일 한국인들 중에는 미소라 히바리가 재일교포 2세 출신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다.

하지만 미소라 히바리 본인이 생전에 "나는 한국계다."라는 말을 한 적은 한번도 없다. 일본에서 활동하다가 한국으로 돌아왔던 작곡가 손목인이 어느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미소라 히바리, 미야코 하루미 등의 유명 엔카 가수가 한국계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주장했던 적이 있고, 우에다 타케히코(植田剛彦)라는 저널리스트가 쓴 <재일(在日) 한국인의 실력>에도 미소라 히바리가 한국계라는 주장이 있지만, 두 사람 모두 본인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확실한 근거를 제시한 적은 없다. 또한 미소라 히바리의 어머니와 이웃에 살았고, 미소라의 한국 공연을 추진한 스즈키 마사부미(鈴木正文)는, "미소라는 아버지의 고향 한국에서 노래하는 것이 소원이었고,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것에 대해 애통해했다"고 증언한 적도 있다. 반대로 미소라 히바리의 아버지 가토 마스키츠(加藤增吉)가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김해 출신 재조선일본인[11]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2가지 다 확실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한편 1989년에는 일본의 주간지 <주간문춘(週刊文春)>에서 미소라 히바리에 대한 재일 루머에 대해 관계자 인터뷰 등 심층조사 후 "재일설은 근거없는 낭설"이라는 기사를 내기도 했다. 덧붙여서 일본 현지에서는 <주간문춘>의 기사와는 별개로, 미소라 히바리에 대한 재일 루머를 한국 언론과 재일 등이 만든 도시전설 내지는 근거없는 루머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미소라 히바리에 대한 수많은 재일설 모두 주장만 있을 뿐 확실한 증거가 없고, 전술한 대로 미소라 히바리 본인이 한국계라고 밝힌 적도 없으며, 결정적으로 일본 관보에 귀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5. 여담[편집]


  • 한국에서도 잘 알려져 있는 일본의 엔카 가수이다. 다만 미조라 히바리라고 칭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틀린 것이다. 미소라 히바리가 맞다.


미소라 히바리가 부른 돌아와요 부산항에

  • 도쿄에서 발행되는 교포 월간지 <아리랑>에 따르면, 미소라 히바리가 어린 시절 일본인 작곡가 코가 마사오(古賀正男) 앞에서 아리랑을 불렀고, 사후에 나온 <히바리 세계의 노래를 부르다> 앨범에 <도라지 타령>이 수록되어 있으며, 후렴 부분인 '에헤야'는 또렷한 한국어로 수록되어 있다. 단, 미소라 히바리는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리메이크했는데, 이 곡에서도 부산항이란 단어는 일본어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부산항'이라고 불렀고, 후렴부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역시 한국어로 부른 적이 있다. 이것은 이 노래를 일본어로 번안한 작사가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일본 가수들이 부른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가사도 대부분 '부산항'과 '돌아와요 부산항에' 부분은 한국어 그대로 불렀다. 단 이 곡을 일본에서 제일 먼저 리메이크한 것은 1979년 '도노사마 킹스'의 <泪の波止場(눈물의 부둣가)>다.[12] 1983년에 '아츠미 지로'가 발표한 <釜山港へ帰れ>에 처음으로 '부산항'이라는 단어가 그대로 수록되어있다. 미소라 히바리가 부른 곡은 아츠미 지로 버전의 커버곡이다.

  • 교토 아라시야마에 미소라 히바리를 기념하는 기념관인 미소라 히바리관이 있었으나 현재는 폐업한 상태다.

  • TBS 테레비 방송 50주년 특별 기획으로 미소라 히바리의 일생을 그린 드라마 <미소라 히바리 탄생이야기(美空ひばり誕生物語)>가 제작되었다. 그녀의 역은 일본의 유명 가수이자 배우인 우에토 아야가 맡았다.

  • 마츠우라 아야의 <초원의 사람(草原の人)>는 생전에 미소라 히바리가 작사한 가사에 음을 덧붙여 만들어진 곡이다.

  • 한국을 대표하던 작곡가 박춘석이 작곡한 <바람 주점(風酒場)>을 미소라가 불러 1978년에 발매한 적이 있었다.

  • 생전에 가수 패티김의 팬으로 잘 알려졌으며 패티김은 미소라 히바리 3주기 추모 공연에 단독가수로는 유일하게 공식 초청되었다.

  • 마지막 곡이자, 명곡으로 추앙받는 <川の流れのように(강물의 흐름처럼)>는 인생을 돌아보는 듯한 아름다운 가사[13]와 더불어 마침 이 노래가 히바리의 마지막 곡이기 때문에[14] 일본에서는 잊혀지지 않는 전설의 명곡으로 남아 있다. 히바리는 이 노래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더더욱 큰 여운을 주었고, 현재까지도 기성가수들은 물론 발라드, 성악 등으로도 불리우고 있으며, 젊은 가수들까지 자주 방송에서 부르는 명곡 중의 명곡이다. 작사는 그 유명한 아키모토 야스시.

  • 15살 때의 모습. 영화 <悲しき小鳩> 에서의 한 장면이다. 부르는 노래는 <東京キッド>이다. 그녀의 대표적인 히트곡 중 하나로, 김연자가 리메이크하여 취입하기도 했다.

  • 1957년 1월 13일 국제극장에서 공연도중 동갑내기 여성 극성팬에게 염산테러를 당했으나, 다행히 얼굴에 큰 상처는 입지 않았다. 범행을 저지른 여성 팬은 이전에도 미소라 히바리의 집에 찾아가거나 전화를 걸었으며, 공연 대기실에도 들어가려고 했으나 제지당한 적이 있었다. 범행 이유는, 자신을 만나주지 않는 미소라 히바리가 미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2주 정도의 치료 후 1월 29일 다시 무대로 복귀할 수 있었다.

  • 1962년 영화배우 코바야시 아키라와 결혼했지만 2년 만에 이혼했다. 다만 혼인신고는 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미혼이다. 아키라는 히바리가 연예활동을 하지 않고 가정에 충실하길 원했지만, 히바리는 연예활동에 미련이 많았기 때문에 불화가 시작되었다. 거기다가 히바리의 어머니나 매니저 등 주변 사람들도 부부관계에 개입을 많이 했고, 아키라가 마음대로 빚을 지는 등의 문제를 일으켜 결국 이혼하게 되었다. 이혼 기자회견에서 아키라는 "이혼하기 싫다"고 징징대었으나, 이혼을 원하는 히바리의 마음을 되돌릴 순 없었다.

  • 출산 경험은 없다. 다만 남동생 카토 테츠야의 아들인 카토 카즈야(加藤和也)를 입양했다. 히바리의 사후, 양자인 카즈야[15]가 저작권과 관련된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카즈야는 키타노 타케시의 팬인데, 카즈야가 아직 어렸던 1980년대 초반 히바리는 타케시와 TV에서 함께 공연했던 적이 있었다. 이때 히바리는 "내 아들이 널 만나고 싶어해."라며 타케시를 억지로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 카즈야와 만나게 해줬다는 일화가 있다.

  • 형제, 자매들도 모두 배우, 가수로 활동했다. 바로 1살 아래 여동생인 사토 세츠코(佐藤勢津子)는 언니 사후 뒤늦게 50대의 나이에 1993년에 엔카 가수로 데뷔하여 활동하고 있다. 남동생 테츠야도 배우였고, 히바리의 대표곡 중 하나인 人生一路(인생일로)를 작곡하기도 했다. 막내동생 카야마 타케히코(香山武彦)[16]도 배우로 활동하다 연예계를 은퇴하고 음식점을 경영하였는데, 1986년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따라서 미소라 히바리의 형제 자매들 중에서 현재 세츠코만이 유일하게 생존해 있다.

  • 남동생 테츠야는 도박, 폭행, 권총소지, 권총밀수 등의 혐의로 여러 차례 체포되고 야쿠자와 연루되는 등의 사고만 치며 히바리의 골칫거리였다. 그 때문에 "미소라 히바리도 야쿠자와 연루되어 있다"[17] 는 의심을 사서 공연이 취소되기도 하는 등, 히바리는 크게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동생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동생과 우애가 좋았다. 테츠야는 1983년 42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 미소라 히바리의 데뷔 전인 태평양 전쟁 시기에 이미 '미소라 히바리'라는 예명으로 활동했던 여배우가 있었다. 이 여배우의 본명은 타카기 후쿠코(결혼 후에는 야마모토 후쿠코), 1923년생이던 그녀는 1943년 20살까지 단 3편의 영화에만 출연했던 배우였고, 결혼과 동시에 일찍 은퇴했다. 그렇기 때문에 후쿠코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고, 당사자였던 미소라 히바리와 심지어 그녀의 소속사인 히바리 프로덕션에서도 타카기 후쿠코의 존재를 알지 못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소라 히바리'라는 예명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후쿠코에게 아무런 양해를 구하지 않고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후 히바리 사후인 2010년 도쿄신문에서 타카기 후쿠코를 찾아가 인터뷰를 한 기사에 따르면, 정작 후쿠코는 그저 우연의 일치[18]였을 뿐이며, 오히려 미소라 히바리를 배려하여 자신이 미소라 히바리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을 주변 사람들에게 전혀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2016년에는 가나가와현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고 하는데, 이 분이 지금도 살아계신다면, 2022년 기점으로 100세를 맞이하게 되신다.

  • 1999년과 2016년에도 미발표곡이 발견되어서 앨범화 되기도 했으며, 타계 30년이 되는 2019년 9월 NHK 스페셜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보컬로이드 방식으로 작업해[19] 새로운 곡을 선보였다.# 여기서 나온 곡은 2019년 12월 18일 그녀의 곡을 판매해 왔던, 일본 컬럼비아에서 발매되었다.

  • 2019년 연말 NHK 방송에서 그녀의 생전 육성을 AI딥러닝한 그녀의 목소리와 모습을 재현하여 무대에 등장시켰다. 비록 홀로그램이지만 그녀의 모습을 보며 추억에 잠긴 듯 눈물 흘리는 관객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20]

  • 2020년 1월, 조카이자 양자인 카토 카즈야가 사업을 하다가 실패해서 미소라 히바리의 생전 저택 겸 기념관이 매각될 위기에 처해있다고 한다. 일본언론에선 "성지가 사라진다"고 안타까워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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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일:external/www.jackandbetty.net/tirashi_benten-kozo.jpg
가수 경력이 워낙 먼치킨이라 국내에선 미소라 히바리가 배우 활동을 했다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잘 알지는 못한다. 배역의 폭도 굉장히 넓었는데, 아역으로 시작해서 발랄한 현대 아가씨, 여러 사극, 시대극 영화의 공주와 어염집 처녀나 부인, 호쾌한 젊은 남자 캐릭터, 남장여자 등을 연기했다. 위의 이미지의 영화는 가부키를 원작으로 한 벤텐코조(弁天小僧)인데, 미소라 히바리는 이 영화에서 여장남자 주인공인 벤텐코조를 연기했다.
[2] 미소라 히바리가 전설이 된 후 이 사람들이 어떤 욕을 먹게 되었는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3] 마찬가지로 저음을 가진 나카모리 아키나도 "얼굴은 아기 같은 게 어른 흉내를 낸다. 좀 더 아이다운 노래를 부르라."는 평가를 받고 오디션에 낙방한 경험이 있다. 반면 우리나라의 문주란은 "어른 목소리를 내는 아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워서 센세이션을 일으켜 톱스타가 된 케이스.[4] TV가 보급되지 않았던 시기에는 서커스처럼 코미디와 노래 등을 전문으로 하는 연예단이 직접 지방을 돌면서 공연을 주최하곤 했는데, 이런 연예단들은 야쿠자와 같은 폭력조직들과 밀월관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후술되는 야쿠자 조직들과의 관계도 이러한 경력이있었기때문이다.[5] 다오카 카즈오는 당시 홈런 히트 퍼레이드라는 연예단을 직접 운영하며 연예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확보한 큰 손으로 성장하고 있었는데, 이때 히바리는 다오카의 마음에 든 이후부터 직간접적으로 다오카의 지원을 받아 크게 성장하게된다.[6] 카와다가 척추 골염으로 힘든 세월을 보낼때 그에게 온정을 베푼게 다오카 가즈오였는데 이런 배경으로 훗날 다오카가 고베 예능사를 설립하자 미소라 히바리는 고베 예능사의 전속 연예인이 되었다.#[7] 본래 히바리의 이름은 카즈에였고, 이전까지만 해도 본명으로 활동하고있었다.[8] 당시 히바리는 실크햇연미복을 입고 노래를 부르는 일이 많았는데, 이 이미지는 관중들에게 상당히 깊이 각인되었는지 한동안 실크햇연미복 하면 히바리를 연상하는 일이 많았다고한다.[9] 당시에는 무성영화가 많아, 가수들이 성우 역할로 참여하는 일이 많았다.[10] 1960년대 당시엔 아이돌이란 개념이나 기준이 아직 일본의 연예계에선 명확하게 규정 및 구현이 되어있지 않았으나, 시기만 따져보면 야마구치 모모에나카모리 아키나, 아무로 나미에 등 각 시대를 대표하는 가희 포지션을 맡고있는 초대형 톱스타 아이돌들의 원조격 인물이다.[11] 일제강점기 혹은 구한말에 조선으로 이주하여 정착, 거주하던 일본인[12] 가사내용은 원곡과 거의 같으나 부산항이라는 단어가 다른 단어로 대체되어 있다.[13] 이 점에서는 프랭크 시나트라My Way와 비슷하다. 시나트라 옹도 이 노래를 발표할 당시 50대였다. 다만 시나트라 옹은 이후로도 30년 이상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14] 정확히 말하면 생전에 마지막으로 나온 곡으로 이 곡의 싱글 앨범은 1989년 1월 11일에 출시되었다.[15] 다키마쿠라의 창시자 챵코 마스다가 출연한 방송에서 테이블에 앉은 이들 가운데 노란머리를 하고 있는 양키풍의 사람이다. "금수저인 주제에 뭘 믿고 나와서 잘난 척 하느냐"는 악플세례를 항상 받는다.[16] 본명은 카토 타케히코(加藤武彦).[17] 미소라 히바리의 소속사 사장이자 후견인인 다오카 카즈오는 악명높은 야쿠자로, 야마구치구미의 3대 두목이기도 했다. 다만 다오카는 연예기획사를 경영하는데 있어서 '야쿠자성'을 배제하고 소속 연예인들에게 잘해줬던 것으로 알려져있다.[18] 사실, 그녀가 활동을 시작하던 때가 1937년으로, 미소라 히바리가 태어난 해였으며, 후쿠코가 결혼과 동시에 은퇴하던 1943년에는 히바리는 겨우 6살이었으니, 당연히 두 사람이 서로 만날 수 있는 접점이 없었을 것이다.[19] 음성 복원은 VOCALOID 시리즈를 만든 야마하가 맡았다.[20] 영상 3분 37초부터는 관객들 중에서 아키모토 야스시 선생도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