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쿠투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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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일라리오노비치 골레니시체프쿠투조프
Михаи́л Илларио́нович Голени́щев-Куту́зов


파일:attachment/Kutuzov1.jpg

출생
1745년 9월 16일[1]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現 러시아 북서 연방관구 상트페테르부르크)
사망
1813년 4월 28일[2]
프로이센 왕국 분츨라우
(現 폴란드 볼레스와비에츠)
작위
공작 (князь)

군사 경력 【 펼치기 ㆍ 접기 】


1. 개요
2. 출생과 그의 군 경력
3. 나폴레옹 전쟁에서
3.1. 나폴레옹 전쟁 초기, 그리고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전
3.2. 조국전쟁에서의 쿠투조프
4. 전공
5. 그 후의 이야기
6. 미디어



1. 개요[편집]


나폴레옹 전쟁 후반기, 러시아를 나폴레옹의 마수로부터 구해낸 러시아 제국의 야전 원수이자 명장. 영국의 아서 웰즐리(이후 웰링턴 공작)와 함께, 나폴레옹이 이끄는 대육군에게 매우 위협적인 인물이었다.

본명이 상당히 길어서, 보통 쿠투조프라고 부른다

2. 출생과 그의 군 경력[편집]


쿠투조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으며 1759년[3] 러시아 제국군에 입대했다. 이후 그는 1764년~1769년 사이에 있었던 폴란드 전쟁, 1770년~1774년에 벌어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보였으나 이 와중에 한쪽 눈을 잃고 말았다. 전쟁이 끝나고 쿠투조프는 몇 년 동안 중부와 서부 유럽을 여행했다.

1784년 쿠투조프는 소장이 되었고, 수보로프 휘하에서 1787년 크림 지방의 군정관(governor-general)이 되었다. 쿠투조프는 수보로프 밑에서 지휘관으로서 훈련을 받으며 성장했고. 쿠투조프는 1787년~ 1792년 사이에 또다시 벌어진 제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오차코프(Ochakov), 오데사(Odessa), 벤데르(Bender), 이스마일(Ismail) 등을 함락시키고 림니크(Rimnik)와 마신(Mashin)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입히며 승리하는 등의 기염을 토했다. 1791년 쿠투조프는 중장이 되었으며 이후 콘스탄티노플 대사, 핀란드의 군정관, 상트페테르부르크 사관학교의 교관, 베를린 대사, 상트페테르부르크 군정관 등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역임한다. 쿠투조프는 당시의 황제였던 파벨 1세의 총애를 받았으며, 파벨 1세가 암살당한 뒤에 새 황제로 등극한 알렉산드르 1세에게 잠깐 총애를 받았으나 아우스터리츠에서부터 냉대를 받았고 알렉산드르 1세는 이후 쿠투조프를 멀리하고 열라 까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쿠투조프는 알렉산드르 1세에게 계속하여 충성을 바쳤다.


3. 나폴레옹 전쟁에서[편집]



3.1. 나폴레옹 전쟁 초기, 그리고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전[편집]


1805년 쿠투조프는 으로 진격하는 나폴레옹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러시아군을 이끌고 출진했다. 아우스터리츠 전투가 있기 전날 밤, 전황이 이미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한 쿠투조프는 동맹군 장군들을 설득하여 전투를 저지하려 하였으나, 알렉산드르 1세에게 까이게 되자 삐져서 병을 핑계로 전술을 짜는 데 참여하지 않았다.[4] 그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게, 동맹군은 나폴레옹에게 제대로 발렸고, 알렉산드르 1세는 그제서야 쿠투조프를 신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쿠투조프는 아우스터리츠 전투 막판 빠른 후퇴를 위해 전장에서 지휘를 하던 중 부상을 입었다. 1806년~ 1812년 동안 쿠투조프는 리투아니아와 키예프의 군정관을 역임했다.

쿠투조프는 1806년~ 1812년에 재차 벌어진 제9차 러시아-투르크 전쟁에서 러시아군의 작전을 총지휘했다. 쿠투조프는 다가올 프랑스군과의 싸움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고, 그에 따라 재빠른 작전을 실시하여 또 다시 오스만군을 갈아버렸다. 그 후 부쿠레슈티 조약에서 그동안 열심히 털어온 땅들 일부를 돌려주고 달랬다. 그리고 베사라비아(Bessarabia) 점유를 공식화했다. 이 전쟁의 승리로 쿠투조프는 공작(knyaz)이 되었다

이 때는 프랑스는 러시아 황제의 외삼촌[5]이 다스리던 올덴부르크 대공국을 합병하고 러시아는 대륙봉쇄령을 탈퇴하는 등 서로 열심히 어그로를 쌓던 시점이며, 불과 1개월 후 프랑스의 러시아 공격이 시작된다. 프랑스와의 관계가 파탄나고 전쟁이 가시화되니 양면 전선을 막기 위해 좀 더 양보해서라도 오스만과의 전쟁을 마무리하고 관계를 풀어둘 필요가 있었다. 이런 노력들이 결실을 맺어, 오스만은 프랑스와 전쟁 중인 러시아의 뒤통수를 치지 않았다.[6]


3.2. 조국전쟁에서의 쿠투조프[편집]


대륙 봉쇄령 이후 타격을 받은 러시아가 너무나도 분한 나머지 나폴레옹을 씹고 영국과 놀기 시작하자, 1812년 나폴레옹은 유례없는 70만 대군을 일으켜 러시아를 침공했다. 미하일 안드레아스 바르클라이 드 톨리[7]청야전술을 채택하여 실행에 옮기고자 했지만, 표트르 바그라티온 같은 여러 장군들의 반발을 사고[8] 엄청나게 까인 다음, 황제에 의해 강제적으로 최전선에 배치되었다. 이것은 알렉산드르 1세 탓이 컸는데 평소 쿠투조프를 음흉한 노인네라고 의심했고 군사분야에 문외한이지만 전권을 누구에게도 주려 하지 않아서 국방장관이며 1군을 지휘하는 드 톨리를 명목상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는데, 2군을 지휘하는 바그라티온이 대놓고 그의 명령을 거부하며[9] 황제에게 못해먹겠다고 항명을 부렸고 합동작전도 어려웠다.

사실 이 당시 러시아 군 수뇌부는 드 톨리를 위시한 외국인파와 러시아 전통파들 대립이 컸기 때문에[10] 외국인파와 귀족파 장교들이 날이면 날마다 대가리 터지게 싸웠고 알렉산드르 1세는 이를 이용했다. 애초에 드 톨리를 임명한 것도 "이래저래 간섭말고 일선지휘관을 임명하시죠." 라는 건의 때문에 만만한 바지사장 드 톨리를 명목상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것. 애초에 쿠투조프 정도의 경력과 전공이 아니면 총사령관 감은 없었다. 결국 바지사장(?) 드 톨리를 총사령관에서 해임하고 겸임하던 1군 사령관은 유임시킨 후 쿠투조프에게 전권을 위임한다. 이 때 쿠투조프는 조건을 내걸었는데 황제가 아우이자 황태제인 콘스탄틴 대공[11]을 기용해서 지휘권을 간섭하지 않는 조건으로 수락한다.[12]

쿠투조프가 총사령관이 되어 8월 17일 러시아군 본대와 합류했을 때 모두가 그를 반겼고, 쿠투조프는 기본 방침은 변경하지 않은 채 점점 나폴레옹을 질질 끌고 다니면서 그의 전력을 계속해서 소모시켰다. 그러던 중 9월 초 러시아군은 모스크바에서 서쪽으로 110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보로디노에 도착했고, 근성으로 뒤따라온 나폴레옹군과 한바탕 싸우게 되었다(보로디노 전투). 이 전투에서 양측 모두 20만이 넘는 병력과 600문 이상의 대포를 가지고 개전했으며 그 결과는 나폴레옹마저도 너무나도 끔찍했다고 할만큼 매우 참혹했다고 기록한다.

보로디노 전투에서 절반 가까이 괴멸하는 타격을 입었지만 아직 러시아군의 가용 병력은 건재했고, 프랑스군은 전투에 참여한 병력의 4분의 1을 손실했다. 이후 러시아군은 청야전술의 일환으로 모스크바를 버리고 모든 시민에게 모스크바를 떠나게 했다. 칼루가 도로를 따라 퇴각하며 물자를 보급받은 쿠투조프는 나폴레옹을 도발하여 말로야로슬라베츠 전투를 벌였다. 여기서 프랑스군은 전술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전체적인 국면은 이미 러시아의 승리로 굳어져 가고 있었고 식량 부족과 굶주림에 지친 프랑스 수뇌부는 결국 퇴각을 결정한다. 이후 러시아군은 승세를 타고 퇴각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프랑스군은 퇴각하는 가운데 덮친 엄동설한과 카자크 기병대의 습격과 분노한 러시아 농부들의 공격을 받아 점점 그 수가 줄어들어, 690,000명의 대육군 중 극히 적은 숫자인 93,000명만이 살아서 프로이센 왕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쿠투조프는 야전 원수의 직위에 올랐고, 1812년 11월에 스몰렌스크에서 남아있던 프랑스군을 상대로 승리하면서 고귀한 스몰렌스크 공작 전하(Светлейший князь Смоленский)라는 영광스러운 명칭을 받게 되었다.


4. 전공[편집]


막상 쿠투조프는 전술적인 관점에서는 나폴레옹 전쟁에 별로 한 게 없어보인다. 그가 참가한 중요 전투가 두 개 있는데 아우스터리츠와 보로디노이다. 그런데 아우스터리츠는 반대하는 걸 황제 알렉산드르가 억지로 밀어붙여서 싸운 거고 별로 한 일도 없다. 중앙으로 돌격해오는 프랑스군을 막기 위해 병력을 모았지만 이미 완전히 늦은 상황이었으니 그의 책임도 아니다. (물론 자기가 책임지기 싫었던 황제는 모든 책임을 쿠투조프에게 떠넘기고 짤라버렸다.) 그리고 보로디노 전투의 경우 그의 결정으로 전투를 벌였다기 보단 스몰렌스크에서 후퇴하던 러시아군을 프랑스군이 보르디노에서 따라잡아서 우발적으로 전투가 벌어진 것이고 실제 전장을 이끈 건 바클라이와 바그라티온이었고 쿠투조프는 거의 구경만 했다.

보르디노 전투 당시 쿠투조프는 후방에서 전황보고를 받고 오판하는 바람에 페테르부르크에 승전보(?)를 보내고 페테르부르크에선 감사기도회가 열렸다. 덕분에 보르디노 전투 패배 이후 5일이나 지나서야 모스크바 포기령을 내렸고, 이틀 후 프랑스군이 모스크바에 입성할 때 보르디노서 다친 부상병들이 1만명 이상 모스크바에 있었다. 어쨌든 사고(?) 후에 정확하게 현실판단을 해서 병력을 보존하고 후퇴한 것은 전략적으로 매우 우수한 판단이었다. 드 톨리처럼 청야전술을 편다해도 쿠투조프의 경력이나 카리스마가 아니었으면 러시아군 주전파들을 누를 수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지휘한 그의 공적이 크다. 그리고 그의 전술적 능력이 떨어졌다는 건 아니다. 몇년간을 끈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도 그의 성과는 분명히 인정할만 하다.

무엇보다도 그를 돋보이게 한 건 전략적인 식견이다. 나폴레옹의 적수 중에 전략적인 부분(전술적 화려함에 잊기 쉬운데 사실 나폴레옹의 최대 강점은 전략/작전술적 능력이다)에서 나폴레옹을 고전시킨 인물은 쿠투조프 한 사람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도 나폴레옹의 가장 아픈 부분을 찔렀고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도 초기 전략은 바클라이가 세웠지만 그걸 이어서 막판까지 전쟁을 지휘한 건 분명 쿠투조프이고 프랑스군을 완전히 무너트릴 수 있었다.


5. 그 후의 이야기[편집]


1813년 초, 쿠투조프는 병에 걸렸고, 1813년 4월 28일 결국 분츨라우(Bunzlau)에서 6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를 기념하는 동상이 모스크바 포클로나야 언덕과 쿠투조프가 묻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카잔 대성당 앞에 세워졌는데, 카잔 대성당의 동상은 보리스 올롭스키가 제작하였다. 쿠투조프는 대를 이을 남자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유산은 딸과 사위 가문에 분배 되었다.[13]

제정 러시아 육군에서는 수보로프 다음가는 명장으로 일컬어진다. 알렉산드르 푸시킨은 자신의 유명한 애가인 <쿠투조프의 묘>에서 그의 활약을 그렸다. 레프 톨스토이전쟁과 평화에서 쿠투조프는 교활하고 게으르지만 동시에 현명하고 인내심이 강한 지도자로 그려지고 있다.

1941년~ 1945년간 치러진 독소전쟁에서 소련 정부는 쿠투조프 훈장(Order of Kutuzov)을 만들었는데, 이 훈장은 소비에트 연방이 소멸한 이후에도 여전히 러시아에서 가장 높은 군사관련 훈장으로 건재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붉은 군대가 오렐에서 공세를 펼칠 때, 그의 이름을 따서 "쿠투조프 작전"(Орловская Стратегическая Наступательная Операция Кутузов)이라 명명되었다.

현대에는 소련 해군의 스베들로프급 순양함 중 미하일 쿠투조프 함이 있다. 제정 러시아의 군인이었음에도 워낙 대영웅으로 대접받았기 때문에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존경받았음을 알 수 있다.


6. 미디어[편집]


일본 만화 진정남 나폴레옹에서 개념있는 러시아 장군으로 나오며, 나폴레옹이 러시아군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라고 견제한 명장. 역사처럼 짜르에게 눈 밖에 나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도외시되다가, 황제를 노리는 프랑스군 총격을 몸으로 막아 얼굴을 다친다. 하지만, 곁에서 창백해진 채로 당황하던 알렉산드르 1세와 달리 얼굴에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아픈 기색을 전혀 안 보이고, 황제부터 피하도록 분부하고 이 전투는 졌으니 아군을 하나라도 구해 손실을 줄이기는 게 할 일이라고 당부한다.그의 지휘로 러시아군을 제법 많이 데리고 철수했으나 그래도, 패배에 많은 피해를 입었기에 늪에 자신이 빠지는 상상을 하면서 나폴레옹에게 당했다고 분통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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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율리우스력 9월 5일[2] 율리우스력 4월 16일[3] 1760년에 입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4] 그 때문에 전투에 참여한 오스트리아군 장군 베이로데르(Feldzeugmeister Weyrother)는 훗날 이 전투에서 패한 것은 쿠투조프의 책임이 아니라고 말했다.[5] 황태후 오빠이며 이종사촌인 그 후계자는 나폴레옹이 눈독 들이던 알렉산드르 1세의 여동생과 결혼함.[6] 만약 오스만이 러시아를 공격했다면 러시아로서도 최악의 위기를 맞이할뻔 했지만 오스만 역시 러시아가 전력을 다해 저항할 경우 안 그래도 러시아에게 군사력이 밀리는 자신들의 피해가 더욱 막대해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오스만은 굳이 큰 희생없이 러시아와의 전쟁을 마무리지으려 했다.[7] 스코틀랜드계 조상을 두었으며 발트 지역 태생이다.[8] 바클라이 드 톨리는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둥의 소리를 했지만 정확한 이유는 드 톨리가 등용한 독일 장교(클라우제비츠도 복무했다.)가 너무 많다는 투정과 러시아스럽지 못하다는 이유였다.[9] 작위, 계급, 가문 모두 바그라티온이 한수 위에 당시 러시아 전통파들의 외국인 혐오증에다가 전술적으로 대립이 컸다. 황제에게 직접 저런 겁쟁이의 명령을 듣느니 일개 연대장으로 복무하겠다고 최후통첩까지 보냈다.[10] 드 톨리는 러시아인이지만 외국계고 러시아 귀족 중엔 발트 독일인 계열 귀족도 많은데다가 나폴레옹 전쟁 시기 독일에서 망명한 군인들, 프랑스 왕당파 망명자 등 다양했다.[11] 황제의 아우이면서 황실을 대표해서 군을 맡았는데, 귀천상혼 탓에 알렉산드르 1세 사후에 계승권을 포기하고 폴란드 총독으로 복무한다. 제위를 계승한 건 17세 연하 동생인 니콜라이 1세.[12] 이런 조건을 듣고 임명할 때 황제는 매우 화가 났었다고 한다. 애초에 러시아 전통파 군인들과 귀족들을 조종하는 게 쿠투조프가 아니었나 의심하기도 했다.[13] 인터넷에서 레프 톨스토이의 외증조부 라는 헛소리가 있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딸 중에 한 명인 파라스코비아(Praskovia)가 마트베이 표도로비치 톨스토이(Matvei Feodorovich Tolstoi)와 결혼하긴 했으나 레프 톨스토이의 증조부는 세르게이 페트로비치 볼콘스키 공작으로 쿠투조프가 아니다. 참고로 볼콘스키 가문은 류리코비치 가문의 후예이며 가문의 역사가 8~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러시아 귀족 중 성골 중의 성골로 톨스토이 가문이나 쿠투조프 가문이랑 비교가 안될 정도의 명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