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홍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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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법조인, 전 군인, 정치인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3선 국회의원 (제19대~21대)으로서, 지역구는 경남 김해시 갑, 소속 정당은 더불어민주당으로 경상남도 최초의 민주당계 3선의원이다.
2. 생애[편집]
1961년 4월 18일, 경상남도 김해군(현 김해시) 주촌면에서 부친 민경만(閔庚萬, 1934 ~ 2013)과 모친 해남 윤씨 윤재임(1936. ~ 1978. 10 .25.) 사이의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운 형편에서 공부하며 고철 등을 고물상에 팔거나 김해평야 수로 고랑에서 미꾸라지를 잡아 용돈을 벌었다.
동광초등학교와 김해중학교를 졸업한 뒤 현실적인 고민을 하며 집안 사정을 생각해 인문계 고등학교 대신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선생님의 권유로 인문계인 김해고등학교에 3년 장학생으로 진학했다.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78년 모친상을 당했다. 사인은 뇌출혈. 고3에 가장이자 엄마 역할까지 맡았지만 고등학교에서 공부를 곧잘했고 리더십도 뛰어났다. 주변에서는 서울의 명문대를 권했지만, 동생들을 두고 멀리 떠나는 것이 내키지 않아서, 부산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 [3]
대학교 새내기 시절 군사정권이 출범했고, 휴교령이 내려졌다. 대학교 2학년 때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대학교 시절 아내와 미팅으로 만났으며, 1984년 제6회 군법무관 임용시험에 합격하여 군법무관을 지내던 중 결혼했다. 1987년 부산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준장까지 진급하여 육군 법무감, 고등군사법원장을 지냈으며, 전역 후 변호사로 개업했다.
2.1. 정치 활동[편집]
정치에 입문한 이후, 한때 한나라당 당적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참여정부 시절 군 사법제도 개혁 과정에서 인연을 맺었던 문재인이 혁신과 통합 추진위원으로 동참할 것을 권유하자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민주통합당에 입당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상남도 김해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국회의원인 새누리당 김정권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는데, 당시 경남의 유일의 민주통합당 소속 당선자였다.
2016년 초 같은 당의 부산 지역 의원이었던 조경태 의원이 새누리당으로 당적으로 옮기자, 민홍철 의원 또한 새누리당 복당설에 휩싸였으나 정치는 신의가 중요하다며 일축하고 더불어민주당에 잔류하였다. 이후 같은 해 4월에 치러진 20대 총선에도 같은 지역구에서 당선되어 재선에 성공했는데 총선 당일에 열린 김해시장 재선거 및 김해시의원 보궐선거 또한 전부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당선되면서 김해시가 사실상 민주당의 텃밭이 되었다.[4]
20대 국회에서 공약완료율이 42.9%로 경상남도 국회의원 중 미래통합당 김한표 의원(50%)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20대 국회의원 헌정대상에서 최우수상(300명 중 3위)을 수상했다.
21대 총선에서는 단수공천을 받으면서 3선에 도전했고 선거구 분구 이후 김해시 최초이자 분구 이전 김해시 최초로 3선 의원이 된 김영일에 이어 두 번째로 3선 의원이 되는데 성공했다. 아울러 조경태의 뒤를 이어 3당 합당 이후 두 번째로 영남에서 3선에 성공한 민주당계 정당 출신 국회의원이 되었고 경남에서 첫 민주당계 정당 3선 의원이 되었다. 3선이 됨에 따라 국회 국방위원장이 유력하다는 기사가 나왔다.
2020년 6월 15일 국회 본회의에서 국방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백선엽 장군 사망에 대해서 "국방위원장 입장에서 군의 원로셨고 6·25 전쟁에 공헌하셨던 점에 대해서 우리가 애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발언했다. #
3. 논란[편집]
4. 기타[편집]
- 문재인 전 대통령의 캐치 프레이즈 중 하나인 '사람이 먼저다'에 큰 감명을 받았는지 재선 시절부터 선거 때마다 '사람이 먼저다'를 살짝 바꾼 '민생이 먼저다'를 본인의 캐치 프레이즈로 삼고 있다.
5. 선거 이력[편집]
여담으로 선거에서 단 한번도 낙선한 적이 없다. 뿐만 아니라 민주당계 정당 험지인 경상남도 지역에서 내리 3선한 것도 대단한 일이다.
6. 소속 정당[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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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의 출생지인 주촌면은 선거구 상 김해시 을에 속한다.[2] 충정공파 33세 홍(泓) 항렬.[3] 당시 부산대학교 법과대학은 비수도권 최고 명문 법대로 인풋 및 아웃풋 모두 하늘을 찔렀다. 1979년 12월 28일 경향신문 기사에 수록된 예비고사 배치표에 따르면, 부산대학교 법행정계열의 예상 합격 커트라인이 277점이었다. 당시 연세대학교 정법대학 및 문과대학의 커트라인이 280점이었고, 서강대학교 경상계열이 277점, 경희대학교 경상계열이 275점, 고려대학교 어문계열 및 인문계열·서강대학교 문과계열·이화여자대학교 인문사회계열이 270점이었음을 생각해보면 인풋도 매우 높은 편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4] 사실 김해는 민주계 새누리(김영삼, 이명박)보다는 노무현의 입김이 더 강하게 작용해 노무현 당선 이후 민주계가 지속적으로 강세를 보이는 지역이었다.[5] 출처는 정봉주의 전국구 20화이며 당시 육군본부 진급비리 수사를 맡았던 최강욱 변호사(당시 군법무관)가 'M모씨면서 현 민주당 국회의원'이라고 특정해서 말했다.[6] 새정치민주연합에 흡수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