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바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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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루크 왕조 이집트 술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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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
살리흐 왕조
민족:
아르메니아인 · 튀르크
투르크멘
대수:
-
초대
제2대
칭호:
말리카 알 무슬리민 알 무스타사미아
알 말리크 알 무이즈
알 말리크 알 만수르
술탄:
샤자르 앗 두르
이즈 앗 딘 아이바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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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흐 왕조
바흐리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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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말리크 앗 살리흐
알 말리크 앗 자히르
살라흐 앗 딘 하지
사이프 앗 딘 바르쿠크
살라흐 앗 딘 하지
사이프 앗 딘 바르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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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تمثال_للسلطان_الظاهر_بيبرس_(cropped).jpg
카이로 국립 군사박물관에 위치한 바이바르스 청동 흉상
이름
아랍어
الملك‭ ‬الظاهر‭ ‬ركن‭ ‬الدين‭ ‬بيبرس البندقداري
알 말리크 앗 자히르 루큰 앗 딘 바이바르스 알 분두크다리
영어
Al-Malik al-Zahir Rukn al-Din Baibars al-Bunduqdari
생몰년도
1223년 ~ 1277년/1278년

1. 개요
2. 생애
2.1. 노예
2.2. 술탄의 맘루크
2.3. 몽골에 맞선 술탄
2.4. 사후
3. 의의
4. 성격과 평가
5. 창작물



1. 개요[편집]


맘루크 왕조의 제5대 술탄. 바이바르스 또는 바이바르스 1세라고 불린다. 몽골 제국십자군을 무찌른 명장이자 살라흐 앗 딘과 같은 급의 평가를 받는 이슬람영웅이다.[1] 특히 몽골의 침공으로부터 이집트를 지켜내고 이로써 이슬람 세계의 중심이 바그다드에서 카이로로 옮겨지게 된 것은 역사적으로 큰 의의가 있다.

'바이바르스'는 투르크어표범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2. 생애[편집]


파일:바이바르스 사자.webp
바이바르스의 상징인 표범 문양


2.1. 노예[편집]


킵차크계 튀르크인으로, 1228년 쿠만족 바라리 가문에서 태어났다. 볼가 강 근처에서 10살을 넘겼고, 14살에 노예 상인에게 팔려가 친구와 함께 중동의 노예시장을 전전했다.

바이바르스는 키가 크고, 밝은 금발에 갈색의 피부와 눈동자가 파란색이었지만 선천적으로 한쪽 눈이 기형(애꾸눈)[2]이어서 노예시장에 내놓아도 아무도 사가려 하지 않아 악성 재고로 지낸 기간이 더 길었을 정도였다.[3]

시리아의 알레포에서 한 번, 다마스쿠스[4]에서 한 번 팔렸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애꾸눈이라 쓸 데가 없다고 돌려보내졌다. 결국 하마에서 마술(馬術)과 궁술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아이유브 왕조아미르 분두크다리가 바이바르스와 친구를 샀다. 당시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앗 살리흐 아이유브였는데, 향신료 무역으로 얻은 막대한 재산으로 자신의 맘루크 친위대 바흐리를 만들고 있었다.

앗 살리흐는 친위대로 특히 튀르크계 쿠만족을 선호했는데 쿠만족은 기마 민족이고 활을 잘 쏘며 특히 몽골에 대한 복수심이 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5] 분두크다리는 술탄에게 바치기 위한 노예를 구하고 있었는데 바이바르스와 그 친구가 제격이었다. 둘은 분두크다리에게 이끌려 마술과 궁술을 연마했고[6] 1246년 18세에 바이바르스는 술탄 앗 살리흐의 맘루크가 되었다.

바이바르스는 앗 살리흐의 친위대에서 몽골의 전술과 장비를 배웠고, 여기서 두각을 나타내어 2년 만에 경호대장까지 승진하게 되었다.


2.2. 술탄의 맘루크[편집]


1250년, 제7차 십자군 원정 시의 만스라 전투에서 술탄의 친위대장으로 참전하여 카페왕조 프랑스 국왕 루이 9세를 격파하고 그를 포로로 사로잡았다. 전후, 전쟁 중 병사한 앗 살리흐의 후계자 알 투란샤가 바흐리 맘루크를 홀대하고 배척하자, 선왕 앗 살리흐의 두 번째 아내였던 샤자르 알 두르와 결탁하여 술탄 알 투란샤를 죽이고, 샤쟈르 알 두르를 술탄으로 추대해 맘루크 왕조를 시작했다.

맘루크 왕조의 제2대 술탄은 샤쟈르 알 두르의 재혼 상대이자 맘루크 지휘관이었던 아이바크였다. 바이바르스는 술탄 아이바크 밑에서 시리아 지역에 남은 아이유브 왕조의 군주 나스르와 대립했다. 하지만 아이바크는 바이바르스와 바흐리들이 자신이 아닌 샤쟈르에게 충성하는 것에 불안을 느껴 자신의 사병 맘루크를 양성해 바이바르스를 공격했다. 바이바르스는 결국 쫓겨나 아이유브 왕조의 나스르(An Nasir Yusuf)를 찾아가 의탁했다.[7]

한편 바그다드의 마지막 아바스 칼리파 알 무스타심은 몽골의 침략 앞에 무슬림의 단결을 호소하며 중재했고, 아이바크는 나스르가 바이바르스를 지원하지 말 것을 조건으로 하여 받아들였다. 바이바르스는 다시 쫓겨나 갈 곳 없는 처지가 되었다.

자신을 지지하던 바이바르스와 바흐리들의 고통을 보던 샤쟈르는 결국, 남편 아이바크를 목욕중에 암살했다. 하지만 아이바크의 맘루크 지도자 쿠투즈가 수상함을 느끼고, 시종들을 고문하여 사건의 진실을 알아낸 다음 주군인 아이바크의 아들 알 만수르 알리를 술탄에 앉히고 샤자르 알 두르를 체포해 탑에 감금한 뒤 살해했다. 호라즘 왕족이었던 쿠투즈는 어린 술탄 알리의 섭정을 하다가 곧 자신이 술탄에 올랐다.

한편, 바그다드가 몽골군에게 함락되자 시리아 아이유브 왕조의 나스르는 바이바르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바이바르스는 나스르와 함께 몽골군을 맞이하려 했으나 나스르가 항전과 항복 사이에서 고민을 계속하자 단념하고 이집트의 쿠투즈에게 향했다. 이때, 바이바르스와 그의 바흐리 맘루크들은 명색이 살라딘의 혈통을 물려받은 시라아의 술탄인 나스르의 행보에 매우 실망하며 암살시도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게 사실이든 아니든 일이 글렀음을(...) 예상한 바이바르스는 그의 재산과 가족들을 이집트로 미리 피신시켰다.

이후 나스르는 알레포를 잃고 나블루스에서 몽골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남쪽으로 도주하다가 가자에서 아들과 함께 훌라구에게 생포되었다. 그러나 나스르는 아인 잘루트 전투 패배소식을 들어 빡친 훌라구에게 곧 처형당한다(...)


2.3. 몽골에 맞선 술탄[편집]


파일:예루살렘 사자문.jpg
바이바르스는 영토 곳곳에 자신의 상징인 표범 무늬를 새겼다. 사진은 예루살렘 사자의 문.[8]

1260년에 몽골군이 육박하자 이집트의 술탄 쿠투즈와 손을 잡고 9월 3일의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몽골군을 대파, 사령관 키트부카까지 전사시키면서 대승을 거두었다. 바이바르스가 몽골을 막아낸 건, 온전히 그의 공만은 아니다. 그가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공을 세운 건 맞지만, 아인 잘루트 전투 자체는 바이바르스의 전임 술탄인 쿠투즈의 지휘하에 이루어졌다.

이집트로 개선하는 도중에 바이바르스는 술탄 쿠투즈를 살해하는데, 이는 이전에 쿠투즈가 바이바르스의 군단장이었던 아크다이를 살해하였던 데에 대한 보복이자, 쿠투즈가 자신의 존재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던 데에 대한 선조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바이바르스는 쿠투즈를 대신하여 카이로로 돌아와, 술탄에 즉위한다.

1271년에는 십자군의 난공불락의 요새로 꼽히던 크라크 데 슈발리에를 함락했다. 몇 차례 공성전을 펼쳤으나 함락에 실패하자 바이바르스는 보에몽 백작의 편지로 가장한 가짜 항복 명령서를 만들어 비둘기를 이용해 성에 날려보냈다. 성을 지키던 구호기사단은 느닷없는 항복 명령에 이것이 바이바르스의 속임수라는 것을 간파했으나, 전황이 악화되고 기사단의 상황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어[9] 협상을 통해 크라크 데 슈발리에를 넘기고 모두 철수한다.

1277년 봄에 아나톨리아의 몽골군을 격파하고 일 칸국아바카 칸과 대결하고자 하였으나, 아바카 칸은 이를 피하고 도주한다. 바이바르스는 그를 쫓지 않고 다마스쿠스에 개선하게 되는데, 이 직후에 복통을 일으키고 약 2주 후인 7월 1일에 사망하였다. 그의 급작스러운 사망원인에 대해서는 독살이라는 설이 있다. 일설에는 정적을 독살하려고 준비한 독주를 실수로 자신이 마시고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과도한 음주[10]가 원인이라는 설도 있어, 정확한 원인은 수수께끼에 싸여 있다.

그는 죽을 때까지 30회 이상을 출병하였다고 한다.


2.4. 사후[편집]


파일:바이바르스.jpg
다마스쿠스 구도심의 시타델과 우마이야 대사원 사이에 위치한 앗-자히리야 마드라사 내의 '자히르 앗 딘' 바이바르스 영묘

그의 사망 후, 아들들(바라카흐, 솔라미시)이 뒤를 이어서 맘루크 왕조의 술탄에 즉위한다. 바이바르스는 생전에 아들인 바라카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하였었고, 이를 위해서 바라카를 부하인 칼라운의 딸과 결혼시켜서 칼라운을 바라카의 후견인으로 삼아 그 기반을 다졌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바이바르스의 아들들은 아버지만한 능력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칼라운에게 곧 폐위되고 만다.

실력주의 사회였던 맘루크 왕조에서 결국, 바이바르스의 동료이자 부하, 그리고 바라카의 장인이었던 칼라운이 맘루크 왕조의 술탄으로 즉위하였다.


3. 의의[편집]


이집트로 몰려오는 십자군들을 격파하고[11] 일 칸국아바카 칸의 군대를 물리쳐 몽골제국군의 서진을 막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바이바르스는 세계사에서 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게 몽골군 본진이 아니라 파견된 군대 정도라고 폄하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칸의 권위가 강렬하던 칭기스칸 생전의 서하와 호라즘을 제외하고는 애초에 몽골은 본국의 군대라는게 존재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남송을 멸망시킨건 쿠빌라이,아바스 왕조를 멸망시킨건 훌라구,러시아 대공을 조세수금원으로 쓴건 킵차크 칸국이었는데 이들은 대칸의 권위를 인정하기는 했지만 애초에 연합할 수 없는 지방정권세력이었고 징기스칸 사후 바로 대립하기 시작하여 내전까지 펼치면서 대립하던 상황이었다.

몽골군은 애저녁에 공세종말점을 한참 넘어가 있었다. 몽골 본국에서 이집트까지 걸어서 십년이 넘게 걸리는 지역인데 여기까지 국가를 운영한다는게 중세에 말이 안되는 일이었다. 전쟁을 펼치는 군대에 보급을 해주고 전사자가 생기면 병력을 보충해줘야하는데 그게 이미 불가능해진지가 한참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골군은 보급을 현지에서 하고 대충 용병과 현지인들을 화살받이로 쓰는 영리한 병력교환을 통해 거의 소모없이 무패로 확장하고 있었지만 누군가 한번만 막아줘서 병력을 괴멸시키면 확장이 끝나는 건 분명했다. 하지만 그걸 아무도 막지못하고 있었다. 이때 이들을 막아낸 사람이 바이바르스라는건 명백하다. 아바카 칸이 본격적으로 시리아를 침공한 1281년에는 바이바르스는 죽고 없었는데, 이때도 맘루크는 이들의 진격을 막아냈고 이후 일 칸국은 이슬람으로 개종하며 평화가 찾아왔다.[12]

한편으로는 킵차크 칸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 이슬람몽골인들에게 전파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몽골 제국의 분열(일 칸국 vs 킵차크 칸국)을 이용하는 이이제이 외교를 구사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일 칸국은 십자군 (특히 안티오크 공국), 아르메니아 왕국, 동로마 제국, 교황령 등의 기독교권과 동맹을 시도했는데 제대로 된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맘루크 군과 마찬가지로 기병이 주력이던 몽골과의 전쟁을 치르던 바이바르스는 카이로에서 다마스쿠스까지 연결되는 전령 시스템(역전제)과 문화진흥에 관심이 많았다. 이 역참제(하리드 혹은 바리드[13])는 바이바르스의 역작으로, 유민족 통합과 정보의 신속한 전달에 이바지했다. 이는 몽골의 잠치에서 영향 받았다고도 하는데 세 가지로 수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파발로, 평상시에는 다마스쿠스 ~ 카이로 간의 연락 4일 걸리고 비상시에는 3일로 줄어들게 된다. 두번째로 마나위르라 불리는 봉화대이다. 이는 알 비라와 알 라흐바에서 각각 시작되어 다마스쿠스에서 합쳐지고 가자까지 이어진다. 그럼 그곳에서 파발마 혹은 비둘기로 카이로에 알리는 체계이다. 마나위르 덕분에 아침 무렵 변경의 급보가 저녁 무렵 카이로 당도할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은 아이유브 왕조 때부터 크게 활용되던 비둘기 서신 전달인데, 기존에 개인별로 쓰이던 것을 국가적으로 체계화시켰다. 바리드 시스템은 지극히 군사적 목적으로 쓰였으며, 몽골군의 기동성에 대항하려는 맘루크 측의 처절한 노력의 결과라 할 수 있겠다.

또한 파괴적인 이미지와 달리 바이바르스는 여러 성채들의 요새화를 추진하기도 하였다. 우선 몽굴군에 의해 방어 시설이 파괴된 신자르, 보스라, 알 준, 사르카드, 샤이자르, 알 살트, 알 수바이바, 슈마이미쉬 (홈스 부근) 등을 재건하였고 십자군으로부터 빼앗은 크락 데 슈발리에, 알 준, 티룬, 히신 아르카드, 사파드 성채 등을 보강하였다. 그 밖에 십자군 견제 목적으로 내륙에 카쿤 등의 성채를 사실상 새로 세우기도 하였다. 이는 파괴된 아르수프와 카이사레아를 대신하여 해당 지역의 중심지 역할도 하였다. 그 외에 높은 성벽의 위세는 맘루크 왕조의 권위를 상징하기도 하였다. 아이유브 시대에 몇개의 도시들에 집중된 시리아의 권력이 이집트에 반기를 들었던 것을 의식한 바이바르스가 일부러 많은 성채들에 군대를 분산시켰다는 시각도 있다. 어쨋든 현재 남아있는 레반트 지역의 성채들 중 상당수는 바이바르스의 손을 거친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4. 성격과 평가[편집]


바이바르스는 상대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뛰어났으며, 깊은 신앙심과 금욕적인 성격에, 부하를 지극히 아끼는 등 이상적인 군주의 면모를 보였다. 또한 '세계를 일곱 바퀴나 돈 사나이'라는 별명이 있을 만큼 매사에 열정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외교 면에 있어서는 상당히 비정한 정치가였다. 기독교도에게 맹목적인 증오를 드러냈고, 학살을 벌이다가도 필요하면 협정을 맺고 다시 통수를 치곤 했다. 용맹한 사자 같다가도 꾀많은 여우 같기도 한 바이바르스의 실리적인 면모는, 아직 낭만적인 영웅주의적 정치관에서 깨어나지 못한 유럽인들에게 매우 효과적으로 작용했다. 물론 본질적으로는 동로마 제국이 거의 무너졌고[14], 서유럽은 더 이상 관심이 없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지만.

하지만 부작용도 꽤 있어서 계속되는 적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과, 전투 전에 한 약속을 전혀 지키지 않는 잔인한 면으로 악명을 떨쳤다[15]. 대표적인 사례가 1268년의 안티오크 파괴로, 고대부터 유서 깊은 도시였던 안티오크는 바이바르스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고 수만 명 이상의 주민들이 학살당했다. 이는 빼도 박도 못하는 병크로, 투항한다면 주민들의 생명을 보존하겠다는 약속을 어긴 것이라 더욱 비난받고 있다.[16]

외교 면에서도 몽골군과의 협상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등 위태위태한 행보를 보이며 사방에 적을 만들었다. 훌라구가 대칸의 후계 문제로 주력군을 후방으로 빼고, 이후 일 칸국킵차크 칸국과 지속적으로 심각한 분쟁을[17] 겪지 않았다면 큰 낭패를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바이바르스는 맘루크 출신이면서도 맘루크 왕조 군대의 중추인 맘루크들을 양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는데, 당시 시대적으로 몽골의 억압을 피해 튀르크 인들이 시리아와 아나톨리아 방면으로 밀려드는 때여서 훈련도 필요하지 않은 숙련된 군인을 구하는게 상대적으로 쉬웠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기병인 맘루크들의 훈련에 있어 푸루시야 (군마 소유)를 중시 여겼던 바이바르스는 수도 카이로에 2개의 히드포룸 (알 마이단)을 지어 훈련을 용이하게 하였다. (각각 알 자히리, 알 카바크) 특히 1267년에 지어진 후자에선 술탄 직속 군대의 주 훈련장이었으며 바이바르스는 카이로에 머무는 한 매일 이 곳을 방문하여 직접 솔선수범해 병사들과 함께 저녁 예배를 알리는 아잔이 울려퍼질 때까지 훈련하였다고 한다. 심지어 시리아에서의 군사 원정 중에도 이런 훈련은 매일 지속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술탄이 모범을 보이자 휘하 아미르들도 활과 창을 쥐고 병사들과 굴렀으며, 이로써 맘루크 군대는 더욱더 강력해졌다. 다만 바이바르스가 사망한 후 이러한 지독한 훈련 풍토는 점차 쇠락했는데, 그나마 칼라운과 그 아들들인 칼릴 및 무함마드가 이를 유지시키려 노력하였다.

훈련과 함께 바이바르스는 군대 및 방어 태세에 대한 점검 역시 중요하게 생각했다. 시리아 같은 외지에는 아미르를 파견하기도 했지만 수도인 카이로에서만큼은 직접 병사들을 점검하였다. 일정을 미리 통보하고 병사들을 소집시켜 군사적으로 얼마나 준비되었는지 점검했는데 이에 불참했을 때는 최대 사형까지 집행할 만큼 매우 엄격하였다고 전한다. 이러한 엄격한 사열은 지방에서도 마찬가지라 1276년 홈스에서 점검에 불참한 5명의 할카[18] 군인들이 교수형에 처해지기도 하였다. 병사들은 이슬람권역의 국방부라고 할 수 있는 아르드의 감독 하에 관리되었다.

또한 바이바르스 본인은 몽골군을 상대로 여러 번 전투를 벌여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몽골군을 얕잡아 보지 않았다. 한 예로 1277년 4월 15일 룸의 셀주크 술탄국에서 벌어진 엘비스탄 전투에서 바이바르스가 지휘하는 맘루크 군대가 몽골군을 물리쳤음에도 불구하고 바이바르스는 축제 자리에서 이렇게 한탄했다고 한다.

"내가 어떻게 기뻐할 수 있나? 내 군대의 기병 1만 명이 몽골군 3만 명을 만나면 그들을 이길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나는 (고작) 7천 명의 몽골군을 만났다. 몽골군은 나의 모든 군대에 공포를 불러 일으켰고 내 군대는 낙심했다. 몽골군은 무슬림 군대의 좌측을 쳐부수었다.[19]

신의 은혜가 없었다면 그들은 우리를 이겼을 것이다.#"[20]


고양이를 유독 좋아한것으로도 유명하다. 카이로에 고양이 정원을 따로 마련했을 정도.


5. 창작물[편집]


여러 매체에 은근히 자주 나오는데, 아랍권에는 영웅담인 '바이바르스 이야기(Sirat Baybars)'가 존재하며, 코난 사가의 작가 로버트 E. 하워드도 바이바르스가 등장하는 단편을 쓴 적이 있고, 해롤드 램이라는 작가는 그의 소설에서 아라비안 나이트의 술탄은 사실 하룬 알 라시드가 아니라 바이바르스라고 설정하기까지 했다.

소설가 키드 마일스와 데이비스 버틀러의 2권짜리 소설인 <마르코 폴로>의 1권에서 바이바르스와 그가 이끄는 맘루크 군대가 몽골군을 쳐부수고 붙잡은 몽골군 포로들을 아주 잔혹하게 목을 잘라 대량 처형하는 장면이 언급되는데, 처음 읽는 독자라면 충격을 받을 만큼 굉장히 생생하게 묘사되었다.

"타브리즈까지 가봤지. 거기서 몽골군을 만났어. 어떤 녀석(바이바르스)한테 본때를 보여준다고 출정하더구먼."(중략) "오, 신이시여! 저들은 몽골군이 아닙니까?" 사슬에 묶여 끌려온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오만하고 콧대가 높던 정복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피로와 땀에 찌들고 지쳐 죽을 순간만 기다리는 불쌍한 포로들에 불과했다. 몽골군들은 끌려나오더니, 하나씩 목이 잘렸다. 그들의 잘린 목은 과일처럼 높게 쌓였고, 목을 자르던 사라센인은 징그럽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지옥과도 같았다...


다만 소설가 이재운의 <천년영웅 칭기즈칸>을 비롯하여 몽골 제국을 다룬 국내의 출판물들에서는 바이바르스나 맘루크 왕조 및 맘루크 군대가 몽골군을 쳐부순 아인잘루트 전투의 이름조차 아예 등장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매우 많다. 사실 이건 세계사에 대한 지식 부족에다가[21] 몽골 제국에 대한 국내의 인식이 "천하무적" 수준이다 보니 그런 인식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바이바르스와 맘루크 왕조에 대한 언급을 아예 안 하려는 것[22].

코에이칭기즈 칸 시리즈에도 등장한다. 첫 등장은 3편인 원조비사의 시나리오 3으로 다들 전체적으로 찌질한 능력치인데 혼자 전투력 A를 자랑한다. 그것도 모자라 징기스칸 4에선 시나리오 2의 최강군주. 시나리오 3에서는 재야로 등장한다. 전투력은 시나리오중 최강이며, 내정이나 전투나 어느 것 하나 밀리는 게 없다.특히 연사, 화전을 가지고 있다. 일러스트도 지나치게 멋진 감이 있다. 이 남자 때문에 시나리오 2의 맘루크는 최강진영. 고증이 잘못된 점이 하나가 있는데 생년이 1223년이 아닌 1233년으로 설정되어 있다.

미디블2: 토탈 워 - 킹덤즈에서는 크루세이더 캠페인에서 맘루크 봉기 이벤트시 맘루크 풀군단 1개를 이끌고 나타난다. 플레이어가 이집트라면 쾌재를 부르며 십자군 국가들을 쓸어버리게 하는 원동력.

트리니티 블러드바이바르스라는 등장인물이 나온다.

동로마의 황제로 회귀하다에서도 등장. 1부에서는 몽골과의 싸움을 진행하는 모습으로 나왔으며 신무기인 화약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잠입해있던 동로마의 첩자들을 적발하지만 이를 제국과 우호를 쌓을 기회로 보고 이들을 처벌하긴 커녕 직접 화약을 퍼서 주는 대범함을 보인다. 그러나 주인공인 요안니스 4세가 킵차크 칸국-맘루크의 남북 동맹이 아닌 교황령-십자군-일 칸국의 동서 동맹을 선택하면서 적으로 돌아서고 2부에 들어서 최종보스로 등장한다. 원역사에서 십자군 전쟁을 사실상 종결지은 군주답게 엄청난 포스를 보이며 십자군 국가들을 압박하지만 주인공인 로마 제국에게 이길 순 없었고 결국 8차 십자군 전쟁에서 패배한 데다 내부 반란까지 일어나며 파멸을 맞이한다.
[1] 중세 이집트에서는 그의 무용담을 찬양한 서사시인《시라트 바이바르스》까지 나올 만큼, 민중들의 사랑을 받은 영웅이었다.[2] 백내장이었다고 한다. 다만 금발벽안이라고 해서 그가 유럽계 백인은 아니었다. 크림 반도에 살았던 슬라브인과 대거 혼혈된 킵차크계 튀르크인으로 러시아 공국들을 털어먹거나 중앙아시아에서 용병으로 일하면서 살아가던 민족이었다.[3] 당시 몽골군을 피해 달아나는 유목민들을 잡아 파는 노예시장이 성행했기 때문에 그 지역 노예는 공급 과다 상태였다.[4] 금•은세공사에게 팔렸다.[5] 원래 그가 속했던 쿠만족은 몽골군이 당도하기 전부터 다뉴브 강에서부터 아랄 해 북부에 이르는 드넓은 스텝 지대를 지배했던 유목민들이었다. 그러나 1236년부터 시작된 몽골 제국의 서방 원정 당시 러시아 제공국들과 함께 무참히 갈려나갔고, 이들 중 일부는 몽골의 침입을 피해 헝가리로 피난을 가기도 했다. 당연히 쿠만족은 자신들의 터전을 짓밟은 몽골군에 대해 복수심이 강할 수밖에 없었던 셈.[6] '분두크다리'는 '궁병'이라는 뜻이다. 아마 술탄의 사병을 구하러 다니는 부하였을 것이다.[7] 당시 이집트를 제외한 시리아의 알레포, 다마스쿠스, 하마, 홈스 등은 아직 아이유브 왕조 술탄들의 지배하에 있었다. 얼마 후 몽골에 쓸리지만...[8] 그외에도 크락 데 슈발리에, 바니아스의 님로드 / 수베이바 성채, 롯의 다리 등에 남아있다[9] 크라크 데 슈발리에 인근 지역과 요새가 모두 함락당해 더 버텨본다고 한들 그저 죽을 날이 하루 뒤로 늦추어지는 꼴 밖에 안되었다.[10] 말젖술(馬乳酎)였다고 한다.[11] 단 3차 이후 십자군 원정은 크게 약화되었다. 군사적인 부분은 물론 보급문제까지.[12] 하지만 일 칸국은 이슬람으로 개종한 이후에도 계속 맘루크 왕조와 치고 받았고, 한때는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를 함락시키고 분견대가 가지 지구까지 쳐들어갈 만큼 맘루크 왕조를 위협하다가# 끝내 1303년 4월 20일 마르즈 알 사파르 전투에서 맘루크 군대에게 패배함으로써 더 이상 맘루크 왕조에 대한 공략을 포기하였다.#[13] 국경 도시인 알 비라와 알 라흐바의 합성어라고도 함[14] 4차 십자군의 약탈이 있었던 1204년부터 니케아 제국이 수도를 회복한 1261년까지 동로마는 사실상 붕괴된 상태였다.[15] 이 부분은 몽골군도 비슷했다. 사실 맘루크 군대나 몽골군이나 모두 유목민 기마병을 주축으로 하여 거의 비슷했다.[16] 1차 십자군 때의 유럽인들이 저지른 학살 행위에 가려진 감이 있지만, 바이바르스의 안티오크 파괴는 십자군 전쟁을 통틀어 가장 큰 단일 학살 행위로 평가받는다.[17] 일 칸국과 킵차크 칸국의 대립은 상속 제도로 인한 분쟁으로 시작되었으나 네스토리우스교와 이슬람이라는 종교적인 차이까지 겹쳐 아예 맘루크와 킵차크 칸국이 동맹을 맺을 만큼 심각하게 돌아갔다.[18] 맘루크 아랫 단계의 군사 집단으로 주로 튀르크계로 이루어져있다.[19] 이후 맘루크 군대와 싸울 때에도 몽골군들은 집요하게 맘루크 군대의 좌측을 공격하여 맘루크군을 위기로 몰아넣었다.[20] 혹은 "어떻게 내가 행복할 수 있는가. 이전에 나와 내 하인들이 몽골인들을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내 군대의 왼쪽 측면이 그들에게 무너졌다. 오직 신만이 우리를 도왔다."라고도 한다.[21] 단적인 예로 1990년대 후반까지 한국에서 출판된 세계사 관련 서적들은 거의 대부분 일본 서적들을 중역하거나 혹은 불법 번역한 것들이었고, 그나마 그 자료의 정확성이나 양도 매우 부족한 수준이었다.[22] 링크를 건 인터넷 게시물에서도 아인잘루트 전투를 다루면서 많은 오류를 보이는데, 몽골군 지휘관 키트부카가 전사했다고 썼으나 사실 키트부카는 전사하지 않고 사로잡혔다가 처형당했으며,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거의 전멸에 가까울 정도로 대패를 했던 몽골군을 두고 성공적으로 퇴각을 했다고 버젓이 거짓말을 했으며, 심지어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활약한 바이바르스는 아예 언급조차 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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