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규훈(독립운동가)

덤프버전 : r20210301



성명
박규훈(朴圭壎)
생몰
1900년 7월 23일 ~ 1975년 8월 20일
출생지
전라남도 제주목 이도동
사망지
서울특별시
추서
대통령표창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박규훈은 1900년 7월 23일 부친 박이민(朴离旼)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경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일 때 3.1 운동이 발발하자 탑동공원에서 시위대와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거리로 나아가 헌병대와 경찰의 무차별 총격에도 굴하지 않고 시위를 벌이다 체포되었다. 이후 재판 과정에서 경성고등보통학교 동창생이자 제주 출신 홍형표(洪亨杓)에게 “2천만의 대표자가 되어 대항하기 위한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략) 이 글을 보거든 찢어버려라”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것이 들통났다. 또한 3월 7일 종형에게 보내려고 쓴 편지에서는 “나는 조선의 자유를 얻기 위해 연일 시위 운동을 하고 학교는 동맹 휴교에 들어갔다”고 했는데, 이 역시 들통났다.

이 일로 재판에 회부된 그는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1921년 여름 방학을 이용해 한상호(韓相鎬)·송택훈(宋澤薰)·황청하(黃淸河) 등과 함께 귀향하여 강연회 개최 등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고베에 있는 염료회사(染料會社)에서 여러 해 근무하다가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경기도에 있는 송고주식회사에서 근무하였고, 1946년 조선대화방직주식회사에서 근무했다. 1975년 8월 20일 서울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박규훈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