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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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대통령 임기 중 여론
3. 상세
3.2. 인간성 및 자질 문제
3.3. 개인처신 문제
3.4. 역사의식 편향
3.5. 사이비 종교 유착 관계
3.6. 민주주의 후퇴
3.7. 박근혜와 최태민
4.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여지?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박근혜에 대한 비판을 설명한 문서.

2. 대통령 임기 중 여론[편집]



2.1. 지지율[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박근혜/지지율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박근혜는 지난 4년 간의 임기 동안 30~50%대의 지지율을 유지하였으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여파로 2016년 11월 3일, 임기가 1년 넘게 남았었는데도 지지율이 5%까지 떨어졌다. 이는 1997년 외환 위기 당시의 김영삼, 2008년 미국산 쇠고기 파동 당시의 이명박보다 낮은 역대 최저의 지지율이다. 이승만전두환은 비록 폭정을 일삼다가 쫓겨났지만, 이렇게 처참하지는 않았다. 더욱 끔찍한 것은 임기 말 김영삼이 최저 지지율 6%, 부정 평가 78%이었지만, 박근혜는 최저 지지율 4%, 부정 평가 93%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호남에서는 지지율이 아예 0%이었다. 사실 호남이 대대로 反 보수 정당, 親 민주당 계열 지지가 높은 지역임을 감안하더라도 지지율 0%까지 곤두박질친 보수 계열 정치인은 박근혜 이전까지는 없었다. 게다가 오차범위 내에서의 0%대가 아니다. 한국갤럽의 조사에서도 호남 지지율만이 유일하게 공란인데, 여론조사에 응한 호남 사람들 중 지지를 표한 사람이 정말로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리얼미터의 통계를 인용해서 "2016년 11월 4일, 대국민 담화 (혹은 제2차 대국민 사과) 이후로 지지율 하락 추세가 멈칫하더니 소폭 반등하여 10% 이상으로 미약하게 회복되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는 다른 여론 조사 기관의 지지율을 그대로 대입해서 생긴 착시다. 박근혜/지지율 문서에도 나와 있듯이 한국갤럽과 리얼미터는 서로 다른 기관이고, 조사 방법도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숫자가 나올 수밖에 없다. 리얼미터 통계로도 게이트가 터진 10월 이후 한 번도 지지율 상승 없이 계속 하강 중이었다. 그나마 리얼미터 통계에서도 계속 10% 선을 유지하고 있다가 11월 3주차에서 10%가 무너졌다. 어느 기관에서 조사를 하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이후 11월 17일까지 계속 하강만 하고 상승은 없었다.

2016년 11월 11일, 한국갤럽 조사에서 긍정 평가가 5%로 지난주와 같았지만, 부정 평가는 90%까지 치솟았다. 주목할 점은, 20대 이하에서는 0% 지지율을 보이고 있는데, 이건 한국에서 정치 관련 통계가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조사하는 측에서도 경악할 정도로 나쁜 결과라는 것이다. TK 지역에서 새누리당 탈당이 이어지면서 더더욱 악화의 길로 접어들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2주 뒤인 2016년 11월 25일, 한국갤럽 기준으로 마침내는 대한민국 대통령 지지율 역대 최저치인 4%를 기록하기에 이르렀다.[1]


2.2. 20대 총선 결과[편집]


파일:/image/001/2016/04/14/GYH2016041400090004400_P2_99_20160414081807.jpg

"당선된 후에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는 결국 패권주의와 줄 세우기 정치를 양산하는 것으로 반드시 선거에서 국민들께서 심판해 주셔야 할 것입니다."

- 박근혜, 2015년 6월 25일 국무회의 모두발언 중. 원문. 이 발언의 의도는 자신에게 비협조적인 야당 및 비박계 정치인들을 심판하라는 것이었지만, 결국은 박근혜 본인과 친박계 정치인들이 자초해 국민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2016년 4월 13일에 열린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16년 만의 여소야대 현상이 나타나면서 박근혜 정부는 크나큰 위기에 봉착했다. 당시 집권 여당인 새누리당이 122석을 얻으면서 원내 제1당을 더불어민주당에 내주었고, 중도 이념을 표방한 국민의당이 38석이나 얻으며 선전했다. 그 밖에 새누리당의 주요 표밭이었던 대구와 강남을 잃고, 민주당은 오랜 지지 기반인 호남을 잃는 등 지역주의에 균열이 일어났다. 새누리당의 지도부는 총선 실패의 책임을 지고 사퇴하였다. 이것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 때보다 상황이 안 좋았다.

집권당이 참패한 원인으로 전문가들은 민심이 정권 심판론을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후술된 박근혜 정부의 부정적 평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박근혜 정부는 집권 기간에 담뱃값 인상, 단통법, 도서정가제, 맥통법, 노동 개혁을 비롯한 실책을 밀어붙였다. 초이노믹스라는 거창한 정책을 빌려 집값을 가계 부채로 유지하는 방안을 국민들에게 강요하고, 대놓고 친재벌 및 규제 혁파, 정규직 및 노조 탄압 등을 선전했다. 가계 부채와 청년 실업률이 역대 최고치를 기록할 만큼 경제도 엄청 나빠졌다. 더구나 위안부 문제를 당사자 몰래 처리하고, 세월호와 전염병 메르스 유행 등 국민 안전의 위기에서도 정부의 안위만 걱정하는 형태의 정책만 내고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될 수준의 언행만 일삼았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도 오로지 일 안 하는 국회와 발목 잡는 민주당만을 탓하며 국민들에게 심판해주기를 요구했다.[2] 새정치민주연합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으로 분열되고, 야권 분열이라는 호재 및 신뢰도가 높기 힘든 지역 위주의 여론조사에서의 우위를 과신한 박근혜 정부와 친박은 공천관리위원장 등의 요직을 이용해 노골적으로 공천에 개입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맘에 들어하지 않는 사람들을 모조리 쳐내고 당선되기 쉬운 곳에 함량 미달의 친박 인사들을 마구 공천하는 행태가 선거 내내 반복되었고, 이것 때문에 새누리당에서는 온갖 내분이 일어났다. 당시 당 대표옥새런으로 대표되는 유승민, 주호영, 장제원, 강길부 등 비박계의 불복, 진박 마케팅, 막말 파동 등 여당 지지자들은 물론이고 일반인들마저 눈꼴 사납게 만드는 추태가 선거 기간 내내 반복되었고, 민심 이반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자 새누리당이 선택한 타개책은 국민들에게 한 번만 뽑아 달라고 반다송을 부르는 구걸 전략이었다.

똑같이 공천파동이나 논란거리 등이 있었던 더불어민주당은 사태가 심각해지기 전에 문재인의 개입 및 비대위 사퇴 후 재조직, 유세단 등의 활동으로 그 상처를 모조리 봉합해가며, 총선 승리를 위해 모든 것을 거는 절박함을 보여줬고, 국민의당은 안철수의 이미지 덕에 호남에서 있었던 함량 미달의 공천 파동이 거의 보도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1번과 2번에겐 기회가 많았다."는 전략이 제대로 먹혀 들어갔다. 결국 공천 논란과 구태 정치의 논란 이미지는 모조리 새누리당에게로 몰려간 것이다. 그 결과 수도권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압승했으며, PK 지역에서도 더불어민주당의 의석과 지지율이 상당히 상승했다. 심지어는 보수의 성역인 TK에서도 더불어민주당 및 민주당 계열[3]에게 2석을 허용했다. 그 덕에 더불어민주당은 텃밭이었던 호남권에 걸린 의석을 국민의당에 상당수 내주고도 1석 차이로 새누리당을 제쳤다. 중위 투표자 이론에 따라 중도층, 중도 보수층을 빼앗은 야당이 승리했으며, 박근혜 정부가 밀어붙이던 모든 정책에 제동이 걸릴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결과적으로 제동이 걸린 것은 정책이 아니라 박근혜 정부 그 자체가 되었다.


3. 상세[편집]



추락한 대통령 : 67%서 4%로(채널A 제작)

박근혜 터널 : 2013-2016(뉴스타파 제작)


"제가 대통령이었으면 진작 했어요. 그러니까 제가 이번에 대통령으로 되면 할 겁니다."

2012년 대선 토론회에서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로 괴롭기만 합니다."

2016년 제2차 대국민 담화에서


"피청구인헌법과 법률 위배행위는 재임 기간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피청구인의 위헌·위법 행위는 대의민주제 원리와 법치주의 정신을 훼손하였다."

"법 위배행위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여야 할 헌법 수호 의지가 드러나지 않는다."

"피청구인파면함으로써 얻는 헌법 수호의 이익이 압도적으로 크다."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 중에서

박근혜대한민국 대통령 집권기의 대한민국에서는 헬조선이라는 신조어가 유행했고 청년 실업률도 역대 최악이었다. 2015년 대한민국 교수들의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로는 혼용무도(昏庸無道)[4], 사시이비(似是而非), 갈택이어(竭澤而漁)[5], 위여누란(危如累卵)[6], 각주구검(刻舟求劍)이 나왔다.[7]

행정 실무 능력이 없다시피 하다는 평가가 압도적이다. 과거 2012년 대선 토론회에서 박근혜 당시 대선 후보는 국정현안에 대한 문재인 후보의 질문에 "그래서 대통령 되려고 하는 거 아니에요?", "제가 대통령 되면 다 할 겁니다.", "그래서 제가 대통령이었으면 진작 했어요." 라고 대답하였는데, 이 말은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 현안을 아예 모른다고 시인한 꼴이었다. 정치인 박근혜가 수십 년간 보여준 말들은 '자신이 정권을 잡으면 경제를 살리겠다', '일자리를 늘리겠다' 는 식의 두루뭉술한 주장만 있을 뿐 구체적으로 그것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 대책과 근거가 전무했다.[* 2004년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손석희와 박근혜가 했던 인터뷰를 이에 대한 예시로 들 수 있다. 당시 방송에서 손석희는 박근혜에게 한나라당이 경제를 잘 이끌 수 있음을 입증하는 구체적 근거와 IMF 시절 집권 당으로서 경제 위기를 일으킨 신한국당에 비해 어떻게 달라진 모습을 보일 것인지 질문했다. 그러자 박근혜는 제대로 된 답변은 전혀 하지 않고 횡설수설하다가 끝내는 ''저하고 싸움하자는 거예요?" 라는 태도로 받아친 적이 있다. 이 인터뷰에서 박근혜가 "경제 살리기에 앞장서고 일자리를 늘리자" 식의 누구나 할 수 있는 소리를 하는 것 외엔 구체적인 국정 지식이나 실무에 대해선 완전히 무지하며 제대로 설명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싸움 운운하는 소리는 농담으로 한 얘기라고 하지만, 결국 자기 주장에 대한 근거를 하나도 대지 않았다는 사실은 마찬가지이다.

결과적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박근혜의 현실성과 합리성이 결여되어 성과라고 보이지 않는 국정 운영에 지지자들도 하나둘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그럼에도 40%에 육박하는 콘크리트 지지층[8]만 믿고 진박을 운운하며 박근혜 바라기 마케팅에만 열을 올리던 새누리당은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참패를 당했다.

이토록 숨은 실태가 명백히 드러나 지지하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등을 돌리고, 연일 하야 요구가 빗발치는 와중에도 박근혜는 대통령으로서의 진심 어린 사죄는커녕 자리를 지키려고 발버둥치는 추태만 보여주었다. 폭정으로 저항을 받았던 이승만전두환도 정권이 기반을 잃으면서 자리를 끝내 포기하였으나, 박근혜이승만전두환보다도 권력 욕심을 놓지 않았다. 심지어 박근혜의 국정 운영이 국가 발전이 아닌 최순실 일가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을 돕기 위한 수단에 가까웠음을 감안하면, 자신이 옳다는 신념도 아닌 부정부패를 끝까지 저지르겠다는 의도에서 나오는 권력 욕심이라는 점에서 더욱 질 나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동안의 국정 농단과 비선 실세의 존재, 그리고 그동안의 실책의 근본 원인이 모두 드러난 상황에서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권력을 유지할 방안 찾기에만 급급한 모습을 보인 바 있으며, 2016년 12월 탄핵안이 가결된 이후로는 아예 노골적으로 국민들을 분열 시키고 여론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지속적으로 물밑 공작을 시도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전통 지지 세력이었던 박사모, 어버이연합, 엄마부대 등의 어용 단체와 극우 인사들은 물론, 새롭게 떠오른 남녀 갈등마저 워마드 등을 통해 국민 분열과 여론 선동의 소재로 삼으려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스스로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마저 전부 갉아먹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고의로 국민 간 분열을 획책하는 모습은 박근혜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었던 현상은 아니지만, 박근혜는 엄연히 민주주의라는 틀이 갖춰져서 이러한 시도가 금기시될 국가에서 대놓고 이런 행위를 저지른 것이며, 그 목적조차도 국가 발전이 아닌 자기 영달과 측근들의 비리를 은폐하기 위한 것이라는 데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결국 정치적 스펙트럼을 떠나 어떻게 이런 지도자로서 최악의 인간상인 존재가 당 대표를 거쳐 대통령까지 되었는지 심각하게 고민할 때이며, 동시에 한국 정치사의 반면교사로 삼을 일이다. 대통령은커녕 기본적인 사회인의 자질조차 의심되는 존재가 국가 원수가 된 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고질적 병폐인 세대 투표, 지역 투표, 해결되지 못한 산업화의 독재 평가 담론 등이 뭉쳐 발생한 일종의 사회병리적 현상으로 보자는 의견까지 있다. 앞서 언급된 것처럼, 이미 박근혜의 무능함은 선거 전부터 충분히 드러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보수층은 그저 박정희 신화를 계승한 핏줄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런 능력도 없는 박근혜에게 무분별하게 동정했고, 그렇지 않은 이들조차 진보층에 대한 적대감에 애써 사실을 외면하며 박근혜에게 지지를 보냈다. 즉, 선거 시 후보자의 자질을 제대로 살피지 않고 세대, 지역, 심지어는 그놈이 그놈이라는 논리까지 앞세우며 투표에 임하는 유권자들이 그 대가를 뼈저리게 치른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냉소적인 비판으로, 박근혜의 진정한 공로는 '박정희 신화'를 시원하게 갈아버린 것이라는 평가까지 있다. 박근혜가 정계에서 성공하고 결국 대통령이란 자리까지 오르게 된 것은 다른 것도 아닌 아버지 박정희에 대한 국민들의 긍정적인 평가와 그로 인한 '후광' 때문이었다. 결국 그 이후 박근혜의 어마어마한 실정은 곧 새마을운동,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경부고속도로 등이 대변하는 박정희 신화까지 깔끔하게 훼손됐다.

그러나 믿기 힘든 일은 경제 정책 표류, 외교 고립, 세월호 사건 당시 7시간 30분 동안 대통령이 실종되는 초유의 사건을 겪고도 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임기 내내 꾸준히 50%대를 넘기고 있었으며, 최저치도 40%대였다는 사실이다.[9] 매스컴에 극우 성향의 칼럼을 써온 것 외에 이렇다 할 이력이 없는 윤창중[10]을 청와대 대변인으로 등용하는가 하면, 최순실의 딸 정유라를 두둔한 김희정이 그 공로로 여성가족부 장관에 오르는 등[11], 박근혜 정부는 임기 초부터 황당할 정도의 인사 참사를 되풀이했지만, 국민들의 국정 수행 지지도는 한 번도 떨어지지 않았다.[* 언론에 의해 최순실 게이트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한 2016년 말 경이 되어서 박근혜의 지지도는 30% 가량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만큼 박근혜에 대한 국민들, 특히 보수층의 지지는 대단했다. 박근혜 측에서는 국민들의 맹목적인 지지를 발판으로 삼아 최순실의 사익 추구와 국정농단을 철저히 숨겨올 수 있었던 셈이다. 박근혜가 몰락하기 시작한 것은 2016년 말 최순실의 사익을 위해 설립된 미르재단과 K스포츠의 실체가 드러나고[12], 고영태 등 관련자들의 내부 고발이 터져 나오면서 시작되었다. 결국 임기 내내 콘크리트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었던 박근혜도 언론의 공세와 명백한 물증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고, 이는 결국 탄핵으로 이어지게 되었다.[13]


3.1. 박근혜-최순실 게이트[편집]


파일:/image/079/2016/10/25/20161025191120736733_99_20161025191304.jpg

파일:external/www.hyundaenews.com/2016092214452757.jpg

"엄청난 검증의 쓰나미가 몰아닥칠 것입니다. 쓰나미가 몰아치면 아무리 깊이 감춰둔 것도 다 드러납니다. 그때 가서 또 땅을 치고 후회해야 하겠습니까?"

- 2007년 8월 6일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중 유세 발언. 이 발언은 당시 라이벌이었던 이명박 후보를 공격하기 위해 썼던 표현이지만, 결국 본인과 나중에 이명박에게 그대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리고 이때 서로를 공격했던 네거티브 발언들은 당연하지만 전부 사실이었다.


"이러한 피청구인의 위헌·위법 행위는 대의민주제 원리와 법치주의 정신을 훼손한 것입니다."

- 최순실의 국정개입 허용과 권한남용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평가.

2016년 10월경에는 40년 절친이자 사이비 종교 교주 최태민의 친딸인 최순실이 대통령 본인 대신 국정운영 전반을 도맡아 한 비선실세[14]란 사실이 폭로되면서 대국민 사과를 하는 등 사면초가의 상황에 빠졌다. 최순실은 국정 운영 전반을 마음대로 움직인 것도 모자라서, 국정 운영에서 얻어낸 기밀 정보들을 이용해 자신과 그 일족의 이익을 창출하고, 대통령의 권력을 이용해 수백 억의 돈을 수수하기까지 했다. 최태민 일가의 전횡은 조응천, 박관천, 이명박 전 대통령, 이제는 동생들(박지만박근령)도 걸고 넘어졌고, 이로써 무당 하나에 나라가 좌지우지됐다면서 여야와 시민사회 등을 막론한 탄핵론이 등장하게 되었다.

특히 대통령의 사과와 JTBC에서 관련 보도가 있었던 2016년 10월 25일에는 순식간에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1위부터 10위가 박근혜 탄핵, 하야 등으로 채워졌으며, 트위터에서도 마찬가지로 실시간 트렌드에 관련 해시태그가 최상단에 올랐다.[15] 그 스캔들에 관한 내용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참고.

11월 21일 민병두 의원에 의해 밝혀진 바로는 그녀는 이 사건에 대해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모른다.'는 반응을 보여서 주위 및 국민들을 어이없게 만들었다. 즉 그녀의 대국민사과 등 입장 발표들은 정치적인 쇼이자 거짓말이었다.

또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후에도 최순실은 시녀 같았던 사람이라며 그런 사람 때문에 나라가 이렇게 됐다며 여전히 상황 파악이 안 되는 자기중심적인 모습을 보였다.

임기 내내 최순실의 확인 없이는 국정을 운영하지 못했다고 한다.[16] 탄핵 사유 중에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집무실에서 매일 업무를 처리했던 전직 대통령들과 달리 거의 모든 때를 관저에서 보냈으며, 청와대 본관 집무실로 출근한 날이 절반도 안 된다고 한다. 사실상 대통령직에 있으면서 출근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얘기다.[17] 그 때문인지 아무리 긴급한 사항도 대면 보고보다 서면 보고를 선호했다고 하며, 이는 세월호 사건이 터진 7시간 동안 대통령에 연락이 닿지 않는 초유의 사태를 빚게 되었다. 이는 국회가 제출한 탄핵 사유 중 하나였지만 실제 법정에서 탄핵 사유로 인정되지는 않았다.

임기 내내 국정운영이 대단히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성향을 띤 것은 최순실의 영향으로 보인다. 당시 북한 핵 개발로 인해 대북 제재의 필요성이야 논란의 여지가 없지만, 국내 기업들의 피해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하루아침에 개성공단을 폐쇄했고[18], 특별한 이유도 밝히지 않은 채 하루아침에 고위 공무원들을 대거 좌천시켰고,[19][20] 다분히 주관적인 기준에 의해 문화계 인사들에 대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불이익을 주는 등의 행태가 그런 것이다. 박근혜의 오른팔인 전 여성가족부,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조윤선은 박근혜 정부에 비판적인 성향을 지닌 인사들에 대한 블랙리스트를 만드는 데 직접 개입한 것이 밝혀져 구속 수감된 상태다.[21]


3.2. 인간성 및 자질 문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박근혜/비판/자질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3. 개인처신 문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박근혜/개인처신 문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4. 역사의식 편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박근혜/역사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5. 사이비 종교 유착 관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박근혜/비판/사이비 종교 논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6. 민주주의 후퇴[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박근혜 정부/평가/민주주의 후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7. 박근혜와 최태민[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박근혜와 최태민의 부적절한 관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여지?[편집]


"미숙한 권력이 오만하기까지 했습니다."[22]

- 전원책

박근혜의 임기 중 성과들은 전부 전임 대통령들(노무현, 이명박)이나 국회의원들에게 공이 있으며, 박근혜 본인이 대통령 임기 동안 세운 업적은 단 하나도 없었다. 박근혜는 업적이 전무한 것은 물론 임기 내내 물의만 일으킨 것도 모자라 최소한의 염치(廉恥)[23]조차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나마 이념과 사상에 따라 평가가 갈릴 항목이 몇 개 있을 뿐이지만, 그것들마저도 전임 대통령 이명박이 차린 밥상박근혜는 숟가락만 얹었을 뿐이었다. 박근혜의 정책 대부분은 "박근혜가 아닌 비선실세 최순실이 본인의 사익 추구를 위해서, 혹은 즉흥적으로 생각해낸 뒤 주도한 정책이었으며, 대부분이 권력을 위해 보수층을 모으려는 포퓰리즘에 기반한 것이었거나 국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은 정책들이다"라는 의견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이후 제정된 긍정적인 내용의 법률들도 박근혜가 직접 주도한 것이 아니라 의회가 직접 시민들의 여론을 수렴하여 발의하고 제정한 유형이 절대다수를 차지했다.


그러나 2016년 10월, 초대형 정치 스캔들이자 권력 비리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고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동년 12월 9일에 가결되었다. 그리고 2017년 3월 10일 11시 21분경에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헌법재판소가 공식적으로 만장일치로 인용하면서 박근혜는 그렇게 권좌에서 쫓겨났다. 게다가 2017년 3월 31일에는 전직 대통령으로는 세 번째로 구속 수감까지 당했다.

당장 전임 대통령 이명박과 비교해 보아도 박근혜는 DNA부터 금수저[24][25]에, 조직의 맨 아래에서 일해보는 등 제대로 된 사회적 경험[26][27]을 하지도 않고, 목숨을 담보로 자신의 역량을 증명한 이력[28]도 없다. 그야말로 평생 동안 검증된 능력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한 마디로 스스로 바닥에서 올라온 적이 없다. 실제로 대통령직에 있을 때도 전세계 민주 국가들이 지닌 President가 아닌, 제왕적인 느낌의 대통령에 가까웠다.[29][30] 최소한 이명박의 경우에는 공도 있고 과도 있어 호불호가 갈리는 대통령 시절과는 별개로 서울특별시장 한정으론 역대 모든 시장을 통틀어 매우 능력이 뛰어난 인물로 1~2위권에 올려도 될 정도로 검증된 인물이다.

오죽하면 혹자는 박근혜의 등장과 몰락으로 전임 대통령의 업적이 재평가받고 전임 대통령들[31]의 지지자를 더욱 늘린 것이 유일한 업적이라고 비꼬기도 한다.

사실 청와대에서는 2016년 12월, 박근혜정부 3년동안 성과(삭제됨)라는 제목으로 경제 부흥, 창조 경제 육성 등을 중심으로 긍정적인 일면을 홍보하고 있으며, 249페이지 분량의 관련 문서(삭제됨)를 홈페이지에 공개하기도 했다. 이 보고서에서 소개하는 주요 업적들은 다음과 같다.

  • 4대 개혁 추진으로 경제 재도약 기반 구축, 꾸준한 경제 민주화
  • 창조경제의 성과 가시화 및 청년 일자리 창출 토대 마련
  • '생애주기별 맞춤형 복지' 완성으로 평생 사회 안전망 기틀 마련
  • 튼튼한 안보와 원칙에 입각한 남북관계 재정립, 국익 우선 신뢰 외교로 국제적 위상 강화[32]
  • 부정부패와 비리 척결, 자유민주주의와 헌법 가치 수호[33]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과장되거나 '숟가락이나 얹었다'는 게 일반적인 의견이다. 그리고 전두환 전 대통령 추징금 환수, 담뱃값 인상, THAAD 국내 도입, 전시작전권 연기 등을 업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으나 이에 대한 논란도 많이 있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단 참고.

그리고 경제 민주화는 아예 폐기라도 해도 무방하다. 박근혜의 공약이었던 경제 민주화를 설계한 이는 김종인이었다. 하지만 경제 민주화 공약을 사실상 파기 시켜버리자, 실망한 나머지 김종인은 이후 탈당했다. 이걸 수혈하겠다고 경제학자 출신의 최경환이 주도하는 경제 정책이었던 초이노믹스는 원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통해, 근혜노믹스 또는 창조노믹스라는 이름을 밀었다고 한 것이 공개되었다.

또한 일자리 창출은 역대 최악의 청년 실업 시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무색해진 의미다. 그리고 일자리 창출을 위함이랍시고 추진했던 4대 개혁 중 하나가 바로 '노동계 버전 유신 헌법'이라 불렸던 노동개혁이다. 얼마나 악질적으로 불렸으면 별명이 '노동개'악(惡)'이다.[34] 비정규직 사용 기간이 2년에서 4년으로 무려 두 배로 늘어난 것과 근로 시간이 줄어들지 않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노동개혁 반대 서명을 시민 단체에서 자비 투표소를 구입해 투표한 결과, 96%가 반대했을 정도였는데,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맞불로 노동개혁 찬성 서명을 하기 시작했는데, 첫 서명자가 박근혜였다. 결국 이 노동개혁 법안은 2016년 5월 19일에 모두 폐기되었다. 청와대에서는 진영 논리에 갇혀 법안 통과가 지지부진해졌다고 평했다.

그나마 문화가 있는 날 정도가 박근혜가 시행한 정책 중 매우 드물게 호평을 받았지만, 이마저도 박근혜가 제멋대로 휴일로 정한 수요일을 문화가 있는 날로 정했다는 비판이 있다.

또한 일부에서는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35]이라는 점을 내세우기도 하나,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라는 후광 때문에 대통령이 되었다는 의견이 강세다. 원래부터 낙하산 인사일 뿐이었고, 그 정의(무능력 + 인맥빨 + 낮은 인격 수준 + 돈빨)를 모두 만족한다. 낙하산 인사는 무능력과 인맥, 돈 문제 때문에 쓴소리를 듣는 평가를 피할 수 없다. 따라서 박근혜 대통령은 저 4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으므로, 정계 입문 시절부터 낙하산이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박근혜 정부 초기에는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라는 점은 분명히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이는 박근혜가 아니라 다른 어떤 여성 정치인이었어도 마찬가지다. 박근혜 본인의 공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박근혜 정부의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여권이 기존보다 더 퇴보되는 악영향만 낳았고, 앞으로 또다른 여성 대통령이 나올 여지를 가로막게 되었다.
하지만 박근혜는 앞서 말한 것처럼 긍정적으로 볼 만한 부분이 전무함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옹호를 받아왔는데, 이런 꾸준했던 옹호의 이유는 보통 60대 이상 극보수층에게 많이 적용된다는 '박정희의 후광 효과 + 진보파에 대한 부정적 인식 + 감성적 지지 + 박근혜 정부의 무능과 잘못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인지부조화 + 콘크리트 지지층 + 헌정 최초의 여성 대통령' 이라는 의미 등이 그 근거라고 지목되고 있다. 당연하게 이런 뚜렷한 근거도 없고 맹목적이기만 했던 옹호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같은 박근혜 정부가렴주구식 국정 운영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당장 새누리당의 친박 계열이 박근혜에게 이유 없는 무조건적인 지지와 선거 마케팅으로 삼는 황당한 짓까지 하는데도 견제가 먹히지 않았던 이유는 결국 30%에 달하는 콘크리트 지지층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으니까 말이다. 후술되듯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로는 이런 꾸준한 옹호조차도 급속도로 사라져가는 추세이지만, 눈으로 뚜렷이 드러나는 각종 실책과 사회 문제들을 목격하면서도 눈과 귀를 막고 진영논리에만 열을 올리던 행태가 어디에서 나왔는지는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정국이 거의 마비되는 대사단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사건 때문에 지지율이 4% 아래로 내려가 바닥을 쳤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박근혜를 지지한다고 공개된 옹호자들과 여론 통계에 잡히지 않았을 뿐이지, 소수나마 존재한다고 추측되는 숨은 옹호자들, 즉 샤이 박근혜가 있다고 추정되는 상황이지만[36] 현재 이런 옹호 여론은 의미가 없어진 상태다. 그리고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예상보다 큰 표 차이로 가결되며, 오히려 새누리당 내 샤이 탄핵파, 샤이 반 박근혜 세력이 더 많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래서 농담 삼아 박근혜가 온 국민을 대통합시킨 업적이 있다고 네티즌들이 언급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문제로 인해 온 국민이 박근혜에게 하야하라고 대동단결한 상황을 비꼬아 말한 것이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 본인조차도 그게 진짜로 박근혜의 실정 때문이지, 업적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끊임없는 실정으로 인해 2016년 12월 9일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대한민국 국회에서 가결되었다. 이로써 당일 오후 7시 3분을 기해 공식적으로 박근혜의 모든 권한 정지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2017년 3월 10일 오전 11시 21분 27초,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에서 만장일치로 탄핵이 인용되었다.

사실 이런 식의 균형을 맞추려는 시도 자체가 의미가 없게 된 것이, 박근혜는 같은 당의 상당수 의원들은 물론이고 한때 지지자였던 前 친박들도 일부 돌아선[37] 정말 답 없는 인물이었다.

물론 영화, 만화가 아니라 현실에서는 어지간히 못난 통치자라도 작은 업적 정도는 있게 마련이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나 조선연산군은 초기에는 그럭저럭 괜찮은 왕이었고, 선조는 도덕성에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능력은 좋은 편이었고 할아버지 선조보다 나쁜 평가를 받는 인조조차 의외로 재평가할 가치가 있었으며, 비교적 혼란한 시기였던 신라 하대의 왕들 중 일부는 현대에 들어서 재평가되고 있다. 쿠데타로 집권하고 대한민국 대통령 중 가장 민주적 정당성이 떨어졌던 전두환의 경우도 비록 그것이 박정희의 정책의 후광인 부분이 없었다고 보긴 힘들어도 수치상으로 좋은 경제 성장률, 문화 규제 해제등의 장점은 있었다. 문제는 박근혜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질 만큼 능력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너무나도 무능했다는 것이다.


5. 관련 문서[편집]


[1] 분기별 평균으로 따지면 11%가 돼서 김영삼의 6%보다 높지만, 이 당시에는 분기당 1번씩만 조사를 했기 때문에 한 번의 여론조사 상 지지율로는 최하위가 맞다.[2] 참고로 제19대 국회의 전·후기 국회의장은 새누리당이였고, 국회부의장은 여야가 전·후기에 공동으로 맡았다. 새누리당은 151>149>146, 야당은 127>123석으로 줄었다. 쟁점법안에 대한 처리요건을 150>180석으로 만든 건 여당이 제안한 거지, 야당이 제안한 게 아니다.[3] 대구 수성 갑 더민주 김부겸, 대구 북구 을 무소속 홍의락. 원래 더민주였으나, 이 당시에는 탈퇴했기 때문에 무소속이었다. 한동안 국민의당 입당설이 돌았으나, 더민주로 복귀했다.[4] 군주가 어리석어 세상이 온통 어지럽고 무도하다. 어리석고 무능한 군주를 가리키는 혼용(혼군(昏君)과 용군(庸君)을 아우르는 이름)과 세상이 어지러워서 도리가 깨진 것을 묘사한 '논어'의 '천하무도'(天下無道) 속 '무도'를 합친 표현.[5] 못의 물을 모두 퍼내 물고기를 잡는다. '눈 앞의 이익만을 추구하여 먼 장래는 생각하지 않음'을 뜻한다.[6] 달걀을 쌓은 듯이 위태로운 형태. 비슷한 표현은 누란지위.[7] 다만 올해의 사자성어는 노무현, 이명박 전 대통령들 때에도 나쁜 말만 있었긴 하다. 올해의 사자성어 자체가 그 해 한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부각 시키는 게 크니 말이다. 실제로 2010년대에 들어온 후부터 꾸준하게 국민들로부터 가장 평가가 좋은 노무현 대통령조차도 재임 당시에 그나마 가장 좋았던 말이 "여건은 조성되었으나 일이 성사되지 않아 답답함과 불만이 폭발할 것 같다"는 뜻의 밀운불우(密雲不雨)였다. 물론 이 말이 박근혜가 정치를 잘했다고 변호하는 건 절대로 아니다.[8] 이 역시 당선 당시 51.6%의 득표율을 기록했던 것과 비교하면 어느 정도 지지자가 떠났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 51%의 득표율은 박근혜의 지지자들뿐 아니라 대선 당시 그가 국정을 잘할 것이라고 믿은 일반 국민들도 상당수 포함됐기 때문에, 사람들이 등을 돌린 건 당연하다. 오히려 그런 실책들을 저질렀는데도 지지율이 30% 밑으로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역대 대통령 중 유례가 없는 맹목적 지지자들을 보유했음에도 그 지지자들 대부분이 결국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9] 박근혜/지지율 문서 참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본격적으로 터지기 전까지는 임기 중 어떤 실책에도 절대 떨어지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10] 후에 인턴의 엉덩이를 만지고 알몸 상태로 인턴을 호출하는 등의 성추행으로 경질되었다.[11] 이 점에서 박근혜는 여권 신장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었음이 드러난다. 여성 인권 신장에 가장 힘쓰고, 가장 힘써야 할 여가부 장관을 이렇게 임명하면 여권 신장이 가능이나 할까? 굳이 여권 신장까지 안 가도 여성가족부는 해바라기 센터 등을 운영하고 성교육에도 힘을 보태고 있으며, 근처에 사는 성범죄자의 신원을 보내준다. 이 모든 일을 말아 먹으라는 거나 다름 없으니 이는 다른 부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후 김희정은 2016년 20대 총선에 부산광역시 연제구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당시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더불어민주당 김해영 후보에게 출구 조사까지 뒤집히면서 제대로 참교육 받았다. 심지어 김해영은 민주당 당적으로 첫 출마해서 한 번에 당선되었다. 보통 PK에서 민주당계 정당으로 출마하는 사람은 최소 재수, 심하면 4수 이상 출마해 욕 먹으면서 민심을 쌓고 나서야 당선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보통 놀라운 일이 아니다. 김경수가 그런 케이스로, 선거에서 낙선 후 김해 지역의 마을 잔치에 돌아다니면서 민심을 쌓았다고 한다. 김희정은 이미 지역구 관리가 엉망이라는 평을 받고 있었다. 이미 2008년에도 한나라당 후보로 나왔으나, 친박연대 후보에게 밀려 낙선한 전적이 있다. 후에도 반성 없이 여당 후보로 나온 탓에 아예 민주당으로 갈아엎자는 여론이 생긴 것이다.[12] "박근혜 대통령이 미르·K스포츠재단에 돈 낼 기업과 액수까지 지시했다"는 증언이 나왔다.[13] 이미 조선일보JTBC 등의 언론에서는 증거를 확보하고 있었으나, 워낙 높은 지지율 탓에 눈치만 보고 있었던 것이 임기 말에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14] 대통령의 휴가 계획, 의상 등 사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국가의 외교, 경제 정책 등의 중대한 수준의 국정 업무까지 관여했으며, 최순실 본인은 고위 공무원들로부터 마치 '상전'처럼 모셔졌다고 한다. 여기에 더하여 최순실의 친딸인 정유라는 어머니의 위세를 빌려 대학에 부정 입학하고 각종 특혜를 받았었다.[15] 실검 1위 탄핵 등 박근혜 관련 검색어 10위 중 7개 "탄핵은 정치적 분노" 2016년 10월 25일 <영남일보>, 심상정 “인터넷 실검 1위 탄핵, 2위 박근혜 탄핵...朴 대통령 사과 수용 못 해” 2016년 10월 25일 <아시아투데이>, 박근혜 대통령 대국민 사과문 발표에도...실검 상위권 휩쓴 '탄핵' '하야' 2016년 10월 25일 <동아일보>, 박근혜 대통령 대국민 사과에 트위터 "두 번 순수했다가는..."등 후끈 2016년 10월 25일 <서울경제>, 박 대통령, 최순실 사과 뒤 포털 실검 1위는 '탄핵' 2016년 10월 25일 <한겨레>, '최순실 연설문' 이후 탄핵·하야 등 실검 도배..."국민 분노 비등점 향해" 2016년 10월 25일 <서울신문>, [주요 반짝 뉴스] 박근혜 대통령 대국민 사과에도 온라인은 분노의 불꽃 활활...실검 '탄핵' '하야' 장악 외 <스포츠경향>, 포털 실검 1~10위 최순실 게이트 관련 '탄핵·하야·jtbc' 도배 2016년 10월 25일 <디지털타임스>, 실검 1위 탄핵... 네티즌도 정치권도 쏟아지는 '탄핵' 얘기 2016년 10월 25일 <중앙일보>, JTBC 최순실 연설문 보도에 '탄핵' '하야' 실검 등장... 박근혜 대국민사과까지 2016년 10월 25일 <부산일보>.[16] 조금의 도움? 최순실 '컨펌' 없으면 국정 못 한 박근혜.[17] 박근혜, 세월호 참사 당일 재택근무. 출근 비율 절반도 안 돼(JTBC뉴스룸).[18] 상식적으로만 접근해도, 폐쇄하기에 앞서 남북 협상 카드로 쓰는 것이 더 유리했을 것이다.[19] 박 대통령 수첩 보면서 “문체부 국·과장 나쁜 사람이라더라".[20] 일부는 영전했고, 일부는 원래 자리로 복직했지만, 대부분은 능력이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21] 국민이 친정부 성향이 아니라고 해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불이익을 준 자체만으로도 헌법 위반으로 탄핵 사유가 되지만, 최순실 국정농단이 너무 큰 문제라 상대적으로 묻혀 버렸다.[22] 이 사람은 잘 알려진 보수논객 중 하나다. 보수논객한테서조차 이런 평가를 받았으니 박근혜 정부가 얼마나 최악인지 알 수 있다. 전원책 항목 참조에도 알 수 있듯이 전원책은 성역 없는 비판으로 유명하다. 보수 이념에 맞지 않는 정당이라고 새누리당을 맹비판해왔다. 전원책은 이후 자유한국당에 대해서도 가감 없는 비판을 이어 갔다.[23]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24] 박근혜는 10.26 사건 직후인 1980년에 압구정 현대아파트 몇 십 채는 살 만한 돈이던 6억 원을 전두환에게서 받았다. 2017년 현재 기준으로도 6억 원은 거금인데, 저 때는 헤아리지도 못하는 수준이었다. 대치 은마아파트 분양가가 2,000만 원이던 시절인데, 은마아파트 30채면 2016년 기준 300억 원 정도다. 거기에 제부 신동욱은 2016년 11월, CBS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에서 박정희가 사망하고 나서 최태민 목사가 박근령에게 200만 원 짜리 아파트 한 채를 얻어주었다고 한다. 최태민은 이어 박지만에게도 아파트 한 채를 구해준 것으로 보이는데, 결과적으로 박정희의 비자금 6억 원 중에서 동생들의 아파트 2채 가격을 제외한 298채 가격을 언니인 박근혜가 가졌다고 한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이미 이 시기에 박근혜최태민은 통장을 같이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증언하였다는 것이다.[25] 박근혜를 제외하고 그나마 금수저 출신인 대통령이라면 당시 거제군의 지역 토호의 아들이었던 김영삼 대통령(아버지 김홍조가 멸치 어장과 선단을 소유한 지역 거부였다.) 정도인데, 그 역시 초선의원 시절 선거 운동을 할때라면 몰라도 이후에는 순전히 본인의 힘으로 모든 것을 개척한 것이다. 물론 김영삼 대통령 역시 측근과 차남 김현철 등의 친인척이 비리를 저지른 적은 있었지만, 그 자신은 청렴한 사람이었다는 평가에는 이견이 없다.[26]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은 육군 소위로 임관해서 군 조직의 최말단에 위치한 조직의 장인 소대장으로 시작해서 장성까지 올라갔다. 다만, 박정희 대통령은 만주군 소위 출신이긴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 최초로 육군 현역병으로 입대하여 만기전역했다. 전역 당시의 계급이 상병이었는데, 당시에는 베트남 파병으로 조기 진급한 병장들이 너무 많아서 병장 TO가 없어 진급을 못했을 뿐, 노무현은 분명히 만기 전역을 했다. 게다가 가난에다가 고졸이라서 사법시험 준비 과정도 매우 파란만장했고(공사장 등에서 힘들게 노가다를 하면서 책값을 벌어 고시 준비를 했다고 한다), 합격한 뒤에도 본인을 괴롭히는 기득권 세력들에게 학력 등을 꼬투리 잡혀 집요한 공격을 온몸으로 받았다. 1940년대생으로서 고졸이 결코 낮은 학력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엘리트들이 옹졸하게 노무현을 공격한 것이다. 물론 노무현 본인은 그것을 자기 실력으로 모두 극복했다. 노무현 대통령과 더불어 자수성가의 대표적인 사례로 통하는 이명박 대통령은 시장 바닥 행상으로 시작해 아예 현대건설 말단 사원으로 들어가서 까마득한 선배들과 함께 현장에서 뛰어다녔다. 윤석열 대통령은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후 평검사로 시작해서 검찰총장까지 올라갔다.[27] 영애/영식 시절부터 비교해도 마찬가지다. 노무현 대통령의 영식 노건호LG전자에 말단 사원으로 들어가서 선배들과 일선에서 움직였다. 아버지가 대통령이 된 뒤에도 퇴사하지 않고 계속 본분을 지켰다. 훗날 퇴사하긴 했으나 (중국 유학을 위해 LG전자 중국법인에 입사했는데, 본사에서 퇴사하고 중국 법인으로 갔다는 말도 있으므로 정확하지는 않다), 아버지 노무현이 서거한 후 한참 지난 뒤였다. 노무현 대통령의 영애 노정연도 조용히 자신의 자리에서 본분을 지키고 있다. 참고로 영식/영애는 영부인/영부군과 달리, 본인이 바라는 삶을 누릴 기회가 생긴다. 영부인/영부군은 어차피 바로 청와대로 들어올 운명이기 때문에, 회사에서 영부인/영부군 기간을 무급 휴직으로 처리하고 퇴임 후 복직할 기회를 준다던지 하지 않는 한 원래 직장으로 돌아갈 여지가 적다.[28] 이승만 대통령은 비록 독재와 학살을 비롯한 실책 때문에 말이 많지만, 일제강점기독립운동가로서 활동했다는 사실만은 명확하며, 일본 내막기를 저술하며 미국에서 위험분자로 낙인 찍히면서도 일제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게다가 취임 후 6.25 전쟁목포시에서 해군 경비정으로 간신히 철수하는 등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장면 총리는 1956년에 이승만의 측근인 이기붕을 누르고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가 이후 이기붕의 계획에 의해 김상붕에게 저격당하여 왼손에 총탄을 맞기도 했으며, 4.19 혁명 직후 이승만 대통령의 사임을 촉구하는 뜻에서 부통령직을 사임했다. 윤보선 대통령은 1915년에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잠시 독립운동에 참여한 바 있으며, 영국 유학 생활을 마친 후 귀국했을 때 조선총독부 등이 그에게 끈질기게 협조(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는 것)를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석왕사에서 은신하면서 끝내 거부했을뿐더러, 일제강점기 말에 민족말살정책이 실시되었을 때 본인이 속한 해평 윤씨 가문의 문중회의에서 가문 전체의 창씨개명을 결의한 뒤에도 혼자서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등 일본 제국의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비록 친일반민족행위라는 점에서 흑역사이긴 하지만 만주군 시절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고, 남조선로동당 시절 여수·순천 10.19 사건과 연루되어 체포되었다가 본인의 처세술 및 백선엽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며, 이후 한국군 소속으로 6.25 전쟁에 참전하였다. 휴전을 1년 앞둔 1952년에는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군부의 이승만 축출 시도에 가담하기도 했다.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도 장교일 때 베트남으로 파견되었다.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은 목숨을 걸고 독재 정권에게 항거했다. 김영삼 대통령도 제명 파동, 질산 테러, 각목 사건, 가택 연금 같은 시련을 겪었으며, 특히 김대중 대통령은 인생 자체가 납치와 사형 선고 등을 비롯한 온갖 고난으로 얼룩졌다.(이 과정에서 장남 김홍일도 고문을 당해 불구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은 사후에도 보수 세력으로부터 노벨평화상을 받기 위해 부정한 공작과 거래를 자행했다느니, 북한에 일방적으로 퍼줬느니라는 마타도어에 지독하게 시달리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도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면서 군부 정권의 탄압 때문에 무척 고생했다. 하다못해 이명박 대통령도 6.3 항쟁의 주역 중 한 명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검찰총장 시절 조국 사태에 대해 수사하던 중 문재인 정부의 지나친 견제에 시달렸으며, 정계 입문 직후에는 문재인 정부의 독선적인 정치에 항거했다. 박근혜는 당 대표로서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지만, 이는 순전히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자신의 후광 이미지가 먹힌 결과물일 뿐이다. 대한민국 대통령들 중 이러한 이력이 없는 또 다른 대통령으로는 최규하가 있기는 하지만 재임기간이 1년도 채 안되므로 논외. 문재인 또한 노무현의 후광으로 당선되었다는 이미지가 있긴 하지만 사법연수원 수료 이후 노무현과 함께 인권변호사로 힘들게 근무하고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다는 이력이 있어 선배 덕 좀 봤다는 비평은 있을지언정 인권변호사 및 민주화운동가 이미지를 부정하는 관점은 없다.[29] 대통령(大統領)은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백성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최고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전제군주 같은 신분이나 지위를 뜻하는 단어지만, President는 이런 느낌과는 정반대로 '다른 사람보다 앞에 앉는 사람'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애초에 대통령이라는 단어가 19세기 일본이 통령(부유층 자제 출신의 무사들을 통솔하는 에도 시대의 관직)에서 따와, 큰 나라인 미국을 예우한다며 大를 붙이고, 1853년 밀러드 필모어 미국 대통령의 친서 번역본에서 최초로 쓰인 게 시초다. 우리나라에서는 임시정부 때 처음 쓰였다.[30] 윤석열 토론회 손바닥 王자 논란이 왜 터졌는지만 봐도 이와 일맥상통하다.[31] 특히 노무현과 이명박.[32] 대표적인 사례로 42년 만에 한미원자력협정 개정, 한일 위안부 협상 타결을 들고 있다. 다만 위안부 협상의 경우에도 논란이 많다.[33]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통합진보당 해산. 하지만 역설적으로 박근혜의 탄핵을 받게 한 중대한 사유 중 하나가 헌법수호 의지가 없으며, 파면을 통해 얻는 헌법 수호 이익이 압도적으로 크다는 판단이었다.[34] 노동계 버전 유신헌법, 전 국민 알바화, 전 국민 장그래화 등의 별명도 있었다.[35] 이마저도 박근혜 본인은 당시 대한민국 여성의 평범한 삶을 이해하고 있었다고 할 수도 없으며, 딱히 양성평등에 업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유영하의 '여성의 사생활' 발언 등에서 여성 운동가들에게는 비판을 받기까지 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여권 향상을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보는 것도 힘들다. 오히려 퇴보시켰으면 시켰지.[36] 다만 샤이 박근혜 항목을 참고하면 알겠지만, 그 규모가 있다고 해도 미미하며 국정 변환의 변수로는 거의 가망성이 없다.[37] 실제로도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그 열렬한 박근혜의 팬이라 할 수 있는 두 지역인 부산광역시울산광역시마저 자유한국당에게 등을 돌리고 두 지역 모두 문재인이 승리했다. 본디 경상도 지역 전체가 보수 정당의 텃밭 지역인데, 그러한 곳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부산조차 박근혜를 계승한 홍준표를 버리고 문재인을 선택했다는 것은 엄청난 정치적 지각 변동이다. 물론 문재인이 부산 출신이라는 것과 20대 총선 이후로 더불어민주당이 PK 지역에 기반을 확대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지만, 결국 자유한국당대구광역시 이외의 모든 광역시에서 패배했다. 게다가 비영남권 특별/광역시(서울, 인천, 광주, 대전)에서는 읍/면/동 단위로 봐도 처참했다. 광주는 지역 특성상 원래부터 0곳이라고 쳐도, 서울에서는 13개 동(게다가 그 중 6곳은 강남, 2곳은 서초고 나머지 중에서 여의도동과 합참 및 국방부 소재지인 서빙고동이 있다.), 인천에서는 3개동(원도심의 2개동+용유동), 대전에서는 3개동(원도심의 1개동+농촌지역인 대청동, 기성동)에서만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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