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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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멸할 것이다. 붉은 피로써 가장 추악하고 어리석은 인류에 의해 더럽혀진 세계를 깨끗이 씻을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도 죽어갈 것이다. 거기에 참된 자유가 있고, 평등이 있고, 평화가 있다.
참으로 선량하고 아름다운 허무의 세계가 있는 것이다.
박열의 선언[7]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무정부주의자, 언론인, 시인이며 재일교포 단체인 재일조선인 거류민단의 초대 민단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2. 생애[편집]
2.1. 해방 이전[편집]
일본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친일반민족행위자와 조선을 모욕하는 일본인을 응징하는 '혈권단'과 '의권단'을 조직했고, 고학생동우회와 흑양회를 거쳐 1920년 최초의 무정부주의 단체인 '흑도회(黑濤會)'를 조직하여 간사로 참여했다. 이때 한 대표적인 활동은 니가타 현 시나노가와 댐 공사현장에서 조선인 노무자들에게 엄청난 혹사와 그로 인한 극심한 산업재해, 심지어 일본인 현장감독들에 의한 타살이 만연하다는 소문을 듣고 위장취업으로 잠입해 참상을 조사하고 발표한 것이다. 실제로 이곳의 노동자들은 새벽 4시부터 저녁 8,9시까지 하루 15시간 이상을 식사 시간을 빼놓고 1분의 휴식도 없이 중노동에 동원되었으며, 특히 힘든 일은 모두 조선인들의 몫이었다. 그러면서도 임금은 일본인 노동자의 70%밖에 안 됐고, 그나마도 하청 조합에 빼앗겨 실제 손에 쥐는 돈은 명목상 임금의 절반 이하였다. 견디다 못해 도망치면 '결사대'라고 불리는 파수꾼들이 잡으러 다녔다. 그들은 칼과 권총을 늘 갖고 다니며 고문과 살상을 밥 먹듯 했다. 희생자들은 공사장에 그대로 암매장되거나 강물에 던져져 하류에서 틈만 나면 떠밀려온 사체가 발견되었고, 잡히지 않은 사람들도 가까운 민가가 10km도 넘게 떨어져 있는 고립된 산속에서 조난당해 굶어죽거나 얼어죽기 십상이었다. 밝혀진 대표적인 희생자들은 이렇다.
- 김갑철: 당시 19세. 도망쳤다가 붙잡힌 그에게 하청 조합 책임자가 하역을 할 때 쓰는 쇠갈고리로 맨살을 열 군데 넘게 찍었다. 그것도 모자라 알몸 상태로 눈구덩이 속에 방치했다. 3시간 뒤 꺼내졌을 때는 이미 사망한 뒤였다.
- 우윤성 포함 4명: 역시 도망치다 붙잡혔고, 발가벗겨진 채로 벽돌을 찍는 틀 속에 갇혔다. 그 위로 물과 모래, 시멘트를 부었다. 시간이 지나 시멘트가 굳어지자 돌과 모래가 살 속으로 파고들며 압사. 극심한 공포 속에 아주 길고도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이렇게 100여명이 죽어나갔다는 자세한 상황을 조사한 흑도회는 그해 9월 간다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시나노가와 댐 조선 노동자 학살사건 조사회 연설회를 열었다. 일본 경찰은 오스기 사카에 등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과 조선인 운동가들을 연사로 나서지 못하도록 구속해 사건이 사회에 알려지는 것을 막으려고 했지만, 조선인과 일본인이 각 5백명, 1천여명의 인파가 운집해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듬해인 1921년 정견 차이로 말미암아 김약수를 위시한 공산주의자가 이끄는 북성회와 박열을 위시한 아나키스트가 이끄는 풍뢰회(이후 흑우회로 개칭)로 분리되었다. 이후 일시 귀국하여 조선 최초의 아나키즘 단체인 '흑로회(黑勞會)'를 조직하였다. 흑우회는 기관지〈후데이센진(太い鮮人)〉을 발행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일본 당국이 '조선인 불온분자'를 일컫는 "불령선인(후테이센진)"과 비슷한 발음의 단어로, 일종의 말장난을 이용한 조롱이었다.
1923년 4월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를 위시해 여러 동지와 함께 비밀결사 '불령사'를 조직하고 반일 활동을 더욱 적극으로 주도하였다. 독립운동 자금을 착복한 장덕수와 사회주의자를 욕한 동아일보 기자 김형원을 사적제재했고, 민중화가 모치즈키 카츠라를 초청해 일본노동사를 듣고, 민중예술론을 주창한 가토 가즈오를 초청해 혁명사상을 배우기도 했다. 백정해방운동을 벌이던 조선형평사에 응원 전보를 보내고, 파업을 지도하다 투옥된 나카니시 이노스케의 출옥 환영회를 개최하는 등. 쉽지는 않았는데 도쿄에서 검속 구류를 당한 횟수가 50회 이상이며, 미행이 따라붙었다. 박열이 사는 집 앞에 경찰서 파출소가 설치되어 출입하는 사람을 일일이 검문했다. 발간하는 잡지는 제본되어 나오자마자 검열당국에 압수되어 발매금지 처분을 받기 일쑤였다. 인쇄소를 비밀로 하고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비밀반포도 해 봤지만 한계는 명확했다. 잡지를 만들어도 거의 팔 수가 없어 수입이 없고, 생계를 위해서는 인삼 행상 일을 했지만 형편은 늘 어려웠다. 광고비와 후원금으로 잡지를 만들었다. 그러다 후원을 얻어 작은 식당을 열 수 있게 되었는데, 성사되었다면 생계와 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겠지만 그러기 직전 관동대지진이 발발하고 체포되면서 이루지 못한다.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조선인 학살을 피해 기타 잇키[10] 에게 도움을 받아 피신하였으나 9월 3일 보호 검속이라는 명목으로 체포되었다. 24시간으로 규정되어 있었지만 다음날 '경찰범 처벌령'으로 대체되었고, 결국 치안경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기에 이르렀다. 일본 경찰에 의한 취조 도중 박열의 폭탄 구매 계획이 알려졌는데 일본 정부와 검찰은 이것을 천황 암살을 꾀한 조직 사건으로 날조하고 과장하여 보도하였다. 이것을 '대역 사건'이라고 한다.
이때 재판 과정에서 보인 모습도 비범한데 4가지 요구를 했다. 피고라고 부르지 말 것[11] , 공판정에서 조선 예복 착용을 허락할 것, 재판장과 동일한 높이의 좌석을 마련할 것(이건 거절되었다), 선언문 낭독을 허락할 것이었다. 박열뿐 아니라 가네코 후미코도 "조선 옷을 입겠다"고 고집을 피워서 첫 공판 당시 박열은 옛 조선 관료의 예복인 사모관대를, 가네코 후미코는 치마저고리 차림을 하였다. 이 옷은 조지훈 시인의 아버지인 조헌영 씨가 제공했다고 한다.[12] 그리고 "우리는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이므로, 재판도 조선말로 할 것이니 통역을 허락하라!"고 요구했다.
재판 과정에서 낭독한 선언문을 일부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인간의 신체, 생명, 재산, 자유를 끊임없이 침해하고 유린하는 조직적 대강도단인 국가의 틀 속에 있는 재판관이 공명정대한 판결을 내릴 리가 없다. 내가 이 자리에 선 것은 재판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선언하기 위해서다!
'소위 재판에 대한 나의 태도' 중.
지배자와 부자의 민중에 대한 수탈, 타민족에 대한 강대국의 지배, 피압박 민족인 조선 민족 사이에서 볼 수 있는 백정에 대한 차별 또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볼 수 있는 고참 노동자와 신참에 대한 압정 등, 극히 무의미하고 강렬한 우월감, 정복욕, 지배욕, 따라서 가장 우매하고 추악한 약육강식! 이것만이 인류의 빼놓을 수 없는 참된 본성이며 자연의 대법칙이다. 나는 너희들의 증오에 사랑을 가지고 보답할 만큼 천진난만하지 않다. 또한 나는 너희들의 이기심에 대해 양보를 할 정도로 미친 사람은 아니다. 나는 너희들의 폭행에 무저항으로 보답할 만큼 선량하지도 않다. 그것은 모두 추악한 위선이다. 이와 같이 비굴한 태도는 용서받지 못할 너희들의 죄악을 묵인하고, 그에 대해 암흑의 조력을 주는 셈이 된다. 나는 그런 일은 하지 않겠다!
'나의 선언' 중.
두 사람에게는 1926년 3월 25일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확정판결 11일 만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변호를 맡았던 변호사 후세 다쓰지의 도움으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옥중 결혼을 하였다.천황이란 국가라는 강도단의 두목이다. 약탈 회사의 우상이며 신단(神壇)이다. 나는 폭탄으로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실권을 가진 모든 계급 및 간판을 전멸시키려 했지만, 이것이 가능하지 않았기에 천황과 황태자를 투탄 대상으로 삼았다. 조선인의 입장에서 그들을 대상으로 삼은 이유는 첫째, 일본 민중에 대하여 일본 황실의 진실을 알리고 그 신성을 땅에 떨어뜨리기 위함이며 둘째, 조선 민중에 대하여 일본 황실을 무너뜨려서 조선 민중의 독립에 대한 열정을 고취하기 위해서이며 셋째, 침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일본의 사회 운동에 대한 혁명적인 기운을 고취하기 위해서였다. 그러기 위해 황태자의 결혼식에 폭탄을 사용하는 것이 일본에 대한 조선 민중의 의지를 세계만방에 표명하기에 가장 적절한 기회라고 생각했다. 나는 법률이나 재판의 가치를 전혀 인정하지 않으므로 형법 73조[13]
에 해당하는지 아닌지는 아무 상관없다. 그건 너희들 마음대로 하라!
'어느 불령선인이 일본의 권력자에게 주는 글' 중.
이때 일본에선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사진 스캔들이 터지기도 했다. 일본 언론이 보도했던 두 사람의 모습을 담은 사진은 도저히 중범죄자의 모습이라곤 할 수 없을 정도로 자유롭고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정황은 조선에서도 1926년 8월 25일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1926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 보도 내용을 보면 사진을 촬영한 사람은 판사 다테마스 가이세이였고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회유하려고 촬영한 것이라고 한다. 해당 사진. 그뿐만 아니라 판사 타테마스 카이세이는 박열에게 홍차를 권하고 만년필을 빌려주기까지 했다고 한다.
동아일보는 판사 타테마스 카이세이를 대상으로 해 "원래 열정가로 유명했다"고 평했고 다테마스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박열이 '우리 가족이 가네코 후미코의 얼굴을 모르니 두 사람이 찍힌 사진을 가족에게 보내고 싶다'고 여러 번 애원해서 촬영했다"며 "셔터를 누르는 순간 박열과 후미코가 갑자기 이상한 모습을 해서 사진이 그렇게 촬영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진 원판을 그대로 버렸고 박열에게도 사진을 주지 않았는데도 왜 사진이 세상에 유포됐는지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또 1926년 8월 29일자 동아일보에 보도된 다테마스의 해명은 다음과 같았다.
그 사진은 1925년 4월 9일에 촬영한 것이다. 취조는 4월 7일 끝났지만, 그로부터 2일 후 박열이 "우리 형에게 보내겠다"고 해서 촬영한 것이다. "모리 대역범이라고 해도 형제 간까지 죄가 있겠느냐" 싶어서, 나는 다만 인간애로 사진을 촬영했을 뿐이고 다른 사람에게 그 사진을 준 일이 절대로 없다.
이 스캔들은 타테마스 판사가 해임되었고 정치 공세 탓에 1927년 당시 일본 와카츠키 레이지로 내각총사퇴를 부를 정도로 파장이 컸다.[14]
이와는 별개로 일본 우익들은 이 사진을 가지고 아주 신나게 아래와 같은 가관인 찌라시를 작성해서 퍼뜨리는 등 한바탕 난리가 일어났다.
(...)박열과 가네코는 황실에 대해 위해를 가하고자 한 극악무도한 국적임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이들을 국사(國士) 이상으로 대우해 옥중 특별실에 기거하게 하며 결혼에 이어 동서 생활까지 시키고도 모자라 감형의 은전까지 베풀었다. 이런 조처를 취한 정부 자체가 '국적'이 된것이 아닌가?
불령선인 박열은 책을 들고 있는 반역자 가네코를 포옹하고 있다. 박열의 한쪽 팔은 책상에 턱을 괴고 있지만 다른 한쪽은 가네코의 젖가슴을 누르고 있다. 하루의 취조를 마친 후 타테마스는 예심 법정에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두 사람만을 남겨놓은 채 변소에 간다는 핑계로 퇴정하여, 감시도 없이 문을 잠그고 약 30분 동안 내버려두었다. 해방된 30분 사이 인적 없는 법정 안에서 불령한 남녀가 무슨 짓을 했을지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그 후부터 박열과 가네코는 생리적인 어떤 기능이 조절되어 점차 유순해졌고, 그들은 타테마스를 이해자이자 동정자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은 1926년 7월 23일 가네코 후미코는 23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정확한 사인이 밝혀지지 않은 의문사인데 자살이라는 설과 당국의 암살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증은 없다. 후미코의 시신은 변호사 후세 다쓰지가 수습하여 박열의 가족을 거쳐 경상북도 문경시에 안장했다. 박열은 22년 2개월 동안 복역한 끝에 해방 후인 1945년 10월 27일 석방되었다.
한편 학계에서는 박열이 수감 도중인 1934년 전향했다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는 박열이 형무소장에게 제출했다고 알려진 공순상신서, 감상록 등의 사료와 이를 보도한 각종 신문기사에 따른 것이다. 특히 가네코 후미코의 평전을 쓴 야마다 쇼지(山田昭次) 전 교수는 박열의 전향을 확실시하여 끝까지 지조를 지킨 가네코의 사상을 보다 높게 평가했다. 이들 전향서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저 역시 천황 폐하의 적자(赤子)로서…응분의 책무와 분담의 광영을 부여받은 것을 생각하면 매우 기쁘다"(1935년 8월 9일자 동아일보 기사)
- "신속히 내지(일본)인과 합체하여 새로운 민족을 형성하고 빨리 내선융화를 완성하여 한일합병의 결실을 거둘 필요가 있다"(1938년 6월 제출 감상록 중)
- "전향 이후 일본인으로 살기로 맹세한 이상 사회가 받아들여주지 않더라도 나는 일본인으로 살고 싶다…이것은 폐하의 능위에 따른 것"(1945년 10월 27일 야마가타신문)[15]
- 전향서의 문투가 박열의 문체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
- 문서들에 전향에 이르게 된 경위가 설명돼 있지 않고, 너무 갑작스럽게 발표됐다는 점.
- 박열의 사상전향은 그야말로 화젯거리이며 그만큼 일제의 선전성 역시 다분하였을 텐데 일간신문이나 대중 교양지에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는 점.
- 감형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
- 출옥 후 김구 등 동지들이 별 반감 없이 박열을 환영, 추앙했다는 점이다.[16]
2.2. 해방 이후[편집]
이후 도쿄로 돌아와 '신조선건설동맹'을 결성하였고 김구 선생에게 부탁받아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세 의사의 유해 송환을 책임지기도 했다.[17] 이후 반공주의 노선의 신념을 밝혔고[18] 신조선건설동맹은 타 우파 단체들과 통합되어 재일조선인거류민단(지금의 민단)이 발족하였다. 그리고 박열은 재일조선인거류민단의 초대 단장으로 추대되었다. 다만 박춘금 항목에 의하면 당시 민단은 구 친일파나 파시스트들이 제법 많았고, 박열은 초대 단장이 되었지만 이들과 갈등 끝에 결국 민단을 나갔다고 한다.
이듬해에는 영구 귀국하여 서울에 머물렀다. 그러다 6.25 전쟁 도중 납북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당시 서울에 진주한 북한 보위부가 납북했다고 한다. 자진 월북한 인사들도 있었고[19] 반동 혐의로 체포된 사람들도 있었으며 북한군과 보위부 고위 관계자들이 와서 "선생, 이곳은 위험하니 우리가 안전한 곳으로 모시겠다"라며 설득하여 북한으로 데려간 예도 있었다. 조소앙과 김규식, 이광수가 이러한 모시기 공작으로 북으로 넘어가게 된 예이고 박열도 북한이 연행한 예라는 이야기가 있으나 확실하진 않다. 서울이 함락되기 직전 박열은 주위의 피난 권고에도 "국민이 모두 서울에 남아 있는데 독립투사인 내가 그 사람들을 버리고 서울을 떠날 수 없다"며 서울에 잔류했다고 한다. 아마 사진에서도 보이듯 당시 김구나 양근환[20] 등과 교분이 있었기 때문에 주변에서 꽤 우려한 듯.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21] 장을 맡고 있다가 1974년 1월 17일 평양에서 71세로 사망하였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다. 묘지는 평양 신미리의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특설 묘지에 있다.[22] 한국에선 다른 납북자들이 자진 월북자로 도매금당하고 언급 자체가 금기시된 사례가 많은데 박열은 그래도 해방 정국 5년 동안 뚜렷하게 반공 우익 노선을 탔기 때문에 스스로 원해 월북한 게 아니라 북한 당국에게 강제로 납북당했다는 인식이 오랫동안 정설이었다. 그래서인지 박열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대한민국 언론에서도 짧게나마 이것을 보도했고 사회장 수준으로 추도식이 열리기도 했다.[23]
2.3. 장의위원회 구성[편집]
2.4. 추도위원회 구성[편집]
- 집행 위원장: 이은상,
- 위원: 곽상훈 통일주체국민회의 운영위원장, 김정주 재일본대한민국민단장, 정일권 국회의장, 안춘생 광복회장, 김종필 국무총리
- 유족: 미망인 장의숙, 영식 박영일 중위, 영애 박경희
3. 학계연구[편집]
일제강점기 재일 조선인, 독립운동가, 아나키스트 연구자들이 박열에 대해 연구하였다.
3.1. 연구자[편집]
- 김인덕
- 이호룡: 한국의 아나키스트 연구자. 박열에 대해서도 연구한 내용이 저서에 담겨있다. 한국의 아나키즘: 운동편 , 한국의 아나키즘: 인물편
3.2. 평전[편집]
- 김인덕, "박열 - 극일에서 분단을 넘은 박애주의자" 독립기념관: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49, 역사공간2013-12-05 #
- 이호룡, 한국의 아나키즘: 인물편, 지식산업사2020-01-20의 제 3장
3.3. 후세 다쓰지의 기록[편집]
4. 기타[편집]
-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이야기가 다뤄진 적이 있다. 그러나 프로그램이 프로그램인만큼 단순한 연애담 정도로 묘사됐다.
- 워낙 성격이 불같고 강직해서 북한에 있을 때도 당국에서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인물이었다고 한다.[24] 심지어 1955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결성식에서 당시 조국 전선의 일원이자 평화위원회 서기장이었던 최성환과 다툼이 있었는데 최성환은 늑골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북한에서의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여러 가지 자료를 종합해 보건대 박열은 이북 생활에 불만이 많았지만 김일성의 눈밖에 날 행동은 하지 않았던 듯하다. 일설에 따르면 김일성이 위로 차원에서 차려 준 연회에서 납북·월북자들이 희희낙락하는 게 꼴보기 싫었고 결국 그 사람들과 시비가 붙자 두드려 팼다는 이야기도 있다. #
- 박열의 고향인 경상북도 문경시에는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 박열의 생가도 복원했고 가네코 후미코의 묘소도 이곳에 있다. 본래 가네코 후미코의 묘소는 주흘산 근처의 박열 집안의 선산에 있었는데 기념관을 세우면서 현 위치로 이장했다.
- 박열과 2번째 아내 장의숙(1947년 결혼, 1976년 사망) 사이에 낳은 자녀들은 1남 1녀가 있는데 아들 박영일은 대한민국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육군 예비역 장성 출신으로 준장까지 지냈으며 재일교포 출신으로는 육군사관학교 최초 졸업자라고 한다.(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기사) 장의숙의 회고에 따르면 박열은 재혼한 뒤에도 후미코의 기일에는 집에서 묵상하며 그녀를 추모했다. 한편 북한에 간 뒤 박열이 그곳에서 다시 재혼했는지의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 박영일이 육군사관학교에 임관하게 된 경위는 이렇다. 박열이 납북된 후 장의숙은 북한에 있는 그에게 편지를 보내서 아들의 장래에 관해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었다고 한다. 당시 상황이 상황인지라 답신이 올 가능성이 희박한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보냈던 것인데 뜻밖에도 북에 있는 박열로부터 답장이 도착했다. 그렇게 도착한 답장에는 '아들을 나라에 바쳐라'라는 말이 적혀 있었으며 이를 본 장의숙은 박영일을 군인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아들을 나라에 바치는' 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박영일은 후에 이 편지를 보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육군사관학교에 임관, 준장으로 예편했다.
- 소설가 김별아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주인공으로 열애 (박열의 사랑) (2009) 라는 제목의 소설을 썼다.
- 유영식 감독의 영화 아나키스트(2000)의 세르게이(장동건)와 가네코(예지원)는 각각 박열 열사와 가네코 후미코를 모델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 박열의 인생을 내용으로 이준익이 감독하고 이제훈이 주연한 동명의 영화가 2017년 6월 28일에 개봉했다. 김별아의 소설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 2021년 동명의 뮤지컬이 초연했다.
- 사이비 종교 십계석국총회 출신이자 래퍼 출신인# 이슬람 근본주의 선교사 박동신이 자신이 독립운동가 박열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고 다니다가#1#2 진짜 박열의 후손들이 없는 사실을 왜 지어내냐고 항의하자 갑자기 자신은 그런 적이 없다고 발뺌하고 자신보고 박열의 후손이라고 한 사람들에게 고소를 걸겠다며 과민 반응을 보인 적이 있다.# 2009년에는 자신이 이명박과 뉴라이트의 타겟이 되어 협박 추궁을 당하고 있다는 주장을 한 것으로 보면# 그냥 생각 없는 사람이 허풍떠는 것으로 보인다.
- 2022년 3월 10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 '나는 승리자다 - 제국을 뒤흔든 사나이'라는 제하에 주인공으로 소개되었다. 이야기는 그가 3.1 운동 당시에 독립선언서를 나눠주는 장면에서부터 이야기가 진행되었으며 주제가 주제인 만큼 앞서 소개된 이제훈 주연의 영화 장면들도 자료화면으로 등장했고, 박열의사기념사업회 이문창 이사[25] 와 큰아들 박영일의 인터뷰도 함께 소개되었다. 또 방송 중간에 관동대학살에 대해서도 언급되었는데 박열의 생애와 관련된 중요한 사건이라는 점에 더해 안양시 소재의 초등학교 학생들이 꼬꼬무 제작진 앞으로 편지를 보내 방송을 통해서 관동대학살에 대해 꼭 자세히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26] #
5. 어록[편집]
세상에 어떠한 것이 정말로 무서워해야할 것 인가? 그것을 나는 놈들에게 보여줄것이다. 생각건대 그들이 내 목을 단두대에 걸 수 있을지언정 내 손으로 뿌린 씨앗을 태워 부술 순 없을것이다. 일본에게 입힌 상처를 낫게할 수는 없다. 내가 뿌린 씨앗은 후세에 남아 딱딱한 지각을 깨고 싹을 틔워 꽃을 피우고 그리고 종국에는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나는 승자다. 영원한 승리자다.
--알려진 명언중 가장 유명한 명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