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성

덤프버전 :

분류

파일:다른 뜻 아이콘.sv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동명이인에 대한 내용은 박지성(동명이인) 문서
박지성(동명이인)번 문단을
박지성(동명이인)#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이 문서는 나무위키의 이 토론에서 출생지를 서울로 출신지를 고흥군으로 서술하기(으)로 합의되었습니다.
타 위키에서의 합의내용이 더위키에서 강제되지는 않지만 문서를 편집하실때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
1 이범영 · 2 이용 · 3 최희원 · 4 오반석 · 6 최보경 · 7 한교원 · 8 정혁 · 9 벨트비크 · 10 무릴로 ·
11 조규성 · 13 김보경 · 14 이승기 · 15 구자룡 · 17 쿠니모토 · 18 나성은 · 19 박원재 · 20 이동국 ·
21 홍정남 · 22 김진수 · 23 윤지혁 · 24 김재석 · 25 최철순 · 26 홍정호 · 27 명세진 · 28 손준호 · 29 이성윤 ·
31 송범근 · 32 이주용 · 34 장윤호 · 51 김정훈 · 57 이수빈 · 77 이시헌 · 92 김민혁

파일:포르투갈 국기.png 주제 모라이스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김상식 ·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안재석 · 파일:포르투갈 국기.png 페드로 사라이바 페레이라 ·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박원재>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이광석 파일:브라질 국기.png 주앙 쿤햐 파일:남아프리카 공화국 국기.png 라스 벨트비크
* 이 표는 간소화된 버전입니다. 스쿼드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여기를 참고해주세요.
* 타 팀으로 임대 간 선수는 제외되었습니다.
* 전북 현대 모터스 스쿼드에 변동이 있으면 두 틀 모두를 수정해주세요.



박지성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박지성의 역임 직책

[ 펼치기 · 접기 ]

파일: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김남일
(2007~2008)

박지성
(2008~2011)


박주영
(2011)


박지성의 수상 이력

[ 펼치기 · 접기 ]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파일:대한축구협회 엠블럼.svg

파일:2011_아시안컵_로고.png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3px; border-radius: 2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20deg, #360B02 0%, #DF6100 50%, #FFF594); font-size: 0.9em"
2011 AFC 아시안컵 우수 선수




박지성의 기타 사항

[ 펼치기 · 접기 ]











전북 현대 모터스 테크니컬 디렉터
파일:전북 현대 모터스 영문 워드마크.svg

이름
박지성
朴智星 | Park Ji-sung

출생
1981년 3월 30일[조기입학] (43세)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1]
거주지
서울특별시
제주특별자치도
전라북도 전주시
영국 런던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신체
175cm[2], 72kg[3]
학력
신안초등학교[4] (전학)
산남초등학교 (전학)
세류초등학교 (졸업)
안용중학교 (졸업)
수원공업고등학교 (졸업)
명지대학교 예술체육대학 (체육학 / 학사)
명지대학교 일반대학원 (체육학 / 석사[5])
드몽포르 대학교 대학원 (스포츠경영학 / 석사 과정)
직업
축구 선수 (미드필더[6], 공격수[7] / 은퇴)
홍보 대사
축구 행정가
축구 해설가
소속
선수
교토 퍼플 상가 (2000~2003)
PSV 에인트호번 (2003~2005)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2005~2012)
퀸즈 파크 레인저스 FC (2012~2014)
PSV 에인트호번 (2013~2014 / 임대)
코치
퀸즈 파크 레인저스 FC U-16 (2021)[8]
행정
JS파운데이션 (2011~ / 이사장)
박지성축구클럽 (2011~ / 이사장)
대한축구협회 (2017~2018 / 유스전략본부장)
전북 현대 모터스 (2021~2022 / 어드바이저)
전북 현대 모터스 (2022~ / 테크니컬 디렉터)
해설
SBS (2018, 2022, 2023 / 해설 위원)
기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2015~2020 / 앰버서더)
국가대표
100경기 13골 (대한민국 / 2000~2011)
정보 더 보기 [ 펼치기 · 접기 ]
가족
아버지 박성종(1958년생)
어머니 장명자(1959년~2018년)[1]
배우자 김민지(2014년 7월 27일 결혼)
장녀 박연우(2015년 11월 19일생)
장남 박선우(2018년 2월 10일생)
본관
밀양 박씨 (密陽 朴氏)
주발
오른발(양발)[2]
등번호
대한민국 대표팀 - 21번[3], 14번, 7번
교토 퍼플 상가 - 12번, 7번
PSV 에인트호번 - 21번, 7번, 33번[4]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 13번
퀸즈 파크 레인저스 - 7번[5]
응원가
Pigbag - Papa's Got A Brand New Pigbag[6]
더 더블리너스 - Lord of the Dance[7]
빌리 레이 사이러스[8] - Achy Breaky Heart[9]
종교
불교[10]
MBTI
ISFJ[11]
서명
파일:박지성서명.png}}}


1. 개요
2. 행적 요약
3. 축구인 경력
3.1.1. 플레이 스타일
3.1.1.1. 전술적 가치 및 입지
3.2. 해설 경력
4. 기록
4.1. 대회 기록
4.2. 개인 수상
4.3. 수훈
4.4. 통산 기록
4.4.1. 클럽
4.4.2. 국가대표
4.4.3. 개인 기록
9. 응원가
9.1. Ji Sung Park (위송빠레)
9.3. Don't Sell My Park
10. 어록
12. 한국 축구계가 박지성을 외면했다?
12.1. 외면했다는 주장
12.2. 반박
12.3. 직접 밝힌 J리그로 간 사유
13. 논란 및 사건·사고
13.2. 백승호 이적 관련 오해
13.3. 유상철 조문 관련 여론 몰이 피해
13.4. 조규성 이적 관련 여론 몰이 피해
14. 여담
14.1. 열애설
14.2. 결혼
15. 관련 문서
1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 국적의 축구 선수 출신 행정가. 現 전북 현대 모터스 초대 테크니컬 디렉터. 선수 시절 포지션은 미드필더, 공격수.

2000년 일본 교토 퍼플 상가에서 프로로 데뷔한 이후, 네덜란드 PSV 에인트호번, 잉글랜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퀸즈 파크 레인저스에서 활약하였다. 이후 2014년 PSV로 돌아와 1년을 뛰고 무릎 부상 여파로 비교적 이른 나이에 은퇴했다. 국가대표로서는 2002 월드컵, 2006 월드컵, 2010 월드컵에서 활약했다.

은퇴 이후에는 JS파운데이션 이사장, 맨유 앰버서더 등으로 다년간 활동, 축구 행정가로도 경험을 쌓다 2021년부터는 K리그 전북 현대 모터스 구단의 어드바이저를 거쳐 테크니컬 디렉터로 활동 중이다. 동시에 런던의 QPR에서 U-16 코치도 겸하면서 코치 자격증을 따기 위한 연수도 하고 있다. [9]


2. 행적 요약[편집]


서울특별시 출생으로 관악구 신림동에 정착한 부모와 살았으나 태어난 지 몇 년 안 돼 아버지의 사정으로 부친의 고향인 전남 고흥군 점암면 신안리 775번지에서 자랐다. 그러다 초등학교[10] 3학년 때 수원시로 이사하여 수원 산남초등학교에서 축구를 시작했으나# 축구부 해체로 이후 세류초등학교로 전학갔다. 이후 안용중학교, 수원공업고등학교를 거쳐 1999년 명지대학교에 입학했고 명지대 2학년 재학 중이던 2000년 일본의 교토 퍼플 상가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입단 후 프로에 데뷔하게 된다.

국가대표 선수로서 박지성은 2000년 4월 5일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데뷔한 후 한동안 주전과 비주전을 오갔지만 히딩크호의 황금세대 중 한 명으로 활약하면서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 포르투갈전 후반 70분 극적인 결승골을 성공시켜 1:0 승리를 견인하는 등 2002년 대한민국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끌고 이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전으로 활약했다. 2006 FIFA 월드컵 독일에서는 준우승국 프랑스를 상대로 후반 81분 극적인 동점골을 성공시키며 대한민국을 패배 직전에서 구하고 프랑스에 무승부 승점 1점을 획득하고 토고전에서 승리하는데 기여하면서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최초의 월드컵 원정 첫승이라는 기록을 새로 썼고,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본선이 열리기 직전 한 언론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자신의 평생 꿈[11]은 "대한민국의 월드컵 원정 16강 진출"이라며 당찬 포부를 천명했고, 이후 국가대표팀의 주장으로 출전하면서 대회 32강 조별리그 본선 첫 경기 그리스전에서 쐐기골을 기록하는 등 자신의 평생 꿈이라고 밝혔던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최초의 월드컵 원정 16강 진출이라는 대기록을 이루어냈다. 2002년 월드컵 이전까지만해도 월드컵 역사상 조별리그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던 축구 불모지의 변방의 작은 아시아 국가[12]가 월드컵 4강(최종 4위), 원정 첫 승(최종 17위), 원정 16강(최종 15위)이라는 상상만 했던, 아니 어쩌면 상상하기도 힘들었던 기적을 내리 써내려 갔고, 이러한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라 불린 이 시기, 그 역사의 중심에는 단연 "영원한 캡틴" 박지성이 있었다. 박지성이 현역 은퇴를 결정한 2014년 여름 기준으로, 대한민국이 월드컵에서 거둔 5번의 승전에 모두 출장한 선수가 박지성이었다!

3개의 FIFA 월드컵 본선에서 모두 1골씩 득점하여 3연속 골을 기록한 아시아 최초의 선수이며, FIFA 월드컵 Man of the Match 총 4회로써 월드컵 역대 공동 7위이자 아시아 대륙 역대 최다 수상[13]의 기록을 갖고 있고, 대한민국 역대 FIFA 월드컵 본선 최다 승리[14]와 본선 최다 득점[15]기록 등의 커리어를 보유한 선수로 아시아와 대한민국 축구를 빛낸 전설적인 축구 선수다. 이러한 위대한 업적들을 이룩한 박지성을 두고 차범근은 "대한민국 축구사의 정점에 서 있는 존재"라고 평가했다.[16]2008년 10월부터 2011년 1월까지 2년 3개월 동안 대표팀 주장을 역임했으나 A매치 100번째 경기에 출장한 직후 만 29세의 나이에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다. 또한 히딩크호 23인 엔트리에선 차두리와 더불어 2002 월드컵 당시까지 K리그에 소속된 적이 없는 단 2명뿐인 멤버다. 다만 차두리는 10년 넘게 지난 뒤 FC 서울에 입단하여 2골을 넣었다. 따라서 히딩크호 선수 중 유일하게 K리그 출장경력이 없는 선수이기도 하다.

클럽 경력은 일본 교토 퍼플 상가에 입단한 이후 일본 1, 2부 리그에서 활약했다. 이후 월드컵을 거치며 거스 히딩크 전 감독에게 발탁되어 네덜란드 PSV 에인트호번로 이적했다. 네덜란드 시절 초기에는 부진과 리그 부적응이 겹쳐 부상 재활보다도 고통스러운 시절이었다고 회고할 정도로[17] 힘든 시기를 보냈지만, 곧 리그에 적응하고 주전 자리를 꿰차면서 팀의 리그 우승과 챔스 4강 달성에 기여한 뒤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이끌던 EPL의 명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로 이적하게 된다. Three Lungs Park[18], 빅게임 플레이어, 두 개의 심장, 아스날 킬러 등으로 불리며 자신의 축구 인생 전성기의 대부분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전성기 중 한 시기에 보태며 구단의 수 많은 우승에 일조했고, 이후 퀸즈 파크 레인저스 FCPSV 에인트호번을 거치며 2014년 5월 14일 공식 은퇴를 선언하였다.

대한민국 최초의 프리미어 리거[19]이자, 프리미어 리그 주장을 역임한 최초의 아시아인[20][21]이며, 아시아 선수로는 최초이자 최다 프리미어 리그 우승[22]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 선발 출전[23], 아시아 선수 최초이자 유일한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24]FIFA 클럽 월드컵[25]우승을 한 선수이고, 아시아 선수 최초로 UEFA 올해의 공격수 후보[26]UEFA 올해의 팀 후보[27]로 선정되었으며 발롱도르 후보 50인에도 선정된 축구 선수다.


3. 축구인 경력[편집]



3.1. 선수 경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박지성/선수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1.1. 플레이 스타일[편집]



가장 큰 장점은 뛰어난 체력과 이를 기반으로 하는 오프더볼 무브먼트, 높은 전술 이해도 이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선수 생활 동안 포지션 변화가 잦았다. 기량이 어중간했던 것은 절대 아니고 오히려 여러 포지션에서 훌륭한 기량을 선보였던 다재다능한 선수였기에 구단의 필요와 감독의 권유에 따라 여러 포지션을 거친 경우다. 교토 시절은 윙백, 히딩크호 국대 초기에는 수비형 중앙 미드필더, 2002 월드컵 직전 윙 포워드로 정착해 교토에서도 윙 포워드로 뛰었고 히딩크와 함께 넘어간 PSV 시절도 쭉 윙 포워드로 뛰었다. 코엘류호본프레레호, 아드보카트호에서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출전하는 빈도 수가 늘기 시작하더니 월드컵 본선에서는 다시 4-3-3의 윙 포워드로 뛰었다. 이후 허정무호가 출범하고는 4-4-2의 왼쪽 윙어와 공격형 미드필더로 많이 출전했다. 맨유에서는 4-4-2의 윙어를 가장 많이 소화했고 이따금씩 4-3-3의 윙 포워드로도 출전했다. 09/10 시즌에는 때때로 공격형 미드필더로 출전햇다. 말년으로 접어들수록 중앙으로 스위칭하는 움직임이 잦더니 맨유 말기와 QPR, PSV 에서는 중앙 미드필더와 윙어 번갈아가며 출전했다. 공격수라는 의견과 미드필더라는 의견이 자주 충돌하는데 공격 진영과 수비 진영 가릴 것 없이 뛰어다니는 스타일이며 본인이 가장 오랫동안 뛰었던 구단에서의 역할 또한 미드필더에 가깝고[28], 본인의 성향도 미드필더 성향이다.[29]

커리어를 통틀어 박지성의 장점은 왕성한 활동량과 전방압박, 뛰어난 수비력[30][31], 높은 공간 이해도와 박스 근처 짧은 패스를 통한 유연한 연계 및 오프더볼, 저돌적인 돌파에 이은 지능적인 파울 유도, 몸을 사리지 않는 적극적인 경합, 다양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유틸성[32]이라고 할 수 있다. PL 스탯을 기준으로[33] 박지성의 평균 90분당 태클 성공 횟수는 3회, 태클 성공률은 73%, 인터셉트 2회, 리커버리 4회, 지상 경합 성공률은 54%에 달하며[34], 이러한 수비적 능력을 통해 상대 중요 키플레이어를 맨마킹 해서 무력화 하거나[35], 상대 풀백의 공격력을 약화시키고 중원 싸움에 가담하며 팀에 보탬이 되어준다. 특히 태클 능력이 우수했는데, 후술할 장점인 활동량과 압박 능력이 더해져 시너지를 낸다. 풀타임 기준 평균 10~12km를 자랑하는 왕성한 활동량[36]을 바탕으로 전방에서부터 조여오는 숨막히는 공격적인 압박 축구(전방 압박)를 구사하며, 압박 타이밍이 좋아 높은 지점에서 인터셉트 하거나 드리블 하는 선수 시야 밖에서 나타나 인터셉트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박지성이 적극적으로 압박하는 상황은 대체로 대치하고 있는 상대 선수의 몸이 뒤쪽으로 향해있거나, 볼 줄기가 느려지거나, 볼이 어느팀의 것도 아닌 상태(루즈 볼)가 됐거나, 상대 선수가 공을 오래 소유하는 상황이거나, 본인이 공의 소유권을 잃은 상태일 때면 쏜살같이 달려와 바로 압박한다.[37] 높은 공간 이해도를 바탕으로 한 오프 더 볼 움직임으로 공격 상황 시 동료의 공간을 창출하거나 빈 공간에 직접 침투하며, 미드필드 싸움에선 아군의 패스 옵션을 제공해주고, 터치라인 부근에서 상대의 공격 시엔 예측을 통해 패스 길목을 사전에 차단해 버린다. 박지성의 공간 창출은 두가지 방법인데, 하나는 공이 없을 때의 움직임으로 상대 수비를 교란시켜 동료가 공을 받거나 침투할 공간을 만들거나 공을 소유할 시엔 상대가 자신에게 붙을 때까지 기다린 후 동료에게 패스를 건내 공간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공간 창출, 오프더볼 능력과 볼의 흐름을 살리는 짧은 패스를 통한 연계 능력이 시너지를 일으켜 본인이 중앙으로 움직임을 가져가며 박스 근처에 있는 동료 공격수나 터치라인 부근에서의 아군 풀백 혹은 중앙을 통한 원투패스를 통해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포지션이 좌, 우를 구분하지 않은데다 양발을 모두 사용하며 유틸성이 높아 다양한 역할을 수행할수 있어 때때로 공격형 미드필더, 중앙 미드필더로 출전하기도 하며 경기 중에 포지션 스위칭 또한 자주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본인이 압박을 당하는 중이거나 볼을 뺏길것 같을 시엔 지능적인 파울 유도 능력으로 어떻게든 공격권을 유지시킨다. 강팀과의 경기에서는 상대의 공격 기회가 늘어나는 만큼 공수 밸런스와 전술적인 움직임이 중요해지는데 이렇듯 윙어치고 중앙 지향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면서 뛰어난 수비력과 준수한 연계력, 많은 활동량과 움직임을 보여주는 장점으로 인해 박지성은 퍼거슨의 4-4-2 시스템에서 공수 밸런스를 맞추는데에 가장 적합하며 퍼거슨이 강팀과의 경기에서 자주 기용했던 이유이다.

박지성의 플레이 스타일을 두고 영국의 대형 정론지 중 하나인 더 가디언에서는 박지성을 두고 당시 새로운 유형의 윙어인 수비형 윙어[38]의 창시자라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관련 기사[39]

단점으로는 공격 전개 시 본인이 해결해야 할 상황에서는 파괴적인 모습을 보여주진 못했다. 나름 공격적 재능이 살아있었던 J리그에레디비시에서 조차 04-05 시즌을 제외하면 리그 공격포인트 10개를 넘기지 못했다. 박지성은 박스 안팎에서의 과감한 슈팅보다는 동료와의 짧은 패스 연계 플레이를 선호했고[40] 애초에 슈팅을 적극적으로 때리려는 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았고 슈팅을 때리더라도 결정력에서 문제가 있었다. 또한 좌우로 벌리거나 동료와의 연계를 통한 짧은 패스는 많이 나왔으나 전방을 향한 창조적인 스루패스나[41] 크로스는 자주 나오지 않았다. 프로 선수 생활 내내 박지성을 괴롭혔던 잦았던 부상들도 단점으로 꼽을 수 있는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시절 이러한 부상이 자주 발생하여 스쿼드에 포함시킬 수가 없는 상황이 종종 발생했다.[42] 맨유에서는 월드클래스 수준의 공격진과 함께해 자신의 장점을 유감없이 드러낼 수 있었지만, 팀적인 움직임보다 개인적 해결 능력이 중요했던 QPR에선 이런 단점들이 부각되었다.[43]

기본적인 주력은 무릎 부상 이전엔 상위권이었으나 무릎 부상 이후로는 평균적인 수준에 불과했고 피지컬은 에레디비시 시절부터 꾸준히 단점으로 지적되었으며 맨유 시절에는 어느 정도 강화되긴 했으나 좋다고 보긴 어려웠다. 게다가 바디 밸런스도 좋지 못해 넘어지는 상황이 잦았다. 키핑과 드리블이 단점이라고 꼽는 사람도 있지만, 공을 건네받아 안정적으로 넘기는 수준은 되고 동료를 이용한 탈압박 또한 나쁘지 않았다.

축구 지능, 수비 가담 및 활동량에서 강점을 보이고 돌파력과 크로스, 득점력에서 약점이 드러나는 박지성의 특징이 본인의 주 포지션인 윙어의 통상적인 역할과는 다른 느낌이고 이러한 유니크한 특성 때문인지 현역 시절 저평가를 받았던 것에 비해 은퇴 후 오히려 현재까지도 여러 매체나 함께했던 동료들이 언급하는 선수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는 클럽과는 조금 다른 역할을 수행했는데, 기본적으로 왕성한 활동량을 바탕으로 플레이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공격적인 측면에서 훨씬 더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2000년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크랙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다만, 박지성의 자서전에 따르면 맨유에서는 다른 선수들의 공격적 능력이 본인보다 더 뛰어났기 때문에 조연의 역할을 맡는 것이라고 했으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는 자신이 주연의 역할을 맡아야 하니 상반된 플레이 스타일을 가져가는 것이라고 언급했다.[44]


3.1.1.1. 전술적 가치 및 입지[편집]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이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교토 퍼플 상가 시절에서는 거의 붙박이 주전으로 출전했다. PSV 에인트호번 시절에는 초반에는 부상보다 힘들었다고 말했을 정도로 힘겨운 시기가 있었지만, 적응한 후에는 거의 풀타임 주전으로 출장했다.[45] 당시의 플레이 스타일은 공격과 수비 모두에서 움직임이 왕성하고 역동적이었다. 공격 시에는 빠른 스피드와 침투 능력을 이용해 자신에게 볼이 오지 않아도 언제나 공간을 찾아 움직였고 수비 시에는 전방부터 압박을 전개하고 윙백과의 뛰어난 협력 플레이를 보여줬다.

가장 명성을 떨치고 오래 몸담았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에서는 로테이션 멤버로서[46]공격과 수비에서 공헌하였으며, 중요 경기에서는 맨마킹 등의 전술적인 임무를 부여받기도 하였다. 박지성이 현역 선수로 활동하던 시기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프리미어 리그를 넘어 유럽과 전세계를 호령하던 가장 수준 높은 구단[47]이었으며 매 시즌 타 구단보다 컵대회를 훨씬 많이 치르는 트레블 목표의 우승권 빅클럽이었기 때문에[48] 체력소모가 극심한 미드필더진의 로테이션은 필수였기도 하고,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핵심 주전급 선수[49] 몇몇을 제외하고 특히 미드필더진의 로테이션 시스템을 고집하곤 했다.[50][51] 박지성이 활약한 2005/06~2011/12 시즌 이 기간동안 매 시즌 맨유의 미드필더진 부동의 주전자리를 꿰찼던 선수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마이클 캐릭정도였고 출전시간이나 출전경기 숫자에 약간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루이스 나니, 대런 플레처, 안데르송은 물론이고 안토니오 발렌시아[52]나 노쇠화된 라이언 긱스폴 스콜스도 이 시기엔 미드필더진의 로테이션 멤버로서 활약했다.[53] 박지성의 경우엔 전술상 필요한 경기, 특히 수비를 두텁게 가져가야 하는 강팀과의 경기에서 자주 선발로 출전했다.[54] 특이한 점은 통상적으로 리그 출장률이 낮거나 로테이션 멤버로 사용되면 챔피언스리그 토너먼트나 컵 결승전 같은 큰 대회에서는 배제되기 마련인데, 박지성 같은 경우는 오히려 부상 여파와 더불어 플레이 스타일 때문인지 리그 출장률이 낮지만 중요 경기에는 해가 지날수록 웬만하면 선발출장을 기록했다. 또한 출장률 자체는 높지 않지만, 출장하는 경우 대부분은 선발출전을 기록한 점이 특이한 부분이다.

여담으로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2012-13 시즌 박지성이 퀸즈 파크 레인저스 FC로의 이적이 확정되고 팀을 떠날 때 그에게 편지 한통을 작성했는데 그 내용에 2007년 심각한 무릎 수술[55]을 한 박지성의 무릎 부상을 늘 염두에 뒀기 때문에 박지성이 원하는 출전시간을 못 채워줘 미안하며 충성심있고 열심히 뛰어줘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

맨유의 레전드인 폴 스콜스는 박지성의 맨마킹 능력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스콜스는 "훈련장에서 최악의 선수가 누군지 아는가. 박지성이다. 정말 악몽이었다. 나를 마크할 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옆에 붙어 다녔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뛰어났다"라고 말했다. 이어 "박지성이 피를로를 상대한 일을 기억하는가? 정말 비현실적이었다. 하루 종일 체력을 유지했다"라고 언급했다.

당시 똑같은 측면 미드필더로 활약하던 안토니오 발렌시아는 박지성만큼의 태클과 마킹 능력을 가지진 못했지만 박지성만큼의 수비가담과 활동량을 가졌고, 더욱 빠른 스피드/뛰어난 크로스 능력으로 공격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였다. 이 두 명의 측면 미드필더 조합은 10-11 시즌 맨유가 강팀과의 대결에서 계속 이길 수 있었던 이유이며 언론에서도 이를 지적한 바 있다. 퍼거슨은 보통 오른쪽에 발렌시아를 배치하고 그 뒤를 수비적인 풀백을 기용해서 발렌시아의 적당한 수비가담과 뛰어난 공격능력을 부각시켰고 왼쪽에는 공격능력이 뛰어난 에브라를 배치시켜서 박지성의 공격력 부족을 메꾸고 에브라가 올라간 빈공간 커버를 박지성에게 시켰다. 강팀 상대로는 이게 황금 밸런스지만 약팀을 상대로는 수비력에 덜 신경써도 되고 공격력을 끌어올려야되기 때문에 박지성보다 훨씬 공격적인 나니가 기용되었던 이유기도 하다. 현대축구에서 윙어는 단순히 측면공격 뿐 아닌 적의 측면 공격을 차단하는 역할도 겸하는데다 한쪽 측면이 공격을 나가면 다른 한쪽 측면은 포지션을 지키며 2선 라인을 조율하는 편이 안정적이다.[56] PSV 시절 04/05 챔피언스리그에서 이러한 능력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전 시즌 챔스 준우승팀이었던 모나코와의 16강 경기에서 에브라를 발랐고 리옹전에서도 이영표와 협력으로 좌측을 밀어버렸다.[57] 특히 4강인 AC 밀란전에서 혼자서 한쪽 측면을 휘젓다시피 하면서 1인 압박축구를 펼친 장면은 유명하다. 2009년 5월 5일 아스날 FC와의 UEFA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 2차전에선 아스날의 측면 공격수 시오 월콧을 경기장에서 지워버렸는데 그 날 월콧은 평점 4점을 받았다.

맨유 시절 박지성이 강팀과의 경기에 많이 나온 이유가 이것이다. 강팀들끼리 붙을 때는 약팀이랑 할 때와는 다르게 개인 능력으로 찍어누르는 플레이를 할 수 없고 더 강한 팀과 할 때는 더더욱 그럴 수 없다. 결국 전술적이고 팀플레이로서 평가되는 요인들이 경기에 큰 영향을 끼치게 돼있으므로, 맨유 공격루트에 많은 옵션을 제공하고 전술적으로 다양한 역할을 소화할 수 있는 박지성을 출전시키는 것이다. 박지성은 이런 팀의 의도에 잘 부응하며 좋은 경기를 펼치는 경우가 많았다. 박지성이 이런 역할을 통해 승리에 크게 기여한 경기들은 대표적으로 2008년 UCL 4강 바르셀로나전, 2009년 UCL 4강 2차전 아스날전, 2010년 UCL 16강 AC밀란전[58], 2011년 UCL 8강 첼시전, 10-11 EPL 리그 후반기 첼시전 등이 있다. 역설적으로 부족한 공격력 때문에 상대적 약팀과의 대결에는 기용 1순위가 아니었다.[59]

하지만 이런 역할로 나왔음에도 부진한 경기도 있었다. PL 2011-12 시즌 후반기 맨시티전이 대표적인 사례. 퍼거슨 감독의 자서전을 보면 맨시티전에서 야야 투레를 봉쇄시키기 위해 박지성을 출장시켰다. 퍼거슨 감독은 박지성의 '사냥감을 쫓아다니는(marauding run)' 능력이 필요했다고 서술했다. 하지만 박지성은 맨시티의 공격을 어떻게든 틀어막는 데는 성공했으나 공격적인 기여를 전혀 하지 못했고 결국 코너킥 상황에서 콤파니에게 단 한 골을 허용하여 우승을 놓쳤다. 이 경기가 끝나고 해외 언론의 혹평이 쏟아지기도 했다.[60][61]

2010년 이후 축구 전술에서 각광받는 게겐프레싱, 두줄수비 등 윙어라도 수비가담을 안하면 욕먹는 전술들이 트렌드화 되고 또한 2010년대 중반 이후 3백 전술이 큰 유행을 하게 되면서 왕성한 활동량과 수비 공격에 다재다능한 윙백에 대한 주목도가 올라가자 많은 축구 팬들은 박지성을 다시금 한번 떠올렸다. 현지에서도 박지성과 퍼거슨의 은퇴 후 여러 호사가, 전문가가 박지성 같은 좋은 수비 가담과 높은 전술적 이해도를 가진 선수가 지금의 맨유에게 필요하다고 말한다.[62][63]


3.2. 해설 경력[편집]



파일:20191214_215358.jpg

2018 러시아 월드컵 시기에 SBS 해설 위원으로 활동하던 박지성의 모습.

2015-16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객원 해설 위원으로서 잠깐이나마 해설 데뷔를 했다. 다만 처음이다 보니 그다지 좋지 못한 평가를 받았었다.[64]

이후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 SBS의 정식 해설 위원으로 발탁 받면서 본격적인 해설 데뷔를 하게 된다. 개막전인 러시아와 사우디와의 경기에서 처음 선보인 해설자 박지성은 초반엔 좋지 않았지만 점점 나아지는 모습을 보였다.

처음엔 "목소리가 너무 하이톤이다", "해설에서 기자회견 때에 말하는 것과 똑같이 뭔가 건성건성으로 말하는 간신같은 말투가 답답하다", "생각보다 재미가 없다", "너무 무난하다" 라는 의견이 많았다. 특히 발성에 대한 지적이 대다수였다. 박지성에 대한 팬심으로 SBS를 틀었으나 목소리 때문에 견디지 못하고 다른 채널로 돌렸다는 말이 꽤 많이 보였다. 박지성 본인도 아직 마이크 앞에서 자신의 목소리가 어떻게 들리는지, 어떻게 발성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은 것도 있다.

이후 피드백을 받으면서 다음 경기에 개선된 모습을 보여주면서 우려를 불식시켰다. 배성재의 도움이 있었는지 처음에 지나치게 너무 떠버린 목소리가 많이 안정되고 단단한 목소리로 변했다. 특히 축구 선수로서 정점의 커리어에 있던 사람인지라 중간중간 풀어놓는 이야기, 파울 시비에서도 한 걸음 물러나는 다른 해설진들과 다르게 단호하게 "맞다, 아니다." 짚어주는 모습이 신선했고, 다른 두 방송사 해설 위원이 다소 언행이 차분하지 못했던 면과 비교되어 선수들이 부진했어도 '아쉽다', '한국 축구 전체 책임이다' 정도에서 끝내는 정도로 참았다. 2인 해설의 한계상 장지현같은 정보력 포지션의 비선출 해설자가 붙어서 시너지를 내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데 하는 의견들도 많지만 다른 경기를 해설해야 하는 장지현의 스케줄상 아무래도 어렵다. 결과적으로 첫 해설 치고는 잘했다는 평이다. "어떤"이라는 단어를 중간중간에 너무 많이 쓴다는 지적도 있었는데 다음에 해설할 때는 모니터에 포스트잇으로 "어떤"을 써놓고 가위표를 쳐놔서 스스로 피드백을 수용하는 모습을 보여서 화제가 됐다.

어록 항목에 나와 있는 것과 같이 2018 러시아 월드컵 F조 경기: 멕시코 vs 독일에서 독일의 이뭐병스러운 경기 능력을 보고 나서는 아무 망설임 없이 "비벼볼 만합니다"라는 발언을 해서 사람들이 '제 아무리 박지성이라지만 더위 먹고 실성한 게 아닌가'라는 평가마저 받았는데 결국 대한민국 vs 독일에서 대한민국이 독일을 정말로 싹싹 비벼버리는 사태가 벌어져 버렸고 그 결과 박지성의 통찰력에 사람들이 감탄했다.

대한민국의 조별 리그 세 경기가 끝난 뒤 육아 휴가 차원에서 영국 런던의 자택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후에 준결승전부터는 다시 러시아로 와서 중계를 마무리지었으며 2018년 8월에 있을 자카르타 아시안게임 해설은 안 한다고 밝혔다.

그 이후 SBS에서 축구를 중계할 때에는 장지현이 계속 하다 보니 앞으로도 SBS 축구 해설 위원으로 있을지는 예측 불가다. 또한 박지성이 SBS를 선택했던 이유도 기존에 친분이 있었던 배성재 아나운서의 권유와 설득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현재는 SBS를 떠나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중이라 박지성이 굳이 SBS에서 축구 해설 위원을 할 이유도 없어졌다. 그러나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도 배성재 캐스터와 함께할 해설진에 합류하는 것이 배성재의 텐 방송에서 언급됐다.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는 전반적으로 이전 월드컵 대비 목소리가 굉장히 차분해지고 안정적인 발성으로 변화하며 호평이 많아졌다. 4년 전 대회에서도 경기 흐름을 읽는 능력이나 전문성 측면에서는 선수 출신 해설자들 가운데서는 이영표 해설 위원을 제외하면 그래도 가장 좋은 평이 많았는데 기존 약점이던 발성까지 고치고 나오면서 이영표가 해설을 하지 않는 현재 선출 해설자 중에서는 종합적으로는 가장 좋은 평가를 듣고 있다.

2023 여자 월드컵에서도 해설 위원으로 활동하게 되면서 경력 처음으로 여자 축구 해설을 맡았다.

이후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65] 남자 축구에서도 해설 위원으로 활동했다.


4. 기록[편집]



4.1. 대회 기록[편집]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2005~2012)
    • 프리미어 리그: 2006-07, 2007-08, 2008-09, 2010-11
    • 풋볼 리그 컵: 2005-06, 2008-09, 2009-10
    • FA 커뮤니티 실드: 2007, 2008, 2010, 2011[66]
    • UEFA 챔피언스 리그: 2007-08
    • FIFA 클럽 월드컵: 2008




4.2. 개인 수상[편집]




이 문서는 나무위키의 이 토론에서 개인 수상 문단에 UEFA 올해의 공격수 후보ㆍUEFA 올해의 팀 후보ㆍMLS 올스타전 MVPㆍK리그 올스타전 MVP를 존치하기(으)로 합의되었습니다.
타 위키에서의 합의내용이 더위키에서 강제되지는 않지만 문서를 편집하실때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발롱도르 후보: 2005[67][68]#
  • UEFA 올해의 공격수 후보: 2004-05[69] ###
  • UEFA 올해의 팀 후보: 2005 (LM 3위)[70] ###
  • FIFA 월드컵 마스터카드 올스타팀[71]: 2002 #
  • FIFA 월드컵 원더풀 골 베스트 8: 2018[72] #
  • FIFA 올해의 최우수 아시아 선수: 2008[73] #
  • AFC 아시아 역대 최고 월드컵 영웅: 2020 (1위)[74] #
  • AFC 아시아 월드컵 올타임 XI: 2020[75] #
  • AFC 아시안컵 우수 선수 4인: 2011[76] #
  • AFC 아시안컵 올타임 드림 XI: 2023[77]
  • J리그 디비전 1 올스타: 2002 #
  • J리그 디비전 1 올해의 우수 선수: 2002 #
  • K리그 올스타전 MVP: 2014 #
  • KFA 올해의 선수: 2010[78]
  • KFA 올해의 골: 2002, 2010[79]
  • MLS 올스타전 MVP: 2011 #
  • PSV 에인트호번 100년사 구단 레전드: 2013[80] #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이달의 선수: 2009년 03월, 2010년 11월ㆍ12월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역대 월드 베스트 XI: 2021[81][82] #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역대 저평가된 베스트 XI: 2020[83] #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역대 언성히어로: 2020[84] #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위대한 국가대표: 2013[85] #
  • 슈퍼매거진 슈퍼어워드 올해의 아시아 축구 선수상: 2008 #
  • IFFHS 올타임 아시아 드림팀: 2021 #


4.3. 수훈[편집]




4.4. 통산 기록[편집]



4.4.1. 클럽[편집]


시즌

소속 리그
리그
FA컵
리그컵
대륙 대항전
기타
총합
경기

도움
경기

도움
경기

도움
경기

도움
경기

도움
경기

도움
2000
교토 퍼플 상가
J리그 디비전 1
13
1
0
1
0
0
2
0
0
-
-
-
-
-
-
16
1
0
2001
J리그 디비전 2
38
3
0
1
0
0
1
0
0
-
-
-
-
-
-
40
3
0
2002
J리그 디비전 1
25
7
0
4
1
0
-
-
-
-
-
-
-
-
-
29
8
0
3시즌
합계
76
11
0
6
1
0
3
0
0
-
-
-
-
-
-
85
12
0
시즌

소속 리그
리그
FA컵
리그컵
대륙 대항전 [86]
기타 [87]
총합
경기

도움
경기

도움
경기

도움
경기

도움
경기

도움
경기

도움
02-03
PSV 에인트호번
에레디비시
8
0
0
-
-
-
-
-
-
-
-
-
-
-
-
8
0
0
03-04
28
6
2
1
0
0
-
-
-
10
0
2
1
0
0
40
6
4
04-05
28
7
5
3
2
0
-
-
-
13
2
2
-
-
-
44
11
7
3시즌
합계
64
13
7
4
2
0
-
-
-
23
2
4
1
0
0
92
17
11
시즌

소속 리그
리그
FA컵
리그컵
대륙 대항전 [88]
기타 [89]
총합
경기

도움
경기

도움
경기

도움
경기

도움
경기

도움
경기

도움
05-06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프리미어 리그
34
1
8
2
0
0
3
1
0
6
0
0
-
-
-
45
2
8
06-07
14
5
2
5
0
0
-
-
-
1
0
0
-
-
-
20
5
2
07-08
12
1
1
2
0
0
-
-
-
4
0
1
-
-
-
18
1
2
08-09
25
2
2
3
1
0
1
0
0
9
1
0
2
0
0
40
4
2
09-10
17
3
1
-
-
-
2
0
0
6
1
0
1
0
0
26
4
1
10-11
15
5
3
1
0
0
2
2
2
9
1
1
1
0
0
28
8
6
11-12
17
2
1
1
1
0
3
0
3
7
0
0
-
-
-
28
3
4
7시즌
합계
134
19
18
14
2
0
11
3
5
42
3
2
4
0
0
205
27
25
시즌

소속 리그
리그
FA컵
리그컵
대륙 대항전
기타
총합
경기

도움
경기

도움
경기

도움
경기

도움
경기

도움
경기

도움
12-13
퀸즈 파크 레인저스 FC
프리미어 리그
20
0
3
2
0
1
3
0
0
-
-
-
-
-
-
25
0
4
1시즌
합계
20
0
3
2
0
1
3
0
0
-
-
-
-
-
-
25
0
4
시즌

소속 리그
리그
FA컵
리그컵
대륙 대항전 [90]
기타
총합
경기

도움
경기

도움
경기

도움
경기

도움
경기

도움
경기

도움
13-14
PSV 에인트호번
(임대)
에레디비시
23
2
5
-
-
-
-
-
-
4
0
0
-
-
-
27
2
5
1시즌
합계
23
2
3
-
-
-
-
-
-
4
0
0
-
-
-
27
2
5
통산
317
45
32
26
5
1
17
3
5
69
5
6
5
0
0
434
58
45


4.4.2. 국가대표[편집]


  • 출전 기록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9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b71d27 0%, #FF2E3C 20%, #FF2E3C 80%, #b71d27)"
소속 대표팀 }}} ||
연령
[조기입학] 음력 2월 25일. 주민등록증에는 양력 2월 25일로 되어 있다. 1987년 3월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호적상으로는 만 6세 정상 입학이지만 실질적으로 만 5세에 조기 입학한 셈이다.[1] 출생지는 서울특별시이고 출신지는 고흥군이다. 학창 시절은 경기도 남부(주로 수원시)에서 보냈다. 본인은 고흥군과 수원시 양쪽을 고향으로 여기며 때문에 고흥군과 수원시 양쪽에 박지성 이름을 딴 체육 시설이 있다.[2] 프리미어 리그 공식 웹 사이트상 프로필 다만 박지성은 2008년에 자신의 실제 신장이 178cm라고 밝힌 바 있고 월드컵 중계 화면에도 178cm로 나왔다. 관련 기사 그 후 차범근과의 동반 인터뷰 때는 자신의 신장이 프로필(178cm)보다는 작다고 말하기도 했다. 관련 기사[3] 선수 시절 기준으로 현재는 약간 줄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운동선수는 대체로 은퇴 후 운동량이 급격하게 줄어들어 체중이 증가하는 경우가 많지만 박지성은 오히려 체중이 감소한 다소 특이한 경우다. 지금까지도 자기 관리를 매우 성실히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4] 1996년 3월 1일 점암초등학교 신안분교로 전환, 2019년 8월 31일 폐교.[5] 석사 학위 논문: 한국 유소년 축구의 발전을 위한 방향제시 : 문헌조사와 사례분석에 기초하여(2012. 2).[6] 박지성의 주 포지션. 좌우를 가리지 않았으며 교토 퍼플 상가 초창기 시절 중앙 미드필더로 뛰다가 월드컵 이후 윙어(LM)로 뛰었고 PSV 에인트호번 시절에는 주로 윙 포워드로 출전했으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로 이적한 후에는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활약했지만 주로 4-4-2 윙어(LM)로 뛰었다.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종종 4-3-3 포메이션을 사용할 때면 윙 포워드로 출전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도 주로 윙어공격형 미드필더로 출전했다.[7] 중앙 공격수 즉 최전방 스트라이커를 제외하고 세컨드 스트라이커와 윙 포워드 포지션도 수행했다.[8] B급 라이센스 취득을 위해 잠시 활동[9] 14분 15초부터.[10] 박지성이 다녔던 신안초등학교는 점암초등학교의 분교장으로 강등되었다가 2019년에 폐교되었다.[11] 관련기사[12] 출처[13] 2002년 포르투갈, 2006년 프랑스, 2010년 그리스와 나이지리아를 상대로 선정되었으며 혼다 케이스케와 공동 1위 기록이다. 랭킹[14] 5승. 02 월드컵 8강 스페인전은 승부차기 승리이기 때문에 전적상으로 무승부다.[15] 3골로 안정환, 손흥민과 타이 기록.[16] 출처[17] 오죽하면 홈팬들마저 자기가 출장하면 야유를 보낼 정도라 히딩크 감독이 원정경기에서만 출전시킬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돌아갈까도 수차례 생각했지만, 이대로 포기할 순 없다고 다짐하면서 하나하나 다시 쌓아올렸다고 하며 이후 부진을 극복하자 홈팬들부터 환영했다고 한다.[18] 세 개의 폐[19] 1호 박지성(2005, 맨유 이적), 2호 이영표(2005, 토트넘 이적), 3호 설기현(2006, 레딩 승격 이적), 4호 이동국(2007, 미들스보로 이적), 5호 김두현(2009, WBA 승격), 6호 조원희(2009, 위건 이적), 7호 이청용(2009, 볼턴 이적), 8호 지동원(2011, 선더랜드 이적), 9호 박주영(2011, 아스날 이적), 10호 기성용(2012, 스완지 이적), 11호 김보경(2013, 카디프 승격), 12호 윤석영 (2013, 퀸즈 파크 레인저스 이적), 13호 손흥민 (2015, 토트넘 이적), 14호 황희찬 (2021, 울버햄튼 이적). 참고로 설기현이 2004년 오프시즌에 RSC 안데를레흐트에서 디비전1 울버햄튼 원더러스 FC로 이적하여 잉글랜드 리그에서 먼저 뛰긴 했으나, 승격은 레딩으로 이적하면서 하게 된다.[20]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퀸즈 파크 레인저스 FC[21] 관련기사[22] 2006-07, 2007-08, 2008-09, 2010-11[23] 2008-09, 2010-11[24] 2007-08[25] 2007-08[26] 2004-05 시즌 호나우지뉴, 안드리 셰브첸코, 아드리아누, 사무엘 에투와 함께 UEFA 올해의 공격수 후보 5인에 선정되면서 아시아 선수 최초이자 유일하게 UEFA 클럽 풋볼 어워드 최종 후보에 올랐다. 수상자는 호나우지뉴.##[27] UEFA 올해의 팀 후보 55인에 든 최초의 아시아 선수가 되었다. 그 중 왼쪽 미드필더 부문 5인에 올랐으며 투표 결과는 수상자 파벨 네드베드 (29.10%)와 아르연 로번 (27.94%)에 이은 3위 (22.61%)였다. 베스트 11으로 팀을 나눌 때 3군에 들어간 셈이다.# # 미국스포츠식 개념으로 치면 UEFA 서드팀에 들어갈 성적이었던 것.[28] 실제로 프리미어리그의 공식 웹 사이트를 살펴 봐도 박지성은 미드필더로 소개되고 있으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공식 SNS를 통해 소개할 때도 늘 미드필더로 소개한다. 프리미어 리그 공식 홈페이지[29] 본인의 자서전에서 공격수는 골을 넣는 것이 목표라면 미드필더는 골을 넣기까지의 과정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생각하고 본인은 후자의 목표를 가지고 게임에 임한다고 언급한다.[30] 대인방어(맨마킹), 태클, 리커버리, 인터셉트, 볼 경합[31] 관련기사 1, 관련기사 2, 관련기사 3, 관련기사 4[32] 감독들 입장에서는 포지션 당 주전 1명과 백업 1명을 가지고 있는 입장에 이러한 유틸성 자원이 있으면 굉장히 유용한 자원으로 사용할수 있다.[33] PL 공식 사이트에서는 05/06 시즌의 세부스탯이 표기되지 않는다. 따라서 05/06시즌은 제외하고 계산했다.[34] 포지션 경쟁자였던 나니는 리커버리는 박지성보다 높지만 볼 경합과 태클, 인터셉트에서 완전히 밀린다. 물론 나니는 박지성과는 플레이스타일과 역할이 완전히 반대라고 볼 수 있는 선수다. 박지성이 수비와 전술적 밸런스 유지에 치중하는 스타일이라면 나니는 박지성보다 훨씬 공격적이고 뛰어난 볼컨트롤 스킬을 활용해서 상대 수비진을 흔들고 직접 득점에도 가담하는 스타일이다.[35] 대표적인 예로 2009-10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전에서 박지성이 안드레아 피를로를 대인방어 하면서 피를로의 경기당 평균 79회의 패스 시도가 25회로 줄었을 정도로 경기장에서 아예 지워져 버렸다.[36] #[37] 박지성의 활동량이 높긴 하지만 최정상급은 아님에도, 이러한 압박 능력과 후술할 오프 더 볼 능력으로 끊임없이 움직이며 스프린트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경기장 안에서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인다는 인상을 받게 한다.[38] 동 시대에 수비형 윙어로서의 특징을 갖고있는 선수는 박지성 이외에도 대표적으로 디르크 카윗을 들 수 있다. 다만 박지성과는 다르게 디르크 카윗은 본래 스트라이커였다가 윙어로 포지션을 옮긴 경우고 정통 오른쪽 윙 포워드라는 점에서 약간의 위치 차이는 있다. 이전과는 달리 윙포워드나 측면 미드필더, 심지어는 스트라이커에게도 수비 가담이 강제되는 시대가 도래하면서, 박지성의 플레이 스타일은 현재도 영국 언론 매체들 사이에서는 자주 회자되곤 한다. 관련 기사[39] 디르크 카윗은 원래 네덜란드 리그 득점왕이자, 네덜란드 리그 최고의 공격수라는 점에서 PL에 영입된 동기가 박지성과는 다소 다르다. 리버풀은 스코어러로서의 카윗을 기대했지만 카윗은 PL에서 네덜란드 리그에서 만큼의 득점력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카윗은 강력한 체력과 헌신적이고 왕성한 활동량으로 리버풀의 주축이 된 선수다.[40] 물론 이런 플레이에는 당시 퍼거슨 감독의 패스 앤 무브라는 전술방식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이고, 박지성 자체가 한경기에서 슈팅을 아예 때리지 않거나 평균적으로 1회정도만 한다.[41] 실제로 박지성의 빅 찬스 생성이나 스루 볼 스탯은 좋은 편이 아니다.[42] 박지성은 말년을 제외하고 4시즌을 부상+A매치 기간을 합산해서 연속적으로 10경기 이상 제외된 경기가 4시즌이나 된다. 06-07 시즌에는 개막전부터 잘 출전하다가 토트넘전에서 부상 당하여 3개월 연속 무릎 부상으로 이탈했고(5R~17R 연속 결장) 그 후 31라운드 블랙번전 이후 시즌 아웃을 당해서 부상으로 리그 경기 명단 제외만 20경기 정도된다. 그 후 07-08 19라운드 선더랜드전에 복귀하였고, 09-10시즌에도 독감->세네갈전 이후 부상으로 5경기 연속결장->회복 후 세르비아 A매치를 치뤘고(리그 8경기 연속, 챔스 2경기 명단제외) 10-11 시즌에는 아시안컵 이후 햄스트링 부상을 당한 후 96일만에 복귀하였다.(리그 10경기 연속, 챔스 2경기 명단제외)[43] PSV 시절에는 주력도 나쁘지 않았고, 개인 기술도 어느정도 갖춘 박지성이었으나 박지성은 아무래도 팀원을 보조하고 받쳐주는데 특화된 유형인 선수라 혼자서 상대 수비진을 돌파해내거나, 전략적인 볼 호깅으로 상대의 압박을 유도해서 상대 중원을 비워놓을 만큼의 볼 키핑, 탈압박 능력을 갖추지는 못했다. 높은 성공률의 중장거리 킥을 가지지도, 플레이메이킹 능력도 가지지 못한 박지성이었다. 그렇기에 이미 폼이 떨어진 상태에서 하위권 팀인 QPR에서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줄 수 밖에 없었다.[44] 물론 당연히 한국 대표팀의 중심이었고 최고의 선수였지만 어디까지나 맨유에서에 비해 좀더 공격적인 역할을 가져갔던 것이지 혼자서 공격을 진두지휘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공격수인 박주영, 안정환, 이천수, 설기현 등의 득점력도 살아있었고, 미드필더진엔 공수겸장의 김정우, 강력한 수비력의 수비형 미드필더인 김상식, 조원희가 있었다. 또 당시 한국 축구 최고의 라이징 스타였던 기성용, 구자철, 이청용도 있었고 박지성 국가대표 말기엔 손흥민도 있었다.[45] 02-03 시즌 8경기 319분
03-04시즌 40경기 2,717분
04-05시즌 44경기 3,877분을 소화했다.
[46] 맨유에서의 7시즌간 평균적으로 14~15위권의 출전 시간을 보장 받았으며 출전 시간이 2000분을 넘긴 시즌은 2005/06, 2008/09, 2010/11 시즌으로 3개 시즌이다. 2008/09 시즌과 2010/11 시즌에는 챔피언스 리그 결승 선발 출전 및 프리미어 리그에서의 활약 또한 두드러진데다 팀도 프리미어 리그에서 우승하는 최고의 시즌을 보냈고, 2005/06 시즌은 본인이 가장 많이 출전했지만 팀은 칼링컵 우승과 프리미어 리그 2위에 만족해야만 했다. 2006/07, 2007/08 시즌은 발목 인대 파열(2006년 9월 10일 토트넘전 왼쪽 발목 부상으로 동월 14일 수술을 진행했고 동년 12월 18일에 복귀전을 치르면서 약 3개월 결장관련기사)및 심각한 무릎 부상(2006-07 시즌 3월 31일 시즌아웃 이후 동년 4월 28일 수술 사이 약 한 달 결장)과 그로 인한 수술(4월 28일 수술 이후 동년 12월 27일 선덜랜드 원정경기 복귀까지 약 8개월 결장관련기사)로 인해 도합 약 12개월 이상을 날려 많은 출전을 하지 못했으나 각각 출전시간 대비 높은 공격포인트, 챔피언스 리그 맹활약 등의 성과가 있었다. 2009/10 시즌은 2009년 10월 14일 대한민국 대표팀과 세네갈과의 평가전에 풀타임 출전 이후 수술받은 무릎에 물이 차오르는 부상(관련기사)으로 인해 초중반 10여 경기 연속 출전 기회를 놓치다가 챔피언스 리그에서 AC밀란을 맞아 안드레아 피를로를 경기장에서 지워버리는 등 좋은 활약을 펼쳤다. 다만, 2011/12 시즌은 애슐리 영과 나니, 발렌시아에게 밀려 경기에 많이 출전하지 못했다. 당시 맨유에서 부상없이 3경기 이상 연속 결장한 것은 처음이었으며 이때 부상없이 5경기 연속 결장하게 된 것이 선수로서 힘든 일이었고 맨유에서의 생활이 끝났다는 신호였다고 밝히며 이적을 결심하게 된 결정타였다고 회고했다.관련기사, 박지성 주요 부상 기록 관련 기사[47] 출처[48] 박지성이 현역으로 활약한 2005-06 시즌~2011-12 시즌 총 7시즌 동안 3번의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올라갔고 1회 우승하였으며, 프리미어리그 우승은 4회를 했고 2위를 3회 달성했다. 7시즌동안 단 한번도 2위 밑으로는 내려가본 적도 없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구단이었으며, 애초에 매 시즌 리그 우승을 하지 못하면 욕 먹는 팀이 이 당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였다.[49] 웨인 루니,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마이클 캐릭, 파트리스 에브라, 리오 퍼디난드, 네마냐 비디치, 에드윈 반 데 사르 등[50] 관련 기사 1, 관련 기사 2, 관련 기사 3, 관련 기사 4[51] 박지성 또한 겉으로 이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아버지 박성종 씨에게는 '그 양반은 늘 그래요' 정도로 푸념을 하곤 했다고 한다[52] 2010/11 시즌 발목 골절 부상[53] 유럽을 호령하던 맨유 마지막 전성기라고 불렸던 2006-07~2010-11 시즌 맨유 주요 스쿼드 멤버로는 반데사르 , 에브라 , 비디치 , 퍼디난드 , 네빌(은퇴 후 하파엘), 브라운, 호날두(이적 후 발렌시아), 긱스 , 나니 , 캐릭 , 스콜스 , 플레처 , 안데르송 , 오셔 , 루니 , 테베즈(이적 후 베르바토프 + 치차리토) 여기에 박지성이며 평균 14~15위권의 출전시간이라는 것은 이 당시 맨유라는 팀에서 스쿼드 플레이어로 인정받았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54] 퍼거슨 감독은 박지성이 가진 최대의 장점인 활동량, 태클, 인터셉트 등의 능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리기 위하여 아주 중요한 경기가 있을때 쯤이면 종종 前주의 경기에 결장시키곤 했다. 일례로 10-11 첼시 8강전에 앞서 前주에 열린 리그 경기는 모두 출전 시키지 않았다.[55] 이 수술을 받은 선수는 장거리 비행시 무릎에 물이 차는 증상으로 인하여 곧바로 경기에 투입하는게 부담으로 작용한다고 한다. 2000년대 중반 마이클 오언 역시 이 수술로 인하여 국대를 조기 은퇴하였다.[56] 특히 호날두가 엄청난 공격력을 보인 06~08 시즌까지 박지성이 중용되었는데, 호날두가 나간 밸런스를 맞춰줄 선수가 박지성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국내 신문에서는 경쟁자라고 불리던 호날두가 이적한 뒤 오히려 박지성의 출장이 줄어들게 된다.[57] 경기를 중계하던 크루이프가 엄청난 칭찬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58] 이 경기에서 박지성은 위치상 루니 바로 밑의 공격형 미드필더였으나 경기 내내 안드레아 피를로를 전담마크하며 글자 그대로 지워버렸다. 이 당시 피를로의 경기당 평균 패스 갯수는 78개 정도였으나 이 경기에서 피를로의 패스 수는 27개. 이것이 인상깊었는지 퍼거슨이 박지성을 언급하면 이 경기를 자주 언급할 정도이다.[59] 골이 필요한 상황에 박지성을 투입하는 경기는 거의 없었다.[60] 물론 이때 박지성은 연속으로 경기 명단에서 제외되다가 무려 8경기만에 출장해 경기 감각이 상당히 떨어진 상황에서 막아야 했다는 악조건을 감안해야 된다.[61] 더군다나 이 시기 야야 투레는 최고의 경기력을 보이며 말그대로 세계 최고의 선수였다. 야야 투레는 피지컬까지 당대 최고인 선수라서 어떻게 막아야 되는지 도무지 방법이 안 떠오르던 그야말로 탱크같은 선수였는데, 피지컬에 약점이 있는 박지성이 감당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상대였다.[62] 박지성의 은퇴 후 그의 후계자로써 비슷한 유형으로 지목됐던 선수로는 대니얼 제임스프레드(1993), 제시 린가드, 현재는 파리 생제르망으로 이적한 안데르 에레라 등이 있다.[63] 지목된 선수는 전반적으로 높은 활동량과 좋은 축구 지능과 뛰어난 수비 가담 능력을 가졌다고 평가되는 선수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공통된 단점을 보면 알겠지만 빌드업에서 상당히 약한 모습을 보였다.[64] 여담으로 이 경기는 현지 중계였다.[65] 코로나19로 인한 1년 연기 개회[66] 2011-12 시즌을 앞두고 열린 FA 커뮤니티 실드는 박지성의 프로 경력 마지막 우승이다.[67] 표를 얻는데는 실패했는데, 당시 발롱도르 최종후보는 50명이었고 후보자들에게 투표를 하는 유권자는 "유럽 한정" 기자단 52명이었으므로 이 당시 축구 불모지의 아시아인으로서는 한표 받기 조차 매우 어려웠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현재 발롱도르 투표 시스템과 비교해보면 더욱 체감이 되는데, 현재는 96명의 "전세계" 각 나라의 기자단 유권자들이 최종후보 30인에게 투표를 하고 있다. 유권자가 던질 수 있는 표는 두배가 되었지만 후보의 수는 절반 가까이 줄어든 셈. 당연한 얘기이지만 대한민국 기자단도 2005년 당시 발롱도르 최종후보에 대한 투표권은 없었다.[68] 나카타 히데토시 3회(98, 99, 01), 설기현 1회(02) 이후 3번째 아시아인 노미네이트[69] 호나우지뉴, 안드리 셰브첸코, 아드리아누, 사무엘 에투와 함께 후보 5인에 선정되면서 아시아 선수 최초이자 유일하게 UEFA 클럽 풋볼 어워드 최종 후보에 올랐다. 수상자는 호나우지뉴.[70] UEFA 올해의 팀 후보 55인에 든 최초의 아시아 선수가 되었다. 그 중 왼쪽 미드필더 부문 5인에 올랐으며 투표 결과는 수상자 파벨 네드베드 (29.10%)와 아르연 로번 (27.94%)에 이은 3위 (22.61%)였다. 베스트 11으로 팀을 나눌 때 3군에 들어간 셈이다.[71] 온라인 팬 투표[72] FIFA는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1930년 우루과이 월드컵부터 2014년 브라질 월드컵까지 나온 약 2400골 가운데 아름답거나 큰 의미가 있는 '원더풀 골'로 8개를 뽑았는데, 박지성의 2002 월드컵 포르투갈전 골이 그중 하나로 선정되었다.[73] 온라인 투표[74] 팬투표에서는 4위에 머물렀지만 패널들이 선정한 순위와의 합산에서 종합 1위를 차지했다.[75] 팬투표, 옵타 선정 베스트 XI에 모두 포함되었다.[76] AFC는 2011년 아시안컵에서 베스트 11을 선정하지 않았고 대신 기술위원회가 선정한 우수 선수 4인을 대회 공식 리포트를 통해 발표했다. 선정된 4인은 대회 MVP로 선정된 혼다 케이스케를 비롯해 박지성, 해리 큐얼, 세르베르 제파로프.[77] 팬 투표[78] 1990년까지 시상하던 대한축구협회 최우수 선수상 이후 최초 수상.[79] 02 월드컵 포르투갈전, 10 월드컵 그리스전[80] 구단 공식 선정[81] 구단 공식 선정[82] 국가별로 1명씩, 각 대륙에서 최소 1명의 선수를 골라야 하는 조건[83] 구단 공식 선정[84] 구단 공식 선정[85] 구단 공식 선정[86] UEFA컵 + UEFA 챔피언스 리그[87] 요한 크루이프 스할[88] UEFA 챔피언스 리그 + UEFA 유로파 리그[89] UEFA 슈퍼컵 + FIFA 클럽 월드컵 + FA 커뮤니티 실드[90] UEFA 유로파 리그 + UEFA 챔피언스 리그
경기 }}} ||
득점
대한민국
U-17
0
0
U-20
2
0
U-23
23
2
A대표
100
13
통산
125
15

  • 골 기록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9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b71d27 0%, #FF2E3C 20%, #FF2E3C 80%, #b71d27)"
날짜 }}} ||
장소
상대팀 }}} ||
결과
대회명 }}} ||


4.4.3. 개인 기록[편집]


  • 2005년 발롱도르 후보[91]
  • FIFA 월드컵 Man of the Match 4회[92]
  • 2010 남아공 월드컵 아시아 최종 예선 최다 득점[93]
  • 아시아 선수 최초 UEFA 올해의 공격수 후보[94]
  • 아시아 선수 최초 UEFA 올해의 팀 후보[95]
  • 아시아 선수 최초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선발 출전[96]
  • 아시아 선수 최다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선발 출전[97]
  • 아시아 선수 최초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풀타임 출전[98]
  • 아시아 선수 최초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99]
  • 아시아 선수 최다 UEFA 챔피언스 리그 경기 출전[100]
  • 아시아 선수 최다 UEFA 챔피언스 리그 연속 시즌 출전[101]
  • 아시아 선수 최다 UEFA 챔피언스 리그 통산 시즌 출전[102]
  • 아시아 선수 최초 FIFA 클럽 월드컵 우승[103]
  • 아시아 선수 최초 프리미어 리그 우승[104]
  • 아시아 선수 최다 프리미어 리그 우승[105]
  • 아시아 선수 최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통산 200경기 출장
  • 아시아 선수 최초 프리미어 리그 주장[106][107]
  • 아시아 선수 최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주장[108]
  • 아시아 선수 최초 퀸즈 파크 레인저스 FC 주장[109]
  • 아시아 선수 최초 FA컵 득점[110]
  • 아시아 선수 최초 EFL컵[111] 득점[112]
  • 아시아 선수 최초 프리미어 리그 앰버서더 선정
  • 아시아 선수 최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앰버서더 선정
  • 아시아 선수 최초 FIFA 월드컵 3대회 연속 득점[113]
  • 아시아 선수 최다 FIFA 월드컵 Man of the Match[114]
  • 대한민국 선수 FIFA 월드컵 본선 최연소 득점[115]
  • 대한민국 선수 최다 FIFA 월드컵 본선 승리[116]
  • 대한민국 선수 최다 FIFA 월드컵 본선 득점[117]
  • 대한민국 선수 최초 UEFA 챔피언스 리그 출전[118]
  • 대한민국 선수 최초 UEFA 챔피언스 리그 득점[119]


5. 은퇴 이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박지성/은퇴 이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미디어 활동[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박지성/활동 내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별명[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박지성/별명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 악성 팬덤[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박지성/악성 팬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9. 응원가[편집]



9.1. Ji Sung Park (위송빠레)[편집]


Ji Sung Park
원곡: Pigbag - Papa's Got A Brand New Pigbag



Dames en heren
Rechtstreeks uit Korea
Aan de rechterkant van het veld
De Koreaanse doelputmachine
Ji! Sung! Park!
Tu, tu, tu, tu Ji Sung Park (반복)
신사 숙녀 여러분!
한국에서 온
오른쪽 미드필더
한국의 골 머신
지! 성! 박!
투, 투, 투, 투 지성박 (반복)
파일:PSV 에인트호번 로고.svg


9.2. Park, Park, Wherever You May Be[편집]


Park, Park, Wherever You May Be
원곡: The Dubliners - Lord of the Dance



Park, Park, wherever you may be
You eat dogs in your country
It could be worse
You could be scouse
Eating rats in your council house!
박, 박, 네가 어디에 있든
너희 나라에서는 개를 먹지
네가 스카우저였다면
더 심해질 수도 있어
공영 주택에서 쥐를 먹을 테니까
파일: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로고.svg


9.3. Don't Sell My Park[편집]


Don't Sell My Park
원곡: Billy Ray Cyrus - Achy Breaky Heart



Don't sell my Park
My Jisung Park
I just don't think he'd understand
But if you sell my Park
My Jisung Park
You're gonna have a riot on your hands
내 박을 팔지 마
내 박지성을
그가 이해할 거라 생각하진 않지만
내 박을 판다면
내 박지성을
네 손에서 폭동을 겪게 될 거야
파일: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로고.svg


10. 어록[편집]


쓰러질지언정, 무릎은 꿇지 않는다.(19살 시기의 인터뷰)


불가능이란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어야 한다.


‘축구를 잘했던 사람’, ‘우리나라 최초의 프리미어리거’ 이런 걸 다 떠나서 많은 팬들이 내가 경기장에서 뛰고 있는 모습을 보고 믿음을 느꼈다면 “저 선수는 믿음이 가는 선수였어.”하고 한 번이라도 생각했다면 저는 그걸로 제가 원했던 행복한 축구 선수 생활을 했다고 생각해요.

박지성 마이 스토리


오늘 우리 선수들이 최선을 다했다는 것에 대해서 저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단지, 우리의 축구 수준, 지금의 축구 현실이 (지금) 여기까지인 걸로 저는 판단을 내리는 거고요.

우리가 더 잘하기 위해서는, 대표팀에 대한, 선수들에 대해서, 선수들의 능력을 더 키우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한국 축구가 어떤 방향성을 갖고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지금 보이는 것만 바꿔서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지금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어두운 것들[120]

을 얼마나 털어내고, 그것을 그 벽을 깨부수고 우리가 (과연)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하느냐가 더 중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축구인들이 서로가 힘을 합쳐서 희생을 감내해서라도 뭔가를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는 4년마다 매번 지금과 같은 모습을 보게 될 것으로 보여집니다.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 F조 경기: 대한민국 vs 멕시코 종료 후에 박지성 SBS 축구 해설 위원이자 대한축구협회 유스 전략 본부장이 평가한 한국 축구의 현실


과연 독일이 이번 월드컵에서 우승을 하려고 나온 건지 저는 잘 모르겠네요.

네, 이 정도면 우리나라도 비벼 볼 만하겠는데요.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 F조 경기: 독일 vs 멕시코 전반전 종료 후에 박지성 SBS 축구 해설 위원이자 대한축구협회 유스 전략 본부장이 평가한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후배들에게 진정한 선배가 되고 싶다면 실력으로 승부하길 바란다. 실력과 인품이 뛰어난 선배들에게는 저절로 존경심이 생기는 법이다.

2009년 4월 19일 MBC 스페셜에서#


그러면 맨유를 갔겠지



11. 박지성에 대한 언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박지성/관련 언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2. 한국 축구계가 박지성을 외면했다?[편집]



12.1. 외면했다는 주장[편집]


박지성이 고교 졸업을 하고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 입단하고 싶어했으나 안받아줬고, 대학교들도 외면해서 겨우 명지대에 갔으며, K리그에서도 외면했다는 주장이다. 특히 대학생 박지성을 영입해 좋은 결과를 낸 J리그보다 안목이 없다며 대차게 까였다. 박지성은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기도 했지만 탈락했으며 당시 수원의 스카우트이던 정규풍은[121] 당시 박지성의 피지컬이 타 선수들에 비해 약해서 크게 성장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여서 영입을 시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박지성의 피지컬이 같은 세대의 한국 선수들에 비해 밀렸음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나중에 K리그보다 피지컬, 압박, 미친 일정탓에 체력 소모가 더욱 심한 프리미어 리그 + 유럽 대항전에서도 잘 적응 해낸 것을 보면 재능을 알아보지 못한 잘못을 저질렀다는게 주요 내용이다.


12.2. 반박[편집]


  • 당시 고교 졸업하고 바로 프로팀에 입단하는 사례는 드물었다.
일종의 관례처럼 대학 졸업 후 K리그로 가는 것이 보통인 시절이었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유소년과 프로의 격차가 그만큼 커서 그렇다. 지금 대학 리그가 옛날에 월드컵에까지 대학 선수를 내보내던 시절에 비하면 위상이 많이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역 국가대표급 선수들을 보면 대학에서 2년 정도 뛰고 프로 리그로 올라온 경우도 많다. 특급 유망주를 쓸어담아 국대급 스쿼드를 구축 가능한 정도는 확실히 아닐지라도 프로 리그로 가는 최종 관문 정도의 역할은 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후 고교계를 평정했던 윤화평이 고등학교 졸업 후 프로팀인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직행한 적이 있는데 성장도 못하고 기회를 잡지 못해서 기대 이하의 선수 생활을 이어간 것을 보면 보수적으로 구단들이 접근하는 것이 이해가 간다. 물론 정말 심하게 쩔어주면 이조차도 프리패스다. 게다가 이때의 수원 삼성 블루윙즈는 고종수, 서정원, 데니스, 샤샤, 박건하, 김진우 등이 포진해 슈퍼컵, 대한화재컵, 아디다스컵에 이어 리그 우승까지 차지했던 K리그 역대 최강급 스쿼드를 자랑하고 있었기에 당시 박지성의 입지로는 발붙일래야 발붙일 수가 없었다.# MBC 스페셜에도 나왔지만 박지성 또한 원래 프로 입단보다 대학 진학을 우선에 뒀고 고려대가 목표였다고 했다.

박지성/선수 경력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초등학생부터 차범근 축구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전도유망한 선수였다. 그러나, 박지성의 고교 경력은 늦은 신체 성장으로 인해 중학교 때 팀을 상위권으로 끌어올린 선수답지 않게 미싱링크 수준으로 기록이 없다. 실제로 신체 발달이 늦어져서 유망주 때 기대받았으나 성인무대에서 꿔다 놓은 보릿자로로 전락한 이승우의 사례를 봐도 웃어넘기기 힘든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박지성이 빛을 낸 건 신체조건이 좋아지고서 부터다.

  • 대학 진학이 어려울만한 이유가 있었다.
대학 진학을 알아봐야 할 시기에 프로팀 입단테스트를 보느라 대학들이 이미 선수들을 다 선발한 뒤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대학 진학을 노리던 선수들과 상황이 달랐던 것. 박지성이 뛰던 수원공고가 우승한 적도 없었고 대학에서 서로 데려갈만큼의 초고교급 선수도 아니었다.[122] 비슷한 예시로 김영권을 들 수 있다. 김영권도 박지성과 비슷한 상황에서 대학교를 진학하기 힘들었는데 당시 전주대 감독이 받아주다시피 해서 결국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고 라디오스타에서 밝힌 바 있다. 거기에 김영권은 현재 국가대표팀의 어엿한 주전 수비수다. 정말 외면받은 것일까?

당시 박지성의 프로 데뷔 연봉이 무려 5천만엔(한화 5억)이다. 올대에서 활약을 보이니 교토에서 파격적인 제안을 한 듯 보이며 당시 J리그에서도 꽤나 높은 연봉이었을 것이다. 2004년 J리그 연봉 통계 자료 김정우가 2012년 전북과 맺었던 15억의 연봉 계약이 리그 역대 최고액이었고 전설적인 외인 공격수로 평가되는 데얀이 FC 서울에게 받았던 연봉도 10억이 약간 되지 않았다. 이들도 리그 최고의 기량에 리그 최고의 부자 구단에서 뛰었으니까 이 정도다. 그때로부터 10년이 지난 2014년 K리그에서도 5억이면 시민 구단은 줄 수도 없고 기업 구단이라도 핵심 멤버들이나 받는 금액이다. 당시 신인들한테 줄수 있는 최고 연봉이 5천만 원이었던 걸 감안하면 머니싸움에서 절대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는다. 올대 이후엔 영입을 하고 싶어도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당시 박지성이 처음으로 국가대표로 뽑혔을 때 인맥으로 뽑았냐고 비아냥거렸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프로 무대는 어림도 없었던 소리다.

  • 박지성을 만개시킨 것은 히딩크호지만, 그 이전부터 박지성은 중용받았다.
항간에 퍼진 잘못 알려진 사실 중 하나가 "박지성은 대한축구협회에서 천대와 무시를 받다가 인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공정한 명장 거스 히딩크가 발굴하여 지금의 자리에 올 수 있었다."라는 주장인데, 조금만 사실관계를 고려해봐도 터무니없는 주장임을 알 수 있다. 히딩크는 2002년 박지성을 중용해 4강에 진출하고, 이후에도 본인 소속팀 PSV에 그를 데려가 무려 챔스 4강에 올리는 등 그가 유럽리그에서 활약할 수 있게 도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박지성은 이미 히딩크 재임기가 시작하는 2000년 12월 이전부터 국가대표팀에서 중용받았다. 박지성은 2000년 4월 5일 2000년 AFC 아시안컵 예선 라오스전에서 A매치 데뷔하여 2000년 아시안컵, AFC U-19 챔피언십, 시드니 올림픽 등 무려 3개의 국제대회에 선발되었다. 심지어 저 대회 중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오히려 박지성을 깜짝발탁한 허정무가 뇌물이니 인맥 축구니 욕을 먹었다. 박지성이 허정무에게 발탁된 계기는 명지대 축구부와 국가대표 친선전이었다. 당시 올림픽 대표팀과 허정무 감독은 명지대 축구부와 같은 곳에서 훈련하며 친선경기를 치뤘고, 허정무는 박지성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비난까지 받아가며 이례적으로 발탁했다. 박지성의 발굴 자체는 허정무의 공이 크다. 박지성을 처음 발굴한 사람이 히딩크라고 주장하면 스스로 축알못임을 인증하는 거다. 여담으로 시드니 올림픽때 적극 중용한 유망주로 박지성말고 송종국도 있는데 이쪽은 초등학교때 반짝하고 잊혀져 가던 박지성과 달리 착실히 엘리트 코스 밟은 전국구 유망주라서 아무도 뭐라고 안했다.

극성 FC코리아 등에게 박지성 홀대 논란으로 근거 없는 비난을 받는 허정무 및 협회 관계자들만 환장할 노릇. 눈 씻고 찾아봐도 이 선수를 국가대표팀에서 천대했다는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 박지성이 맨유로 이적할 때 워크퍼밋 발급 조건에 걸려서 입단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는데 워크퍼밋 발급 조건이 2년간 열린 국가대표 경기 중 75% 이상을 뛰었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때 축협에서는 선수 보호 차원에서 박지성을 못 불렀던 경기도 있어 64%밖에 못 채웠던 지라 3명의 보증인이 필요했고 거스 히딩크, 알렉스 퍼거슨, 요한 크루이프가 보증을 서준 덕분에[123] 워크퍼밋을 발급받고 입단하게 되었다. 축협에서는 박지성을 인정하고 대우해주고 있었다. 상술했듯 히딩크 아래에서 만개했음에는 분명하지만, 그것을 회고하는 과정에 거짓이 들어가서는 안될 일이다. 이런 기존 인사들이 외면한 재능 레퍼토리에 어울리는 선수는 최진철김남일이다. 최진철은 전북에 입단한지 얼마되지 않아 바로 상무 입대(94~96)하고 전역뒤엔 김도훈의 이적으로 공격수 전향(98~99)한 탓에 커리어가 애매해져서 대표팀에서 중용되지 못하다 히딩크를 만나 대표팀 핵심 수비수로 자리잡았고, 김남일은 소속팀 전남 서포터들조차 거칠고 투박하기만한 선수 왜 뽑냐고 항의하는걸 중용해 대표팀 핵심 미드필더로 키웠다.


12.3. 직접 밝힌 J리그로 간 사유[편집]


2023년 10월 9일 업로드된 슛포러브 근본투어 영상에서 이 부분에 대해 박지성이 직접 사실을 밝혔다.
6분 16초~

당시 수원 삼성에서 드래프트에서 한 명만 지명하고 잔여 지명은 포기했기 때문에 결국 박지성은 드래프트에서 역시 뽑히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J리그로 향하게 된 것이다.

K리그에서 드래프트가 있을 당시 연봉 상한선은 5000만원이었다. 수원 삼성의 일부 팬들이 주장하는 연봉 때문에 수원에서 뽑지 않았단 이유는 신빙성이 없는 얘기고 그 외의 이유로 뽑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3. 논란 및 사건·사고[편집]




이 문서는 나무위키의 이 토론에서 비판 및 논란 문단명을 논란 및 사건 사고로 변경하며 해당 문단의 하위에 유상철 조문 관련 여론몰이 피해 항목을 존치하기(으)로 합의되었습니다.
타 위키에서의 합의내용이 더위키에서 강제되지는 않지만 문서를 편집하실때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3.1. 개고기 응원가 관련[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박지성 개고기 응원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3.2. 백승호 이적 관련 오해[편집]


2021년 전북 현대에서 박지성의 지원 아래 이루어지던 백승호 영입이, 선수 등록기간이 하루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 다름슈타트 측과 국제이적동의서(ITC) 절차까지 밟은 상태로 알려졌다. 박지성이 영입 과정 전체를 주도했다는 증거는 없으나[124] 영향력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보니 백승호 영입에 대한 책임성 비판이 어느 정도 나오는 중.

하지만 애초에 박지성의 역할은 어드바이저로 전북 구단에 조언하는 역할이며 박지성이 영입 과정에서 한 역할은 백승호와 수원 간의 합의서가 존재하는 것을 몰랐을 시기에 백승호에 대해 조언해 주고 연락한 것이 전부라고 볼 수 있다.

전북 관계자는 당시 인터뷰에서 박지성의 조언, 연락 역할이 전북의 백승호 영입에 큰 역할일 것이라고 인터뷰하였는데 이때는 백승호-수원 간의 합의서 문제가 불거지기 전이므로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또한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박지성을 띄우면서 전북을 홍보하기 위해서 한 인터뷰에서조차도 박지성이 연락 이상의 역할은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기사

전북 관계자는 "엄청난 열의를 가지고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K리그의 분위기를 빠르게 파악하려는 열정을 보이고 있고 동시에 유럽에서 습득한 경험을 공유해주고 있다"고 만족감을 내비쳤다.

박지성 위원은 전북의 영입전에서도 큰 역할을 도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주목을 끌고 있는 백승호 협상 건에 대해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관계자는 "박지성 위원이 백승호 측과 직접 연락을 취하는 등 도와주고 있다. 만약 영입이 성사된다면 아주 큰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고 박수를 보냈다.


그런데 이후에 백승호-수원 간의 합의서 문제가 불거지면서 논란이 되고 그럼에도 전북 감독과 단장이 백승호 영입을 결정하면서 논란이 되자 축구 팬들은 '저번에 박지성이 영입에 큰 역할이라고 하지 않았냐'면서 마치 어드바이저인 박지성이 후에 문제된 합의서 내용을 인지하고도 백승호 영입을 주도한 것인 양 집중적으로 비난하는 경우가 생겼다.

이후 김상식 감독과 전북 관계자는 이에 대해 해명하는 인터뷰를 하였다. 박지성은 합의서의 내용을 몰랐을 때 조언하고 연락한 것이 전부이며 박지성은 구단의 유소년 정책에 관여하고 있는 상황이고 선수 영입 결정에 전면적으로 나서고 있지는 않으며 영입 결정은 전적으로 감독이 한다는 인터뷰 내용이다. 기사 기사

이에 대해 전북 고위 관계자는 "박지성 어드바이저는 백승호가 수원에 입단한다는 합의서가 있는지는 당연히 몰랐다. 그걸 모르는 상태에서 박지성 어드바이저가 선수단의 고령화에 대해 지적하며 장래성 있는 젊은 선수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백승호 영입을 추천했다"고 했다.

김상식 전북 감독도 스포츠한국과의 통화에서 "솔직히 말하면 영입을 추진 당시 중앙 미드필더 자리에 구멍이 생길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백승호에 대해 박지성 어드바이저에게 물어봤고 박지성 어드바이저가 조언을 해줬다. 또한 유럽생활을 많이 한 선배다보니 백승호에게 직접 연락해 안부를 묻고 소속팀에서 상황이 어떤지 정도 묻는 ‘축구 선배’ 역할을 한번 해봐줄 수 있냐고 부탁했고 박지성 어드바이저가 그렇게 해준게 전부"라고 했다.

일각에서는 박지성 어드바이저가 백승호 영입 전반에 모두 관여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김 감독은 "그것은 아니다"라며 "박지성 어드바이저는 구단 유소년 정책에 많은 관여를 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직접적인 선수 영입 전면에 나서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상황 설명을 하기도 했다.


스포츠한국과 1일 전화 인터뷰에 응한 김 감독은 박지성 어드바이저가 백승호 영입에 깊이 관여했다는 것에 대해 “선수를 영입하는데 있어서 감독이 원하지 않는 선수를 뽑지 않는다. 선수를 영입하는데 감독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냐. 백승호도 제가 관심이 있어서 영입한거지, 박지성 어드바이저가 ‘영입하시죠’ 해서 영입하는 건 아니다” 라고 했다.

"백승호에 대해 박지성 어드바이저에게 물어봤고 박지성 어드바이저가 조언을 해줬다. 또한 유럽생활을 많이 한 선배다 보니 백승호에게 직접 연락해 안부를 묻고 소속팀에서 상황이 어떤지 정도 묻는 ‘축구 선배’ 역할을 한번 해봐줄 수 있냐고 부탁했고 박지성 어드바이저가 그렇게 해준 게 전부다." 라고 답했다.


요컨대 박지성은 딱 전형적인 유럽파 선배가 해줄 수 있는 역할을 했을 뿐이고 그 시점에서는 수원과 백승호의 계약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는 것. 전북 구단에서도 계약을 알고 난 뒤 공식적으로 아는바가 없었다고 밝힌 것을 생각하면 이것이 합당한 결론이다. 애초에 박지성이 아무리 한국 축구에서 가지는 영향력이 크다한들 이제 막 부임한 어드바이저에게 선수 영입의 전권을 맡긴다는 것부터가 비약적인 추측이다. 아무리 박지성이 한국 축구계에서 대단한 업적을 세웠어도 선배인 김상식 감독의 권한을 침해하면서까지 전북 선수단의 훈련을 주도하고 전술을 짜는 것은 아닐테니까 말이다.

게다가 이 사건은 백승호 측과 수원 측의 입장이 엇갈리며 정확한 잘잘못과 팩트가 가려지지 않은 채 원만히 합의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따라서 이 사건으로 박지성이 비난을 받은 것은 더더욱 아이러니하며 박지성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억울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자세한 것은 백승호 수원 삼성과의 합의서 위반 논란 문서를 참고하자.


13.3. 유상철 조문 관련 여론 몰이 피해[편집]


2021년 6월 7일에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유상철 전 인천 유나이티드 FC 감독의 장례식에 박지성이 오지 않은 것에 대해 당시 에펨코리아 등 일부 커뮤니티에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일부 극성 누리꾼들은 SNS를 하지 않는 박지성 대신 아내 김민지 유튜브 채널에 가서 무분별한 비난 댓글을 달기도 했는데#, 오죽하면 김민지가 이런 분들은 도대체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겁니까? 라며 무지성 비난을 멈추어 달라는 글을 쓸 정도였다.#

당시 박지성은 영국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런 팩트 확인조차 제대로 안하고 선동에 휩쓸려 걍 무지성 비난을 한 것. 이런 뉴스들이 나오자 이를 비난한 사람들이 오히려 비판받기도 했다.# 사실 조금만 따져봐도 박지성에 대한 이러한 비난에는 어떠한 합리성도 없다. 추모란 고인과의 생전의 관계에 따른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일이지 그것을 어떠한 방식으로 행할 것인가, 애초에 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 제 3자가 왈가왈부 할 권리는 없다. 더군다나 신문 기사나 SNS 따위로 세상에 공공연하게 알려서 일자일면식도 없는 대중들에게 "나 이렇게 추모를 했습니다"라고 선전하고 다니지 않았다고 해서 비난을 받을 이유는 더더욱 없다. 고인의 가족들과 개인적으로 연락을 해서 조용히 추모의 뜻을 전하는 방법도 있고 그것은 개인의 내면적인 선택일 뿐이다. 박지성이 영국 자택에 머무르고 있고[125], 개인 SNS가 없으며 화한을 보냈는가 여부 등의 물리적으로 티나는 행동이 가능했는가 하지 않았는가는 부수적인 문제고 타인이 참견할 사항이 되지 못한다.

그야말로 현대 인터넷 사회의 프로불편러, 방구석 코난같은 성향의 족속들로 대표되는, 함부로 타인의 행동을 재단하고 비난을 일삼고 그러할 권리가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불러일으킨 촌극이나 다름없는 사건이다.

게다가 후에 김병지에게 직접 연락이 왔다고 한다. 참석하지 못해 미안한 뜻을 밝혔으며 조만간 한국을 찾을때 방문 예정이라고 한다.

6월 17일 보도 자료를 통해 악플러들을 고소하고 선처는 없다고 밝혔다. 박지성의 매니지먼트인 에투알클래식에 따르면 박지성을 대신해 박지성 부친이 대신 조문해 조의를 표했으며 박지성 역시 멀리서나마 연락을 취해 유가족과 슬픔을 나누었다고 한다.

또한 존경하는 선배이자 동료 축구인을 잃은 참담함 속에서 박지성의 조의 표현 여부를 알리는 것이 중요치 않다는 박지성의 의견에 따라 매니지먼트도 별다른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계속되는 억측으로 유상철 감독에게까지 누를 끼칠까 우려되어 오해가 없도록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뉴스

7월 25일, 유상철 감독의 49재에 조용히 참석했다고 한다. <스포츠니어스> 김현회 기자의 기사에 따르면 박지성이 먼저 유가족 측에 참석 의사를 밝혔고 약속된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유가족들과 인사를 나누고 조용히 애도의 뜻을 표했다고 한다. 인터뷰에서 축구계 관계자가 밝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가족 측에서 ‘박지성은 왜 조문하러 오지 않느냐’는 비난 분위기 때문에 박지성 어드바이저를 많이 걱정했다. 오히려 박지성 어드바이저에게 부담이 될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49재에 참석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했다. 뉴스



13.4. 조규성 이적 관련 여론 몰이 피해[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전북 현대 모터스/사건사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4. 여담[편집]


  • 전학 가기 전, 박지성이 다니던 초등학교에는 운동부가 야구부밖에 없었고 어린 시절 박지성은 야빠라서 야구 선수가 되고 싶어했다. 박지성의 아버지가 직접 언급하기도 했으며, "축구 선수가 안 되었다면 무슨 일을 했을까요?"라는 질문에 회사원이나 야구 선수가 되어 있었을 듯이라고 답하기도 했다. 박지성은 "컴퓨터와 IT에 관련된 일반 회사원이 되지 않았을까"라고 반문한 후 "아니면 야구 선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축구를 시작하기 전에는 야구를 많이 하곤 했다. 당시 학교 야구부에 가입하려 했는데 너무 어리다고 받아주지 않았다. 1년 뒤에 오라고 해 대신 축구부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말했다. 당시 야구부에서 받아 주었다면 이후 계속 야구를 해서 야구 선수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야구를 계속했다 하더라도 프로 야구 선수가 될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박지성이 초등학교 3학년 때 야구부에 입회 신청서를 냈는데 4학년부터 가입이 가능하다고 하여 1년 뒤로 계획을 미뤘다. 그 사이 집이 수원으로 이사하며 전학을 가게 되었는데 전학 간 학교엔 축구부가 있었고 운동이 하고 싶어 축구부에 가입했다고 한다.[126]

  • 무릎팍도사에 나온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원래 이름은 박지선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출생신고를 받은 전라남도 고흥군 점암면사무소 직원이 실수로 박지성으로 잘못 알아듣고 이름을 적었고 이후 그냥 바꾸지 않고 현재까지 그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 동시대 뛰던 박지성과 동명이인의 축구 선수도 존재했다. 박지성(1984) 문서 참고.

  • 박지성이 재능형 선수냐 노력형 선수냐에 대한 논쟁이 붙을 때 재능형을 주장하는 측에서 주로 활용하는 근거가 초등학교 때 수상한 차범근축구상인데 박지성은 자신은 6명 중 가장 끝인 장려상을 받은 것이고, 재능형 선수였다면 대학 진학이 이렇게까지 힘들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천재라고 하기엔 학창 시절 한 번도 청소년 대표팀에 뽑히지 못했고 대학에 진학한 후 올림픽 대표에 선발된 것이 첫 대표팀 커리어이기 때문에 자신은 재능형 선수라기보단 노력형 선수라고 생각한다고 인터뷰했다.

  • 수원공고 시절 막 창단한 수원 삼성 블루윙즈볼보이를 하면서 "난 언제 저기서 뛰어보나" 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진 듯하다.

  • 명지대 신입생 시절 올림픽 대표팀이 명지대와 연습경기를 하게 됐는데 당시 김희태 감독이 미드필더였던 박지성을 윙백으로 깜짝 기용했다. 신입생에 주목받는 선수도 아니라서 본인도 놀랐다고. 그런데 이 경기에서 박지성이 단독 드리블로 올림픽 대표팀 여러 명을 제끼고 골을 성공시켰다. 이날의 경기로 당시 올림픽 대표팀 감독이던 허정무의 눈에 들었고, 경기 후 올림픽 대표팀에 선발됐다는 전화를 받게 되었는데 자신은 신입생인데다 빠른 생일로 만 18세에 불과해 당연히 19세 이하 대표팀에 선발된 줄 알았다고 한다. 대표팀에 소집된 후에야 올림픽 대표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자신보다 4살 정도 많은 형들과 훈련한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고. 참고로 최연소 올림픽 대표 선발이라는 타이틀로 스포츠 뉴스에도 등장했다.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활동하는 7년 동안 맨체스터에 집을 사지 않고 전세로 살았다고 한다. 이유에 대해서 부친 박성종씨는 "언제 쫓겨날지 몰랐으니까. 하하."라고 말했다. 관련 기사. 맨체스터에서 7시즌이나 보낼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 영국에서 7년 체류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평생 헌혈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127]

  • 2009년부터 박지성 가족이 개를 키우기 시작했는데 이름이 한골이었다고 한다. 제발 한 골만 넣자는 염원에서 였다고 한다. 관련 기사.

  • 2014년 은퇴 직후 결혼을 올린 후 거주지를 영국 런던에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 머무르지 않고 영국에 거처하는 이유는 축구 행정가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관련 기사. 실제로 2년 후인 2016년 9월 레스터 시티 FC에 있는 드몽포르대 스포츠 매니지먼트 석사 과정에 입학했다.


  • 나이키에서 출시한 박지성의 축구화 JS PARK TIEMPO LEGEND의 프로모션을 3D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는데 만들긴 잘 만들었지만 보기 민망하다는 견해가 많다.

  • 쉬는 날에는 위닝일레븐을 즐겨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엔 맨유 동료들에게 영미 버전 위닝인 프로 에볼루션 사커로 붙어서 관광 당했으나 위닝으로 갈아타자마자 역으로 구단 동료들을 관광시켰다.[128] 이적 초기에는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뤼트 판 니스텔로이(반니)와 에드윈 판 데르 사르, 루이 사하와 친했으나 반니가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해버리자 할 일 없는 박까들이 박지성 왕따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현재 가장 친한 친구는 파트리스 에브라카를로스 테베즈로 서로가 인터뷰에서 밝혔으며 셋이 같이 찍은 사진이 많다.

  • 2002년 월드컵 4강으로 병역 특례를 받은 뒤, 맹호부대에서 훈련을 받았다. 4주간의 기초군사훈련 가운데 사격에서 만점을 기록, '사격왕' 메달을 수여 받기도 했다. 주간·야간·영점 사격 등 세 분야로 실시된 사격훈련에서 150명의 훈련병 中, 그는 주간과 야간에서 만점을 받았으며 특히 과녁조준에 대한 정교함 및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영점사격에서는 다른 두명의 만점 훈련병들을 제치고 당당히 사격왕 타이틀을 거머쥐었다고 한다.

  • 한국 언론에는 그다지 소개되지 않지만, 친한 일본 선수들이 꽤 있다. 비시즌 중에 곧잘 일본으로 놀러가는 모양. 박지성이 휴식차 한국에 잠시 들렀을 때, 절친으로 알려져 있는 일본축구의 전설 미우라 카즈요시가 다른 친구들과 함께 박지성을 보러 한국에 갈까말까 고민하다가 박지성한테 만나러가도 되는지 물어보려고 전화를 했더니 '응? 지금 다들 모여있는거야? 기다려, 내가 당장 갈게!'라는 말을 남기곤, 다음날 아침 나리타 공항에서 선물을 한 움큼 끌어안고는 '나 여깄어~'라며 손을 흔들고 있었을 정도라고 한다. 다들 아시아 최고의 선수라는 사람이 그리도 반갑게 찾아오는 걸 보고서 굉장히 감동했다고 한다. 그 이외에도 교토 시절 같이 뛰었던 마츠이 다이스케[129]와는 그의 부인과도 친할 정도로 절친한 관계다. 상술했듯이 교토에서 대활약을 했던 경력도 있어서 2ch의 혐한들도 박지성에 대해서는 인정하는 편이다. 그 대신 친일파니, 일본이 키웠다느니 등등의 드립을 치긴 하지만[130] 적어도 디스의 강도는 이청용과 더불어 타 한국 축구 선수에 비해서는 낮은 편이다. 지금도 간혹 박지성에 대한 기사나 영상이 올라오면 '한국은 싫어도 박지성은 인정.'이라는 식의 댓글들이 심심치 않게 보이곤 한다.

  • 한때 MBC ESPN의 초강력한 밥줄이었으나 프리미어 리그 중계가 2009년부터 SBS 스포츠로 넘어가게 되어 이후에는 한동안 SBS ESPN의 초강력 밥줄이었다. 물론 이청용의 해외 진출로 인해 이청용의 경기도 중계해 주지만 같은 날 동시에 경기할 경우 맨유의 경기를 먼저 틀어주는 등 아직까지는 박지성의 아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결국 2018년에 SBS의 해설 위원이 됐다.

[ 움짤 보기 · 닫기 ]
파일:external/www.wsgvet.com/3730941267_FREjSAzi_jsp.gif


  • 맨 위의 프로필에서 봤듯이 종교불교이며, 부모화성시 용주사를 자주 다녔고, 할아버지 박동래의 사십구재도 용주사에서 지낸 데다가 박지성의 은사스님 또한 용주사에 있기 때문에[131] 용주사에 개인적으로 의미를 두고 있다고 한다. 사찰이 위치한 곳이 송산동이라 송산동과 안용중학교는 한국축구에 있어서 중요한 지역과 학교가 아니냐는 설레발도 나오게 되었다. 2005년에는 조계종 불자대상을 받았다. 한편으로는 이영표가 박지성을 개신교개종시킨다는 말을 토트넘 핫스퍼 시절에 인터뷰로 말했던 적도 있다.[132]


  • 2011년 챔스 결승 오프닝 영상에서 박지성의 드리블 장면이 잠깐 비춰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 2012년 박지성이 퀸즈 파크 레인저스로의 이적하면서 박지성을 후원하던 아시아나항공이 물을 먹게 되었다. 박지성은 아시아나항공의 홍보 대사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퀸즈 파크 레인저스의 구단주가 아시아나항공의 경쟁사인 에어아시아의 오너이기 때문이다. 퀸즈 파크 레인저스의 메인 스폰서는 에어아시아였고 박지성은 에어아시아 로고가 찍힌 유니폼을 입고 뛰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아시아나항공사는 박지성과 아시아나항공은 2013년 4월까지 계약되어 있었다. 아시아나항공은 겉으론 박지성이 국위선양에 이바지했으므로 계약 기한까지 박지성을 모델로 쓰겠다는 방침을 보여줬다.


  • 파일:unnamed12.jpg
배우 유해진과 닮았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심지어 평발인 것도 똑같다.


  • 다만, 유연성 평발 또한 축구 등의 격렬한 운동을 하면 통증이 있거나 염좌가 발생할 수 있고, 쉽게 피로를 느낄 수 있다고 한다.기사기사기사 박지성이 그동안 평발 얘기가 나올 때마다 언급한 것도 통증과 관련된 부분이다. 박지성은 2005년 자서전 <멈추지 않는 도전>에서 "평발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도 다른 선수들과 큰 차이가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다만 이후로 발에 조금 더 신경을 쓴다. 내가 아픔을 이겨내는 것은 그렇다 치고 발을 너무 혹사시키는 게 미안하기도 해서다."라고 언급하였다. 2019년 인터뷰에서는 "병원에 갔을 때 평발이라고 하긴 했지만, 뛰기 힘들만큼은 아니었습니다."라고 언급했다.기사 쉽게 말해서 흔히 생각하는 일상 생활조차 지장이 있는 수준의 그런 평발과는 다르지만, 운동을 업으로 삼는 사람 기준으로는 불편한 점이 맞다.

  • 모국어인 한국어를 비롯해, 일본어영어까지 3개국어 구사가 가능하다. 의외로 네덜란드어는 잘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네덜란드어는 어려워서 잘 못한다고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인터뷰 영상[133]

  •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레알 마드리드의 2016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때 배성재, 박문성과 함께 SBS 해설 위원으로 등장했다. 방송 도중 언급된 바로는, 호날두와 같이 뛸 때 "로니" 라고 불렀다고 한다.

  • 과거의 많은 운동선수가 똥군기로 인해 많은 구타를 당했듯이 박지성 또한 선배들에게 구타를 당하면서 축구를 했다고 한다. 본인은 그런 고통을 후배들이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절대로 후배들을 구타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결국 그것을 실천해냈다. "후배들에게 진정한 선배가 되고 싶다면 실력으로 승부하길 바란다. 실력과 인품이 뛰어난 선배들에게는 저절로 권위가 생긴다."는 말을 하면서 군기를 중요시하는 모 유도 선수같은[134] 꼰대들에게 따끔한 일침을 날렸다.[135][136] 참고로 박지성 축구센터 설립의 이유도 축구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더 이상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환경이 아니라 즐겁고 행복한 환경에서 축구하길 바란다는 것이었다.

  • 호날두UEFA 유로 2004 종료 직후 호나우지뉴를 비롯한 몇몇 동료와 함께 쇼걸 20명을 불러서 집단 섹스 파티를 벌였는데 이때 박지성에게도 초대장이 왔다고 한다. 하지만 박지성의 맨유 입단은 2005년이었기 때문에 이 일화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문서의 '여담' 항목에도 소개되어 있지만 이 부분은 거짓일 확률이 높고 아마도 이때의 일화가 와전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 온라인상에서 벌어지는 키배의 가장 큰 떡밥은 역시 차범근 vs 박지성. 요새는 손흥민 vs 박지성이 대세 떡밥이다. 그 외에도 과연 누가 박지성의 부인이 될 것인가는 전 국민의 관심사였다.

  • 런닝맨에 같이 출연했던 아이유와 친해졌는지 아이유의 전국투어 콘서트에 갔다. 콘서트 중에 박지성 선수 왔다고 소개를 받았다. 장내는 남성들 환호의 도가니로 변했다.


  • 유독 왼쪽 풀백들과 친하다는 농담 아닌 농담이 있다. PSV 시절에는 이영표, 맨유 시절에는 파트리스 에브라와 친했으며 QPR 이적 후에는 파비우가 항상 박지성을 따라다니는 중이다. 이 중 에브라는 박지성과 같은 라인이면 풀백들이 편하다는 발언을 한 적도 있다.

  • 안정환을 축알못으로 만들어버린 적이 있다. 마리텔 19회에서 안정환이 '솔샤르는 공격형 미드필더'라고 주장했는데 이에 대해 네티즌들은 '안정환의 말이 맞다'/'안정환 축알못이다'로 논쟁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에 대해 박지성은 '솔샤르는 공격수가 맞다'라고 단정내려서 졸지에 안정환을 축알못으로 인정해버렸다. 사실 이 논쟁은 포지션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관점이 달라지는 것이라서 안정환의 주장도 완전히 틀렸다고 보긴 힘들다. 박지성 본인 또한 결론을 내면서도 '정환이 형을 디스하는 셈이지만'라는 말을 하며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웃어 넘기는 수준이었다. 물론 네티즌들 사이에선 안정환은 축알못 확정이다.

  • 경기도 화성시수원시를 연결하는 도로에 그의 이름이 붙어있다. 동탄지성로가 해당 도로로, 수원시 영통구 망포동에 위치한 박지성축구센터가 이 도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수원구간에는 아예 대놓고 '박지성로'라고 이름이 붙었지만 도로명 주소 시행 과정에서 도로를 통합하면서, 실존인물의 이름은 도로명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정책에 따라 해당 도로가 연결되는 화성시(동탄)와 수원시의 협의로 동탄지성로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다만 교차로 이름으로는 아직 잔존하고 있어서, 박지성삼거리는 수원시에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 2018년 1월 12일 어머니 장명자가 한국시간 새벽 교통사고로 영국에서 사망했다는 슬픈 소식이 전해졌다. [단독]박지성, 어머니 영국서 잃고 큰 슬픔 ‘교통사고’ 이후 얘기로는 어머니와 박지성의 딸 연우와 같이 차를 타고 있었는데 사고가 나면서 손녀를 지킬 생각에 몸을 던졌고 정작 자신을 지키지 못했다고 한다.[137] 설상가상 어머니가 사망한지 몇 시간 뒤인 오후 친할머니 김매심마저 한국에서 사망하면서 더욱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

  • 기네스 기록을 갖고 있었다. 36m 높이 상공에서 떨어지는 공을 5회 리프팅에 성공하여 기록을 인증받았다. 슛포러브가 기록 달성 당시 상황을 영상에 담았다. 종전 기록은 시오 월콧이 갖고 있던 34m. 그러나 동년 5월 3일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Christopher Njokwana 라는 사람이 37.458미터로 기록경신을 하였다. 그 후 제이미 레드냅이 38.9m로 기록을 경신했고, 레드냅의 기록을 조원희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에서 50m를 기록하여 이를 갈아치웠다.


  • 2015-16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때 SBS 객원 해설을 맡았는데 별로 좋지 않다는 평가가 많았다. 목소리와 발성은 해설자 스타일은 아닌 듯하다. 그래도 2023년을 기준으로는 많이 좋아졌다.

  • 그렇지만 2018년 5월에 SBS 월드컵 해설 위원으로 지명 받아 배성재 캐스터와 함께 러시아로 가게 됐다. 그 전 까지 자리를 맡았던 차범근이 고령으로 은퇴한 뒤 이미 몇 번 맡아본 경험도 있고 아내도 SBS 출신이라 더욱 익숙한 지라 해설 위원이 된 듯하다. 이로써 지상파 3사 전부 메인 해설을 2002년 멤버가 하게 됐다.[138]

  • 러시아 월드컵 중계 도중 본인이 밝힌 바로는 그 유명한 알렉스 퍼거슨의 헤어드라이기를 맞아본 적이 없다고 한다. 퍼거슨 시절 맨유 선수라면 한 번쯤은 맞아봤을 터인데 나름 업적이라면 업적이다. 박지성 말고 칸토나, 로이 킨, 호날두 등의 선수도 헤어드라이어를 맞지 않았다. 물론 칸토나는 그의 지랄맞은 성격 때문에 퍼거슨이 알아서 안 한거였겠지만. 하지만 팀 단체로 헤어드라이기는 맞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 2018년 6월 10일, 17일에 SBS 집사부일체 11대 사부로 출연하였다.

  • 2019년 10월 4일, 제100회 전국체육대회에 최종 성화봉송 주자 10명 중 1명으로 참석했다.

  • 박지성의 양력 생일은 1981년 3월이지만, 호적상 박지성은 음력 생일인 2월을 사용해서 1980년 생과 동창으로 지냈고, 이것 때문에 동갑내기인 이천수는 박지성을 '지성이 형'이라고 부른다. 박지성과 이천수가 처음 한 팀에서 뛴 것이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인데 99년 대표팀 발탁 당시 박지성은 대학교 1학년, 이천수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하지만 만 나이로 통일되면서 진짜 박지성이 형이 되어버렸다

  • 외모로 주목받지 않아 잘 언급은 안되나 엄청난 동안이다. 2021년에 40대가 되었음에도 얼굴이 선수 시절 그대로다. 2022 월드컵 때 해설로 얼굴을 비추면서 해외에서도 박지성이 나이를 거꾸로 먹는다고 화제가 되고 있다.퍼디난드와 찍은 사진

  • FIFA 23에서 드디어 FUT 히어로 등급의 선수로 출시되었다. 오버롤은 86으로 책정되었고, 디펜스를 제외한 모든 능력치가 80 이상이고[139], 그중 속도와 드리블은 85라는 육각형 선수로 출시되었다. 성능도 매우 준수하여 미드필더로서 상당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데, 한가지 단점이라고 한다면 포지션은 좌우 윙어만 선택할수 있는데, 능력치상 가장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는 포지션은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 인지라 케미스트리에 영향을 주지 않는 인게임 포지션 변경이 필수라는 것이다. 포지션 관련 단점은 업그레이드 버전인 월드컵 히어로 카드에서 CAM을 선택 가능하게 변하면서 어느정도 개선되었다.

  • 맨유 시절 응원가에서 박지성을 팔면 맨유 팬들이 폭동을 경험하게 될거라는 가사가 있다.

  • 슛포러브와 진행한 '근본투어'에서 자신이 뛰었던 교토 상가 FC 구장을 방문해서 옛 동료들이나 당시 있었던 직원들과 반갑게 재회했다. 20년이나 지났는데도 일본어로 하는 기본적인 의사소통에 무리가 없는 모습이었다. 홈구장을 방문해서 경기도 관전하면서 하프타임때 경기장에 내려가서 팬들에게 통역 없이 일본어를 구사하며 인사했다. 한편 슛포러브가 영상을 게시하기 전에 해당 경기의 관중석에 욱일기 모양을 형상화한 깃발이 걸려 있는 모습이 국내 축구 커뮤니티 사이에서 논란이 됐는데 슛포러브와 박지성도 이걸 보면서 당혹감을 느꼈고 구단 측에 직접 시정 조치를 요청했다고 밝혔다. 해당 영상에서는 모자이크로 처리했다.


14.1. 열애설[편집]


  • 2011년 시점에서 30세, 즉 혼기에 들어선 나이였기 때문에 열애설이 빈번하게 나왔다.

  • 2008년 솔비와의 열애설: 전혀 사실 무근으로 솔비는 박지성과 만난 적도 없다고.

  • 2008년 이보영과의 열애설: 당시 이보영이 박지성을 만나기 위해 영국으로 출국했다는 루머가 퍼졌지만 이보영은 “박지성을 한 번도 본 적 없다”라고 열애설을 일축했다. 결국 둘의 열애설은 박지성과 배우 지성의 이름이 같아 발생한 해프닝으로 종결됐다.

  • 2010년 일본의 배구 선수 기무라 사오리와 열애설: 이 보도의 근원지는 베트남의 스포츠 신문 인터넷판으로 박지성 선수의 아버지인 박성종이 직접 라디오에서 근거 없는 소식임을 밝혔다. 박지성 본인도 "나보다 키가 큰 여자는 싫다."라는 농담으로 일축했다. 또한 "모르는 분하고 스캔들이 나서 정말 당황스러웠다. 이런 일도 세상에 벌어지는구나라고 생각했다."라고 언급하기도.

  • 2011년 허정무 감독의 둘째 딸 허은과의 열애설: 2년 전부터 교제해 왔으며 결혼이 임박해 왔다고 기사가 떴다. 박지성 측은 사실 무근이라 부인하며 법적 대응까지 거론했다.

  • 박지성의 여자친구 문제는 영국 현지 언론에서도 떡밥거리였는지 해당 업계에서는 유명하다는 파파라치가 한 달여 동안 몰래 따라다니며 취재를 했지만 아무것도 건져내지 못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성추문에 연루된 선수들이 나오면서 이런 곳에서 사고 한번 안 친 박지성을 칭찬했다.

  • 2012년 1월 11일 스포츠서울닷컴에서 재일동포 사업가 오지선과 열애 사실을 특종으로 냈다. 반응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였는데 기사 내용도 틀린 부분이 많으며, 아버지 박성종이 사실무근이라고 반박, 본인도 심드렁한 반응을 나타내며 흐지부지해졌다.

  • 2012년 7월 14일 배두나와 스캔들이 터졌다. 한 네티즌이 '박지성과 배두나가 런던에서 함께 우산을 쓰고 걸어가더라!'라는 내용의 글을 올렸고, 이것이 퍼져 각종 매체에서 뉴스화까지 된 것. 배두나의 소속사는 두 사람의 친분을 알지 못했는지 "두 사람은 아예 친분이 없다." "영국에서 만난 것은 친한 사진작가."라는 식으로 입장을 발표하였다. 이에 대해 배두나는 미니홈피에 "이봐, 나를 대신해 그것에 대해 말하기 전에 최소한 나한테 먼저 전화를 했어야지(hey. you should have phoned me at least before you spoke about it on my behalf)라는 글을 올렸다. 이후 박지성은 기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배두나와 친분이 있는 것은 맞지만 열애설은 사실무근임을 밝혔다. 당시 인터뷰

  • 2013년 6월 김사랑과 열애설 및 결혼설이 터졌다. 김사랑과 박지성이 면도기 광고를 통해 커플 컨셉의 화보를 촬영한 후 소위 카톡 찌라시를 통해 루머가 유포된 것이었다. 결국 6월 15일 김사랑 측이 유포자에 대한 법적대응을 하겠다고 밝혔다. 카톡 찌라시와는 다르게 박지성은 김민지 아나운서와 열애 중이었고 커뮤니티에서 구체적인 장소와 데이트 목격담이 돌기도 했다. 김사랑과의 열애설은 헛소문이었던 것. 6월 20일 박지성은 김민지와의 열애 파파라치 기사가 난 후 열애설을 인정하는 기자회견에서 김사랑에게도 직접 공개 사과했다. 괜히 자신과의 헛소문으로 인해 김사랑이 피해를 보지 않았을까 배려한 것이다. 박지성 공개사과, "김사랑 상처 준 것 같아 미안해". 이에 대해 김사랑 측은 박지성 본인이 사과하는 상황에 대해 입장을 밝히지 않기로 했다고 답변했다. 박지성이 열애설을 유포한 것도 아닌데 사과를 받기도 안받기도 애매하다는 것김사랑,"박지성과 훈훈하게 마무리, 법적대응 없다".

  • 당초 선자리에 정계 내지 재계 인사의 딸, 판사, 검사 등 법조인을 추천하려 했으나 박지성 본인이 고사했다고 한다. 상대방으로 인해 부담을 느껴서라고 밝혔다.


14.2. 결혼[편집]


파일:박지성김민지결혼식.jpg
  • 2013년 6월 19일 스포츠서울닷컴 보도를 통해 김민지 SBS 아나운서와 열애설이 터졌다. # 결국 김민지는 사귀는 게 맞다고 시인했다. 2013년 6월 20일에 박지성이 직접 기자회견을 열었다. 김민지와의 열애를 시인했지만 일각에서 제기한 7월 결혼설은 아니라고 부인했다. 은퇴 전까진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2013년 11월 12일, 드디어 결혼 기사가 떴다. 게다가 이미 상견례에서 결혼을 확정지었다고 한다. 박지성의 아버지 박성종은 구체적인 날짜는 미정이며 2013-14 시즌이 끝나면 결혼한다고 밝혔다. 이후 SBS 연예대상에서 김민지 아나운서가 시상 소감을 말하는 중 프로포즈를 받았다고 고백했다.

  • 2014년 6월 6일 제주도에서 약혼식을 올렸으며, 두달여 뒤인 7월 27일에 결혼식을 올렸다. 관련 영상 결혼을 앞두고 청첩장을 돌렸는데, 이 청첩장이 호평을 받고있다. 영국에서도 보도되었다고 한다. #

  • 2015년 박지성 본인이 직접 첫 아이 임신 소식을 페이스북에 공개했으며 태명은 만두라고 밝혔다. 마침내 2015년 11월 19일 득녀했다. 이름은 연우. 박지성은 은퇴 이후 2020년 현재까지 줄곧 영국 런던에 거주하고 있는 이유로 한국이 아닌 영국에서 출산했다고 한다.

  • 2018년 2월초에는 둘째 아들이 태어났다. 이름은 박선우. 관련 기사

  • 집사부일체 출연 당시(2018년 6월 10일) 언급하기론 박지성이 김민지를 부르는 애칭은 '각시'라고 한다. 부인인 김민지 아나운서가 유튜브를 시작한 이후 종종 얼굴을 보이고 있다.


  • 2021년 2월 방송된 MBC 쓰리박에 출연해 결혼 후 남편, 아빠로서의 박지성의 모습을 최초로 공개했다.


15. 관련 문서[편집]




16. 둘러보기[편집]




[ 펼치기 · 접기 ]
사무국 직원
직책
성명
국적
생년월일
대표이사
미상 ()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년 월 일
단장
이도현 (Lee Do-hyun)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73년 월 일
테크니컬 디렉터
박지성 (Park Ji-sung)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1년 3월 30일
테크니컬 어드바이저
로베르토 디 마테오 (Roberto Di Matteo)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1970년 5월 29일

코칭스태프
직책
성명
국적
생년월일
감독
단 페트레스쿠 (Dan Petrescu)
파일:루마니아 국기.svg
1967년 12월 22일
수석 코치
발레리우 보르데아누 (Valeriu Bordeanu)
파일:루마니아 국기.svg
1977년 2월 2일
코치
박원재 (Park Won-jae)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4년 5월 28일
조성환 (Cho Sung-hwan)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2년 9월 10일
골키퍼 코치
최은성 (Choi Eun-sung)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71년 4월 5일
피지컬 코치
이세준 (Lee Se-joon)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4년 7월 24일
보그단 알데아 (Bogdan Aldea)
파일:루마니아 국기.svg
1981년 4월 26일

지원 스태프
직책
성명
국적
생년월일
의무 담당관
지우반 올리베이라 (Gilvan Oliveira)
파일:브라질 국기.svg
1981년
김재오 (Kim Jae-oh)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5년 5월 29일
김병선 (Kim Byeong-seon)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8년 5월 6일
이규열 (Lee Gyu-yueol)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미상
통역
김민수 (Kim Min-soo)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6년 6월 8일
문건호 (Mun Geon-ho)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미상
최동은 (Choi Dong-eun)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미상
분석관
이선구 (Lee Sun-gu)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미상
김기현 (Kim Gi-hyeon)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미상
키트 매니저
이민호 (Lee Min-ho)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미상

B팀 코칭스태프
직책
성명
국적
생년월일
B팀 감독
안대현 (Ahn Dae-hyeon)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77년 8월 20일
B팀 코치
정혁 (Jung Hyuk)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6년 5월 21일
B팀 골키퍼 코치
정부선 (Jung Boo-sun)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3년 6월 11일
B팀 트레이너
박정훈 (Park Jung-hun)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미상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9 22:45:28에 나무위키 박지성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91] 최종 후보 50인[92] FIFA 월드컵 역대 공동 7위이자 아시아 대륙 역대 최다 수상랭킹[93] #[94] 2004-05 시즌 호나우지뉴, 안드리 셰브첸코, 아드리아누, 사무엘 에투와 함께 UEFA 올해의 공격수 후보 5인에 선정되면서 아시아 선수 최초이자 유일하게 UEFA 클럽 풋볼 어워드 최종 후보에 올랐다. 수상자는 호나우지뉴.##[95] LM 3위, UEFA 올해의 팀 후보 55인에 든 최초의 아시아 선수가 되었다. 그 중 왼쪽 미드필더 부문 5인에 올랐으며 투표 결과는 수상자 파벨 네드베드 (29.10%)와 아르연 로번 (27.94%)에 이은 3위 (22.61%)였다. 베스트 11으로 팀을 나눌 때 3군에 들어간 셈이다.# #[96] 2008-09 시즌[97] 2008-09, 2010-11 시즌[98] 2010-11 시즌[99] 2007-08 시즌[100] 54경기#[101] 2003-04 시즌부터 2011-12 시즌까지 시즌9시즌[102] 2013-14시즌 PSV 복귀해에 3차 예선을 출전한 시즌을 포함할 경우 아시아 선수 유일 두 자릿수 10시즌 출장[103] 2008 클럽 월드컵[104] 이나모토 준이치도 아스날 시절 프리미어 리그 우승을 했지만 단 한경기도 못나오면서 우승 메달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다.[105] 4회[106] 정규시즌 공식경기 풀타임 주장[107] 2011-2012 UEFA 유로파 리그 32강 2차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아약스와의 경기#[108] 2011-12 UEFA 유로파 리그 32강 2차전 아약스와의 경기#[109] #[110] #[111] 구 칼링컵[112] 2005.12.21#[113] 2002 한일 월드컵 포르투갈전, 2006 독일 월드컵 프랑스전, 2010 남아공 월드컵 그리스전[114] 총 4회로 2002년 포르투갈, 2006년 프랑스, 2010년 그리스와 나이지리아를 상대로 선정되었으며, FIFA 월드컵 역대 공동 7위이자 아시아 대륙에선 혼다 케이스케와 공동 1위의 기록이다. 랭킹[115] 21세 3개월 19일#[116] 5승[117] 3골로 안정환, 손흥민과 타이 기록[118] #[119] 2005.05.05#[120] 박지성은 이미 정확하게 어떤 부분이 한국 축구에 있어서 문제인지를 충분히 알고 있다. 다만, 저 표현은 박지성이 상당히 에둘러서 말한 것이다. 박지성은 대한축구협회의 중요한 직책인 유스 전략 본부장을 맡고 있고 그런 직위를 가진 상태에서 방송으로 섣불리 자기가 몸담고 있는 조직의 탓이라고 말을 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121] 고종수, 고창현김호의 아이들 중 상당수를 직접 스카우트한 사람이다.[122] 이 부분에 대해서는 홍명보의 자서전 내용을 통해 납득할 수 있다. 홍명보가 나온 동북고는 당시나 지금이나 축구 명문으로 명성이 있었다. 그런데 기수 차이가 얼마 안나는 한두학년 위의 선배들이 그 명문 동북고를 졸업하고도 대학교에 입학하지 못했다고 서술한다. 이를 들어 홍명보는 "대회 성적이 저조했기 때문에 프로팀은 고사하고 불러주는 대학교도 없었다."고 회상한다. 수원공고보다도 훨씬 명문에 속하는 동북고마저 대회 성적이 낮으면 대학교조차 진학하기 힘든데, 그보다 더 지명도가 낮고 심지어 대회 성적마저 저조했던 수원공고에서 좋은 대학을 진학하기 쉬웠을 리가 없다.[123] 히딩크와 퍼거슨은 박지성의 전 소속팀과 현 소속팀 감독이라서 당연했다지만 크루이프는 말 그대로 뜬금없었는데, PSV와 AC밀란의 UEFA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전에서 보여준 박지성의 플레이가 마음에 든다면서 보증인 서명을 해준 것.[124] 위 기사에서도 박지성이 백승호에게 K리그행을 권유한 조언에 대한 것만 실체적인것으로 언급했고 나머지는 추측의 영역이다. 김상식 감독이 박지성 어드바이저에게 어느정도 권한을 주었을 것이고 협상의 마무리를 맡길 것이다 라는 추측이지 이것이 실제로 백승호 영입에서 박지성이 최종적으로 모든 결정을 내린 것인가에 대해서는 알수 없다.[125] 코로나-19 상황으로 국내 입국이 힘든 상황이며 설령 입국할지라도 2주정도의 자가 격리 기간을 고려하면 사실상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지난 1월 위르겐 클롭 감독은 고향인 독일에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는데도 독일의 봉쇄 조치로 인해 귀국하지 못해 장례식에 참여할 수 없었다. 심지어 한국에 머물고 있는 이강인조차 자가 격리 면제 받는 대신 이동 제한이 걸려있어 유상철 감독 장례식에 가질 못했다.[126] 야구부가 3학년 때부터 받아줬다면 야구 선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까운 야구 인재 하나를 날렸다[127] 손흥민도 토트넘에서 7년 이상 활약 중이기 때문에 역시 한국에서 헌혈이 평생 불가능하다.[128] 이때 박지성이 위닝 박지성을 보고 "아... 박지성 골을 못 넣네...?"라고 말하는 짤이 유명해지기도 했다.[129] 아내가 배우인 카토 로사다.[130] 당연하지만 한국에서는 "박지성은 엄마아빠가 키웠다" 라고 말한다.[131] 다른 불자들에게는 몰라도 청년불자들에게는 출가자 만큼이나 은사스님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삶의 방향을 지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132] 출처는 <프리미어를 보러가다>[133] 하지만 들리는 이야기론 2005년 맨유 이적 막 했을 당시 팀 동료인 에드빈 판데르사르에게 네덜란드어로 인터넷 설치를 도와달라 했다 한다.[134] 똥군기를 옹호하는 모 유도 선수는 결국 여러 사건사고로 인해 구설수에 오르더니 결국 미성년자 성폭행 사건을 일으켜 구속, 2021년 7월 29일 대법원에 의해 징역 6년이 확정됐다. 개인적으로도 대한유도회에 의해 삭단 징계를 받았다.[135] 한국 축구 대표팀은 그가 주장일 때를 기점으로 후배들을 괴롭히는 군기 문화가 완전히 사라졌다. 이러한 마인드는 이후 주장이었던 기성용-손흥민에게도 이어지고 있으며 심지어 기성용은 특유의 성깔 있는 모습을 보였다가 주장이 되고 나서는 최대한 자제하고 팀이 부진할 경우 자신을 먼저 자책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이는 차후에 이강인이나 이동경 등 U-20 출신 젊은 선수들이 부담없이 성인 대표팀에 쉽게 적응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136] 실제로 지네딘 지단 같은 레전드급 선수를 생각해보면 공감이 갈 것이다. 지단은 조용한 성격이면서도 팀워크가 오합지졸이었던 프랑스를 하나로 묶을 수 있었던 카리스마를 가진 리더였다. 지단의 은퇴 이후 2010년 프랑스 대표팀은 카리스마를 가진 지네딘 지단이 없어지자마자 그야말로 사분오열되고 최악의 팀워크를 보여주면서 망했다.[137] 하지만 일부 언론은 이에대해 추측성 보도를 내자 그만하라는 반응이 나오는 중. #[138] SBS 박지성, MBC 안정환, KBS 이영표.[139] 그 디펜스도 78이여서 조직력 아이템을 붙여 보완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