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선

덤프버전 :


박창선의 역임 직책

[ 펼치기 · 접기 ]

둘러보기 틀 모음
대표팀
파일:대한축구협회 엠블럼(2002~2019).svg

31대



클럽





파일: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정해원
(1984)

박창선
(1984~1986)


조병득
(1987~1988)


박창선의 수상 이력

[ 펼치기 · 접기 ]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파일:대한축구협회 로고.svg

파일:K리그1 로고.svg

파일:K리그1 로고.svg


베스트팀
파일:대한축구협회 로고.svg

1984 · 1985 · 1986
파일:K리그1 로고.svg

1983 · 1984



대한민국의 축구 감독


파일:711279_409253_0407.jpg

이름
박창선
朴昌善 | Park Chang-Sun
출생
1954년 2월 2일 (70세)
경상남도 김해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직업
축구 선수 (공격형 미드필더, 중앙 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신체
170cm, 65kg
학력
동아고등학교 - 경희대학교
병역
대한민국 육군 병장 만기 전역
소속
선수
포항제철 축구단 (1977~1982)
육군 충의 축구단 (1978~1980 / 군 복무)
할렐루야 독수리 (1983)
대우 로얄즈 (1984~1986)
유공 코끼리 (1987)
감독
동아고등학교 (1992~1993)
대한민국 U-20 대표팀 (1998)
경희대학교 (1994~2003)
대중초등학교 축구부 (2011)
국가대표
32경기 8골 (대한민국 / 1979~1986)

1. 개요
2. 생애
2.1. 선수 경력
2.1.1. 클럽 경력
2.1.2. 국가대표 경력
2.2. 플레이 스타일
2.3. 지도자
3. 논란
4. 여담



1. 개요[편집]


대한민국축구 선수 출신 감독.

대한민국 최초의 월드컵 득점 선수다.

2. 생애[편집]



2.1. 선수 경력[편집]



2.1.1. 클럽 경력[편집]


경남 김해 출신으로 경희대학교를 졸업한 뒤 1977년 실업팀인 포항제철 축구단에 입단하였다. 이후 육군에서 군복무를 한 후 1983년 프로축구리그가 창설되자 할렐루야 독수리의 창단멤버가 되었다. 할렐루야에서 15경기에 출장해 3골 6도움을 기록하였고, 6개의 도움으로 도움왕에 올랐고,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시즌 종료 후 대우 로얄즈로 이적하였다. 1984년 대우에서 28경기에 출장해 6골 7도움을 올리며 대우의 첫우승의 일등공신이 되었고, 리그 MVP에 선정되었다. 이후 1987년 유공 코끼리로 이적하였고, 유공에서 13경기 2골 1도움을 기록하고, 선수 생활을 마감하였다.


2.1.2. 국가대표 경력[편집]




파일:l_2015052201001323900089824_99_20150522060217.jpg

1979년부터 1986년까지 32경기 8골을 기록한 박창선은 우리나라 국민들에게는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에서 대표팀의 주장으로 참가해 본 대회 챔피언으로 등극할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중거리 슛으로 득점하며 대한민국 월드컵 역사의 본선 무대 첫 골을 기록한 선수로 각인되었다.[1]

1986 월드컵 3경기 모두 출전하여 필드의 중앙을 누비는 전방 플레이메이커로 활약했고 대한민국의 선방에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에도 출전하여 금메달을 획득하기도 하였다.[2]


2.2. 플레이 스타일[편집]


키는 큰 편이 아니었지만 다부진 체형에 몸싸움을 잘했고 기동력이 좋았다. 섬세함은 부족했지만 강인한 체력과 저돌적인 플레이로 좋은 활약을 펼쳤다. 최대 장점은 강한 킥력과[3] 전방으로의 볼 배급이었으며 넓은 시야와 정확한 패스, 간결한 탈압박을 이용한 기회 창출 능력이 좋았던 플레이메이커였다. K리그 초대 도움왕이 되기도 했고 월드컵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10번 역할을 했던 미드필더이자 역대급 전방 플레이메이커로 회자되고 있다.[4] 다만, 그 절정의 기량을 보여준 시기가 나이가 서른이 넘어가는 늦은 시기였다. 그 이전에는 조광래, 이영무, 박상인 같은 쟁쟁한 미드필더들에게 밀려 국가대표에서 빛을 못 봤으며, 그 때문에 A매치 출전 수도 적은 편이다. 이에 따라, 당시 언론에서는 그를 대기만성형이라 표현했다.


2.3. 지도자[편집]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박이천호

박창선호

조영증호
은퇴 이후 1992년 동아고등학교 지휘봉을 잡으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1998년 대한민국 U-20 대표팀의 감독을 맡았고, 1994년부터 모교인 경희대학교 축구부의 감독으로 선임되어 2003년까지 10년간 지휘했다.

이후 정신적으로 혼란이 왔을 때 미국으로 건너가 유소년 축구 관련 일을 했지만 즐겁고 보람된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해 귀국해 2010년부터 본인의 고향인 김해시에서 박창선 축구클럽(PCS FC)의 감독으로 유소년 선수들을 육성하기 시작했으며, 2011년에는 박창선 축구클럽 회원으로 구성된 학생들을 중심으로 대중초등학교 축구부를 창단해 창단 감독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3. 논란[편집]


2013년 김해시 공무원으로부터 공무집행 방해와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고소를 당하며 구설수에 올랐었다.

김해중부경찰서에 따르면 불암동주민센터에서 근무하는 박모 씨는 박창선 감독이 불암동 동장실에서 자신에게 심한 욕설과 함께 폭언을 했고 말다툼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넘어뜨렸다는 내용이 담긴 고소장과 함께 전치 10일의 진단서도 제출했다.

반면 박창건은 "박 씨가 동장실 밖에서 동장실로 들어오면서 먼저 (자신을)잡았고 그 와중에 타박상을 입었다"고 반박했다. 또 서로 감정이 격한 상태에서 옥신각신하는 정도였으며 박 씨가 고소한만큼 법적 대응을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박창선은 자신이 아끼는 후배 축구 선수(29)가 불암동 주민센터에서 공익근무요원으로 근무하면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말을 전해듣고 항의하러 간 것으로 알려졌다.#


4. 여담[편집]



  • 월드컵 첫 골의 주인공이라는 역사적인 기록의 소유자이지만 은퇴 후에는 비교적 언론에 노출이 적은 채 조용한 삶을 살고 있으며 월드컵 시즌 때만 주로 언론에 모습을 비추고 있다.

  • 2019년 제30회 경남생활체육대축전 축구 어르신부에 김해시 대표로 참가해 우승을 거뒀다.#, #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9 22:58:14에 나무위키 박창선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그것도 당시 최고의 슈퍼스타 디에고 마라도나가 이끌던 시절의 챔피언 아르헨티나였으니 더더욱 감회가 새로웠을 것이다.[2] 이때 금메달을 차지한 멤버는 박경훈 前 제주 유나이티드 감독도 있었다.[3] 소속팀과 대표팀에서 PK를 도맡아 찼다.[4] 후방 플레이메이커인 조광래와의 조합은 역대 대표팀에서 손꼽히는 플레이메이커 조합으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