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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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관료, 교육인.
2. 생애[편집]
1938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공업고등학교와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를 졸업했다. 피츠버그 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한양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부흥부(현 국토교통부)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해 상공부에서 통상진흥국장, 국제협력차관보, 상역차관보를 맡았다. 이 당시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주도하였으며, 1981년 전매청장을 지냈다.
1988년 모교인 한국외국어대학교 총장으로 1990년까지 임기를 수행했고, 1990년 상공부 장관 으로 관계에 복귀했다. “성장은 수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로 수출에 대한 집념이 강한 인물이었으며, 1970년대 수출 드라이브 정책의 주역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1990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통상장관회담의 수석대표로 참가,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에 참여했으며, 은퇴 후에는 기아경제연구소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98년 10월 23일 상공부 전직 관료들 및 옛 상공부 출신 공무원들의 모임인 상우회 회원들과 삼척 경동탄광 관련 시설 시찰을 위해 경동탄광 소속 현대 에어로타운(초기형) 버스에 탑승하던 중 영동고속도로 평창군 속사IC 구간에서 탄광회사 버스기사의 무리한 추월로 마주오던 동부고속 소속 현대 에어로(1세대) 버스와 충돌, 사망하였다[2]신문기사 출처KBS뉴스 출처. 별세 이후 유가족들이 소장도서 2, 226권을 모교인 한국외국어대학교 도서관에 기증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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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2] 이 사고로 양쪽 버스 운전자, 박 전 장관 본인 및 부인, 유각종 전 동력자원부 차관, 노진식 한국무역정보통신 사장, 최승태 경동탄광 사장, 차상필 전 상공부 차관보의 부인, 탄광회사 버스 탑승 승객 등 12명이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