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계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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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내용
3. 의의



1. 개요[편집]


조선 중기의 실학자 유형원(柳馨遠)이 저술한 책. 1652년에 쓰기 시작하여 1670년 완성하였고, 100년 후에 영조가 이 책을 보고 크게 감탄해 1770년에 왕명에 의해 공식적으로 국가의 손으로 다시 간행해 전국에 퍼트렸다. 총 26권 13책이다. 홍대용이이성학집요와 함께 조선 최고의 책으로 뽑았던 책이기도 하다.

저자인 유형원은 평생 관직을 하지 않고 조상의 사패지인 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반동의 작은 집에 칩거하며 19년 간 연구하며 이 책을 저술하였다.


2. 내용[편집]


중농학파로 불리는 유형원의 생각을 담아 토지 제도의 개혁안을 담고 있다. 서수록후(書隨錄後)에 이 책을 쓴 동기를 실어 놓았는데 절박한 현실은 개혁되어야 하며 이에 대해 현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과 개혁법을 심사숙고해 체계적으로 이루어야 한다고 적었다. 대토지를 소유한 자와 송곳을 꽂을 만한 조금의 토지도 소유하지 못한 자가 있을 정도로 토지가 일부의 사람에 의해 집중되어 있는 현실을 비판하고, 이에 가난한 농민은 유망하게 되고 그 피해는 이웃의 농민에게 넘겨진다고 보았다. 여기에 각종 무거운 세금의 부과와 세정의 문란은 농민들을 파탄으로 몰고 갈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러한 빈익빈 부익부 현상과 유전무죄 무전유죄 현상에 대한 윗사람들의 철저한 자기반성과 타파, 그리고 개혁을 주문하고 있다.

원래 조상들은 정전법(井田法)으로 국민이 토지를 균등히 가져야 한다는 정명한 정신을 가지고 있었으나, 미천한 후세의 자신들이 사욕에 물들어 폐단이 있는 법을 만들었으며, 폐단이 또 다른 폐단을 낳아 우리들의 자식들에게도 쌓이고 있음을 지적한다.

사욕에 바탕을 둔 법제로 노비세습제(奴婢世襲制)를 들며 천하의 악법 중에 악법으로 야멸차게 평가하며 당장 철폐해야 함을 주장했다. 중국의 경우는 노비는 존재하였으나 70세가 된 관노비는 양인으로 삼게 하였고[1] 노비신분이 자식에게 세습되진 않아 부모가 노비라도 자식은 노비는 아니였다. 반면에 고려와 조선은 중국과 달리 노비의 신분이 혈통적으로 세습되었는데 반계는 이 책에서 이러한 현실을 지적하며 "중국에도 노비가 있지만, 모두들 범죄 때문에 노비가 되거나 스스로 몸을 팔아 고용된 것일 뿐이다. 혈통을 따라 대대로 노비가 되는 법은 없다."라고 비판하였다.[2][3][4][5][6] 반계는 노비세습제는 악법 중에 악법으로 당장 폐지해야 속이 시원하지만 현실 상황상 공전제가 완전히 자리잡을 때까지는 종모법(從母法)을 실시해 천천히 노비 수를 줄여나가자고 주장한다. 지금 있는 노비들은 무료로 부려먹지 말고 품삯을 주고 고용하는 용역제로 전환하도록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토지 제도는 사족과 지주들이 농민들을 착취하는 것을 억압하고 국가에서 경작권을 분배하고 환수할 수 있는 공전제(公田制)로 하여 차별 없이 모든 백성들에게 지급해 기본 생활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금을 뜯어내기 위해서만 발전된 제도인 결부법(結負法)을 실제 토지 면적을 단위로 하는 경무법(頃畝法)으로 개혁해 가난한 사람들의 부담을 줄이고 부유한 높으신 분들의 사회책임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반이라는 신분으로 타인을 차별하며 자기들끼리만 교육받는 세태를 비판하고 전 국민의 평등한 공교육을 주장해 읍학(邑學), 사학(四學), 영학(營學), 중학(中學), 태학(太學)의 순으로 전 백성들이 교육기관을 거치게 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통해 관리를 임용하는 제도를 공거제(貢擧制)라 이름붙였다. 이 밖에 전문기술학교의 설치도 구상했다.

철밥통이 되어 눌러붙어 있는 양반 관리들을 비판하고 임기제를 만들어 행정의 실효를 거두도록 한다. 임기는 중앙직은 6년, 외직은 9년이다. 천거되어 관리가 된 자는 1년간 재능을 살핀 뒤에 임용하되 잘못 추천되었을 경우에는 추천한 자를 파면한다.

또한 왕의 경우 왕실 재정이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에 대해 비판하고 왕이 꼬불쳐 놓은 내탕금들을 모두 국가 재정으로 일원화할 것을 주장했다.

서리직(書吏職)의 경우 하는 일은 많으면서도 양반 관리들과는 달리 봉급이 전혀 지급되지 않고 있는데 이러한 열정페이 때문에 탈법적인 부정이 일어나고 있다고 보고, 서리에게도 봉급을 지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반계수록의 내용들을 100% 그대로 믿으면 곤란한 것이, 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우리나라 풍속은 수레를 사용할 줄 모른다."라고 적어서 마치 조선에서는 수레를 전혀 안 쓴 것처럼 묘사했으나, 조선왕조실록이나 비변사등록 등 당시의 기록들을 보면 조선에서도 엄연히 수백 대의 수레를 사용했다.#1, #2 다만 민간에서 수레 활용이 발달하지 못한 것은 발전이 필요한 일이라 수레에는 세를 받지 말 것이며 수레를 업으로 하는 자가 있으면 부역을 시키되 날을 정해서 시키자고 주장했다.

3. 의의[편집]


대부분의 주장들은 왕조가 새로이 개창되어야만 실현될 수 있는 이상안(理想案)이었다. 때문에 대부분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반계수록은 17세기 후반에 등장해 전국의 많은 선비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18세기 후반에 영조가 지원까지 해주면서 실학(實學)이란 학풍을 일으키는 데에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이익(李瀷), 안정복(安鼎福), 정약용(丁若鏞) 등이 반계수록에 영향을 받았다.

반계수록은 당대에는 무시당했으나[7] 훗날 영조대에 재평가받아 왕의 명으로 3부가 남한산성과 사고에 보관되었고, 유형원의 실학사상은 성호 이익을 거쳐 순암 안정복, 다산 정약용 등 토지개혁을 중심으로 한 경세치용파(經世致用派)의 개혁방안으로 이어지게 된다. 유형원을 흠모한 안정복은 "참으로 천리(天理)를 운용하여 만세를 위해 태평을 얻어주는 책이 아닐수 없다”고 평가하고 1776년에 직접 반계선생연보를 편찬했으며, 정약용은 수원화성을 축성하면서 유형원의 축성 이론을 적용했다. 정조는 반계수록보유(磻溪隨錄補遺)를 읽어본 후 "그의 글을 보지 못했는데도 본 것과 같고 그의 말을 듣지 못했는데도 이미 쓰고 있으니, 나에게 있어서는 아침 저녁으로 만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며 극찬했고, 수원화성을 자신보다 일찍 기획했다는 이유로 이조 참판에 추숭했다.

지나치게 과격하고 지나치게 이상적인 개혁안들이라 당대엔 외면했지만, 훗날엔 나라에서도 국가의 개혁에 몸을 불사른 의기 정도는 높이 평가해준 셈이다. 물론 이후의 실학자들에 비하면 허무맹랑하거나 미숙한 주장들도 있지만, 현대에 같이 묶이는 다른 실학자들보다 100년에서 150년 정도 이전의 인물이었음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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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육전》 〈상서형부(尙書刑部)〉 편[2] 연구에 따르면 중국에서 그나마 노비제도가 제일 성행하던 시기인 전한~삼국시대 당시에도 노비 비율은 전체 인구의 불과 1% 내외였으며 그마저도 꾸준하게 해방되는 양상을 보인다. Encyclopedia of Antislavery and Abolition Peter P. Hinks, John R. McKivigan Greenwood Publishing Group, 2007[3] 그러나 조선과 같은 시대인 중국 청나라에서도 엄연히 가생자(家生子)라고 하여 세습노비가 존재했다. 참고로 청나라 시대 노비들은 주인이 하녀를 첩으로 삼거나 다른 사람한테 첩으로 넘겨주는 경우를 제외하고 양민과 결혼할 수 없으며, 노비가 낳은 아이는 가생자가 되어 역시 부모의 신분을 물려받아 노비가 되었다. 아울러 청나라의 옹정 황제는 동화록(東華錄)에서 노비 관계를 “하인(노비)들은 자손 대대로 영원히 주인에게 복종해야 하며, 하인의 신분을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라고 옹호했다. 출처: 한 권으로 읽는 청나라 역사 (하)/ 따이이 저/ 전영매, 김선화 공역/ 김승일 감수/ 경지출판사(27~30쪽)[4] 또한 중국 청나라에는 타민(惰民). 세부(世仆), 반당(伴當), 단민(蛋民) 같은 세습 천민 계급들도 존재했다. 이들은 옷차림과 가옥 등에서 모두 엄격한 규제를 받았고, 규모가 작은 수공업에 종사하거나 노동에만 종사할 수 있을 뿐, 지식인이나 농민이나 장사꾼이 될 수 없었다. 더욱이 글을 읽지도 과거에 응시할 수도 없었으며, 양인과 결혼하지도 못했다. 이 천민계급들은 청나라가 망하고 들어선 중화민국 시대에 되어서야 비로소 없어졌다. 출처: 중국을 말한다 14/ 멍펑싱 저/ 김순림 역/ 신원문화사(248~250쪽)[5] 유형원이 반계수록에서 왜 엄연히 존재했던 청나라의 세습 노비에 대해 그런게 없다고 잘못된 기술을 했는지 의문이다. 정말로 몰랐던지, 아니면 알고도 일부러 사실을 숨기려 했는지? 아니면 아예 유형원 또한 당대의 조선 유학자들 답게 중국 = 명나라라고 취급했을수도 있다. 명나라에서는 노비 대부분이 세습되지 않았고 청보다는 신분이동이 좀 더 여유로웠다. 반론: 명나라에도 타민(惰民)과 악호(樂戶)라는 천민 계급이 엄연히 존재했다. 타민은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이 자신의 적수인 장사성의 부하들에게 대대로 타민이 되어 배 위에서 살아가라는 벌을 받은 사람들의 후손이며, 악호는 명나라 초기 영락제가 조카인 건문제로부터 황제 자리를 빼앗기 위해 정난의 변을 일으켰을 때, 건문제 편에 섰던 관리의 후손들로 영락제가 승리하자 천민 계급인 악호가 되는 벌을 받았다. 이들 타민과 악호들은 일반 백성들과는 달리 과거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없었고 다른 계급의 사람들과 결혼하지도 못하는 차별을 받았다. 그러다가 명나라 이후에 들어선 청나라의 옹정황제가 이들 악호와 타민들의 천민 신분을 없애주었다. 출처: <중국을 말한다 14권>/ 248~250쪽[6] 그런데 반계수록을 잘 읽어보면, 유형원 본인은 오히려 천한 자가 귀한 자에게 부림을 당하는 것은 불변의 이치이고 추세라고 적어 오히려 신분제도를 긍정하는 발언을 하였다! #[7] 동시기 학자 윤증, 배송유, 이현일 등이 주목하긴 했다. 윤증은 발문, 이현일은 반계수록 서문을 써줬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