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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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석평
潘碩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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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472년
조선 전라도 옥구현(군산시)
사망
1540년 5월 28일 (향년 68세)
조선 한성부
신분
천민양반
본관
광주 반씨
국적
조선국
직업
문관, 정치인
부모
반서린(潘瑞麟)(아버지), 회미 장씨(어머니)
조부모
할머니
배우자
첫째부인 남양 박씨
둘째부인 예안 이씨[1]
셋째부인 진보 조씨
후손
11대손 반기문
학력
1507년(중종 2) 식년 문과 급제
1. 개요
2. 야사
3. 실록에서의 행적
3.1. 할머니에 의해 출세한 천얼
3.2. 변방의 관리
3.3. 순탄치 않은 출세
3.4. 조정의 중신
3.5. 사망



1. 개요[편집]


조선 중종 대 문신. 본관은 광주이며 자는 공문(公文), 호는 송애(松厓), 시호는 장절(壯節)이다. 흔히 '노비 출신 재상'[2]으로 일컬어진다.

2. 야사[편집]


어우야담에 따르면, 반석평은 재상가의 노비였다고 한다. 그가 어렸을 때 재상은 반석평의 순수하고 명민함을 아껴 시서(詩書)를 가르쳤는데, 여러 아들 조카들과 더불어 같은 자리에 앉혔다. 그러다가 반석평이 성장하자, 재상은 이대로 노비로서 썩히는 걸 몹시 아깝게 여겨 시골의 아들 없는 사람에게 양자로 주었다. 이후 주인집과 통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종적을 감추고 배움에 힘쓰게 했다고 한다.

반석평은 장성하여 신분을 숨긴 채 과거에 응시했는데,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과거에 급제한 그는 겸손하고 공경하며 청렴하고 성실하여 나라에 충성하는 신하가 되었다. 이에 순조롭게 출세하여 팔도의 관찰사를 역임하며 정 2품에 이르렀다. 반면 그가 모셨던 주인 집은 재상이 죽은 뒤 재상의 아들과 조카들이 모두 곤궁하여 외출할 때는 나귀도 없이 걸어서 다녔다. 반석평은 길거리에서 그들을 만날 때마다 늘 가마에서 내려 진흙탕 길에서 절을 하였으니, 지켜보던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겼다.

이에 반석평은 글을 올려 원래 신분을 실토하면서 자신의 관직은 삭탈하고 대신 주인집 아들과 조카들에게 벼슬을 내려달라고 청했다. 조정에서는 이를 의롭게 여기고 후하게 장려하고자 했다. 국법에도 불구하고 반석평을 조정에 그대로 두는 것은 물론 주인집 아들에게도 관직을 주었다. 어우야담의 저자 유몽인은 이 일화를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우리나라는 땅이 치우쳐 있고 작아서 인재가 배출되는 것이 중국의 천 분의 일도 되지 못한다. 또 기자가 남긴 법전에 국한되어 노비가 된 자들에게는 벼슬길이 허용되지 않는다. 현명한 이를 세움에 차별을 두지 않는 것이 삼대(三代)의 성대한 법도였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벼슬을 못하게 막는 것이 더욱 견고하니 사대부의 의론이 편협하고 또 배타적인 것이다. 반석평은 충성스럽고 의로운 사람이다. 비록 법망을 빠져나와 조정의 대신이 되었으나 한미한 선비에게 몸을 굽힘으로써 솔직하게 천한 자취를 드러냈다. 진실로 우리나라에 드물게 있는 미담이다. 그의 주인집 재상도 스스로 편협하고 배타적인 마음을 통렬히 없앴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이루어주었다. 그 어짊이 있었기에 사람을 알아보고 선비를 얻었다고 할 것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익의 저서 성호사설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성호사설에 따르면, 반석평은 어떤 재상의 집 종으로, 재상은 그의 재주와 성격을 사랑하여 경서와 사기를 가르치고 어떤 아들 없는 부잣집에 부탁하여 아들을 삼도록 한 다음, 그의 자취를 숨기고 학문에 진력하여 서로 왕래하지 말라 하였다고 한다. 이후 반석평은 나중에 문과에 올라 직위가 재열까지 이르고 깨끗한 행실과 겸손하고 공정한 마음으로 국가의 충신이 되어 팔도의 감사를 다 역임하고 정경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반석평은 자신의 주인입 자손이 몰락하여 길거리를 유리걸식하는 것을 보고 가마에서 내려 그의 앞으로 달려가 절했다. 그리고는 조정에 자신의 사실을 바로 아뢰고 자신의 벼슬을 깎아서 주인집 자손에게 주도록 청했다. 이에 조정은 그의 말을 장하여 여겨 그 주인집 자손에게 관직을 제수했고 석평도 그 자리에 그냥 있도록 했다고 한다. 이익은 이 일화를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 사실은 지금까지 전해오는데 많은 사람들이 찬탄해 마지않는다. 석평의 일은 보통으로는 해내기 어려운 일이지만, 조정에서 그를 그 자리에 그냥 있도록 한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정조 대의 실학자인 이덕무는 저서 '청장관전서'에서 반석평의 일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우리 조정에서 팔도의 감사를 모두 지낸 사람은 단지 두 사람뿐으로, 함부림(咸傅霖)과 반석평(潘碩枰)인데, 반석평은 또 오도병사(五道兵使)도 지냈었다. 세상에서 전하기로는 이상(二相) 정응두(丁應斗)도 팔도 감사를 지냈다 하지만 이 말은 잘못 전해진 것이다. 그는 칠도의 감사만을 지냈을 뿐이다. 그리고 반석평은 종의 신분이었으니, 옛날에 어진 사람을 기용하는 데 있어서는 그 신분을 따지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3. 실록에서의 행적[편집]



3.1. 할머니에 의해 출세한 천얼[편집]


실록에 따르면, 반석평은 일개 노비가 아니라 어엿한 양반 가문의 자손이었다. 그의 증조는 선략장군, 충무위 부호군을 지낸 반사덕(潘思德)이고, 할아버지는 한성 판윤을 지낸 반강(潘崗)이며, 아버지는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를 지낸 반서린(潘瑞麟)이다. 다만 그의 어린 시절엔 가문이 몰락해 시골에서 살았고 그나마도 그의 어머니가 노비 출신의 첩이었기에 과거를 볼 수 없었다.[3] 하지만 그의 조모가 그가 학문에 뜻이 있음을 알고 광주 반씨 가문을 일으키고자 어린 반석평을 이끌고 서울로 와서 셋집에 살면서 길쌈과 바느질로 의식을 이어가며 손자가 학업을 이어가도록 지원했다. 이에 반석평은 자신이 천얼임을 숨기고 과거에 급제해 중외(中外)의 관직을 거쳐 지위가 육경에 오르니, 사람들이 모두 그 조모를 현명하게 여겼다고 한다.

이후 반석평은 조정에서 여러 하급 관직을 맡다가 중종 8년(1513)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여진족의 실정을 탐문하는 임무를 맡아 북쪽 변경지대에 파견되었다. 반석평은 함경도로 가서 여진족의 사정을 탐망하고 돌아와 조정에 보고해 중종의 칭찬을 받았다.

반석평(潘碩枰) 같은 자는 이미 변직(邊職)을 역임하고, 대간·시종이 되었기 때문에 변방일과 오랑캐의 정상을 자신이 직접 견문한 바로 면대해 아뢰니, 이 어찌 좋은 일이 아닌가! 또한 장차 시종·대간이 될 만한 자를 역시 변지에 기용했다가 다음날 대간·시종을 삼는다면, 또한 각각 견문한 바로 경연에서 면대해 아뢰며 대신들과 더불어 강론할 것이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랴! 전조(銓曹)는 아울러 이런 의도를 알아 거용(擧用)하라.


그러나 대간은 중종 9년(1514) 신분이 미천한 반석평이 홍문관 교리로 기용된 것에 반발해 파직시킬 것을 요구했다.

홍문관 그 인물을 볼 뿐만 아니라 반드시 그 문벌(門地)도 보아야 합니다. 반석평(潘碩枰)은 문지가 미천하기 때문에 이미 서경(署經)[4]

하지 않았습니다. 어영준(魚泳濬)도 문지가 미천하나 전에 수찬(修撰)으로 있다가 수령으로 나갔으면 다른 사람보다 더욱 근신해야 하는데, 감사(監司)가 계문하여 파면되기에 이르렀으니, 이제 다시 경연관(經筵官)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모두 갈으소서.


하지만 중종은 그 말을 듣지 않고 반석평의 직위를 유지시켰다.

3.2. 변방의 관리[편집]


이후에도 예조 정랑 등 여러 직위를 역임하던 반석평은 중종 11년(1516) 정광필이 "반석평은 변방의 적임에 적합한데 자급이 아직 낮으니, 당상(堂上)으로 올릴 수는 없을지라도 경흥(慶興) 같은 오진[5]의 단부사(單府使)라면 할 만합니다."라고 제안하고 중종이 받아들이면서 변방으로 보내졌다. 그 후엔 경흥부사로 임명되었는데, 이에 대해 사관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사신은 논한다. 석평의 자급이 겨우 종5품이었는데 판서 안당이 계청(啓請)하기를 '석평의 자급은 비록 준직(準職)에는 미달하나, 재주가 문무를 겸했으니 탁용하여 시험해 볼 만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당의 행정(行政)이 자급의 차례에 구애하지 않는 것이 이런 유가 많았다. 또 석평은 한미(寒微)한 출신으로 비록 특이한 재주는 없으나, 당이 능히 천발(薦拔)하여 시속에 구애받지 않았으므로, 다른 날 어진이를 기용하는 길을 만들었다.


중종 14년(1519), 반석평은 경원 부사에 임명되었다. 중종은 부임지로 가기 전 자신을 알현한 반석평을 인견하고 다음과 같이 분부했다.

북방은 방어하는 일이 가장 크니 조치를 조심스럽게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또한 수령들의 형벌이 과중하므로 민생들이 매우 고달파하니 조심해서 하라.


반석평이 답했다.

신이 명을 받았으니 의당 힘을 다해 하고 싶습니다마는, 다만 우매하고 재주가 모자라 성상의 뜻에 부응하지 못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그 후 중종 15년(1520) 12월 명나라 사신을 맞이할 군사의 군기를 잡는 일을 맡은 적임자가 논의되었는데, 특진관 고형산은 여러 사람을 추천하면서 반석평이 무재(武才)가 있다고 호평했다. 또한 중종 17년(1522)에는 그가 모종의 이유로 체직되었는데, 이에 대해 특진관 한효원이 다른 적임자가 없어 우려스럽다고 진언하기도 했다. 그리고 중종은 문신으로서 무재가 있거나 무신으로서 학술이 있는 자를 골라서 요충지에 배치해야 한다면서 반석평이 바로 이에 해당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로 볼때 반석평은 과거로 급제해 문신으로서 관직을 역임하면서도 무인으로서의 자질도 갖췄던 것으로 보인다.

3.3. 순탄치 않은 출세[편집]


반석평은 1522년 만포진첨절제사를 거쳐 함경남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그러던 중종 19년(1524), 그는 여진족을 치기 위해 군대가 이동할 도로를 살피라는 조정의 지시에 따라 삼수 군수 권훈에게 군사 100명을 거느리고 도로를 살피게 했다. 그러나 권훈은 스스로 가서 살피지 않고 서너 사람만 보냈다가 보산(甫山)까지만 가서 돌아온 뒤 반석평에게 "수로로 들어가자니 얼음이 굳지 않고 산길로 들어가자니 험악해서 들어가 살피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이에 반석평은 추문(推問)했으나 군율에 의거해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조정에 그대로 보고했다. 이에 비변사가 반석평의 행위를 문제삼았다.

이제 함경 남도 병사의 계본(啓本)을 보건대, 도로와 거사 기일을 상의하기 위하여 군관(軍官) 한포(韓捕)를 보내어 평안도 병사에게 다녀오게 하였다고 하였으나 왕래하여 상의한 일을 거론한 것이 없으니 매우 옳지 않습니다. 또 권훈(權勛)을 시켜 가서 도로를 살피게 하였으나 수로(水路)·육로(陸路)가 모두 험하므로 가서 살피지 못하였다고 하였는데, 이것도 병사가 권훈의 일을 짐작하여 아뢴 것입니다. 처음에 병사가 권훈을 시켜 군사 1백 명을 거느리고 들어가 살피게 하였는데도 서너 사람만을 보내고 스스로 가서 살피지 않고 겨우 보산(甫山)까지 갔다가 바로 돌아왔으면, 군율(軍律)에 따라 논단(論斷)해야 할 터인데 추문(推問)만 하였으니, 이렇게 하면 어떻게 일을 성취할 수 있겠습니까? 신(臣) 고형산(高荊山)이 전에 종사관(從事官)으로 그곳을 왕래하였는데, 길을 다니지 못할 리가 만무합니다. 모든 일이 늦추어지는 것이 다 권훈 때문이니, 엄중히 논죄하여 군율을 보이소서. 그러면 호령이 엄해질 것입니다.


이에 중종은 반석평에게 유시(諭示)[6]를 내렸다.

경이 삼수 군수(三水郡守) 권훈(權勛)을 보내어 도로를 살피게 하였으나 스스로 달려가지 않고 아랫사람에게 맡겼으니, 경이 군율(軍律)을 쾌히 보여 군졸을 정제하여야 옳을 터인데, 우유부단하고 번번이 독촉해 보냈다고 계문(啓聞)하였으니, 기율이 아주 없다. 워낙 용서하지 않아야 하겠으나 큰일이 이미 다가왔으므로 우선 용서하여 죄주지 않고 권훈만을 파직하니, 권훈을 종군(從軍)시키고 경도 전의 잘못을 뉘우쳐 힘을 다해 조치하여 군기(軍機)를 잃지 말라.


이후 대간은 반석평의 죄를 물을 것을 청했지만, 중종은 권훈이 명령에 따르지 않았으니 그의 죄이지 반석평의 잘못이 아니라며 듣지 않았다. 그러나 지평 장계문, 정언 홍석견 등 조정 대신들까지 반석평에게 죄를 물을 것을 청하자, 결국 중종은 반석평을 체차(遞差)[7]하라고 명했다.

그렇게 함경 남도 병사에서 물러난 반석평은 조정으로 돌아와 병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그 후 변방의 일에 관해 여러 의견을 개진하던 그는 중종 22년(1527) 함경북도 절도사에 임명되었다. 1년 후, 반석평은 조정에 급보를 올렸다.

정월 19일, 유원 첨사(柔遠僉使) 원세상(元世相)이 재목 벌채하는 일로 진(鎭)의 사졸을 거느리고 강 건너편으로 들어갔습니다. 나무를 베어 가지고 돌아올 때 적 2백여 명이 후군(後軍)을 습격하자 첨사가 오랫동안 접전하였으나, 아군 6명이 포로로 잡히고 적군 1명을 생포하였습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우리 인물 여섯이 잡혀갔는데 적은 겨우 하나만 잡혔으니 국가의 명예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반석평을 함경도에서 추고하기로 했다. 이에 대해 사헌부가 반석평을 서울로 잡아들여야 한다고 진언했지만, 중종은 적 1명을 생포했으니 잡아오기를 명하지 않았으며, 대신들도 "함경도의 일은 공과가 비슷하니 잡아다 추문해서는 안되며, 만약 이 사람을 체직시키면 병사로 마땅한 사람이 없으니 형세가 쉽지 않다"고 진언하기에 서울로 잡아들이지 않았다고 답했다. 이후 조정은 반석평을 죄주는 것은 지나치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를 벌하지 않았다.

중종 25년(1530) 서울로 돌아와 특진관이 된 반석평은 경연에서 변방의 일에 대해 진언했다.

신이 전에 북도 병사로 있을 적에 목격한 것으로는 이렇습니다. 사노비(私奴婢)를 추쇄(推刷)하는 일은 그 도(道)의 도사(都事)에게 주관시키고 있었습니다. 문서(文書)를 조사할 적에 조금이라도 어긋난 점이 있으면 모두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은 채 속공(屬公)시켜 버리고, 그 문서도 회수해 버렸습니다. 모두다 자세히 살펴서 조처한다면 말할 나위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애매한 경우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일개 사(司)의 경우에도 당상(堂上)과 낭관(郞官)이 같이 상의하여 처결해도 착오가 많은 법입니다.

한 도(道)의 일을 도사가 독단(獨斷)한다면 어떻게 모두 온당하게 처리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민심이 소란합니다. 그리고 혹 감사(監司)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면 이를 도사에게 미루면서 '나는 모르는 일이다.' 하므로, 그 억울함을 끝내 펼 길이 없습니다. 따라서 모두 속공시켜 버린다면 백성의 억울함이 어찌 적겠습니까. 또 송사(訟事)를 좋아하는 간사한 무리들이 문서를 위조하여 양민(良民)을 강제로 종으로 삼는 경우도 많습니다. 만일 문서가 불분명하다는 것으로 모두 속공시킨다면 관(官)에는 소득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백문기(白文記)[8]

2장[度] 때문에 강제로 종이 된 양민이 태반이라면 국가적으로 볼 때 많은 양민을 잃게 될까 합니다. 이 도의 사람 가운데 본래부터 노비(奴婢)인 사람은 없고 입거(入居)한[9]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평소 무사할 때에도 고향을 떠나온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는데, 더구나 불분명한 문서 때문에 모두 노비로 속공된다면 반드시 흩어져 떠도는 폐단이 발생할 것입니다.


중종이 물었다.

내가 미처 몰랐다. 조정에서 의논하여 조처한 일은 아닌가? 당상과 낭관이 같이 의논하여 분변(分辨)해도 쟁송(爭訟)이 끊임없는데 하물며 도사(都事) 혼자서 독단(獨斷)할 수 있겠는가? 과연 소란스러운 폐단이 없지 않겠다. 언제부터 그렇게 해왔는지 모르겠다.


반석평이 답했다.

지난해부터 그렇게 해왔습니다.


한형윤이 아뢰었다.

그 도(道)의 사람들은 예법으로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정해년(1467) 이시애의 반란도 오로지 민정(民丁)을 추쇄(推刷)한 데서 연유했습니다. 그때 많은 민정들이 이시애에게 투속(投屬)되어 있었는데 추쇄한다는 것 때문에 시애가 분을 품고 난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지금의 이 일은 그 이유를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만, 문서(文書)를 모두 거두어 들이면 반드시 억울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 도 사람들은 남쪽 지방과 달라서 이렇게 처우해서는 안 됩니다.


반석평이 덧붙였다.

마천령(磨天嶺) 밖은 중앙과 너무 멀어서 인심이 미욱스럽습니다. 그래서 사리에 맞지 않는 말도 믿고 유언비어에 동요되기 때문에 다스리기가 매우 곤란합니다. 수령으로 있는 자가 공평하고 넓은 마음으로 일을 결단한다면 모르겠지만 서리(胥吏)와 귓속말을 하게 되면 반드시 의심을 품고 거짓말을 조작하여 백성들을 동요시키기 일쑤입니다. 그들의 미욱함이 이러하니, 인심을 진정시켜 소요가 발생하는 폐단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이에 중종은 승정원에 반석평이 아뢴 일이 사실인지를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반석평이 경연에서, 양계에서는 공천(公賤)과 사천(私賤)의 문서를 조사하는 일 때문에 민간에 소요가 일고 있는데, 도사가 혼자서 담당하고 있을 뿐 감사는 관여하지 않고 있는가 하면, 문서가 격식에 어긋나면 그 노비(奴婢)를 거두어 들여 속공시킨다고 했다. 틀림없이 양민을 잘못 점거한 경우가 많을 것이라서 해조(該曹)가 이렇게 공사(公事)를 만들었을 것이다. 반석평이 아뢴 말이 사실이라면 매우 부당한 일이다. 해사(該司)에 물어서 아뢰라.


이후 반석평은 충청도 관찰사에 제수되었고 이듬해인 중종 26년(1531)에 명나라로 보내져 성절(聖節)을 하례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와서 종계변무를 비롯한 여러 사안에 대해 보고했다.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수록된 선원 종계(璿源宗系)를 개정하는 일은, 예부(禮部)에서 이미 성지(聖旨)를 받들어 사관에게 송부하였다 합니다. 또 위화도의 중국인을 쇄환(刷還)하는 일은, 신이 돌아오면서 요동(遼東)에 이르러 먼저 정문(呈文)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상국(上國)의 백성들이 국경에 흩어져 살아 두 나라 경계에 만연하고 있다. 그래서 혹 사로잡혀 가는 일이라도 생기면 조정(朝廷)의 문책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이 땅이 비록 비어 있지만 우리 나라 백성들이 가서 살면서 농사지을 수 있겠는가? 그대로 비워두는 것은 오로지 대국을 섬긴다는 뜻에서인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도사(都司)가 '얼음이 얼기 전에 모두 쇄환할 것이며, 만일 명(命)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법(法)에 따라 충군(充軍)시키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후 반석평은 예조 참판에 제수되었다가 중종 27년(1532)에 전라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4월, 반석평은 아내가 한양에서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자 아내를 돌보려고 상경했다가 "한 지방의 중임을 맡은 자가 함부로 서울로 왔다"는 이유로 사헌부에게 탄핵되었고, 중종은 대간들의 주청에 따라 반석평을 파직시켰다. 얼마 후, 반석평은 다시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한 아내의 장례 기간을 조정에 전했다가 '장례기한을 미루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도 서울을 떠나기 싫어서 멋대로 정했다.'는 탄핵을 받고 또다시 파직되었다.

중종 28년(1533) 7월, 반석평은 다시 함경 북도 병사로 제수되었지만 이미 한번 역임한 바 있어 여진족이 조정에 반석평 외엔 적임자가 없다고 여길까 두렵우며, 또 문신이기 때문에 무신들이 실망할까 염려되므로 불가하다는 반대가 있어 부임하지 못했고, 대신 평안도 관찰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중종은 반석평을 인견하고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본도(本道)는 다른 도와는 달리 중국과 국경이 연하여 사명(使命)이 계속 왕래하는 곳이어서 백성을 괴롭히는 일이 많으니, 백성 돌보는 것을 우선해야 할 것이다. 근일 명사(明使)가 나온다면 백성을 더욱 괴롭히게 될 것이고 또 명사가 나온다는 것을 미리 들으면 민간에서 소동을 일으킬 것이니, 경이 본도에 가거든 백성을 잘 보살피고 폐단을 없애 소동이 일어나지 않게 하라.


반석평이 답했다.

양계(兩界)의 방어가 똑같이 중요하나 북도는 이정(里程)이 매우 가까와서 군사들이 심한 노고를 겪지 않아도 되는데 비하여 평안도는 이정이 너무 멀어 군사들이 갑절 이상의 노고를 겪어야만 합니다. 더구나 사명이 줄을 잇는 바람에 타거나 짐을 싣는 말들까지도 많이 지쳐 있는 상태입니다. 근년에는 삼등(三登) 지방이 연거푸 실농하여 기근이 더욱 심하므로 내년 봄쯤이면 백성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질 형편입니다. 또 상께서는 명사가 올지 안 올지 확실히 모르는 일이니 공급할 물건들을 천천히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신이 대신에게 들으니 토역(土役)은 미리 해 둘 것이 없고 연로의 관사(館舍)를 수리할 목재들은 농사 틈을 이용하여 형편에 따라 예비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미리 해 두지 않았다가 명사가 갑자기 오게 되면 창졸간에 하기란 어려울 염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중종이 주의를 줬다.

명사가 올 날이 확정되지도 않았는데 미리 공급에 관한 준비를 한다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그러나 농사 틈을 이용하여 할 만한 일은 형편에 따라 해 두라.


이후 반석평은 요동 대인 선위사 겸 호조 참의 정사룡과 함께 변경 지역의 상황에 대한 장계를 올렸다.

신들이 의주(義州)에 와서 여러 번 사람을 보내어 탕참(湯站)을 탐문하였는데, 이달 5일에 요동 진무(遼東鎭撫) 강진(康鎭) 등 4명이 먼저 강(江)가에 왔습니다 그래서 이화종(李和宗)을 시켜 가서 만나 보고 다례(茶禮)를 행한 다음, 그들이 온 까닭을 물어 보았더니 강진 등이 목패(木牌)를 가지고 와서 보이면서 '패에 쓰여 있는 본국(本國)의 범인 여계(呂戒) 등을 의주 관아에서 신송(申送)시켜주기 바라서 왔다.' 하므로, 화종이 '여계는 어떤 사람인가.' 하였습니다. 강진(康鎭)이 '순안 어사(巡按御史)가 본국의 자문을 보고 또 그대들의 말을 듣고 나서 노대인(魯大人)을 차출하여 이곳으로 가서 살펴보라고 하였는데 떠나려고 할 때 협강(夾江)에서 농사 짓는 조세장(曺世章) 등 15명이 어사에게 연명(聯名)으로 정소(呈訴)하였다.

그 정소에 「우리 조부모 때부터 대대로 이땅에 살았다. 정덕(正德) 연간에 달적(韃賊)들의 노략질로 인하여 농사짓던 땅을 버려둔 지가 수십 년이 되었다. 그랬다가 요즘 구업(舊業)을 다시 회복하려 하는데 의주 사람 여계 등이 왕래하면서 방해하였고, 또 요동에 정소하여 곡식을 짓밟고 집을 불살랐으니 여계와 면담하여 확정짓게 해달라.」 하였으므로 어사(御史)가 아울러 대인에게 지시하여 처치할 방법을 강구하고 있으니 여계를 보내지 않으면 안 된다.' 하였는데, 화종이 '여가 성(姓)을 가진 사람이 본국에는 본디 드물고 의주에는 본디 없으니, 아마 세장(世章) 등이 허위 사실을 꾸며 거짓으로 정소한 것일 것이다. 만일 세장에게 그 사람을 찾아내어 질문하게 하면 허실이 즉시 가려질 것이다.' 하니, 곧 돌아갔습니다. 4일 대인(大人) 노탁(魯鐸)이 탕참에 도착하였으며, 5일 본벽(本壁)에 그대로 유숙하였습니다.

6일에 파사보(婆娑堡) 변두리 민가(民家)에 도착하여 먼저 사람을 시켜서 '말을 타고 더위를 무릅쓰고 왔더니 몸이 매우 좋지 못하다. 약을 먹고 치료하고 싶다.'라고 하기에, 신이 그 말을 듣고는 날이 저물고 급해서 의주의 의생(醫生)과 한어(漢語)를 할 줄 아는 의주의 기관(記官) 김철순(金哲孫)을 시켜 약을 보냈는데, 대신이 감사하다는 인사말을 하였습니다. 이어 사명(使命)이 왔는가를 물었으므로 철손이 '오늘 선위사 및 본도 관찰사가 다같이 와서 기다리고 있다.'고 하니, 대인이 '전하(殿下)가 나를 정중하게 대우한다.' 하고, 또 '이곳에서 금지된 법을 어기고 농사짓는 사람들을 지금 추핵(推覈)하고 있으나 다 끝내지 못하였으니 모래쯤이나 만날 수 있다.' 하였습니다.

7일에 화종을 시켜 문안케 하면서 음식을 보내고 이어 추문하는 일을 살피게 하였더니, 화종이 돌아와서 '대인이 「나는 협강(夾江)의 땅을 조사해 보라는 내사의 명령을 받고 나왔는데 지금 대략적인 형세를 살펴보니 이 협강의 땅은 버려두는 것이 합당할 듯하다. 내일 마아산(馬兒山)과 위화도(威化島) 등지를 다니면서 직접 살핀 뒤 법을 어기고 심은 곡식은 당연히 베어 내게 할 것이니, 주관(州官)에게 군인들을 많이 거느리고 와 강가에서 기다리게 하라. 그리고 법을 어기고 경작한 사람들 가운데 죄가 가벼운 자는 직결(直決)하고 죄가 무거운 자는 압송(押送)하여 어사가 직접 다스리게 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막 법을 어기고 들어와 농사지은 사람 1백여 명을 잡아서 모아놓고 하나하나 불러 농사지은 농토의 평수를 심문하는데 속이는 자가 거의 반이었다.'고 하였습니다.

화종이 또 여계의 일에 대해 대인에게 '주관(州官)이 보관된 장적(帳籍)을 조사해 보고 한 편으로 노인들에게 물어보았으나 여계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하나도 없었다. 더구나 협강의 일에 대해서는 주관이 관찰사에게 보고하고 관찰사는 국가에 보고하고 국가는 도사(都司)에게 자문을 보냈는데 그 명(命)을 가지고 왕래한 사람은 나뿐이다. 가령 실지로 여계하는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일개 평민으로서 상국(上國)의 국경을 마음대로 넘어가서 도사에 거짓 정소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니, 대인이 '그러면 내일 강가에서 세장 등과 함께 있을 때에 다시 고하라.'고 하기에, 화종이 또 '전하가 대인이 국경에 행차(行次)하였다는 말을 듣고 관원(官員)을 보내어 문안케 하고 또 위로하는 예의를 행하려 한다 그리고 본도 관찰사도 와서 기다리고 있다.'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대인이 '내가 위임받은 일을 아직 결정짓지 못했는데 어떻게 갑자기 위로연의 예를 받을 수 있겠는가. 일을 끝마친 뒤에 의순관(義順館)이나 또는 강가에서 형편에 따라 예를 받겠다.'고 했습니다.

탕참(湯站)에 새로 부임한 지휘(指揮) 사오(査鏊)도 대인을 따라 강가에 도착하였으므로 화종이 나아가 만나고 인사를 하였더니, 사오가 '협강의 무식한 백성들은 금지된 법을 어기고 멋대로 농사를 짓는데 당신 나라 백성은 전혀 초채(樵採)하는 자가 없으니, 큰 나라의 백성이 도리어 작은 나라 백성만 못하다.'고 하고, 곡식을 베어 들일 역군을 강가에 모아놓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들도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소식을 기다립니다.


3.4. 조정의 중신[편집]


중종 31년(1536) 3월, 반석평은 호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그로부터 7개월 후엔 공조 판서에 제수되었지만 대간이 "반석평은 시종이나 대간을 역임하지 않았으므로 별다른 추천을 받지 않았으니 불가하다."고 반대하자 중종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결국 공조 판서가 되지 못했다. 그 직후엔 공조 참판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함경 감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중종 32년(1537), 반석평은 병이 나서 직무를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사직서를 제출한 뒤 조정으로부터 체직한다는 명을 받기도 전에 서울로 올라왔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중종 34년(1539), 반석평은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고, 뒤이어 형조 참판, 한성부 판윤에 잇달아 임명되었다. 이때 반석평은 변방에 관한 대비책을 진언했다.

신이 전에 만포 첨사(滿浦僉使)였을 때 봄가을로 날래고 용맹스러운 군사를 뽑아 야인들의 지역을 정탐시키며 여러 가지로 가르치기를 '그곳에 야인이 집을 지으면 네 죄를 다스릴 것이다.'고 했습니다. 다만 우예(虞芮)와 자성(慈城)은 길이 몹시 험하고 멀어서 정탐하는 자가 반드시 오랑캐 땅에서 하룻밤을 잔 뒤에라야 비로소 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 중간에는 상무로(上無路)와 하무로(下無路)라는 지명(地名)이 있는데, 무로(無路)란 길이 없어 갈 수 없다는 뜻이니 험악함을 알 만합니다. 여연(閭延)과 무창(茂昌)은 토지가 기름져서 곡식이 잘되니, 야인들이 즐겨 사는 것이 이 때문입니다. 다만 해마다 정탐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 편안히 살지 못했는데, 지금은 금하지 않기 때문에 사는 자들이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모름지기 널리 조정에 의논하여 저들을 타이르고, 또 전례에 의하여 매년 봄가을로 정탐한다면 변방의 근심이 일어날 곳이 없을 것입니다.

또 변방의 장수가 저들을 접대하는 것은 본디 정해진 법이 있는데, 지금은 풍성하고 사치하기에 힘쓰고 백성들의 폐는 따지지 않습니다. 그 잔치는 매양 회령부(會寧府)에서 하는데, 감사와 병사 앞에 상(床)을 놓고, 우후(虞候)·부사(府使)·도사(都事)·평사(評事) 등의 상은 그 다음이요, 중추 첨지(中樞僉知) 등의 앞에는 모두 사주상(四注床)을 늘어 놓고, 그밖의 어육(魚肉)같은 음식도 여기에 맞추어서 냅니다. 소주(燒酒)는 거의 70여 동이나 되는데, 그 상의 비용은 나라의 잔치 때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잔치가 끝날 때쯤 해서는 과일과 어육을 거두어서 주고, 또 사기(沙器)·염두(鹽斗)·석자(席子)·포자(布子) 등 물건을 예물(禮物)이라 일컬어 그 추장(酋長)에게 넉넉히 주는데, 이것이 모두 민간에서 나오니 백성들이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또 잔치 때 쓰는 술은 한 말의 좁쌀을 민간에 나눠주고 사람 수를 따져서 각각 한 병씩을 거둡니다. 까닭에 궁한 백성들이 여기저기서 사다가 바칩니다. 또 돼지를 민간에 독촉하여 받기 때문에 백성들이 혹은 소를 끌고 가서 비밀히 저들에게서 바꾸어 바치기도 합니다. 회령(會寧)뿐이 아니라 각진(各鎭)이 모두 그렇지 않은 곳이 없으니, 이 폐단을 없애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야인들을 접대하는 물건을 풍성하고 사치스럽게 하지 못하도록 감사에게 하유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또한 그는 노비 문제에 관해서도 진언했다.

근래 인심이 교사(巧詐)스러워 사송(詞訟) 중에 불법적인 일이 매우 많습니다. 무릇 노비(奴婢)나 전택(田宅) 등 이미 오래 전에 매매했던 것을 '훔쳐다 팔은 것'이라고 사칭하면서 스스로 원척(元隻)이 되어 승부를 다툼으로써 요즘 시가를 받아내어 그 이익을 나누려 하니, 이것이 사송이 그치지 않는 원인인 것입니다. 얼마 전 성세영(成世英)이 윤대(輪對)[10]

때 아뢴 것은 바로 세상을 구할 수 있는 합당한 방책입니다. 부중(府中)에서도 그 내용으로 공사(公事)를 만들려 하고 있습니다. 그 방책을 거행하게 하시면 간사한 풍조가 사라질 것입니다.


이후 반석평은 중종 34년(1539) 10월 말에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고, 12월 20일엔 이기와 함께 변방의 일을 관장했다.

3.5. 사망[편집]


중종 35년(1540) 5월 20일, 반석평이 사망했다. 중종은 이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이 전교했다.

근래 재상들이 잇따라 서거하니 매우 경악스럽다. 반석평은 일찍이 육경(六卿)을 역임했으니 특별히 부의(賻儀)를 보내야 한다. 전례를 조사하여 서계하라.


이후 조정에서는 그에게 장절(壯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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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장(李穡)의 딸[2] 조선시대의 재상(宰相)은 종2품 이상의 관직자를 일컬었다. 대략 50~60인 정도이다. 삼정승을 비롯하여 좌·우찬성, 6조의 판서, 한성부 판윤, 6조의 참판, 한성부 좌윤·우윤, 관찰사, 병마절도사 등이 포함된다.[3] 이 정도면 반석평이 노비라는 말이 틀리진 않다. 노비 출신이라는 첩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반석평은 얼자 출신인 것인데 얼자는 공식적으로는 천민이었다. 다만 실질적으로는 면천이 이뤄졌다.[4] 국가에서 수령, 경연관, 사관, 대간과 현직 관원의 4품 이하의 관을 임명할 때, 사헌부 및 사간원에 가부를 묻고, 양사는 법전 및 관원의 내외 사조를 조사한 후 하자가 없음을 파악하고 임명에 동의한다고 서명하는 절차[5] 육진(六鎭) 중에서 가장 먼저 설치된 남쪽의 부령(富寧)을 제외한 경원(敬源)·회령(會寧)·종성(鍾城)·온성(穩城)·경흥(慶興)[6] 윗 사람이 아랫 사람에게 지시하는 문서[7] 관원의 임기가 차거나 부적당할 때 다른 사람으로 갈아서 임명함. 즉 관원을 경질하는 것이다.[8] 신빙성이 없는 계약이나 증서 등의 문권[9] 강제로 변방으로 옮겨진 죄인 또는 서민[10] 조선시대에 일정 품계 이상인 벼슬아치들이 소규모로 임금과 만나 정사의 잘잘못을 고하거나 왕의 질문을 받는 소규모 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