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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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 渤海
Parhae (Balhae) | ᡦᡠᡥᠠᡳ[1] | Бохай[2]


파일:발해 건국과 발전.jpg

678년[3] or 684년[4] or 698년 12월 ~ 926년 1월 14일
(227년 1개월 or 242년 or 247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고구려
고려[5]
발해부흥운동[6]
여진 (금나라)[7]
요나라 (동란국)[8]
국호
진국 ・ 진단[9] → 발해[10]
고려, 모시 구르[11], 해동성국[12]
위치
한반도 북부,[13] 중국 지린성, 헤이룽장성랴오닝성[14]
러시아 극동 연해주하바롭스크 지방[15]
행정구역
5경(京) - 15부(府) - 62주(州) - 현(縣)
독주주(獨奏州)
[16]
수도
동모산 (698년 ~ 742년)
중경현덕부 (742년 ~ 756년)
상경용천부 (756년 ~ 785년)
동경용원부 (785년 ~ 794년)
상경용천부 (794년 ~ 926년)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가독부, 대왕[17], 황제[18]
주요 군주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 (698~719)
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 (719~737)
문왕(文王) 대흠무(大欽茂) (737~793)
선왕(宣王) 대인수(大仁秀) (818~830)
대인선(大諲譔) (906~926)
국성
(大)
언어
불명[19]
민족
예맥 (발해인)[20], 숙신 (말갈인)[21]
종교
불교, 유교, 샤머니즘, 도교, 기타 토착신앙
계승 국가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22]
[[북한|

북한
display: none; display: 북한"
행정구
]]
[23]
현재 영토(실효 지배)
[[북한 |
북한
display: none; display: 북한 "
행정구
]]
[24]
[[중국|
중국
display: none; display: 중국"
행정구
]]
[25][26][27]
[[러시아|
러시아
display: none; display: 러시아"
행정구
]]
[28]

1. 개요
3. 정치
4. 사회 구조
7. 군사
9. 외교
9.1. 신라와의 관계
9.2. 당과의 관계
9.3. 일본과의 관계
9.4. 거란과의 관계
16. 발해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서
16.1. 한국
16.2. 중국
16.3. 일본
17. 발해 유적
17.1. 북한 소재
17.2. 중국 소재
17.3. 러시아 소재
18. 발해 관련 창작물
19. 같이 보기
20. 관련 사서




1. 개요[편집]


발해(渤海)는 동아시아의 한반도 북부와 만주, 연해주 일대에 위치했던 고대국가. 국호는 일반적으로 발해로만 알려져 있으나 대일본 외교 문서에서는 고려(高麗)를 자칭하기도 했다.[29]

한국 고대사에 있어서는 8~9세기 남방의 신라와 함께 200여 년간 이른바 ‘남북국시대’의 한 축을 담당했다. 영토와 면적은 확실하지 않지만 서아무르까지 나아간 것으로 보아 영토로는 한국사의 역대 국가들 중 면적이 제일 넓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고구려의 계승을 자처한 흔적을 제법 찾아볼 수 있지만 영토의 경우 북쪽으로는 고구려보다 더 나아갔으면서도 남진은 신라와 접경하는 선에서 멈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이 지난 678~698년에 고구려 유민들이 지금의 중국 만주 일대에 세운 국가. 한반도 북부와 만주 및 현 러시아 연해주하바롭스크 남부 지역에 227~247년간 존속했는데 926년 거란의 침공으로 멸망했다.[30]

일종의 '발해'는 당과 외교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당이 지칭한 발해군왕이라는 호칭에서 유래한다. 발해군은 랴오둥 반도 남쪽에서 산동반도까지의 영역이다. '진국(震國)'[31] 일본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대외에선 고려를 사용한 적이 있었다. 거란에서는 발해를 '단 구르(dan gur)' 혹은 '모시 구르(mos-i gur)[32]'라고 불렀다고 하며, 이 중 '단 구르'라는 국명이 동단국의 어원이 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발해인 본인들이 자국을 '단'이라고 불렀는지, 아니면 거란인만이 부르는 칭호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33] 한국학계에서는 일본에 보낸 국서를 근거로 정식 국호를 고려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34]

한편 군주는 '가독부(可毒夫)라고 칭했는데, 이는 발해 고유어의 음차라고 한다. 그런데 정혜공주묘비에 '황상'이라는 표현과 '황후'를 사용한 묘비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외왕내제였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다만 "대왕"이라는 표현도 적게나마 나오는 것으로 보아 발해 군주의 칭호가 모두 황제였다고 볼 수 없다. 물론 발해 왕에게 ''이 들어간 표현을 쓴다는 것은 적어도 국내에서는 황제와 비슷한 권위를 가졌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2. 역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발해/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정치[편집]


발해의 정치제도는 제3대 문왕 대흠무 때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해 중앙에 3성 6부제와 주자감(胄子監)을 설치했다. 문왕 서거 후 정치적 혼란을 겪었으나 제10대 선왕 대인수 때 왕권의 안정을 되찾으며, 5경 15부 62주 지방제도를 완성시켰다. 관제(3성 6부 1대 7시 1원 1감 1국)는 당나라의 3성 6부 제도를 본땄으나, 그 명칭을 발해에 맞게 바꾸어 독자성을 강조하였다. 실제 각 관부의 기능은 당나라의 것과 많은 차이가 있었다.


발해는 당의 영향을 받아 중앙 관제로 3성 6부제를 시행하였고, 중앙 교육기관으로 주자감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3성 6부의 명칭과 관리 체계, 각 부서의 구체적인 업무는 다르게 편성되었다. 발해는 중서성, 문하성, 상서성의 명칭을 각각 중대성, 선조성, 정당성으로 바꾸었다. 6부의 명칭 또한 충,인,의,지,예,신부 등 유교적 명칭으로 바꾸었으며, 정당성 아래에 좌사정과 우사정을 두어 각각 3개씩 부를 관장하게 하는 등 이원적인 방식으로 조직을 운영하였다.

3성(省)으로는 정당성(政堂省), 선조성(宣詔省), 중대성(中臺省)이 있었다. 정당성은 당의 상서성에 해당하는 곳으로 발해의 모든 정령(政令)을 집행하는 최고의 행정 서무 기구였다. 3성이 형식상 분립되어 있지만, 정당성의 권한은 절대적인 것이어서, 3성은 기능상 평등하게 분립하는 것이 아니라, 당의 상서령에 해당하는 정당성의 수장인 대내상(大內相)을 중심으로 선조성 수장인 좌상(左相)과 중대성 수장인 우상(右相)이 대내상 밑에 있었다. 그리고 좌우상 밑에 좌우평장사가 있고, 좌사정과 우사정이 좌우평장사 밑에 있었다.[35] 기록에는 누락되어 있지만 사정(司政)도 존재했음이 입증되는데, 신당서에서 중정대가 사정의 밑에 있었다고 기술되어 있고 고려사절요에 기록된 발해 유민 중 사정 직위에 있던 인물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좌사정과 우사정이 거느리던 6부(部)에는 충부, 인부, 의부/지부, 예부, 신부가 있다. 발해 6부의 명칭은 충, 인, 의, 지, 예, 신 등 5행의 덕목명이었다. 충부는 인사관서이자 6부 최고위치였고(다른 나라의 이부), 인부는 재무 행정의 최고기구였으며(호부), 의부는 의례, 제사, 과서, 학교, 대외관계 주관부서였다(예부). 지부는 군사행정의 최고기구였으며(병부), 예부는 최고 법률기구였고(형부), 신부는 행정부서였다(공부).

그러나 대이진 시절 일본으로 보낸 국서에는 정당성 산하에 춘부경(春部卿) 상중랑장(上中郞將) 직책이 확인되므로 이 시기에는 주나라 시대의 천관(天官)·지관(地官)·춘관(春官)·하관(夏官)·추관(秋官)·동관(冬官) 체제를 도입했을 가능성도 있고 발해고고려사절요에 따르면 강왕시기 공부낭중, 발해 멸망 당시 예부경(禮部卿)과 공부경(工部卿)이 발견되므로 전통적인 이-호-예-병-형-공 체제로 회귀한 것으로 보인다.

1대는 중정대(中正臺)로 발해의 감찰 기구였다. 수장은 대중정(大中正) 1인이다. 그 다음은 소정(少正) 1인이다. 1감(監)은 주자감으로 귀족 자제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는 곳이었다. 1국(局)은 항백국으로 왕실 후궁의 명령 전달 및 호위, 일상 생활의 시중 등의 업무를 관장하였다. 항백국의 수장은 상시(常侍)로서 환관만을 임명하였다.[출처]

7시(寺)는 발해의 중앙부서이다. 전중시에서는 황제의 생활(음식, 옷, 주거, 수레)을 보살폈고(전중성), 종속시에서는 황제의 친인척에 관한 직무를 맡았으며(종정시), 태상시에서는 조정의 예의와 제사를 맡았고(태상시), 사빈시는 외국 사신의 접대와 관리를 맡았다(홍려시). 대농시는 전국의 창고와 곡식을 관리하였고(사농시), 사장시사선시에서는 외국 무역품, 재화, 궁중 잔치, 의례 음식을 관할하였다(소부시, 광록시).


4. 사회 구조[편집]


발해의 사회구조는 흔히 소수의 고구려 지배층과 다수의 말갈 피지배층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현재는 부정되고 있다. 이유로는 발해 지배층 중에 모시몽, 오차지몽, 미발계 등 말갈계 또한 있었던 기록이 남아 있고, 발해가 차지한 영토는 애시당초 고구려인들이 터전으로 삼았던 곳이며 고구려 멸망 후 해당 지역의 고구려계 유민들이 민족 대이동 수준으로 모두 사라진 게 아니기 때문이다.[36] 즉, 발해의 사회구조는 고구려계와 말갈계가 혼재된 구조는 맞으나 소수의 고구려계 지배층, 다수의 말갈계 피지배층은 아니다.

발해의 귀족은 왕족인 대씨(大氏)를 중심으로 고씨(高氏), 장씨(張氏), 양씨(楊氏), 두씨(竇氏), 오씨(烏氏), 이씨(李氏)의 여섯 우성망족(右姓望族)이라 불리는 유력 귀족집단이 존재하였다. 이들은 발해가 존재한 대부분의 기간동안 외교, 군사, 정치 주도권을 잡았고, 이 중 고씨, 오씨는 발해 멸망 후 발해부흥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고, 장, 이는 고구려계로, 오, 양은 말갈계로 추정되지만 두씨는 기록이 미비하여 알 수 없다. 이 외에도 하(賀), 왕(王), 임(任), 해(解),수(受), 율(聿), 배(裵), 박(朴), 최(崔) 등 부여계, 고구려계, 말갈계를 비롯한 중국계, 신라계도 포함된 49개 족성(일반귀족)이 존재하였다.

왕비족으로는 기록이 부재하여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간왕의 왕후인 순목황후의 성씨인 태씨(泰氏)가 존재하며 무왕 시기 등장하는 임아가 왕의 장인이 맞다면 임씨(任氏)또한 왕비족에 포함될 가능성이 있다.

편호(編戶)는 국가호적에 편입된 평민으로 신분이 보장되었으며 나름대로 자유로운 삶은 영위하였고 평민들은 농민이 주가 되었으며 이들은 부세와 요역, 병역 등을 감당하였다.<<구당서 발해전>>

천민계층으로는 부곡민과 노비가 존재하였으며 부곡(部曲)민들은 신분이 자유롭지 못한 계층으로서 그 신분이 편호보다 낮고 노예보다는 좀 높았으나 주인과의 예속관계가 비교적 강한 농노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노비는 가장 신분이 낮고 착취와 압박을 가장 심하게 받았다. <<송막기문 발해국>>

옆나라 신라의 골품제처럼 공고한 신분제가 발해에도 있었는지는 기록의 부족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그 정도를 떠나서 전체적인 양상은 동시대 신라와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 발해의 인명들을 대조해 보면 발해 역시 대씨가 고위 관료 대부분을 독점하는 양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최상위에서 한 단계 아래 급 벼슬에 여섯 우성망족이 주로 분포한다. 그리고 발해에서도 자체 과거시험이 따로 없었으므로 당나라 빈공과를 노리는 유학생을 많이 보냈는데,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編)을 참고하면 정작 유학생은 조효명, 유보준, 해초경 같은 비주류 성씨를 가진 인명이 상대적으로 많이 확인된다. 신라에서도 주로 최고 신분에서 한두 단계 아래면서도 유학생을 뒷바라지할 재력은 있는 6두품 계급이 당나라 유학을 주로 떠난 것처럼, 발해에서도 대략 그 정도 가문들이 본국에서의 가문의 한계를 당나라 유학 경력으로 보완하려는 경향이 나타난다.


5. 경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발해/경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문화[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발해/문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군사[편집]






파일:external/gunsight.jp/bokkai-image01L.jpg

발해의 군사 제도는 명칭과 구조는 당의 16위제를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각 위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역할을 담당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또한, 구체적으로 각 군사 조직의 역할과 그 운영 원리에 대해서도 뚜렷한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재 발해의 군대는 신당서 발해전의 기록 해석의 차이에 따라 좌맹분위(左猛賁衛), 우맹분위(右猛賁衛), 좌웅위(左熊衛), 우웅위(右熊衛), 좌비위(左羆衛), 우비위(右羆衛), 남좌위(南左衛), 남우위(南右衛), 북좌위(北左衛), 북우위(北右衛)로 이루어졌다는 10위(十衛)설과 남좌우위(南左右衛), 북좌우위(北左右衛)를 각각 하나로 보고 8위제였다고 보는 견해로 나뉘어졌다. 맹분위(猛賁衛), 웅위(熊衛), 비위(羆衛)가 궁성의 숙위를 담당하고, 남북의 좌우위가 각각 남위금병(南衛禁兵), 북위금병(北衛禁兵)의 역할을 담당했으리라고 추측된다. 이외에 고려사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좌우위가 별도로 있다. 각 위에는 대장군(大將軍) 1인, 장군(將軍) 1인씩을 지휘관으로 두었다. 각 위의 장군 아래에는 소장(少將) 1인과 낭장(郎將) 1인, 장사(長史) 1인, 병조참군사(兵曹參軍事) 1인, 교위(校尉) 5인 등 다수의 지휘관이 있었다.

또한, 각 지방에 주둔하고 있는 군사 조직에 대해선, 촌장인 수령을 지휘관으로 촌락민들을 병사들로 징집하는 군사 조직이 촌락을 단위로 조직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속일본기에 기록된 발해의 관제 중 과의도위(果毅都尉), 별장(別將)은 당나라군에서 나타나는 절충부의 속관이기 때문. 이 절충부는 10위에 배속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병력동원력은 전신인 고구려에 비해 많이 떨어졌을 거라 생각되는데, 무왕 시기 대문예가 무왕에게 한 말이라든가, 말기인 점을 감안하더라도 최대 3만+@밖에 동원하지 못한 걸 보면 고구려가 아닌 오히려 백제의 동원력과 비슷해보인다.

8. 지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발해/지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初, 黑水西北又有思慕部, 益北行十日得郡利部, 東北行十日得窟說部, 亦號屈設, 稍東南行十日得莫曳皆部, 又有拂涅·虞婁·越喜·鐵利等部. 其地南距渤海, 北·東際於海, 西抵室韋…後渤海盛, 靺鞨皆役屬之, 不復與王會矣.

당초 흑수의 서북쪽에는 사모부(思慕部)가 있고, 북으로 10일을 가면 군리부(郡利部)가 있고, 동북으로 10일로 가면 굴설부(窟設部)가 있다. (굴설은) 굴설(屈設)이라고도 한다. 조금 동남으로 10일을 가면 막예개부(莫曳皆部)가 있고, 또 불열(拂涅)·우루(虞婁)·월희(越喜)·철리(鐵利) 등의 부가 있다.

그 땅은 남쪽으로는 발해에 이르고, 북•동쪽으로는 바다에 닿아 있으며, 서쪽으로는 실위에 이른다…후에 발해가 강성해지자, 말갈은 모두 그들에게 역속(役屬)하여 다시는 왕과 만나지 못하였다.

신당서 북적열전 흑수말갈


발해의 여러가지 지도. 자연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대륙 중앙에 위치한 발해의 영역이 어디까지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과 연구가 있었지만 사료가 부족하여 정확한 영토가 어느 정도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리고 현대 발해사 연구와 얽혀있는 한(남북)중일러 각 국가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에 맞는 지도를 채택하는 경향이 있다. 러시아만 봐도 발해 연구사 초기에는 연해주 - 아무르강 하류 북만주와 겹치는 발해의 동북방 영역을 넓게 인식했으나 근래에 들어서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현대에 러시아 국민으로 편입된 연해주 - 시베리아 지역 원주민들의 역사를 발해보다 높게 평가하려는 의도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꼭 러시아만 그런게 아니라 동북공정을 마무리하는 중국, 자신들의 만주 제국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발해사를 연구했던 일본이 있다.

파일:attachment/발해/IE001206652_STD.png

위의 지도는 중국 학계의 지도이다. 의외로 중국에서는 발해의 동북이 넓게 그려진 지도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발해의 동북이 러시아 방면으로 광범위하게 뻗쳐 있는 지도를 사용하곤 하는데 그 이유가 발해를 당의 도독부 정도로 보아서(…)이다. 중국은 어차피 발해를 말갈과 동류로 인식하며 말갈이 러시아 방면까지 넓게 퍼젔으니 발해도 도긴개긴이라는 식이다. 중국에서 제작한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위 지도는 일본에서 제작되었지만 저런 지도가 일본의 주류는 아니고, 일본에서는 주로 아래 지도에서 요동과 서북한을 제외한 지도가 주류이다. 일본의 교과서나 역사책을 보면 알 수 있다. 일본은 대체적으로 발해를 말갈의 역사로 보는 편이다. 다만 일본어 위키백과의 발해 항목에는 한국어도 병기되어 있다. 일제 시절에는 만선사관을 정당화하기 위해 한국 역사로 보기도 했다.

파일:attachment/발해/22-0440265_1.jpg

한국의 교과서에 실려 있는 지도. 왠지 대부분의 경우 발해의 북쪽 국경을 랴오허강, 쑹화강으로 삼는다. 일부는 요동과 서북한 지역을 무주공산이라 주장하기도 하는데, 조선시대에 발해와 관련된 자료들 중 정약용아방강역고에서는 발해가 평양 점유에 실패했다고 적은 반면 유득공발해고는 평양 일대를 발해가 정복했다고 주장한다. 옛 기록에서부터 발해는 평양 정복 관련 의견이 갈렸고 그 이전의 1차 사료들도 하나같이 시원하게 발해의 영토가 어디까지인지 명확하게 말해주는 기록이 없다보니 추정으로 할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단, 평양을 중국 강역에 넣으려는 억지 시도와는 별개로 평양이라는 도시 그 자체의 국적에 대해서는 한국학계에서도 의견이 대립한다. 과거에는 나당 양국의 대동강~원산만 협약을 기준으로 대동강 이남의 평양(낙랑 치소)은 신라령, 이북(평양성)은 발해령으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였다. 그러나 요즘 들어 평양과 평안남도 남부 대부분이 발해보다는 신라 영향권에 가까웠다는 주장이 점차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 8~9세기 양국의 국경 획정은 한국사학계에서도 상당히 중대한 문제로 평양 일대가 신라령이라는 판단이 확정된다면 남북국시대 지도(특히 교과서 수록 지도)를 통째로 수정해야 할 판이다. 문헌사료적으로는 조선시대에 발해와 관련된 자료들 중 정약용아방강역고에서는 발해가 평양 점유에 실패했고 평양은 신라가 점유했다고 적은 반면 유득공발해고는 평양 일대는 발해영토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두 사서 모두 남북국시대로부터 대략 800여년이나 지난 후대의 기록이기 때문에 신뢰성이 낮다. 그나마 당대의 기록에 근접했을 고려사에서는 신라가 평양을 점유했다고 기록하였다. 다만 신라의 점유가 매우 느슨한 형태였는지 평양이 황폐화되었다는 기록 역시 적혀있다. 남북국시대 당시 평양의 지위와 국적에 대해서는 평양시/역사 항목으로.

한국 측은 대한민국 국사 교과서를 위시하여 발해의 요동 지배를 확실시 한다. 실제로 요동과 서북한 지역을 무주공산으로 단정지어 버리면 왜 신라군과 당군의 진격이 막혔는지를 설명할 길이 없으며 남쪽으로 발해가 위치한다는 것은 요동지배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외국 학계에서는 발해의 요동 점유 문제에 대해 다소 신중히 접근하는데 발해는 고구려와 달리 요동과 평안도 지역에 고고학적 유적을 거의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 현종 시기 나당 연합군의 발해공격에 대한 논란은 제외하고서도 곧 이어서 당나라가 안사의 난이라는 내란, 그리고 각 지방 번진들의 난립으로 혼란에 빠지면서 영역이 줄어들었기에 서북한지역과 요동지역에서의 발해의 영역 여부는 정말 정복했거나 아니면 최소 영향권 안으로 가져온 것은 명백해 보인다.

당의 북동 지역 번진이였던 평로가 안사의 난 중에 산동으로 이동하였다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거의 확실하게 생각된다. 특히 요동 지역은 주요 거점이기 때문에 당나라, 발해, 후의 거란이 치열하게 군사적 대립을 벌인 지역이다.거기다가 나라이름부터 발해이기도 하고.

파일:학자별 발해 국경 표기 지도.png
학자별 발해 강역 추정도. 상단의 초록색 원은 트로이츠코예 유적의 위치이다.

최근 트로이츠코예 고분군이 발견되면서 발해 북방 영토 범위에 큰 혼란이 생기기도 했다. 트로이츠코예 고분군의 위치가 기존 발해 영역으로 간주되던 기준선에서 한참 북쪽에 있는 아무르강 너머의 서아무르 평원의 블라고베셴스크 주변에 있기 때문. 최근 연구에 따르면 발해인들이 서아무르 유역까지 진출했다는 연구 결과도 나오고 있으므로 아무르 강 너머까지 지배 범위가 확대될 수도 있다.

차지했던 남만주, 연해주 지역은 산지비율이 많다. 그렇기에 사람이 살기 어렵다. 북만주나 요동쪽이 평야 비율이 많다.#


8.1. 행정구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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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京)
상경
용천부

중경
현덕부

동경
용원부

남경
남해부

서경
압록부

부(府)
장령부
부여부
막힐부
정리부
안변부
솔빈부
동평부
철리부
회원부
안원부
독주주
영주 | 동주 | 속주






파일:external/www.greatcorea.kr/2012100221004083.jpg

발해의 행정구역은 5경(상경 / 중경 / 동경 / 남경 / 서경) 15부(상경용천부 / 중경현덕부 / 동경용원부 / 서경압록부 / 남경남해부 / 부여부 / 동평부 / 막힐부 / 철리부 / 정리부 / 회원부 / 안변부 / 안원부 / 솔빈부 / 장령부 /) 62주와 3개의 독주주로 구성되었다. 주 아래에는 100여개의 현(발해고 지리고에는 113현으로 나옴)이 있어 부 - 주 - 현의 3단계 행정 관리 체제를 갖추었다. 부에는 도독을 두었고, 주에는 자사를 두었으며, 현에는 현승(縣丞)을 두었다.

이에 따르면 발해의 지방 통치는 행정구역을 일원적으로 배치한 중앙집권적 통치처럼 보이지만, 부족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실제 발해의 통치는 '수령', '대수령'으로 호칭된 전국 지방세력의 자체 권력을 인정하는 형태로 간접 통치의 범위가 넓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일본 사서 속일본기에는 779년에 '발해'와 '철리부'가 마치 서로 다른 나라인 것처럼 별개의 타이틀을 달고 일본에 사신을 보내기도 했고, 발해 사신과 철리인 사신이 일본 조정에서 윗자리에 누가 앉느냐를 두고 경쟁할 정도로 발해에 복종하지 않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중국 사서에서도 802년 말갈 수령들이 발해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고 당나라에 조공한 기록이 있다.


9. 외교[편집]





파일:신라-발해교류.jpg
남북국시대의 교류.


9.1. 신라와의 관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통일신라-발해 관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흔히 남쪽의 신라와는 고구려를 멸망시켰다는 이유로 사이가 안 좋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그저 별로 친하지 않고 서로를 동족으로 생각하지 않을 뿐이었다.[37] 그렇다고 삼국시대 때처럼 열심히 싸우거나 아주 불구대천까지는 아니었고, 대신 데면데면한 관계만 200여년간 유지했다.

다만 두 나라가 크게 싸울 뻔한 적이 있긴 있었다. 733년에 외교 관계에 있던 당나라의 요청을 받고 신라가 발해를 공격하러 가다가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도저히 못 가겠다는 핑계로 그냥 포기하고 돌아간 것과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 때 일본이 발해에게 지원을 요청했던 것인데, 이는 오히려 발해가 거절했다. 요사 지리지에서 발해 선왕이 신라에 승리한 기록이 있지만 요사란 책 자체가 신뢰도 면에서 문제점을 지적받는 데다 같은 시기 신라는 오히려 대동강 유역으로 약간 북진했기 때문에 타 기록이나 고고학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일본 기록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신라가 발해에 승리한 적이 있다는 기록도 있지만, 이건 맥락상 과거 삼국시대에 신라가 고구려에게 승리했던 어떤 전투를 고구려의 후신인 발해국으로 오해하여 기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발해는 신라도라고 불린 통로를 통해 신라와 교류했다. 당나라 가탐의 고금군국지에 따르면 신라 천정군(지금의 원산시 일대)부터 발해의 책성부(동경 용원부로 추정)에 이르는 길목에 39개의 역참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삼국유사에서 이를 인용했다. 한편 삼국사기에서는 평양부터 국내성까지 17개 역참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국내성을 거치는 서쪽 육로도 얼마나 많이 이용되었는지는 명확하지는 않더라도 존재는 했던 것으로 보인다.

양국간에 군사적 충돌은 인접국 치고는 거의 없는 편이었지만, 라이벌 의식 같은 건 양측 다 가지고 있었는지 당나라에서 신라 유학생들과 발해 유학생들의 신경전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당나라 빈공과의 신경전이 기록되어 있다. 빈공과의 최초 합격자는 물론 합격자의 대다수를(자그마치 80%!) 신라가 차지했는데, 점차 발해 출신의 합격자가 많이 나오자 신라인들이 언짢게 생각했다. 급기야 발해에서 수석을 배출하자, 신라에선 "발해가 과거에 당나라랑 싸운 거 잊은 거 아니겠죠?"라고 항의하기도 했다. 가령 신라 유학생의 거두인 최치원은 발해를 매우 무시하고 발해에 뭐든지 질 수 없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외에도 발해 유학생 오소도와 신라 유학생 이동의 경쟁, 그리고 오소도의 아들인 오광찬과 신라의 최언위의 경쟁 등의 사례도 있다.

그나마 간혹 마지못해 어쩌다가 간혹 발해가 '고려'임을 인정한 적이 있는 당나라와는 달리, 신라는 발해를 한번도 '고려'로 간주한 바 없었다.[38] 신라의 발해에 대한 공식 입장은 발해는 고구려와는 무관한 말갈족들 나라 내지는 고구려의 '잔당'이란 것으로, 굳이 말하면 현재 러시아가 발해에 대해 가진 견해와 같다. 이는 신라의 삼한통합 이데올로기에 발해란 나라가 존재 자체로 이를 부정하는 게 될 수 있기에, 발해의 고구려성을 철저히 부정해야 했던 상황에 그 원인이 있다. 신라 왕실이 생각보다 흔쾌히 왕건의 고려가 바로 그 '고려'임을 왕실 차원에서 승인했던 태도와는 완전히 대조되는 대처.[39]

또한 후삼국시대가 개막한 이후인 897년 당나라에 사신으로 온 대봉예가 "우리가 신라보다 국력이 앞서니 자리를 바꿔주시오!"라고 했다가 당나라는 의전서열은 국력의 강약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이유로 거부당하고, 신라는 발해의 요구에 발끈하며 발해의 주장을 물리친 당나라에 감사하다는 글을 보내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어찌 보면 라이벌 관계.

실제로 당나라에서 사신의 자리는 상당히 중요해서 자리를 둔 이런저런 잡음이 일기도 했다. 좋은 자리에 앉을수록 좋은 대접을 받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 즉, 발해는 당나라에 이젠 우리가 더 세니까 신라보다 더 좋은 대접을 해주라고 말한 거다.


9.2. 당과의 관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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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를 멸망시켰고 발해를 건국하는 과정에도 전쟁을 치른 나라였기에 초기에는 꽤 치열히 대립했다. 서로 간에 많은 전쟁을 치렀으며, 당은 발해 시조 고왕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하면서 낮추어 부르기까지 했다. 군왕은 국왕(國王)보다 격이 낮은 명칭인데, 발해의 건국 자체가 천문령 전투에서 당군을 패퇴시킨 뒤에 비로소 성립한 것이므로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무왕 때에는 당의 본토 산둥성만리장성에 근접한 마도산을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왕 때부터 평화적으로 문물 교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며 서기 762년에 당이 문왕을 발해 국왕으로 책봉하면서 발해를 나라로 인정했다. 이후로는 두 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큰 충돌 없이 우호 관계를 유지했고 서로 간의 문화 교류 역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9.3. 일본과의 관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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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거란과의 관계[편집]


발해가 건국하는데 거란족은 큰 역할을 했다. 당시 거란족이 당나라 내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틈을 타 대조영이 옛 고구려인을 이끌고 동모산으로 가서 발해를 건국했기 때문이다. 또한 무왕 시기에는 발해, 돌궐, 거란의 3세력이 연합해 마도산 전투에서 당군을 물리치기도 했다.

이후 발해의 국력이 선왕 시기에 이르러 강대해졌을 때에는 거란도(契丹道)라는 무역길이 트여 발해와 거란 양국의 교역이 활발해 지기도 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호적이던 양국의 사이가 원수가 될 지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10세기가 시작할 무렵, 당나라가 멸망하고 초원이 경쟁 세력이 없어 강성해진 거란 연맹의 야율아보기를 세워 칭제건원을 하고 주변국에게 복속을 요구하였다. 이 때에 요동 지역을 두고 발해와 거란의 팽팽한 신경전이 계속되었는데 요의 국력이 점점 막강해지자 발해는 중국, 신라, 일본, 해족 등과 연합해 대 거란 전선을 형성해 맞서는 것을 구상한다.

하지만 중국과 한반도, 일본 열도는 하나같이 전부 분열기를 맞이하고 내부가 혼란에 빠져있는 때라 발해의 요청에 부응하지 못했고 해족조차 거란에 병합되었기에 발해가 요에 맞서 싸울 동맹이 없었다.

그래서 발해는 요동을 두고 거란과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지속했으나, 요동을 잃고 전선이 넓어져 점점 부담이 커지고 있었다. 발해와의 전쟁에서 유리한 입지를 차지한 야율아보기는 20만 대군을 동원하여 방어력이 약화된 부여부를 급습해 함락하고 상경 용천부를 포위한 다음, 보름만에 발해를 멸망시켰다.

이후 발해인은 함락당하지 않은 거점을 중심으로 부흥 운동을 전개했으나, 요의 빠른 진압과 저항 세력의 약화로 인해 부흥 운동은 실패했다. 그러나 요는 발해 고토의 지배가 어렵고 나라가 멸망당한 발해인의 원한이 깊어 부흥 세력들이 붕괴했어도 발해인들의 저항이 계속 이어진다는 어려움에 직면해 발해인들을 강제 이주한다는 초강수를 써서 발해인들의 저항을 무력화했다.

다만, 요가 이러한 강경책만 구사한 것은 아니었다. 형식적이긴 했으나, 발해인 귀족과 왕족들을 우대하고 거란인 귀족, 황족과 통혼시켰다. 그리고 요서에 강제 이주당한 발해인들을 위해서 세금을 아주 낮게 부과하고 전매도 거의 실시하지 않았다. 또한 발해인들을 관료와 군인으로 임용하고 동경도 지역의 주요 직책, 지방관직에도 임명했다. 즉, 요의 발해인 정책은 강온양면책이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여요전쟁에서도 발해상온 고청명이 지휘하는 발해인 부대가 요나라 소속으로 고려군과 싸웠다.[40]

그러나, 점점 발해인에 대한 차별이 강해지고 중앙에서 파견된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폭정, 잘못된 통치로 발해인들의 반감이 폭발해 대연림이 흥료국을 세우기도 했다. 이후, 요가 쇠퇴하여 여진 완안부의 아골타가 봉기했다. 아골타는 발해인들을 회유하여 그들을 여진에 편입시키려 했는데, 요의 착취와 폭정에 진저리가 난 발해인들은 그간 여진인들과의 적대적 관계에도 불구하고 아골타의 제의를 받아들여 아골타가 요를 무너뜨리고 금을 세우는 것에 적극적으로 협조했고, 금나라는 요를 무너뜨리고 발해인들을 통치 체제 안으로 편입시켰다.

참고로 옛 발해 지역인 현재의 만주 일대에서는 홍라녀 녹라녀 전설이라는 발해의 토속 전설이 전해지는데 배경이 발해 최전성기인 선왕 대이다. 그런데 이 전설에서는 주인공이 거란의 공격으로부터 위기에 빠진 발해를 구해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이를 토대로 볼 때 해동성국 시기였던 이 때조차 발해인들의 거란에 대한 공포심 및 적대감이 상당한 수준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즉 발해-거란의 적대관계는 당나라 멸망 한참 전부터 이미 조성되어 있었다는 것.


10. 왕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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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왕릉#발해[편집]





12. 인물[편집]





13. 유민[편집]





14. 역사귀속과 계승인식[편집]



발해는 현재까지도 밝혀진 기록과 정보가 굉장히 적은 고대국이다. 그에 따라 역사 귀속 문제에 대해서 논란이 많은 국가인데 해외학계에서 발해는 확실히 한국의 역사로 여겨진다. 하지만 중국 사용자가 굉장히 많고 누구나 수정이 가능한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한국어, 영어, 한자 표기가 되어있는 고구려와 달리 발해는 한국식 발음으로 문서제목이 올려져있고 문서 내내 한국어 발음과 중국어 발음, 러시아어 발음이 병기되기도 한다. 한국계의 관심이 적어진 것도 하나의 이유이다. 그로인해 영어 위키백과의 발해 문서에선 수정전쟁이 벌어지곤 한다. #

오늘날 중국에서는 발해를 고구려와 함께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하여, 당나라의 지방정권 혹은 말갈족의 나라로 주장하는 동북공정을 진행 중에 있으며, 고구려와 발해 성곽을 만리장성의 일부로 판단하여 복원 계획에 포함시키거나, 당나라 황궁인 함원전보다 더 컸다는 상경성 제2궁전지는 중국 정부에서 비공개로 보수 작업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 대한 사진도 공개되지 않아 더 연구해야 될 부분이 많다. 지금은 중국 사회과학원고고연구소가 발행하는 잡지에 실린 짤막한 발해 비문 정도를 통해 일부를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한중사 편입 논쟁은 후술된 한·중 역사 논란 항목으로.).

특히 중국은 한국뿐 아니라 북한 고고학계에도 철저히 비공개한다고 한다. 북한에 초대받아 북한 유적을 널리 답사한 유홍준의 저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의하면 북한 고고학자는 애초에 중국 입국비자를 안 내줘서, 만주지역 답사는 오히려 북한 학자보다 한국 학자가 더 자유롭다고 한다. 물론 한국 학자의 고구려, 발해 유적지 답사도 막거나 방해한다고는 하지만[41] 유적지 근처에서 접근을 방해하는 일이 있다는 것이지 일단 중국 입국은 쉽게 할 수 있으니 그럭저럭 유적지 답사가 가능하지만 애초에 북한 역사학자는 중국 국경선 자체를 못 넘는다. 중국과 북한이 서로 우호국가라는 이미지와 달리 의외로 북중 학자끼리 고대사 교류도 서로 거의 없다고 한다. 북한도 북한 지역에 있는 북청군 청해토성, 청진시 청암구역 유적 등 발해 유적을 나름대로 발굴조사하고 있다는데 애초에 북한 지역이 발해의 중심지가 아닌 남쪽 변방에 해당하는 지역이라 중요 유적이 적어서 한계가 있다. 아마 중국의 동북공정이 북방계 국가들을 대상으로 하는데 지리적 이유로 한국보다 북한이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기 때문.

러시아에서는 발해를 자국의 퉁구스족과 연관지어 발해를 퉁구스족의 첫 국가로 인식한다[42]. 어찌됐던 발해는 건국 당시부터 여러 민족이 섞인 다민족 국가였으며 발해의 정보는 자세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대조영과 지배계층의 민족 구성에 관한 논쟁은 현재진행중이며 따라서 아직까지 완벽하고 확실한 정설은 없으나, 고구려를 계승하려고 했다는 점 만큼은 분명하다.


15. 발해부흥운동[편집]





16. 발해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서[편집]



16.1. 한국[편집]


  • 고려사
  • 고려사절요
  • 계원필경
  • 동사강목
  • 동국통감
  • 발해고[43]
  • 삼국사기
  • 삼국사절요
  • 삼국유사
  • 제왕운기


16.2. 중국[편집]


  • 구당서
  • 요사
  • 금사
  • 송사 [44]
  • 발해국기
  • 신당서
  • 통전
  • 당회요
  • 책부원귀
  • 구오대사
  • 신오대사


16.3. 일본[편집]




17. 발해 유적[편집]


아쉽게도 대한민국에는 발해 유적이 아예 없으며 북한, 중국, 러시아에만 있다. 애시당초 발해 영토 중에 현재 대한민국 영토인 곳이 전무하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일.

다만, 강릉에 발해의 왕족인 대씨가 쌓았다고 전해지는 대공산성이 있긴 하다.


17.1. 북한 소재[편집]


현재까지 발굴된 1172곳의 발해 유적 중 총 84곳이 북한에 소재해 있다.#

  • 개심사: 함경북도 칠보산에 위치. 대웅전 보수 과정에서 선왕 9년(826) 병오 3월 15일에 창건됐다는 종이가 든 나무함이 발견되어 발해 시대에 창건된 절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한반도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발해의 사찰 유적으로, 북한에도 통일신라의 사찰은 꽤나 존재하지만 발해 사찰은 이 함경북도의 개심사만이 유일하기에 역사적 중요성 또한 매우 높다.
  • 고읍성: 평안남도 영원군 용성리 위치. 성벽의 둘레길이는 2,200m이며 현지에서 발해성으로 불리는 산성이다. 북한 학계의 승성호는 이 산성을 이 일대의 양마성과 함께 발해의 초기 성으로 판단하였다.
  • 궁심고분군: 함경북도 회령군 궁심동 위치. 발굴된 궁심고분군의 무덤 형식들 중 지상식 석실봉토분이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다만 석실 내 석관의 존재와 원형 혹은 타원형에 가깝게 모를 줄인 석실의 평면형태 등은 전형적인 발해 고분의 특징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어, 학계에서는 이를 발해 고분에서 독특하게 나타나는 지역성으로 보는 의견이 주를 이루고 있다.
  • 부거석성: 함경북도 청진시(광복 당시 부령군) 청암구역 부거리 위치. 성 둘레 길이는 1,236m이며 현재 북한 학계에서 동경용원부의 소재지로 주장하는 유적이다.
  • 양마성: 평안남도 영원군 마산리에 위치. 성 둘레길이는 약 100m이고 성 부근에서 말굴레, 말안장, 말편자 등의 마구류와 금속제 활촉 등이 발견되었다. 또한 이 유적을 소개한 북한 학계의 승성호는 이 성이 발해임금이 용성리에 성을 쌓고 살 때에 그가 사용하던 군마들을 사양 관리하였던 말방목지였다고 전하는 『녕원군지』와 이 지역의 노인들의 의견을 전하면서, 마산리(馬山里)라는 지명도 발해 때 이 일대에서 말을 많이 길렀기 때문에 유래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다만 용성리에 있는 발해성(고읍성)에서 발해임금이 살았다는 『녕원군지』의 내용과 관련하여서는 발해가 이 일대에 도읍을 정한 적이 없기 때문에 발해임금과는 관련이 없음을 지적하였다.
  • 양화사: 평안북도 태천군에 있는 사찰로 개심사처럼 발해 시대 유적임을 확인할 수 있는 유물은 없지만 <양화사사적기>에서는 발해 시대에 창건된 사찰이라고 전하고 있다.
  • 연봉리 기와가마: 평안북도 선천군 연봉리 위치. 북한 서쪽 지역에서 발견된 거의 유일한 발해 유적이다.
  • 오매리절터: 함경남도 신포시 금호지구 오래미 절골 위치. 고구려 문화층과 발해 문화층으로 나뉘며 발해 사지에는 고구려식 1탑 3금당 건물 배치를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 운두산성: 함경북도 회령시 유선노동자구 위치. 산성이 자리해 있는 운두산은 해발 570m인 비교적 높은 산이며 성 둘레의 길이는 대략 6km이다.
  • 청해토성: 함경남도 북청군 하호리에 위치. 동벽 332m, 서벽 342m, 남벽 328m, 북벽340m 총 둘레 1,342m의 정방형 평면형태를 갖춘 흙으로 쌓은 평지성이다. 주변에 위치한 거산성, 안곡산성, 룡전리 산성 등과 함께 수도 방위체계를 갖추고 있으며 평리 고분군 같은 대규모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는 점, 치, 망루 등 성곽시설을 갖추고 있는 점 등의 고고학적 근거를 토대로 학계에선 현재 남경남해부의 유력한 소재지로 비정하고 있다.


17.2. 중국 소재[편집]




17.3. 러시아 소재[편집]


  • 보리소프카 절터 유적
  • 스타로레첸스코예 유적
  • 콕샤로프카 유적
  • 크라스키노성: 발해 시대 명칭은 염주성.
  • 트로이츠코예 유적


18. 발해 관련 창작물[편집]


  • 발해를 꿈꾸며 - 서태지와 아이들3집 타이틀곡으로 발해를 꿈꾼다는 것은 다시금 해동성국으로 떠올라 발해 땅을 밟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는 것, 즉 북한과의 통일을 염원하며 만든 노래다. 남북국시대 때 지금의 남북한과 유사하게 남쪽의 통일신라와 북쪽의 발해가 대치했었던만큼 남한을 통일신라, 북한을 발해에 비유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 태조 왕건 - 145회에서 발해의 장수 신덕이 거란의 침공을 피해 고려로 귀순한 사건을 담았다. 184회에서는 발해의 대광현이 백성들을 이끌고 귀부하였으며, 왕건이 왕씨성을 하사하였다.

  • 무영검 - 발해 부흥운동을 소재로 한 무협 액션 영화.

  • 대조영 - 2006년에 방영한 KBS 대하드라마, 발해의 시조 대조영이 주인공이지만 95%가 발해를 건국하기까지의 창작물이었고, 발해 건국이후의 이야기는 정작 드라마 끝자락에 몇회분만 나온다. 발해에 대한 역사의 기록이 많지 않아 굵직한 역사를 끌어와 창작을 더하여 제작되었다.



  • 호랑이형님 - 2부 마지막화에 한때 흰산의 일족이 중경 일대에 살고 있었다는 것과 이 시점에 나온 인물들이 발해의 복식을 착용하고 있었다.

  • 환단고기 - 하위 카테고리인 태백일사에 '대진국본기'라는 발해 전담파트가 있다. 왕들의 연호며 시호며 잔뜩 적어놨지만 그 환단고기인 만큼 역사서로써의 가치는 없다.

  • 고요의 바다 - Netflix 2021년 마지막 한국 오리지날 시리즈인 고요의 바다의 주요 기지 이름이 발해이다.



19. 같이 보기[편집]




20. 관련 사서[편집]












[1] 근현대 만주어로, 푸하이(Puhai)라고 읽는다.[2] 보하이라고 읽는다.[3] 삼국유사 기록[4] 제왕운기 기록[5] 사실 고려는 발해가 멸망하기 전에 건국되었다. 그러나 발해부흥운동이 끝내 실패했기 때문에 한민족 국가의 정통성은 남쪽의 또다른 고구려계 국가인 고려에게 이어지게 된다. 또한 많지는 않지만 고려는 발해의 영토를 일부 수복했으며 200여년간 수용한 수만~수십만 호 단위의 발해 유민들은 한민족의 조상이 되었다. 나아가 고려에 합류한 발해인들은 후삼국시대여요전쟁에서 크게 활약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상당수는 고려의 북진정책에 따라 수도권인 패서(浿西)서경, 그리고 그 이북에 걸쳐 정착하며 일대를 개척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현종 이후의 발해인들은 대부분 북방이 아닌 한강 이남에 배치되었다. (박순우, 『고려 내투 발해인들의 처치 지역 검토 -고려시기 유적 출토 발해계 막새기와를 중심으로-, 2019』)[6] 후발해, 정안국, 흥료국, 대발해 등등이다. 사실 발해의 직계후신은 200여년간 이어진 이들 부흥운동 세력이라고 봐야한다. 부흥운동 과정에서 후발해정안국의 사례처럼 발해인들이 수천에서 수만 호(戶) 단위로 고려에 귀부하면서 흡수된 세력들이 있었던가 하면, 흥료국과 대발해처럼 고려가 흡수할 틈과 여유도 없이 요나라금나라에 의해 차례대로 진압되어 사라진 세력도 있다.[7] 만주에 잔류한 부류들은 훗날 완안아골타를 도와 금나라의 기반을 마련하는데 큰 힘이 되었지만 요나라와의 전쟁에서 철저히 이용당한 뒤 한족들과의 통혼을 강요받았다. 그리고선 산동반도 등으로 상당수가 강제이주되는 등 고초를 연이어 겪으면서 지배계층인 여진족과의 사이가 좋을 날이 없었다. 다만 정몽주요동을 경유했을 때 지은 발해고성(渤海古城)이라는 시를 보면 14세기까지도 아직 발해 유민의 후손들이 만주에서 여전히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성계요동정벌 당시 귀부한 1만 호(戶)를 비롯한 일부는 다시 고려에 흡수되기도 하였다.[8] 발해 멸망 이후 다수의 유민들은 그대로 요나라의 지배 체제에 귀속되어 살아갔지만 요나라 출신의 발해인들이 부흥운동을 일으킨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모두가 순응하면서 살아갔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상당수는 요나라에서 벼슬을 하며 고위직에 오르는 등 출세하였고 여러 방면에서 거란족에 큰 영향을 끼쳐 요나라의 문화적, 행정적 중추로서 활약하였다. 당장 요나라의 행정구역과 단위도 상당부분 발해의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흔적들이 나타난다. 일부는 고려, 금나라와의 전쟁에 동원되면서 크게 소모되었는데, 특히 여요전쟁 당시에는 고청명 등을 비롯한 상당수의 발해인들이 고려군에 의해 죽임당했다.[9] 震國, 振國, 震旦.[10] 당나라에서 부르던 명칭[11] 거란에서 부르던 호칭[12] 바다 동쪽번성한 나라라는 뜻, 발해의 전성기 시절 당나라에서 이들을 칭하던 명칭이다.[13] 대동강 이남을 제외한 지역.[14] 동부[15] 위치가 중국, 러시아 사이에 있어서 각자 자신의 역사라고 경쟁한다.[16] 영주(郢州) · 동주(銅州) · 속주(涑州)로서 중앙에 속한다.[17] 문헌에 따르면 그 군주를 대면할 때는 성(聖), 군주에게 올리는 글에서는 기하(基下)로 존칭하였다고 한다. 금석문상에서는 "황상(皇上)"으로 지칭되며 그 부인은 황후라는 칭호를 가졌다.[18] 중국 정사인 요사에 기록이다.『遼史』卷38 志8 地理志2 東京道 東京遼陽府 “十有二世至彝震, 僭號改元 擬建宮闕, 有五京·十五府·六十二州, 爲遼東盛國”[19] 고구려어, 말갈어, '발해어'라는 용어까지 여러가지 가설이 제시된다. 다만 발해라는 나라 자체가 영토가 넓고, 여러 종족들이 함께 산 다민족국가였기에 여러 계통의 언어가 같이 쓰인것으로 보인다. 한국어족으로 추정되는 발해어와, 퉁구스어족 계통의 여러 언어, 고시베리아 제어 계통의 여러언어 , 몽골어족 계통의 여러언어(거란어를 비롯한 준몽골어족 포함), 중고한어, 소그드어 등. '발해인의 언어'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기록이 부족해 확실시하기는 힘들지만 몇몇 파편적 기록을 통해 신라어와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일본 기록에 의하면 740년 일본 조정에서 신년 축하 조회를 가질 때 발해 사신과 신라학어(新羅學語)를 행렬에 함께 세웠는데 이를 일본 측이 신라학어, 즉 일본어를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어학연수를 간 신라인 학생에게 발해 사신의 통역을 맡긴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20] '발해인'은 고구려인과 고구려에 동화되었던 속말말갈 등으로 추정. 혹은 단순히 발해에 사는 주민으로서의 발해인이 아니라 구 고구려, 구 말갈과 구별되는 발해인 혹은 발해족이라는 독자적인 종족 정체성이 형성되었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단, 발해인들끼리 얼마나 공통의 정체성을 갖고 있었는지, 그리고 '발해인'의 정체성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단언할 수는 없다. 단지 서남부의 고구려인(한국어족)과 동북부의 말갈인(퉁구스어족)이 연합한 다종족 국가라는 주장도 있다.[21] 여러 기록을 통해서 '발해인'과 '말갈인'이 당대에 구별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속일본기1,속일본기2. 즉 발해는 여러가지 종족 정체성을 가진 집단이 공존하는 다문화적 국가였음은 거의 확실하다.[22] 대한민국은 발해를 현재 통일신라와 더불어 남북국시대의 한 축을 담당했던 혈연상의 조상이자 한민족계 국가로 인식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도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영토 기준으로 옛 발해 땅과 중첩되는 곳이 없을 뿐 이는 부여도 마찬가지이므로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23]후백제 영토로도 이주했음과는 별개로 평안도황해도 일대에 발해인들이 가장 많이 정착한 점을 들어 어떻게 보면 혈연상으로 발해인들과 가장 많이 섞인 지역이 북한이기도 하다.[24] 남경남해부를 포함한 과거 발해 남부의 땅 일부가 북한에 속해있으며 발해 때 만들어진 절터 등이 발견되기도 한다.[25] 만주 일부 지역. 물론 현재의 영토가 이곳까지 걸쳐져 있는 것일 뿐이지 중국사에 속하지 않는다.[26]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의 구성 비율에 대한 시비를 떠나 발해는 기본적으로 고구려의 후계를 자처한 국가였다. 언어는 일본의 신라학어(新羅學語)라는 통역사와 대화가 가능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적어도 발해인들은 한국어족에 속한 집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멸망 이후 발해인들의 거취가 크게 세 부류로 나뉘어 각각 거란, 고려, 금나라에 속하게 되었다지만 고려만이 유일하게 발해를 동류(同類), 즉 같은 동족으로 여겼던만큼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본격적으로 한민족의 조상이자 역사로서 인정받았다. 반대로 발해인들을 포섭하려 했던 금나라흑수말갈에 뿌리를 둔 완안부(完顔部)가 주체였으며 이들은 발해인과 반목하는 사이였다.[27] 발해는 중원에서 중화(中華)를 표방하는 나라가 아니었을 뿐더러, 당대 중국인들에게 있어 발해인들은 그저 신라인들과 나란히 이민족을 대상으로 한 빈공과에 응시해야만 했던 엄연한 외국인들이었다. 이는 발해인들을 동족의 예로써 대우하며 높은 관직을 하사하는 한편 탐라인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빈공과로 묶어둬 제한을 둔 고려의 반응과 확연히 다르다. 중국이 국내의 만주족을 내세우며 발해의 역사에 대한 지분을 요구해도 말갈족은 나라의 주체가 아닌 속민에 가까우면서도 때론 반독립적인 집단이었기 때문에 일본으로 향하는 발해의 외교사절들과는 한 배를 타면서도 서로를 따로 구분할 정도였다. 또한, 말갈과 만주족이 동의어인 양 서술하며, 일원적으로 이어지는 집단으로 보기 힘들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는 중국 측의 어폐 역시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28] 연해주하바롭스크 지방. 당연히 현재 영토가 이곳까지 걸쳐져 있는 것일 뿐이지 러시아의 역사가 아니다. 당시 러시아는 루스 카간국키예프 루스의 일부였기에 동유럽에만 속해있었다.[29] 광개토대왕~장수왕때부터 고려 국명을 사용해오던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왕씨고려와 구분되기도 한다.[30] 거란의 침공으로 바로 멸망한 것 같지만 당시 기록들을 살펴 보면 이미 한반도 북부에 통치권을 잃어 말갈인들이 독자적으로 국명을 자칭하고 신라와 화친한 기록들이 존재한다. 즉 이때 부터 나라 상황이 좋지 않았다.발해/역사 [31] 삼국유사에서는 진단(震旦)이라고 나오는데, 이는 산스크리트어 '시니타나(cinitana)'를 음역한 것으로 '동방'을 의미한다. 이 표현은 불교에서는 주로 중국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32] '대(大)씨의 나라'라는 뜻이다. 비슷한 원리로 거란인들은 송나라를 정식 명칭인 '송 구르'외에도 '조(趙)씨의 나라'라는 뜻에서 '자우구이 구르'라고 부르기도 했다.[33] 다만 발해의 초기 국명이 삼국유사에서의 서술대로 진단(震旦)이었다면, 대내용 명칭으로는 계속 이 이름이 사용되었고 주변국에도 알려져 거란인들 역시 이렇게 부르게 되었을 가능성은 있다.[34] 비슷한 사례로 보이는 과거 베트남대월국처럼 외부 국호는 안남국(安南國)이고, 내부 국호는 대월국(大越國)였다는 사례가 있는 것처럼. 발해도 외부 국호는 발해이고, 내부 국호는 고려였을 가능성이 있다.[35] 저게 모두 직책이라고 본다면, 국무총리(대내상)와 장관(부경) 사이에 부총리(좌우상)는 물론 2단계가 더 있던 꽤나 복잡한 관료제였다.[출처] - 발해의 역사와 문화(동북아역사재단 편)[36] 고구려 후기의 인구는 무려 120만 명 이상일 것으로 추산된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넓은 땅을 모두 벗어났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37] 통일신라에서 동족이라 생각 안 했다고 발해를 한국사로 치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식이면 훗날 통일되며 만주족을 구성하는 건주여진과 해서여진도 동족의식은 없었다.[38] 그래도 위의 최치원 같은 경우는 사적으로 “지난날의 고구려가 오늘날의 발해이다.”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는데 이로 보아서 최치원은 발해가 고구려의 후예라는 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인정한 듯하다.[39] 다만 이 때는 상황 상 어쩔 수 없었다. 이미 통일 신라는 후백제와 태봉으로 나뉘어 십 여년 간이나 대치 상황이었던 데다 견훤의 후백제가 틈틈히 신라를 노략질하며 통째로 집어 삼키려는 야욕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 이 당시 국왕이었던 경명왕은 재빠른 형세 판단과 대처로 고려를 정식 국가로 인정, 동맹을 맺고 후백제에 공동으로 대처했다. 이러한 고려와의 우호 관계는 견훤에 의한 서라벌 함락 및 경애왕 시해 사건을 기점으로 경순왕 즉위 초까지 잠시 끊겼다가 고창 전투에서 후백제가 대패하고 고려로 흐름이 넘어가면서 다시 시작된다.[40] 그런데 고려군에도 대도수 등 고려에 투항한 발해 유민들이 포함돼 있었다. 즉 동족상잔이었던 셈이다.[41] 모 고대사 전공 교수의 증언에 의하면 입국하는 순간부터 출국하는 순간까지 매 순간 감시가 붙는다고.[42] 그러나 이는 동북공정처럼 역사왜곡을 통해 발해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시도는 당연히 아니다. 애초에 한국에서도 발해를 말갈과 고구려 유민이 공동으로 세운 국가로 본다. 다만 고구려 유민이 말갈인들보다 국가 건설에 더 영향을 미쳤다고 볼 뿐이다.[43] 현존하는 최초의 발해 역사서[44] 발해부흥운동까지 서술되어 있다.[45] 동모산이 위치해 있는 발해가 최초로 시작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