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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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미국 상원 문장.svg 미국 연방 상원의원 (캔자스 주 클래스 3)
제81-90대
프랭크 칼슨

제91-104대
밥 돌


제104대
셰일라 프램[1]

밥 돌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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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미국 대선 공화당 후보
미합중국 제91-104대 연방 상원의원
로버트 조지프 돌 3세
Robert Joseph Dole III


출생
1923년 7월 22일
미국 캔자스 주 러셀
사망
2021년 12월 5일 (향년 98세)
미국 워싱턴 D.C.
서명
파일:Bob_Dole_Signature2.svg
홈페이지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2] |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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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탤벗 돌
어머니 도런 레이 돌
배우자
필리스 홀덴 (1948년 결혼, 1972년 이혼)
엘리자베스 돌 (1975년 결혼)
자녀
슬하 1명
학력
캔자스 주립대학교 (편입)
투손 대학교 (편입)
워시번 대학교 (B.A.)
워시번 대학교 (법학 / LL.B.)
의원 선수
4 (하원)
5 (상원)
의원 대수
87, 88, 89, 90 (하원)
91, 92, 93, 94, 95, 96, 97, 98, 99, 100, 101, 102, 103, 104[1] (상원)
지역구
캔자스 제6구[2]캔자스 제1구[3] (하원)
캔자스 클래스 3 (상원)
소속 정당

약력
미국 육군 복무 (1942~1948)
캔자스 주 하원의원 (1951~1953 / 제81선거구)
러셀 카운티 지방검사 (1953~1961)
연방 하원의원 (1961~1969 / 캔자스 6구→1구)
연방 상원의원 (1969-1996 / 캔자스 클래스 3)
공화당 전국위원회 의장 (1971-1973)
1976년 미국 부통령 선거 공화당 후보[4]
상원 재정위원장 (1981-1985)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 (1985-1996)
1996년 미국 대통령 선거 공화당 후보
군사 경력
복무
미국 육군 제10산악사단
1942년 ~ 1948년
최종 계급
대위
대령 (명예 계급)
참전
제2차 세계대전
유럽 전역 이탈리아 전선
수훈
은성훈장, 퍼플 하트 훈장, 미국 대통령 자유훈장

1. 개요
2. 생애
2.1. 청년기
2.2. 정치 인생 초기
2.3. 상원의원 시절
2.5. 다시 상원으로...
2.7. 은퇴와 여생
3. 소속 정당
4. 선거 이력
5. 기타


1. 개요[편집]


미국의 정치인. 1996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공화당 대선 후보자였으며,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공화당 부통령 후보자였으나 두 선거에서 모두 패했다.

2. 생애[편집]



2.1. 청년기[편집]


1923년 캔자스 러셀 카운티 출생. 아버지는 캔자스 농장에서 중소 우유 사업을 했다. 어릴 때에는 고등학교 미식 축구 팀에서 활약할 정도로 건장했다고 한다.

1941년, 진주만 공습과 뒤이은 독일의 선전포고로 미국이 2차 대전에 참전하게 되자, 밥 돌 역시 대학교 학업을 중단하고 군대에 입대해 유럽 전선에 투입된다. 그는 제10산악사단의 중위로 주로 이탈리아 전선에서 복무했는데, 2차 대전 참전 경력이 있는 다른 대부분의 정치가와 달리 밥 돌은 정말 최전선에서 죽을 위협까지 무릅쓰고 싸운 "전쟁 영웅" 중 한명이었다.

파일:Daniel Inouye - Robert Dole.jpg

군병원에서 카드게임을 하는 대니얼 이노우에(왼쪽 끝)와 밥 돌(그 오른쪽)
1945년 1월 아펜니노 산맥에서 북부로 도주한 이탈리아군 및 나치 잔당과 전투를 벌이다가 독일군의 포탄이 그의 바로 옆에 떨어져 온 몸에 파편이 박히는 중상을 입었다. 포탄 파편에 의한 감염은 상반신과 오른팔 대부분을 못쓰게 만들었고 밥 돌은 마비되어 바로 군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너무 부상이 심각해 군 병원 측에서 어떤 마약성 진통제를 써도[3] 말이 안듣는다고 신약이었던 스트렙토마이신을 투약했는데, 밥 돌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스트렙토마이신 투약자 중 한명이라고 한다. 7번에 걸치는 대수술과 43도에 달하는 고열을 이겨낸 강인한 정신력으로 밥 돌은 1947년 오른팔을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을만큼 병세가 회복되었고, 1948년 의병제대한다. 이 때 군 병원에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오른팔을 못쓰게 된 대니얼 이노우에를 만나 평생의 절친이 되었다.

그럼에도 오른 팔은 거의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돌은 병원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 연습을 해야했다. 실제로 이후 경례나 악수를 하는 사진을 보더라도 대부분 왼 팔로만 하고 있다.


2.2. 정치 인생 초기[편집]


1950년, 밥 돌은 공화당에 입당하고 잠시 캔자스 주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정치 경력을 쌓았다. 1952년 워시번 대학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자신의 고향인 러셀 카운티의 지방 검사 직에 출마했는데 압도적으로 당선되었다. 1961년까지 총 9년간 지방 검사로 정력적으로 활동하며 주민들에게 신망을 쌓았고, 이를 발판으로 1960년 캔자스 주 제6구 하원의원 선거구에 출마, 민주당 후보를 제압하고 하원의원으로 당선된다.

1962년 그의 지역구였던 캔자스 6구가 인구 미달로 폐지되고 1구로 합구되어 돌 역시 1구로 출마했는데, 접전 끝에 다시 민주당 후보를 물리쳤다. 이후 2번 더 당선되어 4선 의원이 되었다.


2.3. 상원의원 시절[편집]


1968년 프랭크 칼슨 상원의원이 은퇴하자 밥 돌은 그 자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공화당 예비 선거 상대는 캔자스 주지사를 지낸 윌리엄 H. 애이버리(William H. Avery)로 만만치 않은 싸움이 예상되었는데, 돌은 69% 대 31%로 애이버리 전 주지사를 크게 꺾고 공화당 후보로 결정된다. 본선에서도 61%를 득표했고 와이언뎃 카운티 단 한곳을 제외한 모든 카운티에서 승리했다. 이를 눈에 여겨본 공화당 지도부는 1971년 돌을 공화당 전국위원회(RNC) 의장으로 임명했고, 그는 공화당의 선거전략을 이끌면서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전례가 없는 닉슨의 대승을 이끌어내는데 큰 도움을 줬다.

1974년 중간선거에서는 워터게이트 사건제럴드 포드 대통령의 무리한 닉슨 사면 때문에 공화당의 인기가 크게 떨어진 상태였고, 민주당에서도 하원의원 윌리엄 R. 로이(William R. Roy)가 출마해 상당히 선거가 접전이었다. 그럼에도 밥 돌은 50.9% 대 49.1%로 재선에 성공한다.

밥 돌은 상원의원으로서 상당히 보수파에 속했다. 하원의원 시절에는 흑인 민권법안에 통과하는 등 중도적 성향을 보였지만, 1970년대 상원의원으로 활약하면서는 제2차 세계대전 참전 경력 때문에 외교 문제에서 강경 보수의 입장을 표방했다. 조지 맥거번의 유명한 연설인 "피 냄세가 나는 방"[4] 연설에 반발해 맥거번에게 고함을 친 것으로 주목을 받기도 하는 등, 민주당은 물론 공화당 내의 베트남 반전 세력[5]과도 대립했다.


2.4. 부통령 출마[편집]



파일:DOLE 1976.jpg

1976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의 밥 돌과 제럴드 포드
1976년 미국 대선에서 제럴드 포드 대통령은 재선은 커녕 공화당 내에서 대통령 후보 재지명은 받을지 의심이 되는 상황이었다. 대통령으로서의 리더십이 부족하다는 말도 들었고[6], 당내 보수파에게는 너무 중도적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이런 배경 하에서 제럴드 포드는 당내 중도파의 지지를 받던 자신과 대비되게 젊고 보수적인 상원의원인 밥 돌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본래는 하워드 베이커 상원의원이 부통령 후보가 될 예정이었지만, 베이커 의원의 아내가 우울증 증세로 전기치료까지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급하게 교체되었다.[7]

밥 돌은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전국적으로 이름이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지만, 제럴드 포드로널드 레이건을 근소하게 경선에서 꺾고 승리하자 실망해 공화당에 등을 돌린 공화당 보수파의 표심을 다시 끌어들이는 데는 어느정도 성공했다고 평가 받는다. 실제로 공화당 전당대회 전 29%까지 떨어진 지지율이 본선에서는 48%까지 올라갔는데 여기에 밥 돌의 부통령 후보 지명이 약간의 영향을 줬다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밥 돌의 부통령 후보 지명은 포드의 자충수로 평가받는다. 첫번째로 밥 돌은 재선 상원의원으로 무명의 정치가였기에 레이건을 지지한 보수파를 끌어들이기에는 역부족이었고 1976년 대선에서도 보수파의 29% 정도가 포드가 아닌 카터를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두번째로 부통령 토론회에서 밥 돌이 "민주당 전쟁"(Democrat War)이라는 실언을 하면서 포드의 지지율에 영향을 줬다는 주장이 있다. 1976년 대선에서는 최초로 부통령 후보 토론회가 열렸는데, 여유있게 자신의 논리를 풀어나간 프로 정치가 월터 먼데일과 달리 밥 돌은 시종일관 짜증난다는듯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해 부정적인 인상을 줬다. 밥 돌은 이 토론회에서 20세기 이후 터진 모든 전쟁[8]이 민주당의 유약한 국방 정책으로 인해 일어났다고 민주당을 비난하며, 민주당만 없었어도 디트로이트 인구만한 미국의 인구가 목숨을 부지했을거라며 공격했는데 대다수 유권자들은 이 공격이 너무 강경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밥 돌 역시 몇 년 후 이 선거를 회고하며 "민주당 전쟁" 발언은 너무 지나친 것이었다고 자아비판하며, 자신의 그런 강경한 태도가 포드의 낙선에 영향을 미쳤을 것 같다며 후회의 말을 남겼다. 결국 제럴드 포드-밥 돌 조는 48%를 득표하며 50%를 득표한 카터-먼데일 조에 근소하게 패배, 돌은 다시 상원의원으로 돌아간다.


2.5. 다시 상원으로...[편집]


1976년 상원으로 돌아온 밥 돌은 상원 농업위원회 및 재정위원회에서 활동한다. 1980년 상원의원 선거에서 공화당이 승리하자, 밥 돌은 상원 재무위원장으로 재직했는데, 로널드 레이건과 협력하면서도 세금 인상을 지지하는 등 레이건과 미묘한 거리를 두는 것으로 점차 성향이 중도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부통령 후보와 상원 재정위원장을 지내고 성향도 중도화된 밥 돌의 입지는 상원에서 더욱 강화되었고, 1984년에는 테드 스티븐스(Ted Stevens) 의원을 당 내 경선에서 누르고 공화당의 상원 원내대표로 선출되기까지 한다.

파일:BOB DOLE 1988.jpg

1988년의 밥 돌
1986년 상원의원 선거에서 공화당이 원내 다수당 지위를 다시 상실함에 따라 돌은 장기간 상원 소수당 원내대표로 활약했다. 동시에 1988년 미국 대통령 선거 출마도 준비했다. 1988년 대선의 공화당 예비선거에서 두각을 드러낸 세 후보는 밥 돌 상원의원, 현직 부통령 조지 H. W. 부시, 텔레비전 전도 활동으로 유명해진 극우 목사 팻 로버트슨이었다. 밥 돌은 농업 전문가라는 경력을 살려서 레이건 행정부의 파멸적인 농업 정책에 실망한 많은 농부 공화당원의 지지를 받았고,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부시를 2위로 밀어내고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경선에서 지속적으로 패배하며 동력을 잃었다. 밥 돌 자신이 부시와 차별화를 하는데 실패하면서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스트롬 서먼드의 지지까지 얻었지만 사우스캐롤라이나 프라이머리에서 참패하며 사퇴 압력을 받았고, 결국 경선 도중 사퇴하고 부시를 지지한다. 부시의 러닝메이트로 고려되기도 했지만 고령의 부시는 젊은 보수파 상원의원 댄 퀘일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한다.그리고 망했어요...

1990년대 밥 돌은 더더욱 중도적인 성향을 내비쳤다. 타협과 초당적 협력이 강조되는 상원에서 오래 활동한 결과이기도 했고, 공화당 자체가 레이건 시대를 거치면서 많이 보수화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배리 골드워터는 "믿을 수 있나? 우리가 공화당의 새 진보파라네."라는 말까지 할 정도였다.[9]

1994년 미국 중간선거에서 뉴트 깅리치가 우익 복음주의를 내세우며 대승을 거둔 후 이런 기조는 강화되었다. 뉴트 깅리치는 연일 강경한 행보를 보이며 연방정부 셧다운의 파국까지 몰고갔지만, 밥 돌은 이것이 공화당과 미국의 국익 모두에 좋지 않다고 생각해 앨 고어 부통령과 단독 회담까지 가지며 셧다운 해결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깅리치와 공화당 보수파가 타협하지 않으면서 공화당의 지지율은 폭락했지만, 밥 돌 만큼은 빌 클린턴 대통령의 찬사도 받으면서 공화당의 "타협 중도파"로 이름을 알렸다.


2.6. 1996년 대선 출마[편집]


1996년 대선을 앞두고 밥 돌은 마지막 대선 출마를 준비했다. 이때 밥 돌의 나이는 72세, 더이상 정치를 하기도 어려운 나이였기에, 밥 돌은 이 선거를 마지막으로 모든 정계에서 은퇴하겠다고 배수진을 치며[10] 대선 출마를 선언한다. 뉴트 깅리치가 공화당 보수파를 대표해 대선에 출마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공화당의 인기 자체가 깅리치의 노빠꾸 정신으로 추락한 상태였기에 깅리치는 경선에 출마하지도 못했다. 결국 1996년 대선에서 유의미하게 표를 얻을만한 후보는 팻 뷰캐넌, 스티브 포브스, 알렌 스펙터, 필 그램 등 밥 돌보다 훨씬 지명도가 낮은 인물로 압축되었고, 밥 돌은 손쉽게 96년 공화당 예비선거에서 승리한다. 부통령 후보는 돌과 마찬가지로 공화당 중도파였던 잭 켐프였다.

파일:BOB DOLE 1996.jpg

토론회에서 맞붙은 클린턴 대통령과 돌 후보
밥 돌은 1996년 73세 1개월의 나이로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는데 이는 로널드 레이건에 이어 2번째로 늙은 대통령 후보라는 기록이었고, 그마저도 레이건은 80년 대선에서 처음 출마할 때에는 밥 돌보다 젊었기에 사실상 밥 돌은 역사상 가장 늙은 나이에 출마한 대선 후보가 된 셈이었다. 밥 돌은 늙은 나이에 무리하여 전국 유세를 나서다가 9월 18일 넘어지는 등 건강이 우려되는 모습을 많이 보였고, 지지율도 40% 선에서 정체되었다. 하지만 밥 돌은 이에 개의치 않고 반세기 동안 의회에서 봉사한 경륜과 2차 대전 참전 경험, 타협과 중도를 강조하는 등의 낙관주의를 내세웠다.

선거 막판까지도 클린턴과의 격차가 좁혀지지 않자 밥 돌은 선거 패배를 직감하고 마지막 96시간동안 대선일과 동시에 치러지는 하원, 상원, 주지사 선거의 접전 지역을 돌며 마지막까지 더 많은 공화당 의원이 당선될 수 있도록 도왔다. 밥 돌의 예상대로 1996년 대선은 빌 클린턴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표차는 49% 대 40%, 제3지대 후보자 로스 페로도 8%나 얻었다. 비록 밥 돌은 선거에서 완패했지만 "내일은 내가 정치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즐거운 하루가 될 것 같다"며 유쾌한 반응을 보였고, 데이비드 레터먼과 코미디 대담을 나누기도 하면서 담담하게 패배를 받아들였다. 공화당과 민주당의 대립으로 엉망이 된 1994~1996년 사이 밥 돌은 초당적인 협력을 강조하며 신사적인 선거운동을 벌여 모두의 찬사를 받았다.

이 선거에서 밥 돌이 남긴 또다른 유산은 최초의 인터넷 대선 홈페이지였다. 미국 역사상 최초이며 빌 클린턴보다도 빨리 만들었다.대선용 인터넷 홈페이지 지금 보면 조금 촌스러운 면도 있지만 2차 대전 참전용사 출신 대선 후보의 홈페이지라고는 볼 수 없는, 당대로서는 혁신 그 자체인 홈페이지로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었다. 인터넷 만화, 십자말 풀이, 아내 엘리자베스 돌의 쿠키 레시피 등을 포함한 다채로운 홈페이지는 인터넷 선거전의 혁명이었다고 평가받으며, 바로 1년 후에 치러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양당 대선 후보인 김대중이회창이 모두 인터넷 홈피를 사용하며 이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듯한 모습을 보였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국회의원 선거에까지 "인터넷 선거"가 확산되어 임종석, 노무현 등이 인터넷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선거전을 벌이기도 했다.


2.7. 은퇴와 여생[편집]


1996년 정계를 은퇴한 이후로는 공화당의 원로로 존중받으며 여생을 보냈다. 1998년 모니카 르윈스키 탄핵 사건 당시에는 깅리치 의장이 주도한 탄핵안에 반대하며 대통령 비난 결의로 끝날 일을 탄핵으로 크게 벌리고 있다며 공화당 지도부를 비판하기도 했다. 정적이었던 조지 맥거번과는 어느순간부터 친해져[11] 푸드스탬프 자격 요건 완화, 식량 원조 운동 등에 뛰어들었고 이에 대한 공로로 2008년 "세계 식량상"을 공동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2015년에는 공화당의 보수화를 우려하며 젭 부시를 지지했지만, 트럼프가 후보가 되자 밋 롬니조지 W. 부시와 달리 공화당에 대한 애당심을 강조하며 트럼프를 지지했다. 당시 살아있던 공화당 대선 후보(조지 H. W. 부시, 밥 돌, 조지 W. 부시, 존 매케인, 밋 롬니) 중 유일하게 트럼프를 지지했고 노구를 이끌고 전당대회에도 참석했다.# 2020년 대선에서도 트럼프를 지지했지만, 트럼프의 대선 불복 시도는 비판하며 2020년 대선의 정당한 당선자는 조 바이든이라고 주장했다.

파일:BOB DOLE 2018.webp

밥 돌의 마지막 모습, 2018년 부시 대통령 장례식 참석[12]
2018년, 조지 H. W. 부시가 사망하자 늙은 몸으로 장례식에 참석해 왼쪽 팔로 경례까지 하면서 다시 주목을 받았다. 1988년 대선 당시 이 둘은 대통령 후보 자리를 두고 예비선거에서 맞붙은 정적이었지만, 같은 2차 대전 참전 용사로서 경의를 표한 것이었다. 밥 돌 역시 2021년 향년 98세의 나이로 폐암 악화로 사망했다. 유언은 "난 또 천당이 캔자스주를 많이 빼닮았을 것이란 내 생각이 옳은지 무진장 궁금하다는 것을 고백해야겠다. 그리고 나보다 앞서 가본 다른 이들처럼 여전히 시카고에서 투표가 가능할지 알아봐야겠다."였다.


3.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1950 - 2021
정계 입문
작고

4.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50
캔자스 주 하원의원 선거
제81선거구


2,576 (58.3%)
당선 (1위)
초선
1952
러셀 카운티 지방 검사 선거
캔자스 러셀 카운티
4,207 (67.1%)
초선
1954
4,207 (100.0%)[단독]
재선
1956
3,175 (57.8%)
3선
1958
2,807 (56.1%)
4선
1960
연방 하원의원 선거
캔자스 제6구
62,335 (59.3%)
초선
1962
연방 하원의원 선거
캔자스 1구
102,499 (51.1%)
재선
1964
연방 하원의원 선거
113,212 (51.2%)
3선
1966
연방 하원의원 선거
97,487 (68.6%)
4선
1968
연방 상원의원 선거
캔자스
490,911 (60.1%)
초선
1974
연방 상원의원 선거
403,983 (50.9%)
재선
1976
미국 부통령 선거
미국
39,148,634 (48.02%, 241명)
낙선 (2위)

1980
연방 상원의원 선거
캔자스
598,686 (63.8%)
당선 (1위)
3선
1986
연방 상원의원 선거
576,902 (70.1%)
4선
1992
연방 상원의원 선거
706,246 (62.7%)
5선[13]
1996
미국 대통령 선거
미국
39,198,755 (40.71% / 159명)
낙선 (2위)


5. 기타[편집]



  • 캔자스 주에 대한 애향심으로 유명했다. 미국 현지에서는 유명한 캔자스 출신 미국사 유튜버 Mr. Beat이 엄청나게 존경하는 사람으로도 잘 알려져있는데 그가 사망하자 1시간 5분짜리 추모 영상까지 올릴 정도였다.[14]

  • 조 바이든 대통령과의 친분이 있는데, 정치적 의견을 떠나서 프랑스 노르망디 해변으로 같이 여행을 간 적이 있다고 밝힌 적 있다.

  • 심슨 가족 시즌8 호러 에피소드에 빌 클린턴과 함께 등장한다. 지구를 침략하기 위해 미국에 숨어든 외계인 남매(?) 캉 & 코도스에게 클린턴과 함께 납치되었다. 클린턴과 같이 우주선 내부의 생체복제장치에 냉동되어 갇혀있었다가 변신한 외계인들의 음모를 저지하고자 우연히 착륙해있는 우주선을 발견하여 잠입한 호머 심슨이 냉동장치를 해동하였고 클린턴과 함께 양당정치로 인한 분쟁을 그만두고 서로 손을 잡자며 잠시 훈훈한 분위기를 만들었으나 호머의 조작 실수로 우주공간에 사출되어 둘 다 죽고 만다.

  • 전립선암으로 수술을 받은 뒤 발기부전을 겪고있었으나 당시 임상실험 중이던 비아그라의 임상실험에 참여해 회복(...)되었다.[15] 이후 비아그라 광고에 출현하고 비아그라의 한국 시판을 앞두고 방한해 홍보에 도움을 주는 등 비아그라 전도사로 활발히 활동한다. 어지간히도 효과가 만족스러웠던 듯.

  • 3인칭화 화법을 자주 사용했다. 미국에서는 3인칭화 화법의 대표 주자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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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임자 밥 돌 사임으로 캔자스 주지사에 의해 대체 상원의원으로 임명.[2] 밥 돌 정치재단 홈페이지[3] 모르핀을 투여했는데 전혀 효과가 없었고 항생제 페니실린을 사용했지만 병세가 호전되지 않아 사망 확률이 높았다고 한다. 밥 돌은 이때 부상 이후의 삶을 제2의 삶이라고 여겼다고.[4] 조지 맥거번 문서 참조. 맥거번-햇필드 수정안 표결 당시 나온 발언이다.[5] 대표적으로 제이콥 재비츠 상원의원.[6] 1974년 대통령 취임 후 닉슨 사면으로 인기가 추락했고, 공식 석상에서 자주 넘어지거나 엉덩방아를 찢는 등 모자란 모습을 보여서 조롱거리가 되었다.[7] 그 외에도 포드는 존 코널리 텍사스 주지사, 로널드 레이건 캘리포니아 주지사 등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두명 모두 거절했다. 포드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던 셈이다.[8]2차 대전까지 포함해서.[9] 골드워터 역시 미국 공화당 보수파의 아버지라 불리는 강경보수파였지만, 1980년대에는 동성애자 권리 문제나 낙태 권리 문제 등에서 공화당 보수파와 대립하며 퇴조하고 있던 최후의 록펠러 공화당원들과도 협력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10] 경선이 끝난 직후 상원의원직을 사임했고, 1996년 대선에서 당선되어도 2000년 대선에서 출마하지 않겠다고 말했다.[11] 맥거번 역시 이탈리아 전선에서 폭격기 조종사로 활동했고, 1970년대 농업위원회에서 활약하며 가난한 농부들을 돕는 정책을 많이 추진했는데 이 때문에 밥 돌과 공통 분모가 많이 생겨 친해졌다고 한다.[12] 잘 보면 2차 대전 때 부상으로 뭉개진 오른쪽 팔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래도 젊었을 때에는 비교적 멀쩡했는데 늙어서 혈액 순환이 잘 안되어 오른 팔이 괴사한듯.[단독] 단독 입후보[13] 1996.06.11. 의원직 사퇴 (대선 출마)[14] 물론 Mr. Beat 본인은 객관적으로 보면 로버트 M. 라폴레트가 가장 위대한 상원의원일거라고 말하긴 했다.[15] 아내 엘리자베스 돌 여사 역시 약효가 탁월하다는 소감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