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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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행적
2.1. 반란을 일으키다
2.2. 세력을 떨치다
2.3. 관군의 토벌
2.4. 최후


1. 개요[편집]


龐勛
(? ~ 869)

당나라의 군인, 방훈의 난의 주도자.


2. 행적[편집]



2.1. 반란을 일으키다[편집]


당나라 조정이 절도사를 파견해 통치하면서 절도사들이 중앙에 바치는 돈을 위해 병사들의 급여를 유용한 것으로 인해 병사들이 절도사를 축출하고 자기에게 맞는 절도사를 추대하면서 이들의 비위를 맞추는 절도사도 나타났다.

서주의 병사들이 862년 7월에 온장을 축출하고 8월에 왕식이 부임해 서주의 병사들을 공격해 죽이자 살아남은 병사들은 비적이 되었으며, 당나라 조정에서는 한 달 안에 자수하면 사면을 내려주기로 하면서 남조에게 싸울 병력으로 이용하면서 3년에 한 번씩 교체하기로 한다.

6년이 지나지도 않아 교체하지 않았고 당나라 조정에서는 관리를 파견해 이들을 사면하기로 하고 서주로 돌려보내기로 했으며, 이들을 회유하는 시도도 했지만 868년 가을 7월에 양료판관 방훈은 허길과 함께 병사들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켰다.

방훈 등은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장사 조무 등 12명이 서주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해 도망가자 그들을 모두 참수해 사자를 파견해 서사관찰사 최언증에게 수급을 보내면서 조무 등이 간계를 부려 주멸당하는 것을 피하고 잘못을 채우고자 했다고 전했다. 겨울 10월에 최언증이 팽성에서 사자를 붙잡아 심문해 정황을 알아내 사자를 가뒀으며, 방훈은 공문서로 장사들이 스스로 죄를 지어 걱정과 의심을 품었고, 윤감, 두장, 서행검 등의 직임을 정지시켜 무리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면서 변방에서 귀환한 장사들을 별도로 군영 2개를 설치해 장수 1명을 삼으라고 했다.

이에 최언증이 원밀을 보내 방훈을 공격하도록 했고 방훈은 원밀이 허실을 알아내기 위해 보낸 나무꾼으로 위장한 자를 붙잡아 관군의 계획을 알아냈으며, 부리에 도착해 숙주의 병사를 수수에서 격파하고 10월 10일에 숙주를 함락해 수천 명을 얻자 병마유후(兵馬留後)라 자칭했다.


2.2. 세력을 떨치다[편집]


원밀이 추격하자 배 안에서 매복해있다가 공격해 그들을 모두 죽였고 방훈은 항복한 병사들에게서 팽성 사람이 대비하지 않았음을 알고 팽성을 공격해 함락했으며, 온정호를 불러 절월을 구할 표문을 쓰도록 했다. 온정호가 다음날에 처자들을 보고 싶었기에 곧바로 거절하지 않은 것이라면서 이제 결별했으니 죽겠다고 하자 방훈은 서생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서 온정호를 풀어줬으며, 주중이 재능과 지략이 있다고 자부하자 그를 영접해 상객으로 삼았다.

허길을 도우후, 조가립을 도유혁사로 삼았고 여러 군사를 나누어 파견했으며, 방훈은 거짓으로 최언증을 위해 서주를 잘라 없애달라고 상표했으며, 이원이 사주를 공격하자 방훈은 그를 도와 사주를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했다.

11월에는 환관 강도위가 팽성에 도착하자 위무하자 방훈은 그를 영접하면서 연회를 베풀고 사람들을 시켜 거짓으로 여러 도적으로 투항한 자가 수천 명, 여러 요새에서 승리했다고 보고한 자가 수십 명이라면서 절월을 구하는 표문을 작성했다. 방훈은 칙사가 오자 절월을 하사하는 것이라 여겼지만 최언증, 장도근을 책망하고 벼슬을 강등하기만 하자 실망해 칙사를 가뒀으며, 방훈은 이원이 사주를 함락하지 못하자 오형이 대신하도록 했다가 허길을 파견해 오형을 돕도록 했다.

방훈은 사주를 구원하기 위해 파견된 조정의 군사들과 싸우면서 서주남면행영초토사 대가사의 3만 군사를 격파하자 스스로 천하에 대적할 사람이 없다고 여겨 노포를 만들어 흩어서 여러 영채와 향촌에 보이게 했다.

방훈은 교만해져 매일 유람 연회를 벌였고 주중이 이에 간언했으며, 조정의 군사가 송주에 크게 집결하자 서주에서는 두려워해 병사로 응모하는 자가 줄어들었고 여러 요새에서 병사를 더 달라는 요구가 나왔다. 방훈은 무리들에게 향촌으로 흩어져 들어가 사람들을 몰아 병사로 삼았다. 방훈과 함께 거병한 자들을 더욱 교만하고 사나워져 사람들의 재산을 빼앗거나 부녀를 약탈해도 방훈은 통제하지 못했다.


2.3. 관군의 토벌[편집]


869년 봄 정월에 강승훈이 이끄는 관군 7만여명이 여러 곳에 군사를 나누자 방훈은 두려워했으며, 방훈은 맹경문이 두 마음을 품고 부참(符讖)을 만든 것을 알면서도 군사를 파견해 맹경문을 도와 풍현을 지키도록 했다.

맹경문이 위박의 군사와 대적하면서 물러나 달아나자 방훈은 사자를 파견해 불러낸 후에 복병으로 사로잡아 맹경문을 죽였으며, 방훈의 세력은 해주, 수주 등에서 패했고 왕홍립이 강승훈을 물리치겠다고 요청하자 이를 허락했다가 패하자 참수하려 했지만 3월에는 유자가 함락되고 장수 요주가 죽자 방훈은 크게 두려워했다.

사람들의 권유로 최언증, 장도근, 구대부, 초로, 온정호 등을 죽이고 곽후본, 이상의 손발을 잘라 강승훈의 군사들에게 보였으며, 방훈은 천책장군 대회명왕에 추대되었지만 이를 사양했다.

아버지 방거직을 대사마로 삼았고 누군가의 진언으로 부자의 친함으로 상하의 절도를 잃으면 안된다면서 뜰에서 방거직이 절하는 것을 의자에 기댄 상태로 받았다.


2.4. 최후[편집]


위박이 풍현을 포위하자 방훈은 몰래 들어갔다가 위박의 군사를 포위하고 여러 중요한 길에 군사를 매복해 관군 2천명을 죽이고 돌아서 달아났다. 방훈은 강승훈을 공격하기 위해 진군하고 유자를 공격하기로 했지만, 회남에서 패해 도망간 자들 중에 날짜를 강승훈에게 알리면서 방훈은 유자에서 복병을 만나 패해 달아났다.

강승훈의 추격을 받아 수만 명이 죽거나 도망쳐 3천 명만 팽성으로 돌아갔으며, 장수를 파견해 진전유, 주매 등의 장수를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했다. 방훈은 장실이 편지를 보내 송주와 박주 근방을 공격해 포위를 풀도록 하고 요해처에 매복해서 공격하자고 편지를 보내자 방훈은 서쪽으로 나아갔다.

그 사이에 강승훈이 이끄는 군사들에게 팽성이 함락당했고 방훈은 2만을 거느리고 석산 서쪽으로 나아가 지나가는 곳마다 약탈했으며, 방훈은 송주를 공격해 남쪽의 성을 함락했다가 남쪽의 박주를 노략질했다. 방훈은 환수를 따라 동쪽으로 내여가 팽성으로 돌아가고자 했는데, 강승훈이 보낸 주사적심의 추격을 받아 기현에 이르러 강을 건너려 했으며, 이 때 관군이 집결해 공격하면서 방훈은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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