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인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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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인길
(裵寅吉)

출생
1571년
조선
사망
임진왜란 1592년
조선

월성이씨(月城李氏)지려
기록
충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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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흥해興海 배씨

경보敬甫
시호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본관이 흥해興海이며, 자는 경보敬甫이고, 참봉을 지낸 유산儒山 배삼근裵三根의 아들이다.

2. 생애[편집]


1592년 6월에 발발한 임진왜란을 토벌하고자 용궁전투에 나가 22세의 나이에 전장에서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우리 집안이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었는데, 나라가 난리로 이리도 위급하니 지금이 그때이옵니다. 이 몸이 한낱 선비에 불과하나 적군이 쳐들어옴을 보고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으리오

사나이가 나라를 위해 마땅히 죽으러 나가니, 신혼이라 이별함을 그대는 너무 슬퍼하지 마오.

충의사 배인길


부인 월성이씨는“군신의 의가 중하니 부부의 은혜는 오히려 가볍다”라고 하여 절개를 지켜 손가락을 깨물어 명주 수건에 혈서를 남기고 순절하였다.

18세기 이후 충효열(忠孝烈)에 대한 국가적 표창사업이 전개되는 분위기 속에서 1817년(순조 17년)에 배인길과 그의 부인의 충렬이 인정되어 쌍절려가 하사됐다.[1]

배용길이 배인길의 시신을 찾으려 백방으로 살폈으나 끝내 찾지 못하고 봉화 호골산虎崖山 서쪽 자락에 초혼장招魂葬으로 장례를 치렀는데,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이곳은 ,의사총義士冢’이란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다.

1817년(순조 10)에 영남사림의 상소로 인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 그 충절을 가상히 여겨 포상과 은전으로 정려旌閭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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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쌍절여는 지난 2000년 4월 10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86호로 지정됐으며, 현재 석평2리 유록마을 흥해배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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