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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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회휘장(제헌-5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전라북도 고창군 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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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관수


제2대
신용욱

동아일보 제7대 사장
백관수
白寬洙

파일:external/tv03.search.naver.net/yonhapnews_28441886.jpg

자 / 호
찬율(贊慄) / 근촌(芹村)
본관
수원 백씨[1]
출생
1889년 1월 28일
전라도 흥덕현 일동면 도덕리
(現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덕산리 도덕마을)[2]
사망
1951년 10월 25일 (향년 62세)
사망지 미상[3]
1961년 3월 초 (향년 72세)
평안북도 선천군[4]
가족
아버지 백도진[5], 어머니 고왕림[6]
형 백성수[7], 남동생 백기수[8], 백헌수[9]
누이 3명
묘소
재북인사릉
1. 개요
2. 상세
4. 대중매체에서
5. 선거 이력
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정치가, 언론인, 교육자, 독립운동가이자 제헌 국회의원.


2. 상세[편집]


1889년 1월 28일 전라도 흥덕현 일동면 도덕리(현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덕산리 도덕마을)에서 아버지 백도진(白道鎭, 1843. 2. 15 ~ 1914. 9. 30)과 어머니 제주 고씨 고왕림(高旺林, 1868. 6. 18 ~ 1943. 11. 23)[10] 사이의 4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형 백성수(白宬洙, 1888. 8. 11 ~ 1943. 12. 5), 아래로 남동생 백기수(白岐洙)[11], 백헌수(白憲洙, 1904. 6. 13 ~ ?)가 있었고, 누이 3명이 있었다.

그는 5살 때부터 호남 지방의 대학자였던 전우의 문하에서 한문을 수학했고, 그 뒤 같은 고창군 출신으로 동향 사람인 김성수를 알게 되었다. 이후 부안군 좌산내면 입암리(現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입암마을) 내소사 부속 청련암에서 수학하면서 김성수를 통해 송진우를 알게 되었고, 이들 세 명은 이때부터 의기투합하게 되었다. 15살 되던 해부터는 김성수와 함께 한승이(韓承履, 1876. 2. 17 ~ 1946. 1. 14)를 만나 군산부 금호학교에서 물리·수학·영어 등 신학문을 배웠다.

이후 상경해 경기도 경성부 공평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공평동) 79번지에 거주했으며, 1915년 경성전수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김성수가 교원으로 있던 중앙학교에 교원으로 채용되어 근무했다. 한편,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에 가입해 이상재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애국계몽운동 및 사회봉사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1917년 일본에 유학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후 도쿄로 건너가 1918년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에 입학했다가 그해 12월 메이지대학 법과에 입학하였다.[12] 이듬해인 1919년 도쿄에서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해 칸다구(神田區) 니시오가와초(西小川町) 청년회관에서 2.8 독립 선언에 참가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그해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9개월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 1920년 3월 출옥한 뒤 메이지대학에 복학했고, 1921년 졸업해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한동안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에서 근무했고, 1923년 조선물산장려회가 창설되자 간사로 재직하기도 했다. 1924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상무취체역에 취임했고 1926년 12월부터는 편집인 및 영업국장을 겸임했다. 1927년에는 미국 하와이에서 개최된 제2회 태평양회의에 참석했다. 그러다가 1928년 신문에 투고한 사설 '보석(保釋)지연의 희생'이 문제가 되어 당시 주필 안재홍과 함께 구속되었고, 조선일보는 1년 4개월간 신문 발행을 중단해야 했다. 1929년에는 도쿄에서 개최된 제3회 태평양회의에도 참석했다. 1932년 홍문사(弘文社)를 설립해 월간지 『동방평론(東方平論)』을 발간했으나, 내용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3년만에 폐간당했다.

그 뒤 1937년 5월 31일 친구 인촌 김성수가 창간한 동아일보에 입사해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사장 자리에서 물러난 송진우의 후임으로 제7대 동아일보 취체역 사장에 취임했다. 이후 발송인, 편집인, 편집국장 등을 겸했고, 1940년 8월 결국 동아일보가 폐간되었을 때 조선총독부로부터 체포되어 1개월간 투옥되었다. 이후 전라북도 고창군으로 낙향해 칩거생활을 지냈다. 한편, 1937년~1940년 동아일보 사장 지내던 시기였던 일제말기에 친일행위 관련 의혹이 제기(조선총독부가 만든 관제어용단체에 그의 명의로 기록된것등)되기도 했으나, 백관수는 조선총독부로부터 작위나 재산(반대급부)을 받는 것을 일체 거절하였고, 지속적,반복적인 활동했던것도 아니었으며 1940년대 이후 백관수는 모든 활동을 그만둔 채 시골로 은둔하여 ‘은둔’이라는 방식으로 일제 조선총독부에 소극적이나마 저항했었다. 그래서 사후 민족문제연구소 및 대통령직속 친일반민족행위자 진상규명위 보고서 발간위원 측은 '백관수는 친일행위자가 아님'을 확인했다.

1945년 8.15 광복 직후에 여운형으로부터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제의가 들어왔으나 거절했고, 다만 송진우와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사이를 절충하려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같은 해 9월 16일 한국민주당이 창당되자 총무에 선임되었고, 1946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민선으로 선출되어 법무사법위원장을 겸임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민주당 후보로 고창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한국민주당 중앙위원이 되었다. 1949년 2월 민주국민당이 창당되자 이에 입당했다. 1949년 7월 동아일보사 취체역에 재차 취임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신용욱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그 뒤 6.25 전쟁이 발발한 뒤 전쟁 중에 조선인민군에 납북되었다.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한동안 밝혀지지 않았으나, 1961년 3월 초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13] 또한 재북인사릉에 안치되면서, 납북되어 사망한 것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다만 재북인사릉 묘비에는 1951년 10월 25일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3. 제헌 국회 활동[편집]


  • 1948년 6월 1일 자신을 포함 장면,이훈구,윤치영,이청천과 함께 UN 공함 원안 작성 의원으로 뽑혔다.
  • 1948년 6월 2일 김상돈,김준연과 함께 연락위원으로 뽑혔고 헌법급정부조직법기초위원 30인 으로 뽑혔다.[14]
  • 1948년 7월 20일 감표의원으로 뽑혔다.[15]
  • 1948년 9월 10일 국회법개정안 제2독회를 하였다.[16]
  • 1948년 9월 11일 ' 연호에 관한법률안'을 보고하였고 국회법개정안 제2독회를 계속하였다.
  • 1948년 9월 14일 국회법개정안 제2독회를 계속하였다.
  • 1948년 9월 15일 일반사면에 대한 동의에 대한 건을 발의하였다.
  • 1948년 9월 30일 양곡매입법안 제3독회를 하였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1966년 영화 《남북천리》에서 배우 강계식이 연기했다.


5.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48
제헌 국회의원 선거 (전북 고창군 을)

[[한국민주당|
한국민주당
]]

19,787표 (67.53%)
당선 (1위)
초선
1950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전북 고창군 을)


6,098표 (17.28%)
낙선 (2위)



6.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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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경공파(文敬公派)-휴암 종중(休庵宗中)-당산공계(棠山公系) 26세 수(洙) 항렬. 아버지 백도진(白道鎭, 1843. 2. 15 ~ 1914. 9. 30)은 25세 진(鎭) 항렬.[2] #[3] 재북인사릉 묘비의 기록[4] 1991년 10월 1일 공개된 전 북한 정무원 부부장(차관급)을 지내다가 1980년대 중반 망명한 박병엽(朴炳燁, 필명 신경완申敬完)의 구술기록 참조.#[5] 白道鎭. 1843. 2. 15 ~ 1914. 9. 30.[6] 高旺林. 1868. 6. 18 ~ 1943. 11. 23. 제주 고씨 장흥백파(長興伯派) 고제량(高濟良)의 딸이다.[7] 白宬洙. 1888. 8. 11 ~ 1943. 12. 5.[8] 白岐洙.[9] 白憲洙. 1904. 6. 13 ~ ?.[10] 장흥백파(長興伯派) 고제량(高濟良)의 딸이다.[11] 농업에 종사했다.[12]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 및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 당시에는 학력사항에 조도전대학, 즉 와세다대학을 졸업했다고 기재했다.[13] 1991년 10월 1일 공개된 전 북한 정무원 부부장(차관급)을 지내다가 1980년대 중반 망명한 박병엽(朴炳燁, 필명 신경완申敬完)의 구술기록 참조.#[14] 류성갑,김옥주,김준연, 오석주,윤석구,신현돈,백관수,오용국,최규옥,김명인,이종린,이훈구,류홍렬,연병호,서상일,조헌영,김익기,정도영,김상덕,이강우,허정,구중회,박해극,김효석,김병회,홍익표,서성달,조봉암,이윤영,이청천. [15] 백관수,신성균,김도연,주기용,이종린[16] 제1독회는 진헌식 의원의 제안으로 생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