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베켄바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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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베켄바워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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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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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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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 뮌헨
43대, 대행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볼프강 오베라트
(1970~1972)

프란츠 베켄바워
(1972~1977)


베르티 포크츠
(1977~1978)

FC 바이에른 뮌헨 역대 주장
베르너 올크
(1965~1970)

프란츠 베켄바워
(1970~1977)


제프 마이어
(1977~1979)


프란츠 베켄바워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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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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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 ·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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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FIFA 월드컵 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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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FIFA 월드컵 브론즈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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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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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 1967 · 1968 · 1969 · 1971 · 1972 · 1973 · 1974 · 1975 · 1976 ·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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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66 · 1966-67 · 1967-68 · 1968-69 · 1969-70 · 1970-71 · 1971-72 · 1972-73 · 1973-74 · 1974-75 · 1975-76 · 197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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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FA 월드컵 드림팀



1966 Ballond'or
수상
바비 찰튼
2위
에우제비우
3위
프란츠 베켄바워
1974 Ballond'or
수상
요한 크루이프
2위
프란츠 베켄바워
3위
카지미에시 데이나
1975 Ballond'or
수상
올레흐 블로힌
2위
프란츠 베켄바워
3위
요한 크루이프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프란츠 베켄바워의 기타 정보









Fußball-Club Bayern München e.V. Ehrenpräsident

파일:Franz Beckenbauer 2018.jpg

이름
프란츠 베켄바워
Franz Beckenbauer

본명
프란츠 안톤 베켄바워
Franz Anton Beckenbauer
출생
1945년 9월 11일 (78세)
연합군 점령하 독일 바이에른주 뮌헨시
국적
[[독일|

독일
display: none; display: 독일"
행정구
]]

신체
181cm / 체중 75kg
직업
축구 선수 (수비수[1], 미드필더[2] / 은퇴)
축구 감독 은퇴
축구 경영인
주발
오른발
소속
유소년
SC 1906 뮌헨 (1951~1959)
FC 바이에른 뮌헨 (1959~1964)
선수
FC 바이에른 뮌헨 (1964~1977)
뉴욕 코스모스 (1977~1980)
함부르크 SV (1980~1982)
뉴욕 코스모스 (1983)
감독
서독 대표팀 (1984~1990)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90~1991)
FC 바이에른 뮌헨 (1993~1994)
FC 바이에른 뮌헨 (1996 / 감독 대행)
경영
FC 바이에른 뮌헨 (1994~2002 / 회장)
FC 바이에른 뮌헨 (2002~ / 명예 회장)

국가대표
103경기 14골 (서독 / 1965~1977)

1. 개요
2. 선수 경력
3. 감독 / 행정가 경력
4. 플레이 스타일
4.1. 미드필더 시절
4.2. 수비수 시절
5. 평가
6. 기록
6.1. 선수
6.1.1. 대회 기록
6.1.2. 개인 수상
6.2. 감독
6.2.1. 대회 기록
6.2.2. 개인 수상
6.3. 수훈
6.4. 출전 기록
7. 베켄바워에 대한 헌사
8. 이야깃거리
9.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독일축구인. 2002년부터 FC 바이에른 뮌헨 명예회장을 맡고 있다. 선수 시절 포지션은 수비수, 미드필더이다. 특유의 제왕적 리더십[3]과 경기 장악력에서 기인한 '카이저(Der "Kaiser")'[4]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기존 리베로의 역할을 개편한 독일식 리베로[5]로 뛰면서 리베로의 상징이 되었다. 또한 발롱도르를 다회 수상한 유일한 수비수[6]이며, 1966 잉글랜드 월드컵 브론즈슈 및 신인상을 비롯해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에 2회, 월드 사커 올해의 팀에 11회 연속, 키커 올해의 팀에 12회 연속 선정되었다.

클럽에서는 바이에른 뮌헨의 주장을 맡아 분데스리가 4회 우승[7], 유러피언컵 3연패[8] 등 수많은 트로피를 들어올리며 바이에른 뮌헨의 첫 번째 전성기를 이끌었고, 국가대표팀에서도 주장을 맡아 유로 19721974 서독 월드컵 우승을 주도하며 서독 축구의 최전성기[9]를 견인했다.

감독으로도 대성하여 서독 대표팀1990 이탈리아 월드컵 우승을 이끌면서 선수와 감독으로 월드컵을 모두 제패했다.[10] 이후 독일축구연맹 부회장, 2006 독일 월드컵 조직위원장, FIFA 집행위원, 바이에른 회장 및 명예회장을 역임하면서 행정가로서도 성공신화를 이어갔다.


2. 선수 경력[편집]



2.1. 클럽 경력[편집]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 폐허가 된 뮌헨에서 태어나, 1959년 바이에른 뮌헨 유스팀과 계약하고 1964년 1군 데뷔전을 치렀다. 당시 바이에른 뮌헨은 분데스리가 2부 리그에 속해 있던 팀이었는데, 프란츠 베켄바워의 1군 데뷔와 동시에 1부 리그로 승격하는 데 성공한다.[11]

베켄바워의 가세와 동시에 1부 리그에 진입한 바이에른은 본격적인 몸집 불리기에 나선다. 이 때 새로이 가세한 멤버들이 바로 게르트 뮐러제프 마이어. 공격에 게르트 뮐러 - 미드필드와 수비에 프란츠 베켄바워 - 골키퍼에 제프 마이어라는 위대한 라인업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당대 최고의 3인방을 스쿼드에 갖춘 바이에른 뮌헨은 신흥강호를 넘어서 서독과 유럽 축구계를 집어삼키기 시작한다. 1966년 바이에른은 DFB-포칼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이듬해인 1967년, 프란츠 베켄바워는 거의 평생을 함께할 파트너를 얻는다. 바이에른 유스에서 올라온 강철같은 스토퍼 한스게오르크 슈바르첸베크로 베켄바워는 그와 함께 철벽의 중앙 수비라인을 완성시키고 DFB-포칼유러피언 컵위너스컵마저 제패한다. 베켄바워는 1968년부터는 바이에른의 주장 완장을 차기 시작했는데, 하늘의 뜻인지 바이에른 뮌헨은 그 해, 역사상 처음으로 마이스터샬레를 들어올린다. 이후 1977년 분데스리가를 떠나기까지, 바이에른에 분데스리가 4회 우승, DFB-포칼 4회 우승, 유러피언컵 3연패,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1회 우승, 인터컨티넨탈컵(현재의 FIFA 클럽 월드컵) 1회 우승을 이끌며 수많은 트로피를 안겨주었다.

1977년, 20여년을 몸담았던 바이에른을 떠나 '축구 황제' 펠레와 마찬가지로 당시 축구 불모지로 꼽히던 미국에 진출한다. 북미 축구 리그에 진출하고 뉴욕 코스모스에 입단하여 4시즌 동안 3번의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 프란츠 베켄바워는 1980년 다시 독일로 돌아와 이번엔 함부르크 소속으로 마이스터샬레를 들어올린다. 1983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고 1년동안 활약하였다. 그 해에 마침내 '카이저'는 영광에 가득했던 커리어의 마침표를 찍는다.

여기까지 읽어봤다면 알겠지만, 자신이 소속되어 있었던 모든 클럽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충격과 공포인데, 여기에서 끝난게 아니다.


2.2. 국가대표 경력[편집]



2.2.1.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편집]


프란츠 베켄바워의 첫 메이저 국제대회는 1966 잉글랜드 월드컵으로 이 대회에서 베켄바워는 4골을 터트리며 득점 랭킹 3위에 랭크되었다. 특히 소련과의 준결승전에서는 역대 최고의 골키퍼 레프 야신을 상대로 환상적인 왼발 중거리포를 터뜨린 바 있다. 슈팅 타이밍이 워낙 환상적이라 그날 경기 내내 홀로 선방쇼를 펼치던 야신이 몸도 던져보지 못하고 그대로 실점했다. 소련이 후반 막판 추격골을 넣었으나 베켄바워의 이 골이 결승골이 되어 2대 1로 서독이 승리하고 결승에 진출했다. 하지만 결승전에서는 잉글랜드와 연장 접전 끝에 2대 4로 패했다.[12] 결승전에서도 베켄바워는 바비 찰튼의 1:1 마크를 명받아 당시 최고의 미드필더로 꼽히던 찰튼과의 맞대결에서 크게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경기 후에 베켄바워 본인도 "찰튼이 나보다 아주 조금 나았기 때문에 잉글랜드가 승리를 거뒀다"라고 했다. 하지만 그 당시 찰튼은 준결승전에서 에우제비우가 이끄는 포르투갈을 상대로 결승골 포함 두 골이나 뽑아냈고, 1966년 발롱도르까지 수상하는 등 당대 최고의 미드필더였다. 21세밖에 안 된 베켄바워가 거의 대등하게까지 버텨냈다는건 커다란 의미가 있다.[13] 찰튼이 결승전에서 골을 넣지 못했으니, 찰튼을 마크하는 임무 자체는 성공적으로 해낸 셈이다.

유로 1968[14]에서는 서독 국가대표팀이 예선 탈락하며 본선 무대를 밟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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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1970 FIFA 월드컵 멕시코[편집]


1970 멕시코 월드컵 8강전에서 복수의 칼을 갈고 있던 독일과 전 대회 우승팀 잉글랜드가 맞붙었고 두 팀은 명승부를 벌였다. 베켄바워는 감독의 명에 따라 4년 전처럼 1:1로 찰튼을 마크했지만, 선수 생활의 마지막 불꽃을 불태우던 찰튼은 공격가담과 패스전개로 유명한 베켄바워가 오로지 수비에 전념하게 만들면서 중원싸움을 압도했고 그로 인해 잉글랜드가 2대 0으로 경기를 리드하고 있었다.

이때,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중 하나로 꼽히던 알프 램지는 노장 찰튼의 체력 안배를 위해 찰튼을 콜린 벨과 교체 준비 시킨다. 이게 결국 오판이 됐는데 어수선한 상황에서 베켄바워가 페널티 박스 오른쪽으로 드리블을 치고 들어와 추격골을 성공시키면서 경기를 뒤집는 발판을 마련했다. 연이은 우베 젤러의 환상적인 헤더 골과 연장전 게르트 뮐러의 결승골로 결과는 3대2 독일의 연장 승리였다.

그러나 이 경기에서 연장전 22분 베켄바워가 페널티 박스 안에서 잉글랜드의 미드필더 콜린 벨에게 말도 안 되는 반칙성 태클을 걸어 넘어뜨렸는데도 아르헨티나 국적[15]의 주심이 묵인하는 등 논란이 있었고 완벽하게 깨끗한 승리는 아니었다.

준결승에서 독일은 연장전에서만 5골이 터지는 혈투 끝에 이탈리아에게 3대 4로 석패하며 3위에 그쳤으나, 당시 경기에서 베켄바워는 쇄골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음에도 연장전까지 120분을 풀타임 소화하는 실로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었다.[16]


2.2.3. UEFA 유로 1972[편집]


유로 1972 예선 플레이 오프에서 베켄바워의 서독은 드디어 바비 찰튼이 없는 잉글랜드를 만났다. 베켄바워는 헬무트 쇤 감독의 전술에서 리베로 역할을 맡은 전술의 핵심[17]이었고 상대팀 주장 바비 무어와 주장끼리 불꽃 튀는 명승부를 펼쳤다. 잉글랜드는 무어 혼자 미친 활약을 보여주었지만 당시 서독은 베켄바워 외에도 귄터 네처게르트 뮐러, 베르티 포크츠, 울리 회네스 등 최고의 선수들이 버티고 있었고 말 그대로 그 때가 자국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였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잉글랜드보다 나은 경기력을 보여줄 수 있었던 서독이 경기 막판까지 몰아붙이다가 1:1 상황에서 무어의 태클 실수로 페널티킥을 얻어 득점했고 추가 득점에 성공해 3:1 승리를 거두었다. 2차전에서는 양팀 모두 무득점을 기록하며 종합 3:1의 점수 그대로 서독이 4강 본선에 진출하게 되었다.

헬무트 쇤 감독은 지금껏 외면하던 한스게오르크 슈바르첸베크를 드디어 대표팀에 등용했고, 눈만 마주쳐도 뜻이 통하는 파트너와 함께한 베켄바워는 처음으로 국가대항전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프란츠 베켄바워와 귄터 네처가 중심이 되었던 이 시기의 서독은 1950년대 초의 헝가리가 돌아온 것 같았고 역대 최강으로 불렸던 펠레의 브라질에 비견된다는 의미로 '람바참바 팀'이라 불렸다.


2.2.4. 1974 FIFA 월드컵 서독[편집]


그리고 자국에서 개최된 1974 서독 월드컵은 베켄바워에게 있어선 절실한 대회였다. 결승까지 올랐던 첫 번째 대회는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오심 릴레이[18] 끝에 패배했고, 두 번째 대회는 준결승에서 쇄골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음에도 연장 120분 풀타임을 뛰는 투혼을 발휘했으나 연거푸 벌어진 연장 혈투를 버티지 못하고 패했기 때문이다.

이번의 독일은 승승장구하며 결승까지 올라갔고, 이 월드컵의 결승전은 그야말로 결승전답게, 지금도 역대 월드컵 최강 스쿼드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두 팀인 소위 클래식 네덜란드클래식 독일이 제대로 맞붙은 대회였다. 거두절미하고, 프란츠 베켄바워는 결승전에서 요한 크루이프의 네덜란드를 물리치고 드디어 월드컵을 들어올리는 데 성공한다. UEFA 유로 19721974 서독 월드컵 우승으로 서독(독일)은 월드컵과 대륙간 대회를 나란히 제패한 최초의 국가라는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게 되었다.

이말인 즉, 국가대항전에서도 얻을 수 있는 트로피는 다 얻었다는 것이다.


2.2.5. UEFA 유로 1976과 그 이후[편집]


이후 유로 1976에서도 결승까지 올라가며 스페인 이전에 먼저 메이저 대회 3연패를 달성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지만 체코슬로바키아와의 승부차기에서 안토닌 파넨카에게 그 유명한 파넨카를 얻어 맞고 패배하며 기록 달성에 실패한다.

승부차기 패배 직후 좌절하는 베켄바워
유로 1976에서 준우승을 거둔 후, 1977년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한다. 거기에 유로 1972, 1974 서독 월드컵에서 베켄바워가 보여준 퍼포먼스는 수비수 한정 메이저 대회 역대 최고의 퍼포먼스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19][20] 참고로 베켄바워가 서독 유니폼을 입고 찍은 스탯은 103경기 14골이다.


3. 감독 / 행정가 경력[편집]


1983년 현역에서 은퇴한 후 유프 데어발의 후임으로 서독 국가대표팀 감독직에 임명되었다. 수석코치가 후임 감독이 되는 전례를 깨고 최초로 감독에 임명된 사례였다. 단지 그정도가 아니라 베켄바워는 지도자로서 경력이 전무한 상태였다. 전임자였던 데어발 감독은 유로 1980 우승, 1982 스페인 월드컵 준우승 등 분명한 결과물을 일궈내 왔으나 월드컵 우승이 목표였던 서독축구협회는 데어발로는 부족함을 느낀 듯 하다. 사실 데어발은 그 이전 감독들인 제프 헤르베르거헬무트 쇤처럼 선수 시절부터 대표팀을 휘어잡아왔던 카리스마형 지도자는 아니었다. 데어발은 나름 인화력이 있어서 선수단을 잘 이끌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독은 1982 월드컵 1차 조별 리그 첫 경기 알제리전에서 어딘지 모르게 나사 빠진 모습을 보인다거나 2차 조별 리그로 진출하기 위해 승부조작성 플레이를 한다거나 결승 이탈리아전에서 참패하는 등 아쉬운 모습을 보였다. 데어발 감독은 82 월드컵 직후 과감한 세대 교체에 돌입하여 유로 1984 본선에 임했으나 결과는 조별 리그 탈락이었다. 이에 축구협회는 2% 부족해 보이는 데어발을 경질하고 베켄바워를 신임 감독으로 앉힌 것. 베켄바워는 지도자 경력이 없었지만 예전의 쇤, 헤르베르거 감독처럼 독일 축구의 한 시대를 대표하는 레전드였기 때문에 선수단을 확실하게 장악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베켄바워는 지도자 라이선스 없이 감독이 되었기 때문에 독일 국가대표팀 감독에게 주어지는 영예로운 호칭인 Bundestrainer(분데스트레이너, 연방감독)이라는 명칭은 사용하지 못하고, Teamchef(팀셰프, 팀 지도자)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유로 1984 직후 감독을 맡은 베켄바워는 데어발 때 시작된 세대 교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여 자신의 첫 메이저 대회인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차지한다. 사실 1986 월드컵 때 서독은 세대 교체 직후였기에 주장 카를하인츠 루메니게를 제외하면 젊은 스쿼드로 구성되어 있었고, 명목상 우승 후보로 꼽히긴 했었지만,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 플라티니의 프랑스, 디펜딩 챔피언 이탈리아, 지쿠의 브라질 만큼 주목받는 팀은 아니었다. 베켄바워가 이끄는 젊은 서독은 데어발 시절의 대표팀보다 이름 값도 떨어졌고, 대회 초반에는 다소 자신감이 없어 보였으나 토너먼트가 진행되면서 조직력이 탄탄해지고 체력적으로도 뛰어난 모습을 보이며 결승까지 진출했다. 결국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에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이 스쿼드를 기반으로 다음 대회에서 다시 한 번 우승을 노려볼 수 있게 되었다.

이어 유로 1988 4강에서는 오렌지 삼총사가 활약하던 네덜란드에 패했지만,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마침내 우승컵을 들어올린다. 이로써 베켄바워는 선수와 감독으로 월드컵을 모두 제패한 두 번째 축구인으로 그 이름을 올렸다.[21] 사실 1986년이나 1990년이나 독일 국대 스쿼드가 결코 압도적이라는 평은 듣지 못한 때라는 걸 감안하면 베켄바워의 통솔력이 얼마나, 어떻게 작용했는지 감히 짐작할 수 있다.[22] 1990년에는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의 감독으로 부임해 디비지옹 1 우승을 이끈다.

그리고 1994년. 카이저는 자신의 고향인 뮌헨으로 돌아와 바이에른 뮌헨 회장직에 취임한다. 그러더니 바이에른 뮌헨 감독을 맡기도 한다. 더욱 곤란한 것은 감독 재직 중에 커리어에 분데스리가 우승과 UEFA컵 우승을 추가시켰다는 것이다.

이쯤되면 트로피가 이 사람을 부르는 것인가, 이 사람이 트로피를 부르는 것인가 궁금해진다. 다만 1995-96 시즌 UEFA컵 우승의 경우, 해당 시즌 바이에른 뮌헨의 감독이었던 오토 레하겔이 팀과 선수들과의 지속적인 갈등으로 팀을 결승까지 올려놓고 사퇴했기 때문에 베켄바워는 임시감독으로 결승전 단 2경기만 지휘하고 UEFA컵 우승감독에 이름을 올린 케이스라서 베켄바워의 업적으로 쳐주기는 어렵다.

1998년에는 독일축구연맹 부회장을 역임하고, 2006 독일 월드컵에서는 대회 조직위원장 직을 맡아 대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즉 선수, 감독, 행정가 등 가는 곳마다 성공대로를 달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지금이야 그 인식이 서서히 옅어지고 있긴 하지만, 스타플레이어 출신 감독은 성공하기 어렵다라는 말은 거의 불문율 수준으로 작용하던 때이고, 심지어 스타플레이어 출신 행정가는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라 생각되던 때였다. 그런데 이 양반은 이 2가지를 죄다 해냈다. 영웅신화라고까지 칭하면 다소 비약적인 찬사겠지만, 그야말로 은퇴 전후를 통틀어 축구판의 황제라 불리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커리어다.

더 쉽게 비교해보자면, 축구 황제 펠레 역시 현재 세계축구계에 나름대로 영향을 끼치고 있으나 펠레는 따지고 보면 명예직에 앉아 있을 뿐이지만, 베켄바워는 스스로 실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와 경력을 지니고 있다는 소리.[23] 오죽했으면 前 FIFA 회장 제프 블래터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시절 블래터와 맞장을 뜰 수 있는 유일한 축구인이라는 말까지 들을정도다. 1인자인 블래터가 1인자라 이거저거 해먹는 탓인지 여기저기 적이 많지만, 그와 대비되게 베켄바워는 축구실력과 국력 양면에서 뛰어난 독일을 등에 업고 유연한 대응을 바탕으로 적을 만들지 않고 실익을 잘 챙겨간다.


4. 플레이 스타일[편집]



4.1. 미드필더 시절[편집]


미드필더 시절의 베켄바워에게서 가장 돋보였던 능력은 볼 컨트롤 능력이다. 엄청나게 민첩했으며, 그런 가벼운 몸놀림으로 상대 선수를 따돌리고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데에 능했다. 기술적인 역량이 매우 뛰어났기에 공을 빼앗기는 일이 아주 드물었다.

압도적인 볼 컨트롤 능력과 스피드를 결합시켜 독특하면서도 파괴적인 드리블을 자주 시도했다. 기본적으로 다른 미드필더보다 처진 위치에 배치되었지만, 전방에 공간이 생기면 그 즉시 공을 몰고 상대 선수 여러 명을 제치며 순식간에 페널티 박스 부근까지 도달하곤 했다. 섬세한 개인 기술을 자유자재로 사용했고, 스피드 자체가 매우 빨랐기 때문에 상대팀에게 있어서 베켄바워의 드리블을 끊어내는 일이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대표적으로 1970년 월드컵 4강전 서독 vs 이탈리아 경기를 보면, 축지법을 쓰듯 순식간에 페널티 박스 부근로 이동하며 몇 번 씩이나 수비진을 모조리 뚫어내는 베켄바워를 볼 수 있다.

수비 능력도 뛰어났다. 온 몸을 사용한 적극적인 인터셉트가 특기였다. 인터셉트 뿐만 아니라 대인 수비 부분에서도 훌륭한 모습을 보였다. 빈 틈 없고 침착한 대인 마킹에 이은 저돌적인 태클로 상대의 공격 진행을 이른 타이밍에 끊어버리곤 했다.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렇듯 훌륭한 기량을 갖추었기에 수비적인 측면에서 눈에 띄는 약점은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 단점을 꼽아본다면, 태클이 다소 부정확했다는 점을 고를 수 있다. 저돌적으로 달려들거나 섣불리 슬라이딩 태클을 걸었다가 상대 선수의 플레이에 속아넘어가 막아야 할 상대를 완전히 놓쳐버리는 경우가 꽤 있었고, 무리한 태클 시도로 파울을 범한 적도 많았다.

수준급의 미드필더였던 만큼 패스는 당연히 잘했다. 정말 잘했다. 특히, 중앙에서 공을 가지고 배회하며 타이밍을 기다리다가 타이밍을 정확하게 포착한 뒤 슬쩍 띄워서 공격진으로 보내 주는 로빙 패스가 일품이었다. 주로 쓰는 발인 오른발로는 아웃프런트 킥 같은 기술도 자유자재로 구사하곤 했다. 베켄바워는 느긋느긋하게 공격을 전개하고 싶을 때, 아웃프런트 킥을 사용하여 측면의 선수에게 천천히 넘겨 주는 식으로 팀의 공격 속도를 조절했다. 오른발처럼 기술적으로 다루지는 못했지만, 왼발 패스 능력 역시 상당히 뛰어났다.

미드필더 시절에는 득점력도 매우 출중했다. 대포알 같은 중거리 슈팅을 뽐냈으며, 왼발, 오른발, 머리를 가리지 않는 다양한 득점 패턴을 가져가며 꾸준히 골을 집어넣었다. 대표적으로 1966년 월드컵에서 우베 젤러를 제치고 팀 내 최다 득점자에 오르며 대회 최다 득점 공동 3위에도 오르는 등 어마어마한 득점력을 과시했다.

즉, 미드필더 시기의 베켄바워는 필드 플레이어로서의 모든 플레이에 능했던 유틸리티 플레이어이다.


4.2. 수비수 시절[편집]


베켄바워는 매우 공격 지향적인 스타일의 레프트백 자친토 파케티를 보고 '센터백도 비슷한 역할을 할 수는 없을까?'라는 의문을 가졌다. 때마침 유로 1972가 열렸고, 베켄바워는 이 대회에서 스위퍼 역할을 맡은 것를 기점으로 스위퍼 포지션에 완전히 정착했다. 좀 더 낮은 위치에 기용된 베켄바워는 더 적은 압박 속에서 자유로운 움직임을 가져갈 수 있게 되었다. 헬무트 쇤 감독으로부터 '프리 롤 스위퍼'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베켄바워는 파케티를 보고 떠올렸던 생각을 실행에 옮겼다.

베켄바워는 미드필더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간결한 볼 컨트롤 능력을 사용하여 공간을 확보한 뒤 넓은 시야를 바탕으로 경기를 풀어나갔다. 스위퍼의 기본 소양인 '패스'에 있어서 매우 훌륭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짧은 패스와 긴 패스를 가리지 않고 훌륭한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베켄바워는 이른바 '찍어 차기'의 달인이었다. 공을 찍어 차며 원하는 방향으로 띄워 보내는 기술이 정말 뛰어났다. 또한 자유자재로 공을 감아 찰 수 있었기에, 엄청난 궤적을 그리며 휘어 날아가는 롱패스를 자주 구사했다. 이러한 능력을 통해 기존의 수비수들과 차별화되는 공격 전개를 보여줄 수 있었다. 베켄바워는 단지 패스를 잘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공을 몰고 나가 공격형 미드필더처럼 플레이하며 공격 전개를 총지휘했다.

공격에 가담했을 때에는 미드필더 시절과 별 차이 없을 정도로 위력적인 드리블을 보여주었다. 상대 진영의 깊은 곳까지 뛰어들어가 공을 받았고, 지체 없이 다음 플레이로 연결했다. 때로는 날렵한 드리블을 통해 좋은 위치에서 파울을 얻어내거나 아예 골을 넣어버리기도 했다. 미드필더로 활약하던 시기에 비하면 득점력이 확실히 줄긴 했다. 그러나 수비수 시절에도 당대의 수비수 중에서는 최고 수준의 득점력을 가진 선수였다.

프리킥마저 잘 찼다. 매우 영리하게 킥을 처리했는데, 아웃프런트 킥과 인프런트 킥을 선택적으로 구사하며 골키퍼의 타이밍을 빼앗곤 했다. 대표적인 예시가 1973-74 시즌 뒤스부르크와의 리그 경기에서 나온 프리킥. 오른발 아웃프런트로 찍어 찼다.

베켄바워의 프리킥
당연하게도, 베켄바워의 능력은 공격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수비 포지션에 정착한 후 많은 경험을 쌓았고, 관록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수비에 관련하여 베켄바워가 가진 최고의 능력은 상대의 플레이를 읽어내고 공을 가로채는 능력이다. 베켄바워의 인터셉트 능력은 이 능력을 통해 세계 최고의 수비수라는 타이틀을 얻은 잉글랜드의 바비 무어와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탁월한 운동 능력 덕에 클리어링도 뛰어났다. 베켄바워의 클리어링은 정말 아크로바틱했다. 점프력이 좋았으므로 헤더 클리어링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고, 다리도 유연했기 때문에 어떤 자세에서든 상대의 흐름을 끊어낼 수 있었다. 공이 사정거리에 들어오는 순간 인정사정없이 걷어냈다. 공을 걷어내는 데에 바이시클 킥을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미드필더 시절 베켄바워의 태클은 과감함과 동시에 미숙함도 있었다. 그러나 수비수로 활동하며 관록이 쌓인 후에는 태클 실력 또한 상당히 발전하여 미숙한 면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베켄바워는 적재적소에 나타나 높은 완성도의 태클을 통해 상대 공격수를 틀어막았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적극적인 슬라이딩 태클을 서슴없이 시도했지만, 1:1 상황에서의 대인 수비가 훨씬 침착해졌고 그 결과 태클이 매우 정확해졌다. 파울을 범하는 일도 훨씬 드물어졌다. 피지컬이 준수했고 발도 빨랐기 때문에, 정말 진공 청소기가 따로 없었다.

클럽과 국가대표팀에서 모두 주장직을 수행하며 어마어마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베켄바워가 카이저(Der Kaiser), 즉 황제란 별명을 얻게 된 것은 그가 뿜어내는 특유의 사령관적인 기질 덕분이었다. 경기 중 실수가 정말 드물었고 아주 침착했다.


5. 평가[편집]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자가 강한 것이다."
"Der Starke gewinnt nicht, derjenige der gewinnt ist stark."[24]

1974 서독 월드컵 결승전에서 네덜란드를 꺾고 우승을 차지한 후.


명실상부한 축구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이자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TOP 10에 고정적으로 포함되는 선수다. '수비수' 포지션에서 절대적인 위상을 갖고 있으며,[25][26] 아래 상술된 커리어를 능가하는건 차치하고 비슷하게나마 갖춘 동포지션의 선수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다. 이는 시대를 아울러 각종 매체에서 내놓은 올타임 랭킹 자료로도 검증되는데, 호날두, 크루이프, 디 스테파노, 지단 등과 경쟁한다.## 그러나 독일 선수나 수비수 포지션으로 한정할 경우 그를 능가하는 선수는 없다.[27]]

독일에서 축구 선수들의 랭킹을 정하는 키커 랑리스테에서 WK(월드클래스)[28]를 무려 27회나 받았는데 이는 모든 독일 선수와 분데스리가를 거쳐간 선수들 중 가장 많은 횟수다.[29] 1965-66 시즌 후반기에 처음 WK를 받은 이후로 바이언에서의 마지막 시즌인 1976-77 시즌까지 11 시즌 연속으로 받았다. 독일 최초의 트레블을 달성하고 리그 역대 최소실점 2위를 기록한(34경기 18실점. 그 당시엔 1위였으나 2015-16 시즌에 17실점으로 우승하면서 밀려났다.) 2012-13 시즌 트레블을 달성한 바이언의 주전 센터백인 보아텡과 단테도 한 단계 아래인 IK(인터내셔널 클래스)를 받았던 걸 생각하면 얼마나 대단한 기록인지 알 수 있다.

다만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있는 것이 과거에는 멀티 플레이어들을 포지션마다 중복으로 평가를 내려줬기 때문에 요즘 선수들보다 누적면에서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보통 랑리스테는 시즌을 전반기, 후반기로 나누어서 2번 평가를 내리는게 일반적인데 경우에 따라서는 한 시즌에 4번의 평가를 받을 수도 있었다는 얘기. 따라서 베켄바워의 경우 현재 기준으로 평가를 내리면 WK를 받은 횟수는 27회가 아닌 21회가 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2위 우베 젤러보다 7회가 더 많으니 독보적인 수치가 아닐 수 없다.

또한 분데스리가 베스트 11인 키커 올해의 팀에 12년 연속 선정되기도 하였다.

선수와 감독으로 그가 들어올린 메이저 트로피들만 정리해도 다음과 같다. 말 그대로 할 수 있는 우승은 다 해봤다라는 말을 현실화시킨 축구인이라 할 수 있다. 그것도 팀의 주장이자 에이스로 말이다.[30]

  • 선수로 월드컵 우승 (74)
  • 선수로 유로 우승 (72)
  • 선수로 유러피언컵 3연패 (73-74, 74-75, 75-76)
  • 선수로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우승 (66-67)
  • 선수로 분데스리가 우승 5회 (68-69, 71-72, 72-73, 73-74, 81-82)
  • 감독으로 월드컵 우승 (90)
  • 감독으로 UEFA컵 우승 (95-96)[31]
  • 감독으로 디비지옹 1 우승 (90-91), 분데스리가 우승 (93-94)[32]

이밖에도 선수로 월드컵 준우승 (66), 3위 (70) / 유로 준우승 (76), 감독으로 월드컵 준우승 (86) 등도 달성하여 선수-감독 불문 커리어 전체가 단순히 화려하단 말로도 부족할 정도이다.[33]

대다수 매체에서 역대 베스트 11을 선정할 때 중앙 수비수 한 자리는 예외없이 프란츠 베켄바워로 고정이다. 반면 그의 중앙 수비 파트너를 누구로 둘 지에 대해서는 정말로 피 터지게 치열하다.[34] 애초에 수비수를 떠나 선수로서 요한 크루이프와 함께 1970년대 축구계를 양분했고, 그의 위상은 호날두, 크루이프, 디 스테파노, 지단과 동격으로 쳐지니 선수로서도 역대 최고급 반열이고 수비수로 한정한다면 비교대상이 아예 없다.

선수 시절의 경이로운 위상과 커리어는 물론 감독과 축구행정가로도 이렇게 실패없이 성공가도만을 달린 축구인은 축구 역사상 그 유례를 찾기 어렵다.[35] 그야말로 선수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세계 축구사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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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로나로 취소한 2020 발롱도르 대신 프랑스 풋볼에서 선정한 올타임 발롱도르 드림팀에 예상대로(?) 주전 센터백으로 선정되었다. 선정 전에 발표한 후보군의 포지션 배분을 보면 야신, 베켄바워, 펠레, 마라도나, 메시, 호날두의 선정은 기정사실화 되어있었으므로 당연한 일이라는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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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센터백, 리베로[2] 중앙 미드필더[3] 국가대표팀과 바이에른 뮌헨에서 모두 주장을 맡았고, 주장이 되기 이전에도 팀의 에이스로서 절대적 카리스마로 팀을 지휘했다. 베켄바워의 이런 성향은 후대의 로타어 마테우스가 물려받는다.[4] 독일어로 '황제'[5] 단순히 라인 뒤에 머물며 자유로이 스위핑하는 기존 이탈리아식 리베로가 아니라, 이에 더해 적극적으로 공격작업에 가담해 직접 타격까지 하는 역할. 베켄바워는 뛰어난 축구지능과 스킬, 순간 스피드로 이 역할의 대명사이자 상징으로 군림했다.[6] 가장 많은 연도에 걸쳐 발롱도르 유효표를 받은 수비수이기도 하다. 1965년부터 1976년까지 12년 연속으로 한 해도 빠지지 않고 유효표를 받으며 매년 발롱도르 랭킹에 이름을 올렸다. (1965년 공동 17위, 1966년 3위, 1967년 4위, 1968년 4위, 1969년 7위, 1970년 4위, 1971년 5위, 1972년 1위, 1973년 4위, 1974년 2위, 1975년 2위, 1976년 1위)[7] 1968-69, 1971-72, 1972-73, 1973-74[8] 1973-74, 1974-75, 1975-76[9] 프랑스가 1998 프랑스 월드컵-유로 2000을 연속 우승할 때까지 최초의 메이저 대회 연속 우승.[10] 선수-감독으로 월드컵 우승은 1970 월드컵에서 브라질의 마리우 자갈루가 처음(94년 기술고문으로 한 번 더 경험)이며, 이후 2018 월드컵에서 프랑스의 디디에 데샹이 3번째로 뒤를 잇는다.[11] 지금은 세계적인 명문 클럽이 되어 있는 바이에른이 1963년의 분데스리가 창설 당시에 포함되지 않았던 것은, 당시 바이에른의 라이벌 TSV 1860이 직전년도 남부 오버리가(Oberliga Süd) 우승팀이기 때문이다. 서독축구협회는 첫 해 분데스리가에서 동일 연고지에 복수의 팀을 넣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결코 해당 오버리가에서 3위를 거둔 바이에른이 약팀이어서 진입하지 못한 게 아니며, 실제로 바이에른은 2등급인 남부 지역리그(Regionalliga Süd)에서 2년 만에 승격을 달성했다.[12] 축구팬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웸블리 골이 터진 바로 그 경기다. 그리고 여기서 제프 허스트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월드컵 역사상 유이하게 결승전에서 해트트릭이 나온 경기이기도 하다. 다른 한 명은 킬리안 음바페.[13] 찰튼과 베켄바워가 서로를 '지워버렸다'라고 표현될 정도로 막상막하였다.[14] 유로 1976까지는 네팀만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기 때문에 현재보다 본선 진출이 더 어려웠다.[15]
주심의 이름은 앙헬 노르베르토 코에레사(Angel Norberto Coerezza). 판정에 영향을 주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으나 4년 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의 주장 안토니오 라틴이 독일인 주심의 오인으로 억울하게 퇴장당하는 통에 잉글랜드 선수들이 우세한 경기를 가져가며 결국 아르헨티나가 8강에서 짐을 싸야 했던 사건이 있었다. 이 때문에 아르헨티나인 입장에서는 잉글랜드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16] 사실 당시 독일이 교체카드를 모조리 쓴 탓도 있지만, 골절상을 입고서도 끝끝내 120분 풀타임을 소화한 베켄바워의 정신력도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17] 사실 1972년 이전의 베켄바워는 리베로라고 하기 애매하다. 클럽에서는 최후방 수비수도 자주 맡았지만 국가대표팀에서는 일반적으로 미드필더로 기용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공격적인 역할로.[18] 1966년 월드컵 결승전 문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서독만 오심 피해를 본 것이 아니었다.[19] 1970 멕시코 월드컵때까지의 베켄바워는 엄연히 미드필더였다.[20] 이와 비견되는 메이저 대회 역대 최고의 수비수 퍼포먼스는 1930 우루과이 월드컵호세 나사치, 1966 잉글랜드 월드컵바비 무어, 1974 서독 월드컵엘리아스 피게로아, 유로 1996마티아스 자머, 1998 프랑스 월드컵릴리앙 튀랑, 2006 독일 월드컵파비오 칸나바로 등이 있다.[21] 첫 번째는 브라질마리우 자갈루. 단, 자갈루는 브라질 대표팀 주장은 아니었다. 주장과 감독으로 우승한 경우는 베켄바워와 프랑스의 디디에 데샹만이 있다.[22] 두 번의 결승전 상대가 모두 디에고 마라도나가 이끌던 아르헨티나였는데, 첫 대결은 마라도나에게 당했으나 두 번째에는 감독 베켄바워가 선수 마라도나를 이겼다.[23] 명예직에 앉아 있을 뿐이라곤 하지만, '펠레는 브라질 대통령이 되려면 될 수 있었다. 안 했을 뿐이지'라고 공언하고, 또 이를 흰소리로 치부하기 어려울 정도로 위세가 당당하다. 체육부 장관으로 역임하던 시절 나쁘지 않았고. 세계 축구계로 봐도 축구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펠레는 알만큼 펠레라는 이름자 하나만으로 많은 영향을 끼쳐 왔으며 또 현재에도 끼치고 있다. 그래도 아예 실권자인 베켄바워가 파워로는 위지만.[24] 프란츠 베켄바워는 세계 최고의 선수이자 자신의 라이벌 요한 크루이프가 이끄는 네덜란드가 우승했어야 했다는 사람들에게 이 말 한 마디로 멋지게 응수했다.[25] 그나마 파올로 말디니 정도가 수비수로서 베켄바워의 아성에 근접했다고 평가받지만, 그 말디니조차도 베켄바워에 비한다면 격차가 큰 편이다. 센터백에서는 바비 무어, 프랑코 바레시가 베켄바워에 견줄만 하다.[26] 타 포지션에서 이 정도로 절대적인 위상을 구축한 선수는 골키퍼의 레프 야신을 제외하면 없다. 그런 야신도 TOP 10 안에 포함되지 못했다. 대표적으로 역대 최고의 공격수로 평가받는 메시조차도 펠레, 마라도나와의 논쟁이 존재하는데, 축구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를 논할 땐 베켄바워 한 단어로 얘기가 끝난다. 논쟁 자체가 없는 수준이다.[27] 관련링크 1, 2, 3, 4, 5, 6, 7,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gomez33&logNo=220832951328&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8][28] 독일에서 독일 선수를 평가하는게 큰 의미가 있냐하겠지만, 해당 항목에 가면 자세이 있듯 키커 랑리스테에서 WK에 선정되기란 매우 까다롭다. 어지간한 당대 월드클래스 선수들도 선수 경력 내내 한번 받기가 쉽지 않으며, WK 선정의 권위는 모두가 알아줄 정도의 공신력을 지닌다 보면 된다.[29] 2등 우베 젤러가 14회이다. 베켄바워와 젤러를 포함해 WK 두 자릿 수 이상 기록자는 마누엘 노이어(12회), 베르티 포크츠(11회),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10회)까지 5명뿐이다.[30] 한준희 위원은 원투펀치에서 트로피가 베켄바워를 따라다닌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31] 다만 오토 레하겔이 팀을 결승까지 올려놓은 상태에서 구단과의 불화로 사퇴하고 베켄바워가 결승전 2경기만 치르고 우승감독으로 이 된 케이스로, 베켄바워의 기여도가 높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토 레하겔이 결승까지 올라오면서 10경기를 치뤘고 4강에서 크루이프의 드림팀 바르셀로나를 탈락시켰다는 사실을 기억하자.[32] 이것도 팀이 무관에 허덕일때 시즌 중반에 급하게 팀을 이어받아 이룬 업적이다.[33] 선수 커리어만 치면 커리어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리오넬 메시가 베켄바워를 확실히 능가하지만, 감독까지 포함한 커리어는 전례가 없는 수준이다. 그나마 비견될만한 인물을 꼽는다면 선수로 월드컵, 유로, 챔스를 우승하고, 월드컵 골든볼, 유로 MVP, 발롱도르를 수상했으며 감독으로 챔스 3연패를 달성한 지네딘 지단이 유일하다.[34] 이 때, 주로 언급되는 선수는 바비 무어 또는 프랑코 바레시이다.[35] 정리하면 선수로 월드컵 우승, 유로 우승, 유러피언컵 3연패, 유러피언컵위너스컵 우승, 분데스리가 5회 우승 / 감독으로 월드컵 우승, UEFA컵 우승, 디비지옹 1 우승, 분데스리가 우승 / 행정가로 독일축구연맹 부회장, 피파 집행위원, 월드컵 조직위원장, 바이에른 회장과 명예회장 역임.
* 또한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선수와 수비수 5인을 선정했는데, 1970년대 최고의 선수 2위, 1960년대 수비수들 중 1위에 이름을 올렸다.

5.1. vs 요한 크루이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요한 크루이프 vs 프란츠 베켄바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동시대에 대활약한 또다른 레전드 요한 크루이프와의 라이벌리로도 매우 유명하다. 축구사에선 펠레 vs 디에고 마라도나, 리오넬 메시 vs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함께 가장 유명한 라이벌리 중 하나며 종목을 통틀어서도 NBA매직 존슨 vs 래리 버드와 함께 라이벌리를 논할 때 거의 무조건 언급된다. 똑같은 유러피언컵 3연패, 1974 서독 월드컵 결승전의 맞대결, 축구 전술사 혁명의 핵심롤(토탈 풋볼 vs 리베로), 은퇴 후 감독으로도 성공했다는 점등 여러가지 공통점들이 있어 더욱 조명받는다. 크루이프 사망시까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 리스펙트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한준희 해설위원과 장지현 해설위원도 원투펀치에서 이 주제를 다루었는데, 둘 다 역대 축구를 크게 한번 바꾸고, 토탈 풋볼의 상징이 된 크루이프를 더 위로 랭크하였다. 다만, 베켄바워가 얻어온 엄청난 수의 우승 트로피들과 뛰어난 활약, 리베로로서 아직까지도 수많은 수비수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도 언급하였으나 수비수라는 포지션이 랭크놀이에서 불리하다는 점도 들었다. 참고로, 해당 매체에서 이전에 역대 멀티플레이어 순위에서는 굴리트에 이어 베켄바워가 2위에 선정될 정도로 베켄바워는 다재다능한 선수이기도 했다.


6. 기록[편집]



6.1. 선수[편집]



6.1.1. 대회 기록[편집]







6.1.2. 개인 수상[편집]


  • 발롱도르: 1972, 1976 / 2위: 1974, 1975 / 3위: 1966
  • 발롱도르 드림팀: 2020
  • FIFA 월드컵 브론즈슈: 1966
  • FIFA 월드컵 신인상: 1966
  • FIFA 월드컵 올타임 XI: 1994
  • FIFA 월드컵 올타임 드림팀: 2002
  •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1972, 1976
  • UEFA 유로 역대 베스트 XI: 2016
  • 월드 사커 올해의 팀: 1966, 1967, 1968, 1969, 1971, 1972, 1973, 1974, 1975, 1976, 1977
  • 월드 사커 역대 베스트 XI: 2013
  •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1966, 1968, 1974, 1976
  • 키커 올해의 남자: 1990, 2006
  • 키커 올해의 리베로: 1973-74, 1975-76, 1980-81
  • 키커 올해의 팀: 1965-66, 1966-67, 1967-68, 1968-69, 1969-70, 1970-71, 1971-72, 1972-73, 1973-74, 1974-75, 1975-76, 1976-77
  • NASL MVP: 1977
  • 레기오날리가[36] 올해의 선수: 1965
  • FIFA 100: 2004
  • FIFA 공로훈장: 1984, 2004
  • FIFA 회장상: 2012
  • UEFA 회장상: 2012
  • 라우레우스 공로상: 2007
  • FIFA XI: 1968
  • 20세기 월드팀: 1998
  • 20세기 유럽팀: 1998
  • 옹즈 드 옹즈: 1976
  • 마르카 레전드: 2012
  • 아스 올타임 XI: 2021[37]
  • 바이에른 뮌헨 올타임 XI: 2005[38], 2017[39]
  • 바이에른 스포츠상: 2005
  • CONMEBOL 리본상 공로훈장: 2006
  • 한스 로젠탈 명예상: 2010
  • 골든풋: 2010
  • 월드 스포츠 1950~1970년 월드 베스트 XI: 1970
  • IFFHS 레전드: 2016
  • IFFHS 최우수 유럽 선수 (1956~1990)
  • IFFHS 올타임 월드 드림팀: 2021
  • IFFHS 올타임 유럽 드림팀: 2021
  • IFFHS 올타임 독일 드림팀: 2021
  • 독일 스포츠 명예의 전당: 2006
  • 독일 축구 명예의 전당: 2018
  • 바이에른 뮌헨 명예의 전당
  • 발터 벤제만 독일 축구문화상 특별상: 2006
  • 독일 축구 대사 명예상: 2022


6.2. 감독[편집]



6.2.1. 대회 기록[편집]






6.2.2. 개인 수상[편집]


  • 월드 사커 올해의 감독: 1990
  • 유럽 올해의 축구 감독[40]: 1990
  • 키커 올해의 감독: 1993-94


6.3. 수훈[편집]


  • 독일 공로훈장 공로십자장: 1976
  • 독일 공로훈장 제1급 공로십자장: 1986
  • 독일 공로훈장 대공로십자장: 2006
  • 바이에른 공로장: 1982
  • 바이에른 사회공로메달: 2011
  • 바이에른 헌법 금메달: 2012
  • 니더작센 공로장 1등급: 2008
  •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공로장: 2009
  • 은월계수잎 훈장: 1966, 1967


6.4. 출전 기록[편집]


시즌
클럽
소속리그
리그
FA컵
대륙대회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63/64
FC 바이에른 뮌헨
레기오날리가
6
2
-
-
-
-
1964/65
FC 바이에른 뮌헨
레기오날리가
31
17
-
-
-
-
1965/66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33
4
6
1
-
-
1966/67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33
0
5
0
9
0
1967/68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28
4
4
0
7
1
1968/69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33
2
6
0
-
-
1969/70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34
6
1
0
2
0
1970/71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33
3
9
1
8
1
1971/72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34
6
6
1
7
1
1972/73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34
6
6
0
6
1
1973/74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34
5
4
0
10
1
1974/75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33
1
3
0
7
1
1975/76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34
5
7
2
9
0
1976/77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33
3
4
0
-
-
1977
뉴욕 코스모스
북미 축구 리그
15
4
0
0
-
-
1978
뉴욕 코스모스
북미 축구 리그
27
8
0
0
-
-
1979
뉴욕 코스모스
북미 축구 리그
12
1
0
0
-
-
1980
뉴욕 코스모스
북미 축구 리그
26
4
0
0
-
-
1980/81
함부르크 SV
분데스리가
18
0
1
0
0
0
1981/82
함부르크 SV
분데스리가
10
0
3
0
5
0
1983
뉴욕 코스모스
북미 축구 리그
25
2
0
0
-
-


7. 베켄바워에 대한 헌사[편집]


파일:der kaiser beckenbauer.jpg}}}

프란츠 베켄바워는 내가 본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다. 출처

펠레


프란츠는 훌륭한 볼 배급 능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훌륭한 태클러였고, 상황을 통제할 줄 알았으며 결코 긴장하는 법이 없었다. 정말 상대하기 힘든 선수였다. 출처

그가 가졌던 최고의 능력은 환상적인 시야였다. 출처

1966년을 다시 떠올려 보면, 프란츠와 나는 하루 종일 서로를 바라보았고, 둘 다 긍정적인 의미로 경기에 기여하지 못했다. 우리는 서로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지 확인하느라 바빠서 사이좋게 경기장에서 지워졌다. 출처

그는 훌륭한 선수였고, 매우 긍정적이었으며, 매우 빨랐고 항상 위협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1966년과 1970년에 그를 막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서독이 가진 선수 중 가장 위협적인 선수였다. 그는 그의 스피드와 컨트롤, 재능을 살려 놀라운 플레이를 보여주었고, 나 같은 마킹맨이 항상 붙어 있어야 그 훌륭한 능력을 조금이라도 제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출처

바비 찰튼


그는 수비수와 미드필더를 모두 소화할 수 있었다. 그는 다재다능하고 융통성이 있었으며, 경기의 흐름을 잘 읽었고, 플레이하는 방법을 아는 선수였으며, 또 전진하여 골을 넣기도 했다. 출처

에우제비우


누구도 프란츠를 넘어설 수 없었다. 출처

게르트 뮐러


나는 어느 날 식당에서 그를 봤는데, 그는 그런 곳에서도 그가 축구할 때 보여주는 권위와 클래스를 보여주었다. 출처

브라이언 클러프


매우 우아하며, 공을 잘 다루고 경기를 잘 읽는 선수였다. 그는 미드필더와 수비수를 모두 소화할 수 있었는데, 내 생각에 그에게 걸맞는 위치는 '리베로'였던 것 같다. 공을 앞쪽으로 가지고 나와서 수비진과 중원을 연결하는 것 말이다. 그는 훌륭한 리더이기도 했으며, 라커룸에서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출처

오스발도 아르딜레스


당신은 그가 완벽한 선수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출처

나는 누군가가 그에 대해 비판하는 것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축구장 안에서도, 축구장 밖에서도. 출처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클래스 그 자체. 침착하고 속도감이 있었으며, 중원으로 쉽게 이동하여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동료들이 가진 모든 장점을 빠짐없이 갖추고 있었다. 나는 어릴 때 그가 발의 안쪽과 바깥쪽을 모두 활용하여 패스하는 것을 보고 많은 영감을 받았다. 위대한 선수의 특징은 서로 다른 두 시대에서도 효과적으로 플레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점이다. 베켄바워는 그런 선수였다. 출처

글렌 호들


그는 남자다운 리더였고, 우아함과 기술로 중무장한 채 지배적인 존재감을 뽐냈던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이건 꼭 말해야겠네요. 그는 내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8살 때, 나는 서독과 네덜란드간에 있었던 1974년 월드컵의 결승전을 보았어요. 나는 네덜란드를 응원했죠. 네덜란드가 패배하고 나서 나는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어요. 그때는 아주 슬펐지만, 지금은 Der Kaiser의 총명함을 인정해요. 출처

에릭 칸토나


그는 축구계의 진정한 신사였고, 경기를 읽는 능력이 뛰어나고 기술적이기에 필드 어디에서나 뛸 수 있는 선수였다. 그는 클래스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선수였고, 오랜 시간 동안 정점에 군림했다. 멋지다. 출처

에마뉘엘 프티


내가 본 영상에서 베켄바워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공격에 가담했고, 골을 넣었으며, 팀을 지휘했다. 대박이다. 출처

제라르 피케



8. 이야깃거리[편집]


2020년 프랑스 풋볼 주관 발롱도르 드림팀에서 하나뿐인 센터백 득표율 1위를 기록하며 2013년의 월드사커 역대 베스트 XI에 이어 또다시 이름을 올렸다. 베켄바워는 1970년 월드스포츠, 1981년 플라카르의 베스트팀 등 현역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러 기관과 매체에서 선정한 올타임 베스트팀에서 중앙 수비수 한 자리에 매번 무혈입성하고 있다. 은퇴한 지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그 위상이 굳건하다.

1966년 당시 유럽 최정상이던 인테르로 이적이 거의 확정상태였지만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이탈리아 대표팀이 북한 대표팀에게 패배하자 이탈리아 축구협회에서 외국인 선수 영입 금지 조항을 만들면서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고 한다. 만약 실제로 이적이 성사되었다면 바이에른 뮌헨의 찬란한 영광은 없었을지도.

차범근과는 굉장히 두터운 사이다. 베켄바워가 말년 함부르크 SV에서 뛰던 시절 차범근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서 한창 전성기를 보냈는데 같은 리그에서 플레이를 하며 서로 간에 친분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어느 정도냐 하면 차두리2010 남아공 월드컵 이후 셀틱 FC로 이적하려 했을 때 차두리의 워크퍼밋 조건이 충족이 안 되자 베켄바워가 직접 추천서를 적어 주기도 하였다.

파일:attachment/프란츠 베켄바워/f39.jpg
2014 브라질 월드컵을 앞두고 차범근SBS 광고에 출연하기도 했다.

2009-10 챔스 결승전을 앞두고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팬들에게 챔스보다 더 빛나는 주장 하비에르 사네티가 있는데 챔스 없다고 슬퍼하지 말라는 칭찬[41]을 하였고, 결과는 인테르의 승리.빛나는 주장과 빅이어를 동시에 갖고 있는 위대한 클럽 인테르[42]

2014년을 휩쓴 아이스 버킷 챌린지에 수많은 축구인들이 지목했으나, 베켄바워는 정중히 거절하고 5000유로를 기부했다. 그 이유는 전후 폐허가 된 뮌헨에서 태어났기에 갓난아기 때부터 항상 차가운 물로 씻어야만 했고, 그것이 일종의 트라우마가 되어 찬물을 견딜 수 없다고. 기부 후에 펠레믹 재거, 그리고 귄터 네처를 지목했다. 기사

무결의 커리어와 달리 사생활은 전혀 깨끗하지 못했다. 66년 첫 결혼을 해서 두 아이를 얻었지만, 나이가 많이 차이 나는 보험대리인과 혼외정사를 벌여 셋째 아이를 얻은 것 때문에 첫번째 부인과 별거를 거쳐서 1990년에 이혼을 하고 만다. 1980년대 별거 기간 동안에는 다른 여자와 동거를 했다가 1990년 독일축구협회 여직원과 2번째 결혼을 했다. 이후 아이 없이 결혼생활을 지내다가 개인 비서와의 불륜으로 두 아이를 얻은 것이 빌미가 되어 두번째 부인과도 별거를 거쳐 2004년 이혼을 하게 된다. 개인 비서와 세번째 결혼을 올린 직후 현재까지는 별 다른 탈없이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라이벌이었던 요한 크루이프가 1968년, 아내 대니 코스터를 만나서 201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별 트러블 없이 부부생활을 잘 유지한 거랑은 크게 대비가 된다.[43]

2022 카타르 월드컵 개최지 선정 의혹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90일 정지라는 처분이 내려졌다. 그는 2022년 월드컵 개최지 투표가 실시된 2010년 무함마드 빈 함맘 전 카타르 축구협회장과 밀약을 맺고 카타르 선정을 도왔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영국 선데이타임스는 베켄바우어가 독일 기업의 카타르 진출을 돕는 브로커 역할을 한 정황이 있다고 보도했다. 이에 가르시아 조사관이 두 차례 면담 요청을 했으나 모두 거부했다. 기사

하지만 베켄바워가 조사에 응하였고, 그 결과 결국 무혐의 처분을 받고 FIFA에서도 고소를 취하, 제프 블래터의 애꿎은 희생양이 되었다. 기사 아무래도 행보 자체가 블래터의 오른팔인 미셸 플라티니와 정반대 행보를 보이고 영향력이 큰 레전드 오브 레전드다보니 견제를 했다고 볼 수 있다. FIFA 회장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기에 법을 개정하면서까지 5선에 도전하는 블래터와의 기세싸움이라고 볼 수 있다. 베켄바워는 2000년대 초반부터 유력한 차기 FIFA 회장 후보로 꼽히는 인물이며, 집행위원으로서 2022 카타르 월드컵의 개최를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정 개최해야한다면 1월에 해야한다는 입장이었기에 뇌물수수혐의는 더욱 뜬금없었다. 베켄바워는 블라터의 이러한 처사에 분노하여 강력한 재조사 입장을 들고 블라터와 정면대결을 펼치려는 상황이다.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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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시절부터 독일을 대표하는 스포츠 브랜드 아디다스의 대표 모델로 활약중이다. 베켄바워의 이름을 딴 스니커즈는 슈퍼스타와 함께 영원한 스테디셀러. 2006년 독일 월드컵을 기념하여 베켄바워가 현역시절 착용했던 져지, 유니폼 등을 복각해서 한정 출시하기도 했다.

역시 독일인답게 맥주를 좋아한다. 사실 옥토버페스트의 원산지인 바이에른주의 바이에른 뮌헨의 레전드인데 안 좋아하는 게 더 이상하기도 하다. 바이에른 주를 대표하는 에딩어(Erdinger Weißbräu) 맥주의 광고를 찍기도 했다.

전통 의상인 디른들(Dirndl)을 입은 옥토버페스트 아가씨와 건배를 하는 내용. 탈모가 왔는데도 미노년의 간지를 뿜어낸다.

펠레의 엄청난 팬이다. 역대 최고의 선수가 누구냐는 질문이 들어오면 고민도 안 하고, 바로 펠레를 말한다. 오죽 하면 "내게 가장 영광스러웠던 때는 월드컵에서 우승했던 때가 아니라, 펠레와 함께 뛰었던 때였다"라고 말했겠는가. 2015년 5월에도 "펠레메시보다 조금 더 앞서 있다"라고 말했다. 물론 20대에 한창 커리어를 쌓고 있던 메시를 펠레에게 비견했다는 것 자체가 메시에게도 찬사. 기사.

그의 아들도 축구선수였으나, 2군에서 주로 뛰었다. 지난 2015년,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손자 루카 베켄바워도 축구선수로 활동 중이다. 분데스리가 하노버 96에 소속되어 있으며 프로 데뷔를 앞두고 있다.

위르겐 클롭을 엄청 좋아한다. 그가 FC 바이에른 뮌헨의 감독을 맡는 게 소원이라고 한다.

현재 건강 상태가 매우 안 좋다고 한다. 의료진의 말에 따르면 2019년 4월부터 건강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으며 판단력과 기억력이 매우 안 좋아졌고 개선될 여지가 없다고 한다. 베켄바워는 두 번의 심장 수술과 골반 인공 관절 수술을 받았으며 자신의 골프 대회에서 한쪽 눈이 실명 상태임을 밝혔다. #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 자국팀이 2-0으로 패배하고 조별리그 꼴찌로 광탈하자 외질은 국가 제창도 안 하는 매국노 라며 맹비난을 했다. #

UEFA 네이션스 리그/2020-21 시즌에서도 독일이 스페인에게 6-0으로 참패를 당하자 "독일 축구가 전세계 웃음거리로 전락했다"며 분노했다. #

2022년 12월 29일 펠레가 작고하면서 "펠마베크디"[44]로 불리던 메날두 이전 축구계 탑5 라인 중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9. 둘러보기[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24 08:16:43에 나무위키 프란츠 베켄바워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36] 당시의 2부 리그[37] 링크[38] 팬투표[39] 분데스리가 홈페이지 선정[40] 제프 헤르베르거 어워드[41] 정확히는 "너네 챔스 우승은 못 할 거임 ㅋ"라는 의미의 도발에 가깝다. 챔스 결승 상대가 자신의 친정팀인 바이언이었기 때문에 바이언이 우승할 것이라는 뜻으로 한 말.[42] 여담으로, 인테르는 이 우승을 통해 이탈리아 클럽 유일의 트레블을 달성했다. 또한 23년 시점에서 돌아본다면 바이언에 있어 이 준우승은 상당히 아쉬웠을 것이, 09-10의 바이언 역시 리그컵대회를 모두 평정하고 챔스 결승까지 온 것이기 때문. 즉 이때 우승했다면 바이언의 첫 트레블은 3년 일찍 달성되었을 것이고, 바르사보다 두 번째 트레블이 빨랐을 것이며, 아예 이를 넘어서 트레블 3회라는 엄청난 대기록을 쓸 수도 있었다.[43] 심지어 크루이프는 가족이 괴한들한테 공격받은 문제로 국가대표까지 은퇴했다.[44] 펠레, 디에고 마라도나, 요한 크루이프, 프란츠 베켄바워,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