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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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군사원조사령부
U.S. Military Assistance Command, Vietnam

Bộ chỉ huy viện trợ quân sự tại Việt Nam

파일:Patch_of_Military_Assistance_Command,_Vietnam.png
주둔 기간
1962년 2월 8일 ~ 1973년 3월 29일
국가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소속
미국 태평양사령부
규모
1969년 4월 기준 543,000명
본부
탄손누트 공군기지
사령관
프레데릭 웨이안드[1]

1. 개요
2. 사용 장비
3. 미국 내 여론
4. 실상
4.1. 전술적 측면
4.2. 물자 낭비
4.3. 총체적 기강 해이
4.5. 전쟁범죄
5. 결론
6. 여담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남베트남의 끈질긴 요구와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 속에 도미노 이론을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에, 1962년 베트남 군사원조사령부를 창설해 미군을 주둔시키고, 1964년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2] 본격적으로 베트남 전쟁에 개입한다.

2. 사용 장비[편집]






베트남전기의 미군 및 다국적군 기갑차량
파일:미국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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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캄보디아 내전, 라오스 내전
미군다국적군 기갑차량
파일:베트남 공화국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파일:호주 국기.svg 파일:뉴질랜드 국기.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태국 국기.svg 파일:캄보디아 국기.sv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Flag_of_the_Khmer_Republic.svg.png 파일:라오스 왕국 국기.svg
기타전차
M31 TRVFR, 89식 중전차 치로 을형FR, M4A1FR, 전투공병전차, M67A1 지포 화염방사전차, T-34-85C
전차
경전차
95식 경전차 하고FR, AMX 13ROV/KH, M41(A1/A3)ROV, M5 스튜어트FR/ROV, M24 채피FR/ROV/KH/LAO
공수전차
M551 셰리든
주력전차
M48(A2C/A3), 센추리온 Mk.5/1AUS, 59식 전차C/ROV
장갑차
차륜장갑차
닷지 WC62FR, GMC CCKWFR, Coventry Mk.IFR, V-100, M8 LACFR/ROV/LAO, 험버 정찰장갑차FR, 파나르 178BFR/ROV, 링스ROV, 알비스 살라딘(FV601)AUS, M3 스카웃 카FR
궤도장갑차
94식 경장갑차 TKFR, 르노 UE 슈니예트FR, Sd.Kfz. 251FR, LVT-4FR, LVT-4/40FR, M113ROK/ROV/KH, M59, LVTP-5ROV, LVTH-6, M113 76mm FSVAUS, M114 장갑차, M2 하프트랙FR/ROV, M3 하프트랙FR/ROV/LAO, 유니버설 캐리어FR, M29C 위즐FR
차량
소형
M151, M715, 랜드로버 시리즈 IIAUS
트럭
건 트럭, M37, M602, M211, M274
자주포
자주곡사포
LVT(A)-4FR, M8 스콧FR, M53/M55, M107, M109, M108, M110
자주박격포
M125, M106
대전차 자주포
M50 온토스, M56 스콜피온, M36B2FR
대공 차량
자주 대공포
GMC CCKW 353 AAFR, M16 MGMC 미트쵸퍼, M167 VADS, M42 더스터, Phòng không T-34C/ROV
※ 윗첨자ROV: 남베트남(Republic Of Vietnam)군 소속 차량
※ 윗첨자AUS: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군 소속 차량
※ 윗첨자FR: 프랑스(FRance)군 소속 차량
※ 윗첨자KH: 캄보디아 왕국 및 크메르 공화국(KHmer)군 소속 차량
※ 윗첨자LAO: 라오스(LAOS) 왕국군 소속 차량
※ 윗첨자ROK: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 국군 소속 차량
※ 윗첨자C: 노획 차량








3. 미국 내 여론[편집]


베트남 전쟁하면 히피들과 진보 단체들의 시위 행렬을 떠올리기 쉽고 실제로 당시에는 인종차별과 계층갈등이 사회적으로 큰 이슈였기때문에 어수선했던것도 사실이었지만, 베트남 전쟁 초기의 미국 여론은 그리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당시에는 1964년 통킹만 사건이 조작이라는 사실을 몰랐을 때인 데다가 일반 국민들도 공산주의에 대한 병적 공포에 판단력을 상실하고 도미노 이론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6.25 전쟁 이후 '정의로운 세계의 경찰 미국'을 진지하게 믿었던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에 미국인들은 '베트남빨갱이들로부터 구하자!'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응오딘지엠의 만행이 좀 알려지긴 했지만 어쨌든 대통령을 응우옌반티에우로 갈아치운 직후에 전쟁이 터졌기 때문에 남베트남 정권에 대한 여론도 크게 나쁘지 않았다.

물론 전쟁이 장기화되고, 전선이 지지부진해진데다가, 그간의 인종문제가 본격적으로 사회쟁점이 되었던지라 1966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패배하면서 존슨 대통령의 인기가 크게 나빠졌음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1967년까지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 내 여론은 좋은 편이었고 당연히 미국이 이기고 있다고 믿었으며 네이팜탄을 맞고 불바다가 되는 북베트남 마을이 나오는 뉴스를 보고 환호를 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1968년 구정 공세의 실상이 낱낱히 드러나고 미국 대사관이 베트콩북베트남군에게 공격받는 모습이 여과 없이 방영되면서 급격하게 기울어진다. 우리가 생각하는 미국 내 반전 시위의 모습은 대부분 구정 공세 이후의 모습이다. 또한 1970년 미군의 캄보디아 폭격[3] 폭로[4]와 1971년 펜타곤 페이퍼 등 미국 언론에서도 미군에 불리한 이슈가 지속적으로 터졌다.


4. 실상[편집]


미군 창설이후 현재까지 미군의 군기, 행정, 제반사항 등에서 가장 총체적 개막장이었던 시기로 일컬어지고 있다.

2차대전은 파시즘이라는 전체주의적, 반인륜적 광기에 대항한 결기가 있었고, 한국전은 먼저 평화를 깨고 침략해온 북한과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결기 등의 확실하고 의미있는 "명분"이 있었지만[5] 베트남전은 파병된 미군들이 생각하기에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생각할 정도로 명분조차 없었던 전쟁이며 미군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 시기로 알려져 있는 전쟁이다.

무엇보다도 구찌 터널의 활약을 무시할 수 없다. 이 구찌터널은 입구인지 터널인지 알지 못했고 구찌터널의 유래는 농민이 호미로 땅굴 파기시작한 1946년에 시작되었는데 프랑스에 맞서고자 비정규군 베트남군이 48km의 터널을 만들었고 통킹만 사건 이후 200km를 더 팠다고 한다. 유독 석회질을 포함한 토지는 비가 오면 굳어버려서 탱크가 위로 지나가도 무너지지 않았고, 따라서 미군이 이들의 실체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4.1. 전술적 측면[편집]


베트남전 당시 미군의 실상을 보면 실로 참혹하기 그지 없었다. 미군은 특수부대 제외하면 나머지 군인들은 제파 전술을 선호하는데 문제는 제파 전술이 시간을 오래 끌면 안되는 전술이며 평야 지역인 몽골 지역 혹은 유럽과 달리 정글과 산맥은 물론 단결심이 강한 민족에게 절대로 쓰면 안되는 전술이다. 미국은 두번의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승승장구 했지만 평야 지역 한정이며 쿠바, 베트남 등지에서는 게릴라 위주로 가기 때문에 압도적으로 제압하더라도 비용이 상당히 많이 나간다. 심하면 나중에 PTSD를 걸리고 학살까지 가는데 이렇게 되면 여론이 안좋게 나올 뿐더러 전쟁에 질색이 난 같은 우방국들도 등 돌릴 수 밖에 없다.

당시 미군은 게릴라전에 전혀 익숙하지 않아서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의 게릴라 전술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전쟁 초기 미군의 주력소총이었던 M14 소총은 베트남과 같은 정글전에서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6] 목제 스톡을 사용하는 M14는 베트남의 습기, 하천지대 등에서 내구성 문제를 드러냈다. 물론 북베트남 정규군이나 베트콩도 목제 스톡의 SKS, 목재 개머리판과 핸드가드를 사용하는 중국에게서 지원받은 56식 소총(AK-47)을 사용했으나 이들은 인도차이나 전쟁때부터 쌓인 노하우로 목재 부품들을 라드(돼지기름)를 녹여 코팅했다. 또한 상대적으로 많은 장탄수와 분당 발사속도가 우수하고 또한 현재까지 내구성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AK계열은 정글 우림지대에서 탁월한 안정성을 자랑했다. 하지만 M14는 애초에 탁 트인 야지에서의 운용을 가정하고 만들어졌고 자동발사시 반동도 너무 강했을 뿐더러 정글에서 사용하기엔 너무 긴, 한마디로 "장총"이었다. 즉, 2차대전기의 주력소총이었던 M1 개런드에 장탄수 늘리고 자동발사 기능만 추가한 수준인 시대에 뒤떨어진 물건이었다. 당시의 베트콩은 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군에게 취득한 MAT49, 미국산 톰슨 류의 기관단총도 운용하고 있어서 협소한 정글에서 갑툭튀하여 탄환을 비오듯 퍼붓고 튀는 전술은 미군도 당해내기가 힘들었다.

미군은 북베트남 정규군을 상대로는 1대 9, 베트콩을 상대로는 1대 20 정도의 교환비를 내긴 했으나 이는 동맹국들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낮고, 태평양 전쟁과 한국전쟁 때의 미군과 비교해도 너무나도 형편없어진 교환비였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은 북베트남 정규군을 상대로도 1대 24의 교환비를 냈고, 베트콩을 상대로는 1대 40의 교환비를 자랑했다. 호주군 같은 경우, 북베트남 정규군 상대로 1대 50, 베트콩 상대로는 거의 1대 100 이상의 정신나간 교환비를 낸 것에 비하면 미군의 교환비는 너무나도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한국전쟁에서 미군도 북한군이나 중공군을 상대로 1대 50 이상의 교환비를 냈었는데 과거에 비해서도 훨씬 모자란 수치였다.

특수부대나 일반 전투 부대의 정예병 중심으로 파견한[7] 한국군, ANZAC군과 달리 미군은 일반 징집병이 비교도 안되는 규모로 동원됐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세간의 인식과 달리 베트남 전쟁에 파병된 미군 중에는 자원병이 훨씬 많았다. 심지어 단순 비율로는 2차 세계대전보다 훨씬 높다. 즉 아무나 그냥 막 잡아서 전쟁터에 투입 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즉 공산주의에 대항하고자 하는 청년들의 애국심섞인 호승심, 할아버지는 1차대전 참전용사 아버지는 2차대전 참전용사 등 군인집안 자제들이 많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도 T/O를 메꾸기 위해 불특정 다수로 징집된 질낮은 자원과 베트남전 특유의 분위기에 점차 물들어가게 된 것이다.

1967년 중반부터 M16 소총이 미군에 보급되었고, M14에 비해 성능은 분명 우수했다. 플라스틱 재질의 핸드가드와 개머리, 적절한 반동, M14보다 컴팩트한 사이즈등 장점은 무척 많았으나 초기에는 초도 보급 총기 자체의 결함, 장약의 미스매치, 잘못 퍼진 총기 관리에 대한 루머 등으로 인해 고장으로 악평을 들었다.[8] 그래서 지급받은 M16을 버리고 AK-47을 쓰는 미군들이 꽤 있었는데 문제는 MACV-SOG 산하 특작대원들의 여러 임무 가운데 하나가 베트콩의 탄약고에 잠입해 AK-47용 7.62x39mm M43 탄의 정밀모형 내지는 불량품 등을 끼워넣는 것이었다. 원래는 베트콩 및 이들에게 파견된 북베트남군이 총을 썼을 때, 작동고장 및 이로 인한 폭발까지 노려[9] 자신들의 주력 소총을 불신하게 만들려는 것으로 당시 미군 상층부도 '적군의 AK-47는 원래 불량률 높은 총이다'라고 일선의 병사들에게 이러한 내용의 교육을 해 특작부대들의 행동에 대한 연막 및 이로 인한 아군의 피해를 방지하려고 했지만, 혼란스럽고 급박한 전장에서 불량탄이 삽입된 AK를 가릴 틈도, 능력도 없는 미군 보병들에게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고, 결국 이런 랜덤박스급 상황에서 '불량탄 삽입 AK'라는 꽝카드를 선택한 미군 병사들까지도 베트콩 및 이들을 지원하러 온 북베트남군 병사들과 같이 펑펑 터져나갔다.[10]

M60 기관총도 오염에 취약하여 고장이 잦아 베트남에서는 부적합한 총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장병들에게 지급되었으며 쓸데없이 무겁기만 해서 병사들에게 '화약 먹는 돼지' 라는 별명을 얻었다. 영화 람보 같은 데서는 남자의 상징, 마초이즘의 상징 격인 총으로 등장하지만 실제 M60은 베트남전 당시 미군들에게 악평이 자자한 잔고장이 많은 총기였던 것이다.

미합중국 공군 또한 베트남전에서는 희한하리만큼 성과를 내지 못했다. 미 공군은 태평양 전쟁6.25 전쟁에서 최소 1:3 이상의 교환비를 접하고 있었으나 북베트남 공군을 상대로는 1:2를 간신히 넘기는 수준이었다. 그나마 F-4 팬텀 II가 미그기들을 상대로 1:3.67의 교환비를 냈지만 F-105MiG-17를 상대로 1:1.6을 간신히 넘기는 초라한 전과만 올리는 등 좋지 못한 상황이었다.[11] 사실 전투기보다 더 큰 문제는 북베트남의 방공망으로 롤링썬더 작전에서 공중전 손실비는 미군의 우위였으나 소련에서 제공한 베트남군의 소련제 지대공 장비에 미군기가 무더기로 격추당했다. 그래서 미국은 북베트남 방공망을 조지기 위해서 와일드 위즐 기체를 도입한다. 물론 북베트남 공군의 방해로 고생하지만 볼로 작전을 통해서 북베트남 공군을 일방적으로 털어버리는 등[12] 그럭저럭 대처할 수 있었다. 미사일의 문제는 미사일 만능주의의 탓도 있지만 당시 기술 수준으로 발칸포와 진공관 레이더를 기수에 쑤셔넣기는 어려웠던 것도 있고, 단순히 기관포의 부재탓을 하기에는 기관포가 없는 해군의 F-4가 나중에 기관포를 장착한 공군보다 우수한 전과를 올렸다.[13] 결론적으로 미군 항공기가 북베트남 항공기에게 일방적으로 털린 적은 없고, 고전하기는 했어도 손실비에서는 미국의 우위라는 건 사실이다. 이따금 지대공 장비에 의한 손실까지 전부 베트남 공군기의 전과로 밀어넣어서 미군이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을 당했다고 기술하는 경우가 있는데 엄연한 왜곡이다.

헬기 손실 역시 엄청났다. 하루에 한 대 꼴로 대공기관포와 미사일, 로켓 등에 의해 격추됐으며, 착륙 지점이 제대로 확보되지 않은 작전에서는 부비트랩이나 매복으로 인한 손실도 엄청났다. 특히 소련중국의 지원 덕에 북베트남군의 방공망은 매우 탄탄했다. 그래서 미군 항공기는 UH-1, AH-1, CH-47, OH-6, F-4 팬텀 II, F-105, AC-47, AC-130, A-1, B-52 등 모든 항공장비들은 늘상 SA-2나 RPG, 중기관총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고, 베트남 전쟁 동안 미군이 손실한 항공기의 총 수량은 최소한 네자릿수를 넘는다. 마이클 매클리어의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이라는 책에 따르면 이 중 1,000대 이상이 북베트남 상공에서 파괴됐다 한다.

그나마 그 교환비도 불명확한 것이 미군 뿐만 아니라 남베트남 진영 연합군 모두가 해당되는 문제로, 당시 연합군의 사살 전과 계산이 발견한 적군 시신 한 구당 몇 명 사살, 적군 총기 노획 한정당 몇 명 사살 이런 식으로 주먹구구식 계산이었던 관계로 실제로 더 교환비가 좋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특히 북베트남 정규군을 상대로 하는 경우. 애초에 베트남전 특성상 적을 몇 명 사살했는지 알기도 어렵다는 것을 감안해야 하긴 하지만.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최대의 전투 중 하나였던 케산 전투만 해도 케산 요새 포위전에서 미군이 실제 발견한 시신은 1,600구에 불과했으나 미군은 이를 10,000명 이상 사살했을 거라고 대충 추정을 때려버린다.

특히 호주군 일반 부대나 한국군의 경우에는 작전구역 특성상 실제로 북베트남 정규군보다는 베트콩과 전투를 벌이는 빈도가 더 많았다. 북베트남 정규군과 맞서야 했던 건 대부분 미군이었다. 실제로 북베트남 정규군이 상대였던 야전의 경우에는 연합군은 거의 예외없이 고전해야 했다. 주월 한국군의 경우 안케패스 전투에서 실제 작전기간 내내 고전하다가 마지막에 638고지 점령 직후 실제 발견한 적 시신은 4구, 무기노획 36정에 불과했는데 이걸 별 근거도 없이 436명을 사살했다고 보고하는 희대의 뻥튀기를 보여줬다. 1대 100의 신화에 빛나는 호주군도 호주군대로 롱탄 전투에서 실제 발견한 적 시신은 50구였으나 600명 이상의 사상전과를 올렸다고 과장해서 보고했다.[14] 보고부터가 이 꼴이니 1대 몇십 어쩌고 교환비 가지고 누가 높니 낮니 해봐야 과연 얼마나 이게 정확한 수치일지는 의문이라고 할 수 있다. 연합군이 주장한 전과가 전부 진실이라면 북베트남의 지상전 수행역량이 크게 약화되었을 것이나 현실은 전쟁기간 내내 북베트남의 지상전 수행역량은 전혀 감소하지 않았다는 게 현실. 물론 실제로 발견한 시신이나 무기 기준으로도 수십대 1의 교환비를 보인 전투들도 적진 않았으나[15] 많은 부분에서 과장이 있던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북베트남 측도 과장은 연합군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이들이 주장하는 연합군을 상대로 한 전과는 엄청나게 높고, 자신들의 손실은 매우 적은데 이쪽은 가히 월맹무쌍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전과 과장의 정도가 더더욱 심하다. 양측 모두 과장 및 축소가 있을 것이고 양측 주장의 중간쯤으로 추정하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미군의 대민 정책은 군이 아닌 민간 단체가 하도록 규정되어 있는데 그렇다고 위험한 지역에 민간 단체가 올 리가 없으며 미군이 다 해결해야 하는 판에 미국스러운 원조 방식으로 트럭에 쌀을 갖고와서 마을에 던져 놓고가기 일쑤였다.[16] 베트남 주민들은 우리 쌀 뺏어놓고 인심 쓴다고 불평했을 정도.

그렇다고 해서 북베트남이 전투에서 생각보다 잘 싸웠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교전비가 정확히 무엇이든지간에 전투 대부분은 남베트남 파병군의 승리였다. 미군도 북베트남 진영에 대해서 교전비가 현저하게 우세하다는 것은 정황상 명확하다. 단지 정확한 수치를 알 수 없을 뿐이다. 교전비가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북베트남이 전투에서 피해를 적게 입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며, 막대한 전술적 손실을 감수할 수 있을 정도로 전략적인 면, 그리고 여론이라는 측면에서 북베트남 진영이 남베트남 진영에 비해 우세했기 때문에 승리했다고 보는 게 맞다. 특히 전쟁을 수행하는 가장 중요한 주체인 남베트남이 총체적으로 부패에 시달렸고, 그에 따라 남베트남군도 겉보기와는 다르게 보급이 엉망인데다 내부에 스파이가 넘쳐나고 전투수행 의지도 낮은 오합지졸로 구성된 막장군대였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유엔군이 큰 역할을 했던 한국 전쟁조차도 한국군 지휘부가 정신 차리고 활약하지 않았으면 결국 공산화가 되었을 것이다. 한국 전쟁에서 적화통일이 저지된 주요 요인이 한국군과 한국 정부의 국가 수호 의지였던 것처럼, 남베트남 패망의 주요 요인은 남베트남의 낮은 국가 역량과 남베트남 정부의 부정부패 및 국가 수호 의지 결여였다.


4.2. 물자 낭비[편집]


미군의 물자 낭비는 말 그대로 개념을 상실한 수준이었다. 당시 한국 군인들은 모두 미군들 보급 나오는 것을 보고 부러워했다는 이야기가 많은데, 이건 지금 기준으로 봐도 납득이 가지 않을 정도의 물량 소모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베트남 전쟁 시기에 미군에서 베트콩 하나 잡겠다고 평균적으로 들인 비용이 무려 1명당 33만 2천 달러[17]였다. 애초에 포병들은 하루 평균 10,000발을 쏘아대었고, 소총수들은 새로 등장한 M16을 맹신한 채 자동으로 놓고 갈기기가 일쑤였다.[18] 사실 당시 베트콩들은 정글에서 기습공격하며 부비트랩, 지뢰 등 함정을 깔아놓은터라 미군이 여기에 큰 피해를 입었고, 베트콩이 나타나는데, 적이 보인다고 무식하게 그냥 추격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참전 용사에 따르면 베트콩이 확인됐을 때 소총부대가 바로 진입하기보다는 그 위치에 포격 지원을 요청해서 200발쯤 쏟아부어놓고, 전진했다고 전해진다.

여기에 압권은 B-52 폭격기였다. B-52 폭격기가 호찌민 루트의 베트콩 하나를 잡는데 써먹은 폭탄량은 100톤. 실제로 B-52는 한참 심할 때는 연간 20억 달러를 폭격으로 소모했고, 그 결과 약 1,500명을 사살했다. 문제는 같은 기간 동안에 그 100배의 숫자가 남파되었다라는 것이다. 20억 달러 들여서 평균적으로 100명 중 1명 잡았던 셈이다.

B-52의 위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앞서 언급한 북폭 역시 돈 많이 들어가고 효율 없기는 돈 문제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평균적으로 10억 달러를 북폭에 소모했는데, 그 타격이 평균 1억 달러 정도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게다가 이 정도는 중국과 소련의 계속된 지원으로 금방 복구되었으니 북폭이 아무 효과가 없었다. 단기간 전투로 꼽자면 구정 공세의 일환이었던 '케산 전투'가 있다. 미군은 케산이 제2의 디엔비엔푸가 되는걸 막으려고, 모든 항공기를 동원하여 케산 주변에 폭탄을 아주 그냥 들이부었는데 77일간 벌어졌던 이 전투에 쓰인 폭탄의 양이 12만7천 톤이었다.[19] 그래서 기지 반경 2마일은 아예 무인지대가 되버렸을 정도. 이 돈 때문에 1971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의회의 동의 없이 기존 브레튼 우즈(Bretton Woods) 체제금본위제도를 무너뜨리기까지 했다.

물론 정규전에 한정해서 물량으로 적을 깔아뭉개는 건 효율적인 판단이기는 하다. 실제로 연합군이 추축국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미국의 물량빨이다. 오죽하면 렌드리스라는 신조어가 탄생했겠는가. 당시 소련영국은 미국에 신청만 하면 탱크와 전투기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들어왔다. 게다가 육군항공대가 꾸준히 나치 독일에 폭탄을 뿌렸으니.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까지 했으면 이겨야하는데, 이기질 못했다. 2차 대전을 물량빨로 승리하였으나 그것에 버금가는 돈이 들어간 베트남전은 이기지 못한 것이다.

미군의 보급물자는 차고 넘치는 수준이어서 동맹국은 물론, 적국인 북베트남까지 그 수혜를 받았는데, 미군이 남베트남군에게 준 물자가 다음날 암시장에 나온다거나 베트콩에게 팔려가는 등 개판이 속출했다. 한국군도 이런 점을 이용해서 당시 최신 화기였던 M16을 많이 얻어내려고 꼼수를 부렸다. 본래 가지고 있던 것을 짱박고 새로 신청해서 수령한 뒤 그걸 또 짱박고 또 새로 신청해서...[20] 한국군도 이때 M113 장갑차를 비롯한 적지 않은 물자를 국내로 반입했으며, 나중에 미군이 물자 이동을 감시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상당히 많은 M16이 국내로 반입되었으며, 현재에도 향방작계 훈련시 예비군에게 지급되는 M16중 베트남전 특유의 튤립형 소염기와 콜트 마킹이 들어간 오리지널 베트남 M16들이 종종 보여진다. 한국군은 개전 초기 M1개런드, M1카빈, M2카빈(자동소총),그리스건 등의 당시 기준으로도 뒤떨어진 화기로 무장하고 있었고 화력의 열세를 미국측으로 지속적으로 어필하였다. 그리고 끝내 이를 관철시켜 M16소총, M60기관총 등 미군과 동일한 화기를 사용하게 되었고, 후에 한국 국내에서 라이센스 생산을 하게 되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며 K시리즈로 대표되는 한국 제식총기의 개발의 초석이 된다.


4.3. 총체적 기강 해이[편집]


베트남 전쟁 당시 대다수의 미국 군인들은 술, 마약, 섹스에 중독된 채 전투에 참전했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 나오는 사례를 보면 당시 미군이 얼마나 개판이었는지 알 수 있다. 한밤중에 술에 질펀하게 취한 연대장이 휘하 소대장에게 "찰리 몇 놈 잡아와"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것도 오밤중에 밀림 깊숙히 들어가서. 이에 소대장 브로일스 중위와 병사들은 연극을 했다. 나뭇가지도 꺾어오고, 물도 그릇에 떠와서 무전기로 나무를 밟는 소리를 내고, 나뭇가지를 꺾으며 숲을 지나는 것처럼 들리게 하며, 물을 첨벙첨벙 치면서 강물도 건넌다고 무전기로 뻥을 쳐가면서 1시간 넘게 보고했다. 취한 연대장은 속아넘어갔고 나중에 그냥 잠을 자버렸는데, 다음 날 그 연대장은 그런 명령을 내린 걸 전혀 기억 못하더란다.

The normal problems of red-blooded Americans posted in a tropical war zone—sex, alcohol, madness—multiplied in Vientiane, most often at a nightclub called the White Rose. Lilley recalled the day that “one of our senior CIA officers briefed a visiting congressional delegation on the secret war up-country. That evening the delegation was taken to the White Rose for exposure to nightlife in Vientiane.

Members of the delegation saw a large American man stark naked on the floor of the bar yelling, 'I want it now!" A hostess lifted up her skirt and sat on his face. It was the same officer who had briefed the delegation earlier in the day.

적도의 전쟁 지역에 배치된 혈기 왕성한 미국인들이 맞닥뜨릴 수 있는 정상적인 문제들 즉 섹스와 술과 광기는 비엔티안에서 특히 심했다. 이런 문제들은 거의 대부분 '화이트 로즈' 라는 나이트클럽에서 벌어졌다. 이와 관련된 일을 릴리는 생생하게 기억했다.

"간부 요원 한 명이 그 곳을 찾아온 의회 대표단에게 시골 오지의 CIA 사업에 대해서 브리핑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에 의회 대표단은 비엔티안에 있는 화이트 로즈라는 나이트클럽으로 안내를 받아서 갔습니다. 현지 요원들의 실태를 보기 위해서였죠.

그런데 이 술집의 무대 위에 덩치가 커다란 미국인 한 명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홀랑 벗은 채로 '지금 당장 하고 싶다아아아!'라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한 여종업원이 스커트를 훌렁 걷어 올리고는 이 남자의 얼굴 위에 앉았어요.

그런데 이 남자가 누구였느냐 하면, 낮에 대표단에게 브리핑을 했던 바로 그 요원이었던 겁니다."

-출처 : 팀 와이너, <잿더미의 유산(Legacy of Ashes)>[21]

이런 어처구니 없던 상황 속에서 미군들이건 미군과 함께 작전하던 CIA 요원들이건 모두가 다 같이 말 그대로 미쳐갔다. 헬기 조종사들은 맥주에 절어 음주조종을 했고, 다른 장병들은 술이랑 성매매는 물론 마약까지 했는데[22], 당시 베트남 정글에는 야생 대마가 흔했고 미군은 TV 카메라가 촬영하는 가운데서 대놓고 피우기도 했다.(...) 징집되어 베트남에서 싸우던 올리버 스톤도 이 당시, 마약에 빠져 제대 후에도 갱생하느라 고생해야 했고, 이 경험으로 이라크 전쟁이라든지 걸프전때 미군 파병을 부정적으로 대했다. 실제로 베트남에서 알콜중독, 마약중독에 PTSD에 빠진 예비역들이 미국내로 적지않게 퍼졌고 이를 다룬 영화가 야곱의 사다리이다.

당연히 1969년에서 1971년 사이에 미군의 환각제 사용자는 5%에서 14%로, 헤로인 복용자는 2%에서 22%로 폭증했다. 더구나 이는 상원위원회의 보고서로, 실상은 이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인데 단적으로 1981년 미국 통계에 의하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서 실제로 싸웠던 군인의 25%가 마약류 범죄로 체포되었다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덕분에 1971년 미군 야전병원에는 "전투로 부상당한 병사가 5,000명도 되지 않던 상황에서 마약문제로 입원한 환자는 20,000명이 넘었다"라는 엽기적인 기록이 남아있다. 한국군 참전 용사에 따르면, 한국군은 적으로부터 이동 규모를 들키지 않기 위해, 또는 풀밭에 지뢰가 있을까봐 앞사람이 걸어간 발자국을 그대로 밟으며 조심스럽게 행군했는데, 미군은 마약에 취한 채로 일렬 횡대로 행군하는 걸 봤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에 대해서는 1980년대에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한국군 장교가 쓴 <그날>이란 책자에서도 일화가 나와 있다. 한국군 지원 미군 헬기 조종사가 거나하게 취한 채로 와서 한국군들도 경악한 일화가 나와 있다. 그래서 그 장교가 영어로 "왜 술을 먹냐?"고 힐난하자 그 조종사는 살기 어린 눈빛으로 "이런 외국에서 개죽음 당하러 왔는데 맨정신으로 버티라구? 이 XX것들아. 네놈들은 여기서 뒤지는 게 좋냐? 좋아?"라고 소리치는 통에 그 장교는 "이 전쟁은 우리가 이길 수 없는 전쟁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계적으로 헬리콥터, 전투기 조종사는 최소 준위에서 소령급 장교들인데, 그런 계급을 부여받은 자들이 이랬으니 그 밑의 계급은 말할 것도 없다.

참고로 호주군은 알아서 절제했고 한국군은 한강의 기적이라는 국가적 특성상 외화 유출을 이유로 제한적으로 매점을 이용할 수 있었으나, 당시 미군 PX에서는 마구잡이로 뒷돈을 받으면서 술을 팔아댔다고 한다. 주말 한국군 부대 앞에 술을 살 수 있는 한국군 명의 "구매권"을 현금으로 사기 위해 죽치고 있는 미군들도 많았다고 한다.[23][24] 한마디로 상명하복의 군기 중심인 한국군은 제한적으로 대대급 보고 수준으로 비번인 부사관과 병사, 장교들의 음주회식을 인가하에 실시하였고 호주, 뉴질랜드군은 참전자들의 수기에서도 보이듯이 "알아서" 절제했다. 하지만 미군은 중,대대장과 선임부사관이 약간 분위기 좋아 보이거나 술을 마시면 병사들은 몰래 술을 마셔댔다. 한마디로 영화에서 보이는 술마시다 상황걸려 뛰쳐나가는 미군의 모습은 가공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는 1,2차 대전에서도 보이는 진중음주와는 다른데 추위해소, 긴장해소 등으로 홀짝대는 수준이 아니고 분대별로 몰래 술판을 벌이고 마약을 했다. 1,2차 대전 당시는 음주도 일종의 기호이고 남성의 소양이라는 당시 기조 상 프랑스군은 포도주가 보급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술 문제에 의한 기록이나 후일담은 별로 없는데 비해 베트남전의 미군은 술 문제가 상당히 많았다. 현재도 구글을 이용해 참전자 커뮤니티의 글을 쉽게 접할 수 있는데 벙커 안에서 몰래 먹던 저키(육포)와 맥주 맛은 지금도 잊을수 없다거나 앵그리코맨(한국 해병부대 파견 미해병 연락병. 함포,항공 폭격을 유도함)출신의 참전자가 "k레이션에 김치, 소주를 한국군과 끝내주게 마시는건 연락병들의 특권이다"라며 종종 추억글을 올린다. 판단은 각자가 하도록 하자.

게다가 군인의 기본소양이라 할 수 있는 복장과 장구류 불량도 심각했다. 물론 베트남이 엄청나게 더웠던 것도 한몫 했지만, 문제는 미군이 군복을 제대로 입고 있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맨몸에 플랙 재킷 하나 걸치고 다니는게 비일비재했고, 군장도 무겁다고 버리기 일쑤였으며 심지어 총기 관리도 개판이었다고 한다. 특히 전투복 상의의 팔을 잡아뜯어 나시 형태로 만들거나 하의를 잘라 반바지로 만드는 것 정도야 양반이었을 정도. 습하고 오염이 쉬운 정글에서 M16 소총이 자주 고장나자 이를 정비할 생각은 안하고 버리고 다른 총을 줍거나 아예 AK-47을 들고 다니는 병사들도 흔했다. 그리고 마구잡이 징집으로 불량배, 사회부적응자, 술집 기도 등의 사회의 하류층들이 대거 유입됐는데 이들이 군대 내에서 각종 문제를 일으켰으며 이들은 제대 후 미국에서 바이크 갱으로 편입되어 많은 사고를 쳤다. 미국 바이크 갱 서열에는 "SGT. at arms"라는 직책이 있는데 이는 베트남전 당시 부사관급 출신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갱 서열에서 중간보스급을 의미하는 직책이다. 더 나아가 연합군 중 공식적으로 덕 헌터 패턴의 위장복을 입고 온 한국 해병대에게 피복을 돈을 주고 사거나 바꾸어 입고 다니는 육군, 해병대 병사들도 적지 않았고 이를 문제삼는 간부도 별로 없었다. 현재 해병마킹이 들어간 덕헌터 즉 한국 해병대 군복을 입고 사진을 찍은 베트남전 미군들의 사진이 검색되는게 그 이유.

실제로 이 시기의 미군들의 방탄헬멧을 보면 온갖 낙서와 잡동사니로 도배가 되어 멀쩡한게 별로 없는데, 담배포커 카드를 끼워 놓은건 그나마 얌전한 축에 속하고, '집에 가고싶다.' 같은 평범한 문구부터[25] '우리에겐 Oswald가 한명 더 필요하다.(Where is Lee Harvy Oswalt Now that we really need him.)' 같은 불온문구나, 위장 따윈 개나 준 휘황찬란한 노즈 아트까지 각양각색이었다. 한술 더 떠서 장난감이나 염소 뿔(...) 같은걸 끼워놓은 것도 있었다. 전술적 문제를 생각해서라도 근절해야 했지만 일선 지휘관들도 말리지 못할 정도로 심했다. 기록 사진으로 확인 가능한 지금 시각에서야 낭만이겠지만 이는 심각한 군율위반이다. 오히려 방탄헬멧을 온전히 쓰고 다니는 것은 장교들밖에 없었을 정도. 상술한 상황에 대해서 "군율로 다잡을수는 없었는가?" 라는 의문점을 제기 할수 있지만, 타들어갈 것만 같은 더위, 푹푹 찌는 습도, 미치도록 꼬이는 벌레들, 지천에 널려있는 야생 대마, 빽빽하고 무성한 정글에서 보이지도 않는 적에게 사살 당하는 공포, 수틀리면 뒤통수에 총알이 박힐 것 같은 긴장감은 도저히 군율로 통제할수 있는 성향의 것이 아니었다. 온실 속에서 자라온 사관학교 출신이나 학군후보생 출신 초임장교들은 상술한 공포감에 경도 되어버린 병사들에겐 괜히 일을 재수없게 만드는 귀찮은 상급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고, 실제로 적지 않은 수의 신임 소위들이 프래깅에 희생당했다. 감독이 곧 고증전문가였던 올리버 스톤의 영화 플래툰을 보면 이러한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신임 소위가 병사들의 포커판에 끼어 친해져보려고 하나 오히려 대놓고 무시당하고 적당히 마시도록... 하면서 멋적게 물러난다. 그리고 선임부사관(반즈 중사)의 눈치를 계속보며 아첨까지 하는 모습을 보인다. 나중에 이 소위는 계속 겉돌다가 작전 중 허무하게 전사한다.

이런 개판 오분전의 상황에서 기강붕괴라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가지 않은것은 부사관들의 노력이 굉장히 컸다. 2차 세계대전, 한국전 출신의 노련한 상사나 일등상사들이 아직 군에 남아있었고 실전경험 및 군 생활이 풍부한 중사급들이 나름 장교들을 보좌하고 병사들을 통솔하고 눌렀기에 망정이지 이들마저 미쳐버렸다면 결과는 어땠을지 불보듯 뻔한 일이다. 예를 들자면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작전의 의미가 뭐냐고 밀러대위에게 항명하는 리처드 레이번 일병에게 호바스 상사가 권총을 뽑아 위협하면서 "똑바로 다시 말해봐" 라면서 으름장을 놓는 장면이 있다. 부사관들의 역할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의 한 장면이다. 베트남전의 대표적인 부사관으로 영화 위워 솔저스에 나오는 바실 플럼리 원사가 있다. 실존인물이며 제82공수사단 출신으로 2차 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 작전마켓 가든 작전에서 작전을 수행했고 한국전쟁 때는 제2보병사단으로 참전했다. 영화 상에서 플라스틱으로 만든 총은 못 믿겠다며 M1911만 들고 정확히 베트콩들을 조준사격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화이다. 게다가 머나먼 정글을 보면 지크 앤더슨 중사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극 중에서 그는 무려 3번이나 베트남전에 자원하여 3년이 넘게 베트남의 고인물로 있었던 인물이다. 극 중에서 그는 웬만한 장교들보다 경험이 풍부하고 실력이 출중하며 병사들 그 누구도 개기지 못하고 대위급 장교들도 그를 함부로 까지 못한다.[26] 놀라운 것은 이게 머니먼 정글에서만의 픽션이 아닌 실제로 이런 부사관들이 미군 내에 상당히 존재했었다는 것이고 철저한 고증이라는 것이다. 또한 플래툰에 등장하는 일라이어스 하사와 반즈 중사 같이 역전의 용사들의 묘사 역시 고증을 철저히 따른 것이다. 이런 부사관들에게 어떤 병사가 함부로 개기겠는가?[27][28]

여담으로 영화 위워 솔저스가 전쟁 초기, 플래툰이 전쟁 중후기이다. 위워 솔저스에서는 병사들의 전투복이 깔끔하고 군장도 제대로 착용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다가 플래툰을 보면 개판 오분전의 복장상태를 보여준다. 이는 영화 고증이 제대로 된 것이며 전쟁 초기의 멀쩡했던 미군과 중후기의 미쳐가는 미군을 제대로 비교해서 볼수 있다. 참고로 당시 연합군으로 참전했던 호주군은 2차대전, 한국전 출신의 노련하고 강철같은 부사관들을 선별해서 파견하여 병사들을 통제, 훈련케 했으며 한국군 역시 일본군 징집에 따른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부터 해서 한국전쟁과 후방의 빨치산 토벌작전과 후방 민사작전을 수행해본 3~40대 부사관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다.

심지어 파월 초기 한국군 지휘부는 사령관 채명신 소장은 물론 영관급 지휘관 전원한국전쟁과 빨치산 토벌을 경험한 참전용사였다. 호주군과 한국군이 일정한 군기를 유지할수 있었던것은 이들의 역할이 컸다. 그리고 한국군은 전매특허인 민사작전(태권도 강습, 모내기 등 대민지원)을 수행하며 지역 주민들의 환심을 샀고 중대전술기지를 축성해서 효과적인 전투를 수행했다. 예나 지금이나 미군의 민사작전 역량은 그리좋지 않고 문을 박살내고 들어와서 총부터 들이대는 미군은 그 어떤 베트남인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29] 그래서 미군이 베트남 농민들에게 작별인사하고 가는중에 농민으로 위장했던 베트콩들이 작별인사한 미군들을 총으로 살해했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군 특유의 상명하복때문에 마주칠때마다 목청이 터져라 외치는 경례구호에 미군장교들은 한국군 부대를 방문할때마다 기분이 좋아졌다고 한다. 이는 윌리엄 딕슨 당시 육군 중위의 수기이며 휴식을 할때도, 작업중일때도 선임자가 일어나 자로 잰듯한 경례를 하고 통역병에게 무슨 보고를 하는거냐고 물어보았는데 저 사람 계급은 병장이고 지금 중위님께 본인 포함 인원수, 현재 작업중 휴식 취하는 것을 보고 하는 것입니다. 라는 말을 듣고 왜 우리 군대는 이런 게 안되는가 라고 생각했다고 한다.[30]

당연히 이 사태 이후로는 미군 내에서의 술, 마약, 성욕과 관련된 통제가 강화되었고 수뇌부 측에서는 잘 나아졌지만 병사들 사이에선 해결하지 못했다. 사이공, 하노이, 다낭 좌판에는 싸구려 양주들이 널려 있었고 부패한 px병들은 맥주를 팔아댔기 때문이다.


4.4. 병영부조리, 프래깅, 인종갈등[편집]


미국은 이때까지만 해도 병역이 징병제였고, 베트남 전쟁은 미군 역사상 가장 구타가혹행위, 병영부조리가 심했던 시기와 겹쳤다. 일본군 수준까진 아니지만 최소한 530GP 사건, 제28보병사단 의무병 살인사건, 제22보병사단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나는 대한민국 국군이 떠올라도 어색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사실 그 내지 그 이상은 되는 병영 분위기였다. 간부들은 폭력과 폭언으로 병사들을 다스렸고,[31] 선임병들은 후임병들을 놀려먹거나 괴롭히거나 구타하기 일쑤였다.[32] 전반적으로 동시대 인종 문제와 맞물린 것도 있고, 병사들은 사회적으로 자유주의적인 태도, 반권위주의적인 가치관이 퍼졌던 전후 세대인데 반해 장교들은 여전히 2차 세계대전 시대의 보수적 가치관을 갖고 있음으로 인해 군 내부 세대갈등이 심했던 시절로 평가된다. 비로소 본격적으로 백인, 흑인, 히스패닉, 동양인이 혼성 편제되던 시기였고 이 때문에 인종간 싸움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으며 심한 경우 아예 흑인, 백인끼리 안면몰수하고 따로 행동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는 전쟁 후로 갈수록 동고동락 개념이 생기면서 희석되기는 했지만 심각한 문제였다. 일례로 중국계 해병대원이 육군 헌병에게 베트콩이라고 조롱받자 동료 해병대원들에게 육군 헌병이 뭇매를 맞는 사건도 있을 정도였으니 심각하지 않았다고 말을 할 수 없다. 게다가 불량배, 전과자 등의 하류층 징집병들은 대학 출신 병사들을 컬리지 키드등의 멸칭으로 부르며 조롱하는 경우가 대다수였고 이는 나중에 미국사회의 해묵은 계층갈등의 씨앗이 된다.

한국전쟁 당시의 미군은 징병제였지만 2차 대전이 끝난지 얼마 안된 때였고 미국의 설득으로 민주주의 노선을 선택 했다가 침략당한 신생국가김일성과 공산주의로부터 어떻게든 구해내야한다는 책임과 명분하에 미국을 중심으로 민주주의 국가들이 단결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한국의 공산화를 막자는 명분이 더 앞서서 군복무는 적극적으로 임한 편에 속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은 그런 명분조차 한국전쟁에 비해 매우 약했고, 결국 약한 명분에서 비롯된 개개인의 불만이 병영부조리를 증폭시킨 것이다.

위의 병영부조리 문제와 더불어 미국 내에서도 반전운동 여파와 여러가지 부정적인 일들도 크게 퍼져버리면서 프래깅이 미국 역사에서 가장 많은 전쟁으로까지 언급되어버렸다. 1967년만 해도 공식적으로 800건이 넘는 프래깅이 적발될 정도[33]였으니, 미군 장교들은 눈 앞의 적군보다 등 뒤에 있는 부하들을 무서워해야 했다.

일례로 1967년 11월 미군 헌병이 입수한 어느 포스터에는 베트남어와 영어로 어느 미군 대위 이름과 여러가지 신상명세, 심지어 주둔지 정보까지 써있고 적군들에게 "이 놈 죽이면 1,500달러 포상금을 선물하겠다"라는 말까지 쓰여있었다. 미군 측이 난리가 난 건 물론이다. 하지만, 헌병들의 수사에도 결국 이걸 만든 범인은 잡히지 않았고, 얼마 뒤 그 중대장은 기관총에 벌집이 된 시체로 발견된다. 헌병들은 미군 기지 안에서 등 뒤에 M16 총알로 벌집이 된 점을 주목했으나 부대원 전원이 적군 공격으로 죽었다고 주장하는 터라[34] 결국 전사로 처리되었다. 군대라는 닫힌 사회의 전형적인 폐해.

거기에 영관급 장교 이상의 상급 장교들은 사이공의 장교 클럽에서 휴가를 즐기고 더운 한낮의 땡볕을 에어컨이 나오는 사무실에서 보냈는데[35] 이 판국에 위관급 장교, 부사관, 사병들이 회의감을 느끼지 않을 리가 없다.


4.5. 전쟁범죄[편집]


리드 : 공산주의자로 의심이 가는 사람들을 구금한 후 심문은 어떻게 진행되었습니까?

오즈번: 심문 과정에서 살아남은 구금자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모두 죽었습니다.

리드: 심의나 재판 절차 없이 전원이 죽었단 말인가요?

오즈번: 베트콩에 협조했다는 아무런 합리적 근거 없이 전원이 처형되었습니다.[36]

출처: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467


도망치는 놈은 빅터 찰리다! 그대로 있는 놈은 잘 훈련된 빅터 찰리다!

Anyone who runs is a V.C.! Anyone who stands still is a well-disciplined V.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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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 메탈 자켓


미군의 전술항공 지원은 베트남 전선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네이팜탄 투하와 세열폭탄에 사살되는 사람들이 베트콩 게릴라인지 아니면 단순한 농민인지를 구분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1962년 7월 7일 뉴욕타임스 보도


나레이션: 이 전쟁은 적과 민간인의 구분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베트남 민간인 증언자: 미군은 가는 곳 마다, 방화와 파괴 그리고 살상을 자행했습니다. 저는 게릴라가 살상당한 것을 목격한 적이 없습니다. 전부다 민간인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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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다큐멘터리[37]


만약에 베트남 전쟁 당시 전투에 관여했던 참전용사 중에 당신에게 전투 중에 정말 그런 참극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데일 다이의 증언[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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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을 보면,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캘리 중위와 몇몇 나쁜 병사들이 미라이 학살을 자행했으며, 미라이 학살 하나만 베트남 전쟁에서 일어난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실을 들어다 보면, 베트남 전역에서 미라이 학살이 일어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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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커밍스와의 인터뷰에서[39]


우리는 고향에 돌아와 침묵할 수도 있었습니다. 입을 다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베트남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나라를 위협하는 것에 대해, 알려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백만 명의 미국 남성들이 폭력을 배웠고, 역사상 가장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죽을 기회를 얻은 수백 만의 남자들이 분노와 배신감에 가득 찬 채 돌아왔지만, 아직 아무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마을을 구하기 위한 파괴 행위를 합리화했습니다. 우리는 미국이 도덕성을 잃는 것을 보았습니다. 미국은 냉정하게 미라이 학살을 받아들였고, 초콜릿과 껌을 나눠주는 미군의 이미지를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무차별 사격 지대의 의미를 배웠고, 움직이는 모든 것을 쏘았으며, 동양인의 목숨을 가볍게 생각하는 미국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미국이 사망자 수를 위조, 아니 오히려 그것을 미화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장군이 언덕을 차지해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언덕을 오르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한두 개의 소대를 잃은 후, 북베트남을 다시 차지하기 위해 언덕을 떠나 행진했습니다. 미국인은 이것을 생각하길 바랍니다. 누군가에게 베트남에서 마지막으로 죽은 사람이 되라고 어떻게 요구하겠습니까? 실수로 죽는 마지막 사람이 되라고 어떻게 요구할 수 있을까요? 30년이 흐른 뒤, 다리, 팔, 얼굴이 없는 우리 형제들이 길을 걸을 때, 어린이들이 부상당한 이유를 묻는다면, 우리는 '베트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추하고 가당찮은 기억이 아닌, 미국이 마침내 변한 곳 그리고 우리 같은 군인들이 변화하도록 도운 곳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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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케리의 연설


1971년 열린 미국 상원 청문회에서 오즈번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 내용이다. 캐나다 종군기자 마이클 매클리어가 쓴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 따르면 미군과 CIA가 공동으로 전개한 "피닉스 전략(Phoenix Program)"을 통해서 1968년부터 1971년 까지 약 27,000명을 체포하여 20,000명을 어떠한 물증이나 근거도 없이 학살했다고 한다. 벤자민 발렌타인의 책에 따르면, 많게는 27,000명에서 41,000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집계한다. 이 작전에는 그린베레를 비롯한 수많은 미국의 특수부대들이 참여했고, 성고문, 전기고문, 거꾸로 매단 상태에서 행하는 물고문 그리고 무차별 구타와 같은 잔혹한 고문들을 자행했다고 한다.[40] 그리고 오즈번은 "피닉스 작전은 인간이 자행할 수 있는 가장 야수적인 범죄"였다고 털어놓았고, 6인치 나사못으로 뇌를 관통 당해 사망한 시신을 자신이 직접 확인했다고도 증언했다. 확실한 물증없이 사살된 사람들 대다수는 고문으로 죽거나 산 채로 헬기에 실려 태평양에 던져졌다고 한다. 이 피닉스 작전에 차출되었던 제프 스타인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잔학한 행위가 정상적인 것이라고 배웠다. 피닉스 작전이 우리 군인들을 타락시킨 것이다. 한 가지 실례를 들어보겠다. 어떤 베트남 사람에게 증거는 없지만 베트콩과 내통했다는 혐의가 있고, 그가 지금쯤 어디 있을 것이라는 보고가 있었다. 한찬 뒤에 우연히 알게 된 것은, 보고를 받자마자 어디쯤이란 장소로 날아간 B-52 폭격기가 광범위한 지역까지 초토화시켜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471

1970년 봄 사이공 농과대학에 다니던 남녀 학생 11명이 반정부시위와 관련하여 가혹한 고문을 받은 사실이 보도되기도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70년 7월 인권유린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맥클로스키 등을 포함한 미 하원의원 4명이 베트남을 방문하여 이를 확인해보는 일까지 있었다. 심지어 베트남 수용시설 조사단에 참가했던 호킨스 하원의원은 북베트남 미군포로 수용시설이 남베트남의 미군 관할 수용시설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라며 미군의 범죄행위를 규탄하기도 했을 정도였다.[41]

특히 월맹군이나 베트콩을 상대로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허구헌 날 자기네들만 피해를 보자 화가 난 미군들은 애꿎은 베트남 민간인들에게 행패를 부리기도 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미군 최악의 학살인 미라이 학살이다. 1968년 3월 16일, 윌리엄 켈리 중위가 이끄는 미군은 미라이 촌에 들어가 단 하루 동안 총 504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이들 중 대다수는 여자와 노인 그리고 어린아이들이었다. 미라이 학살을 벌인 미군의 학살방법은 말 그대로 잔인하고 추악하기 짝이 없었다. 학살당한 노인은 총검으로 난자당했고, 어떤 노인은 우물 속으로 던져진 다음 수류탄 세례를 받았으며, 미군 병사들은 어린 여자아이들을 강간했다. 강간한 여성 5~6명을 한 오두막에 집어넣은 다음 수류탄으로 던져 폭사시키는 천인공노할 만행까지 저질렀다.겨우 발걸음을 때기 시작한 아이들까지 한곳에 모아놓고 총살하는 짓까지 했다.[42]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이는 결국 1969년 어느 양심있는 기자에 의해 진상이 드러난다.

그 외에도 미군이 저지른 학살로는 탄퐁 학살, 송탄 학살 등이 있는데 이 두 가지 학살은 미라이 학살과 더불어 모두 진상조사와 진실규명이 확실하였고 당시 종군기자가 학살 당시를 확실하게 찍었기 때문에 빼도박도 못하고 미군의 짓임이 드러난 사건들이다.

1965년 말에 창설된 타이거 부대는 1967년부터 베트남의 꽝응아이성에서 무고한 베트남 민간인에게 베트콩이라는 혐의를 씌워 고문 및 살해하고, 생업에 전념하는 오지 마을을 습격하여 어린이 부녀자 노약자 등 주민을 학살했다. 심지어는 젊은 부녀자를 강간한 뒤 살해하고, 부녀자의 품에 있던 유아도 목을 베거나 군홧발로 밟아 죽였다고 한다.[43] 켄 번즈가 2017년에 제작한 PBS 베트남 전쟁을 보면, 당시 타이커 부대가 어떠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는지, 보다 상세하게 나오는데, 아래의 내용은 다큐멘터리에 나온 인용문이다.

방송인: 스타우드 씨, 베트남엔 언제부터 언제까지 계셨죠?

스타우드: 저는 베트남에 1966년 9월부터 1967년 9월까지 1년 동안 있었습니다.

방송인: 어느 부대에 있었죠?

스타우드: 제101공수사단 제1여단입니다.[44]

방송인: 베트남에 계실 때, 미군이 저지른 잔학행위를 직접 목격하신 적이 있나요?

스타우드: 네, 있습니다.

스타우드: 이 잔혹행위들은 제가 육군 신문 기자로 배정된 부대의 병사들이 짓입니다.

스타우드: 한 베트남 소녀를 강간하고 살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심문 때문에 구금된 소녀가 이틀 동안 겁탈당하고 나서, 사흘째 오전에 살해된 사건이었죠.

방송인: 한 명 이상이 겁탈한 건가요?

스타우드: 네, 위생병과 저 그리고 소대원 한 명을 빼고는 모두 가담했어요.

방송인: 당신은 반대했고, 그들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했습니까?

스타우드: 네, 강간 사건 이후에 해당 대대의 원사에게 항의했더니, 그의 대변은 이런 일은 전쟁에서 흔히 일어나는 거라면서 입 다물라고 하더군요. 일상적인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군목한테 가서 그 얘기를 했더니, 군목이 자체 조사를 했고, 사실이라는 게 밝혀져서 같이 주임 원사한테 갔더니, 그가 군목에겐 종교 일에나 신경 쓰라고 하면서, 돌려보냈고, 저한테는 입 다물라고 하면서 다음 임무에서 돌아올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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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BS 베트남 전쟁 5화


타이거 부대의 전쟁범죄가 발생한지 몇 년 후에 또 다른 병사가 나서서, 전쟁 범죄 행위를 추가로 제기 했다. 제기한 내용 중에는 목을 베어서 그 여자를 죽였다.,귀를 베어냈다., 10명의 농부를 살해한 후 발포를 멈췄다., 북베트남 병사의 머리 가죽을 벗겼다.등의 내용이 있었다. 육군 조서 결과 타이거 부대 소속 18명을 살인이나 폭행으로 기소할 만한 근거를 찾았다. 하지만 아무도 기소되지 않았고, 이 공식 기록은 기록 보관소에 깊이 파묻혔었다.[45] 심지어 미국 콜롬비아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인 폴 토머스 체임벌린의 경우 미라이 학살은 남베트남에서 보고된 수백 건의 대학살 중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며, 이 대학살 가운데 일부는 손미에서 벌어진 학살을 능가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여기서 체임벌린 교수가 예시를 든 것이 바로 타이거 포스인 미국 제101 공수사단 정예부대가 1967년 7개월 동안 베트남 중부고원지대에서 벌인 공포작전이었다. 이 기간 타이거 포스는 최소 수백 명의 비무장 민간인을 살해한 것으로 기자들이 추산했는데, 많은 사람이 총에 맞거나 칼에 찔렸으며, 미군 병사들이 부녀자와 아이들이 무리 지어 있는 벙커에 수류탄을 던져 사살했다고 한다. 당시 작전에 참여했던 한 위생병은 거의 모든 병사가 귀목걸이를 하던 때가 있었지요. 우리는 마을로 들어가서 무턱대고 아무한테나 총을 갈기곤 했어요. 구실이 필요 없었죠. 사람들이 보이면 그냥 죽였습니다.라고 이후 회고했다.[46] 이와 같은 타이거 부대의 전쟁범죄는 이후 전쟁의 사상자들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쉽게 말해, 이러한 미군의 전쟁 범죄가 전쟁 과정에서 군부에 의해 은폐된 것.

미군의 또 다른 전쟁범죄로는 1969년 당시 미군이 몇 개월 동안 전개했던 군사작전인 초고속 작전(Operation Speedy Express)가 있다. 이는 소위 미군의 평정작전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적잖은 민간인이 희생된 사례였다. 당시 현장에 있던 한 의사는 자신의 병원에서 1969년 초 4개 부락의 최소한 1,000명의 주민을 치료했다고 전했는데, 사람들은 예외 없이 대부분 민간인들로 비행기와 대포, 헬리콥터에서 밤낮으로 쏘아대는 로켓, 포탄, 폭격, 총알 등의 무자비한 연발공격 때문에 죽었다.고도 증언했다. 이 4개 부락 중 한 지역에서는 주민이 16,000명에서 1,600명으로 줄었다.[47] 초고속 작전으로 학살당한 비전투원 즉 민간인은 최소 5,000명에서 7,000명 많게는 10,000명으로 본다. 미군이 바디 카운트로 사살한 15,000명 중에 최소 절반이나 40% 이상은 민간인이었던 것이다. 노엄 촘스키와 에드워드 허만은 저서 미국 대외정책론에서 초고속 작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미군 사령부는 B-52 폭격기와 무장 헬리콥터의 공격, 혹은 포격, 네이팜 폭탄, 그리고 대인용 무기 등에 의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아는 바가 없었다. 아마도 5,000명의 비전투원이 죽었을 것이다. 사태를 정직하게 검토한 것이라면 최소한 버클리와 심킨의 상세한 조사에서 밝혀진 민간인 사상자에 대하여 다소라도 언급이 있어야 했을 것이며, 또 사상자 수는 제쳐 놓고라도 방금 개괄한 것과 같은 상황에서 수행된 작전의 의미를 생각해 봤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레위는 공식 소식통을 지지하기를 더 좋아해서, 스스로 "초고속 작전의 엄청난 결과"라고 부른 그 결과에 대해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인지에 다소 의문을 표현했을 뿐이었다. 미국의 침략에 맞서 남베트남인들이 성공적으로 대항해 왔던 그 지역에서 이렇게 평정작전이 이와 같이 성공했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질문을 회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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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외정책론 p.376

일본인 기자인 가츠이치 혼다 또한 1969년 여름, 미국 공군은 메콩강 삼각지역에 있는 끼엔호아를 집중 폭격했던, 초고속 작전을 취재했다. 폭격 후 미군 9사단의 50대 무장 헬리콥터는 마을을 샅샅이 뒤졌고, 사격 목표는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일본 <아사히신문> 특파원 가츠이치 혼다는 그것을 아시아인 사냥이라고 표현했다. 미군 공식기록에 따르면 ‘적’의 사망자 수가 1만899명인 데 비해 포획된 무기는 748정에 불과했다.관련 기사 따라서 초고속 작전은 말 그대로 미군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살상을 벌이면서, 베트콩을 죽였다고 거짓 보고한 사례였다.

사실 친서방적 성향을 가진 일본인 기자 가츠이치 혼다[48]는 초고속 작전의 실체를 알기 2년 전인 1967년 가을 메콩강 삼각지에서 미군 헬리콥터가 농가를 무차별적으로 폭격하고 마치 사냥을 하는 것처럼 농민들을 조준하며 무방이 상태의 마을을 공격한 상황을 보도했었다.[49] 아래는 당시 혼다가 보도한 내용중 일부다.

그들은 아시아인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이 폭격은 메콩 삼각주 병원들의 수술실이 부상자로 가득차게 만들었다.

여론조작 p.330

즉, 베트남 전쟁 당시 요새화 된 마을이 건설되면 주변 지역은 사실상 미군의 공격용 헬기와 야간에 폭격기의 무제한적이고 무차별 표적지대가 된 셈이다. 따라서 한 지역이 자유사격지대로 선언되면, 지상군이나 공군이 그곳에서 보이는 사람은 누구든지 적군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더글라스 키내드(Douglas Kinnard)는 1969년 5월 제2 야전포병부대 지휘사령관으로 베트남에 갔을 때, 공격목표가 공식적으로 야간 등화관제가 해제된 지역 중에서 무작위로 추출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보고했다. 이 무차별 발포에 의해 죽은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결코 서방 측에 알려지지 않았으며, 이 광경을 보도한 외신 기자들도 비슷한 관찰을 했다.[50] 또한 앞에서 가츠이치 혼다가 보도한, 1967년 미군의 베트남인 사냥식 살인행위는 사실상 북베트남 군부대가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저지른 행위였다. 미군의 이러한 사냥에 의한 희생자들은 미군 기록에 공식적인 사망자 수에 들어가 있지 않았으며, 또 어떠한 대량학살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51] 베트남 전쟁 당시, 반공주의적 신념에 부풀어 해병대로 참전했던 한 해병대 대원은 1967년 미 상원의원인 윌리엄 풀브라이트(William Fulbright)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나는 책임이 막중한 해병대 소위로서 공산주의 침략에 대항하여 싸우는 지친 사람들의 호소에 부응하겠다는 확신을 가지고 베트남에 왔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대략 2주 동안 지속됐습니다. 공산주의 침략자에 맞서 싸우는 대신 우리의 군사활동의 90%는 남베트남 주민들을 상대로 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사이공 정부에 대해서 조금의 호감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혹은 그 정부에 대해 조금도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남베트남에서 그 진정한 국민들로부터 아무런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는 정부에게 그 국민을 굴복시키기 위해 전쟁에 몰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진정한 국민이란, 전시 축재자가 아닌, 혹은 쉽고도 이익이 된다고 해서 자신의 정부나 미국을 배반하지 않는 모든 베트남인을 의미합니다.

미국 대외정책론 p.386


미국의 이런 폭압적인 행위는 베트남 민간인들의 반감을 불러왔고, 민간인들이 베트콩에 가입하는 불씨가 된다.[52]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국의 전쟁 범죄는 단순히 1968년에 일어난 미라이 학살로 한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미군의 전쟁 범죄는 단순히 미라이 학살로 한정되지 않는다. 사실 미라이 학살 또한 은폐될 뻔했던 사건이 빼도박을 수 없을 정도로 공개된 사건이지, 크고 작은 미라이 학살들이 빈번히 벌어졌다. 실제로 미라이 학살을 은폐한 죄목으로 기소당한 오렌 핸더슨 대령은 1971년 초 기자들에게 여단 정도 크기의 모든 미군 부대는 어딘가에 각자의 미라이를 숨겨두고 있다고 고백했을 정도다.[53] 주월미군 총사령관인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William Westmoreland)는 베트콩이 장기적으로 통제하는 곳에 살고 있는 민간인을 무장한 전투원으로 간주하는 정책을 채택했으며, 1965년 9월 MAC-V의 지침 전문인 525-3은 공산주의 세력이 일시적으로 지배를 하든 전혀 지배를 하지 못하든 간에 그러한 민간인 보호는 인구 밀집 지역에만 적용했다. 실제로 웨스트모어랜드는 자유사격지대가 설립된 시점에서 그는 “남아있는 누구도 적 전투원으로 간주해라!”, 그 지역에서의 작전은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두려움 없이 행해질 것이다!”라고 썼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미라이 지역에 보내졌던 병력이 받았던 명령이었다.[54] 사실상 민간인과 베트콩의 구분이 자유사격지대에서는 없었던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초고속 작전만 하더라도, 미군의 일상적인 전쟁범죄가 어떻게 은폐되어 왔는지 알 수 있는 증거가 있다. 베트남 전쟁 당시, 공군 장교로 참전했던 브라이언 윌슨(S Brian Wilson)은 1969년 초고속 작전에도 참전했고, 민간인 살상이 어떻게 은폐되는지 보았다. 닉 터스(Nick Turse)가 쓴 책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나온다.

초고속 작전 당시 호전적인 미군들이 건쉽의 지원을 받으며 잔혹한 군사작전을 수행하는 것만이 베트남 민간인에 대한 유일한 위협은 아니었다. 미군 기록에 따르면, 초고속 작전 기간 동안 대략 6,500번 이상의 항공 지원이 동반됐고, 최소 5,078톤의 폭탄과 1,784톤의 네이팜탄이 투하됐다. 메콩델타 전역에 있는 자유사격지대에서 폭격으로 인한 파괴관련 조사를 수행한 공군 대위 브라이언 윌슨(Brian Wilson)씨는 그 참담한 결과를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폭격피해의 현장은 부도덕성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고 했고, 이후 윌슨이 인터뷰에서 말한 것에 따르면, 나는 항상 모든 것을 불태우고 튀겨버리는 두 개의 네이팜탄이 투하되어 끝난 현장을 항공 폭격 이후에 조사했던 적이 있다. 나는 현장에서 최소 62명 이상의 민간인 시신을 셌다. 공습관련 군보고에서 나는 대략 15명에서 25명의 여성과, 대부분 엄마 손에 안겨 있거나 혹은 엄마 가까이 있던 수많은 아이들 그리고 수많은 노인들이 희생된 것으로 보고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윌슨 씨는 군의 공식적인 사망자를 읽고서, 앞서 보고한 민간인 학살 관련 보고가 베트콩 130명 사살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Nick Turse, 『Kill Anything That Moves - The Real American War in Vietnam』, Picador, 2013, p.212

베트남 전쟁 범죄 워킹 그룹(Vietnam War Crimes Working Group)은 최소 300건 이상의 학살, 살인, 강간, 고문, 폭행, 신체훼손 및 미군이 저지른 여러 잔혹행위등을 조사하여 밝혀냈으며 문서에 기록했다. 이 자료에는 137명의 민간인이 미군에 의해 학살 당한 것과 78명의 베트남 민간인이 미군의 공격으로 죽고 부상당하고 성폭행 당한 사실을 기록했다. 그리고 이들이 기록한 자료에는 그 당시에는 입증되지 않은 최소 500건 이상의 양민학살을 포함한 여러 전쟁범죄에 관한 내용도 포함했다. 대표적으로 2003년 당시 공론화된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 타이거 부대의 전쟁범죄가 그 예시다.[55]

당시 미군의 민간인 학살이 발생한 이유에는 이른바 바디 카운트(Body Count)를 들 수 있는데, 미라이 학살 또한 공론화 되기 전에는 바디 카운트로 인한 전과보고였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을 지지했던, 독일계 역사학자 권터 루이(Guenter Lewy)에 따르면,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바디 카운트로 죽은 베트콩과 북베트남군 중 1/3인 22만 명 이상이 민간인이며 미군과 남베트남군에 의해 죽었으며, 이에 따라 적군 사살로 기록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56][57]

토마스 셰이어(Thomas Thayer)의 경우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에서 20~40만 명의 민간인이 미군의 군사작전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산했지만[58][59], 어스틴 머피(Austin Murphy)에 따르면 이 추산치는 남베트남측 병원에 입원한 이들을 근거로 추산한 것이지, 미군이 무차별적으로 폭격을 감행한 곳에서 죽은 무수히 많은 민간인의 숫자는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60]

폴 토머스 체임벌린이 쓴 저서 『서구의 번영 아래 전쟁과 폭력으로 물든 아시아 1945-1990』에 따르면, 나중에 미국 의회에서 조사한 바로는 1968년까지 최소 30만 명의 남베트남 민간인들이 소위 미국이 만든 자유사격 지대에서 죽거나 다친 것으로 추산됐다.[61] 노엄 촘스키와 더불어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을 주도했던 에드워드 허만(Edward Herman)은 1970년 당시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의 살인적인 군사작전에 의해 사망한 남베트남 민간인을 100만 명으로 추산하기도 했다.[62] 따라서 이러한 추정치를 생각해 보았을 때,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및 살인이 결코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미군은 아이젠하워와 특히 케네디 정부 시절부터 남베트남 응오딘지엠 정부의 백색테러와 학살을 동반한 작전으로서의 학살을 지원했다. 당시 미군 고문단의 역할을 남베트남군을 지원하는 것이었지만, 게릴라들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억울하게 민간인이 희생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따라서 미군 고문단 또한 베트남 전쟁 초기 전쟁범죄 부분에 있어서 절대로 자유롭지 못하다. 마치 그리스 내전에서 미군고문단의 양민학살적 정책이나 해방 이후 제주4.3사건에서 미군정의 책임이 있는 것과 같은 이야기. 당시 남베트남의 백색테러로 인한 인명살상의 규모는 베트남 역사를 연구한 서구의 1세대 학자 버나드 폴(Bernard Fall)이나, 유명한 철학자 버틀란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1965년 미군 개입 이전까지 대략 8~10년이라는 기간 동안 10~17만 명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했을 정도다. 자세한 내용은 응오딘지엠 2.7문단을 참고.

베트남 전쟁 당이 미군에 의해 벌어진 전쟁범죄는 역사적으로 굳이 단절된 사건이 아니다. 미국은 미서전쟁 이후 필리핀을 식민지 지배하는 과정에서 수십만 명의 필리핀인을 짐승 죽이듯이 학살했다. 니카라과에서 아우구스토 산디노가 미국의 식민지 지배에 맞서 무장봉기를 일으키자, 민가를 폭격하여 수백 명을 죽였으며, 해방 후 한반도 이남에서 발생한 제노사이드에도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무차별 폭격은 1950년 한국전쟁에서 이미 일어난 현상이었고, 응오딘지엠 정부의 반게릴라전에 따른 양민학살은 1946년 미국이 개입한 그리스 내전과 제주 4.3사건에서 이미 선행학습된 일이었다. 특히나 존슨 정부가 남베트남에 대규모 병력을 파병하면서 군사작전은 더욱 광범위하고 잔혹하게 변했으며, 이것은 결국 100만 이상의 베트남 민간인이 미국에 의해 학살당한 양상으로 이어졌다.[63]

4.6. 집단적 병역거부[편집]


미국 내에서는 "징병제 엿먹어라"라는 구호 아래 청년 남성들이 징집을 거부하고 반전 운동에 가담하면서 미국은 벌집을 쑤신 듯이 소란스러워졌다. 아예 미국을 떠나 캐나다로 도망가는 젊은이들도 많았다. 사이버펑크의 시초인 뉴로맨서 작가 윌리엄 깁슨도 이 당시, 미국에서 태어나 전쟁반대를 외치며 캐나다로 이민 간 경우다. 당시 신병교육대는 시애틀에 위치해 있어서 불과 90분만 차로 이동하면 캐나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캐나다를 떠돌면서 히피 문화를 실천하며 막장에 가까운 히피 퍼포먼스를 보였으며, 사회 부적응자로 살며 마약 중독 등에 빠져 자살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전쟁이 막바지였던 1969년도에는 미군에 의한 강간, 민간인 학살과 같은 반인륜 범죄, 불평등한 징병제[64] 등이 사회적 쟁점으로 떠오르면서 그 누구도 전쟁에 참전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물론 미국 내에서 징병을 피해 캐나다로 이민을 갔던 사람들을 배신자, 탈영병, 겁쟁이 취급하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반인륜적 범죄행위에 가담하지 않고 양심을 지킨 이들이 보여준 용맹으로도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캐나다로 이민을 갔던 젊은이들이 모두 캐나다 시민권을 부여받은 것은 아니었고 단 25%에게만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지미 카터 대통령은 이들을 전부 사면했고, 이 후 미국으로 돌아가는 사례도 적지는 않았다.

의외로 21세기의 미군들 가운데에서도 이렇게 캐나다로 도망치는 경우가 꽤 되는데, 곧 만기 전역자들의 모든 인사명령을 중단시켜버리는 것(Stop and Cut) 때문이다. 이는 제 2의 베트남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라크 전쟁에서 전투병력이 부족했던 미국이, 전역예정자들의 전역을 미루면서 발생한 일이다.

흥미로운 부분은 베트남전 미군에는 당시 소수의 이중국적자,미국 영주권자, 캐나다 본토 등의 캐나다인 자원병들이 존재했고 이들은 제 임무를 다하고 미국이나 캐나다로 귀환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무료함, 대의, 공산주의 견제 등 여러가지 이유로 참전했으며 훗날 참전자의 Canadian troops in vietnam의 수기로 공식화됐고 캐나다에도 이들의 전적비가 있다.

미국 내부의 상황도 엉망이긴 마찬가지였다. 미국은 남북전쟁 이래 부병제를 유지해왔는데, 이는 국민의 군 복무를 법으로 강제한다는 점에서는 본질적으로 징병제와 같으나 세부적으로는 차이가 있는 방식이다. 미국의 부병제는 베트남 전쟁 이전까지는 미혼 남성을 동원 목록 최상위에 두고, 자식이 없는 기혼 남성을 그 밑에, 그리고 자식을 둔 기혼 남성을 목록의 가장 하위에 둔다는 원칙을 줄곧 고수해왔다. 그러나 미국이 베트남에 개입한 이후 수많은 남성들이 동원을 피하기 위해 섣불리 결혼식을 올리는 일이 발생하자, 1965년 8월 26일 오후 5시, 린든 존슨 대통령 본인이 "'오는 자정부터 결혼 여부 및 자녀 유무를 군 복무 관련으로 전혀 법적 반영하지 않겠다"'는 폭탄 선언을 한다. 또한 미국의 경우, 부병제가 있던 당시에는[65] 생사가 오가는 전쟁터나 지리적으로 고립된 오지로 동원되는 일을 피하기 위해 차라리 주 방위군(National Guard)으로 자의적으로 들어가 복무하는 일이 잦았는데, 미국 정부는 60년대 후반 즈음 주 방위군 소속 부대 일부마저도 베트남으로 파병 보내기 시작했다. 이 당시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종전기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합계 출산율이 3명대를 웃도는 베이비붐 시대로 유소년인구비중이 높았는데 이 조치가 미국의 출산율을 끌어내리면서 베이비붐 시대를 종식시키는데 한몫했다는 평이다. 물론 이 한가지만 결정적으로 작용한것만은 아니고 피임약의 시판으로 성해방 바람 및 오일쇼크 등의 경기침체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것이기는 하다.


5. 결론[편집]


1964~1972년까지, 세계 역사상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가 한 작은 농업국가혁명적 민족주의 운동을 파괴하기 위해 원자탄을 제외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군사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패배했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싸웠을 때, 그것은 조직화된 현대의 테크놀로지조직화된 인간 사이의 싸움이었으며 결국 인간이 승리했다.

<미국 민중사 2 p.207>

이 따위 상황이니 당연히 열심히 싸우겠다는 의욕이 있을리가 없다. 1969년 전투기피로 기소된 건만 117건, 1970년에는 131건 등 꾸준히 증가추세였다. 종전이 다 되어가던 1972년에는 탈영한 이들만 무려 7.3%나 되었고, 미군의 무단 이탈은 무려 17.6%나 되었다. 이렇게 탈영한 이들은 북베트남을 거쳐서 중국이나 소련까지 넘어가서 미국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망명하기까지 하였다. 심지어 당시 기항지였던 일본에서 탈영하여 유럽으로 망명한 사례도 있었다. 그리고 주한미군도 마찬가지여서 베트남으로 보내질 것이 두려워 월북하여 북한에서 활동한 월북 미군도 있었을 정도이다.[66] 해당문서 참고바람.

6. 여담[편집]


헨리 폰다의 딸인 제인 폰다는 전쟁을 반대하는 것을 넘어서 베트남을 방문해서 북베트남의 선전 방송에 출연하였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하노이 제인"으로 불렸다.[67] 물론 법적으로는 문제 없었다.

반전 운동가들은 지나가는 군인만 보면 아기 살인자(Baby Killer)라고 욕했다고 한다. 람보 1을 보면 귀국한 람보에게 단체로 모여서 아기 살인자라고 욕하는 반전주의자들을 보여준다. 당시 정복에 부착한 약장 등을 뜯어내고 침 등을 뱉거나 구타하는 등 모욕을 행하는 분위기가 만연했다.

미국의 삽질을 즐겁게 바라보던 라이벌 소련은 훗날 자기네들도 똑같은 실수를 하게 되어 소련이 몰락하는 원인제공을 하게 된다.[68] 그리고 역으로 소련의 실수와 몰락을 보며 조소했던 미국이 약 20년 뒤에 소련과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실수를 해버렸다.

7. 관련 문서[편집]


[1] 마지막.[2] 일단 공격을 받은 것 자체는 사실이다. 문제는 1차는 진짜였지만 2차는 날조이거나 착각이었다는거.[3]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은 베트남-캄보디아 국경에 베트콩 비밀 기지가 있다는 구실로 무차별 폭격을 가해 수많은 민간인 학살과 환경 파괴를 저질렀다. 이에 대한 친미 군사독재 론 놀 정권의 묵인과 방조는 크메르 루주 정권 수립과 킬링필드라는 최악의 비극으로 이어진다.[4] 폭로가 이루어진 직후인 1970년 5월 4일 켄트 주립대학교에서 주방위군이 비무장 시위대에 집단 발포해 4명이 죽고 9명이 부상당하는 사건도 터졌다.[5] 때문에 앞의 두 전쟁에서는 미 참전용사들이 전후에 PTSD와 후유증을 비교적 덜 겪었다는 연구도 있다. 살아돌아온 참전용사들이 국민들에게 영웅으로 추켜세워졌고, 본인들도 "올바른" 대의를 위해 싸웠다며 자부심을 갖기도 했기 때문.[6] 미국과 똑같이 제파 전술을 썼던 소련 역시 아프가니스탄 침공할때 산맥에서 최신형 전차의 한계를 드러냈다.[7] 일선 보병사단 병력들 중 자원한 우수 인원들로 사단을 구성해 파병했다.[8] 미 의회에서 아이코드 의원을 중심으로 한 아이코드 위원회는 M16의 원인 중 하나로 화약을 짚었다. 223 레밍턴 민수용 탄약의 IMR4475 과립형 탄약은 약실에 탄매가 끼는게 덜했지만 WC846 군 제식 볼 파우더가 탄속이 더 높아서 교체됐는데, 이게 탄매가 끼는걸 가속화 시키고 오작동 하는데 어느 정도 기여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XM16E1이 30,000정 정도 소수 운용될 때부터 “미래적인 총이라 총기손질을 할 필요가 없다” 라는 소문이 퍼저서 다들 총기손질을 안한 것과 신형 총이라 총기손질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은게 문제였다. 그래서 전용 청소도구와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만화 형식으로 총기손질 교육 만화를 배포했고, 그제서야 작동불량 문제가 해결된다. 총기 자체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했던건 1967년 5월 경으로 약실 크롬도금 외에는 크게 없었고, 총신 크롬도금과 함께 화약도 70년대쯤이나 개량된다.[9] 실제로 어떤 베트콩의 경우 자신이 쓰던 AK-47이 폭발해 노리쇠가 눈에 박혀 죽은 사례도 있다 카더라.[10] 아무리 AK를 쓰기 싫어도 M16 소총이 고장나거나 탄약이 바닥난 상황에서 적군의 무기라도 주워쓰는게 이치다. 그렇다보니 결국 애꿎은 미군 병사들만 부상당하거나 죽어나갔다. 이렇다보니 당시 월맹군이나 북베트남군 무기 중에서 AK가 아닌 PPSh-41이나 MAT-49 기관단총 같이 다른 무기가 있다면 횡재했다고 그걸 주워 쓰는 미군들도 있었다.[11] 사실 F-105는 공대지용으로 만든 기체다. 억지로 공대공 전투에 넣다 보니 이렇게 된 것.[12] 북베트남은 MiG-21 7대가 격추되었고' 미국의 피해는 없음. 당시 북베트남이 보유한 MiG-21은 16대였으니 거의 절반을 한번에 날려버린 셈이다.[13] 미 해군의 F-4는 1:5.71의 교환비를, 미 공군은 1:3.24의 교환비를 기록했다.[14] 다만 롱탄 전투의 경우 교환비와 별개로 당시 호주군이 거기서 지원군이 오기까지 수 시간이나 버텨낸 것부터가 엄청난 분전이었다.[15] 그 유명한 짜빈동 전투두코 전투의 전과계산은 실제 시신발견 및 무기노획 기준으로 이뤄졌다.[16] 한반도 휴전 협정 후에도 원조할때도 그랬었다.[17] 지금 기준으로도 그정도 달러면 한화 3억 5천만원과 맞먹는 돈인데 그 당시의 달러 가치는 지금보다 훨씬 높았다.. 애초에 금본위제가 폐지된 원인 중 하나가 베트남전이다.[18] M16 소총은 발사속도가 분당 700~950발로 상당히 고속인 편이다. M16 소총이 반동 제어가 쉬워 연사해도 근거리 명중률이 우수하다고는 하지만, 경험이 부족한 젊은이들이 많았고 M16의 운용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당시 병사들이 전자동 사격의 포텐셜을 끌어낸 거라고 보기는 힘들다. 많은 탄이 허공에 낭비되었을 것이다.[19] 어느 정도인지 상상이 안 간다면 배틀 오브 브리튼 기간 동안 루프트바페가 영국 전역에 투하한 폭탄이 12만톤이다. 다만 케산 공방전은 어쨌건 막대한 공중폭격을 퍼부은 대가로 케산이 제2의 디엔비엔푸가 되는 상황을 저지하는데 성공했기에 이것만 놓고 보면 낭비는 아니었다. 문제는 이렇게 이악물고 지켜낸 케산에서 미군이 자발적으로 철수하면서, 반전주의자들에게 이럴 거면 왜 싸웠냐는 비난을 듣게 되었다.[20] 청구서에 '손망실'이라고만 적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달라는 만큼 다 줬다고 한다. 다만, 이런 인터넷썰과 달리 미국도 순바보들이 아닌 지라, 유출 물량을 파악하고 있었고, 나중에 본국에도 흘러들어가자, 계속 눈 감아준다고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재미없다고 엄포를 놓았다.[21] 해당 이야기는 베트남 전쟁 당시 라오스블랙 옵스에 투입된 CIA의 이야기를 다루는 파트에서 나오는 일화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에 미국 측에서 돌던 분위기가 어떠했을지를 짐작할 수 있는 일화.[22]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의 매춘부 숫자는 대략 50만 명 정도였다. 1968년 구정 대공세 때 남베트남에 주둔한 미군이 54만 명인데, 대략 이와 비슷한 숫자의 매춘부가 남베트남에 있었던 것이다.[23] 당시 한국군이 받아볼수 있는 "달러"는 다음의 세 종류가 있었다. 먼저 전시에 작전지역 및 후방지역에서 통용되며 미군 사령부 경리부서의 지시에 따라 주기적으로 교체되는 "군표", 한국군의 달러 사용으로 인한 국부유출을 통제하기 위해 주월한국군사령부에서 발행하며 군표를 사용하게 되면 행보관 등 담당관에게 결제용으로 제출하는 "구매권", 그리고 영내외 어디서도 프리패스로 쓸수 있는 실제 미국 달러현찰인 "본토불". 그런데 빈번한 작전투입으로 인해 한국군의 구매권 사용이 제한되면서 한국군 입장에서는 결제가 필요한 군표 대신 언제든지 쓸수 있는 달러로 바꿀수 있고, 미군 입장에서는 한국군 명의가 필요한데 이를 싼값에 환치기(...)로 얻을수 있으니 서로에게는 윈윈인 거래였다.[24] 당시 한국은 외화 유출을 막기 위해 국가가 수입품도 통제했다. 베트남전쟁 당시에도 한국정부는 조국의 산업화에 일감을 지원해 주기 위해 + 생산 과정에서 생기는 차액을 한푼이라도 더 남겨 보탬이 되기 위해 스테이크, 스파게티 등 양식 위주의 미국제 전투식량을 지원 받는 대신 김치, 장조림과 같은 한식 위주의 전투식량을 한국기업에서 납품 받아 지원해 줄것을 미군에 요구했고 끝내 이를 관철시켰다.[25] 이 정도까지는 한국군에서도 간간이 볼 수 있었다.[26] 다만 앤더슨 중사 역시 PTSD에 심각하게 시달리고 있었고 이로 인해 이혼까지 당하게 되며 사회에 적응을 못하여 군대에 있었던것이다.[27] 애초에 두 사람 모두 올리버 스톤 감독이 군 시절에 만났던 사람들이 모델이다.[28] 당연하지만 전투에서 살아남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이런 베테랑 부사관들이 하는 명령을 잘 따르고 그들이 하는 대로 따라하는 것이다.[29] 미국 경찰이든 FBI도 문을 박살내고 들어와서 총으로 들이대서 제압부터 한다. 오죽하면 이런 밈까지 나올 정도.[30] 물론 그린베레는 제외다. 먼저 총으로 위협하지 않으며 현지언어로 대화하고 적성국 문화에 맞춰서 민심을 얻는데 치중하였고 식량과 의료서비스를 제공하였다. 몽족을 포섭해서 군인으로 훈련시켜서 1만명의 전투부대로 만들기도 했다. 물론 피닉스 작전으로 인해 사회적 비판을 많이 받게 되었지만.[31] 괜히 영화 풀 메탈 자켓에서 하트먼 상사 같은 캐릭터가 나온 게 아니다.[32] 첨언하자면 한국 해병대의 태권도 시범을 본 미 해병대 베트남 참전자가 과거 한국군 특유의 구타 문화를 목도하고 그대로 본인의 중대로 도입했다는 참전 수기도 존재한다.[33] 기간은 다르지만 좀 더 온건하고 확정적인 상원의 보고서에 의하면 '1969년에서 1970년 사이에 살해나 협박용까지 포함하여 미군 부대에서 수류탄 사고가 총 790회 발생하였고, 그 결과로 사망한 장교가 83명이나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우발적 사고를 포함하겠으나 수류탄으로 한정된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기록이라고 하겠다. 애초에 프래깅의 원 뜻도 수류탄을 사용한 상관 살해이다.[34] 당시엔 M16조차도 남베트남군에게 지원하다가 오히려 남베트남군이 빼돌려 팔아버린 경우가 많아서 이것만으로 아군에게 죽었다고 할 증거가 못되었기 때문이다. 등뒤에서 총알을 맞았다고 해도 전투 도중 늘 앞만 보는 게 아니라 뒤돌아보던 터에 당할 수도 있다는 주장도 나오니 이것도 증거가 못된다.[35] 당시 파병되었던 전두환 대령의 일화와 비슷하다. 전두환 대령 역시 휘하 사병들은 물이 부족해 죽겠는데 본인은 매일같이 샤워를 했고 완전히 놀고 먹었다.[36] 참고로 한국도 빨치산 토벌 당시 빨치산과 조금이라도 협력한 자들과 항복한 자들까지 다 처벌했지만 결국 이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닫고는 항복을 유도하는 쪽으로 선회했고 특히 빨치산에서 전향한 자들을 토벌에 적극 활용했다. 이 전직(?) 빨치산들은 목숨만 살아도 감지덕지라 여겼는데 오히려 빨치산 토벌에 참여하게 되자 더 열렬하게 빨치산을 잡아들였다고... 게다가 대민지원도 군이 아닌 민간단체에 맡겨 버리니 베트남 주민들은 '쌀 줬으니까 됐지?' 해놓고 쌀을 던져놓고 가버리는 미군들을 곱게 볼 리가 없었다.[37]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38]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로 1968년 구정 대공세도 직접 겪었다. 올리버 스톤의 영화 플래툰에서 군사 고증을 담당하기도 했으며, 밴드 오브 브라더스 드라마에서 미 육군 제101공수사단 506연대장 로버트 싱크 대령 역으로 출현했다. 또한 FPS 게임인 메달 오브 아너 시리즈에서도 성우를 맡기도 했다. 링크로 인용한 유튜브 영상을 보면, 올리버 스톤이 제작한 영화 플래툰에서 나온 미군의 잔혹행위들이 베트남 전쟁을 통틀어 엄청나게 많이 일어났고, 일상적으로 일어났으며, 전투부대로 배치된 모든 미군 부대에서 일어났다고, 데일 다이는 증언했다. 미국 전쟁영화에서도 군사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고, 여러 다큐멘터리 제작 및 무기 관련 고문까지 맡고 있는 전문가(그리고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가 얘기했다는 점에서 공신력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39] 인터뷰 자료는 이 자료를 참고. 11분 18초부터 11분 30초까지를 보면된다.[40] 출처: 아메리카 제국의 몰락 p.415[41] 출처: 아메리카 제국의 몰락 p.416[42]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491[43] 출처: 아메리카 제국의 몰락 p.423[44]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 나오는 그 공수부대다.[45] 전반적인 내용은 PBS 베트남 전쟁 5화를 참고함[46] 폴 토머스 체임벌린, 김남섭 옮김, 『서구의 번영 아래 전쟁과 폭력으로 물든 아시아 1945-1990』,이데야, 2023, p.372.[47] 미국 대외정책론 p.371[48] 일본군의 전쟁범죄인 난징 대학살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진실된 목소리를 낸 인물로, 젊은 시절 베트남 전쟁을 취재했다.[49] 혼다에 따르면, 이러한 무차별 민간인 살상행위가 베트콩의 테러로 왜곡보도 되는 사례가 적잖게 있었다고 하며, 본인 또한 북베트남군 취재를 가려고 하니까 베트콩 쪽에서 기자가 전장에서 죽으면 미군 측에서 자신들의 테러라는 거짓선전을 할 것을 염려했다고 말했다.[50] 미국 대외정책론 p.364~365[51] 미국 대외정책론 p.365[52] 로빈 윌리엄스가 주인공으로 출현했던 굿모닝 베트남을 보면 극중에서 로빈 윌리엄스가 친구로 여겼던 베트남 청년을 예시로 들 수 있다. 자세한 건 영화 참조. 사실 베트남 사람들이 베트콩과 북베트남을 지지했던 데에는 역사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들 입장에서 미국은 프랑스를 떠난 뒤 대신 들어온 제2의 프랑스였던 측면도 많이 반영됐다.[53] 왜 호찌민인가 p.16[54] What Ken Burns Left Out of the Vietnam Story를 참고함.[55] Nick Turse, 『Kill Anything That Moves』, picador, 2013 p.14~15를 참조.[56] Guenter Lewy, America in Vietnam, Oxford, 1978 p.450~451[57] 심지어 루이는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의 참전을 지지했던 보수적인 인물이었다.[58] 토마스 셰이어는 미국과 남베트남의 군사작전 상으로 죽은 민간인이 40만 명 이상이라고 추산한반면,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에 의해 죽은 민간인은 3만 3,000명으로 보았다. 즉, 베트콩이나 북베트남군에 의해 죽은 민간인 보다 연합군 측에 의해 죽은 민간인들이 최소 10배 이상이라 추산한 것이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사실은 아래 후술되어있지만, 연합군측 추산은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자유사격지대에서 행한 무차별 폭격과 같은 전쟁범죄는 포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59] 허만의 경우 1970년 기준으로 전쟁에서 발생한 민간인 피해의 최소 80% 이상은 미군과 남베트남군에 의한 것이라 추산했다.[60] Austin Murphy, 『The Triumph of Evil』, European Press Academic Publishing, 2000, p.39~40[61] 폴 토머스 체임벌린, 김남섭 옮김, 『서구의 번영 아래 전쟁과 폭력으로 물든 아시아 1945-1990』,이데야, 2023, p.370.[62] Austin Murphy, 『The Triumph of Evil』, European Press Academic Publishing, 2000, p.22[63] 일각에서는 베트남 전쟁 진상조사가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의 양민학살 때문에 베트남 정부가 거부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의 문제는 특별한 근거를 가지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특히나 역사적으로 20세기에 벌어진 좌우갈등에서 학살과 테러의 규모는 항상 좌익보다 우익들이 더 광범위했다는 사실을 손쉽게 망각한다. 베트남 전쟁과 비슷항 양상을 보인 제주4.3사건만 하더라도 양민학살의 90%는 우익들이 했다. 제주4.3사건은 한국의 반공주의 정권에 의해 공산군들의 폭동 혹은 좌익들의 양민테러로 인식되어 왔다. 베트남 전쟁에서의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을 다루는 서술도 마찬가지다. 특히나 이 쪽은 과거 오리엔탈리즘적 성격을 그대로 반영했다. 거기다 토마스 셰이어의 자료편향적 추산만 가지고 보더라도 베트콩이나 북베트남에 의한 민간인 희생은 연합군 보다 최소 1/10 차이를 보인다. 이 문단에서 설명한 미군의 전쟁범죄 행위는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었고, 특히 폭격이나 고엽제로 인한 피해자는 무수히 많다. 따라서 일각에서 주장하는 베트콩의 전쟁범죄 행위 때문에 진상조사를 안한다는 식의 주장은 극히 일부의 사례를 과장한 것일뿐, 남베트남 정부나 미국 정부의 행위는 철저히 무시하는 맥락생략이다.[64] 가난한 사람들은 최전선에 배치되고, 부유한 사람들은 미국 본토 또는 안전한 후방에서 장교로 복무하는 경우가 많았다.[65] 사실 지금도 명목상으로는 미국에서 부병제가 유지되고 있으나 현재 미군은 오히려 매년 자발적으로 입대하는 이들을 처리하기에도 벅찬 상황이 된 관계로 자연히 법적으로 동원이 강제되었다는 사례는 나오지 않고 있다.[66] 그러나 베트남과 달리 북한이 막장짓을 제대로 저지른 국가라 싸울 의욕이 없는 미군도 북한만큼은 완전히 조져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67] 이때 미군 포로들로 부터 가족에게 전해달라고 받은 쪽지를 북베트남군에게 넘겨서 포로들 - F-4 파일런 래리 캐링턴(Larry Carrington) - 이 죽게 만든 짓을 했다는 주장도 나왔을 정도. 단 이건 나중에 루머로 판명났다.[68] 특히 이때 미국은 아프간 반군을 지원해서 소련군을 고전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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