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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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국
Quốc gia Việt Nam (國家越南)
État du Viêt Nam

프랑스 제4공화국괴뢰국
파일:베트남 공화국 국기.svg
파일:600px-Coat_of_Arms_of_South_Vietnam_(1954_-_1955).svg.png
국기
국장
Dân vi quý
민위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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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 ~ 1955
성립 이전
공화정 전환 이후
베트남 임시 중앙 정부
베트남 공화국
역사
1949년 6월 14일 건국
1949년 7월 2일 건국 선포
1954년 7월 20일 제네바 합의
1955년 10월 26일 공화정으로 전환
국가
청년행진곡
위치
지금의 베트남 남부
수도
사이공 (현 베트남 호찌민)
정치체제
군주제
국가원수
국가주석
정부수반
수상
언어
베트남어, 프랑스어
통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피아스터(1949~1953)
남베트남 동(1953~1955)

1. 개요
2. 건국과 소멸
3. 나라 안의 나라 : 황조강토



1. 개요[편집]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1949년부터 1955년까지 현 베트남 지역에 존재한 프랑스괴뢰국. 베트남준국가라고도 한다. 일본의 괴뢰국이였던 베트남 제국(Đế quốc Việt Nam, 데 꾸옥 비엣 남)의 후신이며, 완조의 마지막 황제인 보대제(Vua Bảo Đại)가 국가원수바지사장였다. 수도는 지금은 호찌민으로 개명된 사이공.


2. 건국과 소멸[편집]


1948년 5월 27일 남기 자치 공화국의 수상 응우옌반쑤언프랑스미국 등의 동의 하에 베트남 임시 중앙 정부를 세우고 중기북기 지역에 대한 통일을 선언하였다. 임시 중앙 정부의 지도자는 남기의 수상이었던 응우옌반쑤언을 선발했다. 이후 남기 자치 공화국까지 합병하였다.

이렇게 해서 1949년 6월 14일, 독립이 선포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프랑스의 손아귀에 있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이런 눈 가리고 아웅식의 독립이 이루어진 것은 베트남 각지의 민족주의 세력들이 베트민에게 배신당하고 공격당하고 있음을 감지한 프랑스가 재빨리 전쟁 구도를 베트민 대 프랑스 전쟁에서 반공산주의 전쟁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당시 프랑스 본토에서 공산당이 제1정당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단독으로 정권을 잡을 정도로 의석이 많았던건 아니었고 1947년 들어 연립정권에서 배제되었고 중도좌파(사회당-당시엔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회)와 중도파(공화주의자, 급진주의자, 그리고 급진사회주의자당-약칭 급진사회당), 중도우파간의 연립정부가 구성되었기 때문에 이런 노선을 취하는 게 가능했다. 여기에 식민지 전쟁에는 원조해주기 싫다는 미국의 태도는 덤.[2]

일단 공산당이 국민당의 뒷통수를 치고 패권을 잡아 지배세력으로 등극해가던 북베트남 지역은 차치하고서라도, 남베트남 지역 역시 국제사회의 시선도 나쁜데다가, 대부분 독립운동가였던 반공주의 군벌이나 종교 세력들을 포섭한 이상 대놓고 재식민지화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베트남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프랑스는 1949년 베트남국 체제를 명목상의 독립국으로 출범시키면서도 실제로는 여전히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에 놓는 꼼수를 뒀다. 프랑스인들이 각 분야를 주무르는데다가 화폐는 여전히 프랑스 식민통치 시절의 화폐인 피아스트르(piastre)였고 베트남의 화폐인 동(Đồng)이 발행된것은 독립 선포후에도 한참이 지난 1953년의 일이었다. 기존의 정규군이 없던 만큼 군대 역시 새로 조직해야 했는데, 역시나 프랑스의 영향력이 강하던 만큼 군대도 초기에는 여전히 프랑스인 장교들이 베트남인 병사들을 지휘하는 구조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결국 임시조치였던 만큼 결국은 양성된 베트남인 장교들이 등장했으므로, 프랑스가 명확하게 군 통수권을 행사하는 것 또한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명확한 주체세력이 없이 건국된 베트남국은 그 체제부터가 불안정했다. 이 나라의 정부는 건국부터 멸망까지 단 한번도 임시정부 수준 이상의 영향력을 국내에 발휘한 적이 없었다. 국가주석으로 등극한 황제 보대제에게는 나라를 다스려본 경험도, 스스로가 가지고 있던 세력도 없었고, 대중들이나 세력가들의 지지를 명확하게 받는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왕정복고주의자들에게마저. 일례로, 40년대부터 메콩강 삼각주 지역을 사실상 지배하던 호아하오교 세력의 교주 후인푸소는 "베트남에 진정한 왕이 등극할 것이다"라면서 근왕주의적 독립운동을 이끌고 있었는데, 이후 호아하오교가 주목하던 "진정한 왕"은 일본에 거주하던 황족 독립운동가 끄엉 데였지 보대제가 아니었다. 허수아비라지만 일단은 황제였던 보대제가, 단 한번도 제위 근처에 가보지 못한 황족 출신 독립운동가보다도 인망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정부수반인 수상직을 역임한 인물은 임기가 2년을 넘긴 사람이 없으며, 프랑스의 압력에 의해 해임된 인물도 있을 정도로 허약했다.

프랑스에 의해 조직된 베트남국의 군대는 후반부로 가면 베트남인 장교들이 양성되면서 제법 건실한 군대가 되긴 했으나, 그 군대의 통수권을 쥐어야 할 정부가 저 모양이니 제대로 된 역할을 하는 건 불가능했다. 10만이 넘는 정규군을 가진 나라가 3000명 미만의 병력을 보유했던 군벌 빙쑤옌이 수도를 장악하는 걸 막지 못했다. 게다가 이 군벌은 통행세, 카지노 운영에 더해 아편 팔이로도 돈을 벌었다. 사실상 조폭 보스가 수도를 주무르는 거나 다름이 없었던 셈이다.

결국 1954년 북쪽에서는 디엔비엔푸 전투가 벌어져 프랑스가 패전했고, 남쪽에서도 프랑스의 영향력이 사라져감을 감지한 보대제는 응우옌푹브우록[3] 수상의 후임으로 독립운동가로 명성이 높았으나 국내 세력은 전무했던 응오딘지엠을 지명한다. 그러나 베트남국의 모든 세력가들이 이 변화를 달갑게 받아들인 건 아니었고, 특히나 친불주의자들이 많았던 기득권의 반발이 거셌다. 특히나 심각한 것은 이들 중에 총참모장인 응우옌반힌이 있었다는 것이었고, 스스로의 군사력이 없던 응오 형제에게 이 인물의 쿠데타 위협은 단순한 공갈로 들릴 수가 없었다.

지엠은 인사 문제에서 친인척들을 대거 등용하며 반기득권 군벌 세력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으나, 결국은 타협을 통해 이들 중 일부를 동맹으로 포섭해 '혁명위원회'를 창설하는 데 성공한다. 마침내 친불 군 수뇌부에 대항할 힘을 얻은 지엠은 응우옌반힌의 후임 응우옌반비를 축출했고, 뒤이어 아직도 수도를 지배하고 있던 빙쑤옌을 제거해버리며 권력을 장악했다. 이 시점에서 사실상 기존의 베트남국 체제는 종식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엠이 베트남국 체제 자체를 당장 없애버리려 했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갈린다. 일례로 찐민테의 부하 중 하나였던 '니랑'은 회고록에서 '지엠이 처음부터 보대제의 축출을 원한 건 아니었고, 오히려 혁명위원회 쪽이 더 적극적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지엠의 이후 행보를 볼 때 결국 스스로가 권력을 독점하고 싶었던 건 분명해 보이니, 늦든 빠르든 결국 보대제의 축출과 베트남국의 종식은 필연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 시점에서 제네바 합의는 남베트남에서 별로 인기가 없었다. 4월 혁명 이후로 남베트남의 지배자로 등극한 세력들은 하나같이 베트남 공산당에 배신을 당한 경험이 있었고, 남북총선거를 감독하기로 한 프랑스군이 예정보다 빨리 철수해버리면서 총선거는 공산당의 부정투표에 대단히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인구도 북베트남이 좀 더 많았고, 이미 공산독재국가였던 북베트남에서 공정한 선거가 치러지리라는 보장은 단 1%도 없었으니만큼 총선거를 그대로 치렀다가는 공산당이 이길 게 뻔했다. 결국 베트남국 체제를 장악한 혁명세력은 총선거를 엎어버리기로 합의를 했고, 이 결정은 사이공에서 20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참여한 대규모 반 총선거 시위로 민중의 지지 역시 확보했음을 증명했다.

결국 총선거마저 엎어지자 혁명세력을 막을 이는 남베트남에서 아무도 없었고, 보대제의 직위와 베트남국 체제가 더 이상 유지될 이유도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결국 응오딘지엠이 10월 26일 국민투표를 통해[4] 베트남 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총통이 되면서 베트남국은 그 기구한 역사를 마치게 된다.


3. 나라 안의 나라 : 황조강토[편집]


한자: 皇朝疆土
베트남어: Hoàng triều Cương thổ
프랑스어: Domaine de la Couronne
영어: Domain of the Crown

영역 (1950~54년)

일종의 왕실령이다. 이 지역은 베트남족이 다수를 차지하지 못한 채 응우옌 왕조에 복종하던 소수민족 지역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대한 프랑스의 이익과 원주민 통치자의 영향력을 보존하면서 베트남족의 이민을 이 지역에서 제한하기 위해 1950년 4월 15일 달랏을 수도로 설립되었다. 이 지역에서 바오다이는 베트남국 국가원수이자 황제 칭호를 겸하여 사용할 수 있었다. 영역은 북부에서 11개 성, 중부 고원 지대에서 5개 성을 차지했다. 하지만 실권은 프랑스인 안남총독이 갖고 있었다.

그렇지만 1954년 제네바 회담 이후 북부 베트남에 있던 황조강토 11개 성이 베트남 민주 공화국에 넘어갔고, 5개 성만 남은 남부 베트남의 황조강토 역시 1955년 3월 11일, 응오딘지엠 총리에 의해 폐지당해 존속 기간이 4년 11개월에 불과했다. 그 이후 응오딘지엠은 중부 고원 지대에 대해 베트남족의 권리를 제한하는 기존 조치들을 모두 폐지해 베트남족의 이주를 촉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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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民爲貴. 맹자의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뜻은 "백성이 (가장) 귀중하다".[2] 당시 사진들을 찾아보면 사람은 프랑스군인데 소총이며 장구류가 미제인 경우가 많다. 당연히 미국의 원조물자들.[3] 이름 가운데에 '푹'이 들어간 것에서 보이듯이, 황족이다. 보대제의 삼촌이다.[4] 참고로 이 국민투표의 투표율은 108.42%였고 공화국 지지가 98.91%였다. 이미 스스로가 남베트남의 최고 권력자가 된 상황에서 뭐하러 부정투표까지 했는지는 의문이긴 하나, 어쨌든 부정투표가 이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