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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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제서(南齊書)

[ 본기(本紀) ]

||<-2><tablewidth=100%><tablebgcolor=#3797e8><width=33%> 1·2권 「고제기(高帝紀)」 ||<-2><width=33%> 3권 「무제기(武帝紀)」 ||<-2><width=33%> 4권 「전폐제기(前廢帝紀)」 ||
||<-2><rowbgcolor=#fff,#191919> 소도성 ||<-2> 소색 ||<-2> 소소업 ||
||<-3> 5권 「중폐제기(中廢帝紀)」 ||<-3> 6권 명제기(明帝紀)」 ||
||<-3><rowbgcolor=#fff,#191919> 소소문 ||<-3> 소란 ||
||<-3><width=50%> 7권 「후폐제기(後廢帝紀)」 ||<-3> 8권 「화제기(和帝紀)」 ||
||<-3><rowbgcolor=#fff,#191919> 소보권 ||<-3> 소보융 ||
||<-6><width=1000> 20권 「황후기(皇后紀)」 ||
||<-6><bgcolor=#fff,#191919> 진도정 · 유지용 · 배혜소 · 왕보명 · 하정영 · 왕소명 · 유혜단 · 저영거 · 왕순화 ||
※ 9권 ~ 19권은 志에 해당. 남제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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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기(本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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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21권 「문혜태자전(文惠太子傳)」
22권 「예장문헌전(豫章文獻王傳)」
23권 「저연등전(褚淵傳)」
소장무
소억
저연 · 왕검
24권 「유세륭등전(柳世隆等傳)」
25권 「원숭조등전(垣崇祖等傳)」
26권 「왕경칙등전(王敬則等傳)」
유세륭 · 장괴
원숭조 · 장경아
왕경칙 · 진현달
27권 「유회진등전(劉懷珍等傳)」
28권 「최조사등전(崔祖思等傳)」
29권 「여안국등전(呂安國等傳)」
유회진 · 이안민 · 왕현재
최조사 · 유선명 · 소간 · 원영조
여안국 · 주산도 · 주반룡 · 왕광지
29권 「여안국등전(呂安國等傳)」
30권 「설연등전(薛淵等傳)」
31권 「강밀등전(江謐等傳)」
여안국 · 주산도 · 주반룡 · 왕광지
설연 · 대승정 · 환강 · 초도 · 조호
강밀 · 순백옥
32권 「왕곤등전(王琨等傳)」
33권 「왕승건등전(王僧虔等傳)」
34권 「우완지등전(虞玩之等傳)」
왕곤 · 장대 · 저현 · 하집 · 왕연지 · 원도
왕승건 · 장서
우완지 · 유휴 · 심충 · 유고지 · 왕심
35권 「고조십이왕전(高祖十二王傳)」
소영 · 소황 · 소엽 · 소고 · 소장 · 소삭 · 소감 · 소봉 · 소예 · 소갱 · 소구 · 소현
36권 「사초종등전(謝超宗等傳)」
37권 「도휘등전(到撝等傳)」
사초종 · 유상
도휘 · 유전 · 우종· 호해지
38권 「소경선등전(蕭景先等傳)」
39권 「유환등전(劉瓛等傳)」
소경선 · 소적부
유환 · 육징
40권 「무십칠왕전(武十七王傳)」
소자량 · 소자경(卿) · 소자향 · 소자경(敬) · 소자무 · 소자륭 · 소자진 · 소자명 · 소자한 · 소자륜 · 소자정 · 소자악 · 소자문
소자준 · 소자림 · 소자건 · 소자하
41권 「장융등전(張融等傳)」
42권 「왕안등전(王晏等傳)」
43권 「강효등전(江斅等傳)」
장융 · 주옹
왕안 · 소심 · 소탄지 · 강석
강효 · 하창우 · 사약· 왕사원
44권 「서효사등전(徐孝嗣等傳)」
45권 「종실전(宗室傳)」
46권 「왕수지등전(王秀之等傳)」
서효사 · 심문계
소도도 · 소도생 · 소면
왕수지 · 왕자 · 육혜효 · 소혜기
47권 「왕융등전(王融等傳)」
48권 「원단등전(袁彖等傳)」
49권 「왕환등전(王奐等傳)」
왕융 · 사조
원단 · 공치규 · 유회
왕환 · 장충
50권 「문이왕명칠왕전(文二王·明七王傳)」
소소수 · 소소찬 · 소보의 · 소보현 · 소보원 · 소보인 · 소보유 · 소보숭 · 소보정
51권 「배숙업등전(裴叔業等傳)」
배숙업 · 최혜경 · 장흔태
52권 「문학전(文學傳)」
구영국 · 단초 · 변빈 · 구거원 · 왕지심 · 육궐 · 최위조 · 왕준지 · 조충지 · 가연
53권 「양정전(良政傳)」
부염 · 우원 · 유회위 · 배소명 · 심헌 · 이규지 · 공수지
54권 「고일전(高逸傳)」
저백옥 · 명승소 · 고환 · 장영서 · 하구 · 유규 · 유역 · 종측 · 두경산 · 심유사 · 오포 · 서숙
55권 「효의전(孝義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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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권 「행신전(倖臣傳)」
기승진 · 유계종 · 여법량 · 여문현· 여문도
57권 「위로전(魏虜傳)」
58권 「만・동남이전(蠻・東南夷傳)」
59권 「유목전(遊牧傳)」
위로
고려· 가라 · 왜국 · 임읍 · 부남국 · 교주
예예로 · 하남지 · 양씨저 · 탕창
60권 「자서전(自序傳)」
소자현



1. 개요
2. 반랑, 어우락 (~ 기원전 207년)
3. 남 비엣(Nam Viet)/남월(南越) 시대 (기원전 207년 - 기원전 111년)
4. 중국의 지배 (기원전 111년 - 서기 938년)
4.1. 한나라의 지배시대(한구군, 漢九郡)(기원전 111년 ~ 220년)
4.2. 위진남북조시대(220년 ~ 589년)와 수나라 시대
4.3. 당나라의 기미지배 시대(602년 ~ 880년)
4.4. 정해군절도사 시대(880년 ~ 938년)
5. 안남(安南) 응오 왕조(938년 - 968년)
6. 다이비엣(大越, 대월)(968년 - 1802년)
7. 월남(越南) 응우옌 왕조(1802년 - 1945년)
8. 현대 베트남사 (1946년 - 현재)
8.1. 베트남 독립 전쟁(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1946년 - 1954년)과 제네바 평화 협정
8.2. 베트남 전쟁(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1955년 - 1975년)과 미국의 참전(1964년 - 1973년)
8.3. 통일 이후의 베트남사(캄보디아 침공, 중국-베트남 전쟁, 1979년 - 1988년)
9. 출처
10.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베트남역사를 다루는 문서.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역사 기록물이 길다. 역사적으로 제지기술이 발달한 중국과 전쟁 및 교류로 많이 엮이다 보니[1], 중국사의 시각에서 베트남이 관찰된 기록이 많기 때문. 또한 유교 문화권에 속해 있어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의 역사와 비교하면 오히려 동북아시아사에 가까울 정도. 실제로 문화ㆍ정치체계 등등 다방면에서 동남아의 전체적인 흐름에서 혼자서만 벗어나 있는 경우가 매우 많았는데, 다른 동남아 국가들은 인도이슬람의 문화적 영향력이 큰데 비해 베트남은 유독 중국의 영향력이 커서 동남아에서 유일하게 한자/유교 문화권으로 분류되는 국가이다.

또한 종교 역시 인도를 통해 들어온 이슬람교, 힌두교, 소승불교가 대세인 다른 나라들과 달리 혼자서 동북아시아처럼 대승불교 대세국가이고 거기다 유럽, 일본과 비슷하게 봉건제였던 다른 국가들과 달리 유교의 영향으로 동남아에서 가장 일찍 중앙집권화를 이루었다. 전쟁사를 봐도 다른 동남아 국가들은 상업이 발달하여 중국왕조와의 교류를 위해 큰 전쟁을 벌인 일이 거의 없는데 비해, 유독 베트남은 유교문화권이라 상업에 그다지 코가 꿰인 바가 없어 주구장창 중국 왕조와 싸워 왔으며, 동남아판 게르만족의 대이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13세기 타이족의 대이주로 대륙부 평야지대의 동남아 각국의 역사가 바뀌는 와중에도 거대한 산맥의 지형적 이점에 힘입어 혼자서만 아무 타격없이 멀쩡했다. 그야말로 동남아에 박혀있는 동북아 국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또 한편으로 베트남의 역사는 하노이로 대표되는 북부의 베트남 민족과 호찌민시로 대표되는 남부의 참파 민족 간의 싸움으로도 볼 수 있다. 이 싸움은 베트남이 중국 치하 남월에서 벗어난 938년부터 참파가 멸망한 1832년까지 약 900년 간 지속되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베트남 전쟁을 그 연장선상으로 보는 사람도 존재한다.

2. 반랑, 어우락 (~ 기원전 207년)[편집]


파일:external/www.hoalu.it/hung_vuong4.jpg

염제 신농씨의 3세손인 제명이 아들 제의를 낳고 얼마 후에 남방[3]

으로 순행하여 오령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무선의 딸을 만나 데려왔는데,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 녹속이 태어났다. 제명은 녹속에게 제위를 잇게 하려 했지만 녹속이 고사하자, 제의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북방[4]을 다스리게 했다. 한편 녹속을 경양왕에 봉하여 남방을 다스리게 했는데, 나라 이름을 적귀국이라 했다. 경양왕은 수부에 오갈 수 있었는데 동정군의 딸 용녀를 아내로 삼아 승람, 곧 낙룡군을 낳았다. 낙룡군은 부친을 대신해서 나라를 다스렸다. 그는 백성들에게 농경과 인륜을 가르쳤다. 때때로 수부로 돌아갔지만 백성들이 도움을 청하면 와서 도와주었다. -베트남 건국신화[5]-


베트남 역사상 최초의 국가는 베트남 북부 델타 지역과 현재의 광시좡족자치구 인근에 있었던 락비엣(Lạc Việt, 雒越, 낙월)이라는 민족이 세운 봉건적 공동체인 반랑국(Văn Lang, 文郎, 문랑)으로 기원전 2879년에 훙브엉(Hùng Vương, 雄王, 웅왕)이 건국한 이래로 18명의 훙브엉이 2621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국의 고대 국가인 고조선, 즉 단군조선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베트남의 국경일 중에 훙왕기일(음력 3월 10일)이 있는데, 초대 국왕인 훙브엉을 기리는 날로, 한국의 개천절과 성격이 유사하다. 실제로 동썬(Đông Sơn, 東山, 동산) 문화가 발견되면서 반랑국이 실존했다는 것을 인정받고 있다. 동썬 문화는 기원전 2350±100년으로 추정되며, 타인호아(Thanh Hóa, 淸化, 청화)성 동썬현에서 발견되었다. 이 동썬 문화는 청동기 말기와 철기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이다.[6]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도 그리 많지 않고, 계보도도 자세히 전해져 내려오지 않은 단군조선과 달리 반랑국은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는 많고 계보도도 자세히 전해지지만, 구전되어 내려오는 설화도 신화적인 성격이 강하며 각 왕들의 재위가 너무 길다는 점 때문에 베트남 학계에서는 반랑국이 대체적으로 기원전 7세기경에 건국된 것으로 추정한다.[7]

여하튼 반랑 왕국이 수백 년간 이어져 내려오다가 툭판(Thục Phán, 蜀泮, 촉반)이 반랑을 멸망시키고 어우락(Âu Lạc, 甌駱, 구락)(기원전 228년)을 건국한다. 어우락은 남하한 북쪽의 어우(Âu, 甌, 구)족과 남쪽의 토박이 락(Lac, 駱, 락)족이 결합한 이름이다.

안즈엉브엉(An Dương Vương ,安陽王, 안양왕, 재위 BC 257~207) 툭판은 진시황에게 잘보이려고 장사 이옹중(완옹중이라고도 전해짐)을 보내기도 했지만 자신의 대에 멸망하였다. # 이옹중 이야기 안즈엉브엉은 백 살까지 살았다고 전해진다.

중국사에 비유하자면 반랑은 중국의 하(夏)나라 정도고, 어우락은 상(商)나라와 비슷한 위치이다. 반랑의 경우 동썬 문화의 존재로 확실한 국가의 존재까지는 몰라도, 독자적 문화권의 형성까지는 확실히 파악할 수 있고, 어우락은 대규모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꼬로아(Cổ Loa, 古螺, 고라) 성의 발굴로 좀 더 실체가 분명해졌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World_500_BCE_showing_Van_Lang.png
반랑(Văn Lang)의 영역 #**

간혹 베트남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지도에는 반랑(Văn Lang)의 영역이 과도하게 크게 만들어져 있는 것도 있는데, 월(越)이라 불린 민족이 거쳐 간 영역이란 영역은 죄다 포함시킨 지도이다.[8] 사학자가 만든 지도로는 보이지 않고, 어떤 베트남 네티즌이 임의적으로 만들어 퍼뜨린 것으로 추정된다.


3. 남 비엣(Nam Viet)/남월(南越) 시대 (기원전 207년 - 기원전 111년)[편집]




4. 중국의 지배 (기원전 111년 - 서기 938년)[편집]


베트남의 역사
남월(남비엣)

중국의 지배기

응오 왕조


4.1. 한나라의 지배시대(한구군, 漢九郡)(기원전 111년 ~ 220년)[편집]


한문제 시기에는 화평도 맺어졌지만 한무제가 즉위한 뒤 천하질서를 재편하기 시작하자 남월 역시 공격대상이 되었는데, 조타가 살아있을 적에는 한의 군대를 막아내어 한동안은 화친관계가 지속되었으나 4대 국왕 애왕 조흥(趙興, Triệu Hưng, 찌에우흥)과 토착민 출신인 재상 여가(呂嘉, Lã Gia, 라지아)와의 대립이 불거져 쿠데타가 일어나 5대 국왕이자 마지막 국왕인 조건덕(趙建德, Triệu Kiến Đức, 찌에우끼엔득)이 추대되자 이에 한은 노박덕을 위시한 원정군을 파견하였고, 기원전 111년 남월을 멸망시켰다. 그 소식을 들은 남월 남부의 쟈오 찌(Giao Chỉ, 交趾, 교지)와 끄우 쩐(Cửu Chân, 九眞, 구진)의 대표도 저항하지 않고 항복하여 9개 군이 설치되었다. 이것이 약 1천 년에 이르는 중국의 베트남 지배의 시작이다.[9]

한나라가 베트남을 공격한 이유는 자국 변방의 안정이라는 목적도 있었지만, 나중에는 경제적인 목적이 더 중시되었다. 이 지역은 화북지방을 중심으로 한에서는 구경할 수 없는 남방물자의 산지인 동시에 동남아시아와 인도, 동아시아를 연결하는 물자의 집산지였기 때문에 막대한 이권이 존재하였다. 근데 다 실패했다. 동남아로 가던 사신을 죽이자 그 지방사람 수십만을 죽이는 행동까지 했지만, 끝내 사신 파견은 실패 이후 한은 기본적으로는 간접지배의 방식으로 이 지역을 다스리면서 경제적 이득을 취했는데, 워낙에 원지라서 수시로 탐관오리들이 등장하는 문제가 생겼다. 결국 탐관오리로 인한 반란, 괜찮은 관리와 이 지역 출신들의 통치로 인한 선정을 반복하였다.

이때 후한의 개국공신이자 복파장군 마원쯩 자매의 반란을 진압하고 베트남의 통치를 간접지배에서 직접지배로 바꾸었다. 이 사람은 그 유명한 삼국지마등, 마초 부자의 조상이다. 마원은 또 행정제도를 조정함으로써 중국의 지배통치력을 높이고 동화정책을 실시하였다. 이 조치로 기존의 락장, 락후의 통치력은 약화되었고, 중국인 이주민의 힘이 늘어났다. 복파장군 마원의 후예를 자처하는 사람이 한 명 또 있었지 근데 남만맹획운남 쪽이라는지라 또한 이때부터 비엣족이 본격적으로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면서 비엣족이 가지고 있던 구비서사시의 전통이 끊어진다.[10]

한편 137년 베트남 중부의 원주민인 구련(區憐)이 중국령 베트남을 공격하였다. 구련은 베트남인이 아닌 참족으로 보인다. 남부 원주민의 공격은 계속되어 192년 중국령 베트남 최남부 녓남(Nhật Nam, 日南, 일남)군을 점령하고 나라를 세운다. 이 국가가 베트남의 숙적 참파의 전신인 임읍(林邑)이었다. 참족은 말레이-폴리네시아 인종에 인도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베트남인의 동 썬 문화와는 다른 싸 후인 문화의 민족이었다. 임읍 남쪽에는 부남(扶南) 왕조가 번성했다.

후한 시대에 결국은 베트남의 직접 통치가 흐지부지되었다.

삼국시대에는 이중지배 상태가 되었는데 사섭이 베트남을 지배하고 있었고 그 사섭을 손권이 지배하고 있었다. 사섭은 손권의 부하였으나 베트남에서는 절대권력을 휘둘렀다.


4.2. 위진남북조시대(220년 ~ 589년)와 수나라 시대[편집]


삼국시대에는 교지의 실질적 독립 세력이었던 사섭[11]이 등장하여 안정이 되는가 싶더니 다시 사섭이 죽고 오나라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다시 조씨정[12]의 대규모 반란이 터지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를 이어간다. 오나라가 멸망할 때 곽마가 잠시 반란을 일으켜 떨어져나갔고 이후 중국을 통일한 서진을 잠깐 거치고, 이후 중국 육조시대 내내 대체로 남조의 지배를 받았다. 북조의 지배도 받았긴 받았겠지만, 기록이 없다.

베트남의 중앙이자 교주자사부의 최남단에 위치한 녓남군(일남군)은 기후가 아주 끝내줬는데, 여기는 덥기도 더운 곳인데다[13], 온갖 풍토병이 창궐했던 곳이었다. 당시 후한에서는 수도인 낙양으로부터도 가장 먼 곳이 녓남인데 녓남군은 낙양으로부터 13,400리나 이격되어 있었다. 그래서 당대의 사족들이나 관리들은 유배를 당할 경우 유배지에 따라 자신들의 행보를 예상했는데 녓남으로 유배당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실제로도 녓남으로 유배가 확정되면 고향에서 장례식을 먼저 치르고 녓남으로 출발했다.[14] 교주자사였던 사섭조차 건드리지 않은 곳이 녓남군이다. 그래도 녓남군에는 현이 5개나 되었고 인구가 10만 명 정도 되었다.

중국의 혼란기 사이에는 잠시 찌에우비엣브엉(Triệu Việt Vương, 趙越王)이 일어나기도 하고, 전 리왕조(Nhà Tiền Lý, 전 이조, 544년–602년)가 세워지기도 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수나라는 남방의 정복과 튀르크족(돌궐)과의 효과적인 관계 구축에 성공함에 따라, 다른 방향으로 확장주의적 정책을 자유로이 펼칠 수 있게 되었다. 2명의 수나라 황제(수문제, 수양제) 모두 주변국들과 이민족을 정벌함으로서, 옛 한 제국 시대의 영광을 되살리고자 했다. 602년 수문제는 오늘날 하노이 근방 지역을 가리키는 교주(交州)를 손쉽게 탈환했다.

605년 봄이 오자 제국군은 베트남 남쪽으로 더욱 깊숙히 밀고 들어갔는데, 오늘날 다낭 인근을 수도로 삼고 해안가를 따라 자리잡았던 참파 왕국을 침공했다.[15] 허나 정작 이 특별한 원정은 한 제국의 영광을 되살리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외려 남방에 전설적인 부(富)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현혹된 수문제의 개인적인 욕심에 가까웠다.

유방(劉方)이 이끌던 수나라군이 도리강(闍梨江)을 건너자, 코끼리를 동원하여 참파군이 공격을 가해왔다. 첫 공세를 격퇴한 후, 유방은 여러 개의 구덩이를 파게 하고 그 위를 풀로 덮은 뒤 거짓 후퇴를 통해 코끼리병을 함정으로 유인했다. 또한 수나라군은 쇠뇌를 동원하여 코끼리를 쏘게 했고, 이에 놀란 코끼리들은 몸을 돌려 참파군을 거꾸로 짓밟아버렸다. 유방은 참파의 수도를 정복하고 약탈했지만, 중국으로 돌아오는 귀로길에 수나라군은 풍토병에 시달리며 막대한 손실을 냈고 유방 또한 병에 걸려 사망했다.

사실 이러한 결말은 거진 예상된 바에 가까웠다. 현대에 이르기 전까지, 기후가 다양한 지역 전부에서 기동하던 군대들은 항상 역병에 취약했다. 특히나 온화한 지역에 살던 병사들은 남방의 열대에 극도로 허약함을 보였고, 전혀 익숙치 않던 수많은 세균들에 노출되었다. 이후 베트남 땅에는 당나라에 의해 안남도호부가 세워진다.


4.3. 당나라의 기미지배 시대(602년 ~ 880년)[편집]


당나라가 건국되자 당시 이 지역을 다스리던 태수 구화가 곧 투항하면서 이 지역에 안남도호부가 설치되었으나, 리 뜨 띠엔(Lý Tự Tiên, 李嗣先, 이사선), 딘 끼엔(Đinh Kiến, 丁建, 정건), 풍흥(Phùng Hưng, 馮興, 풍흥) 등의 반란을 꾸준히 겪어야 했다.

당나라는 훗날에 대리국으로 성장하는 현재의 운남성 지역의 국가 남조(南詔)와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전선기지였던 이 지역에 정해군(靜海軍)을 설치하고 고병을 절도사에 임명하면서 완전히 통합정책에 나선다. 고병은 고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선정을 펼치기는 했지만 도교를 중심으로 한 통합정책은 좀 늦은 감이 있어서 결국 실패. 결국, 880년 황소의 난을 계기로 안남도호부를 철폐하는 수준에 이른다.


4.4. 정해군절도사 시대(880년 ~ 938년)[편집]


이후 906년 쿡 트아주(Khúc Thừa Dụ, 曲承裕, 곡승유)가 절도사를 자처하면서 쿡씨 절도사 시대가 개막하였다. 907년 중국도 오대십국시대에 접어드는 헬게이트 상황이었기 때문에 여기 신경쓸 상황이 아니었다. 이 시기에도 역시 정해군절도사 유은이 세운 남한과 전쟁을 벌이면서 툭탁툭탁했다.


5. 안남(安南) 응오 왕조(938년 - 968년)[편집]




6. 다이비엣(大越, 대월)(968년 - 1802년)[편집]




7. 월남(越南) 응우옌 왕조(1802년 - 1945년)[편집]




8. 현대 베트남사 (1946년 - 현재)[편집]



8.1. 베트남 독립 전쟁(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1946년 - 1954년)과 제네바 평화 협정[편집]


1945년 8월 15일일본이 항복하여 철수했으나 베트남 지역은 무정부 상태였고, 프랑스인들은 아직 억류됐다. 며칠 후에 호치민의 베트민은 중북부 지방 대다수를 장악해 9월 2일 재통일과 독립을 선언하며 투쟁을 시작했다. 이들은 민족주의로 철저히 무장돼 있어 독립을 열망하는 주민들의 지지를 한몸에 받았다.

한편 북위 16도 북부는 중화민국군이, 남부는 영국군이 각각 진주했으며,[16] 북부를 지배했던 중화민국군은 국공내전 탓에 거기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으며 1946년 4월에 장제스 총통은 중국 내 프랑스 조계 및 할양지 반환, 쿤밍-하구철도 판매, 하이퐁 1개 특구 양보, 인도네시아 주재 화교의 지위 회복 등을 전제로 프랑스 정부와 중-불 협상을 맺어 프랑스에 양도토록 합의했다. 반면 남부 측은 영국군은 스핏파이어를 비롯한 영국제 무기를 넘겨주고, 별다른 마찰없이 프랑스인들을 석방시켜 프랑스에 남부 지배권을 맡기게 됐는데, 미국은 베트남의 즉시독립을 주장하였으나 프랑스 제4공화국프랑스 식민제국의 유지를 원했다. 미국은 악화일로로 치닫는 소련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한 나라라도 우방국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결국 프랑스의 입장을 지지하게 된다. 프랑스는 처음에는 1946년 3월, 베트민과의 하노이 예비협정을 통해 베트남을 자유국가로 인정했다. 이것은 프랑스 연방 내의 자치령으로 남는 것을 의미한다. 그 대신 프랑스군이 1952년까지 단계적으로 철수하는 것을 골자로 협상이 맺어졌으나, 사실 이는 프랑스의 눈속임으로, 프랑스는 베트남에 공산주의자들이 통치하는 것을 묵인할 생각이 없었다.[17] 마찬가지로 호찌민 역시 이 협상을 두고 같은 공산당 내부에서 매국노(…)라고 욕을 들어먹고 있던 상황이었고, 결국 양국간에 전면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결국 1946년 11월 20일 베트민과 프랑스군 사이 세관업무를 가지고 충돌이 있자, 프랑스가 함포로 쏴제껴 베트민군을 공격하고 수많은 시민들을 학살하는 하이퐁 사건이 터지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된다.

1946년 12월 19일부터 프랑스군은 통킹 삼각주 일대의 각 요새와 하노이의 호치민 관저 및 기타 요충지를 습격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1947년 2월에 중부의 다낭, 후에 지역에 상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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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가 코친차이나 지역에 세운 코친차이나 자치공화국 임시정부 기. 베트남말로는 꽁호아 뜨찌 남끼(Cộng hòa tự trị Nam Kỳ, 남기 자치공화국, 共和自治南圻)이라고 한다.[18] 후에 의회와 프랑스의 동의로 남베트남(베트남국 - 왕정)에 자치를 전제로 흡수된다. 프랑스 시민권자였던 응우옌반틴(Nguyễn Văn Thinh, 阮文廳, 완문청)이 총리으나, 1946년 11월 10일, 응우옌반틴이 사망하였으나, 큰 의미는 없었다. 이 깃발은 1948년 6월 2일까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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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는 1949년 바오다이 황제(1913~1997, 재위 1925~1955)가 이었다. # 바오다이는 즉위 직후 프랑스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와 1932년까지 머물렀으며, 보고 배운 것을 바탕으로 즉위 초에는 내정개혁과 자치독립에 힘썼으나, (당연히) 프랑스의 방해로 갈수록 성과 없는 이런 노력에 지쳐 이후엔 사냥자동차등 향락에 빠지게 된다.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독립으로 호치민에 의해서 고문으로 밀려났지만, 1946년홍콩으로 망명했다가 3년 만에 다시 돌아온 것.[19]

한편 같은 시기 남베트남은 온건한 독립을 준비 중이었다.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프랑스군은 응우옌 왕조의 황제를 명분으로 친프랑스 정부를 세우려 한 것이다. 1946년 성립된 괴뢰국인 코친차이나 자치공화국을 이어받아, 1948년 베트남의 여러 세력과 프랑스가 절충을 한 결과, 같은 해 5월 27일에 잠정 정부로서 베트남 임시 중앙 정부를 설립했다. 그 후, 1949년 3월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는 프랑스-베트남 협정을 체결하여, 같은 해 6월 14일에 정식으로 '베트남국'[20]이 성립됐다.

그러나 프랑스의 이러한 전쟁지속 정책은 소련중국의 지원을 받는 베트민군의 대반격과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오는 재정적인 문제에 국제여론마저 악화되면서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1954년 인도차이나 문제로 제네바에서 회의가 개최되었고, 결국 디엔비엔푸 전투(Điện Biên Phủ, 奠邊府)에서 지압 장군이 이끄는 베트민군에게 병력 대부분을 상실하고 대패하면서 베트남을 포기하고 철수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벌어진 것이 바로 제네바 협정이다.

프랑스와의 제네바 협정(1954년 4월 26일 ~ 7월 20일)의 결과 그해 8월 1일부로 전쟁은 끝났고, 10월에 프랑스 군이 철군하면서 한시적으로나마[21] 정전선 설정에 관해서 논란이 치열하게 벌어졌는데 프랑스는 18도선을 고집했고, 베트민은 13~14도선을 주장했다. 저우언라이가 16도선[22]을, 몰로토프가 16~18도선 중간인 17도선을 중재하여 베트남은 북위 17도를 군사경계선으로 하여 베트남에는 남북으로 2개의 정부가 들어섰다.

그리고 1955년 10월 26일 남베트남에 국민투표로 왕정이 축출되고 응오딘지엠 정부가 수립되었다. 베트남 공화국의 건국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달 1월을 기점으로 내전은 다시 시작되었다. 호치민 대통령은 17도선을 휴전선이라고 보며 남베트남이 1956년 남북통합 총선거를 받아들여 줄 것을 간절히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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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국(quoc gia Viet Nam, 꾸옥 기아 비엣남) 국기이자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비엣남 꽁호아) 국기

1948년 6월 2일부터 1975년 4월 30일 패망때까지 사용. 꺼방바속도(Cờ vàng ba sọc đỏ, 한역하면 주황삼선기朱黃三線旗) 노란색은 베트남과 베트남인, 빨간색은 베트남인의 피를 상징하며, 민유 민치 민향民有 民治 民享(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의 삼민기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런 의미는 뒤에 붙은 것으로 원래는 타인타이 황제(成泰帝/성태제)의 깃발카이딘 황제(啓定帝)가 고친 1920년까지 썼다. 카이딘 황제의 기도 롱띤이라고 부른다. 바오다이 황제 때까지, 즉 1920년부터 1945년까지 사용했다. 사실상 1890년부터 1975년까지 85년을 이어진 국기인 셈이고, 지금도 남베트남계 혹은 베트남 공산정권 반대 세력에선 이 국기를 쓴다.


8.2. 베트남 전쟁(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1955년 - 1975년)과 미국의 참전(1964년 - 1973년)[편집]


그러나 호찌민의 결의와는 달리 남베트남과 미국은 제네바 협정 결의안을 채택하지 않았고, 그에 따라서 1956년에 해야 할 남북통합 총선거도 없었다. 남베트남의 친미 정부는 베트민 지지자들에 대한 테러를 가했고, 결국 이에 반대하는 남베트남 내 공산분자들은 테러 공격을 감행하되며 분쟁이 격화됐다. 1960년 12월, 남베트남에서 '남베트남 해방민족전선'이란 이른바 '비엣콩(베트콩)'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또한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 민주공화국(북베트남)'과 중국, 소련의 원조를 받아 더욱 세력을 확장하였고, 미국과 남베트남의 방해공작으로 선거를 통해 베트남 전역을 장악할 수 없게 된 공산 측은 군사적인 수단을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제는 미국(1964년 8월 2일)이 중국 공산화와 연이은 한국전쟁 등으로 공산주의가 동남아로 퍼질까 봐 통킹만 사건을 핑계로 북베트남과의 전쟁에 돌입하지만(베트남 전쟁 혹은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미국 역사상 최초의 패전이라는 치욕을 남긴 채 1973년 파리에서 평화조약을 맺고 떠나야 했다. 자세한 것이나, 이 당시 베트남 전쟁이 벌어지기까지의 자세한 베트남 현대사는 베트남 전쟁 항목 참조.

1973년 1월 27일으로 파리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지만, 이는 미국이 발을 뺄 핑계거리나 다름 없었다. 무엇보다 워터게이트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사임으로 미국 정국이 혼란에 빠진것이 결정타였다. 1975년 3월 10일에 협정을 깬 북베트남의 침공으로 보름 만인 3월 26일에 다낭 함락, 1달 20일 만인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과 함께 전쟁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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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 공화국 임시혁명정부) 국기[23]

1975년, 북베트남은 기어이 남베트남을 드디어 멸망시켰고, 남베트남 공화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웠다. 다음 해의 총선거로 2,400만명의 북베트남과 2,000만 명의 남베트남이 합쳐져 4,400만 명의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출범했다.

파일:베트남 국기.svg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

이로서 독립국 베트남은 통일을 완성했다. 물론 통일 이후 들어서 중국과의 관계로 인해 사실상 추방당하여 난민이 되거나 공산주의 정권하에서 재교육 등으로 고생한 수많은 사람들이 생기기도 했다. 덧붙여 두는 이야기지만 베트남 공산정권이 호치민 같은 미담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건 절대 아니고, 정치적 탄압이나 수용소 같은 것도 분명 존재했긴했다. 1950년대 중반에 토지개혁을 결정과정 같은 건 생략한 채 강제로 시행했다가 수만 명이 죽거나 다치고 수십만에 이르는 난민이 대거 월남했고, 권력투쟁과정에서 트로츠키파를 숙청했던 게 그 예다. 단지 소련이나 캄보디아 같은 나라들보다 막장성이 덜하다 보니 덜 알려졌을 뿐.

여기서 알아야할 사실은 미국이 지원한 남베트남이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남베트남 또한 지엠 정부 하에서 수만 명이 죽고 또 수십만 명이 강제수용소에 감금당했다. 즉 남베트남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닌 친미 반공 독재국가였다. 자세한 것은 이 논문을 참고하라

8.3. 통일 이후의 베트남사(캄보디아 침공, 중국-베트남 전쟁, 1979년 - 1988년)[편집]


미국과의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하여 자신감이 충만해진 베트남은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를 공산화, 지배하여 동남아 전체의 패권을 차지하려는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과거 19세기에 현 태국의 전신인 시암 왕국과 함께 라오스캄보디아의 상당부분을 지배했던 베트남은[24] 당시 막 공산화된 캄보디아 정권과 당초엔 큰 마찰을 일으키지 않았다.

당시 캄보디아의 정권을 잡고 있던 크메르 루주는 원래 베트남 공산당의 지도로 성장했고, 그 보답으로 베트남 전쟁에서 적극적으로 북베트남을 돕고 있었지만, 1972년 미군이 철수하고 북베트남이 승기를 잡기 시작하자, 크메르 루주는 곧바로 미래에 다가올 상황을 직시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73년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주 정권은 베트남 공산당과의 관계를 끊고 중공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1974년부터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주 정권은 과거 자신들의 고토를 내놓으라며 베트남과의 국경에서 국지전이 발생하기 시작했고,[25]1976년부터는 캄보디아의 요청을 받은 중국이 직접 중재에 나서기 시작했다.

결국 크메르 루주의 친 중공 정책으로의 선회와 남부지역 공격에 마침내, 1978년 12월 베트남은 캄보디아를 무력 침공했고,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을 점령, 괴뢰국을 세워 사실상 캄보디아를 식민 통치했다.

그러자 중국이 베트남에 침공해 중국-베트남 전쟁(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 1979년 2월 17일 ~ 1988년 1월)이 벌어졌다. 아시아 공산권 국가들의 대분열을 상징하는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명목상 상당히 오랜 기간 지속되었지만 결국 모두 지친 가운데, 베트남은 캄보디아에서 물러났고, 역시 중국도 베트남에서 물러나며 상황은 종료되었다.

하지만 통일 이후에는 계획경제체제의 경직성과 막대한 통일 비용을 떠안은 데다가 동시기에 크메르 루주를 퇴격하겠다고 캄보디아를 점령했는데 캄보디아의 경제 상황은 베트남보다 훨씬 안 좋은 데다가 크메르 루주가 장기간에 걸쳐 저항했기 때문에 전비를 지속적으로 지출해야 했고, 덕택에 통일 비용을 감당하기에도 모자를 판에 캄보디아 전쟁에서 상당량의 예산을 투입해야 했다. 그런 데다가 전쟁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중국과의 전쟁도 터지는 바람에 전비가 추가로 지출된 건 덤이었고, 소련과 동구권의 경제 침체로 인해 통일 베트남에 대해 충분한 지원이 이뤄지지 않았다.

이런 연유로 통일 이후 베트남은 경제 파탄 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매년 수십만 명의 인민들이 먹고 살기 위해 보트피플이 되었다.[26] 이들 중 상당수는 엘리트였기 때문에 두뇌유출도 통일 베트남에 상당한 타격이 되었다.[27] 그러나 1985년부터 집권한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의 페레스트로이카글라스노스트 정책이 베트남에도 영향을 미쳐 1986년 말에 공산당은 6차 인민회의에서 도이머이 (Đổi mới; 𣌒𡤓; (易+對)(始+買)) 개방정책을 승인 후 실시했고, 1989년에 캄보디아 철수 후 공산주의 통제경제정책을 사실상 포기하면서 상당한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있다. 하지만 성장률에 비해 소득이 상당히 낮은 데다가 빈부격차가 심하고 물가 상승률도 높다는게 문제점으로 지적받는다.[28]

도이모이 추진 후 1990년대 초반 들어 한국 등 주변국들과 관계를 좋게 만드는 한편 ASEAN에도 1992년 옵저버가 되었고, 1995년 정식 가입했다. 1967년에 일종의 반공정권 5개국 간의 단결기구였던 ASEAN은 그렇게 동남아 전체를 포괄하는 기구가 되었고, 뒤따라 여러 공산국가가 가입하면서 실질적 경제-정치적 공동체가 구성될 힘을 얻게 되었다. 이외에도 적국이던 미국과도 관계 개선에 주력해 1995년 통상금지가 풀려 외교 관계가 재개됐고 이제는 한술 더떠서 공산권 국가들 중 유일한 미국의 군사동맹국이 되면서 미군도 주둔하고 있고 합동군사훈련도 자주 여는 중이다.


9. 출처[편집]


  • 먼나라 이웃나라 시즌2(지역/주제편): 동남아시아, 천년 문명의 신비에서 21세기 변화와 개혁의 주역으로 - 이원복 글/그림. 김영사. 2018. p92~109.
  • 월간조선 연재물 <처음 읽는 베트남史(2016, 송정남 글)> - #1, #2

10.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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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에서는 전통적으로 구하기는 쉽지만 보존성은 떨어지는 패엽에다가 기록하는것이 일반적이었다.[2] 실제로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교과 과정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15차 교육과정 개편으로 인해 근현대사를 제외하면 비중이 대폭 줄었다.[3] 베트남을 의미한다. 베트남은 중국을 북방, 자신을 남방으로 칭하여 자주의식을 드러냈다.[4] 중국[5] 최귀묵, '베트남문학의 이해',창비,2010,p76[6] 송정남, 2001년.[7] 이 점도 단군조선과 꽤 유사한 것이 신화적으로 단군조선은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한국 한계에서는 실제 고고학적 증거와 문헌 기록을 따졌을 때 대략 기원전 6세기 경 고조선이 건국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8] 물론 종족과 분포가 다양해 백월(百越)이라고도 불렸는데, 그 만큼 각 종족들끼리 언어도 달랐다.[9] 이 9군은 나중에 교주(交州, 베트남식으로는 Giao Châu)로 편성되는데, 교주의 중심지는 남월의 중심지였던 남해군(南海郡)이 아닌 쟈오 찌(Giao Chỉ, 交趾, 교지)군이 되었다. 남해군이 아닌 쟈오 찌군이 중심지가 된 이유는 당시 쟈오 찌군이 남방과 베트남 북부에서 생산되는 물자의 집산지였고 쟈오 찌군이 당시 중요 항구였던 지역의 합포군 합포현(合浦縣: 지금의 광시좡족자치구 베이하이시 허푸 현 북동부)과의 거리가 남해군과 합포현의 거리보다 가까워 합포현을 통제하기에 수월했기 때문이었다. 출처는 유인선의 『베트남과 그 이웃 중국』.[10] Đinh, Gia Khánh. Văn hóa dân gian Việt Nam với sự phát triẻ̂n của xã hội Việt Nam. Chính trị quó̂c gia, 1995[11] 베트남식 독음은 '시 니엡(Sĩ Nhiếp)'이다.[12] 베트남식 독음은 '찌에우 티 찐(Triệu Thị Trinh)'이다.[13] 위키백과 동하의 기후 문단에서 볼 수 있듯이, 30도 이상의 폭염은 기본으로 깔고 들어가고, 한창 더울 때는 40도 정도는 예사 수준인 곳이다. 물론 이 시절이 지금과는 완전히 같지 않았을 것이다. 사족으로, 동하는 옛날의 일남군에 해당되는 지역이다.[14] 실제로 공손찬은 유기라는 인물이 녓남으로 유배될 때 따라갔는데 이 때에 그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 여기고 북망산에서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공손찬은 녓남으로 가던 도중 사면령이 내려져서 고향으로 돌아갔다.[15] 상술했듯 중국인은 임읍(林邑)이라 불렀다.[16] 이원복 교수의 <가로세로 세계사> 2권에선 중화민국군이 남부를 지배했다고 잘못 표기되었다.[17] 프랑스에서 프랑스 공산당이 원내 제1당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4공화국 시기 공산당은 정권에서 배제당하는 야당 신세였다.[18] 남기국(南圻國)이라고도 한다.[19] 바오다이는 공화국화 되면서 퇴위된 후 프랑스로 망명해 조용히 살다가 1997년에 파리에서 노환으로 사망한다.(향년 84세)[20] 베트남준국가라고도 한다.[21] 1956년 7월에 남북총선거로 통일 베트남을 세우기로 했다.[22] 이 경계선대로라면 후에다낭은 베트민이 가질 수 있다.[23] 베트콩(남베트남 해방민족전선, 남베트민)임시 기와 같다. 적성홍기(赤星紅旗)라고도 한다.[24] 그나마 태국캄보디아와 유사한 종교와 문화로 어느정도 자연스러운 동형화가 되었지만, 베트남은 종교(대승불교)와 문화의 이질성이 더 크고, 19세기 초에는 아예 꼭두각시 국왕을 세워 완전히 동화시키려 했다. 이 결과로 캄보디아 내에서 강제동화정책에 반발해 1851년 봉기가 일어나기도 했다.[25] 사실 현재 베트남 2대도시 호찌민도 본래 캄보디아의 영역이었다.(…) 16세기 이후 크메르 왕국의 끊임없는 쇠퇴와 베트남 리 왕조의 남진으로 동부지방을 잃고 해양 상업도 쇠퇴하기 시작했지만.[26] 단순히 공산정권의 압제를 피하기 위해서라고 알려져있지만 상당수 보트피플은 공장이나 농장, 어선에서 일해도 봉급이 얼마 안나왔고 인플레이션 현상까지 겹치면서 안 그래도 적은 월급의 가치는 더더욱 떨어지는 현상 때문에 돈을 거하게 벌려고 베트남을 빠져나온 경우가 많았다. 1970년대의 보트피플은 대다수가 정치적인 원인 때문에 빠져나왔다면, 1980년대의 보트피플들은 대다수가 경제적인 원인 때문에 빠져나왔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27] 현재도 두뇌 유출은 베트남에서 심각한 문제로 지적받는다.[28] 이웃 국가인 중국이 태자당을 비롯한 중앙당의 권력남용이나 부정부패 문제가 있다면 베트남은 반대로 지역당 간부들을 비롯한 지방 토호들의 부정부패 문제가 심각하다. 특히 국부인 호찌민이 집단지도체제를 확립시키면서 중앙당과 중앙정부에 지역당과 지방 유력자들이 미치는 영향력이 상당해지는 바람에 각종 선거나 당 대회가 있을 때마다 지방 유지들 간에 기싸움이나 뇌믈 공세가 판을 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