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덤프버전 :





병자호란
丙子胡亂
Qing invasion of Joseon

파일:정묘 병자 호란 지도.jpg

기간
1637년 1월 3일 ~ 1637년 2월 24일
(음력 1636년 12월 8일 ~ 1637년 1월 30일)
장소
한반도 서북부, 중부
원인
홍타이지칭제건원으로 인한 조선청나라의 관계 악화[1]
정복을 위한 후방 변수 제거 목적
교전국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파일:청나라 국기.svg 청나라
지휘관
인조
김류
최명길
김상헌
김자점
심기원
김경징
이시백
민영
허완
홍명구
유림
임경업
우익군 지휘관 숭덕제
좌익군 지휘관 도르곤
좌익군 지휘관 호오거
요토
도로이 버이러 두두
니칸
쇼토
양구리
마푸타
타타라 잉굴다이
1차 선봉대 지휘관 로오사
2차 선봉대 지휘관 도도
병력
속오군 80,000~90,000여 명
어영군 6,000여 명
총융군 20,000여 명[2]
수어군 14,000여 명
훈련도감군 5,000명

총 90,000명~100,000명
1차 선봉대 300명
2차 선봉대 1,000명
3차 선봉대 3,000명
동로군 8,500명
본군 8,600명
후미군 12,900명
기타 11,000명[3]

총 45,000여명[4]
피해
피해 규모 불명[5]
장교 10~300명
병사 7,000명 이하[6]
결과
청의 압승
조선 국왕 인조항복 선언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 단절[7]
영향
조선의 사회·경제 파탄 및 청나라 속방화
명나라 멸망 가속화
소현세자 피랍, 의순공주 강제 혼인
조선인 다수 피랍

1. 개요
2. 설명
3. 명칭
4. 전쟁의 동기
4.1. 조선의 친명배금 노선 비판론
4.2. 조선의 친명배금 노선 옹호(불가피)론
5. 정묘호란 이후부터 병자호란 이전까지의 양국 관계의 상황
5.1. 정묘맹약(형제지맹) 이후부터 존호 문제 이전까지의 상황
5.2. 양국 관계의 파탄(존호 문제)
5.3. 목소리만 컸던 주전론
5.4. 조선의 부실한 전쟁 준비
5.5. 청군의 하북원정 (1636년 여름~가을)
6. 전쟁의 발발과 흐름
6.1. 압록강을 건넌 청군
6.2. 지연전에 들어가다
6.3. 눈보라가 몰아치는 남한산성
6.4. 조선군의 남한산성 구출시도
6.5. 강화도 방어전에서의 패배
6.6. 항복, 그리고 삼전도의 굴욕
7. 결과와 영향
7.1. 조선의 패배 원인
7.2. 청나라의 승리 원인
8. 영향과 평가
8.1. 흑역사로 치부된 전쟁
8.2. 인조옹호론
8.3. 인조책임론
8.3.1. 외교적 실책
8.3.2. 군사적 실책
8.4.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대청인식
9. 여담
9.1. 청은 어째서 조선을 멸망시키지 않았나?
9.1.1. 견해 1: 청나라(만주)의 경제난과 식량난
9.1.2. 견해 2: 조선 내에서 천연두의 유행
9.1.3. 종합
9.2. 일본의 반응
9.3. 명나라의 반응
9.3.1. 명나라의 요동 공격 시도
10. 관련 문서
10.1. 조선 측 관련 인물
10.2. 청나라 측 관련 인물
10.3. 관련 전투[8]
10.4. 관련 작품
10.5. 관련 서적




1. 개요[편집]



병자호란 , 청나라의 특수 기동작전 - 경험해보지 못한 진군속도

병자호란은 음력으로는 1636년(인조 14년) 병자년 12월 8일부터 정축년 1월 30일까지, 양력으로는 1637년 1월 3일부터 1637년 2월 24일[9]까지 이루어진 청나라조선을 침략한 전쟁이다.

1627년 후금이 일으킨 정묘호란 종전 후 약 10년만에 발발한 전란으로서 임진왜란 이래 동아시아의 판도를 다시 한번 크게 뒤바꾼 사건이었다. 청은 병자호란을 통해 조선을 굴복시켜 번국으로 삼고, 조선은 그 대가로 군사적, 경제적 부담과 공녀 차출을 강제당하게 된다. 당대 동방의 패권국이었던 명나라도 상호 온건적인 군신관계를 맺어온 우방국 조선이 청에 굴복함에 따라 멸망이 가속화되어 결국 1644년 멸망하게 된다.


2. 설명[편집]


삼전도의 굴욕이란 항례를 치러 당대 조선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킨 전쟁이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경우, 전쟁의 배경, 전쟁의 전개 방식, 한반도 세력의 대처 등을 보면 고려-거란 전쟁 당시 '거란의 2차 침입' 때와 매우 비슷하다. 단지 차이점이라면 인조고려현종처럼 신속한 몽진(蒙塵)을 하지 못했고 청나라의 너무 빠른 진격 속도 때문에 소모전을 벌일 때까지 시간을 끌지도 못했으며 중요한 통제 사령탑으로 기용한 측근들이 싸움을 회피하거나 패배하여 결과적으로 청군을 막아내지 못하고 전쟁에서 결국 패배했다는 것이다. 이 밖에 할아버지인 선조임진왜란 초기의 빠른 몽진(蒙塵)과도 자주 비교가 된다.

대중들에겐 흔히 '조선사대주의명나라를 섬기다가[10] 연이은 실책[11]으로 자멸했고, 청나라홍타이지는 항복한 조선에 자비를 베풀어 멸망시키지 않았다'는 속설이 퍼져있지만,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다. 천연두가 홍타이지와 청군의 귀국을 앞당겼다는 것이다.[12] 당시 조선과 청의 국력 격차는 쉽게 멸망이나 정복이 이루어질 만큼은 아니었고, 전쟁 중 천연두가 발병한 탓에 소모전을 바라지 않은 청은 전면전이 아니라 조선의 정치를 뒤집어서 외교적인 이득을 보기 위한 단기 전쟁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몇 년 안 가서 명나라도 멸망했다.

한국의 병자호란사 담론은 청나라가 처했던 위기 상황보다도 침략을 당한 조선의 사정만으로 해석하려는 경우가 많다보니, 한림대학교의 오수창 교수는 <청(淸)과의 외교 실상과 병자호란>이라는 논문에서 '자초한 전쟁' 이라는 이런 통념들에 대해 비판을 하기도 했다. “병자호란, 조선이 자초한 전쟁 아니다" 그 외에 다음 글을 참고하는 것도 좋다. 병자호란의 원인에서, '청나라' 의 입장 - 전쟁은 오직 조선 때문이 일어난 것인가? 물론 학자들 사이에서 객관적 연구와 논쟁이 더 필요한 부분이긴 하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가 출연했던 EBS 평생 대학) 역사 이야기 - 병자호란 편과 구범진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가 2019년에 출간한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도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


3. 명칭[편집]


옛 기록에는 '병자노란'(丙子虜亂)이나, '병정노란'(丙丁虜亂)이라고 부른 기록도 있다. 병자년 - 정축년에 걸쳐 있었다는 의미에서는 '병정노란'이 좀 더 정확한 표현이기도 하다. 그래서 위에 인용된 《연려실기술》의 '병자노란'이라는 표기는 오타가 아니다. 호(胡)나 노(虜)나 '오랑캐'를 뜻하는 글자이기 때문이다. 현재는 제2차 조청전쟁[13]이라는 명명도 있다. 본시 고려판 병자호란인 여몽전쟁의 경우도 본시 고려나 조선의 입장에선 '몽고의 침입'으로 불렀고, 조선 왕조식으로 표기하자면 신묘몽란, 신묘호란, 신묘노란 등등으로 불린다. 현대 한국의 동아시아사 과목 교육 과정에서는 "병자전쟁"으로 칭한다.


4. 전쟁의 동기[편집]




일반적으로 정치적인 문제가 병자호란의 원인이 됐음이 20세기 초 하야시 다이스케에 의해 지적됐으며, 병자호란의 원인을 정묘맹약 이후 누적된 양국간의 경제적 마찰에 비중을 둔 이나바 이와키치의 경우도, 일련의 '존호 문제'를 병자호란의 동기로 설명하고 있다.[14] 한국의 호란 연구에서도 명의 모범적인 조공국인 조선을 통해 위상을 정립하려는 홍 타이지가 인조에게 존호 문제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고, 이것이 강경한 척화론을 촉발하여 사신들의 도주와 절화교서의 탈취를 초래했다고 지적하며 이것이 호란으로 이어지는 동기가 됐다는 것이 통설을 이룬다.[15] 의미 부여의 차이지만, 홍타이지의 존호례에 참석한 조선 사신들이 이틀간 배례 거부를 한 것이 중대한 계기[16] 및 직접적인 동기[17]가 됐다고 보거나 이들이 국서를 버린 것을 계기로 양국의 국서 교환이 단절됐음을 강조하기도 한다.[18] 즉, 공물 수량을 두고 양측이 마찰을 빚은 것은 수량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상승하는 후금의 위상을 조선에게 반영하려는 것이 본질이었다.[19]


4.1. 조선의 친명배금 노선 비판론[편집]


"우리 나라가 천조(天朝)에 대해서 의리상으로는 군신(君臣)의 관계에 있다 할지라도 정리상으로는 부자지간과 같다. 더구나 임진왜란 때 위급한 상황을 구제해 준 큰 은혜가 있는데 말해 무엇하겠는가. 따라서 천조에 만약 사변이 발생했을 경우에는 우리 나라 군신들로서는 국내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달려가서 선봉이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다만 우리 나라는 평소 병(兵)과 농(農)을 분리하지 않아 왔으므로 아침에 명을 내려 저녁에 집결시키기는 형세상 불가능한데, 이런 사정은 동정(東征)한 여러 대인(大人)들이 일찍부터 환히 알고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이번의 노추(老酋) 는 실로 천하의 강적이니 결코 건주위(建州衛)의 이만주(李滿住) 따위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러니 왕사(王師)는 단지 병력을 배치하여 무위(武威)를 보여주고 크게 성세(聲勢)를 떨쳐 호랑이가 산속에 웅거하고 있는 형세를 지은 다음에 다시 저 적의 동태를 관찰하면서 기미를 보아 움직이는 것이 어떻겠는가. 지금 만약 깊이 들어가 섣불리 행동하며 진격한다면 만전(萬全)의 계책이 못될 듯하니 한 번 더 깊이 생각해야 한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28권, 광해 10년 5월 1일 무자 7번째기사 1618년 명 만력(萬曆) 46년


"이렇듯 인심이 좋지 못한 때 대군을 징발해서 멀리 중국으로 보낸다면 뜻밖의 걱정이 반드시 없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하겠습니까. 중국 조정은 우리 나라에 있어 임진 왜란 때 구원해 준 망극한 은혜가 있으니 차라리 나라가 망할지언정 보내지 않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다만 이 세상이 생겨난 이래로 사변이 끝없이 일어나는데 혹시라도 흙이 무너지는 환란과 대처하기 어려운 변고가 있게 된다면 묘당에서 장차 어떻게 조처할지 모를 일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의 평안·함경 두 지역은 저 적의 지방과 맞닿아 있는데, 이번에 나라의 병력을 총동원하여 국경으로 내보냈다가 뒤에 만약 허허실실(虛虛實實)의 계책과 충동격서(衝東擊西)의 작전을 구사하며 무인지경(無人之境)에 들어오는 것처럼 하기라도 한다면 묘당에서 장차 어떤 계책으로 대응할지 또한 모를 일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은 이렇습니다. 중국 조정이 만약 저 적에게 병화(兵禍)를 입어 아랫나라에 구원을 요청해 왔다면 나라의 존망이나 일의 이해 따위는 돌아보아선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중국 조정에서 군대를 징발하여 저 적의 죄를 물으려 하고 있으니 일의 완급(緩急)에 있어 크게 차이가 납니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28권, 광해 10년 5월 5일 임진 6번째기사 1618년 명 만력(萬曆) 46년


16세기 말에 일본의 침략으로 일어난 임진왜란을 명나라의 구원으로 극복한 일은 당위론적인 사대관을 더욱 심화시켰다. 이제 조선 사회에서 명에 대한 사대는 외교가 아닌 윤리, 도덕의 문제였다. 이를테면, 1619년 명과 후금이 충돌했을 때, 파병을 반대한 광해군은 물론이고, 대다수 신료들 역시 조선군의 허약함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명을 돕기 위한 원군의 파병을 지지했던 것은, 오로지 '대명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였었다.[20] 그와 같이 광해군 시절의 조정 또한 대명 사대에 소홀하다는 명분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집권한 인조 정권과 마찬가지로 친명배금을 추구했고. 광해군을 왕위에 옹립한 이이첨 등이 있던 대북 또한 열렬한 친명배금주의 성향이었다. 사실 대북은 여진(=후금, 청)에 대해서는 서인 못지 않은 골수 강경파였는데, 광해군 때 후금과의 관계에 대해서 "나라가 망할지라도 후금과 친선 못맺습니다!" 라고 했다.[21] 그러므로, 광해군의 중립외교 또한 결과적으로 사르후 전투 당시의 파병 결정에서 알 수 있듯이 그 한계가 명확한 상황이었다.

조명 연합군이 사르후에서 참패하여 강약이 가려진 다음에도, 조선의 사대부들은 당파를 막론하고 '오랑캐'이자 '역적'인 후금에게 비타협적 자세를 계속 고수했다. 조선의 문신들이 징병칙서를 거절한 광해군의 왕명을 거부하여 파업에 벌이고 계해정변까지 초래한 것, 가도의 모문룡 휘하 명군의 횡포를 방기하고 재정을 쏟아준 것, 병자호란 직전 청 사신을 박대한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이에대해 한명기 교수[22]나 오수창 교수[23]의 주장들 처럼 광해군과 광해군 다음에 즉위한 인조대의 외교노선에 큰 변동은 없었다는 반박성 학설들 또한 존재하는 상황이다. 다만 이러한 반박들에 대해 해당 주장들은 1622년 5월에 명의 징병칙서를 광해군이 거부한 이래 더 이상의 징병 요구가 없었던 점, 그해 10월 광해군이 누르하치를 후금국 칸(後金國汗, amaga aisin gurun-i han)으로 인정하고 우호적인 국서를 보내 부분적인 외교 관계를 형성하는 것에 크게 만족한 누르하치가 더 이상 외교전을 진행하지 않고, 요서 공략에 집중한 점 등을 감안하지 않은 피상적인 관찰일 뿐이다라는 반론 또한 존재한다.[출처필요]

정묘호란 당시 후금의 화친 제안에 대해서도, 비변사의 일부 고위 관료를 제외한 조정 대다수는 척화를 주장했고 특히 대각(臺閣)이 그 중심이었다. 그러한 주화, 척화의 논쟁은 당론과 무관했다. 대명 의리에 기반한 척화론은 당파를 초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척화론은 실리적인 판단에 근거한 것도 아니었다. 인조대 군신들은 광해군과 마찬가지로 조선이 단독으로 후금의 침략을 물리칠 가능성이나 명의 군사적 지원 가능성을 낮게 보면서도, 국가의 존망보다는 상국을 섬기는 대의(大義)가 더 중요하다며 척화에 힘을 실어 주었다. 인조 정권은 후금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밀려 정묘화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으나, 이귀, 최명길 등 이를 주도한 신료들을 참수하라는 상소가 잇다를 정도로 주화론자들의 입지는 매우 좁았다. 그러한 상황은 병자호란을 전후한 시기에도 그대로 이어졌다.[24]

병자호란을 앞둔 시기 조선의 신료와 사대부들은 사대를 위해서는 나라가 망해도 상관없다는 극언을 서슴치 않았으며,[25] 대표적인 예가 다음 홍문관의 차자다.

"요즈음 오랑캐 사신 용골대 등이 가지고 온 거만한 글에 존호(尊號)를 확정했다고 칭했는데, 이 말이 어찌하여 이르게 되었습니까. 신들은 적이 통곡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정묘년의 난리에 참혹하게 유린당하고 기미(覊縻)의 거조가 궁여지책에서 나와 생민(生民)의 고혈을 다 기울여 사신에게 예물을 바치면서 비굴한 말로 애걸한 것이 10년이나 되었습니다. 저들이 이미 위호(僞號)를 참람하게 칭하려고 하였으니, 반드시 우리 나라를 이웃 나라로 대우하지 않고 장차 신첩으로 여길 것이며 속국으로 여길 것으로, 상의하여 정탈한다는 등의 말에서 그들의 행태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차마 당당한 예의의 나라로서 개돼지 같은 오랑캐에게 머리를 숙이고 마침내 헤아릴 수 없는 욕을 당하여서 거듭 조종에게 수치를 끼친단 말입니까. 그리고 전하께서 비록 그 글을 불태우고 사신을 참하여 삼군(三軍)의 사기를 진작시키지는 못할지언정, 어찌 친히 적의 사신을 접견하시어 부도한 말을 듣는단 말입니까. 의당 엄준한 말로 배척하여 끊는 뜻을 분명히 보이고 참람하게 반역하는 단서를 통렬하게 끊어, 저 오랑캐로 하여금 우리 나라가 지키는 바에 대해 기강을 범하고 상도를 어지럽히는 일 로 범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여야 합니다. 그럴 경우 비록 나라가 망하더라도 천하 후세에 명분이 설 것입니다. 서달에 이르러서는, 천조에 대해 새로 반역한 죄가 있으니, 우리 나라와는 통신(通信)을 왕래할 의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히 오랑캐 사신을 따라 제멋대로 국경에 들어왔습니다. 신들의 뜻으로는, 빨리 구금하라 명하여 상경하지 못하도록 해서 엄히 끊는 뜻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조실록 32권, 인조 14년 2월 21일 병신 3번째기사 1636년 명 숭정(崇禎) 9년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가 함락되자, 기존에 척화론자였던 김류는 태도를 바꿔 "나가면 위태로울 확률이 반 보존될 확률이 반인데 계속 버티면 백이면 백 다 망할 겁니다." 라며 현실을 살피게 되었지만, (최명길도 "그래도 지금 결단을 내리면 만에 하나의 희망은 있을 것입니다." 라고 했다.) 대간들은 여전히 항복을 강하게 반대했다. 심지어 대사헌 김수현은 전쟁의 승패가 이미 가려진 상황에서도 하민(下民)들이 어육(魚肉)이 되더라도 임금께서 출성하시는 것을 불가하다고 할 정도였으니, 인조 정권의 척화신들이 얼마나 명분론에 젖어 현실을 돌아보지 않았는지는 긴 말이 필요없을 것이다.

학계 일각에서는, 조선이 청의 군사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신속을 거부하여 홍타이지전면적인 침략을 당하게 된 것이, 명-청 간의 전쟁에 대해 한인 왕조의 최종적 승리를 예상하여 그들의 보복을 피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26] 하지만 당시 국제정세를 고려하여 척화를 주장한 사료는 고작해야 1639년 논쟁 과정에서 의리론이 밀리자 김상헌이 명의 정벌을 거론한 것 외에는 전무하다는 점이나, 막연한 명의 보복 가능성보다는 눈앞으로 다가온 청의 침공이 훨씬 더 실재적인 위협이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낮다.[27] 그와 같은 주장을 담을 논저들은, 인조 정권에서 대청 강경론이 득세했으며 그것이 호란을 유발한 주 요인 중 하나였다는 통념이 마치 허구인 것처럼 주장하다가, 김상헌의 1639년 상소 등을 언급하는 대목에서는 돌변해서 왜 당시 조선 정부가 대청 강경론에 기울어져 청의 침입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정당화하는 등 논리적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기도 하다. 더구나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군신관계를 확정하는 대표적 절차인 봉표칭신의 예를 청 사신들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도망치는 상황까지 초래하면서 거부한 것은 전혀 실리 추구라 볼 수 없는 행태였다.

호란기 척화론이 현실주의적 발상에서 비롯되었다는 근거로 많이 예시되는 김상헌이 명의 보복 문제를 논한 척화 상소에조차 명분 우선주의는 여실히 드러나는 바다.

예로부터 죽지 않는 사람이 없고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는데, 죽고 망하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반역을 따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 어떤 사람이 ‘원수를 도와 제 부모를 친 사람이 있다.’고 아뢴다면, 전하께서는 반드시 유사(有司)에게 다스리도록 명하실 것이며, 그 사람이 아무리 좋은 말로 자신을 해명한다 할지라도 전하께서는 반드시 왕법(王法)을 시행하실 것이니, 이것은 천하의 공통된 도리입니다.


첫 번째 문단에서 강조한 부분에서 보이다시피 해당 상소는 '역(逆)=상국인 명나라를 배반'하지 않는 것을 국가의 존망보다 우선하고 있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저들의 세력이 한창 강하여 따르지 않으면 반드시 화가 있을 것이다.’고 하는데, 신은 명분과 의리야말로 지극히 중대한 것인 만큼 이를 범하면 반드시 재앙이 이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의리를 저버리고 끝내 망하는 것보다는 정도(正道)를 지키면서 하늘의 명을 기다리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명을 기다린다고 하는 것이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린다는 말은 아닙니다. 일이 순조로우면 백성들의 마음이 기쁘고 백성들의 마음이 기쁘면 근본이 공고해집니다.이렇게 나라를 지키고서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한 적은 아직 없습니다. 우리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獻大王)께서는 의리를 들어 회군(回軍)하여 2백 년의 공고한 기업(基業)을 세우셨고, 선조 소경 대왕(宣祖昭敬大王)께서는 지성으로 사대(事大)하여 임진 왜란 때에 구원해 준 은혜를 받으셨습니다. 지금 만일 의리를 버리고 은혜를 잊고서 차마 이 일을 한다면, 천하후세의 의론은 돌아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장차 어떻게 지하에 계신 선왕(先王)을 뵐 것이며 또 어떻게 신하로 하여금 국가에 충성을 다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김상헌이 거듭 강조하는 바와 같이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수준의 사고를 '냉철한 현실주의'라고 평하기도 어렵거니와, 아래 문단의 강조된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김상헌이 궁극적으로 호소한 것은 신하가 국가에 충성하는 것처럼, 소국은 대국을 지성으로 사대하는 것이 도리라는 도덕주의였다. 김상헌이 그 사이에 問罪之師를 운운하며 보복성 침략 가능성을 제기한 것은, 어디까지나 굳이 이해 득실을 따진다고 해도 척화가 맞는 길일 수 있음을 주장한 것이지, 그것을 유일하거나 근본적인 이유로 내세웠던 것이 아니다. 한 마디로 김상헌은 "국익상의 손해를 보더라도, 설령 나라가 망하더라도, 명분이 더 중요하니 척화가 옳다"고 강변한 당대의 흔한 척화신이었을 뿐이다. 단지 거기에다 "이해 득실을 따져도 척화가 오히려 나을 수도 있다"는 말을 보탰을 뿐이다.

게다가 위의 상소는 병자호란 발발 전이나 전쟁 당시에 제기된 것이 아니라, 병자호란 패전 후에 청의 강요에 따라 명을 정벌하는 군사를 파병하는 것에 반대하는 상소임을 감안해야 한다. 청에 대한 화친을 반대[斥和]하는 것과는 맥락이 달랐던 것이다. 또한 당시는 정묘호란에 이어 병자호란에 참패한 이후였으므로, 청에 맞서 싸울 것을 주장했던 척화신으로서는 명분론만 고집할 상황이 아니었고, 자신들의 주장=척화론에 현실주의적인 면도 있었다는 식의 변명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이는 호란기의 척화론이 궁극적으로 국가의 보전을 위한 것이었음을 뒷받침하는 논거로는 타당하지 않다.


4.2. 조선의 친명배금 노선 옹호(불가피)론[편집]


물론 1620년대 이후 1644년에 이르는 명ㆍ청 교체의 전야에, 조선사회의 지식인들이 임진왜란 때 형성된 '재조(再造)'의 기억을 떠올리며 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데에는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화이론(華夷論)의 논리가 크게 작용하고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집착의 이면에는 14세기 말 이래 200년 동안 이념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동아시아의 중심 국가로서 군림하던 명의 위세가 소멸하는 상황을 상상하기 어려웠던 시대적 정황이 작용하고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요컨대 당시 조선 지식인들의 명에 대한 미련에는 명에 대한 '기대감'과 '두려움'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계획을 도모하는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예의(禮義)를 지킬 상황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니, 신 역시 예의에 의거하여 따질 겨를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해(利害)로서 논한다 하더라도, 힘센 이웃의 한나절 강포함만을 두려워하여 천자의 군대를 두려워하지 않음은 원대한 계책이 아닙니다. 산해관(山海關) 아래 줄지어 주둔한 군사들과 바다 위 군함에 올라탄 수졸들은 비록 오랑캐를 쓸어내고 요동 땅을 회복하기에는 부족할지는 몰라도 우리나라의 잘못을 벌하기에는 충분합니다. 만약 우리나라 사람들이 호랑이 앞의 창귀(倀鬼)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그 죄를 물으려는 군사가 천둥번개처럼 달려와 배를 띄운 지 하루 만에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 당도할 것이니, 두려움의 대상이 오직 심양에만 있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1639년 시점에서 작성된 이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조선이 만약 청의 편에 완전히 붙었다가 명이 만에 하나라도 세력을 회복할 경우 그 보복을 감당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는 '친명 사대주의자'의 한낱 공허한 외침만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지금 시점에서 보더라도 적어도 강희제 즉위 이전까지, 하다못해 입관(入關) 이전까지 중원의 정세는 대단히 유동적이었으며 그 향배를 쉽게 장담하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명의 세력 회복을 바라며, 혹은 두려워하며 임진왜란의 기억을 부여잡고 있던 명ㆍ청 교체기 조선 지식인들의 사유를 현실과 완전히 유리된 몽상적 관념 정도로 치부하는 것은 어폐가 있을 수 있다. 그 기억 속에는 중화 문명의 담지자인 명에 대한 존숭과 더불어 명의 현실적 위세에 대한 기대감과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우경섭,『조선중화주의의 성립과 동아시아』(유니스토리, 2013). (pp.86~89) 출처


실제로 병자호란에 이르기까지의 인조 정권의 외교 정책은 분명 명나라와 청나라 그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이었다. 인조 집권 초기부터 명나라는 조선이 다른 마음을 품었다며 의심을 나타내고 있었으며, 1629년에는 조선이 "왜노와 통혼하고 노적에게 정성스럽게 대한다(媾倭款奴)"는 말이 그들 조정에서 나올 정도로 조선을 의심하는 태도가 계속되었다. 당시 조선의 행보에 만족하지 못한 것은 후금도 마찬가지였다.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결정적인 도움을 주지 않는 조선에 대해 후금은 불만을 서서히 키워가고 있었다. 국경 무역에 불만을 품은 후금 조정은, 1631년 만약 충분한 소와 말을 보내지 않는다면 평양과 한양까지 진격하겠다며 조선을 협박하기도 했다. 하지만 명나라와 청나라 간의 전쟁의 결말을 알 수 없었던 조선은 두 나라 가운데 어느 한 편에 방책을 취할 수 없었다. 결국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의 전쟁의 결과를 미리 알 수 없는 한, 조선은 어느 쪽도 만족시킬 수 없는 정책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명나라의 쇠락에도 불구하고 명나라와 청나라의 전쟁이 끝까지 예측을 불허했던 점은 그 시대와 상황의 맥락에서 보면 오히려 당연하다.

만약 이자성이 산해관을 지키고 있던 지휘관인 오삼계(吳三桂)를 자기 편으로 회유하는 데 성공했더라면, 어쩌면 한인의 중원 지배가 그대로 유지됨과 동시에 만주인들의 중원 진공 또한 훨씬 더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맥락을 고려해 보면, 점차 청나라의 우세가 나타나고 있기는 했지만 청나라보다 최소 수십여 배에 달하는 인구와 거대한 영토를 지니고 있던 명나라를 버리고 청나라에 신속하는 것이 조선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큰 모험이었을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조선이 그 보복을 피하고자 청나라를 '황제의 나라'로 먼저 인정한 뒤, 명나라와 청나라 간의 전쟁이 명나라 또는 그 뒤를 계승한 새로운 한인 왕조의 승리로 끝났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임진왜란 당시 파병을 해준 '은혜를 배신'한 번국(藩國)에 대한 보복의 당위성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그들 조정에 없었을 것이다. 분명 병자호란을 능가하는 무서운 보복전이 뒤따랐을 것이다.

조일수(Ilsoo David Cho),「인조의 대중국 외교에 대한 비판적 고찰」(『역사비평』121, 2017). (pp.362~364) 출처


일제강점기때 부터 지금까지의 병자호란에 대한 대표적인 시각은 "맹목적인 대명 사대주의가 시대변화를 읽지 못하고 참사를 불렀다"는 것이었지만, 2000년대 들어 인조정권의 친명배금 및 척화론을 옹호하는 주장이나 실제 인조반정 후 후금(청의 전신)에 대한 외교정책은 광해군대의 외교와 다를 바 없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학설들이 학계내에서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런 주장들을 펴는 학자들로는 대표적으로 한림대의 오수창 교수나 인하대의 우경섭 교수 그리고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의 조일수 선임연구원 등이 있다. 그리고 역덕 커뮤니티들에서도 조선의 친명배금을 옹호하는 입장이 많다.

즉, 기본적으로 명을 편드는 조선의 근본적인 사고 원인은 명에 대한 기대감과 두려움이 가장 큰 이유였으며, 사대의 예로 표현되는 행위들의 근본 동력 또한 명의 국력이 조선을 충분히 위협 할 수 있다는 사고 방식이 근본적으로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에 작동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인조는 1636년 2월 청을 황제국으로 인정하라는 요청에 대해 '대청국황제(大淸國皇帝)'라 부르진 못하겠으나 '청국한(淸國汗)'이라 부를 수는 있다는 제안을 내놓는 등 청 측과 끊임없이 타협을 시도했다. 또 한가지 주의해야 하는 점은 지금 시점에야 청의 승리가 명백해 보이지만, 당시 조선인들로서는 명과 청 양국 간 승패의 향방을 쉽사리 짐작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명은 몽골과의 대결에서 50만 대군이 몰살당하고 황제가 포로로 잡히고도 살아남은 국가였으며, 청과 대결하던 때도 망하는 그 순간까지 실제 국력은 명이 더 우세한 상황이었다. 청은 자주 명에게 패배했고, 조선에다가 ‘명과 화해할 수 있게 다리를 놔달라’는 요청을 하곤 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명이 청을 물리친 뒤 조선을 배신자로 규정한다면 어떤 참사가 벌어질 지 알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인조로서도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즉, 인조도 줄타기 하느라 진땀 흘려야 했다는 것이다. “병자호란 치욕은 인조의 사대주의 때문? 오해다”

또한 당시 청에 대한 강경론에는 명에 대한 사대의 예와는 별개로 청측의 횡포에 대한 조선측 스스로의 청에 대한 강한 적개심이 함께 작용하고 있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실제로 청은 정묘호란 때 맺은 ‘형제의 맹약’을 ‘군신(君臣)의 의(義)’로 개약(改約)하자고 요구해왔을 뿐만 아니라, 황금·백금 10,000냥, 전마(戰馬) 3,000필 등 종전보다 무리한 세폐(歲幣)와 더불어 정병(精兵) 30,000명까지 요구해오는 등 조선측에 무리한 요구들을 계속해왔다. 심지어 충분한 소와 말을 보내지 않는다면 평양한양까지 진격하겠다며 조선을 협박하기도 하였고 장차 명나라 정벌을 염두에 두며 이와 함께 후금의 오랜 숙원 중에 하나인 수군 함선을 보내라는 요구도 하는 등 반복적인 무리한 요구들로 조선내의 반청감정을 계속 고조시켰다.

"요즈음 오랑캐 사신 용골대 등이 가지고 온 거만한 글에 존호(尊號)를 확정했다고 칭했는데, 이 말이 어찌하여 이르게 되었습니까. 신들은 적이 통곡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정묘년의 난리에 참혹하게 유린당하고 기미(覊縻)의 거조가 궁여지책에서 나와 생민(生民)의 고혈을 다 기울여 사신에게 예물을 바치면서 비굴한 말로 애걸한 것이 10년이나 되었습니다. 저들이 이미 위호(僞號)를 참람하게 칭하려고 하였으니, 반드시 우리 나라를 이웃 나라로 대우하지 않고 장차 신첩으로 여길 것이며 속국으로 여길 것으로, 상의하여 정탈한다는 등의 말에서 그들의 행태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차마 당당한 예의의 나라로서 개돼지 같은 오랑캐에게 머리를 숙이고 마침내 헤아릴 수 없는 욕을 당하여서 거듭 조종에게 수치를 끼친단 말입니까. 그리고 전하께서 비록 그 글을 불태우고 사신을 참하여 삼군(三軍)의 사기를 진작시키지는 못할지언정, 어찌 친히 적의 사신을 접견하시어 부도한 말을 듣는단 말입니까. 의당 엄준한 말로 배척하여 끊는 뜻을 분명히 보이고 참람하게 반역하는 단서를 통렬하게 끊어, 저 오랑캐로 하여금 우리 나라가 지키는 바에 대해 기강을 범하고 상도를 어지럽히는 일 로 범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여야 합니다. 그럴 경우 비록 나라가 망하더라도 천하 후세에 명분이 설 것입니다. 서달에 이르러서는, 천조에 대해 새로 반역한 죄가 있으니, 우리 나라와는 통신(通信)을 왕래할 의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히 오랑캐 사신을 따라 제멋대로 국경에 들어왔습니다. 신들의 뜻으로는, 빨리 구금하라 명하여 상경하지 못하도록 해서 엄히 끊는 뜻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조실록 32권, 인조 14년 2월 21일 병신 3번째기사 1636년 명 숭정(崇禎) 9년


이러한 후금의 지속적인 파약(破約) 행위로 조선의 여론은 차라리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치자는 척화배금(斥和排金)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격증하게되었는데 위의 홍문관의 차자만 보아도 단순히 명에 대한 사대의 예 그 자체 보다는 청이 정묘호란 당시에 조선을 유린하고 조선을 추후에라도 속국으로 만들것이며 그렇게 능욕을 당하게 될 바에는 차라리 나라가 망하더라도 당당하게 싸우는게 훨씬 더 옳다라는 인식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막연한 명의 보복 가능성보다는 눈앞으로 다가온 청의 침공이 훨씬 더 실재적인 위협이었다는 점에서 위와 같은 주장들이 설득력이 낮다라는 주장[28]도 일부 있지만 이는 조선이 진정 우려한것은 위의 주장들과 마찬가지로 최종적인 승리가 어느쪽으로 결론날지 알 수가 없었다는 점을 간과한 지적이다. 즉, 일시적으로 조선이 청에 굴복한다고 해도 최종적으로 명이 청을 이길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29][30] 위에서는 계속해서 척화신들의 논리에 현실주의적 논거보다는 명분주의가 우선한다고 지적하지만, 반대로 그 '현실적'이었다던 주화신의 대표주자 최명길조차도 기껏 병자호란을 화의로 이끌어놓고는 명과의 연락과 공조를 이어가려 노력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사실 이 재조지은을 강조하는 명분론을 마냥 현실과 동떨어졌다고 치부할 수 없는 것은, 그래서 다시 누군가에게 침공을 받으면 어디에 도와달라고 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전쟁이 터지기 전 빠르게 청에게 붙는다고 한들, 그럼 청은 이 수백년의 상국, 그것도 조선 말마따나 멸망의 위기에서 구해주기까지 한 맹방을 하루아침에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편을 바꾼 번국을 위에 어느정도로 명운을 걸고 챙겨줄 것인가?[31] 혹은 설령 편을 바꿔탄다 한들 당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어제의 동맹이 오늘 뒤통수를 치며 아예 한반도를 완전 병탄하겠다고 달려들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런 점에서 명나라는 어찌됐건 정말로 수십만 대군을 퍼부어가며 조선을 지켜주었고, 또 그런 투사능력이 있음에도 조선을 병탄할 생각이 추호도 없음을 완벽하게 인증해 준, 한국사에서 몇 안되는 믿을 수 있는 중화통일왕조 우방이었고[32] 이를 상실한다는 것은 조선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이후의 역사를 익히 아는 현대인들 입장에서야 에도 막부는 조선에 우호적이었고 청 역시 조선을 완전 병합할 생각도 없는데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속 편하게 손가락질 할 수 있지만, 그거야 2세기동안 그럴 일 없었던 게 다행이지 국가 지도층이라면 당연히 이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 문제가 되는 건 이런 포지션 변화가 국내 정치에 가져올 파장이다. 사실 '명분'이나 '의리'라는 건 달리 말하자면 '질서'라고 바꿔 써도 무방하며, 중원의 왕조교체, 즉 질서의 재편은 당연히 국외에서만으로 끝나지 않고 국내에도 영향을 미친다. 국제정치가 다원화된 현대에도 주요 강대국에 대한 포지션 설정이 국내 정치에서의 입지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는데, 천조국 초1극의 국제정치 체제였던 당대에는 이 문제가 더욱 심각했다. 길게 설명할 것 없이 조선이란 나라가 어떤 시기에, 누구에 의해, 어떻게 출발했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보면 명나라 버리고 편을 갈아탄다, 그것도 중화왕조를 버리고 북방제국으로 갈아타자는 말을 쉽게 할 수가 없다.[33] 이제 다시 명청교체의 흐름을 조선이 나서서 인정한다면, 성리학적인 상하관계에 따라서 번국이 천조를 고를 수 있는데 신하는 군주를 고르지 못하란 법 있는가? 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고,[34] 여기서 좀 더 올라가자면 40여년 전 일을 두고 "그래서 그 때 그냥 일본애들 말대로 명나라 치게 길 내어주고 편 바꿨어야 했다는 얘기냐?"라는 소리까지 나온다면 뭐 답이 없다. 즉 '나라가 망해도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소리는 달리 말하자면 '백날 잔머리 굴려봤자 어차피 명 주도의 질서에서 이탈하는 순간 이 나라는 망한다'는 것이고, 현대인들 보기에는 그깟 왕조교체가 뭐 대수라고 싶겠지만 그런 대변혁은 당연히 수백 수천의 피를 흩뿌리게 된다.[35] 그렇게 조선이 청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고도 멸망을 면한 것은 청의 여러 한계와 함께 성리학이라는 동아시아 정치철학 끝판왕을 대체할 새로운 이론과 이에 기반한 신진 지배층이 형성되지 않았던 덕이고,[36] 이건 그냥 조선에게 악운이 따라줬다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요약하면, 이러한 척화론을 옹호하는 주장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크나큰 은혜를 입었던 동시에 그와 별개로 명나라와 청나라 간 전쟁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던 당시 조선이 처한 지정학적ㆍ역사적 맥락을 좀 더 거시적인 시각으로 살펴보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즉, 당시에는 명청대전기의 결과가 어떻게 결말이 날지 확실하게 예측 할 수 없었으므로 그 당시 기준으로는 명나라를 편드는것 또한 합리적인 외교적 선택이었다는 것이다.[37]

조선후기 정치사를 전공한 오수창 한림대 교수는 최근 출간된 반연간 학술교양지인 ‘한국사시민강좌’(일조각) 제36집에 기고한 ‘청(淸)과의 외교실상과 병자호란’이란 글에서 “인조반정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은 군사정권의 극복이 우리 사회의 정치적 과제였던 1960년대에서 1990년대 초 지식인들의 현실비판 의식과 연결돼 나온 것”이라며 “한국 현대사에 대한 비판의식을 인조반정이나 그 이후의 서인정권에 그대로 투영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무엇보다 역사적 사실에 의해서도 뒷받침되지 못한다”고 비판하고 나섰다. 전쟁의 본질은 청이 기존맹약을 일방적으로 깨고 조선을 향해 자기 나라의 신하가 되라고 강요하던 끝에, 일관되게 형제관계를 유지하려 한 조선을 침략한 데 있다는 것이 오 교수의 설명이다.

(중략...)

이덕일씨는 병자호란을 ‘쿠데타 정권의 허황한 외교정책 때문에 빚어진 고통’으로 정의하고 있는데, 최근 연구에서 실제 인조반정 후 후금(청의 전신)에 대한 외교정책은 광해군대의 외교와 다를 바 없었다는 사실이 이미 조목조목 밝혀져 있으며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 당시 화친정책의 유지를 강력히 주창했던 최명길과 장유, 이귀, 김류, 홍서봉 등이 모두 반정의 핵심인물이었다는 것이 오 교수의 지적이다.

-

- “병자호란 조선이 자초한 전쟁 아니다” (오수창 한림대 교수)


다른 한편으로는 인조반정과 인조대의 외교정책을 현실비판 의식과 연관해서 생각하는 태도가 본질을 왜곡한다는 주장 또한 존재한다. 이에 따르면 병자호란의 본질이란 청이 기존맹약을 일방적으로 깨고 조선을 향해 자기 나라의 신하가 되라고 강요하던 끝에, 일관되게 형제관계를 유지하려 한 조선을 침략했다는 것이 진짜 전쟁의 본질이며 한국 현대사에 대한 비판의식을 인조반정이나 그 이후의 서인정권에 그대로 투영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무엇보다 역사적 사실에 의해서도 뒷받침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덕일 등은 병자호란에 대해 ‘쿠데타 정권의 허황한 외교정책 때문에 빚어진 고통’으로 정의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오수창 교수의 주장이다. 이러한 점에서 병자호란을 해석하고 연구할때에는 현대의 시각이 아닌 그 당시 사람들의 시각에서 살펴보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다.

임용한 박사가 말하는 양안 관계와 병자호란 이야기
[궁극의 인터뷰] 중립이란 힘이 있는자의 특권이다! feat.임용한박사


5. 정묘호란 이후부터 병자호란 이전까지의 양국 관계의 상황[편집]


조선은 정묘호란 이후 후금과 명목상 형제 관계를 맺고 '형제지맹(정묘맹약)'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이를 달가워 하지 않았고, 후금 또한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결정적인 도움을 주지 않는 조선에 대해 불만을 서서히 키워가고 있었다. 이후 일련의 사건 전개는 조선과 후금이 원했는지의 여부와는 별개로 양국간의 관계를 최악으로 몰아가게 된다.


5.1. 정묘맹약(형제지맹) 이후부터 존호 문제 이전까지의 상황[편집]


1627년 후금의 조선에 대한 1차 침입 때 조선은 무방비 상태로 후금에 당함으로써 후금에 대해 형제의 맹약을 맺음에 따라 두 나라의 관계는 그것으로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이후의 양국관계는 여러 사건들이 겹치고 상호작용을 하면서 악화일로를 걷게된다. 맨 처음 갈등이 발생한 부분은 조선과 후금 사이의 곡물 무역에 관한 문제였다.

"그러나 1627년 만주 국가는 '경제적 재앙'의 문턱에 있었다. 1626년 처음으로 주요 전투에서 명의 군대에 패배한 것은 국가의 취약성을 심각하게 드러냈다. 한계에 달한 만주 경제는 늘어나는 인구를 가까스로 부양할 수 있을 뿐이어서, 군사 원정에 나선 대군을 보급하자면 그 군대가 승리 후 전리품을 모아야 했다."

"1627년의 식량 위기는 가장 격심했는데, 곡물값이 만주 신(1.8석)당 여덟 냥, 즉 1623년의 여덞 배로 올랐고, 사람을 잡아먹고 강도 질을 한다는 흉문이 돌았다. 새로 항복한 백성들에게 줄 양식이 없었고 곡식 창고는 비워 있었다. 게다가 새로 이주해온 한인들에게 줄 땅도 없었다. 1635년과 1637년에 또 식량 위기가 닥쳤다. 군대의 보급 부족은 만주의 군사력을 심각하게 약화시켰다. 말은 너무 지치고 약해져 적을 추격하지 못했다."

"랴오시에서 농업 생산을 늘리려는 시도는 실패했고, 부유한 지주들에게 가난한 이웃들에게 식량을 나눠주라고 권고해도 대체로 우이독경이었으며, 만주족은 그들이 떨어져 나갈까 봐 저가에 곡식을 팔라고 강제할 수도 없었다. 조선은 다시 한번 매력적인 목표가 되었다."

-

─ 피터 퍼듀, 중국의 서진 China Marches West: The Qing Conquest of Centural Eurasia 中 출처


정묘맹약(형제지맹)이 맺어진 1627년 후금은 식량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후금이 몽골을 평정하고 영역이 넓어짐에 따라 영토와 인구의 유지를 위한 물자의 수급 문제가 훨씬 더 심화되었던 것이다. 후금은 이때부터 이런 재정적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서 조선에 식량 수출을 강하게 요구하게 된다. 1628년 후금이 조선에 보낸 국서(<청태종실록 권 3 천총 원년 12월 참조>)에 의하면 몽골 등지에서 귀부하는 사람이 많아 식량 수급에 어려움이 많음을 고백하고 조선에 곡물 무역에 협조해 달라고 사실상 간청하고 있다. 이후 조선은 기미책을 쓰자는 데 의견이 모아져 이들과의 곡물 무역을 허락하게 되었다.

그렇게 1628년(인조 6) 이후 조선은 중강(中江)과 회령(會寧)에서의 무역을 통해 예폐(禮幣) 외에도 약간의 필수품을 청측에 공급해 주었다. 그러나 후금은 당초의 맹약을 위반하고 식량을 강청하고 병선(兵船)을 요구하는 등 추가적인 온갖 압박을 가해왔다. 그뿐 아니라 후금군이 압록강을 건너 변경 민가에 침입해 약탈을 자행하므로 변방의 백성과 변방 수장(守將)들의 괴로움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후금의 파약(破約) 행위로 조선의 여론은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치자는 척화배금(斥和排金)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격증하게 되었다. 출처

결국 양국 간의 실제 개시(開市) 과정에서 정상적인 무역을 통한 물자 수급이 불가능함이 바로 나타났다. 당시 후금 상인들의 횡포로 인하여 조선 상인들은 이들과의 무역 거래를 거부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후금과 무역을 하려는 조선인들이 줄어들었다. 당연히 무역은 실패하고 후금이 기대한 조선과의 곡물 무역을 통한 식량 수급의 계획 또한 실패하게 된다.

이런 상황속에서 청은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결정적인 도움을 주지 않는 조선에 대해 불만을 서서히 키워나가게 된다. 이후 국경 무역에 불만을 품은 후금 조정은, 1631년 만약 충분한 소와 말을 보내지 않는다면 평양과 한양까지 진격하겠다며 조선을 협박하기도 하였고[38] 결국 1631년부터는 후금은 조선에 세폐의 양을 더욱 늘릴 것을 요구하게 된다. 또한 장차 명나라 정벌을 염두에 두며 이와 함께 후금의 오랜 숙원 중에 하나인 수군 함선을 보내라는 요구도 시작하게 된다.

심지어 후금은 만주의 대부분을 석권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 부근까지 공격하면서 정묘호란 때 맺은 ‘형제의 맹약’을 ‘군신(君臣)의 의(義)’로 개약(改約)하자고 요청을 해올 뿐 아니라, 황금·백금 10,000냥, 전마(戰馬) 3,000필 등 종전보다 무리한 세폐(歲幣)와 정병(精兵) 30,000명까지 요구해왔다. 조선에서는 이러한 그들의 요구에 응하려 하지 않고 이에 대한 반발로 화의 조약을 무시하고 후금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려는 움직임까지 일어나기 시작했다. 결국 이런 긴장 관계는 1633년에 이르면 크게 고조되며 양국의 외교가 파탄에 이르게 된다. 그와 함께 후금 측의 기근 상황은 더욱 심각해져 이를 타개할 목적으로 조선을 강하게 압박하게 되었고, 조선내에서도 이에 대한 반발들이 계속 대두하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양국간의 곡물 무역이 완전히 실패한 이후 새로운 파국의 시발점은 모문룡의 부하 장군들이었던 공유덕과 경중명의 후금 투항 사건이었다. 이들은 1629년의 모문룡 처형 이후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렸으나, 여전히 강대한 세력(특히 해군)을 보유했고, 이를 눈여겨본 손원화 제독의 관리하에 산동의 등주 지역에 배치된다. 그러나, 요동의 대릉하 전투 지원을 위해 이동 중, 병사들의 종군 거부 및 이에 따른 반란으로 졸지에 반란군 두목으로 추대된 이들은 결국 산동 지방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이어진 명나라 정부군의 진압을 피해 바다로 탈출한 이들은 결국 파격적인 조건에 휘하의 14,000명의 병력 및 185척의 전함과 함께 압록강변을 통해 후금으로 귀순한다. (1633년 초)

이때 투항한 명나라 수군은 단지 수군 함선뿐만 아니라 과거 누르하치를 죽게 한 홍이포를 가져왔으며 이로써 청나라의 전력은 급성장하게 됐다. 이는 명나라와 조선의 입장에서 큰 위협이 되었는데, 명나라의 경우, 이제 청나라가 산해관만이 아닌 수군을 통해 텐진과 산동을 위협할 수 있게 된 것이고, 조선의 경우, 과거와 같이 수군이 없는 후금을 상대로 강화도로 피신하여 장기 농성하는 전략을 구사하기가 불가능해졌던 것이다.

이때, 조선은 명나라로부터는 공유덕과 경중명을 토벌하기 위해 압록강으로 온 토벌군의 식량을, 후금으로부터는 공유덕과 경중명의 식량을 공급하라는 양립이 불가능한 요구를 받게 되고, 곧 이어진 명나라의 인조의 부모 추봉(追封) 승인으로 인해 명군의 식량만 공급하였다. 이는 와르카(Warka) 송환, 선박 및 병력 지원 문제로 대립을 이어가는 가운데 후금은 조선 사신의 물자를 그대로 돌려보내는 등 불만을 표출했고, 그해 6월 의주의 축성 소식이 전해지면서 홍 타이지는 명, 차하르와 함께 조선을 정벌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다행히 후금 지도부는 조선이 약소한 점을 들어 정묘맹약의 비준수 행위를 성토하면서도 명 정벌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후금은 1633년 후반부터 1635년에 걸쳐 화북 및 차하르(Caqar)의 공격을 추진한다. 이 기간 동안 조선은 청나라의 침공에 대비해 국방력을 강화하려 했으나, 내부 사정상 큰 결실은 맺지 못한다. 우선 1634년 6월 명으로부터 환관 노유녕(盧維寧)이 세자 책봉례(冊封禮)를 주재하기 위해 조선을 방문한다. 불행히도 그는 책봉을 빌미로 조선으로부터 얼마든지 뇌물 상납을 요구할 수 있는 자였고, 그를 수해한 상인들 중 상당수 역시 조선 상인들에게 소위 불공정 거래를 강요하여 한몫 단단히 챙길 생각으로 조선에 온 자들이었다. 결국 조선은 이들을 상대하면서 10만 냥의 은을 소모하게 된다.

그동안 명의 승인으로 부모의 추봉(追封) 및 세자 책봉까지 마친 인조는 본인의 숙원 사업이었던 부친의 신주의 종묘 이전(부묘)를 추진한다. 하지만 이는 신료들의 격렬한 반대를 불러일으켰고 이로 인한 국왕과 신료들 간의 극한 대립은 1635년 상반기까지 계속된다. 또한 여기에 1635년 3월 선조의 능이 파손되는 사고가 발생하고, 이에 대한 정치적 책임 공방이 수개월간 지속된다. 유교 국가였던 조선 나름으로선 중요한 문제였겠지만 후금이 확장과 위협이 차곡차곡 커지는 동안 이런 국정놀음이나 계속되면서 조선은 국방력을 강화할 수 있는 시기를 놓치고 만다.

정리(情理)로 논한다면, 왕은 ‘형(兄)인 한(汗)이 하늘의 돌보심을 받아 출병할 때마다 적들이 흩어져 달아나고 이르는 곳마다 이기지 못한 적이 없구나.’ 하고 여겨야 할 것이오. 공(孔)·경(耿)·상(尙) 세 장수가 바다를 건너 귀부해 왔고, 또 동북 바닷가의 국가도 항복하여 병사 만여 인이 늘었으며, 몽고 삽한(揷漢; 차하르)의 한(汗)의 태후(太后)가 태자(太子) 공아라(空俄羅; 콩오르) 및 온 나라의 병사와 백성을 모두 이끌고 귀의해 왔소. 그래서 서북 천하의 반을 모아 하나로 통일하여 위력이 더해 날로 융성하니, 바야흐로 경사를 기뻐하고 축하하여 극진히 공경해야 할 것이오. ……"라고 하였다. 또 별지(別紙)에, …… "왕은 명나라의 국운(國運)이 쇠퇴하지 않고 길이 바뀌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오? 나는 명나라가 기울어 무너질 때가 이르렀다고 생각하오. 단지 보이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속이고 임금은 신하를 의심하며, 뇌물이 공공연하게 왕래하고 참소와 간사함이 성하며, 도적이 봉기하여 여기저기에서 소요가 일고 있으나 숭정제가 탕평(蕩平)하지 못하고 매번 군대가 패하고 장수를 잃고 있소. 우리 병사가 또 이 틈을 타서 서쪽으로 가고 있으니, 이는 모두 하늘이 도와서 명나라를 뒤엎고 있는 것이오. "

《인조실록》 31권, 숭정 8년 12월 30일 4번째 기사


그러는 사이, 홍타이지는 착실하게 팽창하여 화북의 인축을 노획하고 1635년 8월 경에는 차하르 잔류 세력들을 복속시키는데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 과거 '대원전국옥새'까지 획득하는 행운이 겹치고, 이는 홍타이지 및 후금 사람들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킨다. 이에 더 자신만만해진 홍타이지는 12월경 명의 쇠퇴 조짐과 자신의 부상을 강조하면서 자신을 공경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의 국서를 조선에 발송한다. 이는 조선에게 앞으로 후금의 정책에 거스르는 행위를 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그렇게 홍 타이지는 존호를 받았음을 형제국인 조선에 알려 조선의 동의를 구하고자 자신의 친서와 후금 8 호쇼이 버이러, 17기 암반, 몽고 49 버이러의 명의로 서신을 만들어 용골대를 1636년 2월 조선에 파견하게 된다.


5.2. 양국 관계의 파탄(존호 문제)[편집]


1636년 2월 잉굴다이, 마푸타(Mafuta)를 필두로 한 후금의 사절단이 인조의 왕후인 인열왕후의 장례식 참석차 조선을 방문한다. 그러나, 앞서 복속한 몽골 왕공 인사 77명이 사절단에 포함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의 실제 목적은 그간 후금의 세력 확장 성과를 조선에 과시하고 곧 있을 홍타이지칭제건원에 대한 조선의 반응을 떠 보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 이후 부터였는데 용골대 일행은 2월 23일에 한양에 들어왔지만 이미 의주부윤의 치계가 2월 16일에 도착한 상황이었다. 당시 사절단은 인조에게 홍타이지의 공덕을 칭송하고, 후금의 세력은 확장일로에 있으며, 아우인 조선국왕이 홍타이지를 황제로 인정하라는, 즉, 군신관계를 수립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명 황제만을 황제로 인정하는 조선을 충격에 빠뜨리게 되며, 후금에 대한 매우 적대적인 여론이 조선 내에 형성되게 된다.

이후 조선의 조정에서는 일대 격론이 벌어지게 되는데 이에 대한 당시 조정 회의의 의견은 개돼지 같은 오랑캐가 감히 참칭하며 조선을 신하로 두고자 한다며 당장 용골대 등을 포박하자는 비분에 찬 의견이 대다수였다. 당시 비변사의 대신들은 홍 타이지의 친서가 참칭하고 조선을 '너희 나라'라고 깔보며 협박하고 패만스럽다는 이유로 용골대가 머무는 곳에 몰래 두고 왔고 용골대에게 서신을 보내 후금이 조선을 형제의 예로 보지 않고 노예와 같이 보고 있으니 차마 볼 수가 없고 다시 홍 타이지에게 되돌려 주라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후금의 요구(‘군신(君臣)의 의(義)’ 강요)에 조선의 분노는 완전히 폭발하게 되었고 조정 신하들 가운데 척화(斥和)를 극간(極諫)하는 이가 많아 인조도 이에 동조해 사신의 접견을 거절하고 국서(國書)를 받지 않았으며 후금 사신을 감시하게 했다. 출처1 출처2

결국 예상 이상의 조선의 강경한 반응에, 사정을 전혀 모르던 칭기스 왕공들이 "조선과 후금은 형제의 나라이니 후금이 황제가 된다면 당연히 기뻐할 줄 알았는데, 어찌 이런 반응을 보이느냐?"고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또한, 성균관 유생들이 반발하며 후금 사신들의 목을 베라고 촉구했고, 사절의 동선 근처에 조선 군인들이 무기를 든 채 돌아다니는 등 사신들이 생명의 위협마저 느낄만한 상황이 추가로 연출된다. 게다가 사신이 떠날 때 백성들이 돌팔매로 응수하고 인조가 하달한 다음과 같은 선전교서가 평양 부근에서 입수된 것이 사태를 크게 키웠다.

요즈음 이 오랑캐가 더욱 창궐하여 감히 참람된 칭호를 가지고 의논한다고 핑계를 대면서 갑자기 글을 가지고 나왔다. 이것이 어찌 우리 나라 군신이 차마 들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 이에 강약과 존망의 형세를 헤아리지 않고 한결같이 정의로 결단을 내려 그 글을 물리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 충의로운 선비는 각기 있는 책략을 다하고 용감한 사람은 종군을 자원하여 다 함께 어려운 난국을 구제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라.

《인조실록》 32권, 숭정 9년 3월 1일 2번째 기사


공교롭게도 이렇게 도망치던 도중에 조선 조정에서 평안도관찰사에 내린 유문(諭文)을 빼앗아 본국인 후금으로 가져가게 된 것이 또 다시 후금을 크게 자극하게 되었는데 홍 타이지는 조선이 형제의 맹세를 깨트렸다고 대노하였다. 실제로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는 조선이 정묘맹약을 저버렸다는 이유를 조선침략의 주요 명분으로 선전하였다.[39] 병자호란의 가장 큰 이유<형제지맹 맹약 파기>

1636년 4월 11일, 결국 홍타이지는 관온인성황제(貫溫仁聖皇帝, Gosin Onco Hūwaliasun Enduringge Han)와 숭덕(崇德, wesihun erdemungge)이라는 새로운 존호 및 연호와 함께 국호를 대청(大淸, Daicing)으로 고친다. 즉위식에 조선에서 온 회답사와 춘신사도 있었는데, 이들은 홍타이지에게 삼궤구고두례를 행하는 것을 거부하고, 다음 날의 행사에서도 성찬을 엎는 등 격앙된 반응을 보인다. 그러자 격분한 청 신료들은 그들을 처형하라고 주장했으나 홍타이지의 만류로 목숨은 부지하였으나, 대신 홍타이지가 조선에게 보내는 국서를 받아서 귀국해야 했다. 이 국서에서 홍타이지는 대청황제를 자칭하고 조선을 또 다시 너희 나라[爾國]라고 하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간 조선과 청의 갈등(사르후 전투 참전, 공유덕, 경중명의 귀순 방해 등)을 꾸짖음과 동시에 조선의 왕자를 볼모로 보내 앞으로의 개선 의지를 표명하지 않으면 "화호의 도리를 깨트리고 전쟁의 단서를 일으킨" 조선을 침공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국서는 통원보에 버려졌으나, 그 내용을 사신들이 옮겨왔기에 국서의 내용을 확인한 조선에서는 오히려 크게 반발하였고 이를 즉시 찢어버리지 않고 받아온 사신들을 처벌하자는 논의가 일어나는 등 더욱 대청강경론이 힘을 얻게 된다. 이에 2달 뒤인 6월에는 급기야 양국간의 관계 파탄의 책임을 청의 탓으로 돌리는 격문을 청나라로 발송하고자 하기도 했다. 이 국서는 단순히 책임만 묻는게 아니라 도요토미 일가의 사례를 들어가며 청나라를 사실상 질타하는 문서였다.


5.3. 목소리만 컸던 주전론[편집]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이제 조선은 전쟁을 준비해야만 했다. 그러나 싸우자는 목소리에 비해 정작 실질적인 대비책을 제시하는 정온, 윤황[40], 최명길 등의 제안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게 문제였다.[41] 정온은 인조에게 모든 정예병력을 압록강으로 차출하고, 인조가 개성까지 행차해 군을 독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청과 전쟁을 하더라도 전장을 압록강과 청천강 사이로 국한해야 한다는 논리였다.[42]놀랍게도 성향이 달랐던 최명길도 전쟁을 꼭 해야 된다면 정온의 주장이 합당하다고 찬성하기까지 했다.

이후로도 지휘관들을 교체하는 등 준전시 체제로 돌입하지만, 대 후금 외교의 베테랑이던 박로가 '지금 우리에게는 후금을 막을 힘이 없어요.[43] 지금이라도 미안하다 하고 받아들입시다.' 하는 요지로 상소를 올렸고 '압록강이 얼어붙으면 끝장'이라고 최명길도 상소하자, 결국 화해를 요청하는 사절단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인조는 강경론을 주도하며 전쟁 분위기를 조성해 놓고, 정작 최명길을 비롯한 현실론자들이 반박하자 충격을 받았는지, 자신에게 고무되어 최명길을 비판하는 삼학사 등에게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라고 꾸짖는 등 완전히 입장을 바꿨지만,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누가 이 조서를 들고 가는가 하는 문제로 조정에서는 무려 7개월 동안이나 토론했다. 그럴 만도 했다. 이런 조서를 가지고 간다고 청나라가 쉽게 받아줄 것 같지도 않고, 사신으로 가는 사람은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었던지라 누구든 쉽사리 나설 수가 없었다. 다만 7개월 동안 아예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고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정묘화약 때를 언급하면서 계속 명나라와의 관계를 인정해주고 칭제를 넘어가 달라는 취지로 글을 청나라에 몇 번이나 보냈지만, 처음부터 작정하고 일을 벌인 홍타이지는 이에 반응하지 않았다. 결국 전쟁이 벌어지기 코앞까지도 이런 지지부진한 인조와 신하들의 행태는 변함 없었다.

그러나 강력한 청군과 격돌하는게 겁이 났던 인조는, 명나라의 감군(監軍) 황손무(黃孫茂) 및 최명길의 조언에 따라 청나라의 입장 확인 및 청군의 사정 정탐을 위해 역관 권인록(權仁祿)을 청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1636년 9월) 이들은 심양을 정탐했으나 홍타이지와의 접견은 거부당한 채 돌아오고, 조선에서는 강경파들이 더욱 득세하게 되어 최명길을 파직하기에 이른다.

결국 11월에 이르러서야 화친 얘기를 꺼낸 박로가 사신으로 가서 화해를 요청하기로 결정되어 출발했지만, 그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박로가 압록강을 채 넘기도 전에, 청군이 이미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고 있었던 것이다. 박로와 박난영은 중화에서 청군 선두가 박두했다는 소식을 듣고 정방산성에 피신하였고, 이후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려다가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있던 청군에 생포되었다.[44][45]


5.4. 조선의 부실한 전쟁 준비[편집]


목소리만 컸던 주전론에 비해 조선의 전쟁준비는 소홀했다. 이괄의 난을 끝낸 직후에 정충신은 인조에게 "광해군 때의 절반만 복구를 해놓아도 후금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조선은 광해군 시절부터 군사 태세가 한계점을 노출했으므로, 인조 대에 들어서는 중부 지방의 방위 역량에도 신경을 기울였다.[46] 이 발언은 이괄의 난 직후의 발언이고, 정묘호란은 이로부터 3년 후고, 병자호란은 십여년 이후이다. 인조시대에는 조선의 수비태세와 군대의 규모 자체는 광해군 시절의 노하우를 이어받아 발달한 것이었다. 문제는, 청나라가 작정하고 쳐들어오면 최소한 조선 북부는 박살나는 것이 당연했다는 점이다. 위의 광해군 시절의 방비를 했던 인물도 장만과 정충신이고, 약 20여년 후에 인조 시대의 방비를 준비해놓고 죽은 인물도 그들이다. 당연히 인조시대에는 광해군 시절의 그 군사행정관들이 이전의 단점을 고친 방비를 해두었으므로, 인조는 그들의 준비를 따라서 방비만 잘 했어야 했다.

조선군의 가장 큰 문제는 총지휘관이 되는 인조가 전략적으로 무능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특히 인조는 이괄의 난을 진압한 장수들인 정충신과 남이흥이 수비전을 주장하고 청의 군사력을 이야기하며 방비를 어떻게 해야 할지도 설명하는데도 받아들이기는 커녕 그들에게 '홍타이지는 하찮은 자에 불과한데 나가 싸울 생각은 못하고 병력 탓만 하는 한심한 놈들'이라고 막말까지 일삼으면서 뛰어난 장수들만 찾아내면 문제 없다는 망언을 떠들어대고 만다. 이 때문에 정충신과 남이흥도 인조한테 기가 막혔는지 정충신 문서에도 있는 내용대로 인조를 우회해서 비판을 한다.

그래도 인조반정 이후 당시 조선의 수비를 담당했던 속오군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이 경주되었다. 정부 주도로 조총 생산을 서둘러 각 지방에 보급했고 호패법을 시행하여 병력을 확보하려 했다. 임진왜란 때 큰 문제를 드러낸 각 지방 수령들의 떨어지는 지휘력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전문적인 무관이 평시 훈련과 전시 단위 부대 지휘를 담당하는 전담 영장제가 실시된 것도 인조부터였다.[47] 정권 보위의 핵심이라 전투에 투입되지 않는 훈련도감 대신 실질적으로 전투를 담당할 수 있는 중앙군으로 어영군, 총융군, 수어청 군대가 창설되고 강화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이러한 노력들을 통해서 병자호란 직전에는 어영군 6,000여 명, 총융군 20,000여 명, 수어군 14,000여 명, 훈련 도감군 5,000명 등의 병력이 준비되었고 전국적으로 80,000 - 90,000명 가량의 속오군이 편성되었다.

병자호란 발발 5개월 전인 1636년 7월 김류가 올린 보고에 따르면 각도의 군사는 다 합쳐서 118,825명, 그 중 속오군은 86,073명이였다.[48] 다만 총융군 병력의 다수는 속오군이었기 때문에 병력이 겹쳤다. 전국적으로 36개 - 38개의 영(營)[49]과 이를 담당하는 전문 무관인 전담영장이 설치되면서 이러한 병력에 대한 지휘 체계도 잡혔다.

하지만 임진왜란부터 이어진 재정 문제로 인해 준비에 만전을 기하기 어려운데다 병력 증강에 서둘렀지만 사르후 전투이괄의 난에서 잃었던 20,000명 ~ 30,000명 가량의 정예병을 제대로 회복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50] 특히 이괄의 난 이후 반란을 두려워한 인조와 정치인들은 유능한 지휘관들을 국내의 반란을 감시하는 용도로서 사용했다. 남이흥도 이때 다른 지휘관들과 국내 지방을 감시하느라 본인이 군사 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유언 또한 "군사 훈련 한 번 못해본 것이 안타깝다!"였다.[51] 당시 중앙 중심의 측근 정치로 의한 군권 장악이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52]

이괄의 난 이후에 반란을 겪은 정치가들의 전형적인 기찰 정치가 발휘되어 서인들의 측근으로 이루어진 중앙의 공무원들이 각 부대들을 다 배속받았고 정작 군 전문가인 각 지방의 지휘관들에게는 지휘권을 주지 않았던 관계로 실전에선 유능한 장군인 정충신과 남이흥[53]마저도 이괄의 난을 토벌하는 공을 세웠음에도 차별 대우를 받으며 한직을 떠돌았다.[54] 나중에는 장만과 정충신마저 병사한 이후 김자점 같은 측근들로 채워진 사령관들의 역량은 매우 부실하였기에 군 전문가들이 남긴 많은 노력들이 실전에서는 허사로 돌아간다. 교전이 벌어졌을때 최고 지휘권을 보유한 국왕과 체찰사 김류가 남한산성에 갇힌 상황에서 지휘권을 행사해야 할 도원수 김자점은 지휘권을 포기해버려서 조선군 병력은 통합된 지휘 없이 따로따로 전투를 벌이게 되어 패전을 자초하였다.

게다가 청군은 공유덕과 경중명이 병선들을 이끌고 후금에 투항함으로써 수군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조선 조정은 이를 간과하고 강화도로 파천만 하면 안전할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에 빠져있었다. 그마저 제대로 도망도 못가서 남한산성에 갇히게 된다. 심지어 후금에서도 '너희들은 분명 강화도로 갈 것이 뻔하다' 라는 말을 전한 적도 있다. 더 큰 문제는 강화도의 수비를 맡은 강화도 유수 장신[55]이 적들은 수전에 약하다며 방비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으며, 강도검찰사 김경징 역시 방어태세를 살피기는커녕 안에 틀어박혀서 이민구[56]와 더불어 술이나 쳐마시는 등 안일한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5.5. 청군의 하북원정 (1636년 여름~가을)[편집]


<성스러운 한(홍 타이지)의 조서를 아시다르한 낰추와 히퍼 등에 내린다.

회맹에 모인 지역의 여러 호쇼이 친왕, 도로이 군왕, 도로이 버이러, 모든 버이러들로 향하여 말할 말이다!

지금 얼음 맺히면 곧바로 (조선으로) 출병한다.

이 사이에 모든 사람은 성스러운 한(홍 타이지)에 고두하러 가는 것을, 고두하러 보내는 것을,

또 친척으로 대하며 오는 것을 모두 "멈춰라!"하며 멈추게 하라!

이 말을 "성스러운 한(홍 타이지)의 조서!" 하며 말하지 말아라!

"너희의 뜻으로!" 하며 말하라!

오는 것을 멈추게 하는 까닭은 우리 내부의 나라의 식량 손해를 보았다.

식량 분배하며 먹일 호구 많다!

고두하며 올 사람의 말에 식량 먹이면 견디지 못한다!

그와같이 되어서 멈춰라! 한다.

이 글을 너희 사람에 들리게 하지 않고 조용히 보고서 숨기며 보관하라!>

-

- 만문노당 1636년 10월 16일 기사中 출처


청나라는 조선측의 군신관계 요구 거부 및 적대행위에 상당히 분노했을 것이지만 약 열 달동안은 다른 곳을 공략하느라고 조선측을 내버려두었다. 용골대가 도망치듯이 되돌아 온 것은 1636년 봄인데, 청나라는 조선에 대해 거의 10개월간 아무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최명길 등의 주화파들의 주장처럼 조선 조정이 현실을 보고 청나라를 잘 달랬으면 참화를 겪지는 않았을테지만 위에서 나온 대로 조선 조정은 이 황금같은 기간을 아무 대책도 세우지 않은채 흘려버렸다.

청나라는 그동안 조선은 놔 두고 명나라 서부의 농민반란이 심각해진 틈을 타서 5~9월에 만리장성을 우회하여 하북 지역에서 작전을 하고 있었다. 이때 명나라군 주력은 섬서성에서 농민반란을 진압 중이었기 때문에[57] 청나라군은 무인지경으로 하북지역을 쑥대밭을 만들고 심양으로 개선할 수 있었다. 청나라군 주력은 하북 원정에서 귀환한 후에 3달간 휴식을 취할 겸 12월 압록강이 얼어 붙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날씨가 추워져 기병의 도하가 용이해지자 바로 조선 침공을 개시했다.

청나라는 인구수가 부족했기 때문에 하북에서 명나라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와 만주에서 농업에 종사시켰다. 그런데 수만명의 포로가 갑자기 만주에 이주하게 되니 식량이 빠르게 감소하게 되었다. 병자호란 직전 심각한 청나라의 식량 사정

그리하여 병자호란 당시 청군은 대략 15일~20일치의 군량만 준비하였다. 즉 청나라는 장기전보다는 단기전으로 조선을 굴복시킨 작정이었다. 청나라군이 휴대한 군량은 1달 미만

일부 역덕들이 이를 들어 청나라가 전쟁준비에 소홀했다거나 식량이 모자랐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원래 기병이 주력인 청나라군은 많은 군량을 휴대하지 않았고, 본거지 심양 주변에 팔기군을 주둔시켰다가 공세에 들어갈 때 소량의 군량을 휴대해 전선에 나가고 여의치 않으면 돌아오는 형식이었다. 병자호란 당시에도 그렇지만, 정묘호란영원성 전투만 하더라도 한달 이내의 작전기간을 정해두고, 작전목표가 불분명해지거나, 장기전으로 흘러 식량이 바닥날 것 같으면 바로 물러섰으니 이것이 청나라 사정이 나빴다는 근거는 될 수 없다.

청은 1차 선봉대 300명, 2차 선봉대 1,000명, 3차 선봉대 3,000명, 동로군 8,500명, 본군 8,600명, 후미군 12,900명, 기타 11,000명(쿠툴러로 정규군을 보조하는 하인들이다. 모두 포로가 된 한인들이 맡았다.) 등 총 4만 5천여 명의 침공군을 조직하여 조선에 대한 침공을 감행하게 된다.


6. 전쟁의 발발과 흐름[편집]



6.1. 압록강을 건넌 청군[편집]




1636년 음력 12월 2일, 청태종은 명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심양에 정친왕 지르갈랑을 남겨두고 타타라 잉굴다이(용골대), 마푸타(Mafuta, 馬福大, 馬福塔)를 지휘관으로 하여 한족, 몽골인, 만주족 혼성 부대 45,000명[58]을 거느리고 조선을 침공하였다. 12월 8일 300기의 선봉대가 위장한 채로 압록강을 도하했고, 이후 큰 길을 따라 내려가면서 조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때 홍타이지는 부대 전체를 하나의 집단으로써 한 번에 같이 이동하지 않고 이들을 몇몇의 작은 부대로 나누어서 다양한 루트와 시간차를 두고서 진격시켰다.

물론 조선도 대비를 안한게 아니라서 의주부의 백마산성에서 임경업 휘하에 최소 4,000명에 달하는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으나[59] 청나라는 이를 무시하고 신속히 남하했다. 이후 모든 산성을 우회해 청군은 단 4일 만에 개성에 도착했고, 이후에도 신속히 남하하였다.[60]

만약 조선군이 이 상황에서 반격을 했다면 조선군에게 퇴로가 막혀 그대로 궤멸당할 수도 있는 작전이였다. 그러나 청나라도 이런 신속한 진격을 할 수 있던 배경이 있었는데, 당시 조선군이 임진왜란의 충격을 간신히 추스리던 참에 12년 전 이괄의 난이 터져 금쪽 같은 평안도 북방의 정예병 12,000명이 박살나버리는 바람에 조선은 청의 진격로를 막을 수 있는 방어군이 부족했고, 이를 회복도 못한 시기였는데 그때 청나라군이 침공한 것이였다.


6.2. 지연전에 들어가다[편집]



조선의 도원수였던 김자점도 청군의 이러한 빠른 작전 속도에 놀라 급히 군대를 동원하여 이들을 저지하고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12월 13일 마푸타는 300기병의 앞에 선발대 몇 기를 보내 길잡이로 삼아 황주목에 도착했는데, 이들이 황주를 지나가자 김자점은 일부 병력을 이끌고 동선역에 매복했다. 조금 후에 마푸타가 보낸 본군의 선발대 300명가량이 동선역을 지나가자 이완은 1차 선봉대 뒤에 따라오는 본군을 치자고 건의했지만, 김자점은 인조가 하사한 상방검을 들고 명을 따르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이에 이완은 김응해[61]와 함께 마푸타 군을 산골짜기로 유인하였고 김자점 본군이 기습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다음날 12월 14일 2차 선봉대 청군의 기병 1천 명이 황주목에 도착하자 김자점은 다시 동선역에 매복하는 작전을 계획했다. 이완은 어제의 전투로 이미 적이 동선역 매복을 알 것이라고 말했지만, 김자점은 듣지 않고 다시 한번 매복기습을 실행하지만 실패했다.

마침내 황주목 정방산성에 인조의 서신이 당도했다. 이에 12월 20일 김자점은 5천 전군을 인솔하고 남한산성으로 향한다. 이때까지 김자점은 작계에 따라 동원령을 내려 정방산성을 5천 병력으로 지키고 있었다. 적의 남하를 최대한 막아보려 했으나 청 선봉대들은 전투를 회피하고 서울로 급행했고, 남하한 선봉대는 몇 안되니 정방산성을 지키며 적의 본군의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봉화를 막고 1차 선봉대를 그냥 보낸 탓에 인조가 크게 당황하여 강화도 대신 남한산성으로 거처를 옮기는 한 가지 원인이 되었다.

여하튼 인조가 남한산성에 있으면서 SOS를 치자 김자점은 더 이상 정방산성에 머물 수 없었다. 전군을 이끌고 급히 남한산성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청의 도르곤이 이끄는 좌익군이 12월 23일 황주목에 도착하였는데, 도르곤은 주변 주민들을 착생하여 김자점의 1만 5천(실제 5천) 병력이 선봉대를 쫓아 남하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도르곤은 곧장 일부 병력을 떼어 추격하라 명했다.

사서에 따르면 김자점은 12월 24일 토산에 영을 세우는 중이었는데, 청군이 토산에 김자점의 군대가 있음을 눈치채어 이튿날 동틀 무렵 기습했다. 김자점 휘하 조선군은 일부 병력을 데리고 산위로 패퇴하였고, 다른 장교들도 자신의 휘하에 수십 명씩 이끌고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어영청 포수들이 진지를 고수해서 청군을 물리쳤다거나 봉산군수 조후익만이 병력을 이끌고 반격하여 공을 약간 세웠다거나 하는 등 기록이 있으므로, 조선군이 다시 재정비하고 청군에게 반격하여 결과론적으로 토산 전투는 조선군이 이긴 듯하다.

다음날 12월 26일 김자점은 군사를 풀어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 이에 2천 군사를 수습하여 남하를 개시하고 12월 30일 양평 미원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각지 근왕병의 재규합을 시도했다.

한명기 교수에 따르면 김자점이 황해도에서 청군과 교전한 후, 싸우지 않고 양평까지 남하해 인조가 항복할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조선의 의주에서 한양까지 이르는, 요즘으로 치면 1번 국도상의 방어에 상당히 큰 문제가 있었다는 뜻이라고 지적했다. 임진왜란 시절 일본군이나 정묘호란 때 후금군처럼 적의 산성을 일일이 점령하려 한다면 칩거와 농성이 의외로 시간을 버는 방법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병자호란에서는 오직 수도를 향해 최대한 빨리 어택땅을 하는 상황이었기에 오히려 청나라에게 좋은 일을 해준 격이었다.[62]

급보를 접한 인조는 두 왕자(봉림대군·인평대군)를 비롯한 비빈들과 문반, 무반과 그 가족들 그리고 종묘사직의 위패들을 우선 강화도로 피난가게 하고 소현세자와 함께 뒤따라가려 했지만, 이미 청군 선발대가 서대문 근처 홍제원[63]까지 도착해서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혔고, 결국 인조는 광주시에 있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참고로 아래에 있는 문서는 청태종이 인조와 조선 백성들에게 각각 보낸 것이다.
인조에게 보낸 문서.

대청국(大淸國) 관온인성황제는 조선 국왕에서 조서를 내려 유시(諭示)[64]

한다.

우리 군대가 지난날 동쪽으로 우량카이(兀良哈)를 정벌했을 때 너희 나라가 군대를 일으켜 맞아 싸웠다. 그 뒤로 또 명나라를 도와서 우리에게 해를 끼쳤다. 그러나 우리는 이웃나라와의 우호 관계를 생각해서 이를 마음에 두지 않았다. 우리가 요동을 점령하게 되자, 너희는 다시 우리 백성들을 유인하여 명나라에 바쳤다. 짐이 진노하여 정묘년에 군사를 일으켜 너희들에게 벌을 내린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이다. 이로써 강대함을 믿고 약자를 업신여겨 이유없이 군대를 일으킨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너는 또 무엇 때문에 너희 변방 신하들에게 글을 보내 사세(事勢)[65]

가 부득이하여 무리한 요구에 얽혔지만, 이제는 정의로써 결단을 내릴 때이니, 경들은 여러 고을을 깨우쳐서, 충의의 인사로 하여금 지략을 다하게 하고, 용감한 자로 하여금 정벌하는 대열에 나서게 하라'라고 했느냐. 이제 짐이 몸소 대군을 통솔해서 싸우러 왔다. 너는 왜 지모있는 자로 하여금 계책을 다하게 하고, 용감한 자로 하여금 싸우는 대열에 나서게 해서 친히 일전(一戰)을 시도하지 않느냐.

짐은 결코 힘의 강대함을 믿고서 남을 침범하려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도리어 약소한 국력으로써 우리의 변경을 소란하게 하고, 우리의 지경 안에서 인삼을 캐고 사냥을 했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그리고 짐의 백성으로 도망자가 있으면 너희가 이를 받아들여 명나라에 보냈으며, 명나라 장수 공유덕경중명 두 사람이 짐에게로 귀순코자 했을 때 짐의 군대가 그들을 맞이하려 하자 너희 군대가 총을 쏘며 이를 가로막아 싸운 것은 또한 무슨 까닭인가.

이번 전쟁의 원인은 실로 너희 나라에 있다. 짐의 아우와 조카 등 여러 왕들이 네게 글을 보냈으나 너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난 정묘년에 네가 섬(강화도)으로 도망가서 화친을 애걸했을 때 바로 그 왕들 앞으로 글을 보내지 않았더냐. 짐의 조카나 아우가 어찌 너만 못하단 말인가.

그리고 외번의 여러 왕들이 너에게 글을 보냈는데 너는 여전히 거절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당당한 원나라 황제의 후손인데 어찌 또 너만 못하랴. 원나라 때 조선은 공물을 바치기를 그치치 않았다. 오늘날 어찌 하루아침에 이처럼 오만해졌단 말이냐. 그들이 보낸 글을 거절해서 받지 않은 것은 너희 혼암과 교만이 극도에 이른 것이다. 너희 조선은 요, 금, 원 세나라에 대하여 해마다 공물을 바치고 신(臣)이라 일컬었다. 예로부터 너희 나라는 신하로서 북쪽을 바라보면서 남을 섬겨 평안을 보전하지 않은 때가 있었단 말이냐.

짐이 이미 너희 나라를 아우로 대했는데도 너는 갈수록 배역(背逆)[66]

하여 스스로 원수를 만들고 백성들을 도탄에 몰아넣었다. 성곽을 비우고 궁궐을 버려서 처자와 헤어지고 단신으로 산성으로 도망쳐 들어가 설사 목숨을 연장하여 천 년을 산들 무슨 이로움이 있겠느냐. 정묘년의 치욕을 씻는다면서 지금의 이 치욕은 어떻게 씻을 것인가. 정묘년의 치욕을 씻으려 한다면, 무엇 때문에 몸을 움츠리고 여인의 처소에 들어앉아 달게 여긴단 말인가. 네가 비록 이 성 안에 몸을 숨기어 구차스럽게 살기를 바라지만, 짐이 어찌 너를 그대로 내버려두겠느냐.

짐의 내외 여러 왕과 문무의 신하들이 짐에게 황제의 칭호를 권하여 올렸다. 너는 이 말을 듣고 이르기를 "이것이 어찌 우리 군신이 차마 듣고 참을 수 있는 말인가"라 했다는데 이는 또 무슨 까닭이냐. 무릇 황제의 칭호를 올리고 안 올리는 것은 너에게 달려 있지 않다. 하늘이 도우면 평범한 지아비도 천자가 될 수 있고 하늘이 재앙을 내리면 천자도 한 이름없는 사내가 되는 것이니, 네가 한 말은 심히 방자하고 망령스럽다.

또한 맹약을 어기고 성을 수축하였으며, 우리의 사신을 접대하는 예의가 소홀했다. 또 우리의 사신이 가서 너희 나라 재상을 만났을때 계교를 써서 우리 사신을 사로잡으려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명나라는 부모의 나라로 섬기면서 우리를 해치려 꾀했음은 또 무슨 까닭인가. 이상은 너의 죄목 중에 큰 것을 들었을 뿐이고, 그밖의 사소한 것들은 이루 열거하기 어렵다.

이제 짐이 대군을 이끌고 와서 너의 8도를 무찌르려고 하는데, 네가 부모처럼 섬기는 명나라가 장차 어떻게 너희를 구해주는지 보고 싶다. 자식의 위급함이 경각에 달려있는데 구원하지 않는 부모가 세상에 있겠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는 네가 스스로 무고한 백성을 물불 속으로 몰아넣은 것이니, 억조의 많은 사람들이 어찌 너를 탓하지 않으랴. 만일 할 말이 있거든 서슴지 말고 소상하게 알려라.


인조에게 보낸 이 문서는 조선왕조실록에는 없고, 병자록과 청나라 실록에만 실려 있다.[67] 그런데, 인조와 신료들이 이 문서를 받고 열받아서 길길이 뛰는 내용은 또 있다.

② 조선 백성들에게 보낸 포고.

대청국(大淸國)의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는 조선(朝鮮)의 관리와 백성들에게 고유(誥諭)한다. 짐(朕)이 이번에 정벌하러 온 것은 원래 죽이기를 좋아하고 얻기를 탐해서가 아니다. 본래는 늘 서로 화친하려고 했는데, 그대들의 군신(君臣)이 먼저 불화의 단서를 야기시켰기 때문이다.

짐은 그대들의 나라와 그동안 털끝만큼도 원한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다. 그대들의 나라가 기미년(1619)에 명나라와 서로 협력해서 군사를 일으켜 우리나라를 해쳤다. 짐은 그래도 이웃나라와 지내는 도리를 온전히 하려고 경솔하게 전쟁을 일으키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요동(遼東)을 얻고 난 뒤로 그대들의 나라가 다시 명나라를 도와 우리의 도망병들을 불러들여 명나라에 바치는가 하면 다시 저 사람들을 그대들의 지역에 수용하여 양식을 주며 우리를 치려고 협력하여 모의하였다. 그래서 짐이 한 번 크게 노여워하였으니, 정묘년에 의로운 군사를 일으킨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때 그대들의 나라는 병력이 강하거나 장수가 용맹스러워 우리 군사를 물리칠 수 있는 형편이 못 되었다. 그러나 짐은 생민이 도탄에 빠진 것을 보고 끝내 교린(交隣)의 도를 생각하여 애석하게 여긴 나머지 우호를 돈독히 하고 돌아갔을 뿐이다.

그런데 그 뒤 10년 동안 그대들의 군신은 우리를 배반하고 도망한 이들을 받아들여 명나라에 바치고, 명나라 장수가 투항해 오면 군사를 일으켜 길을 막고 끊었으며, 우리의 구원병이 저들에게 갈 때에도 그대들의 군사가 대적하였으니, 이는 군사를 동원하게 된 단서가 또 그대들의 나라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명나라가 우리를 침략하기 위해 배(船)를 요구했을 때는 그대들의 나라가 즉시 넘겨 주면서도 짐이 배를 요구하며 명나라를 정벌하려 할 때는 번번이 인색하게 굴면서 기꺼이 내어주지 않았으니, 이는 특별히 명나라를 도와 우리를 해치려고 도모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사신이 그대들의 국왕을 만나지 못하게 하여 국서(國書)를 마침내 못 보게 하였다. 그런데 짐의 사신이 우연히 그대들의 국왕이 평안도 관찰사에게 준 밀서(密書)를 얻었는데, 거기에 ‘정묘년 변란 때에는 임시로 속박됨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정의에 입각해 결단을 내렸으니 관문(關門)을 닫고 방비책을 가다듬을 것이며 여러 고을에 효유하여 충의로운 인사들이 각기 책략(策略)을 다하게 하라.’고 하였으며, 기타 내용은 모두 세기가 어렵다.

짐이 이 때문에 특별히 의병을 일으켰는데, 그대들이 도탄에 빠지는 것은 실로 짐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단지 그대들의 군신이 스스로 너희 무리에게 재앙을 만나게 했을 뿐이다. 그러니 그대들은 집에서 편히 생업을 즐길 것이요, 망령되게 스스로 도망하다가 우리 군사에게 해를 당하는 일이 일체 없도록 하라. 항거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고 순종하는 자는 반드시 받아들일 것이며 도망하는 자는 반드시 사로잡고 성 안이나 초야에서 마음을 기울여 귀순하는 자는 조금도 침해하지 않고 반드시 정중하게 대우할 것이다. 이를 그대들 모두에게 유시하여 모두 알도록 하는 바이다.

1637년 1월 2일.


이후 각지에서 방어하려 했던 조선군이 황급히 한성으로 집결해 근왕을 하거나 평지에서 적을 막으려 했으나, 대부분은 청군보다 움직임이 한참 늦었으며, 거기에다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중과부적으로 패하거나 고립되는 상황이었다.

청군은 식량 등의 물자를 현지에서 약탈로 조달하며 기동력을 발휘해 한성에 들이닥첬다. 현지 조달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 청군도 상당한 모험을 벌인 것이었다.[68] 일단 내몽골은 정리했지만 배후에는 아직 상당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명나라가 있었으며[69], 당시 만주에는 기근이 들어서 식량도 부족했다. 청이 비록 내몽골의 몽골인과 요동의 한족 인구를 흡수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인구에서는 조선이 많았으며, 청은 오직 "왕"을 잡기 위해 다른 지역들은 최대한 건들지도 않고 수도에만 집중적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조선군으로서는 민간의 막심한 피해를 무릅쓰고 청야전술을 시행하는 것이 방어전략의 핵심이었다. 인조가 멀리 도망치면서 근왕군을 모으고, 청군의 기세를 죽이면서 시간을 끌면 청군이 더 이상 못 버티고 물러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 핵심전략이었다. 물론 조선이 이를 제대로 구사할 수 있었다면 청군으로서는 영락없이 여수전쟁 때의 우중문이나 여요전쟁 때의 요성종, 소배압 꼴 나기 십상이었겠지만, 정작 조선군의 전략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청군의 진격속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빨랐고 애당초 농성(籠城)에 들어간 병력을 제외하고는 전략적으로 기동할 수 있는 야전군이 집결해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여수전쟁, 여요전쟁 같은 전략을 제대로 운용하기 어려웠다.[70]


6.3. 눈보라가 몰아치는 남한산성[편집]


파일:external/dbr.donga.com/67_MA_138_HM_p153_G1.jpg

결국 조선군은 청군을 제대로 저지조차 못했고, 단 8일 만에 수도인 한성을 내주면서 임진왜란 때의 기록(19일)을 큰 차이로 경신했다. 이후 청나라가 장사꾼 행렬로 위장한 300기의 기병으로 강화도로 가는 길도 차단해버리는 바람에 강화도로 피신도 못하고, 할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이 발생한 이유가 로오사의 선봉대는 300기에 불과했고, 후속 본대는 아직 뒤따라오는 중이었음에도 조선은 이들을 수만 여 명에 달하는 청군의 본대 병력들이라고 그만 착각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임진왜란 때 선조처럼 후방으로 도망칠 수도 있었겠지만 제대로 된 군대랑 기동력 하나 없는 상황에서 이는 청군의 포로가 되겠다고 자처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았다.[71] 게다가 청군이 병력을 쪼개어 시차를 두고 이동했던 만큼 평안도와 황해도의 조선군은 청군의 총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언제쯤 다 진군할지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고, 그 결과 근왕(勤王)을 위해 섣부르게 남하하지도 못하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산성 자체의 방위력은 충분하여 전쟁 초반의 공방전에선 조선군이 선전하였다. 12월 18일에는 원두표가 응모한 군사들이 출전해 6명의 청군을 죽였고, 이틀 뒤 20일에는 신경진의 군사가 출전해서 30명의 청군을 죽이며 적의 진입을 저지하였으며, 심지어 19일에 청군이 공성을 위해 서양 대포인 홍이포를 남성으로 끌고 와 쐈을 때는 되려 천자총통으로 홍이포를 저격하여 청나라 포병들을 공격해 격퇴시켜버리는 위엄을 과시하기도 했다.[72] 치밀했던 청군이 유일하게 고려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래 본문에는 홍이포와 호준포의 이름이 혼용되고 있으나, 중근거리 소형 산탄포인 호준포와 달리 모과만한 포탄을 수십 리 날렸다는 점을 보면 홍이포임을 알 수 있다. 천자포는 천자총통의 다른 이름이다.

(전략) 며칠 전에 적이 망월대(望月臺) 밖에 대포를 설치하니 신경진이 사졸들에게 천자포(天字砲)를 쏘도록 하여 오랑캐의 장수와 졸개 몇 명을 맞추니, 적이 흩어져 갔다. 이에 이르러 적이 또 10여 대의 대포를 설치하고 남격대(南隔臺) 밖에 또 7대, 8대를 설치하였는데, 대포의 이름을 호준(虎蹲)이라 하고 일명 홍이(紅夷)라고도 하였다. 탄환의 크기는 모과와 같고 능히 수십 리를 날 수 있었는데, 매양 행궁(行宮)을 향해 종일토록 끊임없이 쏘았다. 탄환의 위력은 사창(司倉)에 떨어져 기와집 세 채를 꿰뚫고 땅 속으로 한 자 가량이나 들어가 박힐 정도였다. (후략)


  • 출처 : 한국고전종합 DB <연려실기술> 제 25권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 병자노란(丙子虜亂)과 정축 남한출성(南漢出城)# 종종 DB 사정으로 검색이 안되거나 링크가 말을 안들을 경우 안정화되기를 기다렸다가 검색어로 천자포, 혹은 신경진 천자포로 검색하면 된다.


하지만, 남한산성 외부에 있던 식량고에서 미처 성 안으로 식량을 운반하지 못해,[73] 남한산성 안의 식량은 쌀 14,000여 섬, 간장 100여 독에 불과하였다. 군사 12,000여 명이 먹기에는 겨우 50여 일 분. 더구나 그해 병자년 겨울은 정말 추웠기 때문에 그야말로 설상가상이었다.[74] 결국 포위된 지 45일 만에 식량 결핍과 추위로 말미암아 성내의 장병은 방어할 기력을 거의 잃게 된다.

당시 기록들을 살펴보면 남한산성의 장병들이 이미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월 23일 남한산성의 수비군 수백 명이 체찰부와 행궁 앞에 몰려가 척화신들을 내보내라며 시위를 벌였으며, 청군의 홍이포 포격으로 남한산성이 쑥대밭이 된 1월 26일에도 병사들이 행궁 앞에서 척화신 압송을 요구했는데, 우승지 이행원이 칼을 빼어 들고 병조의 하급 관리를 나무라자, 병사들은 "칼을 빼어 든 모습이 용맹해 보이는데 기왕이면 적진에 가서 그 대단함을 몸소 보여 주심이 어떻겠습니까."라며 야유를 보냈다. 어떤 병사는 "척화를 주장했으면 이기는 방법도 안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척화신들을 적진에 묶어 보낼 것이 아니라 장수로 삼아 싸우게 하시지요..."라며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평시에는 상상도 못 할 광경이 벌어진 것이다.(...) 좌의정 홍서봉이 "오늘날 군사들의 마음이 외적보다 심각하다[今日軍情, 甚於外敵]"고 할 정도였으니, 강화도 함락과 상관없이 이미 남한산성에는 항전의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던 셈이다.

(전략)

26일에 장수와 사졸들(신경진과 구굉의 진영의 장사들)이 또 대궐 아래로 나아가 화친을 배척한 사람을 붙잡아 보낼 것을 청하면서 말하기를, “대포에 맞아서 성첩이 모두 다 파괴되어 사세가 이미 더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문사들은 단지 고론(高論)만 일삼고 있으니, 문사들에게 망월대를 지키고 막도록 하소서.” (중략) 하고, 이내 대궐에 들어가 곧바로 진달하려고 하였다. 승지 이행원(李行遠)이 말하기를, “비록 위태롭고 급박한 날을 당했더라도 대내(大內)가 멀지 않은 곳에서 어찌 감히 이런 짓을 하는가.” 하고, 이어 병조 낭청에게 이르기를, “그대들은 대궐문을 지키면서 어찌 난병(亂兵)이 여기에 이르게 하였는가.” 하면서, 칼을 뽑아 들고 쳐죽이려고 하니, 장수와 사졸들이 말하기를, “승지가 칼을 뽑으니 용맹하다고 이를 만하다.그러나 적을 베는 데는 용감하지 못하고 도리어 죄 없는 사람의 목을 베려 하는가. 승지는 재주와 꾀가 있는 것 같으니 만일 오랑캐의 진중에 데리고 가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속히 나오라. 속히 나오라.” 하자, 동료들이 권하여 이행원을 피하게 하였다. 임금이 다른 승지를 시켜 군사들을 온화하게 타이른 뒤에야 진정되었다. 《병자록》 《잡기》

(후략)

-

연려실기술 제25권中


장병들이 전의를 상실했음을 뒷받침해주는 사료도 있다. 영화 남한산성에서도 등장하였듯이 실제로 성첩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12월 25일경부터[75] 가마니[76]를 지급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25일에 굶어 죽게 될 말을 잡아 병사들에게 먹일 것을 도체찰사가 제안하여 나흘 후인 1월 1일에 병사들에게 지급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가마니를 줬다 뺏는 건 사람 할 짓이 아니니 그 부분은 영화적 각색.....이었으면 참 좋았겠으나 안타깝게도 정사이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갑자기 사흘 후인 1월 4일에 비변사에서 사복시(말을 관리하는 부서)의 말과 역말이 굶어 죽을까 두렵다며 가마니를 다시 거두어 들일 것을 제의하고, 인조는 별 말 없이 승낙한다. 음력 1월 4일은 양력 1월 29일으로, 현대의 남한산성 기준만 해도 평균기온 영하4도 내외, 최저기온 영하 10도를 넘나드는 강추위가 기승인 때인데 "그러나 점점 기후가 포근해져 군사들이 추위에 떨거나 동상에 걸리는 일이 매우 위급한 정도가 아닙니다" 운운하니... 출처: 승정원일기 55책 인조 15년 1월 4일 갑진 5번째 기사 인조실록에 따르면 그로부터 열흘 후에 "성첩을 지키던 병사들중에 얼어 죽은 자가 나왔다."...고 한다.# 적은 계속 깔짝대서 상시 긴장해야하지, 눈, 비, 그도 아니면 둘 다 내려서 옷 젖지, 얼어 죽을 날씨에 고작 가마니 따위나 줬다가 며칠만에 말 먹인답시고 뺏어가지, 척화파들은 전투에 나서지도 않으면서 결사항전만 외쳐대지.... 그 와중에 동료도 얼어 죽었으니 이정도면 전의를 생각할 게 아니라 정말 반란이 안 일어난 게 천운이었다.

12월 27일에는 이기남을 보내 청군 진영에 술과 고기를 전달했다.[77] 하지만 홍타이지는 어차피 팔도의 물건이 내 손아귀에 있고 성내의 굶는 사람이 많다고 하니 도로 가지고 가 굶주린 신민들에게 나누어주라며 비아냥거렸다. 적진을 떠보려던 게 오히려 적들이 자신들의 상황을 줄줄이 꿰고 있다는 사실만 알게 되었다.


6.4. 조선군의 남한산성 구출시도[편집]


물론 조선군이 가만히 있던 것은 아니어서, 곧 남한산성을 구원하기 위한 8도의 근왕병이 사방에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통합된 지휘와 물자 보충이 이뤄지지 않아 각자 알아서 진격해야 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게다가 인조 정권 이래 집중적으로 투자하기 시작한 중앙군과 달리, 지방군은 훈련도가 제각각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지방군은 대체로 평시에 훈련을 하지 않고, 농한기에만 형식적으로 한 것으로 보이며, 지방군이 훈련을 열심히 하면 오히려 의심을 받기 쉬웠다. 그 이유는 인조 자신이 지방군격인 황해도의 평산부사 이귀의 병력으로 반정에 성공해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78] 이 때문에 청군은 손쉽게 각개격파를 노릴 수 있었다.

강원도 지방군의 검단산 전투, 충청도 지방군의 험천 전투같은 패배도 있었으나, 광교산 전투김화 전투에서는 전라도 지방군과 평안도 지방군이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특히 광교산 전투에서는 홍타이지의 매부 슈무루 양구리(舒穆禄 揚古利)를 비롯한 청군의 굵직한 장수 3명을 조총으로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런 전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패배하여 퇴각해야했다.

제일 큰 문제점은 도원수 김자점은 양평까지 남하해 인조가 항복할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북변의 오랑캐와 전투 경험이 풍부한 정예병이었던 함경도의 군사와 중앙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강원도 근왕군의 패잔병도 합류한 양평의 군세는 17,000명에 달했다. 하지만 이들은 다양한 지역에서 모인 군대였기에 편제가 제각각이었고 새로 도원수로 임명된 심기원의 존재로 인해서 지휘권에 대하여 잡음이 생겨 이러한 일련의 문제들을 수습하느라 김자점은 결국 군사를 움직일 수 없었고 전쟁에서 효과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인조남한산성에 갇혀 있었던 탓에 근왕군은 남한산성 구원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으며,[79] 지휘권이 분산되어 있어서 통일적인 움직임도 보이지 못했다. 사실 대규모의 병력이 집결만 했어도 청군에게는 커다란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청나라가 이자성을 칠 때 동원한 병력이 18만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당시 청나라는 명나라를 견제할 최소한의 병력 외에는 다 끌고 내려온 것이었다.

당시 조선 속오군은 8도 속오군을 다 합쳐 8만을 넘는 수준이었고 청군이 급하게 내려오느라 다수의 부대가 건재한 상황이었다. 후방도 전혀 안정되지 않고 군대의 대부분이 그대로 수도권에 대기타고 있는 청군의 상황에서 10만 가까운 조선군이 집결하기만 해도, 홍타이지는 남한산성의 포위를 오랫동안 지속하기 어려웠다. 홍타이지가 아직 건재한 명나라를 두고 (자신의 입장에서는) 일개 변방에 불과한 조선까지 직접 내려온 이유도 인조를 빠르게 압박하여 신속히 끝을 내려는 이유에서였다. 속전속결로 한양을 포위하고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군대를 급속도로 전개했고, 보급선이 제대로 구축되지 않아서 조금이라도 공성전이 길어진다면 역으로 청군이 집결한 조선군에게 압박을 당할 가능성이 크게 증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6.5. 강화도 방어전에서의 패배[편집]



청태종조유(淸太宗詔諭) - 청나라의 최후통첩
청군은 대포까지 동원하여 조선 본진인 남한산성을 포위하면서 동시에 계속되는 조선군의 구원을 물리치면서 남한산성 내의 인조와 장병들을 심리적으로 강하게 압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조가 버티자 결국 강화도를 공격했는데 당시 방어를 맡았던 장신김경징은 제대로 싸우지도 않았고, 결국 청나라 수군에게 강화도가 함락되고 말았다.

청의 수군이 없었다는 사람도 있지만, 실제로 모문룡의 부하들이 산동반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1633년 100여척의 함대를 거느리고 요동반도로 가서 청나라에 귀순했기 때문에 청나라도 수군이 있었다. 게다가 모문룡의 부하들은 서해안에서 해적질을 하던 자들이라 서해의 물길을 잘 알고 있었다. 아마도 이런 사정 때문에 청군이 강화도에 상륙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설로는 조선에서 어부와 뱃사람으로 살고 있던 여진족들이 청군한테 강화도의 물길과 물때에 대해 청군에게 정보를 알려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떻게 된 사연인고 하니 당시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때려잡고 다니던 시기에는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이 강성하였고, 동해여진, 일명 야인여진은 소규모 부족들이 난립하여 이들의 먹잇감이 되는 상황에서 1605년부터 시작된 우라 부잔타이와 건주 누르하치의 동해여진 강탈전은 수많은 동해여진족들의 목숨을 위협하였고 이에 두만강 일대에 살던 여진족 상당수가 조선으로 도망쳐 조선 국적 여진인 일명 향화호인(向化胡人)이 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런식으로 누르하치의 박해를 피해 조선으로 넘어온 여진족은 사서의 기록들상 대략 수천 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들은 배를 잘 몰아서 서해안의 어부가 되었다가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그 어부가 된 이들 중에 청군에 투항하는 자도 있었고 그들 중 일부는 또 청군의 강화도 공격 당시에 물길과 물때를 알려주는 결정적인 도움을 제공하여 강화도 함락에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고 한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에 살던 여진족 배신 이야기(향화호인)

이에 대해 서울대 동양사학과 구범진 교수는 이 마푸타와 예천 일명 서해안 일대에 살던 향화선을 몰던 뱃사람들(귀화 여진족들)이 강화도의 물길과 물때를 알려주었을 것이라 추정하여 여러가지 사서의 파편들을 모아 설명하였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당시 여진족들은 서해안에서 어업에 종사했다.
2. 홍 타이지는 훗날 강화도 함락 유산선(뗏목) 건조를 동해여진족에게 맡겼다고 언급했다.
3. 강화도 함락 당시 첫 번째로 강화도에 상륙한 자는 서러와 아하니칸의 부대였다.
4. 서러는 남양 급습 주인공, 아하니칸 니루는 동해여진 출신 니루였다.
5. 강화도 인근에서도 배를 잘 타는 여진족들이 수두룩했다.
6. 도르곤은 강화도 앞 문수산에 도착해서 곧바로 공격하지 않고 홍이포 3~4문으로 위협사격을 하며 썰물이 오길 기다렸다.
7. 11시경 썰물이 오자 조선 수군의 판옥선 등은 움직이질 못했다. 이때를 틈타 청군은 도강을 시작하였다.

결론적으로 조선 수군은 강화도 주변에서 아무 활약을 못했고, 청나라군은 모문룡의 잔당 또는 귀화여진인들의 활약으로 어렵지 않게 강화도를 공략할 수 있었다.


6.6. 항복, 그리고 삼전도의 굴욕[편집]


여하간 이후 봉림대군과 왕족들은 청군 진영으로 압송되었고, 이 소식을 접한 인조는 얼마 후 항복을 결정하고 삼전도로 가게 된다.

사실 인조가 항복한 이유는 간단하다. 각지에서 오던 근왕군이 모조리 격퇴당한데다가, 결정적으로 최후의 거점인 강화도가 함락당했기 때문이다. 만약 근왕군이 모조리 무너졌어도 강화도라도 사수했다면 대몽항쟁 때와 달리 장기전에 대한 대책도 없던 청군은 그냥 철수하거나 인조만 잡아가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인데, 강화도가 함락됨으로써 조선 정부 전체가 완전히 궤멸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 상황에서 항복을 거부한다면 최소한 백제 멸망 때처럼 인조와 그 자손들은 조선의 왕좌를 지키지 못하는 건 당연하고, 심지어 살아남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과 남한산성의 극도로 열악한 상황으로 인해 이미 조선군 병사들은 더 이상 싸울 의욕을 잃은 상태였다. 심지어는 병사들이 척화신을 청군에게 압송하라는 시위를 벌이고, 조정에서도 '군사들의 마음이 변해서 외적보다 심각하다'는 우려를 하고 있었다. 이래서야 더이상의 항전은 불가능했다.

음력 1월 10일 이후 최명길 등이 여러 차례 청군과 화평 교섭을 진행하였다. 하지만 몇 차례 망신을 당하기도 했고, 그러다 강화도가 함락되었단 소식에 마침내 전의를 상실하여 1월 27일에 항복 문서를 보낸다.

조선 국왕 신 이종[80]

은 삼가 대청국 관온인성황제 폐하께 글을 올립니다. 신이 이달 20 일에 성지(聖旨)를 받들건대 ‘지금 그대가 외로운 성을 고달프게 지키며 짐이 절실히 책망하는 조서(詔書)를 보고 바야흐로 죄를 뉘우칠 줄 아니, 짐이 넓은 도량을 베풀어 그대가 스스로 새로와지도록 허락하고, 그대가 성에서 나와 짐을 대면하도록 명한다. 이는 한편으로는 그대가 진심으로 기뻐하며 복종하는지 확인하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그대에게 은혜를 베풀고 전국(全國)을 회복시켜줌으로써 회군한 뒤에 천하에 인애와 신의를 보이려고 함이다. 짐이 바야흐로 하늘의 돌보심을 받들어 사방을 어루만져 안정시키니, 그대의 지난날의 잘못을 용서함으로써 남조(南朝)의 본보기를 삼으려 한다. 만약 간사하게 속이는 계책으로 그대를 취한다면 천하가 크기도 한데 모두 간사하게 속여서 취할 수 있겠는가. 이는 와서 귀순하려는 길을 스스로 끊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성지를 받들고서부터 천지처럼 포용하고 덮어 주는 큰 덕에 더욱 감격하여 귀순하려는 마음이 가슴 속에 더욱 간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신 자신을 살펴보건대 죄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기에, 폐하의 은혜와 신의가 분명하게 드러남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조서를 내림에 황천(皇天)이 내려다 보는 듯하여 두려운 마음을 품은 채 여러 날 머뭇거리느라 앉아서 회피하고 게을리하는 죄만 쌓게 되었습니다. 이제 듣건대 폐하께서 곧 돌아가실 것이라 하는데, 만약 일찍 스스로 나아가서 용광(龍光)을 우러러 뵙지 않는다면, 조그마한 정성도 펼 수 없게 될 것이니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만 생각하건대 신이 바야흐로 3백 년 동안 지켜온 종사(宗社)와 수천 리의 생령(生靈)을 폐하에게 우러러 의탁하게 되었으니 정리(情理)상 실로 애처로운 점이 있습니다. 만약 혹시라도 일이 어긋난다면 차라리 칼로 자결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진심에서 나오는 정성을 굽어 살피시어 조지(詔旨)를 분명하게 내려 신이 안심하고 귀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소서.


최명길인조의 굴욕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곤룡포를 입을 것을 허락해줄 것과 삼배구궤두 대신에 남한산성에서 홍타이지를 향해 절을 하는 것 정도로 의식을 대신하는 것을 제안하는 등 많은 노력을 했다. 하지만 용골대는 완강했고, 죄인인 인조가 정문인 남문으로 나오는 것도 허락할 수 없다고 거부했다. 이날 김상헌정온이 자결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1월 28일 홍타이지의 답변이 도착한다.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는 조선 국왕에게 조유(詔諭)한다. 보내온 주문(奏文)을 보건대, 20일의 조칙 내용을 갖추어 진술하고 종사(宗社)와 생령(生靈)에 대한 계책을 근심하면서 조칙의 내용을 분명히 내려 안심하고 귀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달라고 청하였는데, 짐이 식언(食言)할까 의심하는 것인가. 그러나 짐은 본래 나의 정성을 남에게까지 적용하니, 지난번의 말을 틀림없이 실천할 뿐만 아니라 후일 유신(維新)하게 하는 데에도 함께 참여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 지난날의 죄를 모두 용서하고 규례(規例)를 상세하게 정하여 군신(君臣)이 대대로 지킬 신의(信義)로 삼는 바이다.

그대가 만약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새롭게 하여 은덕을 잊지 않고 자신을 맡기고 귀순하여 자손의 장구한 계책을 삼으려 한다면, 앞으로 명나라가 준 고명(誥命)과 책인(冊印)을 헌납하고, 그들과의 수호(修好)를 끊고, 그들의 연호(年號)를 버리고, 일체의 공문서에 우리의 정삭(正朔)을 받들도록 하라. 그리고 그대는 장자(長子) 및 재일자(再一子)를 인질로 삼고, 제대신(諸大臣)은 아들이 있으면 아들을, 아들이 없으면 동생을 인질로 삼으라. 만일 그대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하면 짐이 인질로 삼은 아들을 세워 왕위를 계승하게 할 것이다.[81]

그리고 짐이 만약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조칙을 내리고 사신을 보내어 그대 나라의 보병(步兵)·기병(騎兵)·수군을 조발하거든, 혹은 수만 명을 기한 내에 모이도록 하여 착오가 없도록 하라. 짐이 이번에 군사를 돌려 가도(椵島)를 공격해서 취하려 하니, 그대는 배 50척을 내고 수병(水兵)·창포(槍砲)·궁전(弓箭)을 모두 스스로 준비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대군이 돌아갈 때에도 호군(犒軍)하는 예(禮)를 응당 거행해야 할 것이다.

성절(聖節)·정조(正朝)·동지(冬至) 중궁 천추(中宮千秋)·태자 천추(太子千秋) 및 경조(慶吊) 등의 일이 있으면 모두 모름지기 예를 올리고 대신 및 내관(內官)에게 명하여 표문(表文)을 받들고 오게 하라. 바치는 표문과 전문(箋文)의 정식(程式), 짐이 조칙을 내리거나 간혹 일이 있어 사신을 보내 유시를 전달할 경우 그대와 사신이 상견례(相見禮)하는 것, 혹 그대의 배신(陪臣)이 알현(謁見)하는 것 및 영접하고 전송하며 사신을 대접하는 예 등을 명나라의 구례(舊例)와 다름이 없도록 하라.

군중(軍中)의 포로들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고 나서 만약 도망하여 되돌아 오면 체포하여 본주(本主)에게 보내도록 하고, 만약 속(贖)을 바치고 돌아오려고 할 경우 본주의 편의대로 들어 주도록 하라. 우리 군사로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다 사로잡힌 사람은 그대가 뒤에 차마 결박하여 보낼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내외의 제신(諸臣)과 혼인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하도록 하라. 신구(新舊)의 성벽은 수리하거나 신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대 나라에 있는 올량합(兀良哈) 사람들은 모두 쇄환(刷還)해야 마땅하다. 일본(日本)과의 무역은 그대가 옛날처럼 하도록 허락한다. 다만 그들의 사신을 인도하여 조회하러 오게 하라. 짐 또한 장차 사신을 저들에게 보낼 것이다. 그리고 동쪽의 올량합으로 저들에게 도피하여 살고 있는 자들과는 다시 무역하게 하지 말고 보는 대로 즉시 체포하여 보내라.

그대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는데 짐이 다시 살아나게 하였으며, 거의 망해가는 그대의 종사(宗社)를 온전하게 하고, 이미 잃었던 그대의 처자를 완전하게 해주었다. 그대는 마땅히 국가를 다시 일으켜 준 은혜를 생각하라. 뒷날 자자손손토록 신의를 어기지 말도록 한다면 그대 나라가 영원히 안정될 것이다. 짐은 그대 나라가 되풀이해서 교활하게 속였기 때문에 이렇게 교시(敎示)하는 바이다. 숭덕(崇德) 2년 정월 28일.

세폐(歲幣)는 황금(黃金) 1백 냥(兩), 백은(白銀) 1천 냥, 수우각궁면(水牛角弓面) 2백 부(副), 표피(豹皮) 1백 장(張), 다(茶) 1천 포(包), 수달피(水㺚皮) 4백 장, 청서피(靑黍皮) 3백 장, 호초(胡椒) 10두(斗), 호요도(好腰刀) 26파(把), 소목(蘇木) 2백 근(斤), 호대지(好大紙) 1천 권(卷), 순도(順刀) 10파, 호소지(好小紙) 1천 5백 권, 오조룡석(五爪龍席) 4령(領), 각종 화석(花席) 40령, 백저포(白苧布) 2백 필(匹), 각색 면주(綿紬) 2천 필, 각색 세마포(細麻布) 4백 필, 각색 세포(細布) 1만 필, 포(布) 1천 4백 필, 쌀 1만 포(包)를 정식(定式)으로 삼는다.


인조는 음력 1월 30일 성문을 열고 왕세자와 함께 삼전도[82]에 설치한 수항단에서 홍타이지에게 갓에 철릭 차림으로 삼궤구고두의 항복 의식을 치른다. 후에 이것은 삼전도의 굴욕이라고 불리게 된다. 해당 문서 참조.

결국 조선은 청나라와 강화 조약을 체결하였으며, 조약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명나라 황제가 수여한 고명과 책인[83]을 바칠 것.
  • 명나라와의 국교를 끊고 청나라와 군신 관계를 맺을 것.
  • 명나라의 연호 대신 청나라의 연호를 쓸 것.
  • 세자, 왕자 및 대시의 자제를 청나라의 수도(심양)에 인질로 보낼 것.
  • 청나라가 명나라와 가도[84]를 공격할 때 원병을 보낼 것.
  • 정기적으로 조선은 청나라에 사신을 파견할 것.
  • 조선의 인질이 조선으로 도망할 경우 무조건 심양으로 송환할 것.[85]
  • 양국 신하 자제들과의 통혼을 장려, 우의를 다질 것.[86]
  • 성곽을 보수하거나 새로 짓지 말 것.[87]
  • 조선은 매년 예물을 청나라에 세폐로 보낼 것.

세폐의 양은 황금 100냥, 백은 1,000냥, 수우각궁면(水牛角弓面: 활을 만들 때 필요한 소의 뿔[88]) 200우, 표범 가죽 100장, 차 1,000포, 수달 가죽 400장, 청서피(靑黍皮: 다람쥐류의 가죽) 300장, 후추[89](胡椒) 10두, 호요도(好腰刀) 26자루, 단목(丹木: 소목(蘇木)이라고도 하며 붉은 물감의 원료로 주로 천을 붉게 물들일 때 쓴다.) 200근, 호대지(好大紙) 1,000권, 순도(順刀) 10자루, 호소지(好小紙) 1,500권, 오조룡석(五爪龍席; 화문석의 일종) 4령(嶺), 각종 화석 40령, 백저포(白苧布: 흰모시) 200필, 각색 면주(綿紬: 명주) 2,000필, 각색 세마포(細麻布) 400필, 각색 세포(細布 : 麻布) 10,000필, 포(布) 1,400필, 쌀 10,000포.

그리고 이 전쟁의 결과를 후대까지 대대손손 알리기 위해 지금의 서울시 석촌호수 자리에 삼전도비를 세웠다.


7. 결과와 영향[편집]



이로써 조선은 개국 이래 이어오던 명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이 청과 군신 관계를 맺게 되었다.

요구 사항을 놓고 보면, 일단 세폐가 어마어마한 수치로 늘었다. 이는 명나라에 보내던 조공품의 몇 배에 달하고 병자호란 이전에 청의 공갈 협박에 보내던 세폐의 3 배에 달하는 수치다. 거기다 예전 중화 제국이 관례로 보답하는 하사품도 별 거 안 내줘서, 그야말로 등골 빠지는 수준의 세폐를 요구했다. 임란 이후, 명 사신들이 와서 뜯어갔던 걸 고려한다 해도 청나라의 요구로 세폐가 너무 크게 늘어서 조선이 지는 부담은 엄청나게 가중되었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이는 청이 세폐를 전쟁 배상금 명목으로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선은 항복조건으로 청의 명나라 공격에 병력을 파견해야 했다. 청나라군이 조선군의 참전에 재정지원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대명전에 참전한 조선군은 여러 전비를 스스로 부담해야 했다. 이것도 사실 명을 도와 사르후 전투에 참가한 조선군도 마찬가지로 스스로 군량을 가져가야 했으므로[90], 청나라가 아주 가혹했던 것은 아니다.

명나라 병부상서 홍승주가 직접 대군을 끌고 참가한 송산 전투에서 조선군 및 소현세자봉림대군은 청나라편으로 참전했고, 이때 항복한 명군 장수들이 조선군의 저격[91]에 피해가 컸다며 이를 가는 경우도 있었다.[92]

물론 장기적으로 보면 임진왜란 이후의 명나라에 사대하던 시절보다 크게 나빠진 게 없다고 볼 수도 있다. 사실 명나라도 모문룡이 가도에 주둔하면서 조선을 삥뜯고 있었으며, 아예 명나라 가도의 동강진은 동맹국 조선에 해적행위까지 하고 있었고, 조선왕조실록을 봐도 모문룡의 행패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었다. 청이 입관한 이후 전쟁 배상금조로 내야 했던 세폐도 크게 줄였고, 하사품이 늘어나 이전의 정상적인 조공 외교 관계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것은 청나라가 대륙을 장악한 이후의 일이고, 어쨌든 청나라가 1644년 입관하기까지 약 8년간은 조선은 전쟁에서 진 대가를 분명히 치러야 했다.

무엇보다 자신들에게 조공을 하던 오랑캐에게 반대로, 종속되어 조공국이 된 사실[93] 조선인들은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이는 가히 윤관의 여진 정벌 이후 순식간에 완안 아골타의 금나라가 군신 관계를 주장한 상황 그 이상이었다. 생각해보자. 청나라 황실의 조상 몽케티무르는 소시적 태조 이성계의 부하였고, 세종대왕 때는 4군 6진의 땅을 뜯어내기도 했고, 유목민[94] = 예비 약탈자라는 상황 탓에, 약탈하러 오기 전에 작살내 놓자는 생각으로(예방전쟁) 조선군이 틈틈히 쳐들어가서 여진족의 농토에 소금을 뿌리고 건물들을 작살내는 통에 노약자들이 울부짖었다는 기록도 많다. 그러니까 조선 초의 여진족은 그냥 조선군과 명군의 동네북이였다. 그것이 이렇게 뒤집힌 것이었다.

조선은 얼마 뒤 멸망한 명나라에 비해 매우 관대한 처분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청이 조선을 멸망시키지 않은 것은 최초의 전략적 목표가 명을 치기 전에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였기에, 당연히 인조는 퇴위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갔지만 여러 방법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있었다. 그나마 무엇보다 탈출한 조선인들에 대한 청나라의 강제적인 송환 요구도 초기의 일이지, 나중에는 적당히 눈감아주는 쪽으로 바뀐다.

그래도 많은 백성들이 속량되는 일이 어려웠는데 그 이유가 가관이다. 병자호란 후 조선의 권력자들이 포로로 잡혀간 본인들 가족들만 빨리 구하기 위해 은 수천냥에서 수만냥의 몸값을 치르자 조선인 포로 몸값이 천정부지로 올라갔고, 당연히 이런 돈이 없는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간 가족이 자력으로 탈출하거나 조선인 포로 주인의 자비를 바라는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 이에 최명길이 이러다가 힘 없는 백성들만 속환되지 못하게 된다며 청나라에 가격상한제를 제시했지만 실효는 없었던듯.

최명길 등은 한겨울에 심양까지 끌려가는 도중에 죽은 사람들 빼고 도착한 조선인 포로들은 최대 50~60만 명 정도라고 황당한 주장을 하나 당시 심양 전체 인구가 수십만으로 당연히 터무니 없이 과장된 수치다.(당연하지만, 정확히 조사하고 집계한 숫자가 아닌 조선 측에서 '대충 60만 명 정도 끌려갔다고 하더라' 하는 식의 추정치이다. 과거에는 과장해서 기록하는 경우가 매우 흔했다.[95] 애당초 당시 후금은 기근과 명나라의 경제제재로 인한 극심한 경제난과 식량난으로 60만 명이나 되는 인구를 새롭게 부양할 능력도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96] 정확히 말해 그 당시 후금의 상황이란 경제난과 식량난에 포로와 노예로 끌려온 한족들이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킬 정도로 식량난이 극심한 최악의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60만 명 이라는 저 숫자부터가 후금 측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기록이다.. 실제로 구범진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또한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이 50만~60만 명에 달했다는 통설이 터무니없다고 반박하였다. 출처) 여성 포로의 경우 인터넷에서 떠도는 자료가 있다. ' 청 태종 홍타이지가 "조선 여인을 학대하는 남편은 처벌하고, 조선인 첩을 학대한 본처는 남편 사망 시 무조건 순장하라"고 칙령을 내릴 정도였다.' 그러나 이 문제는 출처가 불분명하고 여성 포로에 관한 이야기들은 상당히 과장된 게 많다는 게 중론이다. 청측 공식 기록에는 왕공 귀족 장원의 농노나 뽀이가 되었다고 되어있고 애당초 포로 확보 이유가 노동력이라 남성이 주 대상이고 여성은 포로로 끌려가기 전 자결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남성이 주류다.

명을 칠 때 조선을 끌어들이거나, 러시아가 남하하자 나선정벌에서 병력을 요청한 이유는 만주족 병력이 적은데다가, 조선의 조총수가 청나라군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 전쟁의 승리로 청은 뒷통수가 약간 근질근질하던 후방을 단단히 다져두었고, 경제 문제를 상당 부분 해결했으며, 명을 공격하는데 모든 전력을 쏟아부을 수 있게 되었다.

여담으로 인조는 왕좌를 지킨 이후에 대대적인 처벌극을 벌여 김경징, 장신을 비롯해서 강화도에서 달아났던 자들을 모조리 잡아 죽였고, 호종하지 않은 신하들과 근왕병을 데리고 오지 않은 장수들을 적을 눈앞에 두고 임금을 버리고 달아난 죄를 물어 엄벌했다. 이때 김자점도 도원수가 되어 뭉기적거리고 있었다고 처벌 당했으나, 이후 세자빈 민회빈 강씨의 사사와 봉림대군의 세자 책봉 때 인조에게 영합함으로 최고 권신 자리를 차지한다. 그리고 호종한 신하들에겐 상을 주었으나 김상헌, 김상용 등에게는 영 좋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양사가 합계하기를,

강도(江都) 수호의 임무를 받은 제신(諸臣)들이 방어할 생각은 하지 않고 날이나 보내면서 노닐다가 적의 배가 강을 건너자 멀리서 바라보고 흩어져 무너진 채 각자 살려고 도망하느라 종묘사직 그리고 빈궁(嬪宮)과 원손(元孫)을 쓸모없는 물건처럼 버렸을 뿐 아니라 섬에 가득한 생령(生靈)들이 모두 살해되거나 약탈당하게 하였으니, 말을 하려면 기가 막힙니다. 검찰사(檢察使) 김경징(金慶徵), 부사(副使) 이민구(李敏求), 강도 유수(江都留守) 장신(張紳), 경기 수사 신경진(申景珍), 충청 수사 강진흔(姜晋昕)은 모두 율을 적용하여 죄를 정하소서.

군부(君父)가 외로운 성에 거의 2달이 되도록 포위당하여 군사는 고단하고 양식은 적어 조석을 보전할 수 없었으므로 머리를 들고 발돋움하며 구원병이 이르기만을 날마다 기다렸지만 팔도의 군사를 거느린 신하로 한 사람도 성 밑에서 예봉을 꺾고 죽기를 다투는 이가 없었으니, 군신(君臣)의 분수와 의리가 땅을 쓴 듯 없어졌습니다. 함경 감사 민성휘(閔聖徽), 전라 감사 이시방(李時昉), 경상 감사 심연(沈演), 황해 감사 이배원(李培元), 북병사 이항(李沆), 남병사 서우신(徐佑申), 전라 병사 김준룡(金俊龍), 황해 병사 이석달(李碩達), 경상 좌병사 허완(許完), 충청 병사 이의배(李義培)를 모두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김경징·이민구·장신 등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신경진·강진흔 등은 그들이 지킨 곳을 김경징에게 물은 뒤에 처치하라. 민성휘 등은 용서할 만한 도리가 없지 않으니 우선 죄를 논하지 말라. 삼남(三南)의 병사는 이미 죄를 다스리도록 하였다.”

하였다.


7.1. 조선의 패배 원인[편집]


정묘호란과는 달리 병자호란에선 준비를 어느 정도 했음에도 패한 이유는, 인조반정, 이괄의 난정묘호란을 거치며 나타난 정권의 불안정성과 믿을 만한 군사력 및 무장들의 손실이었다. 그나마 남은 사람이 최명길의 장인인 장만과 그 장만의 후원을 받은 남이흥, 이항복의 제자로 북인과 거리가 있던 정충신 정도인데 3명 모두 병자호란 이전에 사망했다. 특히 남이흥의 죽음에는 인조 정권의 문제점이 크게 작용했다. 인조가 손수 수레를 밀어주며 보냈던 이괄이 난을 일으켜 평안도 방어군이 반신 불수가 되어버리고 도성이 점령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자 인조 정권은 무장들에 대한 기찰을 대대적으로 강화하고 믿을 수 있는 인물인 남이흥에게 이 임무를 맡겼다.

정권 보위를 위해 한 행동이었으나, 이는 지방 군사들의 훈련도가 부실해지는 결과를 초래했고 정묘호란 때 크게 문제가 된다. 더 큰 문제는 전쟁에 문외한인 조정 대신들이 끼어들었다는 점이다. 정묘호란 당시 이귀는 전략 거점인 안주목을 사수해야 한다는 남이흥의 주장을 무시하고 구성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인조는 이귀의 주장을 받아들인다.[97] 그 결과 청군은 안주목으로 곧바로 쳐내려왔고, 수 백의 병력만 데리고 긴급 파송된 남이흥은 분전 끝에 패하자 자살한다. 가뜩이나 지휘관이 부족한 상황에 이런 식으로 소모시킨 대가는 병자호란 때 도원수 김자점에 강도검찰사 김경징이란 참사를 불러왔다.[98]

  • 청나라가 수만 대군으로 남한산성을 포위한 그 위태로운 상황에서, 김자점이 조선 최강의 군대인 함경도군[99]을 포함한 근왕군 수만을 이끌고 남한산성 근처에라도 박두하여 왕과 조정을 보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청군을 압박했더라면, 청군을 견제하여 부담을 주었을 것이고, 인조가 친히 나와 항복하는 치욕적인 상황이 경감되었을 것이다.[100][101] 하지만 황해도에서 청군과의 교전 이후 짱박혀 있다가 양평으로 내려온 김자점은 상황을 관망하기만 할 뿐 어떤 군사적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102]

  • 김경징이 제 역할을 다했다면, 최소한 청군의 강화도 상륙을 지연시켜 왕족 일가가 대피할 시간은 벌었을 것이다. 그리 되었다면 인조가 전의를 상실하여 항복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한 당시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근왕군이 재정비하여 올라오고 있었으며, 명나라도 산동 반도에서 강화도 방어를 도울 수병을 보내려던 중이었다. 봉림대군 등이 근왕군을 소집하여 남한산성 밖에서 김자점, 심기원 등과 청군을 견제했다면, 패배할지언정 인조가 직접 무릎꿇고 절하는 등의 굴욕은 면했을지도 모른다. 김경징은 전쟁 이전부터 장신과 병권을 두고 다투며 내분을 일으켰으며, 강화도의 방비를 점검하는 본연의 임무를 망각하고 안에 틀어박혀 놀기 바빴고, 전투 중에는 육전 지휘에까지 개입하여 병사들이 죄다 흩어지게 만든 후 혼자 도망치기까지 했다. 결국 강화도는 함락되었고, 봉림대군과 세자빈 등 왕족 일가가 포로로 잡히게 되었으며, 이는 인조가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103][104]


7.2. 청나라의 승리 원인[편집]


이미 청나라는 10년전 정묘호란이라는 반면교사를 갖고 있었고, 청은 조선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정묘호란때 청군은 안주성을 공략하면서 농성중인 조선군을 전멸시켰지만, 이 때문에 며칠 허비한 끝에 조선이 대응태세를 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고, 조선 조정은 강화도로 도피하여 장기전으로 흘러갈 여지를 주었다. 결과적으로 병력이 부족한 청군은 명나라의 역습이 두려워 조선과 어정쩡하게 강화를 맺고 철군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정묘호란에 청나라군은 조선을 항복시킨다기보다도 자신들과의 국서조차 계속 거부하는 조선과 소통의 경로를 트고, 대명전쟁에서 조선을 중립에 못박아 두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산성(의주성, 정주성, 안주성)을 함락시킬 때마다 조선에 사신을 보내 강화를 요청했고, 결국 후금군이 평산까지 와서야 조선이 교섭에 응해 강화가 성립되었다.

이걸 교훈으로 삼아 병자호란 때는 조선 조정이 도피할 시간을 주지 않도록 아예 시간낭비를 할 여지를 철저히 배제하고 수도로 육박해 들어가는 한편 강화도 공략에도 만반의 준비를 했다. 어차피 청군 기병은 단기간의 보급품은 스스로 휴대했으므로 보급로를 확보할 필요도 없었고, 그러므로 의주의 백마산성이나 그밖의 조선군이 지키고 있는 여러 산성들을 그냥 지나쳐 무인지경으로 닥돌해 들어갔다. 인조는 청군이 국경을 넘은지 10일이 지난 12월 13일에야 적이 한양에 육박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14일에 부랴부랴 강화도로 가려고 했으나 청군이 선수쳤기 때문에 길이 막혀, 결국 남한산성으로 가서 농성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청나라 기병의 신속한 진군 속도가 제일 큰 승리 요인이였다. 원래 만주족은 인구가 적고 가용 병력이 적었기 때문에[105] 주둔병을 두지 않고, 단기간의 보급품을 스스로 휴대한 기병의 기동력으로 승부하는 경향이 강했다. 청나라 기병은 누르하치 시절부터 여진통일 전쟁 및 명나라와 몽골 여러 부족과 전쟁으로 50년간 거의 매년 전투를 했을 정도로 실전경험도 많았으며, 만리장성을 우회하여 본거지 심양에서 약 2000km 떨어진 산서성까지 며칠만에 도달하여 여러번 치고 빠지곤 했다. 병자호란 직전인 1635년에는 다시 산서성보다 더 먼 내몽골 서쪽 끝의 오르도스까지 원정해서 북원의 칸인 링단 칸을 패퇴시키고 내몽골 여러 부족을 복속시킨 후 원나라 전국옥새를 손에 넣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을 침공한 청나라 기병이 어떻게 움직일지는 명약관화했다.

그리하여 청나라 기병은 정묘호란 때와 달리 산성을 건들지 않고 왕을 잡기 위해 한성으로 쾌속 진격을 했으며, 결국 청나라는 인조가 강화도로 가는 길을 차단하는데 성공한다 얼마나 빠른 진군 속도냐면 의주성에서 안주성까지 단 2일만에 180km 거리를 돌파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4일도 안되는 시간동안 안주에서 개성까지, 즉 235km를 왔다. 이것은 하루 평균 78km를 진군한 것이다. 이로부터 약 300여년 뒤 제2차 세계대전전격전으로 유명한 에르빈 롬멜의 기갑사단이 하루에 70km를 못 넘은 걸 생각하면 청나라가 얼마나 신속하게 남하했는지 알 수 있다. 이는 위에서 보았듯이 청나라 기병은 여러번 내몽골까지 수천km를 기동해본 적이 있기 때문에 심양에서 약 600km밖에 안되는 한양까지는 기동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기병이 원정중 보급을 스스로 휴대해야하는 허허벌판인 내몽골에 비해 조선은 인구도 많고 진격로의 선상에서 약탈도 할 수 있기 때문에, 보급의 난이도도 훨씬 낮았다.

이들 청군의 치휘관은 조선에 사신으로 자주 왔던 타타라 잉굴다이하다나라 마푸타였고, 이괄 잔당이 청나라로 귀순하여 길잡이들은 여럿 있었다. 당연히 조선 지리, 진격로에 대해 익숙해진 청군이 길을 잃을 위험도 없었다. 여기에 이괄의 난때 약 1~2만의 조선의 북방군이 소멸한 것도 청군의 승리에 기여했다는 주장도 있다.[106]

게다가 이미 인조는 정묘호란 때와 똑같이 강화도로 몽진하려는 우를 범했다. 청나라는 이미 조선 조정이 이렇게 움직일 것을 알고, 약점인 바다싸움에 대비하여 강화도 공략에도 만전을 기울였다. 모문룡 옛부하들이 가지고 온 수군 또는 조선에 귀화한 여진족 어부들의 도움으로 강화도를 공략해 쉽게 왕자들을 포로로 잡고 승리할 수 있었다.[107]

결론적으로 청나라군은 지연전을 펴러던 조선측의 전략을 훤히 알고 이를 분쇄하기 위해 장기인 기동력을 철저히 활용했다. 여기에 정묘호란 때의 경험으로 조선조정이 대피하게 될 강화도 공략이 승리의 열쇠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점을 제대로 알고 움직인 청나라는 기동력으로 조선의 지연전을 무력화시켰고, 이어 바다를 건너 강화도를 함락시키고 결국 조선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다.


8. 영향과 평가[편집]



8.1. 흑역사로 치부된 전쟁[편집]


병자호란은 그 피해가 임진왜란보다 상대적으로 경미했다고 생각될 수 있으나, 그 충격과 영향은 임진왜란 못지않게 조선에 큰 타격을 주었다.

오늘날 조선 중기는 사극에서도 일반인에게도 매우 흥미로운 시기이지만, 호란에 대한 관심은 왜란과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미미한 편이다. 왜란은 전쟁 초반에는 여러 성읍들과 수도인 한성이 일본군에게 함락될 정도였을지언정 중반, 후반에는 침략 / 점령한 일본군들을 몰아내는 통쾌함은 있었고, 이순신, 권율, 곽재우, 김시민, 조헌 등 수많은 명장 영웅들이 한산도 대첩, 행주 대첩, 진주성 전투, 명량 해전 등 주요 전투에서 활약해 승전을 거두며 많은 이야깃거리들을 양산했다. 그리고 왜란을 주도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후 정권을 잃고 멸문지화를 당했는데 조선은 이를 "천벌"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외에도 한민족은 여러 전쟁을 겪었으나 이렇게 별다른 항쟁도 못해보고 철저히 패배한 전투는 거의 없을 정도이다.

임진왜란에서는 도오토미의 침략의지가 너무나 뚜렷했고, 조선은 이에 맞서 여러 호국 영웅이 나왔으나, 병자호란은 청나라의 침략의지보다는 조선측의 외교실패나 전략적 실책이 너무나 명확한데다가, 전쟁이 터지자 항쟁은커녕 청나라의 전략에 말려들어가 철저히 패배했다. 청나라측은 심리전에도 능해서 침략의 명분을 조선측에 전가하는 선전을 펼쳤고, 그리하여 포위된 남한산성의 일선 병사들조차 주전파들을 청나라에 보내라며 조정에 항복을 압박하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조선측은 가혹한 청나라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고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조선은 20년전만 해도 자국을 상국이라고 부르던 여진족/만주족에게 참패를 당하고 상국으로 모시게 되었으며, 왕자들이 볼모로 끌려가는 초유의 사태에 대해 큰 충격을 받았다. 게다가 만주족과 청나라는 명나라가 부활해 오랑캐를 토벌해주기를 바라던 조선측의 바람과는 달리 이후로도 승승장구를 해서 대륙을 장악했고, 왜란을 주도한 도요토미씨는 대가 끊겼지만, 강건성세시기의 청나라는 조선의 사대부들조차 그 번영에 입이 벌어질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인조를 옹호하는 일부 역덕들이 반론을 제기하고는 있지만, 병자호란의 대중적인 인식은 조선이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낡은 성리학적 화이관 및 맹목적 사대주의를 고집하다가 참화를 당한 흑역사로 간주되고 있다.

  • 전쟁 기간이 2달 정도로 지극히 짧은데다가. 초창기에 산성을 무시하고 빠르게 진군했기에 피해 지역도 적은 데다가, 그만큼 기록도 적고 기간도 짧아서 피해도 상대적으로 적다. 청군의 침공로에 있던 평안도 지방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고 판단되지만, 이곳은 사실 조선 역사에서 변방지역이었고, 인구도 적었기 때문에, 조선의 핵심 농업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전라-경상-충청 지방이 완전히 쑥밭이 된 임진왜란의 피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다. 바로 앞에 '7년 전쟁'이라고 불렀던[108] 임진왜란이 있었으므로 아무래도 비교가 된다.

  •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학자들이 식민사관의 영향도 병자호란의 평가에 큰 영향을 끼쳤다.식민사관의 주 논거중의 하나인 만선사관과 타율성론이 병자호란의 주원인을 조선왕조의 무능탓이라고 돌렸다. 만선사관은 한반도(조선반도)의 역사는 만주에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므로, 만주의 패자가 명나라에서 만주족으로 바뀌었으나 조선이 이에 순응하지 못해 화를 자초했다는 것이고, 타율성론은 조선왕조는 자주적으로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지 못하고, 명나라에 대한 사대에 빠져 국제정세를 읽지 못했다는 것이다.

  • 신채호와 같은 민족주의적 역사관에서도 병자호란을 불러온 맹목적 사대주의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인조반정은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명나라에 대한 사대에 어긋난다는 명분으로 일어난 것이고, 인조 정권은 집권 내내 자국의 형편은 생각하지 않고 후금을 자극하다가 정묘호란이 벌어졌는데도, 이에 교훈을 얻지 모하고 계속 비현실적이고 사대적인 태도를 고수하다가 침략을 당했다는 것이 이들의 논지이다.

  • 사대에 대한 인식의 변화. 이 당시에는 재조지은 담론에서 보듯이 '명에 대한 사대'라는 명분을 무시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사대주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식이 좋지 않다. 오늘날 전근대 중화체제가 일변하여 중국을 진정으로 한국의 상국으로 보는 인식이나 중국에서 많은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진지하게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만주족오랑캐로 보는 시선도 사라졌다. 이런 인식의 변화에다가 이미 농민반란이 빈발하며 몰락해가던 당시 명나라의 상황도 부각되는 만큼 전쟁에 대한 원인으로 흔히 간주되는 '명에 대한 사대'가 오늘날에는 한심하게 보일 수 밖에 없다.

  • 조선의 전쟁 수행 및 사후 처리에서의 문제점, 인조가 자초한 일부 실책들. 인조와 조선 정부의 군 인사 정책은 너무나 한심했고, 그렇지 않아도 불리한 상황에서 이는 조선군의 약화를 초래했고 결국 패배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전후 인조는 이런 책임자들의 처벌을 게을리하고 끝까지 비호했다. 여기에 소현세자에 대한 홀대와 민회빈 강씨의 옥사 등 개인의 인성 부분에서도 좋은 점수를 줄 수 없는 행동을 했다. 이 때문에 집권 후반기에 대동법 개정 등 개혁의 성과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인조 정권은 악평을 받을 수 밖에 었다.

  • 향토사적 연구 기반의 부재. 치욕의 역사라 해도 일단 자기 지역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어떻게든 관심을 불러일으킬 여지가 있으나, 전쟁의 주 무대인 경의연선 거의 대부분이 북한에 있다보니 향토사 연구 같은 걸 할 환경이 못된다. 향토사 같은 것도 남한에서는 경제가 먹고살만해진 90년대부터 향토학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연구인데, 북한에서는 당장 그런 걸 연구할 형편이 못되고, 설령 연구가 되더라도, 남한까지 그 연구성과가 전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북한의 강력한 국수주의-민족주의 하에서 민족의 흑역사인 병자호란에 대한 연구는 객관적으로 되기 힘들다. 남한에서는 그나마 남한산성을 둘러싸고 격전이 벌어졌던 광주시성남시 정도가 관심이 있는 편지만 강화군도 병자호란보다는 대몽항쟁이나 군내에 산재한 군사유적들과 연관된 병인·신미양요 쪽에 집중하고 있다.

이렇게 병자호란의 결과는 인조정권 및 조선왕조의 무모한 대명사대주의 및 화이관에 있다고 평가되지만, 2010년대부터 어떤 학자들은 인조책임론을 앞세운 전통적인 병자호란에 대한 통념에 반대해, "병자호란은 애초에 조선을 정복하기 위한 전쟁이 아니었고 청나라의 식량난 때문에 오히려 조선을 정복하려는 시도 자체가 청나라의 자멸행위였다." , 혹은 "처음에는 진짜로 조선 정복이 목적이었는데 천연두 때문에 그 목적이 급히 수정되었다."는 설을 제기하는데, 이를 근거로 일부에서는 인조 옹호론의 근거를 삼고 있다. 그리고 인조 옹호론까지는 아니더라도 역덕들 사이서도 청나라를 욕하고 비방하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는데 막말로 당시 청나라는 아편전쟁기 영국과 다를 바 없는 양아치 나라라고 하며 아편전쟁은 병자호란의 업보다. 이런 식의 주장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최근 들어 한국 내에서의 반중, 혐중 기조가 강해짐에 따라 현재 중국의 행태를 호란 당시 청나라의 행태에 빗대며 현재 중국의 패권주의의 원류가 바로 청나라라는 사이비 역사를 주장하는 쪽도 생겨나고 있다.


8.2. 인조옹호론[편집]


앞서 언급했듯이, 인조와 조선 정권은 나름 대비를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광해군의 군사 계획을 그대로 이어받아 청나라의 침입을 방비하려 했다.

하지만 광해군 시절의 사르후 전투 이후 후금의 기세가 더욱 세지자[109] 국방에 관심을 보이는 모습도 광해군 일기와 인조 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광해군 대에 북방에 배치한 숫자들의 병력은 상당했고, 무기들도 꾸준히 지원하고 군사 훈련도 자주 시키는 모습이 보이며, 쓸만한 무장들을 골라내 배치시키며 이 때 정충신과 남이흥 같은 유능한 장수들이 발탁되어 중용되기도 했다.[110] 또한 홍타이지를 경계하며 홍타이지를 포섭하려 시도하면서도 동시에 홍타이지와 다이샨을 이간시키려는 시도도 벌어졌고, 후금에 대한 첩보를 명하여 상세한 정보를 얻어내고 홍타이지 포섭 시도는 명나라에는 그냥 적진을 탐색하는 것으로만 알려지도록 속여넘기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당시 거의 대부분의 조선인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설마 단 5일만에 의주에서 서울까지 오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하루에 약 75km 이상 주파한 것으로, 2차대전 당시 전격전의 대명사인 롬멜의 기갑부대보다 빠른 속도였다. 병자호란 당시엔 고속도로는커녕 제대로 된 포장도로 조차 없던 흙길이었다. 광해군은 홍타이지가 왕위에 오르면 반드시 조선을 칠 것이라 보고 서북 방면에 병력을 집중시켰다. 도성의 병력이 3,000명 밑으로 떨어져서 문제가 될 정도였다.

하지만 당시 청나라가 조선에 새로이 요구한 군신관계는 그 이전의 형제관계와는 달리, 명의 번국으로서 사대가 완강했던 당시 조선 사대부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명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는 하나 굳건히 버티고 있으며, 게다가 신앙적으로 명을 부모의 나라로 섬기고 있었다.[111] 오히려 청이 산해관을 넘지 못하고 결국 자체붕괴할 가능성도 완전 배제할 수 없었다. 명이 부모의 나라에다가, 임진왜란 때의 재조지은까지 있어, 그 신앙이 크게 강화되었기에 이를 저버린다면 내부적으로 반정이 다시 한번 일어날 수도 있다.[112] 이는 대명의리를 반정의 한 명분으로 집권한 인조 정권 자체의 한계이기도 했지만, 현실적으로 봐도 당시 조선은 이중외교 이상을 할 수가 없기도 했다. 즉, 광해군이라고 해도 이 점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고, 청나라 입장에서도 조선이 확실하게 굴복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청이 받아들일 가능성도 별로 없었다. 즉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물론, 그들이 쳐들어온 가장 근본적인 전략적 원안 자체는 광해군의 사르후 전투 등에서 명과 청이 공유했던 인식론으로서, 조선이라는 국가는 광해군 정권처럼 결국에는 명 제국에 부역할 가능성이 있는 후방전선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이는 웃기게도 명이 바랬던대로 광해군이 후금에 대하여 어그로를 끄는 역할을 수행해주면서 명이 바랬던 대외전략이 이루어진 것이기도 했다는 한계는 있다. 요약하면 광해군이 무슨 짓을 하든지간에, 명은 조선을 후금에게 대신 쳐맞아주는 역할의 고기방패로 던져주고 뒤에 숨어서 전략을 굴리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사실 조선에 대한 수탈과 후금의 조선침략과 동시에 명나라의 방관 및 느린 개입이라는 큰틀에는 큰 변화는 없었으리라는 예측이 많다. 상당수의 옹호 측에서도 광해군 개인이 신경썼던 첩보의 의의를 고평가 해주는 것과, 구체적인 외교력의 실제 파급력은 전혀 별개라는 평가이다.

거기에다 기본적으로 광해군이 육성해놓은 명에 대한 사대주의재조지은을 중시하던 유생들은 이 상황에 격렬하게 반발한다. 또한, 광해군을 왕위에 옹립한 이이첨 등이 있던 대북이 열렬하게 광해군의 현상 유지론을 반대했다. 한마디로, 광해군 개인의 첩보가 실리적이었다는 것은 국가적인 규모에서는 중요치 않다. 애시당초 광해군 본인이 온갖 숙청과 정치적 악행의 도구로 써먹으며 양성한 정치세력들이 거기에 반대했기 때문으로, 중립외교 따위는 실제로는 그 추진동력이나 실체가 제대로 없었고 현대인들이 정치적으로 만들어낸 이론이라는 것이다.

사실 광해군의 조정은 서인들보다 무식하고 위험했다는 증거이기도 한데, 심지어 서인들도 집권 후 숭명 배금을 주장했으나, 비변사 내부에선 광해군의 기조가 완전히 부정되지는 않았다. 광해군 정권의 구성원들은 세 임금의 정권 중 가장 친명파였고, 이건 광해군이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다.[113] 하지만, 광해군은 조선 왕조에서 단기간 옥사로는 손에 꼽을 정도로 신하들을 숙청했고, 이 과정에서 선조가 만들어놨던 인재 풀의 붕괴를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강경파 북인 친명파들을 이용하여 입바른 신하들을 없애다보니 꼴통 선비들만 조정에 득세하게 된 것. 이 때 항복한 강홍립을 통해서 후금과 내통하려고 해보려고 했으나, 홍타이지는 그냥 협박용으로만 사용했으며 별다른 구체적인 이득이 있었다는 구체적인 기록과 증거는 없다.

많은 사학자들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라는 것은, 오히려 명나라의 선양질에 꽁해서 입에 발린 칭찬은 하면서도 뒤에서는 명나라에게도 은근슬쩍 술수를 부리던 선조의 임진왜란 직후 외교 정책을 이어받은 걸로 보고 있다. 애초에 기회만 생기면 언제든지 조선을 전쟁터로 삼을 수 있었던 명과 청이라는 양대 제국에서 광해군의 의사와 외교를 특별히 신경 썼다는 기록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광해군이 청을 방비하고 동시에 명에게 최대한 관심을 덜 받으려고 했던 흔적은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광해군 시대의 외교 행보를 경험했던 명 제국, 청 제국은 "조선을 명이 철저한 따까리 고기방패로 써먹어야할 국가이자, 청이 지속적으로 싸움을 벌이기 위해서 꼭 행동불능에 빠트려야할 후방전선으로 보는 생각"을 각자 내부적으로 더욱 강화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렇듯 광해군 시절에 더욱 확실해진 조선에 대한 전쟁관을 두고, 광해군이 혼자서 무슨 생각을 했든지 어떤 제국에게도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던 중립외교라는 단어가 과연 맞는지에 대해서 학계에서는 이미 찬반이 존재하고 있다.

즉, 홍타이지와 후금의 강경파들은 무슨 일이 됐건 광해군의 사르후 전투 이후로 조선을 손봐주겠다는 생각을 더욱 강화했고, 명나라는 무슨 일이 됐건 광해군을 보면서 조선을 충실한 고기방패로 써먹으며 조선과 요동 뒤에 숨어서 살겠다는 생각을 도리어 강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즉, 조선을 언제든지 명 제국의 고기방패, 청 제국의 약탈 대상으로서 제국들의 전략이 더욱 확실하게 자리를 잡은 시기는 실제로는 오히려 광해군 치세가 그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병자호란 당시 인조 '개인'이 휘하의 대신들에 비해 특별히 어리석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남다른 혜안을 가진 것도 아니었던것은 맞다. 하지만 호란의 모든 원인이 인조에게만 있었는지와 광해군식의 외교정책이 현실적으로 효과를 발휘하고 지속 가능한 외교였는지 마지막으로 광해 시절의 조정 신료들이 그러한 광해군의 외교정책에 지지를 보내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반론이 있다라고 볼 수 있겠다.

이런저런 이유로 이렇듯 청을 관대하게 보면서 인조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은 상당히 널리 퍼져 있다. 분명 당시 정부의 실책이 있었고 명에 비하면 훨씬 나은 처분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청 역시 조선에 상당한 만행을 저질렀다. 기록만 봐도 <지천집> : 50만 명이 포로, <남한일기> : 심양으로 속환한 사람 60만 이상. <산성일기> : 심양 시장에서 팔린 사람 66만 이상, <비어고> : 60만 이상이 포로. 이런 식이다.

하지만 이 50만~60만이라는 추정치는 딱히 믿을만한 수치는 못 되기는 한다. 당시 청은 기근과 명나라의 경제제재로 인한 극심한 경제난과 식량난으로 인하여 50만~60만 명이나 되는 인구를 새롭게 부양할 능력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으며[114], 무엇보다 속전속결로 이루어진 당시의 전쟁 결과와 당시 조선인들에게 널리 퍼지던 천연두로 인한 조기 종전이라는 결과를 생각하였을 때 누가 천연두에 걸렸는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청군이 대규모로 포로들을 데리고 간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115] 결정적으로 저러한 포로들의 규모는 막상 청측의 기록들에서는 전혀 확인이 되지 않는다.


8.3. 인조책임론[편집]



8.3.1. 외교적 실책[편집]


임진왜란에서 병자호란으로 이어지는 기간 조선은 주변 강대국의 지역 패권을 두고 다투는 것과 그 흐름을 전혀 읽지를 못했다. 즉 조선 중심으로만 생각을 하고 당위성을 주장하는데 급급했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대방이라면 어떻게 하고자할 것인가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

즉 중립외교, 친명외교를 떠나서 조선은 후금이라면 어떻게 하고자 할 것인가 어떤 전략을 세우고 어떻게 실현하려 할 것인가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다. 조선은 전쟁의 피해자가 맞지만 후금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단지 약탈을 하기 위해서 조선을 친 것이 아니였다. 명나라를 제대로 치기 위해서 조선을 친 것이다.

외교를 제대로 진행하지 않으니 상대방에 대한 지식과 정보 이해가 없었고 결국 청나라에서 조선을 치고자 하는 것과 그 치고자 하는 것에 숙여야 하는지 아니면 대항해야 하는지, 대항을 할려면 어느정도의 준비가 필요한지도 제대로 된 이해도 없이 진행됐다.

병자호란은 단순한 양국의 싸움이 아닌 동아시아의 질서를 결정하는 강대국의 교체 과정의 한 부분이었다.


8.3.2. 군사적 실책[편집]


인조 대에 들어서 수적으로는 우세해진 조선이었으나, 병력의 질이라는 측면에선 평생을 전쟁터에서 살았던 청조에게 밀렸으므로, 중요한 전투마다 밀리게 되어 결국 인조는 삼전도의 굴욕을 경험하게 된다.

  • 청군의 쾌속 진군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였고 당연히 청야전술은 시행하지도 못했다. 당시 청군이 대략 15일~20일치 군량만 준비하였다는 사실과 청군은 조선에 들어갈 군량만 준비하였지 돌아올 때 필요한 군량 따위는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청야전술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한것이 뼈아픈 패전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겠다. 1달만 버텼으면 청군이 어려움을 겪었을지도 모른다는 역덕의 주장이 있다. 실제로 인조를 최대한 빨리 사로잡아 조선 전체를 조기에 항복시키는게 당시 청군의 목적이었던 만큼 청군은 조선의 주요 방어거점들을 전부 그대로 내버려둔 채 논스톱으로 한성으로만 쾌속 진군을 하였고, 여기에 한성에 청군이 도착하기전에 청군을 막기로 되어있던 평안도와 황해도의 조선군이 이러한 청군의 계획을 전혀 모르는 상황속에서 원래의 작전 계획대로 관민들을 모두 끌어모아 산성에 들어가서 청군을 상대로한 수성전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청군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고속도로를 탄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펼쳐지고 말았던 것이다.

  • 이를 두고 광해군은 청군이 곧장 한성으로 쳐들어오는 상황까지도 염려하고 있었는데 왜 인조는 그러지 못했느냐며 원망하는 목소리도 일부 있는데 사실 광해와 인조 사이에는 정묘호란이란 이벤트(?)가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만 한다. 즉, 아직 청군의 직접적인 침략을 겪어 본 적이 전혀 없었던 광해군은 모든 상황들을 다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 반면, 서북 각지를 들쑤신 정묘호란을 미리 맛본 인조는 다음 침략 역시 그렇게 이루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라고 합리적으로 예상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인조는 과거의 전훈을 너무나 충실하게 검토하고 곱씹은 나머지 전례에 심각하게 얽매여서 그만 일을 그르쳤다라고 볼 수 있겠다.

  • 전략적으로 굉장히 무능했다는 점이다. 전술했듯이 인조는 병법에 무지했다. 이괄의 난 1달 후에 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자 이를 방비하자는 논의를 하던 중 안주성[116] 병력이 너무 적어 보충해야한다는 의견에 "자고로 개쩌는 장수 한명만 있으면 아무리 병력이 적어도 전쟁에서 이겨. 그리고 오랑캐 추장이라는 놈은 x밥이니까 우리에게 필요한건 병력을 모으는게 아니라 뛰어난 장수를 찾아서 배치하는 거야."라는 황당한 말을 하게 되고, 이를 들은 정충신과 남이흥은 황당해 하며 인조에게 "아니 병력이 없으면 그게 말이 안되는 거라니까요. 저희가 아무리 모자라도 10만명만 주면 요동성도 정벌할수 있습니다."라며 대놓고 디스하기도 했다.[117] 거기에 병자호란 직전에는 사실상 선전포고인 격문을 청으로 보내버리면서 사실상 전쟁개시를 알려버렸다.

"군사가 적더라도 적절히 사용하는 것은 장수에게 달려 있다. 지킬 수 있으면 지키고 싸울 수 있으면 싸워야 하는 것이다. 싸우기만 해서도 안 되고 지키기만 해서도 안 될 것이다. 요는 임기응변하기에 달려 있다. 지키기만 하고 나가 싸우지 않으면 쳐들어오는 적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중략) "오랑캐의 추장은 한낱 하찮은 자일 뿐이다. 우리 나라 수천 리의 지방에 어찌 적을 제어할 만한 사람이 없으랴마는, 찾는 데에 정성스럽지 못하므로 쉽게 얻지 못할 뿐이다. 지금 장신(將臣)들이 모두 들어가 지킨다는 것으로 말하면서 출전할 생각을 갖고 있지 않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하니, 정충신이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는 본시 군사가 없는 나라인데 아무리 훌륭한 장수가 있더라도 누구와 함께 싸울 수 있습니까. 지금 10여 만의 무리를 뽑아서 1년 ∼ 2년 동안 훈련시킨다면 요동(遼東)도 진격하여 빼앗을 수 있을 것인데, 어찌 반드시 수어하려고만 하겠습니까. 지금 창성(昌城)·의주(義州)·안주(安州)의 제진(諸鎭)이 가장 요충지인데 이들 본진에 각각 민병(民兵)을 거느려 굳게 지킬 계획을 세우도록 당부하고, 입방(入防)하는 군사에 있어서는 그 수의 다소에 따라 편의대로 수어하도록 하고, 패강(浿江) 이서에는 가을 이후에 청야(淸野)하여 대비하도록 경계하면, 적이 오더라도 그 형세가 반드시 오래 머무르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남이흥이 아뢰기를,

"부원수의 수하 군사는 2천이 못 되니, 어떻게 이것으로 큰 적을 대항하겠습니까. 정병 수만을 교련할 수 있다면, 신처럼 못난 자도 목숨을 바쳐 싸워서 스스로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어 주찬(酒饌)과 표피(豹皮) 등의 물건을 하사하였다.

인조실록 5권, 인조 2년 3월 14일 무진 1번째 기사. 연안 부사 남이흥 안주 목사 정충신과 함께 오랑캐의 방어 등에 대해 의논하다.
이처럼 실무진들의 의견과 인조를 비롯한 국가 운영자들의 생각이 엇나가니 방비는 했다곤 하나, 제대로 된 방비가 되었을 리가 만무하다.

  • 인사 정책 면에서 야전을 경험해 본 실제 지휘관들에겐 제대로 된 군권이 없었다는 점도 한 몫 한다. 2번에 걸친 침략에서 평안도에서 이름을 남긴 장수들은 수백명만 갖고도 전쟁이 끝나거나 죽을 때까지 계속 싸웠다. 이들의 지휘력은 그나마 좋은 편이었는데, 인조의 측근들이 수만명을 갖고도 태만하거나 패배했던 행적과 매우 비교가 된다.

  • 단순히 병력의 질적 문제뿐만 아니라 인적 자원의 배치 또한 패전의 이유 중 하나였다. 인조는 정충신 같은 국제 첩보 인력을 국내 감시용으로 썩혀버렸고, 북방에서 유일한 군단을 이끄는 도원수에는 김자점, 최중요 거점인 강화도에는 장신김경징, 체찰사에는 김류 등을 배치했다. 그 결과 김자점은 북방군을 이끌고 있었음에도 남한산성의 상황을 수수방관했고, 김류는 아들인 김경징의 안전을 위해 직접 강도검찰사에 김경징을 천거해 관철시키는 등 국가의 존망이 걸린 상황에서 가족을 우선시하는 이기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장신과 김경징은 강도의 방어를 허술히 하여 청군에게 패배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이런 원균급의 간신들이 우루루 사령탑으로 편성되어 있었으니 전쟁은 처음부터 질 수밖에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이는 선조가 초기에는 이순신권율처럼 각 지방의 실무자들을 대우했고, 류성룡이라는 전시 재상을 잘 써먹으면서 인재 기용에 있어 특정한 당파 논리에 휘둘리지 않았다는 점과 대비된다. 물론 선조도 전쟁 도중에 이순신의병들을 족치려고 원균과 측근들을 기용하여 실무자들을 숙청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인조는 붕당에 매몰되어서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원균급 비실무자들을 권력의 측근 혹은 측근이 천거했다는 이유만으로 3명씩(김자점, 장신, 김경징)이나 대군의 군권을 주거나 중추 지역의 지휘관으로 앉혀놨을 정도로 차원이 달랐다.[118]

무엇보다 선조는 그래도 저 멀리 의주까지 도망이라도 잘 가서 왕이 사로잡히는 최악의 상황은 안 만들었다. 참고로 이에 대해서는 반박 견해도 있는데 하나는 이는 인조에게 억울하다는 것이다. 선조는 남쪽에서 명나라(요동)가 있는 북쪽으로 인조는 명의 지원을 생각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북쪽에서 바다가 있는 남쪽으로 가야만 했다는 것이다. 가령 한국전쟁 때의 이승만처럼 인조가 무려 부산까지 도망쳤고 이후에 일본의 지원을 받았다고 해도 일본을 상국이라 받들어 모시면 그런대로 친하게 지내온 명나라와 달리 불과 수십년 전에 임진왜란 당시 전쟁을 한 국가라서 그 정치적 후폭풍이 비교가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으로 또 다른 견해들도 있는데, 일본으로 굳이 갈 필요 없이 호남 방향으로 내려가서 제주도로 가도 된다는 견해와 부산까지만 가도 충분히 청군의 보급선이 길게 늘어나서 청군에게 큰 부담을 준다는 견해가 있다. 그리고 부산까지 갈 필요도 없고 강화도로 가서 황해도 수영, 충청 수영, 전라우수영의 수군들과 금군을 강화도에만 깔아놓는 데 성공해도 제해권이 부족한 청나라는 강화도를 쉽게 뚫기가 불가능하다는 견해, 마지막으로 남한산성에 충분한 물자만 비축했어도 장기간의 수성전이 충분히 가능했었다는 견해 등이다. 물론 어느 쪽이 맞든 간에 인조의 실책이 병자호란에서의 패전을 야기한 것만큼은 확실하다.


8.4.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대청인식[편집]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명과 사대를 끊고, 새롭게 청과 사대의 관계를 맺었으며 조선은 매년 사신을 보냈다. 하지만 조선은 병자호란의 원한을 잊지않고, 청나라를 정벌하자는 북벌론이 대두대기도 했다. 이 북벌론은 조정에서는 효종 사후 사그라들었지만, 민간에서는 계속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명나라 멸망 이후에 조선은 자발적으로 명을 기리며 선진 중화문명의 진정한 후예가 조선임을 자처했다. 이를 소중화 의식이라고 한다.

하지만 다만 이런 의식과는 별개로 겉으로는 양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일단 조선과 청은 커다란 마찰 없이 비교적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현종 시절 조선이 을병대기근이 들어 청나라에 원조를 요청하자 강희제는 직접 지시해 5만석을 보내주기도 했으며, 이 외에도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북경에 간 조선 사신들이 다른 조공국들보다 청황제의 우대를 받아 상석에 앉거나 여러 편의를 제공받았을 알 수 있다.

또한 숙종시절 백두산 부근의 영토를 둘러싸고 청나라와 조선은 분쟁이 일어났으며, 조선과 청나라는 군사적이 아니라 외교적으로 담판하여 평화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자세한 사항은 백두산정계비 참조. 병자호란 직후에 청이 조선에 고압적이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청관계도 정상적인 외교 관계로 돌아온 것이다.

이렇게 조선왕조는 청에 대해 애증이 있었던 듯하며, 삼전도에서 굴욕을 당한 원한은 구한말 고종 때까지 잊지 않았지만 청나라의 강건성세를 지켜 본 영정조대 이후로는 사대부들도 청나라가 정통 중화왕조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119] 당장 조선에 일본과 서방과 위협이 증대하자 오랑캐로 무시하면서도 상국으로 여기던 청나라에 자문을 구했다. 조선이 서양세력과 최초로 맺은 근대적 조약인 조미수호통상조약도 청나라 북양대신인 이홍장의 자문을 받고 진행된 것이다. 또한 조선 조정은 내정의 문제인 동학농민전쟁까지 청나라의 개입을 요청하기도 했으며, 이는 일본의 개입을 불러 조선왕조 멸망의 원인이 된다.

1897년 조선이 칭제를 하기 시작하며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고종은 황제를 칭하기 시작했다. 이때 청나라 조정에는 감히 조선이 참람되이 황제를 칭한다며 성토하는 분위기가 강했으나, 이미 청나라는 서양에 쥐어터지며 제코가 석자인데다가 청일전쟁이후 조선에 더이상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추인해주고 삼전도에서 맺은 군신관계가 폐기되고, 이제부터는 대등한 관계라는 것을 인정했다. 1899년에는 외교적 필요에 의해 청나라는 조선에 주한청국공사관을 설치하였다.


9. 여담[편집]



9.1. 청은 어째서 조선을 멸망시키지 않았나?[편집]


인조를 옹호하는 성향의 역사학자들이나 역덕들이 아래와 같은 가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들의 주장은 청나라가 조선의 반응에 상관없이 조선을 병합하러 침공했다가 아래와 같은 이유로 미수에 그쳤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9.1.1. 견해 1: 청나라(만주)의 경제난과 식량난[편집]


청은 조선을 멸망시키는 것까지는 어려웠다고 해도[120] 인조를 잡아가거나 혹은 폐위하고 세자 및 다른 왕족을 왕으로 대신 세움으로써 원나라고려에게 그랬듯 조선을 보다 직접적으로 조종할 수도 있었다. 애시당초 전쟁 패배 책임만으로도 인조가 폐위당할 이유는 충분했으니까. 그런데 청은 그러지 않았다.[121] 요나라금나라 예처럼 한반도에 발목을 잡히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가능성도 있고, 조선이 생각 외로 극렬하게 저항하는 대신 조용히 항복을 택하고 패전에 따른 복종 의사를 표시해서 그랬을 가능성도 있다.[122] 그 외에 다양한 가능성이 있지만, 진짜 본심은 그 당사자들 외에는 알 수 없다. 여하간 청은 목표했던 조선과 명의 연결 차단을 달성했고, 후방의 위협을 제거한 것도 모자라 경제적 이윤까지 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청은 원이나 요나라와 달리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유라시아를 제패한 몽골 제국[123]이나 연운16주를 장악한 요나라와 달리 장기전을 수행할 형편이 아니었다. 전략적 거점들을 제치고 오로지 수뇌부만 노리는 전략은 한반도를 침공하는 나라들이 항상 펼치는 전략이긴 하지만, 청군처럼 극단적으로 후방을 포기하면서 내려온 사례는 우문술의 30만 별동대와 소배압의 10만 대군의 침공, 단 두 차례 였었는데 결과는 참혹했다. 그럼에도 청나라는 이런 위험한 도박을 할 수 밖에 없었고, 때마침 조선 조정이 상상 이상으로 무능해서 운좋게 전쟁의 목표를 조기에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멸망과 왕조 교체를 노린 침공이라면 방어선 붕괴를 통한 장기전을 해야 했는데, 청나라는 장기전을 할 여력이 없었기에 빠른 지휘부 생포를 통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단기전을 했던 것이다. 즉, 병자호란 당시 청은 조선을 멸망시킬 정도의 힘을 가지지 못했기에 어느 정도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선에서 전쟁을 빨리 끝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설령 조선을 멸망시키는 데 성공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청의 국력이 매우 격렬하게 소모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는 조선이 멸망한지 얼마 안 되어 청나라도 엄청난 혼란으로 자멸하거나 이후 중원 정복이 대단히 어려워졌을 것이다.[124][125]

이 관점에서 보면 앞에 나왔듯 조선군 병사들이 빨리 전쟁을 끝내자고 시위한 것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만일 청의 목적이 조선의 완전정복, 합병, 멸망이라면 이들조차도 죽기 싫어서라도 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라도 계속 싸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싸우다 보면 또 극적 반전이 일어날 거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고... 하지만 청의 목표가 그냥 조선의 항복이기만 하다면 좀 다르다. 이렇게 되니 항복해도 나라가 망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네들이 죽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되면 병사들이 잘 싸울 수 있도록 병사들에게 자극을 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한데 인조는 그 점에서 실패한 것이다. 최대한 멀리 도망침으로써 병자호란을 장기화시켰다면 최소한 남한산성에서 고립되어 절망적인 상황까지 갈 일은 없었을 것이며, 그 이전에 지방 실무자들을 우대하고 김자점이 아니라 훨씬 유능한 다른 사람을 도원수로 임명하는 등 국방력 강화를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면 병자호란에서 조선이 이길 가능성이 매우 높았을 것이다. 결국 병사들이 빨리 전쟁을 끝내자고 시위한 것 자체가 인조가 자초한 일인 셈이다.


9.1.2. 견해 2: 조선 내에서 천연두의 유행[편집]


(수송에 이용할) 큰 길의 주변의 고려인[126]

에게 헛되이 범죄를 저지르지 말라. 그들은 모두 우리의 수에 포함될 고려인이니라.

성스러운 한(홍타이지)이 어리훈 버이러 두두에게 내린 조서 中 (《만문노당(滿文老檔)》숭덕 원년 12월 13일 기사)


1636년 12월 25일 홍 타이지가 조선 정복에 참전하는 팔기군에 하달한 군령에 따르면, 절과 능묘의 파괴, 순응하는 자는 살인, 항복한 성에 대한 약탈, 사회적 약자에 대한 가해 등을 금지하고, 항복한 자를 잘 보살펴 주고 변발시킬 것을 명령했고,[127] 홍타이지는 1637년 1월 8일 어리훈 버이러 두두에게 조선 북방의 수송로 인근의 조선인은 모두 청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기록들은 청이 조선을 어떤 방식으로든 통치하려 했음을 시사한다.

내 그 글(인조가 하달한 선전교서)을 보고서 너희 조선국이 확실히 변심함을 조사하며 알고…너희 조선국의 팔도를 평정하며 깊숙이 들어온 것이다…이제 나의 몸은 왕경에 머물 것이다. 여러 군대를 너희의 팔도에 나눠서 주둔케 할 것이다.

성스러운 한(홍타이지)이 안주의 관리(유림)에게 내린 조서 중 (《만문노당(滿文老檔)》숭덕 원년 12월 16일 기사)


1637년 1월 11일 홍타이지가 평안 병사 유림에게 보낸 조서에서는 자신이 직접 왕경(한양)에 머물고 여러 군대를 나누어 팔도에 주둔시킬 것이라고 발언했다. 따라서 병자호란은 정복전쟁이었음에 분명하다. 홍타이지에게 구체적인 구상은 없었다고 해도 그가 조선을 통치하려는 막연한 의도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홍타이지가 조선을 정복하지 않고, 인조의 항복을 받아낸 뒤 단순히 자신의 권위를 확립하는 것만으로 종전한 까닭은 무엇일까? 기존 서술에 따르면 경제적 파탄이 지적되고 있지만 《속잡록(續雜錄)》과 《병자록》 등의 사료에 따르면 청군은 한양에 입성한 뒤 경창 등을 털어 충분한 식량을 얻어 더 이상 약탈 행위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 1637년 2월 10일에 홍타이지가 수도인 묵던(선양)으로 보낸 조서에서 긴급하지 않은 소식은 3월 16일에 통원보(通远堡: 의주성과 묵던성의 중간 지점)에 사람을 보내면, 자신이 보낸 사람이 그를 조선으로 데려오게 할 것이라고 말했고, 3월 11일까지 압록강 지류에서 강화도 상륙전에서 사용할 배를 건조하는 것을 완료하고 요하 일대의 얼음이 녹으면 개성 앞바다에 주둔할 것을 명령했다. 이 조서에 따르면 홍타이지는 강화도를 함락하고 인조의 항복을 받아내려 했음으로, 청군은 실제 농성전 기간보다 족히 30일은 더 여유롭게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있을 예정이었던 것이다. 최근 청사(淸史)를 연구하는 구범진 교수(서울대 동양사학과)는 《청태종실록》숭덕 2년 7월 5일(1637년 8월 24일) 2번째 기사에서 홍타이지 자신이 직접 병자호란 때 ‘피두선귀(避痘先歸: 천연두를 피해 서둘러 귀환)했음을 언급했다면서 전쟁이 단기간만에 종전한 이유는 천연두였음을 고증했다.[128] 만약 천연두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남한산성은 약 30,000명 중 20,000여 명이[129] 전사·아사 등으로 죽은 대릉하성 전투와 같은 처참한 결과를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즉, 청이 조선을 정복한 뒤 조선을 직접적으로 통치하지 못한다고 해도 과거 금나라북송을 멸망시키고 위제(僞齊)위초(僞楚)라는 괴뢰국을 설치한 것과 같이 괴뢰 정권을 설치하고 때가 되면 그 정권을 해체하고 완전히 복속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만 이게 사실이어도 병자호란이 장기화될 경우 조선이 유리할 가능성도 추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천연두로 청군 병사들이 죽어나가는 상황에서 병자호란이 장기화되면 천연두로 인한 비전투손실에 임진왜란 때처럼 의병들을 상대하면서 입은 타격까지 더해져 병력 손실이 더욱 격렬해졌을 것이며, 심지어 황제인 홍타이지조차 천연두로 거동불능이 되거나 사망하거나 청군 내 숨은 반홍타이지파[130]의 하극상을 당한다면[131] 구심점을 잃은 청군은 혼란에 빠져 와해되거나 조선군에 각개격파 당할 것이다. 다만 인조가 남한산성에 틀어박혀 어설프게 농성을 하는 바람에 이 가능성은 현저히 낮아졌다.

병자호란을 장기화시키려면 제2차 여요전쟁 당시의 현종이나 임진왜란 당시의 선조처럼 적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도망쳐야 했다.[132][133] 다만 인조는 이괄의 난으로 북방이 사실상 텅 비어버린 상황에서 청군이 한양에 근접했을 때서야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선조처럼 빤스런할 준비를 못한 것이다. 다만 애초에 자기가 먼저 선전포고를 때린 상황이었으니만큼 상식이 있다면 전쟁 대비를 했어야 했고, 게다가 남한산성보다도 방어와 보급이 용이하고 유사시 해상 도주도 용이한 강화도로 기어들어갈 적기를 놓쳤다는 점에서 별로 인조를 옹호할 거리는 없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괄의 난으로 조선의 북방이 텅 비어버린 것과 별개로, 이괄의 난 자체는 병자호란 당시 조선군의 입장에서 임진왜란, 사르후 전투, 정묘호란과 더불어 중요한 실전경험이 되기도 했기 때문에 인조가 병자호란 장기화에 성공하기만 했어도 조선군은 과거의 실전경험을 잘 살림으로써 상황을 반전시켜 청군을 몰아붙일 가능성도 있었다.


9.1.3. 종합[편집]


위의 두 견해를 종합하자면, 숭덕제가 조선의 국체를 보존해준 것은 당시 청나라의 본토였던 만주의 경제난(식량난)과 조선 내에서 발생한 천연두의 유행 이 두가지 요소들이 모두 합쳐진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조선과 한창 전쟁할 때는 한양에서 경창 등을 털어 충분한 식량을 얻음으로써 (천연두라는 예상치 못한 변수를 제외하면) 병자호란 초기에 비하면 조금이나마 장기전에 강해졌을 수도 있겠지만, 막 병자호란을 일으켰을 당시엔 청나라 본토의 경제난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청나라는 인조의 무능함에 힘입어 승리한 것에 가까운데, 만약 인조가 임진왜란 당시의 선조처럼 농성 따윈 생각도 안 하고 최대한 도망침으로써 병자호란이 장기화되었다면[134], 아무리 청군이 한양에서 식량을 많이 얻었다 한들 청나라 본토의 경제난이 심각하고 조선 내에서 천연두가 계속 유행하는 이상 장기전에서 버티는 것도 분명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135] 그리고 당시 청나라는 중원에 정착하기 이전으로 말 그대로 기병 중심의 유목민족 국가였다. 참고로 유목민족이 정착민족이 다스리는 국가를 공략할 때 영토를 일일이 점령하는 장기전보단, 유목민족 특유의 우세한 기동력으로 거점 지역만 점령하거나 우회해서 수뇌부를 직격하는 단기전을 주로 하는 걸 감안한다면[136] 더더욱 그렇다.


9.2. 일본의 반응[편집]


병자호란 이전 조청 관계가 악화되는 것을 보던 에도 막부는 조선 측에 군사 원조를 제의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이를 단칼에 거절했다. 아무리 국교 정상화가 되었다지만 임진왜란이 바로 선대의 일인데, 이괄의 난 때 이괄군에 소속되어있던 일부 항왜(왜관)의 전투력에도 혀를 내둘렀던 조선 입장에선 당연한 반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만약에 이 제안이 받아들여졌다면 청일전쟁에서 벌어졌던 두 나라 간의 격돌이 260년 앞서 일어나게 됐을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제안이긴 했다. 참고로 에도 막부는 청과 국교를 맺지 않고 오히려 조선과 같은 소중화 사상에 입각해 오랑캐 취급을 하고 있었고, 조선이 항복한 후에는 어떻게 명을 버리고 오랑캐에게 입조했냐며 역으로 화를 내는 국서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이 정말로 대규모 군사 원조를 해줄 생각이 있었는지는 따져봐야 될 문제. 당시 일본은 시마바라의 난과 연이은 막부 내 다이묘 숙청으로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았기에 실제로는 일부 영주 중심으로 소수의 파병만 이뤄졌을 가능성도 높다. 게다가 해군의 경우 청 해군은 당시 명나라에서 투항한 한족들 덕에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훗날 삼번의 난에서 각각 손자와 아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정남왕 경중명과 평남왕 상가희는 모두 해군 중심의 모문룡 군 출신으로서 청나라에 귀순한 사람들로, 강화도 공략전에 참전했다. 영문 위키 참고. 청 말기에 가서 영국군에게 추풍낙엽처럼 털리는 바람에 정크선에 대한 인식이 나빠졌지만, 명 시기까지만 해도 강한 해군력을 자랑했다. 고로 일본군이 청과 해군으로 맞붙었다면 별 도움이 안되었을 확률이 높다.

약해진 조선군을 보고 일본군이 조선 재침공을 시전했을지 모른다는 견해도 있긴 한데, 임진왜란 이후 미쓰나리와 도쿠가와의 내전으로 연이어 많은 병력을 소모했던 일본이 조선에 임진왜란 때처럼 대규모 병력을 바로 파견할 여건이 되었을지는 의문이다. 또한 임진왜란 덕분에 힘이 빠진 도요토미 가문을 물리치고 에도 막부를 설립한 도쿠가와 가문 입장에선 내실 다지기도 급했기에 조선 정벌에 딱히 메리트를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오히려 반대로 에도 막부는 조선이 망하면 다음 차례는 자기들일 것이라는 것을 비록 실패했지만 과거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으로 몸소 체감했기 때문에 정묘호란 직후부터 조청 관계에 대단히 관심을 가지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137]

한편, 쓰시마 섬 도주는 정묘호란 직후의 혼란을 틈타 조선과의 관계에서 실익을 챙기고자 노력했는데, 실제 조선한테서 삥을 뜯는 것도 성공한다. 문제는 쓰시마의 가로(家老)이던 야나가와 시게오키가 도주 소 요시나리와 뒤지게 싸우다가, 과거 쓰시마가 조선에게 쳤던 사기를 에도 막부에 까발렸다는 것이다.[138] 허나 시게오키가 막부 핵심 인사와 친한 자신의 인맥을 믿고 벌인 하극상은, 정작 조선과의 외교 관계를 중시한 막부 측에서 대 조선 외교 노하우를 지닌 소 가문의 손을 들어주면서 시게오키가 처벌을 받는다. 이 사건은 당시 조선에서도 큰 관심을 가지고 지켜봤는데, 청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과정에서 일본마저 조선과의 외교를 전담하는 쓰시마를 건드리고 있으니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조선은 남쪽 방면의 안정을 위해 일본에 유화책을 쓸 수 밖에 없게 된다.

조선이 왜의 원병을 받아들인다는 가정은 역덕들이 즐겨 논하는 가상역사의 소재로서는 흥미롭겠지만, 현실은 당시에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화이관을 벗어나지 못한 조선 조정조차도 호랑이를 막으려 늑대를 끌어들일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30년전 임진왜란 때도 청나라의 전신인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이 원병파견을 여러번 제의했으나 모두 거절했는데, 7년간 치고받고 싸웠던 왜의 원병을 받아들일 만큼 조선왕조는 바보가 아니었다. 이렇게 적을 치기위해 다른 적을 끌여들였다가 망한 예는 중국역사에도 러번 나오며, 송나라요나라를 치기 위해 금나라를 끌여들였다가 황제가 포로로 잡히고 비빈-공주들이 오랑캐의 노리개가 되었던 예는 조선에 큰 귀감이 되었기 때문에 왜의 힘을 빌려 청의 침략을 막는다는 정신나간 짓은 고려의 대상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 10년전 이괄의 난 때도, 이괄군의 선봉에 선 항왜들의 전투력이 대단해서 관군이 연전연패하자, 조정에서 왜관에서 왜인 용병을 고용하자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흐지부지되었다.

이후 명청전쟁이 가속화되자 대만의 정지룡이나 정성공, 삼번의 난때도 그 아들 정경이 계속 에도 막부에 원군을 요청했으나 에도 막부는 모조리 거절했다. 이를 봐서도 일본이 조선을 도와서 청나라와 싸울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9.3. 명나라의 반응[편집]


병자호란이 터지고 인조가 항복한 이후, 조선은 명나라로부터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명나라 황제 숭정제의 서한을 받는다. 사실 이 당시 명나라는 이자성이 본격적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그 외 여러 곳에서 도적들의 반란이 일어나고 있던 상황이여서 멸망을 눈 앞에 둔 상황이었기 때문에, 조선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으며 병자호란의 전개가 너무나 빠르게 돌아가서 돕고 싶은 의도가 있었다 해도 제대로 준비할 시간도 없었다.

그나마 산둥 지방을 통해 약간의 수병을 보내려 했다고 하는데, 이마저도 풍랑 때문에 중단됐다고 한다. 이 약간의 수병으로 전쟁의 결과가 뒤바뀌진 않았겠지만, 그나마 강화도를 수비하는데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적어도 아예 싸우지도 않고 도망가기 바빴던 장신이나 김경징보단 나았을테니 말이다.

어쨌거나 모문룡건과 더불어 이 일을 겪은 조선은 명에 대한 재조지은을 충분히 했다고 자체 결론을 내리고, 속은 어떨지 몰라도 겉은 명과의 관계를 정식으로 단절한 후 본격적으로 청의 편에 선다. 다만 조선이 청을 돕기 위해 파견한 임경업 등은 횡의 사건도 일으키고 금주성 전투에서는 일부러 태업을 행하기도 했다. 이런 것과 상관없이 얼마 못가 명이 멸망하는게 함정이었다. 게다가 도망쳐온 명나라 유민들을 받아준 게 유일한 성의였다. 하지만 이것도 상국의 은혜를 갚는다는 이유보다는 망국에 대한 동병상련 혹은 그냥 조선의 인구 수를 늘리려는 요인이 컸다. 실제로 많은 명나라 유민들은 초기엔 차이나타운 비슷하게 마을을 만들어 지냈으나, 이후 세금 납부 문제 등이 터지자 숙종때 조선 사회에 동화될 것을 강요당했고 차별을 받았다.#


9.3.1. 명나라의 요동 공격 시도[편집]


비가 옴. 고 태감이 도로 관상(關上)으로 갔다. 이곳에 와서 들으니,

“2월 20일쯤에 태감과 군문이 조 총병(祖摠兵)과 함께 관외(關外)의 철기(鐵騎) 6, 7만 명을 거느리고

삼차하(三叉河)를 건너갔다가, 오랑캐의 군사들이 보이지 않자 퇴각하여 3월 10일쯤에 진(鎭)으로 되돌아왔다.” 하였다.

이는 대개 조대수(祖大壽)의 아들이 포로가 되어 적중(賊中)에 있으면서 그의 아버지에게 몰래

‘오랑캐의 군사들이 동쪽으로 쳐들어갔으니 지금이 바로 빈틈을 타서 들이치기에 좋은 때이다.’

라고 통보하였으므로, 조 총병이 단단히 마음먹고 군사를 진격시켰으나,

여러 장수들이 모두 겁을 내어 논의가 일치되지 않은 탓에 마침내 돌아온 것이라고 하였다.

점심때 모인이 와서 보면서 말하기를,

“무대(撫臺)가 이미 용무영(龍武營)의 천총(千摠) 장성공(張成功)에게 맡겨서 병선 4척을 거느리고 호송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무대는 군문(軍門)을 이른다. 부 참장(傅參將)에게서 소식이 전혀 없는데,

내가 22일에 배를 타겠다고 일찍이 군문을 만나 보았을 때 말하였으므로, 이곳에서 장관(將官)을 차정해서 보낸 것이다.

-

- 조경일록(朝京日錄) 1637년 윤4월18일 기사中


병자호란 직전 명나라 북경에 사신으로 갔던 김육(金堉)의 조경일록(朝京日錄)에 의하면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명나라 군은 그 틈을 이용하여 요동을 공격하고자 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실행자는 금주(錦州)에 있던 조대수(祖大壽)인데, 후금 시절에도 후금군의 공격을 받아 거짓 항복을 할 정도로 수세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던 그가 청의 본군이 조선으로 갔다는 말을 듣고 호기라 여겨 산해관 밖의 모든 병력을 긁어모아 요동을 치겠다는 계획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1637년 2월 20일 6~7만의 철기병을 이끌고 삼차하를 건넜다가 청나라군이 보이질 않고 제장들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자 결국 회군하여 3월 10일에 본진으로 되돌아왔다고 한다. 병자호란 당시 요동으로 진군한 명군 7만(조선아 버텨줘!)


10. 관련 문서[편집]



10.1. 조선 측 관련 인물[편집]




10.2. 청나라 측 관련 인물[편집]




10.3. 관련 전투[139][편집]


  • 창성 전투
  • 능한산성 전투
  • 동선령 전투 - 김자점이 그나마 밥값했던 시기, 조선판 춘천-홍천 전투, 여담으로 여기서 동선령은 고려시대의 여몽전쟁에서 지연전에 성공한 그 동선역이다. 참고로 이때도 지연전을 했지만 그 뒤 김자점이 짱박히면서 까방권을 날렸다.
    • 1차 동선령 전투
    • 2차 동선령 전투
  • 한양 창릉 전투
  • 영변 동의성동 전투
  • 영변 구원군 전투
  • 영변 철옹산성 전투
  • 안주성 전투
  • 한양 전투
  • 영변 덕동 전투
  • 토산 전투 - 승리는 했지만 병력이 많이 날아갔고, 김자점이 짱박히게 된 계기가 된 전투다. 사실상 피로스의 승리를 한 셈.
  • 검단산 전투
  • 죽산산성 전투
  • 험천현 전투
  • 남한산성 공방전 - 영화 남한산성의 배경이 된 47일간의 공방전이다.
  • 쌍령 전투 - 병자호란판 용인 전투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기존 역사관과 달리 청쪽도 지휘부가 붕괴되고 호란 후 패배 책임을 묻는 등 청에게도 승전으로 보기 힘든 기록을 남기고 있다. 자세한 사항은 문서 참조.
  • 광교산 전투
  • 강화도 방어전 - 삼전도의 굴욕의 원흉
    • 갑곶진 전투
    • 갑곶 나루 전투
    • 강화성 전투
  • 김화 전투 - 자모산성 전투라고도 한다.
  • 철령 전투
  • 안변 전투
  • 피도 전투
  • 백마산성 전투 - 병자호란의 서막


10.4. 관련 작품[편집]


  • 소설
  • 영화
    • 최종병기 활 (2011)
    • 남한산성[140] (2017)
    • 올빼미 (2022)
  • 드라마
    • 대명[141] (KBS, 1981~1982)
    • 조선왕조 오백년 남한산성
    • 추노 (KBS 2TV, 2010)
    • 궁중잔혹사 꽃들의 전쟁 (JTBC, 2013)
    • 삼총사 (tvN, 2014)
    • 화정 (MBC, 2015)
    • 내일[142] (MBC, 2022)
    • 연인 (MBC, 2023)
  • 웹툰
    • 강시대소동[143]


10.5. 관련 서적[편집]



[1] 기존에는 인조의 강경 외교에 중점을 두었지만, 최근에는 홍타이지의 군신관계 요구가 조선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음이 지적되고 있다.[2] 단, 총융군의 상당수는 속오군과 병력이 겹친다.[3] 기타 11,000명은 '쿠툴러'로 정규군을 보조하는 하인들이다. 모두 포로가 된 한인들이 맡았다.[4] <대청황제공덕비>에는 "황제(성스러운 한)께서 동쪽을 정벌하시니 그 군세가 10만이라(皇帝東征, 十萬其師, enduringge han dergi babe dailaha juwan tumen cooha)"고 되어있으나, 수사적 과장의 결과가 분명하며, 당시 청나라 인구 300만명에 조선에 동원할 수 있는 가용 병력은 30,000~40,000명이 한계였다.{구범진, 이재경(2015), <丙子胡亂 당시 淸軍의 構成과 規模>, 《한국문화》 72, p. 3; (2019),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5] 60만명이라는 추정치가 있는데, 그 숫자를 그대로 믿는 국내 학자가 요즘엔 거의 없다.{계승범(2020), <1637년 청나라의 조선 정복 전쟁 - 구범진,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까치, 2019)에 대한 서평>, 《동북아역사논총》 69. p.3. } 당시 청나라는 소빙기와 명나라의 경제 봉쇄로 인한 극심한 경제난과 식량난으로 60만명이나 되는 인구를 새롭게 부양할 능력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정확히 말해 그 당시 청나라의 상황이란 경제난과 식량난에, 포로와 노예로 끌려온 한족들이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킬 정도로 위기상황이었다. 무엇보다 60만명이라는 저 숫자부터가 청나라 측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기록이다. 실제로 구범진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또한 속전속결로 이루어진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이 50만~60만 명에 달했다는 통설이 터무니없다고 반박했다. #[6] 단, 교차검증은 되지 않지만 실록에 따르면 병자호란 직후 청나라에 사신단으로 갔던 이성구(李聖求, 1584~1644)가 청군 전사자가 총 장교 300명에 병사 7,000명이라고 발언한 기록이 존재한다. 원문 또한 학계의 공식 자료는 아니지만 만문사료를 번역하는 역덕 길공구의 추정에 따르면 청군의 전사자는 병사가 1,000여 명 이하, 장교는 구체적으로 10명이었다고 한다. #1, #2[7] 조선은 명나라가 멸망하는 그날까지 청나라를 군사, 경제적으로 지원하여 결과적으로는 청나라의 입관 및 대륙 제패를 도왔다. 그런데 사실 가도에 주둔한 명나라군도 조선에 대한 수탈이라는 면에서는 마찬가지였고, 모문룡과 그 사후 가도를 다스리는 심세괴는 오히려 청나라보다도 한술 더떠 아예 동맹국인 조선에 대해 해적질을 하고 있었다.[8] 출처는 http://gil092003.egloos.com/9983300[9] 이 문서에서는 별도의 설명이 없는 한 모든 날짜를 음력으로 쓴다.[10] 물론 "상이 이르기를, 300년을 지켜온 종묘 사직이 일조에 빈 터가 되어 버렸으니, 의당 순절한 신하들이 있었어야 할 터인데, 지금까지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참으로 탄식할 일이다."하니, 석윤이 아뢰기를,"만일 절개를 지키고 의리에 죽은 사람이 있었다면, 비록 어리석은 남녀라도 반드시 모두 그들을 칭송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적막한 것은 반드시 황제가 임금답지 못하여 환관들이 정권을 쥐게 되고, 예의가 쓸어버린 듯이 흔적도 없고, 염치가 무너져 버림으로써 지조와 절개 있는 사대부들이 이미 먼저 자리를 떠나가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라고 명나라를 은근 디스하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진심으로 명나라를 섬긴 건지는 의문이다.출처:http://sillok.history.go.kr/id/kpa_12208023_002[11] 변하는 국제 정세에 맞지 않는 '친명배금'을 끝까지 추구하여 명나라만을 섬기고 후금(청)을 철저히 배척하여 피할 수도 있었던 전쟁이 일어났고 결국 패전까지 했다."라는 인식.[12] 서울대 동양사학과 구범진 교수의 주장[13] 1차 조청전쟁은 정묘호란[14] 稻葉君山(1914), 제20절 <第二次朝鮮役及び其經過>, 《淸朝全史》상권, p. 321~325; 허태구(2017),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의 丁卯․丙子胡亂 관련 주요 연구 검토>, 《朝鮮時代史學報》 81.[15] 노기식(2001), <만주의 흥기와 동아시아 질서의 변동>, 《中國史硏究》 16; 宋美玲(2008), <天聰年間(1627-1636年) 支配體制의 確立過程과 朝鮮政策>, 《中國史硏究》 54; 韓明基(2017), <明淸交替 시기 韓中關係의 추이>, 《東洋史學硏究》140; 허태구(2019), 《병자호란과 예, 그리고 중화》, p. 141~145; 계승범(2020), <1637년 청나라의 조선 정복 전쟁 - 구범진,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까치, 2019)에 대한 서평> 70~72쪽, 《동북아역사논총》 69, p. 333.[16] 한명기(2009),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p. 150~151; 허태구(2019), 《병자호란과 예, 그리고 중화》, p. 146.[17] 구범진(2019),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김영진(2020), <천총 연간 후금의 조선 사신 접대 양상과 그 의미>,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18] 蔡弘秉(2019), <丁卯盟約(1627) 以後 朝鮮의 對後金 關係 추이와 파탄>,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p. 60.[19] 노기식(2001), <만주의 흥기와 동아시아 질서의 변동>, 《中國史硏究》 16; p. 30.[20] 허태구(2018), <병자호란 이전 조선의 군사력 강화 시도와 그 한계>, 《군사》[21] 사실 대북의 수장인 이이첨이 이것을 명분으로 삼아서 폐모살제로 잃은 유자로서의 인망을 찾아 보려는 시도이기도 했다는 해석도 있다.[22] 한명기 교수에 따르면 인조의 기본적인 외교 노선은 놀랍게도 병자호란 이전까지 광해군의 노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정확히 한명기 교수가 저술한 책인 《광해군》을 보면 당시 조선은 인조 반정 이후, 기미책(羈靡策)이라는 명과 후금을 모두 적대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는 그런 외교 정책을 펴는 상황이었고 이러한 기조는 인조 때에도 큰 변동없이 이어져서 배금을 한 건 아니라고 한다. 해당 책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친명의 기치는 확실하게 유지되었지만 배금은 현실화되지 않았다", "그들 역시 후금을 자극하여 사단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명시적으로 설명하고 있다.[23] 오수창 교수는 실제 인조반정 후 후금(청의 전신)에 대한 외교정책은 광해군대의 외교와 다를 바 없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 당시 화친정책의 유지를 강력히 주창했던 최명길과 장유, 이귀, 김류, 홍서봉 등이 모두 반정의 핵심인물들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출처필요] [24] 허태구(2013), 崔鳴吉의 主和論과 對明義理, 《한국사연구》[25] 홍익한이 금한을 배척하고 명분을 세울 것을 상소하다, 홍문관이 금한의 사신들을 가두어서 배척하는 뜻을 보이라는 상소를 올리다, 교리 조빈이 국가의 근본이 명조에 있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다, 이조 참판 정온 등이 사신 보내는 일의 불가함에 대해 올린 차자[26] 우경섭,『조선중화주의와 동아시아』(유니스토리, 2013). (pp.86~89); 조일수(2017), "인조의 대중국 외교에 대한 비판적 고찰", 《역사비평》121; 구범진(2019),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p. 66~67.[27] 허태구(2019), "병자호란 연구의 새로운 定礎 서평 구범진(2019),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까치, 403쪽.", 《인문논총》 76, 3.[28] 허태구(2019), "병자호란 연구의 새로운 定礎 서평 구범진(2019),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까치, 403쪽.", 《인문논총》 76, 3.[29] 우경섭,『조선중화주의의 성립과 동아시아』(유니스토리, 2013). (pp.86~89); 조일수(2017), "인조의 대중국 외교에 대한 비판적 고찰", 《역사비평》121; 구범진(2019),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p. 66~67.[30] 이해하기 쉽게 현대에 대입해보자면 미중 갈등에서 중국이 인구가 많고 가까우며 겉보기에 위협적이라는 이유로 한국이 미국을 배신하고 친중을 해야한다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논리가 된다. 후대에는 어떨지 몰라도 당대인인 우리 입장에선 수백 년 강국인 미국이 신흥강국 중국에게 완패할거라고 예상하는 것이 더 무리인데다 그런 도박적 가정으로 수십년 혈맹인 미국을 배신하면 명분의리를 저버린 대한민국은 1세계에서 제외되어 엄청난 실리적 손해를 보게될 것이다. 게다가 만약 미국이 중국을 완전히 제압하고 패권을 다시 공고히 하면 배신자 한국을 응징하려 들텐데 이 뒷감당은 어찌하겠는가?당시의 친명과 친청은 현대의 친미 친중과 거의 비슷한 구석이 많아 이렇게 대입해보면 조선이 처해있던 외교적 어려움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31] 물론 가장 좋은 건 명이든 청이든 '상국'에 도움 청할 것 없이 자체 군사력만으로 방위가 가능한 것이겠지만, 조선의 체급상, 또 이 '상국'들의 외교정책상 가능성이 매우 낮았다. 최소한 5호16국, 5대10국 수준의 화북 분열 헬게이트가 열리지 않는 한 중국 전체는 고사하고 화북을 통일한 왕조만 되어도 조선에 대해 강력한 군비제한을 가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았고, 실제로 효종대에는 일본의 재침 가능성을 들며 재군비 허가를 요청했지만 청의 대답은 NO였을 뿐이었다. 게다가 16세기 이후 일본의 관동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조선과 일본의 체급차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다다랐고 조선 혼자 아무리 용을 써봐야 고려가 그랬듯 과다군비로 무너지는 길을 피하기 힘들었다.[32] 멀리 가면 연나라-고조선, 통일왕조만 봐도 한나라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중화권과 한민족계열의 충돌사를 보면, 한민족 국가와 중화 통일왕조가 국경을 맞대고도 사이좋게 지내던 시기는 병자호란 당시를 기준으로 보면 정말로 조명관계밖에 없었다. 나당전쟁 이후 우호관계를 회복한 신라-당은 중간에 발해나 여러 세력이 껴있었고(애초에 발해의 흥기 때문에 적의 적은 나의 친구의 원리로 나당관계가 회복된 것이지만), 고려-북송 역시 중간에 거란이 있었다.[33] 주화신의 대표격인 최명길조차도 언제나, 심지어 병자호란 이후에도 재조지은은 잊을 수 없으며 대명전선 파병 같은 짓은 할 수 없음이라는 입장은 확고했다. 심지어 청은 그 치떨리는 몽골 대원전국옥새를 손에 넣어서 칭제를 했으니 당대의 시선에서는 사실상 혈통만 바뀐 몽골제국의 재림이나 다름없었다. 좀 더 앞의 사례를 살펴봐도 삼국통일위진남북조시대의 종식과 수당시대 통일제국의 출현에 발맞춰 이 통일제국 주도 질서에 영합한 신라가 자신들보다 몇체급 큰 백제, 고구려를 연이어 멸망시킴으로써 가능했고, 후삼국시대당나라의 붕괴와 5대10국시대의 혼란기 속에서 벌어졌다.[34] 대청칭신의 영향을 확인할수는 없지만, 어쨌든 조선왕조는 이후 정말로 택군, 즉 신하들끼리 짝짜꿍해서 멀쩡한 후계자 놔두고 누구를 왕으로 밀어줄지를 선택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35] 한국사에서 그나마 피 덜 보고 왕조가 교체된 여말선초만 해도 위화도 회군 하나만 보아도 개경 시가전, 우왕-최영 라인의 숙청 등까지 포함하면 사망자만 적어도 천 단위다. 후삼국시대처럼 군웅할거와 내전의 수순을 밟으면 기본 십만 단위이다. 이것도 어디까지나 나라의 형태는 남아있다는 전제 하에서의 고민이다.[36] 그렇기에 조선은 왕조를 유지하기 위해 성리학 질서를 더욱 공고히 하는 데 열을 올렸고, 이를 대체할만한 잠재력을 지닌 서학을 탄압할수밖에 없었다.[37] 기실 북방민족 VS 중원왕조간의 싸움에서 대체적으로 전자가 승리한 편이지만 그렇다고 쉽게 이긴 것도 아니고 이기더라도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겼다고 해도 완벽히 이긴 것도 아니고 즉, 조선의 입장에서는 정말로 명나라와 청나라 중에서 누가 이길지 판단을 내리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더욱이 명나라의 멸망에는 전례없는 요소들이 많았다. 결정적으로 청나라는 너무 운이 좋았다. 이자성의 난으로 명나라가 허망하게 내부에서부터 스스로 무너지면서 망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오삼계가 휘하 병력들을 모두 이끌고 산해관의 문을 열어주어 청나라측에 투항하지 않았다면 청나라가 스스로 산해관을 넘어서 중원으로 입성하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이며 또한 명나라가 이자성에 의해 멸망했다고 해도 오삼계가 청나라가 아닌 같은 한족인 이자성순나라에 항복을 했다면 청나라가 산해관을 자력으로 넘기도 전에 이자성순나라가 중원을 완전히 제패하였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거기다가 남명은 여러 황제들이 난립했는데 이 역시도 그 이전 동진이나 남송에서는 없던 일이었다.[38] 조일수(Ilsoo David Cho),「인조의 대중국 외교에 대한 비판적 고찰」(『역사비평』121, 2017). (pp.362~364)[39] 朝淸關係의 초기 형성단계에서 ‘盟約’의 역할 丁卯胡亂期 朝鮮과 後金의 講和過程을 중심으로, 남호현(서강대), 조선시대사학보 제78집, 2016.09, 51 - 85 (35 pages)[40] 윤석열의 부계 직계 조상이다.[41] 정온과 최명길은 서로 성향이 달랐다. 정온은 주전론, 최명길은 주화론. 덤으로 둘 다 광해군 시절 배척받은 인물들이다.[42] 정온,윤황 뿐만 아니라 사간원의 간관들도 압록강에서 적을 맞아싸워야 한다고 상소했지만 인조는 젊은 간관들이 군사를 모른다면서 역정을 냈다.[43] 조선의 방위 체제는 12년전 벌어진 이괄의 난때 이미 소멸했고, 게다가 조선보다 훨씬 더 병력이 많았던 명나라조차도 이미 10년전 산해관 이북에서 병력을 다 철수해서 만주 및 요동반도를 다 내주고 근근히 만리장성에 기대 수비하는 실정이었다.[44] 염헌집 박로신도비명[45] 박로는 40일 동안 잡혀 있다가 화의가 성립되자 풀려났다. 이듬해 소현세자가 볼모로 심양에 갈 때 세자빈객으로 따라갔다가 신병으로 3년 만에 귀국하였고 천수를 누리다가 죽었다. 한편 박난영은 본래 사르후 전투때 종군했다가 포로로 잡혔고 이후 정묘년에 강홍립과 조선에 돌아와 후금과의 외교통으로 활약했다. 박로와 함께 청군에 잡혀 억류되었던 중 조선에서 보낸 가짜 왕제 사건에 연루돼 참살당한다. 훗날 영의정에 추증된다.[46] 위의 정충신과 장만도 여기에 참여했다.[47] 중앙에서 전문적 무관이 영장으로 파견되어 지방 수령이 가진 군사권을 넘겨 받아서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인조 5년에 시작되었으나 인조 15년에 사실상 폐지되었다. 이것을 병자호란의 패착이라고 쓰는 사람이 있는데, 최고 사령관님들의 적전 도주와는 관련이 없었고 오히려 병력 증강에 조금이라도 신경을 썼던 결과였다. 문제는 영장을 맡을 무관의 수가 부족하여 폐지되게 된 것이다.[48] http://sillok.history.go.kr/id/kpa_11407004_002[49] 기효신서 체제의 단위 부대로 대략 2,500명에서 3,000명 가량이다.[50] 12년이나 지나서 서북 지방의 인구 수는 회복되었지만 임진왜란을 거친 정예 병력까지 회복되기에는 애매한 시간이었다. 게다가 실전 경험을 쌓았던 고급, 중급, 초급 장교들이 이괄의 난으로 대부분 전사하거나 또는 살아남았어도 역적이 되거나 그것도 아니면 이괄의 반군들을 진압하다가 많이 전사하는 바람에 그 손실이 매우 크다는 것 또한 뼈아픈 문제였다. 또한 평양부의주부, 안주목 등을 비롯한 북부지역 대부분의 대고을들이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거치면서 심각하게 파괴된 것도 영향을 주었다.[51] 국방을 담당하고 있는 장교들에게 병력과 지휘권을 제대로 주지않고 감시만 하게 하며 군사 훈련을 한 번도 못하게 한 것은 군통수권자의 심각한 실책이다.[52] 이때문에 한명기 교수가 남이흥 장군을 안타깝게 여겨 인조를 극렬히 비판하는 부분이다.[53] 이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은 것도 있고 심지어 소모품으로 버려졌다.[54] 단 정충신과 장만은 행정에 뛰어난 인재들이었기에 외교적인 조언은 듣지 않더라도 군사 태세를 정비할 권한은 주었다. 인조 시절의 수비 전략이 최소한 말이 되는 방면으로 투자되었던 것도 이들의 노력 덕분이었다.[55] 후대 효종의 국구 장유의 동생이다.[56] 지봉유설 저자 이수광의 아들이자 태종 이방원의 서자 경녕군의 6대손이다.[57] 이때 명나라 병부상서 홍승주자오곡 대책을 실행해 서안을 급습하려던 고영상의 10만 농민 반란군을 포착해 섬멸했고, 반란군은 고영상의 부하인 이자성 및 몇기만 도망갈 수 있었다. 이후 이자성은 고영상을 대신해 반란군을 이끌게 된다.[58] 이 혼성 부대에 조선인도 포함되어 있었다.[59] 이때 임경업 휘하에 고작 300명밖에 없었다는 설이 널리 퍼져 있지만 이는 후대에 창작된 낭설에 지나지 않는다. 승정원일기 1636년 3월 4일 기사 "백마산성에 입방할 군사로 현재 의주에 있는 자가 1,600명인데 이들 군사로 하여금 돌아와 안주를 지키게 하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만약 이 군사들을 모은다면 의주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정식으로 부방하는 남군(南軍) 2,400명을 백마산성에 보태어 방어하게 하고…"[60] 하루에 78km로 300년 뒤에 치른 2차 세계대전프랑스 침공 당시 롬멜의 기갑부대보다도 빨랐다고 한다.[61] 사르후 전투에서 전사한 김응하의 동생이다.[62] 이미 이 문제는 광해군이 예견했음에도 대책이 세워지지 않은 것이다. 광해군이 왕으로 있던 시절에 "쟤네들이 일본처럼 경로에 있는 성을 다 먹으면서 진군한다는 보장이 없지 않냐? 성을 치지 않고 바로 수도로 진군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얼른 중도에서 막을 대책을 세워봐라." 하고 비변사에 얘기했지만, 비변사에서 내놓은 대책이란 "걍 강화도나 남한산성에 짱박혀서 사방에서 구원군이 올 때까지 기다리죠?"였다. 비변사 말대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각각 강화도, 남한산성에 들어갔지만 그 결과는 대실패로 끝났다. 비변사가 제시한 대책은 일단 중도에서 막지도, 수도를 지키지도 않고, 중앙은 아무것도 안 하는 채로 그저 지방에서 알아서 해주기를 바라는 매우 허술한 것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아군은 육전에 능하고 수전에 불리하니 배 같은 건 버리고 육지에서 싸우자는, 후손인 우리가 보기엔 이뭐병스러운 주장도 했지만, 지방에서 알아서 하라고는 안 했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특정지역에 틀어박혀 농성만 한 게 아니라, 비록 의도는 불순했지만(명나라로 도주) 일본군을 피해 최대한 북쪽으로 도망쳤고, 그 덕분에 임진왜란이 장기화되어 일본군도 지쳤다. 차라리 당시 비변사가 일단 최대한 남쪽으로 도망쳐서 어떻게든 시간을 벌고 최후의 수단으로 농성을 택하자고 했다면, 병자호란은 임진왜란처럼 장기화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설령 실제 역사대로 비변사가 강화도나 남한산성에서 구원군을 기다리자고 했어도, 만약 남한산성으로 몽진하려던 인조가 길을 잘못 들어서 엉뚱한 쪽으로 가는 바람에 결국 남한산성 농성도 포기한 채 무작정 남쪽으로 도망쳤다면, 강화도가 함락되더라도 인조는 한반도 남부 지방 병사들에게 보호를 받는 동시에 이들이 병자호란에 참전하여 자기 아들들을 청군으로부터 구해주리란 희망이 있었을 것이다. 강화도 함락이 인조가 항복을 결심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었지만, 남한산성에서 고립되어 지치는 상황 또한 항복하는 원인으로 작용했으니 말이다. 물론 남한산성에서 방어에 성공할 수도 있었지만, 문제는 전쟁 직전에 광주목사 한명욱이 산성까지 물자와 곡식을 운반하는 번거로움을 없앤다며 평지에 지어서 식량을 얼마 가져오지 못한 청군의 식량이 풍족해지고 남한산성에 갇힌 조선군의 식량이 부족해지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인조 정권은 조괄이 명장으로 보일 지경으로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기본 상식조차 없던 집단인 것.[63] 현재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이다.[64] 타일러 가르침.[65] 일이 진행되는 형편.[66] 은혜를 저버리고 거스름.[67] 승정원일기에는 비슷한 내용이 있다.[68] 이게 얼마나 무모한 계획인지를 알고 싶다면 이 문서에 들어가 보자. 그만큼 아무리 현지가 곡창지대거나 물류의 유통지인 대도시라고 해도, 청야전술 등의 전술을 사용하면 그냥 굶으면서 싸우는 수밖에 없다. 의지로 싸우면 된다고 하면 병사의 사기는 작전을 수행할 수 없을정도로 떨어진다.[69] 다만 명나라는 송산 전투에서 청나라에게 참패하여 정예병 다수를 잃은데다 남은 정예병들마저 수비에 치중하거나 이자성의 반란군을 막는데 투입된 상황이었다.[70] 여수전쟁, 여요전쟁 때는 농성군이 적군을 묶으면서 버티는 틈을 타 집결한 야전군이 후퇴하는 적의 뒷덜미를 후려쳐 결국 승기를 잡아냈다. 또한 임진왜란, 정묘호란 때도 관군이 농성하는 동안 의병이 야전군의 역할을 해 각각 일본군과 후금군의 보급선을 기습해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71] 임진왜란 때는 뭐라고 하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의외로 일본군은 거점 지역을 점령하면서 올라갔다. 물론 후방을 무시하는 바람에,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일대에서 시달리고, 이순신도 왜군의 배를 부수는 바람에, 해상 보급이 늦어졌다. 결정적으로 청의 초월적인 기동력의 원인에는 다수의 기병이 있었다. 반면 일본의 주력은 보병이였다.[72] 연려실기술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조선 왕조 실록에는 없는 내용이다. 다만, 연려실기술이 저격을 언급한 24일에 포탄이 성내로 떨어지고 남성으로 적이 육박하여 격퇴했다는 내용은 있다. 격퇴를 어떻게 했는지는 연려실기술이 2차 사료임을 감안해서 봐야 한다. 요게 뭐 얼마나 대단한 거냐고 감이 안 잡힌다면 영원성 전투에서 20,000명의 명군이 160,000명의 후금군을 격퇴하는데 큰 공헌을 한 것이 홍이포였다. 물론 천자총통도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유용하게 써먹은 최신은 아니나 구리다고는 할 수 없는 포이긴 하지만 유럽 기술까지 접합되어 탄생한 홍이포보다는 못할 터인데 천자총통으로 홍이포를 잡았다는 것이다.[73] 처음 축성될 때 성 안에 있던 식량 창고를 광주 목사 한명욱이 "험준한 산에 창고가 있으면 운반하는 백성들에게 민폐"라며 성 밖으로 끌어냈는데, 이것이 큰 실책이었다. 게다가 이것도 사실 운송을 담당한 상인과 야합했다는 말이 있다. 본래 청군은 20일 정도 밖에 버틸 식량이 없었지만, 이 때 한강변에 떡하니 있는 식량창고를 청군이 활용해서 45일간 포위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줬으며, 오히려 남한산성 내부가 식량 부족을 겪었다. 단순히 남한산성의 버티는 시간만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청군의 군량미를 대폭 줄여 청군을 보다 힘겹게 했을 것이다.[74] 진눈깨비가 내리자 인조가 "저 하나 죽는건 몰라도 백성들과 군사들이 뭔 죄가 있어 죽어야 합니까. 제발 날이 개게 하여 우리 신민을 살려주십시오 하늘이시여!" 라고 울먹이며 천지신명에게 기도를 올리며 절해야 할 지경이었다.[75] 정확히는 24일에 인조가 가마니를 지급하도록 하교하였다고 승정원일기에 서술되어 있으나, 25일에 "(날이 춥기 전에) 미리 나누어 준다면 필히 깔고앉아 다 해지게 될 것" 이라는 관향사의 계와, 가마니를 근근이 나누어 주었다"는 대사간의 보고가 있던 것으로 보아 일시에 전격적으로 지급한 것은 아니다.[76] 인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는 空石, 공석으로 표기되어 있다.[77] 적진을 살피려는 의도도 있겠지만 옛 고구려 시절 대무신왕후한 요동태수의 침공에 농성하던 중 신하 을두지의 계책으로 술과 생선을 가지고 화해를 청하자 한나라군은 성내의 물과 식량이 많은 줄 알고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다. 아마도 이러한 기만책도 참고했을지도.[78] 중앙군격인 훈련도감의 수장인 훈련대장 이흥립이 포섭되어 내통이 있었다. 이흥립은 반정군의 도성진입을 방관했고, 결과적으로 반정세력은 지방군만으로 쉽게 광해군 정권을 전복했다.[79] 참고로 조선 각지의 근왕군이 임진왜란 당시 유연하게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선조가 안전을 보장받은 게 컸다.[80] 실록 원문에는 임금의 이름을 피휘 하기 위해 성휘(姓諱)라고만 기록되어 있다.[81] 이게 나중에 인조소현세자를 적대하는 주요 떡밥이 되지만 자세히 보면 인조의 설레발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 문장에는 '아들'이라고만 언급했지 소현세자를 언급하지 않아 세자도 세자지만 하는 거 봐서 봉림대군을 인조 대신 세울 수도 있다는 소리다.[82] 오늘날의 송파구에 있었던 하중도[83] 고명(誥命)은 황제가 제후 등에게 주는 임명 조서, 책인(冊印)에서 책은 책봉 내용을 담은 문서, 인은 인장을 뜻한다.[84] 모문룡이 설치한 명나라의 동강진이 있었다. 정묘호란 이후 원숭환에게 감독부실로 처형당했는데, 동강진은 이후 심세괴의 지휘 하에서 1-2만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85] 다만 이 부분은 시간이 지나면서 지켜지지 않는 일도 있었다. 애시당초 노동력 부족 때문에 끌고 간 것이어서 생긴 문제였다.[86] 근데 이는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것 같다. 청나라가 중원에 입관한 후 만주족 남성들이 한족 여성들을 첩으로 들이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물론 정묘호란이나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들이 팔기군에 편입된 후 만주족에 동화되어 만주족과 통혼하는 경우는 많았다.[87] 이것 때문에 효종이 즉위년에 성곽을 개수하려다가 청나라 사신의 질책을 받은 적이 있었다. 다만 이경석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당시 유배가 있었던 김자점이 효종의 대외정책을 청나라에 고자질한 것이다. 결국 김자점은 이 사건으로 반역 혐의가 적용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88] 그냥 가 아니라 물소의 뿔인데, 조선군의 주력 무기 중 하나인 각궁의 주요 재료다. 문제는 이게 정작 조선 땅에선 나지 않아서 명나라 아니면 일본을 통하여 오키나와에서 수입하던 것….[89] 후추는 조선에서 나지 않는 향신료였다. 요즘은 흔해 빠진 게 후추지만, 당시엔 값도 매우 비쌌고 물량은 전량 일본에서 수입해 조달해야만 했다.[90] 병량 보급이 제대로 안되자, 도원수 강홍립은 여진족 마을의 약탈을 지시하기도 했다.[91] 실제로 청은 병자호란 당시 조선을 이기고 있을 때에도 조선군 조총병의 기량은 상당히 높게 평가한 바 있다.[92] 이때 명나라 항장들이 임경업이 명나라와 내통했다는 것을 청나라 측에 진술하여 조선 조정은 굉장히 난처해진다.[93] 다시 말하지만 청은 당시 조선(1,100만명 내외)보다 인구가 훨씬 적었다. 여진족이 50만 ~ 100만인 판국에 조선에서 끌려간 조선인 포로가 50만 ~ 60만에 정묘호란까지 합치면 70만 ~ 80만명에 육박한다. (단, 조선인 포로들이 50~60만에 달했다는 통설은 구범진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터무니없는 과장이라고 한다. 출처 무엇보다 저 50~60만 명 이라는 숫자부터가 후금 측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기록이다.) 물론 그때 청에는 귀부한 한인도 여진족만큼 있었고, 몽골인(20만)에다 이들 전체 숫자와 맞먹는 하층민들까지 있어서 총 인구는 그래도 200만 ~ 400만까지 나오므로 포로와 여진족 인구가 같은 상황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지나치게 증가한 인구로 인한 식량 부족도 병자호란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94] 다만 여진족유목민이라기 보다는 농사와 수렵, 수렵으로 확보한 모피 등을 내다 팔고 부족한 걸 사오는 교역을 더 중시하는 반농·반수렵 민족이였다. 주변 털러 다니지 않은건 아니였지만.[95] 이와 비슷하게 노예무역이 성행하던 일본 전국시대에 일본인 50만 명이 포르투갈 상인들한테 노예로 팔렸다는 것도 실제로는 대략 5만 명 정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병자호란은 일본에서처럼 해상을 통한 노예무역이 아닌, 육로를 통해 전쟁 포로들을 수백 km나 이동시켜야 했으므로 한번에 많은 인구를 끌고가기에는 물리적으로 한계가 있었다.[96] "그러나 1627년 만주 국가는 '경제적 재앙' 의 문턱에 있었다. 1626년 처음으로 주요 전투에서 명의 군대에 패배한 것은 국가의 취약성을 심각하게 드러냈다. 한계에 달한 만주 경제는 늘어나는 인구를 가까스로 부양할 수 있을 뿐이어서, 군사 원정에 나선 대군을 보급하자면 그 군대가 승리 후 전리품을 모아야 했다." ─ 피터 퍼듀, 중국의 서진 China Marches West: The Qing Conquest of Centural Eurasia 中 출처[97] 지도를 단 10초만 훑어봐도 어느쪽이 타당한지는 바로 알 수 있다. 구성은 평북 내륙지역의 교통거점이긴 해도 경의가도에서 한참 비껴나간 곳이지만, 당시 안주목은 경의가도의 주요 경유지일뿐더러 북쪽으로는 청천강을 낀 방어요새이기도 하다.[98] 장만, 정충신, 남이흥은 이괄의 난 진압에 가장 큰 공을 세울 정도로 활약이 컸던 장군들이다.[99] 물론 지방군 중에서 최강이라는 것이지 중앙군까지 포함하면 조선군의 최강 병력은 당연 훈련도감이다.[100] 실제로 2차 여요전쟁에서는 요군이 강조의 고려군을 격파하고 전격전으로 개경을 점령해놓고도 후방에서 양규가 이끄는 약 2천 미만의 유격대를 감당하지 못하고 고려측의 친조 약속을 받아내는 선에서 황급히 철수했으며 철수하는 과정에서 고려군 유격대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101] 더군다나 약속은 고려가 그냥 무시하면 그만이기도 하다...... 어차피 전쟁도 이긴 마당에...[102] 이전에 '김자점 역시 구원군을 보내려고 했다.'는 이유로 해당 기록이 삭제된 바 있다. 김자점의 구원군은 조계원 묘비명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1. 이러한 기록은 고인을 추켜세우기 위해 없는 일을 지어내는 경우가 많아 다른 자료와 함께 비교하여 읽어야 한다는 점, 2. 묘비명의 기록이, 패배의 책임을 구원군을 늦게 보낸 김자점이 아니라 너무 빨리 항복한(?) 인조 조정에게 돌리고 있다는 점, 3. 실록에는 '김자점은 구원군을 보내지 않았다.'고 비판하고 있다는 점,(#, #, #) 4. 조계원은 당시 김자점의 수하장수였으며 전후에도 김자점을 변호하고자(김자점은 강화유수에 임명될 만한 능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상소를 올리는 등 김자점을 두둔한 전적이 있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조계원 묘비명의 내용은 김자점 등 당시 토산에 있었던 사람들이 잘못을 변명하기 위해 꾸며낸 거짓으로 보인다.[103] 이전 기록에 '장신은 강화도의 주력을 이끌고 있었음에도 청군의 도하를 지켜보기만 하다가 도망쳤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러나 1. 청군의 침공 루트였던 염하수로는 해협이 좁고 물살이 세서 판옥선 같은 큰 함선을 운용하기에는 적절치 않은 곳이었다는 점(광해군일기[중초본] 142권, 광해 11년 7월 3일 갑신 1번째 기사 참조), 2. 이민구의 답정판서서에 '조수가 물러가고 있어서, 장신의 선단이 전진할 수 없었다.'는 내용이 있다는 점, 3. 실록에도 "장신은 조수가 물러가니 배를 통제할 수 없었다고 한다."며 인조가 변호하는 내용이 있다는 점, 4. 청군의 도하 시점을 추산하여 그 시각의 염하수로 조석과 조류를 과학적으로 조사한 결과 등을 감안하면(조선시대 때와 지금 사이에 조류의 흐름은 큰 변화가 없었을 것이라는 가정 아래 실행한 분석인데, 청군이 바다를 건널 무렵에는 썰물이 시작되면서 염하수로의 수심이 낮아지기 시작했을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고, 그 전제 또한 잘못된 추정이 아니라는 내용이다.), 장신이 단순히 졸장이어서 청군의 위세에 겁을 먹고 도망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104] 1. 청군의 전략을 간파하고 대처하지 못한 점, 2. 전쟁 이전에 미리 병선(兵船) 같은 강화 해협에 적합한 함선을 징발하여 갖추지 않아 적의 도하를 저지하지 못한 점 등은, 강화도의 군을 이끄는 수장으로서 비판받아 마땅하다. 따라서 장신이 패전의 책임을 지고 사형을 받은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하지만 전투가 벌어지기 전의 전략적 구상이나 전투 당시의 움직임은 합리적인 판단 아래 이루어진 것이므로, 강화도 방어전 전후의 행적만으로는 그를 비판할 수 없다.[105] 후금의 전성기에도 총병력은 6만명 정도였다.[106] 근데 이 주장은 인조를 옹호하는 측에서 자주 거론하는 이야기인데 병자호란 당시 이괄의 난은 이미 12년전 이야기였고 정묘호란도 9년전 이야기였다. 1만의 병력이 사라졌다고 해도, 그 전에 똑같은 경로로 온 침략이 있었는데, 10년 동안 아무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면, 이는 인조나 조정의 무능으로밖에 설명이 안된다.[107] 일부 역덕들은 인조가 강화도로 도피했으면 강력한 조선 수군의 방어를 받아 이길 수도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강화도가 남한산성보다 먼저 함락된 것을 보면,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다. 게다가 판옥선은 강화도 주변 해역의 전투에는 잘 맞지 않는다. 판옥선은 임진왜란때 조수간만이 적은 남해에서는 대활약을 했지만, 조수간만의 차가 극심한 서해 연안에서는 썰물 때 기동이 어렵다. 썰물이 들면 흘수선이 높은 판옥선은 인천앞바다나 강화해협에서 꼼짝없이 뻘에 갇혀 사정거리가 긴 청군의 홍이포에게 직격을 당할 가능성이 높다. 조선측의 입장에서는 왕자들을 강화도로 도피시키지 말고 처음부터 남한산성에 준비를 철저히 갖춰 장기농성을 하는 편이 더 나은 선택이었다.[108] 북미-유럽의 동양 사학계에서 임진왜란에 대한 명칭은 7년 전쟁이라고 부른다. 임진왜란이 당시 참전한 한중일 3국에서 각자의 입장에 부르는 명칭이 제각각이라(한국 - 임진왜란, 일본 - 분로쿠의 역, 중국 - 항왜원조전쟁) 이런 중립적인 명칭을 채택했다.[109] 사르후 전투는 명군이 주력이고 조선은 약간 힘을 보태는 정도였다. 근데 기후가 후금을 도운 데다가 명군에서 벌어진 지휘관들의 내분 덕분에 어이없이 각개격파를 당했다.[110] 사실상 광해군외교의 핵심은 정충신이 담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충신이 아프면 일이 미뤄질 정도였다. 광해군의 외교를 지지하던 것은 대북이 아니라 소북인 박승종과 서인인 윤휘, 정충신이었다. 그리고 윤휘는 광해군 몰락 후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다는 이유로 같은 서인들 중 강경파들에게 살해 시도를 받기도 했으나 유능한 능력 때문에 살아남았으나 인조는 딱히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고, 그 탓에 인조는 병자호란 당시 윤휘에게 "경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이 지경이 되었다."라고 사죄했다고도 한다. 또 정충신 역시 이항복의 제자로 따지자면 서인 쪽임에도 불구하고 서인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 정작 조선을 구원할 비전과 가능성이 있었던 유능한 서인들은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기에 한직으로 밀려나는 인조 정권의 한계가 낳은 비극이라고 봐야할 듯.[111] 명이 본격적으로 막장테크를 탄 건 이자성이 들고 일어난 1639년 이후의 일이다. 이때 까지만 해도 청나라는 산해관을 넘지 못했다. 다만 수차례 화북을 대대적으로 약탈하여 조선에서 약탈한 양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인축을 노획하였다. 이자성이 중요한 것은 이자성으로 인해 오삼계가 청나라에 투항해 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오삼계는 만리장성, 그 중에서도 당시 명나라의 생명줄이나 다름없던 산해관의 책임자였다.[112] 광해군 때 이중외교는 오직 광해군 혼자 했다. 집권당인 대북파는 대명의리를 무조건 따랐다. 심지어 광해군의 오른팔인 이이첨이 앞장서서 대명의리를 주장했다. 그리고 실제 명나라는 임진왜란 당시 20만 대군을 출병시키고, 기근의 허덕이는 조선 백성을 위해 100만 톤가량의 곡식을 보냈다. 물론 당시 황제인 만력제의 독단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국운이 쇠하고 있던 명에도 크게 부담이 되었으며 만력제는 '고려천자'라는 비아냥까지 들었었다. 참고로 슬쩍 발을 빼려는 명나라를 끝까지 붙잡은 사람이 바로 류성룡이다.[113] 물론 후대의 인조 역시 친명배금을 명분으로 한 만큼 친명에 더욱 얽매이는 결과를 낳아버렸다.[114] "그러나 1627년 만주 국가는 '경제적 재앙' 의 문턱에 있었다. 1626년 처음으로 주요 전투에서 명의 군대에 패배한 것은 국가의 취약성을 심각하게 드러냈다. 한계에 달한 만주 경제는 늘어나는 인구를 가까스로 부양할 수 있을 뿐이어서, 군사 원정에 나선 대군을 보급하자면 그 군대가 승리 후 전리품을 모아야 했다." ─ 피터 퍼듀, 중국의 서진 China Marches West: The Qing Conquest of Centural Eurasia 중 출처[115] 구범진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또한 이러한 점을 이유로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들이 50만~60만 명에 달했다는 통설은 터무니없다고 직접 반박하였다. 출처 만약 청군이 끌고 간 조선인 포로들이 정말로 50만~60만 명이나 되었다면 변수에 따라서는 천연두에 걸린 조선인들까지도 대거 포로로 끌려가면서, 청나라가 천연두로 인해 조기에 멸망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116] 북방의 전략적 요충지로 고려 시절 안북성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유명하다.[117] 아무리 이순신, 항우, 리처드 1세가 와도 휘하에 병사가 한명도 없었다면 잘해봐야 인간무쌍 찍고 전사했을 확률 100%다. 공성전에서는 방어측이 유리하고 공격측이 불리하다 하나 병사 하나 없이 장군만 있으면 성 위에서 고립되어 성문을 뚫으려는 적군을 멀뚱멀뚱 쳐다보는거 외에 할것이 없다.[118] 이는 또 선조가 평범하게 왕위를 계승한 인물이라면 인조는 반정으로 집권했다는 차이에서 오기도 했다. 선조가 특정 붕당이나 세력에 의존할 필요가 없던 반면 인조는 반정공신을 필두로 한 지지세력을 어느 정도 필요로 했다.[119] 정약용도 하피집(霞帔帖)에서 '청나라는 지식이 일반화되어 일반인이 공부하여 성인이 되는데 별 어려움이 없으나 조선은 그게 어렵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정작 이때부터의 청나라는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가도중쇠).[120] 애시당초 명이 아직 건재한 상황인 데다 조선 왕실이 건재하여 조선 각지에서 의병이 조직되고 정규군이 다시 반격하는 한편, 각 지역의 수비군이 산성을 나와 게릴라와 보급선 차단을 목적으로 반격에 착수했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었다.[121] 대신 소현세자봉림대군을 인질로 잡아갔다. 그리고 인조는 야사를 중심으로 반청을 했다는 인식과는 달리 청에 대한 복수심을 행동으로 드러내지 않았다.[122] 혹시 모를 일본의 침입에 대한 일종의 방파제를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하여 함경도까지 올라간 가토 기요마사의 부대가 여진족 부락까지 침략하여 약탈을 저지르다가 여진족에게 역관광당한 바 있음을 감안하면 그 나름대로 신빙성이 있다. 그리고 훗날 진짜로 청나라와 일본이 서로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123] 여몽전쟁 당시 몽골군은 소규모 분대를 이끌고 고려에 들어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노략질하는 데 집중했을 뿐 당시 고려의 임시수도였던 강화도를 점령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는 않았는데, 만약 병자호란 당시의 청군도 이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조선을 침략했다면 조선 왕실 인물이 사로잡히지 않게 되면서 병자호란이 더욱 장기화될 뿐더러, 오히려 그로 인해 청나라의 국력이 더욱 많이 소모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는 조선이 이겼을 가능성이 높다.[124] 그리고 정작 청나라가 중원을 점령하여 중원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흡수함으로써 조선을 멸망시킬 정도의 힘을 얻었을 때는 광대한 중국 대륙을 온전히 지배하는 것과 함께 자신들의 피지배민족이 된 수많은 한족들을 강압책과 회유책으로 다스리는 것 그리고 준가르 등 다른 세력들과의 싸움에 집중해야 했기 때문에 사실상 조선을 멸망시킬 여유나 기회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청말에는 청의 국력이 엄청나게 쇠퇴했을 뿐더러 청 초중기에 비해 한족들이 고위직에 대거 등용되는 바람에 지배층인 만주족은 조선을 멸망시킬 여유는커녕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것부터가 매우 빠듯한 상황이었다. 청말에 조선의 번국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 청 측 인물들조차 주로 한족이었으며, 그나마도 청군의 부패, 전근대적 전략, 전략의 혼동 등으로 청일전쟁에서 패전하면서 조선은 번국에서 벗어나버렸다.[125] 다만 청나라가 병자호란을 일으킨 시기는 청나라가 만리장성을 우회한 하북 약탈로 식량난 및 문제는 어느정도 해결되었단 의견도 있다. 실제로 명나라에서 얻은 약탈품은 조선에서 가져온 공물보다 많았다.# 또한 북경 포위전에서 많은 명나라 포로를 잡아들었는데, 이는 이미 식량난 문제는 해결된 상태라고 봐야 한다.#[126] 고려라는 나라는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민족 이름으로서는 조선시대에도 계속 남아 있었다.[127] 누르하치 치세부터 청의 지배자들은 명과 조선의 세계관을 동일시하였으므로 치발령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128] [책마을] 병자호란 미스터리…전쟁을 끝낸 건 천연두였다?[129] 《청태종실록》 천총 5년 11월 2일 1번째기사[130] 홍타이지와 달리 조선에 대해 관대한 성향이었던 다이샨과 도르곤이 대표적이다.[131] 청나라의 선조격 국가인 금나라해릉양왕이 바로 그런 식으로 최후를 맞이한 케이스다. 해릉양왕은 남송 침공의 실패로 인해 결국 금나라군 부장의 하극상으로 죽임을 당했다.[132] 현종은 인재 면에서는 어느 정도 운이 좋았다. 지채문, 하공진, 양규라는 희대의 영웅들이 그를 도왔다. 하지만 현종이 이런 몇몇 충신들을 제외하고는 말 그대로 목종 시대의 개판+강조의 정변을 거치며 남은 쭉정이 같은 신하들(그나마 대부분은 말도 잘 안 들을)만 데리고 있었다는 점에서 결코 현종의 상황은 인조보다 좋지 않았다. 인조는 현종에게는 없던 10년이라는 시간, 적어도 현종보단 훨씬 안정된 왕권을 가지고도 그 개판을 쳐놓은 것이다.[133] 선조 또한 개인의 열등감으로 인한 이런저런 실책들은 뒤로하더라도 몽진을 성공적으로 달성했다는 점에서 트롤급인 인조와 비교대상은 아니다. 그리고 왜란 때 조선에는 앞의 고려 3인방에 버금가는 들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희대의 명장 이순신이 모함을 당하고도 충신으로 남아있었기에 인재 면에서는 말 다했다. 다만 왜란 때의 왜군은 지지기반이 미약했던 청군에 비하면 규모도 훨씬 크고 막강했으니 도긴개긴.[134] 사실 강화도로 튀는 것만 성공했어도 장기전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135] 임진왜란 당시 일본이 (결과적으로 패했지만) 상대적으로 장기전에 강한 모습을 보였던 것도 일본 본토의 경제력이 뒷받침된 게 크다.[136] 몽골제국군이 금나라와 남송을 멸망시킬 때나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킬 때도 이런 전략을 썼다.[137] 실제로 17세기 중후반 일본의 성리학자였던 하야시 슌사이(林春齋)는 자신의 책인 화이변태(華夷變態)를 통해서 병자호란과 청나라의 강성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했다.[138] 일개 번에서 보낸 사절을 막부의 사절이라 속이고 국서를 위조했다.[139] 출처는 http://gil092003.egloos.com/9983300[140] 상술한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다.[141] 1981년 ~ 1982년 방영한 KBS 대하 사극으로 병자호란을 포함한 효종의 일대기를 중점으로 다루었다.[142] 14화 〈바람꽃〉 에피소드.[143] 비중은 그리 크지 않으나, 조선에 강시가 생긴 계기로 언급된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30 16:40:55에 나무위키 병자호란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