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사노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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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2.1. 발생
2.2. 부흥과 쇠퇴
2.3. 현재
3. 대표적인 음악
4. 대표적인 음악가


1. 개요[편집]


Bossa Nova. 음악의 한 장르로서 브라질에서 기원한다. 1960년대에 브라질의 전통음악인 삼바를 베이스로 재즈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 보사노바는 포르투갈어로 새 물결을 의미한다. 영어의 뉴웨이브, 프랑스어의 누벨바그와 같은 의미. [1]

삼바가 2/4박자로 구성되어 있다면 보사노바는 4/4박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삼바와 리듬은 유사하지만 속도는 삼바에 비해 느리며 음율도 잔잔하다. 그래도 삼바의 리듬을 계승했기에 4/4박자라도 2마디를 1마디처럼 연결하기 때문에 체감상 느끼는 박자는 2/4박자와 유사하다.

보사노바는 박자를 타는 것부터가 상당히 어렵기 때문에 고음 파트가 거의 없으며 소리를 내지르질 않는다. 때문에 보사노바는 노래 자체의 리듬과 분위기로 승부한다.

2. 역사[편집]



2.1. 발생[편집]


보사노바는 1950년대 후반 리우데자네이루에 사는 중산층 학생들과 거리의 뮤지션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코파카바나 해변이 보이는 나라 레앙(Nara Leão)의 집에 모인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 카를루스 리라(Carlos Lyra), 호베르투 메네스카우(Roberto Menescal) 등의 젊고 스타일리시한 음악인들은 번갈아 기타를 연주하며 매주 새로 작곡한 노래를 자랑했다.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1958년 최초의 보사노바 곡인 'Chega de Saudade'가 탄생했다.[2]



주앙 지우베르투와 함께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을 보사노바의 창시자로 본다. 조빙은 주앙 지우베르투의 조력자이자 스승 같은 존재였으며, 지우베르투가 앨범을 발매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조빙은 많은 보사노바 넘버들을 작곡을 한 것뿐만 아니라, 미국으로 건너가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보사노바를 널리 알리는 데 기여했다.


2.2. 부흥과 쇠퇴[편집]


1959년에 마르셀 카뮈(Marcel Camus) 감독의 브라질-프랑스 합작 영화 「흑인 오르페」(Orfeu Negro)에서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이 작곡한 많은 곡이 사용되어 보사노바 장르가 세계에 알려졌다. 그리고 1962년 11월 21일에 미국 뉴욕 카네기 홀에서 주앙 지우베르투, 카를루스 리라 등이 연주한 보사노바 콘서트가 열려 미국 내에서 인기가 급상승하기 시작하였다.

1964년에는 주앙 지우베르투가 미국의 색소폰 연주자 스탄 게츠와 함께 제작한 앨범인 Getz/Gilberto가 발표되었는데, 이 앨범은 그해 미국 빌보드 앨범 차트 2위를 기록하고 1965년에 미국에서만 50만장이 넘게 팔리는 등 엄청난 히트를 기록하였다. 특히 앨범 수록곡 중에 하나인 'The Girl from Ipanema'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당시 주앙 지우베르투의 아내였던 아스트루드 지우베르투(Astrud Gilberto)까지 세계적인 스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이런 보사노바의 인기에 의해서 미국의 재즈 뮤지션들도 미국적인 멜로디가 가미된 보사노바 곡을 많이 작곡하게 되었다. 비록 이 노래들은 보사노바의 정서와 많이 동떨어지고 상업적으로 변질되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60년대 중반 미국의 대중들은 보사노바를 즐겼고, 카페나 클럽, 라디오에서도 보사노바 음악이 자주 들리게 되었다. 일례로 1960년대 조빙이 미국 방송에 출연해서 보사노바가 전 세계적인 유행처럼 번지는 현상에 대해 하소연한 적이 있다. 세련되고 쿨(Cool)한 이미지를 가지게 된 보사노바라는 단어를 이곳저곳 아무렇게나 붙인다면서 ‘보사노바 냉장고’, ‘보사노바 헤어드라이기’, ‘보사노바 신발’ 같은 것들이 좋지만은 않다고 말했다.

당시 보사노바는 단순한 대중 음악이 아닌 브라질 현대화의 상징이었다. 보사노바 뮤지션들은 너도나도 세련됨(Sophistication)을 추구했다. 사랑, 열정, 슬픔, 그리움 같은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절제된 가사와 멜로디에 숨기려고 했다. 이런 시도는 음악을 넘어 브라질 중산층 청년들의 젊음과 교양을 상징하는 라이프스타일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흥행에도 불구, 60년대 중반 이후 브라질에서 군부독재가 시작되면서 보사노바는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서정적이고 향락적인 분위기의 보사노바는 독재 체제에 대한 저항의 메시지를 담아내기에는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라 리앙을 중심으로 한 가수들은 MPB(Musica Populeira Brasileira, 브라질의 대중음악)라고 불리는 새로운 음악 장르를 개척해내기 시작하였다. 우스 무탄치스, 지우베르투 지우, 카에타누 벨로주를 주축으로 새로운 문화운동인 트로피칼리아(Tropicália)가 생겨났고 이들은 유럽의 록 음악에 브라질 흑인음악의 요소를 섞은 ‘가장 브라질다운’ 음악을 만들고자 했다. 이후 이 MPB도 세계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며 현재도 그 영향력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 MPB도 보사노바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장르이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보사노바는 그 영향력을 지속시키고 있다. 한 예로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이나 주앙 지우베르투는 보사노바의 거장이지만 후배 MPB 뮤지션들과 협업을 많이 했다. [3]


2.3. 현재[편집]


브라질에서 보사노바는 백인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주로 듣는 교양 음악이 되었고, 다소 오래되었지만 국가를 상징하는 장르로서 사랑받는다.

그러나, 보사노바가 1960~70년대 미국에 상륙하면서 미국인들에게 준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고, 그로 인해 당시의 많은 재즈뮤지션들이 앞다투어 보사노바 음악을 재즈적으로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활동하던 재즈뮤지션들은 유행처럼 자신의 앨범에 보사노바 트랙을 1개 이상 넣기 시작했고, 어떤 이들은 아예 전 트랙이 보사노바인 앨범을 내놓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보사노바는 재즈팬들에게 친숙한 장르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보사노바를 재즈의 하위 장르로 오해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3. 대표적인 음악[편집]


  • Chega de Saudade - 주앙 지우베르투 [4]
  • 데사피나두 (Desafinado) -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
  • 코르코바두 (Corcovado)[5] -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
  • Wave -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
  • 이파네마의 소녀 (The Girl from Ipanema) -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
  • Mas que nada - 세르지우 멘지스



4. 대표적인 음악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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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담이지만, 대부분의 유럽의 언어에서 '새로운' 이라는 어휘들은 대부분 n- 발음으로 시작한다. 영어는 , 그리스어네오 등등.[2] 본 곡은 문명 5의 브라질 테마곡으로 들어갔다[3] 먼저 조빙은 1980년대 에두 로부와 함께 Edu & Lobo 앨범을 만들기도 했다. 솔로 작업에서도 Stone Flower나 Urubu, Passarim 같은 앨범을 통해 MPB을 자기식으로 흡수하기도 했다. 주앙은 평소 사석에서 카에타누 벨로주를 아꼈다고 하며 MPB 뮤지션의 곡들을 재해석하기도 했다. 카에타누와 갈의 데뷔작은 보사노바 영향력이 강하며 땀바 꽈뜨로는 보사노바와 MPB 경계선상의 음악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4] 세계 최초의 보사노바곡[5] 브라질의 상징적 랜드마크인 거대 예수상이 있는 리우 시내의 바위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