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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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동구(부산광역시)에 있었던 조선시대 수군 주둔지 부산진에 쌓은 성이다. 조선 전기 부산진성은 좌천동에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의해 파괴됐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수군은 범일동에 있는 자성대 왜성을 수리하여 부산진성으로 삼았다.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다.
2. 역사[편집]
3. 구조[편집]
부산진성은 자성대 왜성을 재활용하였기에 우리성의 구조와 함께 왜성의 구조를 함께 가지고 있었다. 부산진성 장대인 자성대는 전형적인 왜성의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성문과 여장은 조선 성곽의 특징을 따르고 있다.
3.1. 성문(城門)[편집]
3.1.1. 금루관(金壘關)[편집]
부산진성은 서문이 주출입구며 금루관이라 불렸다.
3.1.2. 진남문(鎭南門)[편집]
부산진성 남문은 바다와 맞닿아 있었다. 일제강점기 부산진성 앞 바다가 매립되면서 남문 위치에 성남초등학교가 자리 잡았다.
3.1.3. 진동문(鎭東門)[편집]
부산진성 동문은 진동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나 건춘문이라는 이름으로 복원됐다.
3.1.4. 구장루(龜藏樓)[편집]
부산진성 북문은 구장루(龜藏樓)라고 불렸다.
3.2. 장대(將臺)[편집]
3.2.1. 영가대(永嘉臺)[편집]
1614년 광해군 6년 순찰사 권반은 못을 파고 호(濠)를 만들어서 전선(戰船)을 감추었다. 작은 언덕을 쌓아서 대(臺)를 만들었다. 1624년 인조 2년 이민구가 권반의 고향이 안동이라 안동의 옛 이름인 영가(永嘉)를 가져와 이름을 지었다.
3.2.2. 진남대(鎭南臺)[편집]
1974년 부산진성 정상에 장대를 설치하고 진남대라고 이름을 지었다. 진남대는 부산진성 남문인 진남문에서 이름을 가져온 것으로 추정되나 부산진성에 진남대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2022년 9월 진남대 안내판은 승가정으로 교체됐으며 현판도 승가정으로 변경될 예정이다.
3.2.3. 승가정(勝嘉亭)[편집]
1842년 첨사 이희봉(李熙鳳)은 육우정을 짓고 승가정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육우는 여섯모퉁이라는 뜻으로 여섯 개의 경치를 기록해놨다. '구봉(龜峰)의 저녁 연기각 푸르게 엉기는 것', '크고 작은 섬들에 아침해가 붉게 비치는 것', '강선대(降仙臺)의 높은 자라등', '절영도(絶影島)에 신기루(蜃氣樓)가 일어나는 것' '석추(石楸)에 파도가 울고 흰 물거품을 뿜는 것', 금용산(金湧山) 멧부리가 푸른 하늘에 깍아지른 듯 솟아 있는 것'
영남진지는 승가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해놨다.
"정자(亭子)는 부산의 자성(子城)에 있다. 산이 마치 엎어놓은 가마와 같다 하여 부산(釜山)이라 한다. 그 지형을 따라 돌을 쌓은 것이 성의 형상과 같기 때문에 자성(子城)이라 한다. 그 위는 평평하고 시원하여 수천인이 앉을 만하며 바다와 산의 승경(勝景)이 다 모이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마땅히 정자나 대(臺)처럼 올라가서 경치를 바라볼 만한 곳이 있을 법하나 아직도 이것들이 없는 것은 아마도 기다림이 있는 것 같다. 내가 임인년에 절제사(節制使)로서 이곳에 부임하여 작은 정자를 지었다. 기와를 덮고 여섯 모퉁이에 기둥을 세웠으며 면(面)마다 둥근 난간에 단청을 올렸으니 이로부터 자성(子城)이 갑절이나 광채를 더할 수 있었다.
부산에는 본래 영가대(永嘉臺)가 있어 이름을 온 나라에 떨쳤는데, 내 정자(亭子)가 마침 이루어져 승가(勝嘉)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영가대(永嘉臺)보다 낫게 되기를 힘쓰려 함은 아니다. 승가(勝嘉)의 뜻은 좋은 땅으로 인해 아름다운 정자를 짓는다는 데 있다. 영가대(永嘉臺)는 물가에 있고 승가정(勝嘉亭)은 산의 꼭대기에 있다. 이쪽보다 나은 것이 있고 저쪽보다 못한 것이 있는 것은 황학루(黃鶴樓)와 봉황대(鳳凰臺)의 그것과 같다. 비록 이백(李白)과 최호(崔顥)의 문장으로서도 능히 우여을 가리기 어려울 것이니, 내가 어찌 감히 옛사람이 선편(先鞭)을 잡은 것에 대해 승부를 다투려 하겠는가? 아, 이 곳은 곧 옛날의 전장(戰場)이다. 옛날에 용사(龍蛇)의 난이 있었을 때에 명(明)의 장수가 공을 비석에 새겼는데 세월이 점차 멀어지니 귀두(龜頭)는 깍여져 떨어져나가고 글자의 흔적은 인몰(湮沒)되어 지나가면서 보는 사람마다 발걸음을 멈칫하면서 탄식해 마지 않았다. 그런데 옛날의 황대(荒臺)가 이제 와서는 명구(名區)가 되었으니 이는 흥폐(興廢)에 때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이 정자에 오르면 평평하고 대해(大海)를 굽어보고 대마도(對馬島)를 바로 바라볼 수 있으며, 꽃피는 아침과 달뜨는 저녁에 술을 들고 칼에 기대고 있노라면 매양 강개(慷慨)하여 옛날을 생각하는 정을 금할 수 없으며, 산수(山水)의 뛰어남과 풍물(風物)의 아름다움이 여섯기둥의 주련(柱聯)에 갖추어져 있다. 나는 무인(武人)인지라 문사(文詞)로써 울릴 수 없어, 진경(眞境)을 그려내는 것에 이르러서는 후인(後人)을 기다리려 한다. 만약에 나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나를 이어 그것을 고쳐 지을 것이며, 또한 내가 승지(勝地)로 해서 가정(嘉亭)을 지은 뜻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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