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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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한자 표기가 다르더라도 한글 표기가 같으면 합산됨



백제국성
扶餘 徐氏
부여 서씨

관향
충청남도 부여군
시조
부여융(扶餘隆)
파조
관호당공파, 만호공파, 교위공파
직장공파, 소호공파, 정의공파
참의공파, 통정공파, 석선공파
만죽공파, 학생공파
집성촌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육곡리
전라북도 완주군 화산면 승치리
평안남도 덕천군 풍덕면 율곡리
인구
17,145명(2015년) | 국내 280위

1. 개요
2. 역사
3. 항렬표
4. 인구 분포
5. 집성촌
6. 유명인



1. 개요[편집]


충청남도 부여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는 백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扶餘隆)이다.

백제국성이다.


2. 역사[편집]


증보문헌비고와 조선씨족통보는 부여 서씨의 시조를 서존(徐存)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부여 서씨 세보(世譜)는 백제 의자왕의 아들 왕자 부여융을 부여 서씨의 시조로 기록하고 있다.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망한 후 부여융은 당나라로 끌려갔는데 이때 (唐) 고종(高宗)에게 서씨(徐氏)성을 사성받고 웅진도독(熊津都督)에 임명된 후 본국(本國)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만성대동보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다만 낙양 북망산에 있는 부여융의 묘지명에는 당 고종에게 사성받았다는 기록이 없어서 문헌의 신뢰성이 부족하다. 그래서 중국 측 기록을 실은 바이두 백과의 설명에도 백제국 왕자 부여융이 성(姓)을 고쳐 서씨(徐氏)로 했다고는 나오나 당 고종이 사성한 것인지 여부는 설명이 없다.#

더군다나 부여융의 웅진도독부는 나당전쟁이 터지자 당나라 측에 서서 신라군과 싸우다 패전하여 676년 한반도에서 축출당하였고, 그 과정에서 부여융도 당나라로 쫓겨나 당나라에서 생을 마감하였을 것인데, 이런 상황에서 부여융의 후손이 어떻게 신라 땅에 남았는지 혹은 부여융이 당나라로 쫓겨간 이후 어떻게 신라가 통일한 한반도로 돌아와 무사히 후손을 이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이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 이런저런 설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시조 이후의 세계(世系)를 실전해 몇백 년간의 계보는 알 수 없다가 부여융, 즉 서융의 먼 후손으로 고려 때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내고 태원군(太源君)에 봉해진 서존(徐存)을 1세조로 받들고, 서수손(徐秀孫)을 11대손으로 기록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그 후에 후손들이 원래 성씨인 부여를 본관으로 하였다.

조선 중기부터 이름을 날린 사람들이 많았는데, 서익(徐益)은 조선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의주목사를 지냈고, 이후 종부시 첨정으로 순문관이 되어 북방 경비를 맡았다. 지우(志友)였던 율곡 이이을 구제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같이 화를 입기도 했다. 시조를 잘하여 명망이 높았다. 자신의 청탁을 거절한 이순신에게 앙심을 품고 훗날 파직시키는데 일조한 흑역사도 있다. 서익의 아들 6형제 중 장남 서용갑은 선조 때 영양현감과 덕천군수를 지냈다. 그 뒤 광해군 때 사색당파의 하나인 대북파가 일으킨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넷째 아우인 서양갑과 함께 화를 입었다. 후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현종 때 직간(直諫)을 잘하여 이상진과 더불어 <오직(五直)>으로 불리웠던 서필원은 서용갑의 손자다. 그 밖의 인물로는 서필원의 아들로 목사(牧使)를 지낸 서경조, 의금부 도사 서정훈, 사헌부 감찰 서계훈, 돈령부 도정 서운휘, 서석조 등이 유명하다. 호조 정랑 서규달, 현감 서진문, 공조 참판 서무덕 등도 등용되었다.

3. 항렬표[편집]


부여 서씨 항렬표
세(世)
26
27
28
29
30
31
항렬자(行列字)
진(鎭)
록(祿)
영(榮)
훈(勳)
기(基)
선(善)
세(世)
32
33
34
35
36
37
항렬자(行列字)
승(承)
식(植)
형(炯)
배(培)
현(鉉)
창(昶)
세(世)
38
39
40
41
42
43
항렬자(行列字)
석(晳)
유(裕)
세(世)
용(鎔)
윤(潤)
수(秀)


4. 인구 분포[편집]


년도
가구
인구
인구 순위
1985년
3,032가구
13,041명
-
2000년
4,486가구
14,312명
259위
2015년
-
17,145명
280위


5. 집성촌[편집]




6. 유명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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